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4편 강해-복이 있나니

 

시편 84편을 공부하겠는데요? 먼저 읽겠습니다. 돌아가면서 한 절씩 읽겠구요, 나머지 분들은 눈으로 따라서 읽으면 되겠습니다.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가면서 한 절씩 읽겠습니다.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1.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5.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7.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8..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9.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10.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아멘! 이 시편은 말 그대로 시죠. 시인데, 시라고 한다면 어떤 것들을, 뭐라고 할까요? 사건이나 사태 이런 것에 대해서 그냥 사실대로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상징, 비유, 은유 이런 것을 통해서 표현하는 문학 장르잖아요? 그런 걸 전제하고 여러분들이 시편을 읽으셔야 될 겁니다. 예, 앞에서 우리가 쭉 공부한 내용들, 아 이걸 말씀 드리려다 놓쳤군요. 시편은 각각의 어떤 주제들이 유형별로 좀 나누어집니다. 탄원시 같은 게 있고요, 또 오늘 같은 거라면 찬양시, 이런 것도 있고, 등 여러 가지로.. 제가 지금 그걸 다 연구해 오지 않아서 말씀드리지 힘들지만 네 다섯 가지의 어떤 유형으로 나누어집니다. 앞에서 우리가 지난 한 두 달 공부한 그 시편들은 그 어떤 악의 현실, 악한 사람들, 힘이 없는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 시련들, 이런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뭐냐, 하는 것에 매달린 내용들이예요. 그래서 긴장이 됩니다. 그건 뭐 우리가 한 두 번 이야기 했습니다만 무죄한 고난 앞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입장이 참 곤란한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사랑이신데 그리고 정의로운 분이신데 이 땅에는 정의롭지 않은 사람들이 더 득세한다거나 그리고 죄가 없는 사람들이 왜 고난을 당하는가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가 하는 사실 앞에서 아주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성서기자들은 시편기자들만이 아니라 잠언 전도서 그런 성문서기자들하고 사실은 창세기서부터 시작한 모든 구약성서도 마찬가지구요. 전체적으로 그들이 가만히 기도방에서, 골방에서 기도하는데 어떤 영감이 떠올라서 기록한 게 아닙니다. 현실을 본 거예요. 왜 이렇게 인간이 악한지, 방금 말씀드린 대로 무죄한 자가 고난을 받는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정의로움이 어떻게 살아날 것인지 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이런 것들을 다 빼 놓고서 성경을 내 삶에만 적용시키려고 하는 성경읽기는 이현령비현령으로 떨어지기가 좀 쉽습니다. 보통 큐티라고 하는 것이 다 그런 방식이거든요? 한 절 읽고 이 말씀으로 내가 오늘 어떻게 살아야겠다, 자기에게 좋도록 맞춰서 하는 거죠. 그게 아니라 이 성서 안에는 깊은, 그리고 복잡하기도 하고 아주 고민스러운 삶의 내용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걸 전문적인 용어로 “삶의 자리”라고 얘기합니다. ‘지쯔 임 리벤(Sitz im Leben)’이라고 하는 신학적인 용어인데요, 성서기자가 처한 삶의 자리가 뭐냐, 그런 것을 꼭 찾아야 된다고 하는 거죠.

 

예, 오늘 여기 시편 84편은 앞에 나와 있는 거하고는 분위기가 조금 좋아요, 편해요. 앞에 것은 굉장히 힘이 들었습니다. 읽기가, 사실 그런 어려운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당신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이런 말을 하기가 상당히 어렵거든요? 그건 분명한 사실이긴 하지만, 그 하나님의 은혜, 그 고난과 시련가운데서도 숨어 있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어떤 햇살처럼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거는 완전히 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에 조금 어려웠어요. 그런데 오늘 이 84편은 그냥 쉽게 은혜로운, 정말 찬양하는 그러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편안하게 공부해도 될 것 같습니다. 편안하다고 해서 영적인 긴장을 놓쳐야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여기에도 분명히 시편기자 개인, 혹은 공동체가 붙잡고 씨름했던 어떤 삶의 내용들이 있는 거죠.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이 시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던 사람들의 의해서 집필된 거다, 이야기합니다. 그걸 배경에 놓고 여러분들이 읽으셔야 되는 겁니다. 성지순례 하시는 거 아시지요? 그리고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지순례라고 하는 것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라를 빼앗기고 바벨론 포로,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셔야 될 거예요.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 거기서 쫓겨나서 다른 나라에 가서 흩어져서 살던 사람들을 디아스포라(δίασπορα)라고 하거든요? 유대인 디아스포라, 인류역사서 가장 특별한 방식으로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아마 디아스포라 일겁니다. 사실은 그들이 간 곳곳마다 자기들끼리 단결하고요, 자기들끼리 모이고, 그리고 돈 이런 것에 굉장히 영악하고 머리도 좋아서 그런가 어디가서나 돈도 많이 벌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현지인들과 잘 융화가 되지 않습니다. 대게 그 나라에 와서 몇 세대가 지나게 되면 다 융화가 되어 버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특이한 어떤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고, 힘 그런 게 있어서 자기들의 특징을 그대로 유지했어요. 그게 이제 2000년 동안 유럽역사에서 기름과 물처럼 따로 따로 놀아 갖고 결국은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 의해서 600만 명이 죽는 일까지 벌어졌는데요, 지금 저는 유대인들의 그러한 디아스포라 삶들이 잘했다 못했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기구했다고 하는 뜻이죠. 그들이 예루살렘 성을 다시 한 번 방문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격스러울지요. 예, 떠돌이의 삶에서 자기의 고국, 고향으로 돌아와서 옛날의 어떤 느낌들을 같이 나누는 거죠.

 

예, 오늘 제목을 “복이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여기 84편에 그 복에 대한 이야기가 잘 나오고요. 잘 나온다는 것만 아니라 제가 보기엔 전체적인 주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12절 마지막 절에도 복이 있다고 얘기를 하고 그 앞에도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오고 있고요, 그걸 굳이 우리가 분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읽으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어떤 영적인 복, 하나님의 전에 거한다, 궁정에 거한다 그런 표현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구체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예루살렘 전체지역을 이야기하기도 하고요, 또 그것은 어떤 공간과 시간에서 그 예루살렘 성전을 이야기 한 것만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그런 걸 뛰어 넘는 분이시니까요. 하나님과의 일치, 그걸 궁극적으로 이야기 하는 겁니다. 거기에 좀 미묘한 긴장이 있어요. 구약성서는 다 유대인들의 종교의 문헌이니까 유대인들의 생각이 중요한 겁니다. 그들에게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솔로몬 성전이 정말 중요했어요. 아, 그게 무너지면 안 되고 그게 무너졌을 때 그들의 절망이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고요. 하여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그들의 절대적인 신뢰가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을 또 무시하는 하나님은 그런 성전 안에 거하는 게 아니다, 이 세계, 우주 전체가 하나님의 옷자락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고요, 그러니까 예루살렘을 긍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는 변증법적이라고 할까? 긍정과 부정, 이렇게 하면서 신앙의 본질이 뭐냐 이런 것을 찾아간 이들이 바로 유대인들이고 그들의 신앙의 흔적들이 구약성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사람들의 삶이 복되다, 하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지요. 당연하다고 생각이 되죠.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조금 더 정말 내가 알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을 해야 될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신앙이 상투성에 떨어질 수가 있거든요? 하나님의 은혜, 구원, 성화, 의로움, 칭의, 이러한 신앙적인 용어들, 세례, 성만찬에 이르기까지 성경, 하나님, 삼위일체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앙적인 용어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이미 아는 것들로 전제하고 성경을 읽거나 신앙적인 책들을 읽다보면, 그건 이제 상투성에 떨어질 염려가 많이 있습니다. 그거는 본론을 가진 사람의 눈의 높이만큼 더 많이 드러낼 수 있어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사람의 복이 뭔가를 오늘, 우리들의 뻔 한 선입관을 내려놓고 천천히 오늘 시편기자가 이야기 하는 어떤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합시다. 84편의 복이라고 연관된 단어를 네 가지, 네 구절을 일단 인용했습니다. 첫째는 4절 이예요.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 아마 이 이야기는 이게 예루살렘을 방문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시라고 말씀 드렸지요? 그들이 볼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 일만 하는 사람들, 목사라든지, 이런 전문적인 그런 사람들이겠죠? 그런 사람들이 복되다, 참 부럽다 그런 뜻이 거기에 들어 있겠죠, 자기들은 예루살렘 성전하고 너무나 거리가 먼 바벨론이라든가 등등..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으니까요. 얼마나 부러웠겠어요. 그건 뭐 우리가 크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 시인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복이 있는 이유는, 설명을 그대로 하고 있어요. 항상 주를 찬송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주를 찬송하는 것, 그게 정말 복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예, 여러분 이런 것을 단순히 아, 내가 하루에 찬송가를 몇 곡 부른다 라든지, 성가대에 전문적으로 그런 일이라든지 뭐 그런 일만 한정해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찬양하는 것, 하나님을 찬송, 찬양하는 거거든요?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어야 되겠지요. 이 얘기도 여러분들이 많이 들으셨기 때문에 뭐 제가 설명할 건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형식적으로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 말을 하고 그렇게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기는 쉽지가 않은 거예요. 대게 그거는 그 사람의 신앙이 깊다 아니다 그거와 연관되겠습니다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그리고 인격적이다 아니다도 그것도 넘어서서요. 그 사람이 지적인 사람이냐 그렇지 않은 사람이냐 그거하고도 차원을 달리해서 말이지요.

 

대게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려면 일단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기만 계속 보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겠어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션을 취해도 포즈를 취해도 결국 내가 어떻게 되느냐는 쪽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성, 이거는 공부하면서 제가 몇 번 이야기 했습니다. 성서가 죄, 하마르티아(άμαρτία)라고 하는 것은 자기집중인 거예요. 이게 얼마나 심각하게 자기 집중을 하느냐, 그건 뭐, 이 시간이 설교시간도 아니고,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어쩌면 그걸 벗어나는 것은 숙명적으로 불가능한게 아닌 게 쉽습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 되겠네요. 제가 언제 다른 기회에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납니다. 정말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내가 구원 받을까 아닐까에 대해서도 신경을 끈다고 얘기했습니다. 내가 구원받냐, 아니냐도 결국 자기에 대한 관심이거든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걸 자체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많은 경우에는 사람들이 구원 노이로제에 걸렸다고 할까? 그런 정도로 집착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구원파라고 하는 것도 한국에서 이단 비슷하게 있지 않습니까? 몇 날 몇 시에 구원 받았다고 얘기할 정도의 마음이 편해진다고 한다면, 이거는 아주 병적인 증세입니다. 이거는 구원파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만이 아니라 아마 면면히 우리 정통이라고 하는 신자들 안에도 들어 있는 걸 겁니다. 구원 받은 사람과 아닌 사람을 딱 구별하고요, 알곡과 가라지 딱 딱구별하고, 나는 여기 들었다고 하는 확신,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을 제가 나쁘다고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적인 차원이라고 할까요? 거기에는 자기에 대한 관심이 제로, 無로 돌아가기 때문에 내가 구원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하는 것까지 뛰어 넘는 그런 상태라고 하는 내용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 두 번째는 5절입니다. 주께 힘을 얻고 시온의 대로를 마음에 두는 자의 복이라고 했습니다. 아, 뭐 두 가지가 비슷한 거지요? 주님께 힘을 얻는다. 이런 말들도 사실은 시인이 어떤 것을 경험하고 이 시를 썼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냥 쓴 건 아니잖아요, 여러분들이 지금 시를 읽을 때 한 단어, 아니면 토씨 아니면 어떤 행간, 그런 것을 통해서 시인이 자기의 고유한 삶의 경험을 이야기하잖아요? 시편기자들도 그런 거거든요?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는다가 뭘까? 뭐 여러분도 알고 계실 겁니다. 낙심될 때도 내가 기도하고 힘을 얻고, 등등.. 그런 것들을 다 포함 할 수 있죠, 해야 되고요, 당연히 그런 일반적인 우리의 믿음을 통한 어떤 담대함 그런 것들이 다 들어갑니다. 예, 좀 더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힘을 얻을 수 있으려면 주님께 마음을 두어야 되고요, 그 강의안을 좀 보십시오. 제가 그걸 중요하다고 해서 말씀 드리려고 했는데, 자칫 지나쳤을 뻔 했습니다. 힘을 얻는다고 하는 것을 그냥 되는 건 아니라고 하는 거죠. 주님에게 마음을 두는 사람, 우리가 늘 마음에 두고 있는데, 주님이 누굴까요? 도대체가, 예? 이게 그러니까 주님이 누구냐에 대한 생각, 이런 것들이 잘 정리되지 않으면 뭐, 엉뚱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맨 날 복 받는 생각만 한다거나, 뭐 벌 받을까봐 걱정을 한다거나 주님이 옥황상제처럼 누구 벌 주고 복 주고 이런 쪽으로 머릿속에 딱 각인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 힘을 받는다고 하는 걸 정말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여기서 아무 어려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갑절로 잘 되고 몇 박자 축복을 받는다거나, 예를 들자면, 그런 식으로 주님으로부터 받는 힘을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런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른 건데요, 예, 주님에게 마음을 두는 사람만이 정말 새로운 차원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건데요? 이것은 마치 제가 음악을 예로 들었습니다. 피아노 기술적으로 잘 칠 수 있고, 바이올린도 마찬가지인데요? 그거하고 정말 음악에 마음을 두는 것 하고는 차이가 있습니다. 음악을 이용해서 내가 어떻게 돈 벌이 하냐, 음악을 해서 내가 어떻게 명예를 얻느냐, 이거하고 정말 음악을 사랑하는 것, 음악에 마음을 두는 것은 차이가 있잖아요? 음악에 마음을 두는 사람만이 음악을 경험하고 거기서 삶의 희열을 누리고 삶의 희열, 기쁨, 자유, 이런 것들이 힘이라고 하는 것을 아시죠? 돈, 권력 이런 것, 그러나 이런 건 상대적입니다. 그래서 더 큰 권력이 있으면 아무리 큰 권력도 힘이 없는 거거든요? 자유, 해방, 기쁨, 희락,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서 나오는 생명의 능력들이기 때문에 이게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하나님의 능력인거지요. 예, 그러니까 마음을 하나님에게 두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는 말을 너무 관념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고요, 여러분들이 아주 실질적으로 느끼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될 겁니다. 그런데 그건 쉽지 않아요. 신앙생활 열심히 한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작은 일로, 뭐 일희일비라고 하죠? 맨 날 휘둘리고 그렇게 사는 우리들의 한계가 있긴 있지만, 우리가 방향을 잘 잡으면 금방 거기서 올라설 수 있고요,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평화, 이런 것들을 평화의 영이 성령이니까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그런 삶을 허락하십니다.

 

예, 세 번째는 6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건 적당한 게 아닌데 그래도 복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어서 제가 인용했습니다. 6절요,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복을 채워 준다, 뭐 이건 별거 아니예요. 앞에 샘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고요, 샘과 비, 샘과 비가 적절하게 주어진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들은 그려려니, 그런가보다 생각하겠지만, 팔레스틴, 특별히 지금 고대, 시편은 보통 2300~500년 전에 고대에 기록된 거거든요? 그 고대 팔레스틴 사람들의 형편을 그리면서 읽어 보십시오. 아주 광야잖아요? 삶의 조건도 아주 척박하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이제 비가 오냐 안 오냐 하는 것은 그들이 일 년을 살 수 있느냐 아니냐가 결정 되는 겁니다. 이른 비, 그리고 샘을 발견한다고 하는 것, 샘이 마르지 않고 거기서 물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순례하기 위해서 오면서 6절 전 반절에 보면, 눈물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이런 샘과 비를 얻는다고 하는 것을 보면, 광야를 지나오면서 받았던 어려움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동행 하셔서 예루살렘 성전에까지 같이 온 것에 대한 기쁨, 이런 것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예, 그것을 우리가 조금 교훈적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인생도 이와 비슷하다고 하는 거지요. 어떤 눈물의 골짜기, 거기에 난외주로 바카 골짜기(바카의 어원은 눈물을 흘리다. 탄식하다)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아주 험했던가 봐요. 그 지역을 지나 갈 때면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길에 그건 제가 두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런데도 그런 곳을 지나갈 때 샘, 이른 비를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하는 겁니다. 그건 모든 어려운 문제들이 모두 해결 된다는 뜻이 아니예요. 예수 믿는 사람들만 하나님이 예쁘다고 생각해서 가시밭길 어려운 일 없이 그대로 하는 것은 있을 수는 없죠.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해야 되요. 만약 정말 우리가 신앙이 있다면, 우리가 잘 되는 것 보다는 이웃이 잘 되는 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거 아닐까요? 금년에 제 둘째딸이 대학에 들어갔는데, 내 딸 들어가는 것 보다도 다른 애가 그 학교에 입학하게 하는 게 사실은 더 목사로서 기도하는 게 더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렇게 기도했을까요? 안했을까요? 기도 안했습니다. 그게 참 곤란해 갖고 말이예요.^^ 일동 웃음) 아, 우리가 이 땅위에서 경험하는 모든 그러한 삶의 기준들을 기준들을 어디다 놓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건데요, 하나님을 통해서 얻게 되는 그러한 힘, 복, 이런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돈으로 해결 되는 것 아니고요, 딸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해결 되는 것 아니고요, 남편이 나를 많이 사랑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그 생명의 힘, 능력이라고 하는 거죠, 제가 똑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같은데, 아, 그건 뭐 제가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경험하셨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정말 지루하고요, 그 시간에 다른 걸 하는 게 낫지요. 그 어떤 영성, Spirituality 혹은 Spiritual reality 라고 하는 그 깊이가 아니면 우리 기독교 신앙생활은 지루할 수도 있고, 쓸데없는 것에 더 관심을 갖게 될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예, 세 번째까지 했죠?

 

예, 네 번째 이건 복에 관한 이야기로써 마지막이군요. 12절입니다. 예, 제가 이 시편제목을 “복이 있나니” 그렇게 했는데, 12절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했습니다. 12절도 외워두시면 좋겠네요. 그런데 이 84편이 다 익숙한 거죠? 그렇죠? 1절도 그렇지 않습니까? 1.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이 1절을 주제로 해서 찬송가도 나와 있습니다. 독일사람 누가 지은 건데, 기억이 잘 안 납니다. 구절구절이 다 좋네요. 1절부터 12절까지 우리가 암기할 수 있으면 참 좋은데요. 암기 교육이 단점도 있습니다만, 좋은 점도 많이 있습니다. 몰라도 암기 하고 있으면 어느 때 그게 이제 껍질을 깨고 우리에게 환히 보일 때가 있거든요? 특별히 12절, 이게 전체 주제라고 생각해서 드리는 거예요. 12.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여러분들이 이게 얼마나 엄청난 역사에 대한 통찰과 희망을 담고 있는지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아직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꼭 외워두세요. 기억해 두시고요. 우리가 이것을 이해 할 수 있는 그 때가 되면 아마 이 구절이 문을 활짝 열고 반기는 잔칫집과 같을 겁니다.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러니까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을 때만 주께 의지 할 수 있습니다. 정말 다른 것을 내려놓아야만 오직 그 분만을 향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삶이 모두 허무하니까 다 무시해라 그 뜻이 아닙니다.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봐라 그 뜻도 아닙니다.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요? 아,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우리 인생 전체 삶의 흐름 안에 놓여 있어야 된다고 하는 거지요.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예, 그 설명은 그만 하겠습니다. 강의안을 여러분들이 참고하십시오. 주께 온전히 의지한다, 정말 그것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예, 복에 대한 강의안을 제가 정리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하는 시편기자의 노래는 이건 그저 뭐 좋은 게 좋다는 식이라거나 다 잘 된다는 그런 것, 그리고 삶의 고난과 시련 엄청난 함정들을 모르는 사춘기의 낭만적인 건 아닙니다. 자기 한계도 아는 가운데 나오는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나오는 복은 그냥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든지, 아니면 자기 합리화 자기는 노력도 안하고 자기는 뭔가 얻지를 못하고 비굴하게 살면서 이게 다 하나님이 내게 다 복을 주시겠지 하는 그런 자기합리화 그런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른 거예요.

 

마태복은 5장 3장과 10절 사이에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팔복이 나옵니다. 그런데 읽으실 때 마다 어떤 생각이 들어요? 좀 난감하지 않습니까? 복이 있나니 하고 나온 내용들이 정말 우리가 싫어하는 것들이잖아요? 우리 자식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계속해서 읽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정신상태가 분열 되어 있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이게 무슨 뜻인가, 그러나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 그러한 것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거기에 몇 가지만 인용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누가복음에는 그냥 가난한 자라고 되어 있어요. 조금 더 실제적인 가난한 자를 이야기 한 거고, 마태복음은 그것을 조금 정신화 시켰다고 할까? 마음으로 좀 바꿨습니다. 어쨌든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등등.. 다 고달픈 사람들이네요.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마태복음 기자가 분명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왜 복이 있을까요? 저는 우리 두 딸이 가난하게 살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부자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 정도껏 자기능력만큼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시겠죠. 예, 그건 그거고, 이건 직접 관계없는 이야기인데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마태복음하고 누가복음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복 있는 사람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이런 사람들은 복이 있나요? 왜 복이 있을까요? 그러면, 참 어려운 문제예요. 오늘 제가 다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더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한 가지 방향을 말씀 드려야 되겠네요. 이거예요. 이 세상에서 이거 저거 이런 것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만이 다른 것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됩니다. 내가 여기서 할 일이 너무 많으면, 그러면 종말론적 하나님의 통치 이것 기대하지 않게 되는 거예요. 제가 전에 서울에 가서 어떤 강의할 때 한 내용인데, (지금도 일주일에 한번은 가는데, 4월부터는 제가 격주로 나가게 될 겁니다.) 거기 노숙자들이 있거든요? 강의를 하면서, 어쩌면 저 노숙자들이 나 보다 더 하나님의 나라를 더 열망하고 있을거다, 그런 사람이 복이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어떤 방식으로는 자기 삶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어떤 전혀 새로운 힘을 기다리게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종말론적 하나님의 통치라고 이야기 하는 것, 복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인 거죠, 아이구 그래도 그건 삶이 참 고단한 것 아니냐, 고단합니다. 힘들어요. 이거 설명이 쉽지 않네요. 우리가 지금 바로 죽는다고 합시다, 한 시간 뒤에 죽는다고 한다면, 다른 것에 대한 신경을 다 끄겠지요. 모든 것에 대한, 여태까지 시끄럽게 했던 모든 것을 다 끊고 한 가지만 생각할 거 아니겠습니까? 죽음과 죽음 이후와 하나님, 이런 쪽으로 말이지요. 그 순간이, 그 상태가 복이 있는 거죠. 말하자면, 그게 전적인 평화인거죠. 맞는 얘기 하는 건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그냥 생각해 보십시오.(제가 9시까지 강의합니다.)

 

그 강의안에 그렇게 질문했습니다. 시편과 팔복이 말하는 그 복이 실제로 복일 수 있는가, 생각해 보자는 거지요.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거죠. 저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이 그리고 성서가 말하는 복, 구원, 참된 생명은 관념적이 아니라 물론 관념적이 성격이 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아주 실질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러한 성서가 말하는 복이 정말 우리에게 복으로 이해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다섯 번째 쓰인 그겁니다. 영혼이 전혀 새로운 욕구로 전환 되어야 됩니다. 예, 시편기자가 2절에서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그가 얼마나 간절했으면, 자기가 그렇게 약해졌다 이야기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일치를 열망하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10절에 보면 멋진 은유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참 이것도 잘 알려진 구절이지요? 10.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의 궁정에서, 궁정이라고 해서 큰 대궐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구요. 다 주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 거죠. 한 날과 천 날,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있는 거죠. 그러나 이 사람은 하나님과 일치 가운데서 머무를 수 있는 한 날을 택하겠다, 그 바깥에서의 천 날을 자기는 선택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참 대단하지요? 우리는 무조건 오래 살고, 많이 가지고 살고, 그런 것에 우리 모든 삶의 목표를 세우고 있는데, 전혀 차원을 다르게 하는 겁니다. 영혼의 관심이 어디 있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는 겁니다. 제가 비유를 하나 거기에 적었습니다.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가 있다고 합시다, 그 두 사람은 두 사람 있을 때만 즐겁잖아요? 그 나머지 것들은 다 시시해 보여요. 그런 어떤 그 영적인 열정이라고 할까요? 그렇습니다. 예, 결론입니다. 시편 84편은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찬양하는 노래, 예, 실제로 입으로 찬양해도 좋고요, 생명예찬이라고 할까? 수필가라고 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요, 생명경험의 외경, 거룩한 두려움, 떨림, 그런 것들도 다 찬양입니다. 그러한 찬양과 떨림의 순간들이 우리의 삶에 좀 많아져야 되겠고, 그런 시간들이 늘어나야 되겠지요.

 

그래서 제가 앞에서 잘 알려진 구절에 이렇게 말씀 드린 1절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1.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놀랍지요? 참 행복한 사람이지요? 자기 자신에게 도취해 갖고 하는 이야기 아닙니다. 이 사람이요, 삶의 시련과 고난과 아픔들, 모순들 알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자기 모든 전체, 영혼이라고 할 때는 자기 존재 전체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영혼하면 육체하고 관계없는 공중에 떠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생명의 가장 심층에서 움직이는 어떤 생명 현상을 가리켜서 영혼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 존재 전체를 이야기 하는 거지요. 그 영혼이, 인간을 창조하셨고 세계를 창조하셨고 그리고 완성하실 그 분, 아직까지 우리들에게 다 드러나시지 않았지만, 점점 드러내고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미 일치하셨고 마지막 종말에 모든 생명의 비밀을 열어 주실 그 분을 찬양한다고 하네요.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고 차 한잔 마신 다음에 질문응답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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