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7편 강해-나의 모든 근원

 

시편 87편입니다. 아주 짧은 시편이에요. 7절까지 밖에 없군요. 우리 같은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고라 자손의 시 곧 노래〛

1.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2.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3.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셀라)

4.나는 라합과 바벨론이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것들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5.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6.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

7.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아멘! 아주 짧은 구절입니다. 그렇다면 내용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고요. 단순명료하리라고 예상이 되지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좀 복잡해요. 그리고 조금 두서가 없다, 그렇게 얘기 할 수 있습니다. 짧은 구절인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좀 산만하게 그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1절에서 3절까지는 하나님의 터전, 성산, 하나님의 성,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죠, 예루살렘을 이야기 하겠지요?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 산, 예루살렘 성전, 하여튼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그 도시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그것에 대해서 1절에서 3절까지 이야기 하고 있어요. 그럼 뒤로도 계속 그런 걸 얘기했으면 좋은데, 그 주제가 좀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4절과 5절 전 반절에는 각 민족의 출생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4절과 5절이요, 라합, 바벨론, 블레셋, 두루 여러 이방민족들이 거기서 태어나서 살고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게 지금 1절에서 3절에서 말하고 있는 예루살렘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좀 멀리 연관이 되기도 하고 좀 그렇지 않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 6절에 보면 그냥 이해하기 힘든 표현이 나와요. 하나님이 민족들을 숫자로 센다고요, 사람들을 숫자로 센다고 해요, 그게 뭘까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얘기하고 있습니다. 6절에 있는 이야기예요. 예, 이런 것들을 그냥 큐티 식으로 이해를 해서 하나님은 믿는 자를 세신다, 그 숫자 안에 들어와야 된다든지, 등등..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따라 가는 것은 좀 아전인수의 위험성이 있죠, 우리가 모르는 것은 그냥 우리가 모르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게 좋습니다. 자칫하면 그런 걸 우리가 억지로 해석하려다가 보통 알레고리로 해석을 많이 하거든요? 예, 거기에 나와 있는 동물의 형상, 숫자 이런 것을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거처럼 이야기 하는 것은 좀 문제가 많이 있게 됩니다. 우리 한국 신자들은 그런 것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 좋아한다면서요? 그래서 어떤 성경공부는 구약과 신약을 짝 맞춰서 하는 거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건 사이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되지 않는 이야기를 자꾸만 엮어서 이야기 하려고 하거든요? 구약과 신약은 전혀 다른 상황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게 몇 가지 숫자들을 중심으로 맞추는 것은 곤란한데요, 실제 신천지에서 그런 거 많이 하지 않습니까? 성경을 자꾸 호기심 천국 비슷하게 따라가면 좀 곤란합니다. 그런데 그게 좀 어렵기는 합니다. 고대 중세기까지 아니면 종교개혁까지도 알레고리 해석이 정통기독교 안에서도 많이 있었습니다. 예, 은유라고 하는 건데요? 예, 그것은 더 이상 나가지 말죠, 좀 복잡한 이야기라서요. 그러니까 이게 정통교회 교부들을 중심으로 해서 쭉 내려온 그런 교회들, 신학자들도 시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성경을 잘 못 이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당시 교부들보다 지금 우리가 더 성경을 바르게 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수 천년동안 많은 신학자들이 성경본문을 잘 해석해 주고 있기 때문에 잘 아는 거죠, 그러니까 그것을 좀 이렇게도 설명하고 넘어가야 되겠군요. 물리학도 보면 헬라의 여러 물리철학자들, 과학자들, 피타고라스 같은 수학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보다 지금 우리가 지금 세계를 더 잘 알잖아요, 이것은 물리학 세계가 뉴턴을 거쳐서 양자역학 뒤로 쭉 오면서 세계가 뭐냐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과거에 있었던 위대한 학자들, 철학자들, 물리학자들, 신학자들 그런 사람들보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서 좀 더 많이 알기는 아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더 뛰어난 건 아니예요. 그 당시에 위대했던 사람들은 최선이었어요. 지금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 그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도 모든 것이 아니고요, 이 모든 것을 아는 게 아니고요, 앞으로 2000년 3000년후의 우리 후손들은 이 세계를 더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게 될 겁니다. 그 때의 관점을 물어보면 오늘 좀 유치하게 세계를 이해하는 거라고 할 수 있죠, 절대적인 인식, 그런 것들은 역사 안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좀 옆으로 나가는 이야기였어요. 예, 6절, 수를 센다고 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 전체적인 맥락에서 맞아 떨어지지 않는데 나온다고 하는 말씀을 드린 거고 이걸 억지로 은혜롭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그 뜻입니다. 7절이 결론적인 말씀인 것 같은데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이렇게 제가 몇 가지로 구분했는데, 이게 자연스럽게 연관되는 건 아니예요. 각각 서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색하게 연결되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경은 다 필사된 거거든요? 누가 배껴 쓴 겁니다. 그 필사의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 이건 아주 전문적인 문제니까 그런가보다 그런 정도만 하고 넘어가십시오. 둘 째는 우리가 보기에 지금 이게 어색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우리가 이걸 전제해 놓고 오늘은 1절에서 7절까지 있는 전체를 따라가기 보다는 결론으로 나와 있는 7절을 중심으로 공부하겠습니다. 그래서 제목도 7절에 따른 거예요. "나의 모든 근원", 그대로 나와 있는 거죠, "나의 모든 근원" 그걸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다른 제목을 잡는다면 ‘생명의 근원’이 좋겠어요. 아니면 ‘궁극적인 현실성’ 이게 다 통하는 이야기예요. 이 용어들은 다르죠, 제가 3가지 이야기했어요. 모든 근원, 그리고 생명의 근원, 궁극적 현실성 이런 것들이 다른 용어지만 내용은 똑 같은 겁니다. 폴 틸리히라고 신학자의 말을 빌리면 “궁극적 관심 Ultimate concern” 이라고 얘기하는데요, 그런 것들이 어떤 근원적인 세계를 표현해 보려고 하는 용어들입니다. 이걸 이제 노자와 장자 같은 사람들의 말로 바꾸면 도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제가 자주 성경공부나 그럴 때 설명하는 하이덱거 같은 철학자들의 용어를 빌리면 존재, 그런 용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 근원, 도, 궁극적 현실성 이런 것들이 다 통하는 이야기들입니다. 그 7절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간단한 구절이지만 여기에 많은 신앙의 엑기스들이 녹아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세 단락으로 나눴습니다. 첫 번째는 축제와 신앙입니다.

 

7절이 이렇게 시작을 하죠,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뭘 이야기하는 지는 뒤로 나오고 있습니다. 노래하는 자와 뛰어노는 자라고 했습니다. 지금 87편을 시작한 어떤 영성가 어떤 시인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행해지고 있는 대 축제를 보고 있는 거예요. 그걸 보고 지금 시편을 쓰고 있는 겁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축제가 많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세 가지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많이 들은 이야기지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예수님과 부활과 연관되어 있는 유월절 전날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고요, 그 절기상으로 보면 부활절하고 맞닿아 있습니다. 이거는 유대인들이 출애굽을 한 것에 대한 기억, 회상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유월이라고 하는 자체가 지나갔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뭐가 지나갔을까요? 죽음의 사자가 지나간 거지요. 애굽 혹은 이집트의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끌어 낼 때 벌어졌던 사연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너무나도 잘 아시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오는데 문설주에다가 양의 피를 바른 히브리인들의 집에는 지나가 버렸다고 하는, pass over 유월절을 지키는 거죠. 자기 민족의 해방이었으니까 얼마나 좋은 절기였겠습니까, 유월절이고요. 오순절은 유월절부터 50일 후에요, 순(旬)은 열이라는 뜻이고요. 열이 다섯 번 지나갔다는 뜻입니다. 칠칠절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칠칠이 사십구 해서 그 다음날이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그 용어를 어떻게 붙이냐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데 내용은 똑 같습니다. 오순절은 봄 수확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다음은 초막절인데요, 이거는 가을수확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유월절은 3월말이나 4월 그리고 두 달 쯤 후에 6월쯤에 오순절이 있고, 그 때부터 두 세달 후에 초막절이 있고, 이게 다 농사와 사실은 관계가 있습니다. 유월절이 이제 농사를 준비해야 되잖아요?겨울 철 내내 농사하고 상관없이 살다가 날이 조금씩 따뜻해지는 절기에 농사를 준비도 해야 하고 우리나라에도 전례가 좀 많이 있을 겁니다. 저는 거기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마는 풍악놀이도 하고요, 농사 시작하기 전에 여러 동네 돌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그런 것들을 하지 않습니까, 비슷한 거예요. 그러니까 어느 민족이나 그러한 절기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비슷해요. 뭐하고 연관될까요? 생명하고 연관됩니다. 그 민족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근거들을 찾고 거기에 하나의 축제로 자리를 잡게 되는 거예요.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축제들도 사실은 우리 민족이 살아온 삶의 여정이 다 담겨 있고요, 예,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똑 같습니다. 이 축제는 제가 거기 강의안에 썼습니다마는 생명에 대한 환희를 나눈 거예요. 카니발이라고 하진 않습니까? 보통 카니발하면 너무 놀기 좋아하고요, 또 브라질 같은데 카니발 유명하고요, 세계 몇 대 카니발 이런 게 있다고 하잖습니까? 그래서 문란한 일도 많이 일어나고 하는데 그런 것들이 여러 가지 생명의 풍요로움에 대한 갈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지금이야 우리는 수퍼마켓에서 돈만 주면 얼마든지 먹을 것을 마련하고요, 특히 농사하고는 거리를 두고 살고 있고요, 실제는 돈도 없이 카드만 있으면 해결되기 때문에 고대인들이 느꼈던 생명에 대한 갈망, 이런 것들은 우리가 느끼기 힘듭니다. 우리 청소년들 인터넷 세대에는 더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날씨가 되던지 어떻게 상관없이 그냥 아파트에서 사시사철 모든 게 쾌적한 삶의 조건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게 어쩌면 불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고대인들은 매번 일상이 생존의 위협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아 있다고 하는 사실, 그리고 금년 한해도 다 살았다고 하는 사실에, 우리 가족이, 우리 종족이 버텨낼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쁠지 말이지요. 그리고 새 해가 되면서 한 해를 살아내야 된다고 하는 그 기대, 혹은 소원이 얼마나 강했을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신앙하고 연관 되서 종교적인 축제로 자리를 잡게 됬습니다. 생명에 대한 기쁨, 그리고 그것에 대한 갈급함, 그것을 지켜주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 이런 것들이 유대인들에게 아주 축제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일 년에 세 번 정도는 예루살렘을 방문해야 했습니다. 세 가지 절기에요. 이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예배는 기본적으로 영적인 축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배는 영적인 축제다, 생명의 환희를 노래하는 의식인 거지요. 즉 예배는 생명을 주신 하나님 그리고 생명을 보장하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계시, 혹은 약속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축제지요. 예배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드리는 생명의 축제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예배가 왜곡 될 수 있는데요, 두 가지로 정리를 해 봤습니다. 하나는 예배가 형식주의에 빠지는 거지요. 보통 엄숙주의라고도 할 수 있고요, 우리가 보통 로마 카톨릭 미사를 비판할 때 형식적이다 그렇게 얘기를 하죠? 그러한 습관적인 예배형식에 묶여 있는 것을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예배가 그렇게 많이 드려지는 것 같아요. 예배 집중하기가 힘든 거지요. 제가 다비아에 짧막한 글들을 좀 썼는데요, 몇 년전에, 신학단상 책에도 나왔겠지요? 예배 집중하기라고 하는 건데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영적인 촉수가 예민하게 작동해야만 가능하거든요? 그렇지 않고 똑같은 찬송 맨 날 부르고 형식에 빠져 있으면 예배는 살아 날 수가 없습니다. 형식주의가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예배의 왜곡의 한 가지지요. 두 번째는 그것과 반대되는 거예요. 너무 지나치게 청중들의 심리적인 카타르시스만 목적으로 하는 겁니다. 자극적인 거지요. 굉장히 자극적인 거지요. 이 두 가지가 반대되는 거예요. 형식주의는 좀 정숙주의라고 할까, 엄숙, 정숙 이렇게 정적이라고 한다면 이 카타르시스에 무게를 둔 예배들은 좋은 뜻으로 동적이기도 하고 자극적인 거죠, 지난날에는 우리 한국교회 예배가 형식주의에 많이 빠져 있었는데, 예배와 찬양이라고 할까, 열린 예배라고 할까, 그런 개념들이 들어오면서 두 번째 왜곡들이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 두 번째를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요, 하나는 죄의식을 강조하는 거구요, 제가 이렇게 정리를 하긴 했습니다마는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연관해서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예배에서 늘 그런 것들이 남발되기 때문에 제가 드리는 말씀이에요. 신자들의 어떤 죄의식, 약점 그런 것들을 강조하고 그것이 용서 받았다고 하는 심리적인 일종의 카타르시스라고 할 수 있죠, 또 하나 열광주의거든요? 죄의식하고는 좀 반대인데, 그건 뭐 비슷한 거지요. 이것도 제가 보기에는 심리적인 차원의 예배라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무슨 말씀 드리려고 하는 지 이해하시겠지요? 예배는 영적인 축제라고 하는 것, 축제는 준비가 되지 않으면 참여하지 못하거든요? 혼자 소외 될 수도 있고요, 이 축제를 왜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혼자 들떠서 야단일 수 도 있고요, 이건 생명의 신비로운 작용, 현상에 대한 우리의 영적인 반응을 통해서 얻어 질 수 있는 가장 귀한 신앙의 태도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예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삶 전체가 예배여야 되고요, 그러니까 우리 삶이 매 순간이 축제로 가득해야 되겠다 그런 말씀인 거지요. 오늘 저는 첫 대목에서 노래하는 자들과 뛰어 노는 자들이 뭐라고 노래했다 하는 구절을 근거로 해서 여러분들에게 시편기자가 처 했던 그 당시 대 축제의 상황을 말씀 드렸고, 그것을 근거해서 오늘 우리의 예배와 우리 삶 자체가 예배의 축제로 승화되어야 되겠다 하는 말씀 드린 겁니다. 아마 동의를 하시긴 할 거예요. 그러나 실제적으로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은 좀 더 반성을 해 봐야 되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가능해야 됩니다. 하나님과 일치라고 하는 것은 삶의 충만함인데, 그 보다 더한 축제는 없는 거지요. 이런 것들이 말로만 끝나지 않고 실질적으로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오늘 하양에서 여기 오는데 고속도로로 왔거든요? 자칫하면 국도가 밀릴 수도 있어서요. 경산 톨게이트를 지나오는데 약간 진눈깨비 같은 것이 날리더라구요. 길 경계에 작은 나무들이 있는데 그 위에 흰 눈이 쌓여 있고요. 참 그림같이 아름다운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대구시내에 들어와서 신호가 들어와서 잠깐 대기하고 있을 때 보니까 가로등 밑으로만 빗방울이 보이고요, 그게 막 날리잖아요? 우주에서 이 지구밖에 없는 그러한 자연현상인데 얼마나 놀랍고 황홀한 장면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옆에 있는 집사람한테 이야기 했어요. 다이아몬드나 이런 건 없어도 우리가 살지만 지금 차 창문을 두드리는 빗물 이것이 없으면 인간의 생명이 안 된다, 그러니까 이게 보석이다, 더 중요한 거다라는 사실을 얘기했거든요? 우리가 그런 시각으로 이 세계를 생명 중심으로 바라봐야 되지 않냐 하는 거지요. 이것이 신앙하고 연관 되면 더 풍요로와 질 수가 있겠지요.

 

그 다음 대목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여기 축제에 들어온 사람들의 노래가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고 노래합니다. 네게 있다고 하는 건 이게 하나님인데요. 이건 번역이 약간 안 된 것 같습니다. 물론 인칭대명사 ‘너’가 나와 읽기는 했습니다마는 조금 전반적으로 자연스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축제 참여하는 사람들이 찬양을 부른 거죠. 나의 우리의 모든 근원이 당신에게 있습니다. 노래하는 거죠. 이 근원이라고 하는 것이 뭘까요? 이 근원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뭐 그래야 되겠지요. 다른 해석의 여지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근원이다, 우리 근원이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 고 우리가 많이 들었고 많이 했고, 그러나 믿고 살고 있습니다. 이제 그러한 인식과 믿음이 현실적인 것으로 자리 잡으려면 근원에 대한 여러 층, 다층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을 더 생각해 보십시오. 이 부분만이 아니라 다른 거하고도 연관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다 이런 말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도 구원자, 구원이 뭐냐에 대한 다층적인 이해가 거기에 따라 줘야지 그런 것 없이 문장만 외우고 말게 된다면, 그런 게 틀린 이야기가 아닌데, 초등하교 일이학년 아이들이 어머니 아버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그것만 맨 날 외우는 거하고 똑 같은 거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문학이라고 하는 그런 세계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고전이라든가, 수필 그런 것들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읽어가야 언어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세계를 이해하는 것처럼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인거에요. 예, 근원이 도대체 뭐냐를 이걸 여러 차원에서 우리가 많이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근원이 뭔지 이 세상에서 하나로 딱 끊어서 이거다 확인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직접적으로 볼 수 없듯이, 이건 여러분이 알고 계시죠? 하나님을 직접 만난 사람은 없습니다. 만날 수가 없는 거죠, 하나님을 직접 본 자는 죽는 거죠, 죽어야만 하나님과의 대면이 가능한 거죠. 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생명의 체계 속에 들어온 상태에서는 시간과 존재의 공간을 넘어 서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직면, 직접적으로 경험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성서나 다른 것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이해를 하는 거죠, 예, 근원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 이건 뭐 어려운 문제도 아닙니다. 그냥 쉽게 이야기 할까요? 이 컵이 있어요. 종이컵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의 근원이 뭘까요? 나무요? 나무도 어디서부터 왔잖아요? 나무가 근원은 아니고 또 가야 되잖아요? 나무는 뭐 탄소동화작용 했기 때문에 태양빛하고 물, 탄소가 근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세 가지가 결합되어 있는데 이것도 마지막 근원은 아닙니다. 태양도 지금 얼마나 됬어요. 45억년이 됬나? 그 정도입니다. 그 이전엔 없었어요. 그리고 앞으로 45억년 있으면 태양도 없어지거든요? 아, 그러나 다른 별들은 계속 왔다 갔다 하고요. 그러니까 궁극적인 근원은 아닌 겁니다.

 

예, 그러니까 그게 까마득한 거지요. 그거는 우리가 손으로 잡아 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앞에 보이는 이런 사물들의 근원도 우리가 알 수 없는데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얘기 한다면 그런 점에서 더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제가 거기 강의안에 썼어요. 일시적으로 존재 했다가 사라지는 것들을 참된 근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일단 말하자면 이 근원, 뿌리가 다른 것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있는, 다른 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 플라톤식으로 굳이 이야기하면 이데아라고 할 수 있어요. 예, 모든 것이 거기로부터 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근원은 종말에 나타나게 됩니다. 예, 그 근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쉽사리 이거다 저거다 말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거죠. 그럼 종말에 살기 전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느냐 그러면 그냥 마냥 모르니까 그냥 모른다, 막연하게 생각하고 사는 것이 바른 것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어떤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거든요? 그걸 계시라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시는 거거든요? 이런 하나님의 자기 알리심, 자기노출, 자기 드러내심, 이런 것에 우리가 영적인 민감성을 갖고 대해야 되겠지요. 그렇게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야 되겠지요. 그런데 그게 뭐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잘 못된 것을 계시라고 착각 할 수도 있는데요. 그러니까 아까 제가 말씀 드렸나 모르겠지만, 우리가 노력을 해서 궁극적인 것을 인식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신다고 하는 전제하에서 우리가 그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이해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된다고 거기까지 말씀을 드린거에요.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작업이냐, 기도를 해야 되는거냐,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려면 기도해야지, 그런 걸까요? 아니면 성서가 바로 하나님의 계시니까 성경공부를 잘 해야 되는 걸까요? 아니면 지금도 하나님이 여기저기 역사하시니까 이 세계를 잘 보고 하나님의 정의로움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것을 내가 곰곰이 이해하고 따라서 살아야 되는거냐 뭐, 등등..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요. 한 두 가지만 끊어서 오늘 바른 우리의 삶의 자세라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다 전체적으로 포함 할 수 있겠지요. 예, 많은 작업들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여성분들이시니까 가정살림을 잘 하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도 있을 거구요, 그건 뭐 각자 처한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한 가지라고 말하기엔 곤란합니다.

 

그러나 핵심적으로는 각각 좀 다른 점들이 있지만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있는 거지요. 뭘까요? 모두에게 공통으로 중요한 것, 하나는 교회생활이죠, 예배, 교회가 예배공동체니까 예배가 중요한 겁니다.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특별히 중요합니다. 사이버교회는 이거는 온전한 교회가 되지 않으니까요. 첫째 만나서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훈련, 혹은 참여가 아주 중요한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한 태도로서 초보적이기도 하고 본질적으로 중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예배드리지 않고 혼자서 성경보고 찬송 부르겠다 그거는 조금 예배적인 차원에서 보면 바른 게 아닙니다. 예, 오늘 예배 자체에 대해서 말씀 드린 것은 아니고요, 예배 공동체인 교회생활을 하는 것은 종말에 자기를 드러내실 하나님이 오늘 현재 우리들에게 알리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중요한 태도다, 라고 할 수 있지요. 그 다음에 또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그리고 뭐 그 다음에 점진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성경공부도 물론 필요한 거구요. 신학적인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기독교 교리를 좀 더 깊이 알고 하는 것, 그리고 일반 소설이나 영화나 예술작품을 통해서 인간 삶을 이해하는 것을 통틀어서 하나님의 구원역사예요. 현재 대구성서아카데미에서는 그것을 인문학적 성서읽기라고 하거든요? 그런 관점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나 뭐, 몇몇 경건생활도 당연히 포함시켜서 말씀 드리는 거예요. 예, 이 사람들이 축제에서 부른 노래였습니다. 모든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다. 그 이외의 것들은 근원이 아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는 사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는 어떤 이스라엘 민족중심적인 하나님 이해가 나와요. 하나님 표상, 이런 것들이 있어요. 모든 이방 백성들은 다 멸망시키고 이스라엘만이 중심이 된다,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구약성서에는 그것만이 아니라 그걸 넘어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에 그러한 부분들이 있는 거죠, 4절에 여러 명칭들이 나오잖아요? 라합, 라합은 이집트입니다. 라합, 바벨론, 블레셋, 두로, 구스 등등이 나오고 있습니다. 구스는 이디오피아에 대한 다른 말이예요. 이들이 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편기자의 머릿속에는 이 대축제를 열고 있는 장면이 들어 있는 거예요. 이런 유대인들 3대 절기에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의 많은 사람들도 여기 이 축제에 참여했습니다. 순례를 왔어요.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어요. 아프리카에서도 오고, 여기 지금 나온 지명처럼 여러 곳에서 왔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색깔이 좀 검은 사람들, 또 바벨론 쪽의 사람들, 등등. 여러 지역에서 왔습니다. 그런 걸 머리에 두고 온 민족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지금 그러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역시 세계의 중심이 되려고 하는 말이구나, 그렇게 이해하시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여기 시편기자는 그러한 차원보다도 이 구절 말고 다른 데에서는 이스라엘이 주인공으로 얘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거보다도 온 세계에 주님이 바로 하나님이다 그걸 이야기 하려고 하는 거지요.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주의라기보다도 보편주의가 여기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특수성, 자기들의 민족주의와 그리고 세계 전체를 보는 보편성 이런 것들이 구약성서 안에서 각각 나오고 있습니다. 충돌할 때도 있고 서로 연결할 때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이건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기들 민족의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었어요. 그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이방민족들이 분명히 보였겠지요. 저 사람들 어떻게 될거냐고 하는 그런 궁금증이 없었겠습니까, 당연히요. 그 사람들 모두다 하나님에게서 멀어 진다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타종교 그리고 우리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 조상들 이런 사람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어야 될 것인가에 대한 그런 궁금증을 갖고 있는 거처럼 그 당시 유대인들도 그런 이방민족들에게서 그런 문제의식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때는 이렇게 생각이 드는 거죠. 아, 이방민족은 우리 신앙을 자꾸 괴롭히니까 저건 심판 받아야 돼. 저건 저주 받아야 돼. 이런 생각이 있는 사람들도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 모든 세계의 주인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창조자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왜 그들을 버리시겠느냐, 그러한 생각들이 왜 없겠어요. 여러 가지들이 성서 안에서 이렇게 저렇게 연결 되어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구절만 가지고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어떻게 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독단에 빠질 염려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긴장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긴장이 있는 거지요. 하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의 독보적인 탁월성, 우월성 단어가 정확하지 않는데요, 그것의 어떤 신앙적인 배타성, 좋은 뜻으로 배타성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구원자라고 하는 그러한 신앙과 아울러서, 밖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구원의 가능성들, 두 가지가 긴장 가운데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의 결론은 우리가 지금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종말에 가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거예요. 예,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결론적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강의안에 마지막 대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근원이다. 오늘 제목이 “나의 모든 근원”이라고 얘기했고요. 그것의 실제적인 의미는 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이고요, 궁극적인 현실이라고 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 이런 문제를 좀 생각하다 보면 아, 그럼 우리의 일상이라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 다 지나가 버리고 의미가 없는 것 아니냐 그것도 조금 회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이 두 가지도 아까 제가 표현한 긴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사실은 다 없어집니다. 아무리 붙들고 있으려고 해봐야 붙들 수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다, 우리 몸까지도 그렇구요. 그 어느 하나도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좀 허무하기도 하지요. 결국은 하나님이 궁극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 안에서만 의미가 있는 건데요, 그래서 우리 일상이 소소하고 지나가 버리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의 궁극적인 생명이 어떻게 들어와 있는지를 아는 것, 그게 필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우리 일상적인 삶은 우스운 거예요. 아무리 붙들고 있으려고 해봐야 붙들 수 있는 게 아니구요. 바울은 배설물처럼 여겼다. 그런 표현들이 가능하겠는데요, 그런 한 부분이 있고, 그러나 이 안에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생명이 은폐방식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걸 인식하고 경험 할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예, 오늘 여기까지 공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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