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0편 강해-무상한 삶 앞에서

 

시편 90편 1절부터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우리 같은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천천히 내용을 생각하면서 읽지요.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1.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 으니이다

6.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7.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13.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14.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16.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아멘! 예, 오늘 이 말씀은 아주 유명한 내용이죠. 잘 알려져 있고요. 제가 정확한 구절을 기억을 못하겠는데, 신약성서에도 인용된 그런 내용이 여기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마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동의할 만한 내용은 많이 있지요. 우리의 인생이 마치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 시들어 버리는 거와 비슷하다(6.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라든지 또 10절에 보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이런 구절이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 뭐냐 그런 것들을 아주 일반적인 시각에서 이야기 한 거죠. 그렇게 이해하기 좋은 부분들이 있는 반면에 더 그렇지 않은 부분들도 있습니다. 15절 같은데 보면 이래요.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이거 뭐 투정을 부리는 건지 트집을 잡는 건지 모를 정도의 그런 표현들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이 그냥 겉으로만 읽어서는 우리가 조금 혼란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천천히 보도록 하겠어요. 잘 알려진 내용이예요. 오늘 저도 말씀을 준비를 하면서 고대인들, 까마득한 옛날이요. 최소한도 2500, 3000년 전 사람들이 이렇게 인간의 삶을 정확하게 뚫어 보았다고 하는 것이 참 놀라웠습니다. 이 성서기자들이요. 하나님만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영광, 찬양, 구원 이런 거 이야기 하니까 대단히 관념적인 걸 이야기 하는 것 같죠,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을 굉장히 현실적으로 보는 거에요. 여러분, 이렇게 성서는 비현실적인 게 아니라 굉장히 현실적인 겁니다. 그러니까 리얼한 거에요. 보통 리얼리즘이라고 하지요? 문학이나 연극, 드라마 같은 데서도 거기에는 리얼리즘이 바탕에 된 예술작품이다 그런 말을 하는 것 처럼요. 거기에는 실제적인 삶의 내용들이 그대로 녹아있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성서도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리얼리즘이 명백한 거죠, 다만 이제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그 리얼하다고 하는 것 사실적이고 현실적이라고 하는 것의 차원이 좀 다른 거에요.

 

그걸 여러분들이 빨리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도대체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것, 현실주의 현실성 이런 것들이 차원이 다른 게 뭐 있냐, 똑같지 않냐, 그걸 갖다가 왜 차원이 다르다고 얘기 하냐, 그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어떻게 설명해드릴까요? 설명이 필요할까요? 여러분들이 이미 다 알고 계실 텐데요.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아주 어린아이들은 어머니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냥 맨 날 놀아 주는 것, 혹은 용돈 주는 것 뭐 그런 것으로 현실성을 찾습니다. 그건 어린아이들이 보는 가족 안에서의 현실의 차원입니다. 그러나 크면 사춘기 지나고 철이 나면 부모하고 그런 관계 안 하거든요? 독립적이거든요, 독립적이면서도 가족의 연대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의 가족이 이런 점에서는 조금 약간 미성숙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빨리 자녀들이 성숙해야 되는데요, 독립해야 되는데 우리는 대대로 그러한 전통이 있어서 어쩔 수 없습니다만, 유럽이나 다른 나라의 개인주의를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어떤 형태의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각 사람들의 구성 멤버들이 정신적으로 독립적으로 되어야 된다는 것은 중요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어른이 된다면 가족 안에서의 현실성을 다르게 찾는다는 겁니다. 현실성의 차원이 다르다고 하는 것 이해하시겠죠? 세상을 보는 현실에 대한 시각도 다른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 구원, 하나님 나라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현실적인 거에요. 다만 세상 사람들하고는 다른 차원에서 현실적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요. 그걸 잘 여러분들이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현실적이다, 성서기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렇다, 얘기입니다. 신구약 막론하고 성서기자들이 보는 삶의 현실은 무상하다고 하는 것, 허무하다고 하는 것, 그리고 죄라고 하는 것 이런 거죠.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 말 많이 하잖습니까, 그게 상당한 경우에는 오해되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옳은 이야기에요. 인간은 그 죄와 깊숙하게 결탁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리얼리티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죄를 인간이 나이브하게 생각하면 인간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런 인간의 삶의 현실이 있잖아요, 그걸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죠, 우리도 삶이 허무하잖아요, 그리고 영원한 게 없잖아요. 무상 하다고 하는 것은 늘 변하지 않고 있지 않다, 늘 여상하지 않다 그런 뜻입니다. 그걸 우리가 실제로 느끼지 않습니까, 성서기자들은 이러한 삶의 현실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명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관계에서 설명 하려면 하나님이 누구냐, 하나님의 속성이 뭐냐 이것을 우리가 더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현실과 대립 되요. 그런 것들이 성서의 구석구석에 배여 있습니다. 그거는 서론 부분에 적어 놓은 그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무상과 달리 영원하다, 그리고 인간의 허무와 달리 참되다, 그리고 인간의 죄와 달리 오히려 죄를 심판하는 분이다, 그런거죠. 그게 대립되지요?

 

제가 이 강의를 준비하면서 딱 떨어지는 단어를 선택하지 못했는데, 대체적으로 그렇게 대립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무상과 하나님의 영원성, 인간의 허무와 하나님의 진실성,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죄의 심판, 이런 대립관계에서 인간의 현실들을 해명하고 있는 거죠. 결국 성서기자들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있는 현실의 문제들을 넘어서는 길은 하나님과 일치에 있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과 일치를 통해서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그러한 허무한 삶도 탄탄한 토대를 가질 수 있는, 그걸 살려 낼 수 있는 겁니다. 예, 그런 걸 전제하고 오늘 시편 90편 기자가 이야기 하고 있는 것들을 뒤 따라 가겠습니다. 제가 서론적으로 한 말씀이 지금 시편기자가 얘기한 전반적인 것하고 다 연관되어 있습니다. 세 문 단으로 나눴어요. 1절에서 17절까지 세 문단으로 나눴어요. 첫 번째는 1절에서 6절입니다. 여기서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의 무상성을 날카롭게 대립시킵니다. 1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여, 이건 하나님을 뜻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어떤 때는 주님이라고 얘기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뭐라고 부르지요? 구약성서에서? 여호와라고 부르고 등등.. 그렇습니다. 아마 히브리어로 따지고 들어가면 더 용어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하나님을 어느 관점으로 보느냐, 그런데서 이 용어들이 좀 달라지는 건데요, 하옇든 그것은 더 전문적인 거니까 접어두고 주님이라고 하든지, 주님하면 아도나이 그런 것의 번역일거구요. 여호와, 야훼, 하나님은, 엘로힘의 번역일겁니다. 어쨌든 그것은 하나님을 지칭하는 거니까 그렇게 이해를 하십시오. 그 분이 ‘대대’라고 그랬어요. 우리는 대대로는 못 살잖아요? 잠깐 한 세대, 두 세대 이렇게 사는데, 하나님은 대대에 사시는데요, 사신다기보다도 대대에 모든 것의 근거가 되는 분입니다. 영원하다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 내용을 2절에서 다음과 같이 더 설명합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많이 들었던 이야기죠? 아예 뻔하다 그건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계시고 영원까지 계시다는 그런 얘기 아니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세요. 사실은 하나님이 영원하다고 하시는 것을 인식하기는 힘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유한한 것 안에서 있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것, 유한 한 것만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는 거에요. 그 영원하다고 하는 것은 아예 사실은 인식이 불가능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우주가 150억 광년 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전은 뭘까요? 우리는 그것을 도대체 인식할 수 없고, 처음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 처음 앞은 뭘까, 그리고 마지막 종말이 있다고 하는데, 종말 이후는 뭘까, 이런 것들은 정말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습니다. 아, 우리가 지금 영원이라는 말을 붙일 때는 시간개념 안에 있는 거잖아요? 시간 지금이 2010년이죠? 우리가 2000년 전이면 기원 후 10년 경, 그렇게 우리는 시간을 놓고서 시간이 크다, 작다, 영원하다, 아니다를 얘기하는데요, 시간이 해체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이게 너무 막연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요, 보통 여러분들이 시간여행이라는 말 들어 보셨지요? 빛의 속도로 나가는 비행선을 타고 움직이면 시간을 뛰어 넘을 수 있다는 하는거 아니겠습니까, 미래로도 여행하고 과거로도 여행하고 말이지요. 그래서 스티븐 호킹이라고 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그런 것에 대해서 우주인이 있다, 저렇다 시간여행이 가능하다 그런 얘기들 많이 꺼내서 사람들이 시간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게 되는군요. 그런데 그 분이 얘기하는 것은 새로운 건 아닙니다. 수 십 년 전부터 물리학자들이 다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예, 시간이 완전히 다 허물어진다고 하는 상황이 된다면 우리는 도대체 영원히다 뭐다 그런 것은 이해하기 힘든 거죠,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영원하다고 그러한 말은 우리보다 길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는 거에요. 아예 우리 인식하는 범주를 뛰어 넘는 거예요. 아예, 초월해 계시는 분, 그것을 영원하다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해체되는 때, 우리는 지금 시간 안에 살잖아요, 시간과 공간 안에 살잖아요, 그러니까 시간 너머에 계신 분을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인식하기는 정말 힘든 겁니다.

 

이건 마치 물고기가 사람을 인식하기 힘든 거하고 비슷한 거예요.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못 살잖아요? 그런데 물이라고 하는 그 공간 안에 있는 그것들은 물 밖에 있는 어떠한 세계를 인식하지 못하죠,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자꾸 인간적인 차원으로 끌어 내리면 곤란하다, 하나님이 분노하셨다고 얘기할 때 우리처럼 분노 한다 그런 생각으로 하시면 곤란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가치 판단, 그리고 우리의 인식을 초월하시는 분을 이야기 하는 거죠. 이것에 반해서 인간은 뭐와 같다고 그랬어요? 3절에 보면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돌아가라, 티끌로 그러니까 영원한 것과 상대적인 개념으로 티끌이라고 말한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는 천년이 뭐라고 그랬어요? 4절에 보면, 한 순간이다, 시간이 완전히 다 해체되는 거죠, 그만큼 절대적이고 영원하다고 하는 건데, 인간은 티끌 인거에요. 인간의 삶이 얼마나 무상한 건가 말하고 있는 겁니다. 5절에서 인생을 세 가지 비유로 말합니다. 하나는 홍수에 쓸려가는 어떤 것과 같다, 상상이 가죠, 홍수가 쓸고 내려갈 때 거기서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서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까? 없거든요, 모든 것들이 홍수에 다 휩쓸려 내려갑니다. 우리 사람은 잘 났건 못 났건 건강하건 아니건, 거부건, 평범한 범부건 상관없이 사실은 시간과 더불어서 그냥 큰 강에 홍수가 나서 아무도 버텨내지 못하고 쓸려 내려가는 거와 같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옳은 지적이죠? 두 번째는 잠깐의 잠이다, 낮에 깜빡 조는 거와 같다, 이런 건 동양의 스승들도 많이 얘기 했어요. 인생은 大夢과 같다, 큰 꿈이다, 꿈, 잠깐이라고 하는 거죠, 그리고 실체가 없이 허상이다, 그런 뜻도 좀 있습니다. 대몽이라고 하는 뜻에는,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얘기하는 것은 좀 다른 뜻 이예요. 잠, 꿈, 아주 순간적이다, 얘기하는 거죠, 세 번째 아침에 돋는 풀이다, 저녁에는 어떻게 되요? 말라버리는 거죠,

 

6절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이 그와 같다는 거지요. 이것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요? 예, 아무도 없죠,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들어서 알기도 하고 또 경험적으로도 나이가 들면 압니다. 그래도 그렇게 아는 것 하고 실질적으로 그 세계에 들어가 사는 건 하고는 큰 차이가 있는 거에요. 대게 사람들은 들어도 그냥 그렇다고 하지 그렇게 하고 넘어갑니다. 그걸 그대로 자기 삶의 토대로 삶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영성가죠, 그렇게 되면 보통 도사라고 얘기합니다. 도사, 자기 삶 전체를 한 덩어리로 탁 끌어안고서 사는 사람이죠,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중간 중간에 작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크게 중요하지 않는 거예요. 좀 사기를 당해도 도를 알기 때문에, 인생전체를 알기 때문에 지나갈 수 있는 거지요. 어쨌든 여기 시편기자가 말하는 것은 굉장히 인간 삶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지적이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의 무상성입니다. 두 번째 대목은 7절에서 12절입니다. 인간의 죄입니다. 인간의 삶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꽃과 같이 무상 하다 라는 말을 하다가 느닷없이 죄를 이야기하잖아요? 이게 설명하기가 좀 까다롭긴 합니다. 그런데 좀 하는 데 까지 해 볼께요. 인간의 삶이 무상하게 된 이유는 그거는 죄 때문이라고 하는 거죠, 그 죄는 곧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 옵니다. 아, 하나님이 인간이 잘 못했다고 해서 화 내고 그러냐, 그렇게 생각하시면 이게 좀 곤란한 건데, 그 방식 없으면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걸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분노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도 우리처럼 화내고 뭐, 어떻게 하고 그런 쪽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분노한다고 말 할 수 밖 에 없을 정도로 인간의 악이 이게 굉장히 실질적이다, 심각하다, 그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삶을 9절에서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아시겠지요? 우리가 그렇게 순식간에 지나가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분노라고 하는 거에요. 분노의 결과로 그렇게 됬다고, 아니 먼저는 죄죠, 죄,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분노가 임하게 되고, 그 분노로 인해서 우리의 평생의 삶이 그냥 순식간에 다 지나간다, 우리 평생이 얼마나 빠른지 10절에 보면,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자, 이 시편기자의 문학적인 수사능력이 대단합니다. 10절 다시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그 자랑이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예, 날아가지요, 그런데 그 사실도 모른 체 사람들은 뭔가를 붙잡고 살아가는 거에요. 자기가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자기가 잘 난 것처럼 살아가는 거죠. 이 표현이 좀 거칩니다마는 제가 이런 표현을 통해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생명, 삶을 자기가 생산해 내고 유지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거예요. 그게 죄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죠? 티끌로 가야 되거든요? 티끌로 돌아갈 존재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생명을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피조물이거든요, 구약성서 다른 곳에서도 얘기하고 로마서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와 있듯이 우리는 질그릇이거든요? 그러니까 질그릇이 내가 그릇을 만들겠다, 뭐 스스로 나를 만들었다,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죄 인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죄라는 개념을 조금 더 깊이 있게 이해하셔야 됩니다. 우리는 남의 것을 도둑질했다거나 사기를 쳤다거나 그런 것들을 죄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그거는 죄라기 보다고 죄 결과들입니다. 인간이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그런 행동들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죄는 더 근원적인 거죠, 그거는 자기가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착각, 그게 죄입니다.

 

강의안에 쓴 내용 그대로예요. 티끌로 돌아가라고 한 하나님의 명령을 망각하고 자신이 영원할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곧, 죄다, 그러면 죄 아닌 건 뭐예요? 티끌로 돌아간다고 하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받아 드리는 거죠, 그러니까 인생이 한 순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가 뭔가를 성취하려고 아주 부단히, 부단히 정도가 사생결단하고, 모든 것을 통해서 해 보려고 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 허무 하구나 그걸 느끼는 거예요. 그게 이제 하나님의 분노의 결과다, 그걸 하나님의 분노다,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에게 계속 머물러 있는 삶들을 가리키는 거죠, 예, 사람들은 우리를 포함해서 마찬가지예요, 우리 스스로 우리 인생, 우리 삶을 완성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어느 때는 그런 것 같다고 느끼다가 그러나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아니다, 아니다 자꾸만 그것을 자꾸만 부정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려고 꾸준하게 노력을 합니다. 목사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요? 하나님의 사명이라고 하는 말로 교회부흥, 이런데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거든요? 그런데 사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성장하고 그런 것으로 목사가 영적인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거는 허무한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생명이 가능한 거지, 자기가 뭔가 성취한 것으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보통 자식을 통해서 그런 게 많이 나타나거든요? 부모가 자식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갖는 거야 당연한 거고, 자연의 이치니까 그 자체가 잘 못은 아닌 거예요. 그러나 그 자식을 통해서 자기를 확인하려고 하는 그러한 것들은 결국은 허무한 결과를 낳을 수 밖 에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자식만이 아니라 사업도 그렇고, 여러 가지 학문도 마찬가지고요, 아무리 뉴턴이라든가 호킹과 같은 물리학적인 업적을 낸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우리가 영원한 세계에 참여했다고 하는 그러한 인식과 경험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결국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별거 없다, 내 삶이 허무하다 그런 것을 느끼게 되는 거죠. 그게 하나님의 분노다, 오늘 여기 본문말씀을 통해 보면 그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가 뭐라고 얘기합니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소서 그렇게 12절에 나온 거예요. 우리 날 계수함, 그러니까 우리 인생이 순간이다, 티끌로 돌아간다, 그런 걸 좀 자기가 세면서 살아가도록 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참된 지혜라고 하는 거지요. 세 번째 단락은 13절에서 17절입니다. 간구예요. 첫 단락에서는 하나님의 영원성 앞에서 인간의 무상성을 드러냈고요. 그것을 외면하면서 인간이 스스로 생명을 완성하면서 살아 갈 거라는 착각이 죄라는 것이 나왔고요. 거기서 인생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그런 허무에 빠지게 되는 거죠. 세 번째는 간구하는 거죠, 그러한 우리의 인생에서 일반적인 어떻게 우리가 일반적인 말로 하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 얻는가, 영생 얻는가, 참된 생명을 얻는가에 대한 그런 간구입니다. 시편 기자는 굉장히 솔직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얘기하죠? ‘키리에 엘레이송’ 이라고 하는 라틴어 기도문이 여기에 해당될 겁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 아, 이런 것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비겁하다, 불쌍히 여겨 달라, 스스로 자신 있게 살아가지, 그렇게 비판할 교회 밖의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건 영 딴 나라 이야기입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은 자신감이 없거나 비굴하다거나 노예근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 삶의 현실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가장 진솔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거지요. 그 은총이 아니면, 인생이 한 순간이라고 하는 사실과 티끌로 돌아간다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거예요. 아시겠지요? 우리들도 그런 경험합니다. 자꾸만 망각해요. 왜 망각합니까? 내가 할 일이 많으니까, 그리고 내가 한 일이 많으니까, 하여튼 나를 중심으로 하는 모든 것들이 내 삶을 요동치게 하고 끌어가기 때문에 인생이 한 순간이고, 티끌로 돌아간다고 하는 사실을 그런 것들은 어렴풋해집니다. 기차를 타고, 아니면 기차를 타고 지나가는 순간처럼 점점 멀어지죠,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그것이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좀 알아듣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게 피상적으로만 남아 있지, 아주 실질적으로 우리들에게 이렇게 작용하질 않습니다. 이게 우리 영성의 어떤 나약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시편기자는 그래서 은총을 간구하는 거예요. 그래서 은총이라고 그래서 많은 복을 받는 게 아니예요. 그런 거는 별로 관심도 없어요 성서기자들에게는, 왜냐면 다른 물질적인 이런 복 저런 복 그런 것들은 우리를 오히려 더 번잡스럽게 하기 때문에 그건 영생이나 구원하고 더 오히려 거리가 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한 거거든요? 그런데 은총은 한 순간으로 끝나면 안 되고요. 14절에 나와 있는 그 얘기입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라고 되어 있잖아요? 여기서 아침은 아침밥을 먹듯이 그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매 끼니때 마다 있어야 된다는 그리고 이어서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평생, 우리가 밥을 먹어야 하고, 숨을 내 쉬어야 되듯이 하나님 은총이 함께 해야 된다, 그래야 어떤 걸 망각하지 않을 수 있어요? 우리의 삶이 한 순간이고, 티끌로 돌아간다고 하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는 거지요.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시편기자가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이유가 방금 말씀드린 내용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생은 허무하다, 티끌로 돌아간다, 그래서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예요. 그래서 그런 쪽으로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야, 아, 내가 다 먼지가 되, 이런 것만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을 망각하는 것은 죄인데, 그런 것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체적인 삶의 토대가 여기서 가능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총은 오늘 결론에 해당 되겠는데요? 우리에게 두 가지 차원으로 활동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두 가지 차원으로 활동합니다. 하나는 우리의 삶이 한 순간임을 인식함으로 생명을 자기가 확장해보려고 하는 그러한 욕망, 그러한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고요. 그게 하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무상한 우리의 삶에 확실한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의 양면성이 있는 거예요. 이거는 정말 허무해요. 금방 지나가니까, 모든 것이 없어지니까요. 그러나 이것은 또 중요한 겁니다. 우리의 이 구체적인 삶이요.

 

그래서 17절에 그렇게 얘기 한 거예요.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손이 한 일, 인생살이라고 하는 거요. 이런 것들이 중요한 거지요. 이게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확실한 토대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실존적인 삶이 영원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하는 거지요. 이 긴장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사실은 오늘 우리가 중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편을 우리가 매주 수요일 마다 공부 하고 있는데, 늘 새로워요. 저도 평생 동안 교회 안에서 살고, 나름대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인데, 그래도 읽을 때 마다 이게 새롭습니다. 오늘도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가 많았어요? 우리의 삶은 무상하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고요, 거기서 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길을 쓰면 길을 쓸수록 자기 인생이 허무하다고 하는 것을 더 느끼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이룬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게 연민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이게 놓기가 힘든 거예요. 이게 역설적이죠. 사실은 뭔가를 이루려고 많이 노력하는데, 그게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은총이 임 할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인식하게 되고요. 비록 허무한 모양을 갖고 있지만, 우리가 행하는 우리의 모든 삶들이 그 은총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연결 될 수 있습니다. 이 순간에 영생과의 그러한 영적인 소통이 가능한 거지요. 아, 그걸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봐라, 실제적으로 잘 느껴지지 않는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제가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거는 설명으로 가능한 게 아니고요, 여러분들이 이런 기도생활과 또 말씀, 예배, 또 그리스도인의 친교, 이런 교회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그런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오늘도 우리는 긴 시간 속에서 2010년 5월 5일이라고 하는 이 시점에 이렇게 모여서 공부했습니다. 비록 이 날은 잊혀 질 거예요. 금방가면,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에 기대어 서면 오늘 우리의 이런 공부와 생각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 여기까지 공부를 하고요, 잠시 차 마신 다음에 질문응답 받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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