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6편 강해-영혼의 탄원

 

오늘 시편 86편, 오늘 한 절씩 돌아가면서 읽겠습니다. 시계 반대방향으로 가겠어요.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시편 86편 ‘다윗의 기도’라는 표제가 달려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

1.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2.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3.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4.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5.주는 선 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6.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7.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 하시리이다

8.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

9.주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민족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리이다

10.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

11.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12.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13.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14.하나님이여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의 무리가 내 영혼을 찾았사오며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하였나이다

15..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16.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17.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아멘! 우리가 함께 읽은 것만 하더라도 이 내용이 어느 정도는 전달된 것 같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읽는다고 해서 내용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잘 몰라도 읽는 과정에서 어떤 깨우침들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얘기 하는데요, 조금 신비할 수도 있지요. 언어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마음의 상태를 닫지 않고 열어 놓은 상태에서 바르게 읽기만 한다면 이 성경이 기록할 때 역사하셨던 진리의 영, 그분이 역사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예, 우리가 같이 읽으면서 하나님 말씀도 참 귀하다, 귀하다 그런 느낌이 들어왔을 겁니다. 오늘 제목은 “영혼의 탄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혼이라고 하는 단어를 많이 들어 보셨고 또 쓰시기도 하지 않습니까? 영혼, 영혼이 무엇일까요? 영이라고도 얘기합니다. 영혼은 혼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이게 사실은 구분이 잘 되지 않습니다. 물론 영어로는 soul 혼, 영혼 이렇게 얘기하고요, 독일어로 젤레(Seele)라고 합니다. 젤레, 그리고 영은 영어로 spirit라고 하고 독일어로는 가이스트(Geist)라고 하거든요? 정신이라고도 또 번역도 됩니다. 그렇게 구분하긴 하지만 딱 구분되는 건 아닙니다. 워치만 리 같은 사람은 인간을 3분설인가, 영, 혼, 몸 이렇게 얘기하는데 정통 신학은 아닙니다. 영과 몸, 사실은 이렇게 그게 2분법이다, 3분법이다라는 말 자체가 정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죠, 다 하나인데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느냐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를 두고 있는데요, 왜 그런 얘길 하냐면 누구는 2분법-이게 기독교 전통인데요-영과 몸으로 얘기하고 누구는 영혼, 몸, 바울의 어떤 편지에 보면 영, 혼, 몸 세 가지로 구분되는 구절도 있지 않습니까, 왜 이러냐 하면 이게 인간을 몸과 영의 결합이 신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디서 어디를 딱 끊어서 어디서 어디가 인간의 몸이고 그런 걸 구분하기가 힘든 거예요. 아마 그런 모든 것들은 종말에 가서나 확연하게 드러날 겁니다.

 

여러분들은 희미하게 세상을 보고 산다고 하는 게 좋습니다. 우리가 확실한 것을 모르는 거예요. 우리가 이 세계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확실하게 모르는 게 아니라 너무 신비하기 때문에 잘 모르는 겁니다. 그런 것들을 모든 걸 실증적으로 다 확인 할 수 있는 것처럼 접근하면 문제가 생기겠죠, 예를 들자면, 인간의 죄의 문제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그게 정말 왜 인간이 죄를 짓느냐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정말 힘든 겁니다. 창세기에 선악과라든지, 카인 아벨사건이 나오는 것도 인간이 어떻게 자기 스스로 죄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하는 것, 벗어나기 힘들다고 하는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성서기자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 영혼 우리는 한 가지로 보겠습니다. 영이라고도 하고 영혼이라고도 하는데, 이거는 곧 인간 생명의 심층적인 차원에서 나타나는 어떤 능력, 어떤 현상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딱 집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예요. 우리 몸을 다 해부한다고 해서 영과 영혼 이런 것을 찾아 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영혼, 영, 그런 것들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그런 걸 경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걸로 경험하시나요? 아주 막연하게 생각하시나요? 그거를 대게는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내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럼 내가 성령과의 소통을 통해서 내 영혼이 살아난다, 그렇게 얘기 할 수 있습니다만, 그게 틀린 말은 아니겠습니다마는 여러분들이 더 실질적으로 생각을 하셔야 될 거예요. 언제, 어떻게 여러분들이 나의 영혼, 나의 영 이런 것들을 경험하는가, 하는 거죠. 예, 저는 이렇게 설명한 거예요. 이 설명은 하나의 공식적인 겁니다.

 

다시 설명 할께요. 영혼은 인간생명의 가장 심층적인 차원에서 활동하는 생명현상, 생명능력이다, 이렇게 말한 거죠, 가장 심층적이다라는 말을 기억해 두십시오. 인간이라고 하는 게 깊이가 있고, 높이가 있냐,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어요. 이것도 하나의 이것도 은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심층적이라고 하는 것, 메타포라고 보통 말하거든요? 상징, 은유 그런 것들이지, 우리 실제의 몸이라고 하는 것에서 깊이 이런 것은 찾을 수 없는 거지요. 이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어떤 것을 성취해서 만족해 하는 우리 마음의 상태, 그런 것으로는 되지 않는 상태, 어떤 것들을 얘기하는 거죠. 여러분들은 이런 것들을 경험하시잖아요, 그 어떤 것으로 가능하지 않은 거기, 그 생명의 차원을 얘기하는 겁니다. 거기 대해서 더 설명하지 않겠어요, 뭐 이런저런 예도 많이 들 수 있는데, 그냥 줄이겠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통해서만 만족, 혹은 안식이 가능한 우리 인간 생명의 구성요소, 그걸 가리켜서 영, 혹은 영혼이다 얘기하는 겁니다. 예,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한번 질문해 보십시오. 우리가 과연 영혼의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을까 하는 거죠. 그게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찾을 때가 많잖아요? 도구적으로 하나님을 이용하잖아요? 하나님을요, 내 자식들 잘 되기 위해서, 내 남편 사업을 위해서, 내 건강을 위해서 하나님께 어떻게 구해서 뭘 하려고 하는 이건 제가 보기에는 그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닌데, 하나님께 우리의 구체적인 어려운 사정들을 아뢰고 그 분의 도움을 청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전적으로 자기를 의존하듯이 하나님에게 자기 운명을 완전히 맡기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자연발생적인, 그리고 귀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게 되니까 문제인겁니다. 모든 것들을, 그러니까 이런 거죠. 이 사회에서 복지를 이런 것들을 현상시켜 주는 것처럼 하나님을 통해서도 나의 복지의 차원, 이런 것들을 풍성하게 만들어 가려고 한다면 이건 영혼으로 하나님을 찾는 게 아닌 겁니다. 결코 그것은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악 순환이예요. 계속해서 또 그런 걸 요구하게 되고 그게 충족되면 또 하고요. 그러는 거죠, 간혹 이런 분들도 있더라구요. 산 기도 가는 게 습관이 되 갖고 가끔 가다가 주기적으로 하지 않으면 허전하다거나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건 이제 영혼으로 하나님을 찾는 게 아닌 거지요. 예, 오늘 여기 시편 86편 기자는 영혼의 깊이에서 하나님께 탄원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세 가지로 좀 나눴어요. 전체 주제는 어쨌든 ‘영혼의 탄원’이입니다. 저도 이런 시편기자의 경험을 좀 했으면 좋겠어요. 뭐, 했겠지요. 그런데 더 깊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내 영혼의 깊이에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이렇게 공명이라고 할까, 이런 것이 일어나는 삶이 되어야 되어야 되겠다 하는 거죠. 그게 이제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1절에서 7절입니다. 이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도를 바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반복해서 하고 있어요. 거기 나열했습니다. 1절 2절에서 쭉 나옵니다. 특이한 구절들이예요. 한 두 번 간구한 것이 아니라 반복하고 있어요.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종을 구원하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쭉 그렇게 반복해서 간구하고 마지막으로 주님의 응답을 기대하는 거죠. 그러리라, 그렇다 그렇게 인정을 합니다. 7절은 이렇습니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예, 이 사람이 어떤 형편인가 하는 것은 1절에 나와 있어요. 가난하고 궁핍한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간구했겠지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시편기자가 물질적인 가난, 물질적인 궁핍일까요?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팔복에 나와 있는 그런 고난, 가난 시련, 우는 것 그런 것일까요? 뭐 그럴 수도 있겠죠, 어떤 건지는 우리가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난과 궁핍 그런 것들이 하나의 기도하는 동기가 되었겠지만,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계기 되었겠지만, 그러나 사람은 앞서 비슷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것이 해결되는 것, 그러니까 궁핍과 가난이 해결되는 것만으로 영적인 만족은 아주 불가능 한겁니다. 어쩌면 정 반대일 수 있어요. 반대의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가난과 궁핍이 해결 될수록 우리는 더 영적으로 불안한 거죠, 그런데 그게 참 이상하죠? 뭐만 되면 우리가 정말 영적으로 참 평화로울 것 같은데 그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도 인간이 영적인 동물이다, 그걸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걸 여러분들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은 들어서 알지요. 우리 신앙도 영적으로 안다고 하지만 영적으로 신앙생활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는 질문하면 이건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늘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아요, 우리가 이렇게 몸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계속해서 여러 가지 한계들을 가지고 있고요. 등등.. 아주 복잡합니다.

 

그러니까 숨이 붙어 있는 한 우리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절대적인 안식은 불가능합니다. 죽어야만 영원한 안식에 들어 갈 수 있는데요, 그러나 영적으로 깊이가 있는 사람들은 죽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영적인 평화, 안식을 당겨서 살아 있는 동안에 누리며 살 수 있는 거죠, 예, 이 사람은 영혼을 보존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난하고 궁핍한 것만이 문제는 아닌 거예요. 그런 게 좀 불편하긴 불편한데, 가난하고 궁핍한 게 불편하지만 그것만 갖고 영혼이, 우리의 가장 심층적인 차원의 생명의 능력이 만족할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 이 사람은 가난과 궁핍이라고 하는 기도의 조건이라고 하는 것을 얘기하지만, 영혼에 대해서 기도하고 있는 거지요. 이게 가장 궁극적인 기도입니다. 그 차원을 여러분들이 빨리 인식하셔야 뭘 기도해야 되는지, 그리고 그 이외의 것들로부터 차츰차츰 자유로워지고요. 세상만사 인생무상, 인생허무하다는 차원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각도로 세계를 바라 볼 수 있는 그런 영성이 우리들에게 가능합니다. 우리 영혼을 위한 기도와 간구이지요. 가장 궁극적인 기도입니다. 예, 본인 스스로 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그런 기도를 실제로 드리시나요? 내 영혼을 주님 보호해 달라, 이 영혼은 다른 것으로 보호가 안 되는 거 아시지요? 절대 안 됩니다. 하나님만이 하시는 가장 중심, 가장 핵심, 가장 밑바닥이기 때문예요. 거기에 이제 우리의 삶의 무게가 들어가 있으면 다른 것들이 정말 작아 보이고요, 중요한 게 뭣인지 아시게 되는 거지요. 예, 영혼이 구원 받는 것이야말로 가장 참된 구원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기도라고 하는 겁니다. 구원하면 우리가 죽어서 천당 간다, 자꾸만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는데, 그런 걸 전제하면서 훨씬 더 포괄적이거든요?

 

구원은, 현재 하나님의 나라와 일치, 여러 가지 등등.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 영혼이 건강해지는 것, 풍요로워지는 것, 이게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 대목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혼, 우리가 지금 “영혼의 탄원”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영혼문제를 계속 하고 있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영혼이 뭐냐에 대해서 조금 씩 조금 씩 껍질을 깨갖고 가까이 가는 게 필요합니다. 이게 한꺼번에 아는 게 아니예요. 모든 공부라는 게 그렇습니다. 준비가 되어야, 한 발짝 들어가고, 그게 들어가서 그게 익혀져야 또 한 발짝 들어가거든요? 수학도 처음부터 미분적분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구구단부터 시작해서 처음부터 가야 되는 것처럼 사실, 신앙, 기독교 영성도 그와 같은 거거든요? 그리고 사실 저도 영혼에 대해서 설명할 자신이 없구요. 그냥 부분적인 것만 말씀 드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조금 씩 조금 씩 이런 각도로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체험하면서 점점 넓어지는 거지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이렇게 공부하는 시간도 있어야 하고 좋은 책들을 읽는 게 제일 좋습니다. 예,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혼은 뭐냐, 영육이 구분되는 어떤 것으로만 보지 마시고 영과 육 그런 관계도 있습니다만 미래까지 포함하는 존재 전체를 가리킵니다. 요 단락에서 미래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머리에 두셔야 되요. 죽음 이후까지 말하는, 우리가 지금 미래라고 하지만 몇 년도 몇 일을 계산 할 수 없는 겁니다. 다만 이제 아직까지 끊나지 않은 이 세계에 살기 위해서 이루실 그 때까지 너머 있는, 연결되어 있는 우리의 Identity 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을 가리켜서 영혼이라고 하는 거지요.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영혼의 구원을 하나님께 부탁하고 (?) 오늘 공부의 키워드는 영혼입니다. 여러분들이 나중에라도 내가 과연 영적이냐, 그리고 영혼이 뭐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도움을 드리는 기도를 드리고 두 번째는 8절에서 13절 하나님을 향한 감사 찬양입니다. 하나님에게 영혼을 보존해 달라고 하는 기도를 드리고요, 그 다음에 제의적 형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제의적이라고 하는 좀 낯선 단어를 사용했는데, 예배를 드린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사지낸다, 그런 것들을 신학적으로 제의다, 그렇게 예기하거든요? 예전적이다, 제의적이다. 예배형식을 갖추어서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을 제의적 찬양, 제의적 기도라고 얘기 합니다. 그 8절에서 13절까지는 구약학자들이 연구한 거거든요? 그리고 사실 보면 그렇게 나타납니다. 제의적인 형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도움을 구하는 대상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대한 신앙고백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중요한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중요한 문장들이지요. 8절에 보면 주와 같은 자가 없다, 주와 같은 자가 없다, 주의 행하신 같은 일도 없다. 아예 비교대상이 안 된다, 주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아도나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적인 이름이 여럿이 있습니다. 아도나이, 엘로힘 야훼 등등..사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여럿 나옵니다마는 하나님의 이름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필요에 의해서 그런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 뿐이죠. 그래서 그 주 이름, 아도나이거든요? 그러니까 주인이다 그런 뜻이죠. 그 이름을 붙인다고 하는 것이 이미 형상화 하는 거기 때문에요, 범주화, 개념화 하는 거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허락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모세가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누구냐고 물어 봤을 때 이름을 말하지 않잖아요? 스스로 있는 자다, 앞으로 있게 될 자다, 내용으로 따지면 그렇습니다. 나는 앞으로 있게 될 그다, 그러한 뜻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최초로 하나님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진술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한 하나님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자꾸만 하면서 이게 중요해요. 어떤 분이다. 전지전능, 사랑, 하면서 또 허물어 내려야 합니다. 해체해야 됩니다. 사랑이라고 해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듯이 그런 사랑을 생각하면 그것도 한계가 있는 거거든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어떻게 측량 할 수 없는 거예요. 우리는 사람이 하는 것처럼 우리 편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곤란한 거지요. 그러나 그런 개념들은 우리가 공부할 때 전혀 필요한 거기 때문에 하고 잊어버리는 게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쉽지는 않지요. 예, 주는 우리 민족을 창조하신 분이고, 놀라운 구절이지요? 9절에 보면,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만 만드신 게 아니라 모든 민족 이예요. 그래서 모든 민족이 주 앞에서 경배하고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린다, 이 구절에서도 모든 이방 민족들이 다 유대 예루살렘에 와서 제사를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을 얘기하느냐, 아니면 각기 자기의 방식으로 그 민족이 절대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는 가능성을 얘기하느냐, 하는 것은 좀 생각해 봐야 될 부분입니다. 오늘 거기까지 나갈 필요가 없는 건데요, 그래도 여러분들이 생각을 많이 하시기 때문에 한 마디만 보태면 불교신자들이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여러분들이 어떻게 보셔야 될까요? 지옥갈 이상한 사람들로 생각해야 될까요? 그들이 예수그리스도라는 명칭은 아니지만, 창조자 하나님을 그런 방식으로 인식하고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쪽으로 좀 생각을 열면 어떻게 될까요? 예, 그 사람들도 다 하나님이 창조한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이 창조한 게 분명하잖아요? 다만 교회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는 그런 이유로 그 사람들을 하나님의 구원 영역에서 밀어내는 것이 과연 그게 성서와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와 사랑의 세계인가, 생각을 많이 해 봐야 된다고 봅니다. 지나가면서 하는 얘기니까 너무 마음을 두지 마시고요,

 

예, 주만이 하나님만이라고 찬양한 10절요. 그렇게 쭉 찬양을 이야기 하죠? 13절도 결론적으로 그 주님은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건지셨다고 얘기합니다. 참 중요한 말이네요. 내 영혼을, 스올은 구약성서에서 나오는 단어로 죽은 사람들이 가는 모든 곳입니다. 게헨나라고도 부르고요, 보통 음부라고 얘기하는 그런 곳이거든요? 구약성서에는 아직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죽음은 다 저주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사후세계에 대해서 명확하지가 않았습니다. 그거는 묵시문학이라고, 묵시 사상요. 바벨론 포로 이후부터 유대인들에게 들어온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약간 희망을 얘기하는 신앙이었거든요? 그런 게 들어오면서 이제 죽음 이후에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고요, 그런 것들이 예수님과 기독교 공동체에서 분명하게 자리를 잡아서 하나님 나라로 깊이를 갖추게 되었지요. 스올이라고 하는 곳은 죽은 사람이 가야 되는 곳, 예, 여기서는 시편기자가 하는 이야기를 설명을 하면 그와 같습니다. 죽음에서 건지셨다고 하는 뜻이죠, 내 영혼을 스올에서 건진다고 하는 것은 죽음에서 건졌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영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미래까지 연결된 어떤 존재전체라고 얘기했어요. 요 대목에서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거지요. 영혼은 죽음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는 생명의 핵심이다, 죽음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는 것,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도 그런 게 있어요. 세상의 악한 영들이 우리 몸을 죽일 수는 있지만 영혼을 죽이지는 못한다, 이 몸이라고 하는 단어도 헬라어로 사르크스(σαξς)라고 하는 것도 있고요, 소마(σώμα)가 있어요. 생물학적인 육체덩어리 그런 것을 말할 때는 사르크스라는 단어를 쓰고, 그러나 영혼과의 관계에서의 몸을 이야기 할 때는 소마라고 해요. 우리 몸을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을 죽일 수 있다는 말씀이 있구요. 그러니까 영혼의 어떤 특성이 거기서 나타나게 되는 거지요. 우리 몸이 다 죽으면 흙이 되는 거지요. 그러나 죽음으로부터 건짐을 받을 수 있는 우리 생명의 구성요소 그걸 영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영혼이 살아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역동적이라고 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14절에서 17절입니다. “영혼의 짐”이런 소제목 이예요. 예, 하나님에게 간구 했구요. 하나님을 찬양했고 그것으로 사실은 영혼의 탄원기도는 다 끝나도 됩니다.

 

그러나 시편기자에게 하나 남아 있는 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자기 옆에서 자기를 힘들게 하는 악한 무리들, 교만한 자들, 포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게 두려운 거예요. 실제적으로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고 한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어려움 앞에서는 굉장히 두려워집니다. 여러분들, 지금 당장 위나 장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암이라고, 3개월 6개월 시한부 진단이 났다고 했을 때 두렵지 않겠습니까, 사업하다 망할 수도 있고 말이지요. 실제적인 삶의 짐들은 큽니다.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옆에 있을 수 있고요,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이 있고, 등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교만하고 포악한 자들이 주는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다고 해서 쉽게 넘어 갈수는 없습니다. 이 시편기자도 그러한 무거운 짐이 있는 거죠, 그게 사람일 수도 있고 물질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요? 여러분들이 이것을 완전히 넘어서서 살겠다, 그거는 안 되는 거니까,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그냥 안고 살아야 되요. 죽을 때까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교만하고 포악한 자들이 누구냐, 조폭 행포를 부리는 사람들만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어떤 교묘한 힘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오늘 이 본문에 따르면 이 교만하고 포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외면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시편기자 옆에서 힘들게 하는 거예요. 무엇을 힘들게 하는지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합니다. 그게 너무 힘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자라고 하는 확신이 있고, 감사 찬양 드리고 기도하는데도 여전히 그 문제 가지고 하나님에게 또 기도를 드리게 되는 거거든요? 얼마나 힘든 거였을까요? 이렇게 봐야 됩니다. 물질적으로 나에게 손해를 입혔다든지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태도, 관계, 그들의 조소, 그들의 경멸, 그런 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마저 흔들릴 수 있는 상태 말입니다. 그런 것 있거든요? 시편 다른 데도 그런 거 많이 있습니다. 하도 하나님 잘 믿는다고 하는데 네 꼴을 봐라 그러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런 비방 같은 것들을 시편기자들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 그 앞에서 아니라고 얘기하지만 속으로 하나님이 능력이 없는 분 아닌가, 죽으신 게 아닌가 그런 식으로 이 신앙이 정말 헛것 아닌가 이런 유혹을 받을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이게 두려운 거예요. 시편기자는 옆에 여러 가지 물질적인 유혹이라든지, 이런 저런 사람에 대한 압박감이라든지, 그리고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이 외면하는 사람들의 태도, 이런 것 때문에 그런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거죠. 여러분들 주위에 그런 힘이나 어떤 것들이 있다면, 잘 이겨나가시길 바라구요. 그렇지 않다면,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계속, 여러분이 아니라도 여러분 주변에 그런 분들이 많이 있으니까 혹시 이렇게 이야기를 들을 때 좋은 방향으로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이 비록 그런 회의에 빠질 때도 있지만, 잠깐 생각나는데,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마저 십자가상에서 이런 회의 비슷한 얘기 나오잖아요. 왜 나를 버리십니까, 라고 하는, 예수님도 그런 정도였으니 우리가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은 하나님이 계시냐 아니냐 하나님이 나를 버리냐 이런 것은 대단히 엄중한 사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것을 엄중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다 즐겁던지, 아니면 생각이 없는 사람이든지 둘 중에 하나인 거예요. 열광주의자들은 그런 고민이 없습니다. 열광주의자들은 어떤 사태의 깊이로 들어 간게 아니라 자기감정에 도취하는 거거든요? 믿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만 보장만 되면 되기 때문에 그런 고민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왜 나를 버리십니까, 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그 만큼 더 사태의 깊이 속으로 들어 가셨다고 하는 거지요. 예, 시편기자는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 이게 중요한 거죠, 비록 흔들려도 다시 제자리를 잡는 거죠. 마지막으로 은혜의 표적을 좀 보여 달라 얘기를 하네요. 은혜의 표적, 그 표적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우습게 생각하지 않도록 그들이 오히려 부끄러워 할 수 있도록 표적을 달라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 그 표적이 뭘까요? 뭘까요? 대답은 뭐 굳이 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본때 있게 잘 돼서 세상 사람들이 정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잘 되는 구나, 그런 게 표적일까요? 그렇게 되면 코메디 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고 신앙하고 연관시킬 필요도 없고요. 그래도 가능하면 신자들이 다 편안하게 사는 게 좋다고 저도 생각됩니다. 우리 교회 신자들도 가능한데로 어렵지 않게 사는 게, 그래야 되겠지요. 그러나 비록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걸 신앙하고 직접 연관시킬 필요는 없어요. 제가 보기에는 가장 큰 표적은 그런 시련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것 은혜를 잃지 않는 것, 그거죠, 저는 여기 바울이 얘기한 세 가지, 형식적인 것이지만 제시했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 이것을 잃지 않고 주변에서 어떤 조소, 예를 들어 비웃음, 기고만장 앞에서도 이것을 유지 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표적이 없겠지요. 예, 우리는 ‘영혼의 탄원’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86편을 공부했습니다. 아주 오래전 유대의 한 영성가가 기록한 기도문입니다. 제가 충분하게 다 해석하지는 못했지만, 부분적인 것이라도 여러분들이 도움이 되었으면 바라고요, 집에 가서 더 읽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읽을 때마다 이런 영성의 깊이에 참 놀랍다, 나 자신도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용기도 나고요, 그렇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공부하고 잠시 차 한 잔 마신 다음에 질문응답하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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