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5편 강해- 구원의 하나님

 

시편 85편, 1절에서 13절까지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같은 목소리로 통독하는 방식으로 읽겠습니다. 내용을 잘 생각하면서 읽어 봅시다.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2.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3.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

4.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거두소서

5.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진노하시겠나이까

6.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7.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8.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9.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10.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11.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12.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13.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아멘! 예, 오늘 공부의 제목은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이요. 너무 뻔한 이야기 같지요. 그런데 이게 그렇게 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구원자라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그러한 태도를 견지하는지는 그렇게 명확한 게 아니예요. 하나님이 일단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생각을 굴려서 하나님을 만들어 낸다고 할까, 그렇게까지도 가능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아, 유대인들이요, 오늘 강의안에 제가 기록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다른 때는 한두 번 말씀 드린 건데,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가나안의 바알과 아세라 우상들을 섬겼잖아요, 그런 것들을 볼 때 이게 반복해서 나왔습니다. 모세 오경에도 이미 있고요. 예언자들의 말씀에는 수 없이 반복되고 있고요. 시편에도 사실은 나오는 이야기고,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 보면 좀 여러분들이 이상하다고 느낄 거예요. 하나님이 그들을 확실하게 구원하셨다고 하는 사실들을 알고 있는데, 왜 저들이 자꾸만 돌아설까, 왜 다른 데 한 눈을 팔까, 그런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돌아 볼 필요도 없이요, 출애굽 뒤에 사십년 광야 생활에서도 그랬잖아요? 그건 이상하죠? 이 영적인 카리스마가 대단했던, 모세가 살아 있던 그 당시라고 할 수 있겠군요. 거의 하나님을 대면하다시피 하는 그러한 영성의 경지가 있어서 감히 사람들이 그 앞에서 마주보지 못했던 모세가 끌고 갈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한 눈을 팔았다는 겁니다. 그게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수 없이 반복되고요. 그게 이제 이스라엘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똑 같은 겁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하나님이 실증적으로 나타나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광야에서 만나가 내렸다, 마라의 쓴 물이 달게 되었다, 그래서 확실한 것들이 있는 거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성경을 동화책처럼 읽으면 곤란한 거예요. 그러한 사건들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고 하는 것은 역사가 지난 다음에 천천히 알게 되는 거예요. 그 당시엔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있잖아요, 이사야, 예레미아, 아모스, 호세아, 요엘 등등..이루 말 할 수 없이 이스라엘의 영적인 전통을 갖고 있었던 예언자들 말입니다. 그들의 예언의 활동을 가리켜서 신탁이라고 얘기 하거든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자기 뜻을 알리기 위해서 어떤 사람을 선택해서 그에게 아주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알게 하는 그 행위, 그 사건, 그 현상을 가리켜서 신탁, 오라클이라고 합니다. 신탁을 받지 않으면 예언자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신탁이 뭐냐, 이건 또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돌려서 생각하시면 되요. 누구나 시인이 될 수는 없잖아요? 흉내는 낼 수 있지만, 진짜 시를 쓰기는 힘듭니다. 그러니까 그런 차이예요. 정말 신탁을 받은 예언자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칭 예언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들이 뒤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누가 참된 예언자인지 아닌지도, 예레미야하고 대적한 선지자도 많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참된 선지자들은 감옥에 갇히고, 사실 뭐 그 당시는 빛을 별로 많이 못 받았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말씀 드리는 거예요. 빛을 본 예언자들도 조금 있긴 있었지만, 대다수는 그런 거 없이 그냥 하나님 말씀을 선포한 거예요. 제가 무슨 말씀이냐 하면, 하나님의 예언, 계시,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그 시대, 당대에는 명명백백하게 들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저 사람이 참된 예언자라고 하는 사실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몰랐어요. 세월이 굉장히 많이 지난 다음에 돌이켜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후손들이 생각한 거죠. 아, 예레미야가 옳았다, 아모스가 옳았다, 그렇게 해서 그 말씀들이 살아남아서 구약성경 안에 들어오게 된 겁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알아챈다고 하는 것, 이거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꾸만 한 눈을 팔게 되는 겁니다.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당장 복 받고 뭐 하고 하는 것에 솔깃하잖아요? 그런 것을 약속으로 주는 신, 이게 우상이거든요? 예, 그런 것을 선포한 선지자들, 자칭 그런 것에 청중들이, 대중들이라고 할 수도 있고요, 대중심리라고 하는 게 있지 않습니까? 쏠림현상 같은 게 특별히 그런 것들이 우리 국민성에게 많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그런 게 있어요. 오늘 여기 제목만 제가 얘기하다가 다른 얘기로 좀 더 들어갔는데, 뭐 이거 설명하는 것도 필요하기는 한 거죠,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말은 구원의 하나님,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온갖 우상, 그리고 솔깃한 이야기들, 그리고 물질숭배 심지어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무족건 막 개발해서라도 인간이 편리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그런 성장주의, 개발논리,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게 매력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우리가 잘 이해하려면 구원이 뭐냐,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거죠, 예, 오늘 저는 구원이 뭐냐 하는 것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한 두 마디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그건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로 경험된 어떤 것들이고 그리고 종말에 가서 확연히 드러나야 될 것들인데요, 실질적으로 하나님과 만남이 구원이거든요? 그러니까 죽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겁니다. 본다고 하는 것도 이것을 하나의 은유적으로 말씀 드린 거지 하나님을 어떻게 보고 말고 하겠습니까? 세계 전체, 우주 전체, 모든 생명전체 그게 이제 하나님이라고 할 때 우린 그 안에 들어갈 뿐이지 그걸 직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난다, 본다, 그런 표현을 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은 시적인 언어인 거예요. 그런 것들을 사실적인 언어로 봐 갖고 그걸 진짜 보는 것처럼 생각하면, 어린 아이들 동화 읽는 거하고 비슷한 일이 되겠지요.

 

구원이라고 하는 것도 그냥 낱말 뜻으로 본다면, 소테리아(σωτηρια)라고 하는 헬라어에서 나온 건데, 나온다, 해방 받는다, 어디서부터 건짐을 받는다 그런 뜻입니다. 과연 우리가 어디서부터 건짐을 받아야 될까요? 죄라는 문제도 있고, 우리의 욕망, 우리의 이기심, 우리 자기집중, 여러 가지 말로 말할 수 있지요? 그런 것들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들이 평화를 누릴 수 있고, 정의로움 그렇게 표현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 이거는 우리가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성격도 달라진다, 그 이야기입니다. 예, 우리가 오늘 여기 제목대로 하나님을 구원자로 믿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만이 구원자예요. 우리를 구원하는 자가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바꿔서 생각하세요. 만약에 자연과학이 정말 능력이라고 한다면, 자연과학이 신이겠지요, 아니면 현대인들이 쏠려서 살고 있는 물질, 어떤 자본, 재화, 이런 것들이 인간을 정말 구원한다면 그런 게 신이 될 수 있겠죠? 그러니까 우리를 구원하는 그 누구, 어떤 분, 우리는 그를 하나님이라고 말을 하는데, 그 분만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하는 사실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성서는 바로 그 사실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 거지요? 그런데, 제가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구원과 좀 거리가 멀거든요? 우리가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그리고 때로는 구원의 확신도 드는데, 또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는데, 그런데 우리 현실은 구원과 거리가 멉니다. 이건 뭐 제가 설명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가 물을 좀 마시지 않더라도 생명이 위태롭고, 그런 것 말고도요, 또 생물학적으로라는 문제도 많이 있고, 외롭고요, 절망적이기도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허무할 때도 있고요. 이런 것들을 다 안고 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모든 것을 다 걷어내고 구름타고 다니듯이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거는 이제 환상이죠, 그런 딜레마가 있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이 구원자라고 하는 것을 믿고 있고,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동시에 구원받지 못한 현실 안에 있다고 하는 이 딜레마, 긴장이거든요? 이 긴장을 갖고 살아야 되요, 이것을 쉽게 벗어 버리려고 하면, 광신에 빠져 들겠지요,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하고 허상 속에 들어가 살겠구요. 광신이 바로 이런 거죠?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러한 긴장과 딜레마에서 우리가 계속 허우적거리고 있어야 될까요? 그런 건 아닙니다.

 

저는 세 가지로 그러한 긴장, 딜레마에 대한 우리 기독교인들에 대한 태도를 말씀 드릴까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것으로 설명할 생각입니다. 이게 요거 만이다, 이게 정답이다 이런 얘기는 아닙니다. 이런 관점이 있다, 이런 이야기예요. 여러분들이 제가 설명하는 것을 정답으로 생각하면 곤란하고 정답으로 가까이 가는 하나의 가는 과정으로 생각하시고, 결국 여러분 스스로가 그 길을 찾아야 될 겁니다. 그런데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제가 여러분들하고 공부를 하고 있는 거구요. 오늘은 본문에 나와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세 가지, 이 긴장가운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어떤 영적인 태도를 취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기억하고 그 역사를 배우는 겁니다. 예, 이게 참 중요한 문제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계속 지켰잖아요, 유월절 만찬을 하지 않습니까, 교육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거거든요? 유월절에 그들이 한 일은 뭔지 아시죠?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어요, 옛날 자기들의 선조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 때에 하나님이 끌어내서 어떻게 해방시켰다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앙은 기억입니다. 그런데 그 기억,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셨느냐, 노래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에 대한 노래 말입니다. 특히 홍해사건을 거기 중심주제로 다루고 있지요? 그 깊은 물을 마른 땅처럼 지나가게 했다, 이게 정말 동화 같은 이야기죠, 그것만 본다면, 홍해를 마른땅처럼 지나가게 하고 이집트의 병거의 말 탄자들을 그 안에 수장했다, 그게 역사적 사실이냐, 그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그건 아주 오래된 이야기기 때문에 이게 그들이 구전되는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후손들에게 전하려고 했던 것이지 정말 바다가 갈라져서 그 사람들만 나오고 뒤에 사람들은 다 죽게 하는 그러한 것은 좀 어려운 문제예요. 저는 그걸 사실이다 아니다 말씀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성서기자들은 사실 그런 데에 관심 있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건 이스라엘 민족들의 자기중심적인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어요, 보세요, 지금 서해안에서 초계함이 침몰되어 갖고 장병 어머니 아버지들이 마음을 아파하는데, 끔찍한 일들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구원하기 위해서, 이집트에 있는 지금의 병사들이죠, 말하자면, 그들을 몽땅 다 바다 속에 장사지내는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좀 곤란한 부분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이집트 사람들도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들인데, 자기들 이스라엘 사람들 구원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 젊은이들을 몽땅 다 바다에 빠뜨려 죽게 하는 거라면,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로움이라고 하는 점에서 모순이 있는 이야기거든요, 그런 것들을 아주 세심하게 읽어야 되는데, 그러니까 이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유한 신앙고백인 거예요. 그 사건에서 하나님을 그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그 이야기를 어떻게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느냐는 것들을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고, 더 나아가서 거기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을 그냥 그것으로만 이해하면 곤란하고요, 성서 다른 부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님과 연관해서, 전체적인 관점에서 같이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 중심으로 해석한 역사를 실증적인 것으로 받아드리면 참 곤란한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제가 언젠가 말씀 드렸지만 그 이어지는 사건들 있잖아요, 아이성과 여리고성에 들어가서 어린아이들까지도 죽이라고 하는 것도 실질적인 것으로 자꾸 말하게 되면, 이건 사람의 사랑의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성서읽기가 참 위태한 작업이기도 합니다. 충분한 해석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이현령비현령으로 이해될 수 있거든요? 에, 그런 정도로 말씀 드리고요, 그러니까 구원행위를 기억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셨다,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하셨다, 아, 그렇게 정리하고 넘어가야 되겠군요, 우리가 홍해사건 이런 것도, 말하려고 하는 것은 명백한 하나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셨다, 그리고 그 방식이 놀랍다, 그리고 이 세상이 인간들의 어떤 힘, 막강한 힘 이런 것들도 아주 놀라운 능력이다, 사실인거죠, 예, 그걸 기억하고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기억, 역사적 사건을 바벨론 포로 귀환, 이걸 이야기 하고 있어요. 1절에 나와 있습니다.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예, 반복해서 말씀 드리지만, 바벨론 포로, 예루살렘 함락으로부터 시작해서, 50년에서 70년에 이르는 바벨론 포로기, 이게 구약성경이 형성되는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사건이야말로 오늘 시편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의 구원능력을 보증하는 거였습니다. 오늘 말씀 드리지 않았지만, 올라가면 출애굽 사건구요. 이 두 사건이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임을 여러분 머릿속에 넣어 두시면 됩니다. 하나는 출애굽, 또 하나는 바벨론 포로 귀환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 해방이거든요? 이스라엘 민족적인 해방입니다. 이 두 가지가 기둥으로 되어 가지고 구약이라고 하는 집이 지어졌다, 여러분들 머릿속에 그렇게 넣으시면 됩니다. 두 가지요, 왼쪽에 있는 것은 출애굽, 오른 쪽에 있는 것은 바벨론 포로귀환, 이걸 기둥으로 해서 모든 구약성서가 기록 되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요, 이런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기억한다고 하는 것이, 이게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별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다 잊어버려요,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에 머무르게 됩니다. 아, 대게 그렇지요, 제가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정말 중요한 사건들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예, 우리가 숨을 쉬고 있잖아요, 여기에 산소가 15% 있어야 된다면서요, 그 균형이 깨지면 우리가 아예 숨을 쉴 수가 없고 죽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창조사건에 들어와 있는 것들이거든요? 그걸 기억하는 거거든요? 예, 정말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대신 우리는 나를 어떻게 포장한다고 할까, 자기를 좋은 뜻이든 어떤 뜻이든, 자기를 채워 가는데 우리들이 다 머물러 갖고 하나님의 구원사건과 행위에 대해서는 이거는 어렴풋한 거예요, 들을 때만 그럴 듯 하지, 좀 실감이 나지 그렇게 됩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일거에요. 그런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민감한 영적 공명, 어떤 소통, 이런 것을 유지 하는 게 영성입니다. 신앙의 경지라고 할 수 있고요, 이것이 아주 밀착해서 이루어지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되지 않는 사람이 있고, 그런 거거든요, 그러한 부분들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되는데, 이런 걸 우리가 늘 듣기는 하지만, 놓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 지금 우리가 1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사건이 하나님의 구원사건 계획을 시편기자가 설명하는데, 결정적인 사건이었는데, 그것을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되었다고 하는 이 역사적 사실을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하나는 죄가 용서받은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분노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이스라엘에서 벌어지는 역사에서 어떻게 해석하느냐하고 연관됩니다. 잘못된 것 불행한 것들은 다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죄로부터 용서 받는 것이라고 하는 거죠,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된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죄로부터 용서받는다고 하는 것이고요,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봤습니다. 그러니까 포로로부터 귀환 받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그건 하나님의 분노의 연상선상에 있는다고 하는 거죠, 그런 것들이 해소 됬다고 볼 수 있는 거죠, 예, 거기까지가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기억하고, 그 역사를 배우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구원의 현실하고 멀게 살고 있다고 하는 이 긴장에서 우리가 벗어나는 첫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여러분들이 놓치지 말고 잘 보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한다는 거지요. 시편기자는 역사에서 일어났던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기억하고 해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합니다. 그 차이가 있는 것은 아시겠지요? 구체적으로 보면 분노를 거둬달라고 하고, 인자하심을 보여 달라고 하고 구원을 간구합니다. 그러니까, 아 이거예요.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부터 자유로워졌는데도 여전히 자기들이 사는 삶은 힘들거든요, 다 해결될 것 같지만 안 됬거든요, 여러분들이 일단 예언서들을 읽어보면 바벨론 포로가 끝난 다음에 정말 좋은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기대를 많이 했는데, 아주 거의 다 실패 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분노가 남아 있는 거와 같은 현실 속에서 거둬달라고 간구하는 거죠, 예, 이런 점에서는 지금 우리도 구원을 간구해야 됩니다. 참된 안식을 간구해야 되듯이 참된 평화를 간구해야 되듯이, 안식과 평화는 구원은 같은 성격의 단어들이거든요? 간구해야 됩니다. 다시 정리하면요, 하나님의 구원이 어땠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공부해야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간구해야 되는 거죠, 예, 강의안에 있듯이 구원을 간구한다고 해서 정말 구원받느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사업을 망하게 하지 말아 달라 한다거나 불치병을 고쳐달라고 간구한다거나 그런 것들이 다 기계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게 우리 신앙의 긴장이 좀 있긴 있어요, 간구하라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간구가 실질적으로 그 기도가 실질적으로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이 긴장인 거지요, 그리고 또 좋은 결과가 일어났다고 해서 우리의 기도덕분이라고 꼭 일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와 간구와 응답, 이런 것들은 기계적인 문제는 아니거든요? 편하게 얘기하면,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이루어질 것은 이루어지고 기도한다고 해서 꼭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말이지요. 그런 것들은 우리가 모르는 더 은밀한 하나님과 성령의 계획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입니다. 아,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가 두 가지 극단으로 빠질 염려가 있어요. 강의안을 보시면 두 가지를 적어 놨지요, 하나는 기도만능주의고요, 또 하나는 기도무용론입니다. 기도만 하면 모든 것이 된다. 안 이뤄진 것은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건 좀 우스운 이야기인데, 기도만능주의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도구를 사용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이 이런 만능주의에 있는 게 아닌 가 싶습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실 때 게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간구하셨잖아요? 십자가가 자기 뜻이 아니라면 지나가게 해 달라고 예수님마저도 자기를 그렇게 밑으로 내려 놨는데, 우리는 뭐 믿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건 믿음이 아니라 광신, 맹신 혹은 자기신념, 좋게 봐서 자기신념이겠죠,

 

신념하고 신앙은 다른 겁니다. 신념은 자기에 대한 거구요, 신앙은 자기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에게 맡기는 거기 때문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기도만능주의가 문제이지만 기도무용론도 문제입니다. 일종의 신앙냉소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뭐, 기도해봐야 별거 아닌데 그게 되냐, 라든지 그런 인간들의 무의식에 대한 자기 투사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도 있고요. 지성인들이 그런 쪽으로 생각할 염려가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기도하지 않는 신자도 많이 있겠지요. 너무 주술적인 기도도 문제고 기도냉소주의 기도무용론에 빠진 것도 문제고요, 어떻게 우리가 건강한 신앙생활을 유지 하는가 이건 끊임없이 자신을 성령과의 관계속으로 내 놓을 때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건 어떤 정답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더 생각해 보시고요, 여러 가지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으면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신앙적 경험이 필요하겠지요, 예, 우리는 기도만능주의의 문제를 이렇게 설명한 거예요.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좋은지 사실은 잘 모릅니다. 모르면서 구하는 겁니다. 우리는 사실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하잖아요? 좋은 학교 가는 게 누구나 바람인데, 그 아이가 그 학교 가는 게 우리는 정말 좋은지 아닌지를 판단 할 수 없는 거거든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래야 될 것처럼 알고 기도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또 집단적으로 하고 말이지요, 이런 것들하고는 신앙하고 일치한다 말하기는 좀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예요. 그래도, 몰라도, 우리는 기도해야 되는 거죠, 이건 자기신념이나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으로 그렇게 된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성 말이예요. 그게 참 쉽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정말 하나님에게 자기 존재 전체를 의존하는 참다운 신앙행위이고 어떤 것이 자기 확신, 자기의, 자기열광 뭐 이런 것인지 이게 겉으로 잘 표시 안 나기 때문에 분간하기는 참 힘듭니다. 그런데 어떻게 분간할 수 있을까요? 제3자가 분간하기는 힘들구요, 본인 스스로만 알겠지요, 우리의 삶이 더 영적으로 더 풍요로워 지는 것, 평화가 충만해지는 것, 내 아이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기도하지만 설령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하나님의 은총이 너무 크다고 하는 것을, 그런 데에 놀라워하고 더 관용도 늘어나고 그러한 게 된다면 우리 신앙이 건강하다고 하는 하나의 흔적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 우리는 우리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100%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어린아이가 어머니 아버지에게 아주 전적인 신뢰로 간구하듯이 간구해야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강의안에 그렇게 썼어요. 그럴 때만 우리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응답이라기보다도 -거기 문장이 좀 잘못 되었네요.-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에 바르게 응답할 수 있다. 그렇게 문장을 바꿔야 되겠네요. 하나님의 은혜에 혹은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응답을 바르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다.

 

세 번째는 구원의 현실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다, 하나하나 이렇게 단계적으로 앞으로 나가는 걸 느끼시겠지요? 하나는 성서와 이런 기독교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기억하고 공부하는 거요, 그래서 우리 예배도 그 하나고 성찬예식도 그거고, 성찬예식을 통해서 어떤 것을 기억하는 거거든요? 그리고 그런 걸 아는 가운데, 간구해야 되고요,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구체적으로 그 구원의 리얼리티 구원의 현현이라고 했는데, 그걸 에피파니(헬Επιφανι, Epiphany) 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노래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첫 번째는 구원에 대한 공부, 두 번째는 기도, 간구지요. 세 번째는 노래인데, 이건 실천이라고 하면 되겠네요. 첫 번째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이론적 공부, Theory 라고 하는 것 이론, 하나님의 통치 두 번째는 기도, 이건 영성이라고 할 수 있고, 세 번째는 실천, 제가 세 가지 단계로 집에서 그렇게 구체적으로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지금 말씀 드리다 보니까 생각나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신앙의 이론부분, 두 번째는 영성, 세 번째는 실천, 그 중간에 영성이 앞 뒤를 다 묶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믿음들이 실천까지 나아가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메시아적 미래, 메시아, 이건 아주 중대한 단어입니다. 메시아, 교회를 가리켜서 종말론적 메시아공동체라고 하거든요,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 교회는 바로 그렇습니다. 메시아는 구원자라고 하는 뜻이잖아요, 그것이 종말론적인 구원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 그 하나님의 구원은 메시아적 미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구원의 미래에 대한 예언자적 상상력이 바로 그것이다, 이사야, 요엘 선지자들, 여러분들 기억하시지요? 어떤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하는, 그리고 메시아적, 그리고 묵시적 단어가 다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예언자, 두 번째 메시아, 세 번째 묵시, 다 전문적인 용어인데, 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오늘 여기 시편기자는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의와 화평이 입 맞춘다, 이런 걸로 복음찬송 하나 쓸 만하지요? 복음찬송만이 아니라 찬송가 가사로 어울립니다.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 노래하지요, 하늘과 땅의 일치, 창조와 종말의 일치, 전 세계, 전 우주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이 완전한 구원 안으로 들어가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예, 그것을 지금 시편기자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노래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위해서 투쟁한다, 실천한다고 하는 뜻도 포함되죠, 예, 맨 마지막 패라그래프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메시아적 미래에 대한 노래, 이것이 세상에서 실현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일단 우리 사람들이 행하는 일에는 늘 양면성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강의안에 있는 그대로입니다. 정의로우면서도 평화로운 세계가 인간에게서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마음이 좀 편하거든요? 편하다고 하는 게 평화로운 거니까, 모두 정의로운 세계가 되려면 불가능하잖아요? 예, 인간에 의한 사회질서는 정의로우면서도 평화로운 세계는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런 세계를 희망하고 노래해야 합니다. 저는 이건 정말 우리들에게 필요한 일, 특히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신앙이 파편화되었다고 할까요? 개인주의화 되었다고 할까요?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 라고 하는 것에 그냥 몰두하고 말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의 메시아적 구원의 미래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적이라는 말이예요. 그리고 정의롭고 평화롭고 그러한 세계를 향한 그런 노래를 실제적으로 좀 불러야 되지 않을까요? 남북이 계속 긴장가운데 있고, 이번 서해안의 사건도 일어나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남북이 좀더 평화로운 관계를 위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노력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런 것이 기독교신앙으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거는 정말 성서를 파편적으로 읽는 거죠, 메시아 구원론적 공동체라고 하는 사실을 모르는 거죠. 이 부분이 우리들에게 아주 약합니다.

 

세계정의, 세계평화, 민족의 미래, 그리고 제 3세계에 대한 어떤 이해, 그런 것들을 기독교회가, 하나님을 구원자로 믿는 교회가 외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옛날에 읽은 어떤 신학자가 쓴 책에 이런 말이 나오는데,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제 3세계가 진 빚 있잖아요? 제 1세계 유럽이나 미국에게 진 빚이요. 그 빚을 탕감해 주자, 이상적인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상당히 성서적인 이야기이거든요, 안식년, 희년 이런 제도에 의하면 모든 것이 원상 복귀 되어야 되는 거거든요? 이런 것들이 예언자적 상상력이라는 말입니다. 노래하고 실천해야 되지 않냐 하는 겁니다. 이 말이 그렇다고 해서 구원이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으로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구원의 미래 구원의 현실들을 노래하고 실천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이렇게 노래 불러야 되지 않냐 그 뜻입니다. 예, 오늘 우리가 쭉 공부하고 있는, 시편 85편이었는데요, 좀 중요한 이야기였지요? 다른 시편도 중요합니다. 시편 85편 이 한편만으로도 우리는 성서의 세계가 뭐냐, 하나님과 구원 그리고 그 구원의 미래, 결국 구원의 현실을 경험하지 못하고 구원의 현실이 파괴되는 것을 겪는 우리 모두 믿는 사람들의 딜레마, 이런 것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느냐에 대한 대답을 어느 정도 들었습니다. 이 세 가지 관점들을 잘 기억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예, 오늘 여기까지 공부하고요, 차 한 잔 마신 다음에 우리 같이 토론하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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