시편 83편 강해-저주와 신앙

 

시편 83편,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돌아가면서 읽도록 합시다.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가면서 한 절씩 읽겠습니다. 천천히 읽으시고요, 또 다른 분들은 잘 들으시고 그렇게 한 번 읽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습니다. 나머지 절은 같이 읽겠습니다.

 

〚아삽의 시 곧 노래〛

1.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2.무릇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

3.그들이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께서 숨기신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4.말하기를 가서 그들을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5.그들이 한마음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동맹하니

6.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7.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사람이요

8.앗수르도 그들과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 (셀라)

9.주는 미디안인에게 행하신 것 같이,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소서

10.그들은 엔돌에서 패망하여 땅에 거름이 되었나이다

11.그들의 귀인들이 오렙과 스엡 같게 하시며 그들의 모든 고관들은 세바와 살문나와 같게 하소서

12.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 하였나이다

13.나의 하나님이여 그들이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

14.삼림을 사르는 불과 산에 붙는 불길 같이

15.주의 광풍으로 그들을 쫓으시며 주의 폭풍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소서

16.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17.그들로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낭패와 멸망을 당하게 하사

18.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아멘! 오늘도, 우리가 혹은 지난 주, 혹은 지지난 주, 지난 연초부터 공부했듯이 시편을 같이 읽었습니다. 이 시편의 장이 다른 시편보다 짧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접하기도 하고요, 또 이게 신앙 시이기 때문에 시를 읽듯이 읽기도 하고 좀 친숙합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러나 그 내용을 따라 가기는 또 쉽지 않습니다. 예, 그저 어떤 신앙적인 낭만, 감수성, 이런데서 나온 게 아니라 어떤 삶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나왔기 때문 이예요. 그런 과정을 우리가 조금씩 따라가지 않으면 이거는 시어가 가지고 있는 그런 아름다움 그런 거에 머무르지, 시가 가지고 있는 세계를 따라가기는 힘듭니다. 대게 일반시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젊었을 때는 누구나 시인처럼 글도 짓고 시를 짓기는 한데,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시인이 되려면 삶에 대한 이해가 그만큼 따라야 되고요, 깊은 삶의 어두움이라든지 이런 것들까지 다 이해하는 사람이 그러한 삶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것, 이게 시라서 이 시편도 만만하게 볼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뭐,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다고 해서 안다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최소한도 우리가 마음을 열고 정직하게 바라보려고 하는 그런 자세는 필요하다, 그런 것 없이 어떤 선입견 이런 걸 갖고 시편을 대하면 내용을 다 따라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오늘 제목이 “저주와 신앙”입니다. 제목이 좀 거칠지요? 저주, 좀 더 정확하게 하면 “저주의 기원”이라고 해야 되겠어요. 저주기원, 아, 하나님을 향한 어떤 기원인데, 이게 내용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좀 나쁜 거, 저주하는 그러한 기도, 남이 안 되기를 바라는 기원이라고 하는 거요, 구약성서 다른데도 가끔 나오기도 합니다만, 시편에 그런 게 상대적으로 좀 많은 편이예요. 시편이 다 그런 건 아닙니다. 정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신앙 얘기가 훨씬 더 많지요. 그러나 아주 간혹 가다가 아주 드물지도 않아요, 비교적 많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시편에 분명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어떤 대상을 향한 저주와 가까운 그런 기원입니다. 이런 걸 읽을 때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당혹스럽기는 하지요. 좋은 것만 하더라도 부족할 텐데, 왜 이렇게 남 잘못되라고 하는 기도를 할까, 그런 이야기입니다. 예, 제가 강의안에 그렇게 썼습니다마는 그런 걸 읽다보면 쉽게 생각되는 게 하나님이 마치 원수를 갚아주는 그런 사람, 그런 어떤 존재로 느껴진다고 하는 거죠, 동네 깡패에게 얻어맞은 만신창이, 거의 반신불수가 될 정도로 그렇게 얻어맞은 동생을 대신해서 원수를 갚아주는 그런 형처럼 보이는 그런 구절들이거든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정말 우리들이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을 갚아 주시는, 원수 갚아 주시는 우리가 목표로 하는 대상, 우리를 괴롭히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딱 잡아가지고 어떻게 잘못 되게 만드시는 그러한 분이실까요? 아닐까요? 그런 것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셨나요? 하여튼 오늘 본문에는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원수라고 생각하는데, 신약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게 서로 대립되는 것 같아요. 제가 다른 공부 할 때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성경에는 서로 대립되는 그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느 쪽에서는 사랑하라는 이야기가 있고, 어느 쪽에서는 미워라하는 이야기가 있고요. 어떤 쪽에서는 하나님이 전능하다 그런 표현도 있지만, 어떤 때에는 하나님이 무능력한 분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굳이 제가 그런 구절을 말씀 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나중에 따로 공부해야 할 부분이구요, 예, 그런 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예, 그러니까 서로 많이 충돌되는 모습들이요. 오늘 여기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주제도 그렇고, 신약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그 원수 갚는 것은 성령에게 맡겨라, 이런 것으로 우리가 들었는데, 여기 시편에서는 원수를 아예 박살내 달라하는 정도까지의 표현들, 그러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표현이 나올 수 있는 그러한 사실 앞에서 아,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냐, 이러한 난처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서로 충돌되는 부분들을 극복하려면 각각의 말씀들이 어떤 자리에서 나왔는지, 과연 그 말씀이 말하려고 하는 것이 뭔지 정확하게 알아야 되죠. 그런 것 없이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만 가지고 그것을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 이런 걸로만 알고 하다 보면 오해 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 오늘 시편 83편에도 원수를 저주하는 그러한 말씀이 나와요. 오늘 이 이야기를 공부를 잘 하면 구약성서에 나와 있는 이러한 구절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 가를 공부도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세 단락으로 공부하겠습니다. 첫 번째 단락은 “저주 기원”입니다. 83편 1절부터 공부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들어가는 거예요, 중간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13절부터 15절까지, 일단 거기에 나와 있는 내용들이 원수를 향한 저주 기원이기 때문에 그것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원수를 파멸시켜달라는 그러한 뜻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 묘사가 아주 문학적이예요. 제가 4가지로 좀 정리를 했습니다. 첫 번째 그들이, 원수들이죠. 그들이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고, 검불이라고 하면 거의 무의미한 거지요. 잘난 척 하고 난폭하게 구는 원수인데, 검불 같게 하시고, 아무 힘이 없게 하시고요, 두 번째,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 비슷한 뜻이군요, 검불,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 하찮게 해 달라는 기도지요? 세 번째는 불길과 강풍으로 그들을 쫓으시며, 네 번째 주의 폭풍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소서 예, 제가 4가지로 정리를 했는데요? 특별히 정리랄 것도 없습니다. 그냥 본문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그대로 쓴 거예요. 여러분들도 그대로 찾아 낼 수 있는 그런 내용들입니다. 원수들을 하잘 것 없는 것들로 만들어 달라, 그러니까 거의 저주와 같은 그런 기도지요. 만약에 원수 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기도를 드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기분이 나쁠 거예요, 이러한 서로 대립되는 기도가 여기 나와 있습니다. 예, 이런 기도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구약에 나와 있는 다른 구절들도 연관해서 좀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자리 잡고 살면서 주변 다른 민족들하고 대립했다, 그래서 굉장히 호전적인 그러한 태도를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원수를 박멸해 달라고 하는 그런 마음들을 그냥 그대로 묘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대로 여리고성 하고 아이성 이런데 공격할 때도 거기에 어떤 분노가 서려 있는 것을 느끼겠지요? 여호수아 하고 같이 그 성을 공격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처럼 여호수아가 자기 백성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그 여리고성하고 아이 성에 있는 남녀노소를 다 죽이라고 얘기를 하잖아요? 그런 걸 읽을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이해하시나요? 정말 그렇게 명령을 내리신 걸까요? 명령 내리지 않았는데, 여호수아가 그냥 거짓말로 얘기 한 걸까요? 그건 아니잖겠습니까? 그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명령을 내리신 분일까요? 여러분 그냥 선입견 없이 생각을 해 보세요. 어떻게 사람을 다 죽이는데, 전쟁을 할 때는 사실은 뭐 인정사정보지 않고 싸우기 마련입니다만, 군인들만 아니라 어린아이까지 다 죽이라는 명령이니까 말이지요. 사랑의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그런 명령을 내릴까 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궁금증이 들지 않으면 성서 읽는 것이 깊이 못 들어가죠. 그런 궁금증을 자꾸만 갖고 이게 왜 이렇게 명령을 내릴 수 밖 에 없었는가,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제 그런 것들이 없다면,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냐면, 그런 말씀들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시켜서 이 세상을 여리고 성으로 생각해서 공격하고 아마 우리가 세상을 대립하고 대적하고 말이죠, 싸워야 될 악한 권세들로만 생각하는, 소위 말해서 이원론적으로 선악의 대립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성서를 이현령비현령,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냐 이런 해석들이 우리들에게 딱 굳어져 있어서 말이죠. 그런 걸 우리가 좀 조심하자 그런 뜻으로 말씀 드린 겁니다. 아, 그럼 그거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거냐, 그런 궁금증이 들잖아요? 참 이건 어려운 문제입니다. 오늘 저는 거기까지 자세하게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한 마디만 하고 넘어 갈께요. 그 당시 지금부터 아주 오래전 일이잖습니까? 여호수아가 (?)할 때라고 한다면 지금부터 3500년, 최소한도 3200,300년 정도, 이게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전쟁윤리라든지, 뭐 이런 것들이 전혀 없었구요. 그냥 죽기 아니면 살기, 정글의 법칙이 지배할 때였습니다. 그냥 그렇게 공격하지 않으면 자기들이 죽는, 보통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라는 말 들어 보셨어요? 완전히 zero냐 sum,완전히 전체냐 적당히 타협이 불가능한 그러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거기서 생존하느냐, 아니면 완전히 멸종하느냐 그런 위기 가운데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이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저들, 여리고 성이나 아이 성이나 가나안 땅에 있었던 여러 부족들의 씨를 말리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들은 믿은 거죠. 그 당시에,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아닌지는 그거는 이제 더 해석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서의 구절에 나와 있다고 해서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닌 거거든요? 거의 잘 못된 것도 많이 있고 또 사이비 예언자들이 예언한 것을 받아서 한 것도 있고 말이지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대로 단적인 예를 들면 “처음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그런 구절들 있지 않습니까? 욥기서에 나온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써 붙이고들 하지 않습니까? 그건 욥을 공격한 친구가 한 이야기란 말예요. 그러니까 잘못된 신앙에서 나온 거거든요? 그럴듯한 이야기라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게 좀 문제가 되는 거죠. 그 구절이 어느 상황에서 왜 나왔는지 그러한 것에 대한 충분한 해석,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예,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이라고 하는 영토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얼마나 호전적이고 아주 전투적으로 그렇게 살았는지, 그걸 우리가 이해 할 만해요. 그렇지 않으면 아마 그들은 역사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그러한 틈바구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주 고유한 하나님의 신앙을 발견한 거지요. 그게 이제 싹이 터 갖고 점점 거기서 묵시문학적인 사상도 나오고 메시아 사상도 나오고 결국 예수님 시대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종교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척박한 상황에서 살았는가 하는 것을 이런 구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거죠. 거기는 이제 두 가지의 어떤 딜레마에 빠져 있는 거예요. 거기 강의안을 잘 보십시오. 거기 제가 그렇게 썼어요. 그러니까 저들이 주변에 있는 이방민족들을 다 죽여 없애야 할 것처럼 달려들고 있기는 한데,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이 공격받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그들의 신앙 속에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하는 사실이 있거든요? 이게 딜레마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창조의 신앙에 의하면 그러면 이방사람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죠. 사실은 하나님의 형제들이잖아요? 하나님이 만든 것 중에서 나쁜 것이 있나요? 하나도 없잖아요? 다 선하잖아요? 다 아름답고 보기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전제에 깔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다 하나님의 창조신앙에서 그 기틀을 두고 나온 건데요? 그러니까 이방인들도 역시 하나님의 선한 창조입니다. 이게 딜레마인 거예요. 하나님이 만드신 게 다 선한데, 현실적으로는 악이 있어요. 이방인들의 악도 있고,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구약성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 문제라든지,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이라든지, 이런 창세기 앞부분에 나와 있는 것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선함과 인간 현실의 악의 딜레마를 신앙적으로 해석한 그러한 본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거죠,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했는데,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피조물들인데, 그러나 그들에게 악이 있었다, 이 악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은 아닌데, 도대체 악이 어디서 왔느냐 그것은 더 말씀 드리지 않겠어요. 계속해서 반복해서 나오는 문제니까요. 사탄과 마귀, 이런 많은 성서적용어들이 과연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도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았는데, 악은 실체가 분명하다는 하는 딜레마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고 살았습니다. 그걸 직면한 거예요. 이 악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세력인 거지요. 그러니까 그것은 멀리해야 하는 대상인 거지요. 이방인의 악이 뭐냐, 지금 이 시편기자가 덤불 같게 하고, 지푸라기 같게 해 달라고 거의 저주에 가까운 기원을 하고 있는 그 대상, 그 사람들의 악이 뭐냐 하는 것이 1절에서 12절까지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공부가 중간에서 시작해서 다시 앞으로 갔습니다.

 

사실 이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적인 딜레마는 오늘 우리가 안고 있죠. 여러분 이 세상을 악하다고 공격할 대상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선하고 아름다운 거예요. 분명한 하나님의 창조신앙에서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대립시키는 것은 잘못입니다. 악이 있지만, 이미 그 모든 힘들,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 되겠네요. 악도 하나님의 손안에서만 활동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악도 준동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하나님은 악도 책임 있지 않느냐, 그런 차원의 말씀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악, 그러나 하나님과 맞상대할 만한 힘이 아니라 이미 극복된, 이미 근본적인 힘을 잃어버린, 종말이 오기 전까지 당분간 여기서 악한 일을 행하는 것에 불과한, 어쨌든 우리 현실 앞에 그런 일들이 있어요. 아,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험하는 그러한 어떤 영적인 딜레마하고 비슷합니다. 우리가 이런 시편을 공부하면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적인 딜레마를 같이 공감하면서 오늘 우리의 삶의 방향도 잡는 거죠. 이방인의 악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게 굉장히 문학적으로 썼기 때문에 그게 뭐냐 하는 것은 조금 더 생각하셔야 됩니다. 일단 보겠습니다. 전체적으로, 하옇든 번호로 쓰인 것은 네 가지 였어요. 1) 주의 백성을 치려고 간계를 꾀하며, 2) 주께서 숨기신 자를 치려고 의논하고, 3)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쓴다. 4) 주를 대적한다.(5절) 어떤 악한 음모를 꾸미는 거죠, 악한 음모, 그것은 결국 주를 대적하는 거죠. 5절까지 정리된 내용입니다. 이 시편기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이방의 악을 이렇다 이렇게 묘사한 걸까요? 뭔가를 경험했을 것 아니예요? 그게 무얼까요? 여러분들이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2700, 800년 전 그 시인, 혹은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경험을 하고 이방의 악을 이렇게 표현했을까 하고 말인죠. 사실은 이러한 표현들은 그 당시만 아니라 오늘도 마찬가지지요. 악을 도모하는 힘들은 많이 있거든요? 예,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도 어쩌면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이방의 악에 포함될지도 모릅니다. 예,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을 때 선악을 이원론적으로 자꾸만 구분하지 말라 말씀드리는 것은 사실은 그 악이 우리 안에 그대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과 악령, 이런 것들은 종이 한 장 차이거든요? 우리가 거룩한 영에 속해 있다고 하면서 순식간에 우리는 악한 영의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 우리는 영적으로 상당히 외줄타기라고 할까요? 굉장히 그렇습니다. 거룩한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교회 안에도 악한 영은 얼마든지 준동(蠢動)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기집중, 이기심, 욕망들, 이런 것으로 교회 안에서 표현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성령이 아니라 악한 영이니까요. 예, 이러한, 여기서 묘사되어 있는 이러한 이방의 악이 그 당시 분명히 어떤 구체적인 이방인들의 행태들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생각하면 좋습니다.

 

결론적으로 그 이방인들의 악을 시편기자는 12절에서 그렇게 정리합니다.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모의(謀議)지요? 모의,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 하나님의 목장, 이것은 이스라엘이겠지요. 그러니까 이방의 악은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공격입니다.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 또 하나님의 목장이거든요? 선민이구요, 구약성서가 이야기 하는 겁니다. 선민이라고 하는 말이 나왔으니까 한 마디만 짚고 넘어갈까요?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해도 좋을까요? 오늘 지금 신약시대에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해서 선민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왜 유대인들에게만 자기를 나타내셨을까 하는 그런 질문들도 가능하고요, 거기 말고 우리 한 민족,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서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전혀 관심이 없으셨을까, 그 때는 전혀 예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이스라엘 역사도 전혀 모르고 그냥 우리 한 반도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하나님이 버리신 사람들이냐, 하는 질문은 당연히 나오겠지요, 예, 이런 것들은 참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어쨌든 이 구약성서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 선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꼭 맞다, 틀리다 힘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정확하게 인식했다고 하는 점에서는 맞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하나님이 세계 인류전체를 창조하신 분인데, 그 사람들만 이뻐 했다고 하는 건 이것은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나 있는 일들이거든요? 그럼 이걸 어떻게 풀어야 되느냐, 그리고 그 대답이 있느냐, 이걸 잘 풀어가는 게 신학입니다. 그런데 그게 완전한 대답은 없어요. 아직은 다 아는게 아닙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 신학이나 신앙은 똑 같은 이야기예요. 신학은 신앙을 논리적, 합리적으로 해명한 거예요. 자꾸만 신학과 신앙, 이것을 대립된 것이라고 한다면 곤란한 겁니다. 신앙을 열심히 하려면 신학적으로 생각하지 마라, 그러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마라, 얘기를 하는데, 그건 오해입니다. 신앙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이성인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이성이잖아요? 그런 것 없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르게 따를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에 하나님께 신령과 진리로 예배 할찌니라,(요4:24)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진리라고 하는 게 이성에 의한 우리의 태도거든요? 그리고 영적이라는 하는 말 자체가 이성이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 정말 아주 근원적인 문제, 이스라엘만 선민이라고 하냐, 그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조상들은 다 잘못 된 거냐, 우리가 죽은 다음에 즉시 천국과 형벌로 판단 받느냐, 아니면 잠자고 있다가 (데살로니가서에 있듯이) 잠자는 상태에 있다, 이건 비유거든요? 모두가 그렇게 있다가 최후의 심판 때 다 부활해서 그 때 영원한 생명과 저주, 형벌로 심판 받느냐, 이런 문제들은 우리가 아직까지 다 모르는 하나님의 비밀 가운데 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 아는 것처럼 설명하면 그럼 이제 사이비가 되는 거죠, 예,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라 사도바울이 한 이야기입니다. 아직 우리가 아는 것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 그때가 가야, 종말이라고 하는 거거든요? 종말이라고 하는 것이 뭔지 아시죠? 하나님이 자기 실체로, 명명백백하게 다 드러내는 때, 그러니까 진리가 완전히 드러나는 때, 하나님이 생명이니까, 하나님의 본질이 확 드러나는 때, 그런 때를 이야기하죠, 그때가 되면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처럼 모든 비밀을 알게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다 아는 것처럼 만물박사처럼 해명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잘못입니다. 모르는 것은 잠정적으로 내버려 두고요, 아는 것 안에서 해석하고, 또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점점 더 종말까지 많은 것이 우리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드러날 거니까 진리를 향한 우리의 자세를 잘 견제하기만 하면 훨씬 더 바르게 신앙생활 할 수 있을 겁니다. 예, 이방의 악에 대한 설명이었어요. 시편기자가 중간부분, 시편 6절에서 11절에 원수 되는 민족들과 민족들의 이름과 몇 가지 진영을 나열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 가지 이름들입니다. 예, 이런 것을 통해서 이 시편이 언제 기록 됬다, 딱 끄집어내기 힘든데요? 한 가지만 참고적으로 인용해서 썼습니다. 바벨론이 등장하지 않나요? 이제 바벨론은 역사상에서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사건이 구약성서의 핵심이예요. 바로 이 뜻입니다. 그걸 중심으로 해서 구약성서가 기록 됬습니다. 바벨론 포로 된 햇수, 아시지요? 기원전 587년입니다. 기원전 587년이 구약성서가 기록 되는데에, 아주 상징적으로 중요했습니다. 그때 바벨론 포로로 가서 50년 정도 포로생활 했어요. 1차, 2차, 3차 이렇게 포로 귀환하게 되거든요? 그때 하나님의 관계를 예언자들이 깊이 생각해서 거기서부터 구약성서 문헌들이 나왔습니다. 기원전 587년, (587년을 암기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드릴께요. 여기 국어선생님이 계셔서 얻어 들었는데, “오빠 칠 년 뒤에 만나요.” 오빠7, 이렇게 외우면 된다고 하네요^^) 기원전 587년의 바벨론 사건이 중요한데, 여기 나오지 않는 걸 보면, 훨씬 전 세대에 기록된 시편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시편도 어느 한 시대에 딱 쓰여진 게 아니라 수 백 년 동안 천천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전 전승을 통해서 자리를 잡으면서 빠질 것은 빠지고 들어 올 것은 들어오면서 하나의 편집과정을 거쳐서 귀중한 성문서로 자리를 잡게 된 거죠. 거룩한 문학서로 자리를 잡게 된 겁니다.

 

구약성서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는 것은 아시죠? 하나는 모세오경, 토라라고 하는, 가장 일찍이 유대교의 경전이 된 겁니다. 39권이 처음부터 경전이 된 게 아니거든요? 예수님 당시에도 구약경전이 없었어요. 그것은 한 참 후 얌니야 회의 때 결정 됬습니다. 유대교 랍비들의 회의였어요. 기원후 90년에 얌니야 회의에서 그 때 39권을 유대교에서 자기들의 경전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경전이 없었던 거지요. 각권이 따로 따로 있었습니다. 어쨌든 전통적으로 볼 때는 모세오경이 가장 먼저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대교 안에 자리를 잡았고, 그 다음에는 예언서구요. 그 다음에는 성문서입니다. 이 성문서는 이게 경전이니, 아니냐는 유대교 안에서도 논란이 많았습니다. 참고적으로 한 말씀만 드리면, 유대교가 얌니야 회의 때 39권을 경전으로 삼았는데, 이 기독교가 그대로 받아 드린 거예요. 구약은 우리가 결정 한 게 아닙니다. 유대교가 만들어 놓은 걸 기독교가 받아 드린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교와 기독교는 그런 걸 보면 굉장히 친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거죠. 좀 예상외죠? 예수님이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그들이 경전으로 읽는 것을 가져다가 그대로 썼냐, 여러 가지 많은 사정들이 초기 기독교 역사에 있었습니다. 예, 기원전 9세기와 8세기, 그러니까, 기원전 800년과 700년, 그 사이에 기록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단락입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는 원수들을 향한 저주 그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악을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거라고 이야기 하고요, 이방인들의 악이 뭐냐하는 것을 두 번째 단락에서 제가 설명했습니다. 사실은 세 번째로 결론, 여기에서 중요한 건데요. 여기에서 좀 더 시간을 썼어야 하는데, 앞부분에서도 다른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세 번째 단락이 중요한 거예요. 말하자면, 이 시편기자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그 이방인들의 죄의 항목을 나열하고 그들에게 원수를 갚아 주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나길 바란다고 하는 거죠. 요걸 놓치지 말아야 되는 거예요. 거기 제 강의안을 그대로 보시면 됩니다. 시편기자가 원수를 저주하는 이유를 단순히 원수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원수들도 하나님의 백성임에 틀림없다, 이건 분명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같은 우리가 형제자매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되는 거예요. 이렇게까지 기도하는 게 더 나을 걸요? 예수 믿는 우리만 구원하지 마시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구원해 주십시오. 예수를 정말 진실하게 믿는다고 한다면,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예수 믿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결국은 그들을 어떤 방식으로라도 구원시켜 주실 것이라고 하는 희망, 그러한 기대, 그런 걸 갖지 않을까요? 나는 당연히 가질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예수 믿는 사람만 쏙 빼 가지고 이 사람들만 구원하는 하나님이라면 이게 편할까요. 우리 마음이 요. 기본적으로 우리는 이 세상 모든 사람, 사람만이 아니라 미생물까지 우리가 추하다고 생각하는 동물들까지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건데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사건을 우리가 밑바탕에 깔고 생각해야 됩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악도 행하는 거거든요? 이 시편기자는 그걸 견딜 수 없는 거예요. 그 상황을 견딜 수 없어 그래서 벌을 내리라고 기원하기는 하지만, 그 이유는 16절에 있는 대로 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이거죠, 그들이 주를 알게 하소서 이 안타까움으로 말하는 거예요. 분노가 아니라 안타까움 마음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비유적으로 제가 설명했습니다만, 마치 철없는 자녀들이 말썽만 피우고 정신 차리지 못할 때 그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겨 갖고 그 어려움을 당해서라도 좀 정신 차리게 하려는 부모의 마음이라면, 이 시편기자의 생각을 좀 따라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입니다.

 

18절에서 그것을 우리가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예, 이 말씀 18절, 제가 이것만 가지고 해석을 하려고 하더라도 한 시간은 필요 할 것 같습니다. 이게 구약의 십계명에 나와 있는 첫째 계명, 둘째 계명하고 어떻게 연관되는지, 예, 그리고 우상의 문제들, 다른 종교가 찾는 신과 여호와 하나님신앙의 관계, 거기서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유한 유일신 사상, 그런 게 어떻게 자리를 차지했는가, 그런 것을 우리가 따라 가야 되거든요? 어쨌든 저는 여러분들이 이 성경 말씀을 두려워하라 겁내라 그런 말씀으로 드린 말씀은 아니고요. 이런 성서 구절 하나하나가 아주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는 것, 그냥 나온 게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걸 이제 여러분들이 염두에 두고 읽으셔야 되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시편기자의 관심은 하나님이 창조주이며 권능자라고 하는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너무 간절하기 때문에 그는 원수를 저주하는, 멸망하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를 드릴 수 밖 에 없는거죠. 예, 우리가 이 83편을 전체적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좀 전달이 됬지요? 여러분들이 대충 읽으셔도 알 수 있는 부분이긴 합니다마는 그래도 제가 조금 더 설명을 한 겁니다. 여기서 핵심적으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원수가 하찮은 검불 같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지만, 원수 갚는 데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나고 그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게 하는 것, 여기에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그 당시에는 굉장히 거칠다고 할까, 더 험악하다고 할까요? 한 종족이 한 종족을 완전히 멸절시키기도 하고, 뭐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볼 때 너무 거친 원수에 대한 멸망, 저주 기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형편을 좀 헤아려 주자, 라고 하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 사람과 비슷한 기도를 드리면 안 되겠지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종교를 박해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저 사람이 어떻게 잘 못 되게.. 만일 우리가 성서를 통해서 그렇게 생각한다면 천부당만부당한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3000년 전, 아까 말씀 드린 제로섬 게임, 생존에 급급했던 방식, 지금 말하자면 조폭과 같은 투쟁과 같은 것이었어요. 조폭들은 서로 상대방을 인정사정 보지 않잖습니까? 굳이 예를 들자면 그런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마지못해서 그런 표현을 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바르게 드러나고 하나님이 권능자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하는 것이 목표였었다, 그런 겁니다. 그 목표는 우리들도 똑 같은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게 되도록 우리가 노력하면서 살아야 되겠지요? 이 말은 어떤 피조물을 신처럼 섬기는 것이 잘 못 됬다고 하는 말이겠지요? 돈이나 어떤 물질, 이런 것들을 신처럼 따르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 이름도 붙일 수 없고 형상화 할 수도 없는, 종말에 가서 완전히 자기를 드러 내실 분, 2000년 전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부활을 통해서 온전히 자신을 계시하신 그 하나님을 알게 하는 목표에서 시편기자나 오늘 우리나 똑 같습니다. 방법은 달라요. 그들은 전투적이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평화 지향적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되겠지요. 예,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고요, 차 한 잔 하고 질문응답 하도록 하겠습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