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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실존주의 신학 (實存主義神學, Existential Theology)

실존주의는 주장하기를 과학적 지식은 다만 일종의 지식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것은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아니다. 사실상 실존에 대한 참된 지식은 매우 인격적이기 때문에 계산하거나 계산기로 측정될 수 없다. 인간은 자기의 지성을 가지고 사는 그만큼 의지와 감정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실존주의자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세 가지 기능을 분리시키는데 반대한다. 실존과 생은 하나이다.

(1) 실존주의 신학의 강조점

실존주의의 “실존”(existence)이란 말은 존재하다. 또는 나서다(stand out)라는 뜻의 라틴어 existere에서 유래했다. 실존주의 신학은 사람들이 생의 시련과 투쟁과 유혹에 휘말려 들어가는 매일의 생활에 관심을 두고 있다. 철학의 한 유령으로서의 실존주의는 샤르트르(Sartre)의 무신론에서부터 마르셀(Marcel)의 가톨릭주의에 이르기까지 내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모든 다양성이 어떤 공통된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ꊱ 경험적인 것을 강조한다.
1654년 11월 23일 월요일에 파스칼(Blaise Pascal)의 생애에는 커다란 전환점이 왔다. 그 때 그는 “철학자와 학자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경험하였는데 확실성있고 지각할 수 있는 기쁨과 평화의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이 훌륭한 지성인은 이성보다 더 심오하고 또 이성적으로는 경험될 수 없는 신앙 경험을 했던 것이다.
이것은 부버(Martin Buber)가 “나와 당신”의 관계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말하고 있는 그런 관계이다. 거기에는 합리적인 생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생애는 합리적인 것 이상이 있다는 것도 거기서 알 수 있다. 인격대 인격의 만남에는 초합리적인 요소가 있다. 이 인격 대 인격의 관계는 인격과 사물들 간의 “나와 그것”의 관계보다는 더 높은 차원에 있다. “나와 당신”의 관계는 남을 나의 “당신”으로 즉 나 자신의 일부로서 관계하고 따라서 남을 단순히 물건 대하듯이 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ꊲ 인격적인 것을 강조한다.
개인과 그 실존을 강조하고 있는 이 신학은 참으로 인격적인 것이다. 이것은 생을 그 합리적 요소로 축소시키는 것에 항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은 과학적 설명으로 측정하고 담아넣을 수 있는 것으로 축소시키는 것에도 항의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20세기 초에 우세했던 과학적 인본주의에 대한 반동이다.
실존주의자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와 같은 생의 기본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둔다. 이 문제들은 우리 세대의 사고를 깊이 지배하고 있다. 그 한가지 결과로서 많은 젊은이들은 이 실존적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추구하는 중에 물질주의 문명의 풍요를 저버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의 의미가 소유의 풍부함에서는 찾아질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믿기를 사물들의 세계는 신빙성 없는 실존으로 인도하는데 반해서 인격적 관계의 세계는 진정한 실존에로 인도한다고 한다. 루터(Martin Luther)는 모든 활력 있는 종교는 “주님은 나의 목자시다”에서와 같은 인칭 대명사로 요약된다고 믿고 있었다. 참으로 인격적인 종교, 거기서 한 인격이 참으로 하나님과 맞대면하는 종교만이 참 종교이다.

ꊳ 현재적인 것을 강조한다.
실존주의자는 현재적인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케리그마(kerygma) 의 그리스도, 즉 교회에서 설교된 그리스도, 다시 말해서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현재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라고 단언한 사람은 불트만(Rudolf Bultmann)이었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을 자신과는 무관한 신학이나 철학의 연구와 매우 다르게 해주는 것은 그처럼 지금 여기서 신앙에로 투신하는 것(commitment)이다. 그는 우리가 과거의 사상 체계의 뿌리를 박게 되었기 때문에 현재에서 결단의 필요를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2) 실존주의 신학들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은 최근의 신학운동은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에 힘입었다. 이것은 놀랄만한 사실이 아니다. 키에르케고르 자신이 그 나름대로 일종의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은 신학체계들은 다양하다. 신학자들이 실존주의의 전제로부터 무수한 결론들을 끌어냈다는 사실은 아마도 그 전제들의 애매성과 동시에 연루되어 있는 기본 개념들 중 어떤 것에 대해서는 적합한 분석을 해내지 못했다는 실재를 입증해 준다.

ꊱ 바르트의 신학
실존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1914년 이전의 프로테스탄트의 낙관적 자유주의 신학들을 거부하였다. 이것은 그의 <로마서 주석>(Der Romerbrief, 1919)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그의 사상은 바울에 못지 않게 키에르케고르와 도스토프스키에 의존하고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로부터 바르트가 이끌어낸 결론은 하나님은 인간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그리고 유한한 이성은 무한한 신을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도스트예프스키와 키에르케고르로부터, 자연과 인생은 수수께끼처럼 불가해하며, 세상에는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다는 논제를 배웠다.
바르트는 이 이론을 두 가지 방식으로 이용하였다. 한편으로는, 기독교에 대한 합리적 기초를 찾으려는 일체의 시도를 거부하였다. 로마가톨릭의 합리적 신학의 형태이든 19세기 개신교의 철학적 관념론의 형태이든 바르트에게는 모두 마찬가지였다. 다른 한편으로, 바르트는 실존주의의 이론을 이용하여 종교개혁 시대외 정통 개신교 교리를 부활시켰다. 비록 바르트가 계시에 대한 일체의 기반 수립의 가능성을 거부하였지만, 자기의 의도에 부합될 때에는 키에르케고르처럼 철학적 논증을 이용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실존주의 신학자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의 직접적 성격을 부인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의 차원 속에 있는 어떤 것과도 동일시 될 수 없다. 역사의 차원 속에 있는 것들은 모두가 잘못과 모순을 지니고 있다. 기독교 성경도 역시 역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함으로 성경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를 찾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이 여러 가지 잘못과 모순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성경의 책들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ꊲ 틸리히의 신학

1) 신앙의 현실과 사유(思惟)의 현실 사이를 연결시킨 신학자중에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는 가장 탁월한 사상가였다. 그는 1886년 라우지츠(Lausitz)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베를린과 튜빙겐과 할레에서 신학과 철학을 배우고 나서 1909년 졸업 시험에 합격한 후에 1910년에는 철학박사가 되고, 1912년에는 신학사(神學士)가 되었다. 1차대전 중에는 군목으로 종군하고 전쟁이 끝나자 베를린에서 신학 사강사(私講師)가 되었다. 1924년엔 마르부르크에서 조직신학과 종교철학의 부교수가 되고, 1925년에는 드레스덴의 공과대학의 종교학 교수가 되는 동시에 라이프찌히에서 신학의 명예 교수로 되었다. 1929년에는 막스 쉘러(Max Scheler)의 후임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철학과 사회학의 교수직을 맡았다. 이미 1933년에 그는 “종교 사회주의자”들에게 가담하고 나치 대학생 연맹에 반대하는 유대인 학생들에게 동조했다는 혐의로 정직당하였다. 니버(R. Niebuhr)의 알선으로 뉴요크에 와서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로 있으면서 콜롬비아 대학의 철학 강의도 하였다. 1955년에 그가 하버드 대학에서 은퇴하자 이른바 “하버드 대학의 대학교 교수”라는 명예를 얻었는데, 이는 그가 어느 분야이든지 자유로이 강의할 수 있는 특권이기도 했다. 말년에는 유럽에 와서 초청 강연도 했으나 시카고 대학에서 가르쳤다. 1966년 말경에는 뉴요크에 있는 사회문제 연구학교에서 강의할 새로 시작할 계획이었다. 그는 첫 강의해서 “정치적 이념의 종교적 차원”에 관해 논하려 했으나, 1965년 11월 22일에 시작하기도 전에 멸세했다.

2) 실존주의 신학자 틸리히는 하이덱거의 체계와 유사한 신학 체계의 건설에 실존주의 재료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하이덱거에게서 처럼, 「존재」와 「비존재」 혹은 「비노재」혹은 「무」라는 용어들이 틸리히의 사상 속에서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Being-itself)이시다. 그러나 틸리히의 해석에 있어서는 , 하나님의 이같은 성질이 중세 신학에서 말히던 존재 자체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와 전혀 다른 뜻을 지닌다. 티리히에 의하면, 우리는「자기긍정」(self-affirmation)을 통해서「존재 자체」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의 신학을 존재의 신학이라고도 한다.

3) 틸리히의 “존재의 신학”(Theology of Being)이란 어떤 것인가? 그 대충을 살펴보자.
① 그는 신의 개념을 “궁극적 관심”(What concerns us ultnately)으로 표현했다. 다른 말로는 존재 자체(Being-itself), 존재의 힘(the Power of being), 혹은 존재의 기반(the Ground 0f being)등이다.
②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우리고 존재나 비존재가 되도록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존재 자체, 전 인단의 실재, 실존의 구조, 의미 및 목적 등을 멸하거나 구할 힘이 있다고 믿는 것에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③ 하나님은 어떤 사물(thing)도 아니고 어느 존재자(Being)도 아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분으로 그친다면 그는 유한한 분이 되어 버리고 만다. 하나님을 최고의 존재로 간주하는 것까지고 그를 피조물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신은 한 존재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이며 모든 존재하는 것의 기반이 될 뿐이다.
④ 틸리히는 인간론을 다룸에 있어서 ‘존재로부터 소외된 존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사람은 존재의 기반으로부터 다른 사물로부터 그리고 그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사실’을 말한다.
⑤ 이 소외성을 메꾸는 힘이 필요한데 이것을 스스로 해결치 못한다. 여기서 새 존재의 필요성이 생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파괴하려는 모든 소외(疏外)의 세력이 그 안에서서 소멸된 “새존재”의 상징(Symbol)이다.
⑥ 틸리히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위엄의 위치로 회복된 것을 의미할 뿐이다.

4) 틸리히의 과오는 신을 존재라는 개념 속에 집어 넣고 신을 절대화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신은 어디까지나 철학적 허구요 기독교 성경이 말하는 절대자 신은 아닌 것이다. 존재의 신학에서 그의 신학상 과오를 보자.
① 성경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거부하는, 이 세대에 공통된, 과오가 틸리히의 실패에 기본이다. 현대인의 깊은 실존적 문제들을 분석하려는 노력중에 틸리히는 철학으로 성경을 대치하였다.
② 틸리히의 “항관관계의 원칙”은 철학이 인간 상황을 정확히 분석할 수 있다고 변론하나 “구원받은” 이성만이 상황에 대한 해결을 밝히 볼수 있다. 틸리히는 인간 이성의 중립성을 너무나 쉽게 가상한다. 어떻게 기독교 신앙에 부딛히지 않은 철학적 이성이 인간 실존의 구조와 의미를 정확히 들어낸단 말인가?
③ 틸리히의 신론은 성경교리와 거의 아무 관계가 없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이란 말을 기독교적인 의미로 쓸 수 있는지 의문이다.
유신론(theism)을 초월한 하나님이란 어떤 히니님인가? 초자연적도 아니요, 자연적도 이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④ 틸리히의 기독론은 예수를 하나의 상징으로 떨어뜨린다. 예수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그는 그의 죽음까지 신비(神秘)에 대하여 투명하였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그의 명료성의 최종적 현시였다는 것 뿐이다.” 결국 그의 기독론은 힌두교인이나 불교도에게 받아들여질만한 물탓 맛 잃은 기독론이다.
⑤ 틸리히의 구원론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실존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또 하나의 상징이란 것 외에는 아무 구체적인 의미가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 및 부활이란 “상징들”을 “묵상”함으로 새로운 자아에로 깨우쳐 준다는 것을 말하는 셈이다.
틸리히는 존재의 궁극적 근거(the ultimate ground of existence)로서의 하나님 개념을 창출해냈고, 부르조아적인 자충족성(自充足性) 개념을 극복하였으며, 전통적 신관이나 신앙관을 파기하고 종교적 사회주의를 주창했다. 그러나 틸리히는 기억했어야 했다.
계시적 진리는 역사적 사건들들 통해서 중개되지만 반드시 역사적 사실들을 의미하는 것은 가니다. 그러므로 계시적 진리는 역사적 조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계시적 진리는 계시라는 차원에서 인식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ꊳ 불트만의 신학

1) 불트만(Bultmann)은 신약성경 속에 있는 순전한 실존주의적 메시지가 과학 이전의 우주론에 입각한 말들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의곡되어 있도고 믿었다. 기원으로 보면 영지주의에 속하는 이 우주론은 하나의 신화인데 이 신화로부터 복음의 알맹이를 추룰해내야 한다. 영지주의적 우주론은 우주를 3층으로 보며, 위에는 신들이, 밑에는 흑암의 권세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그 중간에 인간이 땅을 점령하고 살아간다고 보았다. 여기에 숨겨져 있는 메시지는 인간은 (하이덱거의 용어를 빌어) 「본래의 존재」또는 「비본래적 존재」가 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2) 불트만은 믿기를 살고 가르치고 십자가에서 죽은 옛라는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기록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별로 가치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오늘날 나에게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내가 신앙으로 만날 수 있고 또 생의 목적과 가치를 찾도록 나를 도와 줄 어떤 살아 있는 현존인가?불트만과 또 다른 실존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하나님을 향한 결단의 문제이다. 그것은 의지의 내어맡김(commitment)이다. 불트만은 이렇게 쓰고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가 먼저 인간의 결단을 가능케 하는한, 신앙은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그러므로 이 결단 자체는 하나님의 선물로서만 이해될 수 있고 그 때문에 결단으로서의 그 성격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결단은 인간 자신의 것이지만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고 한다.

3) 비신화화(非神話化)
비신화화(demy mythologizing)란 무엇인가?
불트만이 1941년에 출판된 그의 논문<Neues Tesyament und Mythologie>에서 제안한 실존론적 신약해석방법론이다. 이것은 신약의 기사가 고대의 세계관과 개념 등에 의해 신화론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그 신화가 현대의 세속적 인간에게는 걸리들이 된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즉 시대에 제약된 신화적 표항의 형식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신화는 고대인의 종교적 실존이해가 신화적으로 대상화된 것이기에, 현대인 역시 그것을 실존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고대인의 실존이해를 자기화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비신화화는 신약의 신화적 언어를 실존론적 개념으로 번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현대의 성경 해석방법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신약신화의 기본적인 특징은 두 종류의 자이해(自理解)를 주축으로 한다고 불트만은 말한다. 하나는 신앙밖의 생명에 대한 신화적 설명이다. 죄, 육, 공포 및 죽음 등의 술어는 신앙밖의 생명에 대한 신화적 설명이다. 실존적인 용어를 쓰자면 이들은 감각적이요 가시적(可視的)인 멸망할 현실들에 종된 생명을 뜻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신앙안의 생명은 가시적이요, 감각적인 현실에의 이 집착을 포기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사람이 자신의 과거에서 헤어나와 하나님의 미래를 환영하는 것으다. 이것이 종말론의 유일한 진리라고 불트만은 말한다.
가장 싫어하여 부당존재(不當存在)로 지적하는 것은 성경의 초자연적 요소(超自然的要素)들이다. 그는 이 초자연적 요소들을 신화로 판정하고 그 골조들을 버리고 그 배후에 있는 성경저자들의 참된 의도만을 취할 것을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불트만의 그 유명한 비신화화 신학이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간추려 본다.
① “비신화화”는 신정통주의와 같이 신약 자체와는 완전히 상충되는 실존주의라는 철학의 일파에 힘있은 바 크다. 후자가 그 자세에 있어서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라면, 전자는 철저히 인간 중심이다.
② “비신화화”는 역사에 근거한 기독교의 기초를 파괴한다. 성경의 종교가 신화에 기초한 종교가 된다. 헤르만 리델보스는 평하되 불트만에 의하면 예수는 “성신으로 잉태치 아니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지 않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지옥에 내려가지 않으시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지 않으시고 하늘에 오르지 않으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지 않으시다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지 않으시리라”고 하였다.
③ 원시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업의 영향으로 날인되었다. 교회와 그 신학의 발생에 대하여 달리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불트만은 예수의 영향력을 무로 돌린다. 예수께 대한 확실한 회상이 그의 지상생애와 복음전파간의 짧은 기간내에 실제적으로 말살되었거나 진압되었다고 가정한다.
④ “비신화화”는 고전적인 자유주의와 같이 신약의 초자연주의에 관하여 과대한 회의주의에 이른다. 바로 이 이유로 그것은 종종“신 자유주의”라 불린다. 신약의 하나님 중심적 상격과 정반대이다.
⑤ 복음의 적응성이 현대인에게 명백히 되리라는 불트만의 가상은 인간성의 부패를 간과한 것이다. 불신의 흑암을 몰아내고 죄인으로 복음을 바로 보게하는 것은 성령이요 “비신화화”가 아니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불트만의「비신화화」는 신정통주의와 같이 실존주의 철학의 악영향을 받은 망동이다. 그 망동은 3방면으로 진행한다고 볼수 있다. 다음과 같다.

A. 인본주의(人本主義)이다
신약이 그 자세에 있어서 철저히 신본주의이라면 불트만의「비신화화」는 철저히 인본주의이다. 불트만은 신약으로 하여금 인생실존(人生實存)에 관한 무엇을 말하게 하려는 중에 인생중심의 범주(範疇)들을 사용함으로 하나님을 중심한 기도교의 성격을 의곡시킬 뿐 아니라 인생을 본역의 모습 그대로 정확하게 이해시킬 만한 기회를 잘못 썼다. 신약의 참 목적은 주권적이신 하나님이 오셨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오시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생의 본연의 성질을 회복시키셨다는 것을 선포하는 일이다. 신약의 중심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B. 상대주의(相對主義)이다.
불트만의 비신화화의 과정은 철저히 진행하는 때에 신약의 기독교를 해부하여 인식되지 못할 정도로 파괴한다. 예수의 정체는 한 인생 뿐으로 축소되고 그리스도 사건은 객관적 신적(神的) 간섭으로부터「상대적 역사적 현상」으로 변형된다. 이 변형의 밑바닥에 진리는 절대적(絶對的)이 아니라 때와 장소 또는 각 사람의 주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는 상대주의(relativism)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기독교는 다른 매 사람과 다르지 않은 통상한 죽을수 있는 개인과 아무 방신으로도 이적적이거나 초자연적이 아닌, 본질적 상대성(essential relativity)에서 모든 세속적 사건들의 정상적 질서(秩序)에 속하는 사건을 하나님이 선택하신 일에 사람의 구속(救贖)을 연걸시킨다.

C. 주관주의(主觀主義)이다
불트만의 상대주의는 주관주의와 함께 손에 손을 잡고 동행한다. 그리스도 사건의 적절성(適切性)은 단순히 주관적 의의(意義)를 가정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은 연대(年代)를 정할수 있는 과거의 사건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전도의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관적으로 경험될「종말론적 사건」(終末論的事件)들이라 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때문에 나를 도우신다는 객관적 긍정(客觀的肯定)은 그가 나를 돕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순간」(瞬間)의 가치판단에게 반드시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한다. 한 말로하면 진리는 주관성(主觀性)과 동일시된다. 불트만이 만일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 유신론자였다면 우주에 초자연적 세력의 간섭에 반대하지 아니했을 것이다. 우주의 창조주가 우주에 초자연적 간섭을 행하실 가능성은 부인될 수 없기 때문이다.

4) 더욱 특수하게 그 자신의 신약 영역(領域)에서 불트만은 독일에서 학문적 과격적(過激的) 성경비평의 최전선(最前線) 대표자들 중의 하나이다. 그는 역사적 학파로부터 나와서 신약에 판이한 접근(接近)인 소위「양식비평」을 성공시켰다.
B. 양식비평(樣式批評)
양식비평(form criticsm)이란 무엇인가? 문학이전 혹은 구두전승까지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문학에 대한 접근방식이다. 성경은 물론 비성경적 문헌에 모두 적용되고 있다. 하나의 문학이 형정되기 이전에 그것의 자료가 되는 문헌. 설화. 신화 등이 있고 또한 그에 따른 ‘삶의 정황’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의 지속성과 전달과정에서의 변화등을 연구하면 어떤 발전의 양식을 수립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된다. 양식비평은 처음에 궁켈에 의해 구약, 특히 모세오경과 시편에 적용되었다. 신약에 대한 양식비평의 목적은 나사렛 예수에 관한 최초의 가장 신뢰할만한 전승을 수립하려는 데 있었다. 양식비평은 단지 문체나 양식 분석 및 연구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성립된 광범위한 사회적 배경과 상황까지를 연구대상으로 한다.
양식비평의 방법은 원시 기독교인 집단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표현함에 사용한 일정한 인습화(因襲化)한 양식들을 구별하기 유능(有能)하다고 주장한다. 신중히 풀어낸 발전의 표중을 사용하여 양식비평은 초년 복음 전통들을 후년의 것들로부터 구별하는 적절한 방편들을 가진 것으로 믿는다. 이 방식으로 그것은 예수님의 참 말씀들에 매우 접근한 전통을 엷은 지층을 노출시키노라 한다. 양식비평을 다음과 같이 간추려 본다.
① 양식비평은 성경을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생애와 교훈의 신빙성있는 기사로 믿을 수 없다고 전제하고 출발한다. 현금의 양식비평가의 말을 빌리면 성경은 객관적인 의미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사람에게 말씀하시니는 하나. “객관적으로 성경은 고대의 역사적 종교적 영향의 산물이요 따라서 다른 고대 종교서적과 꼭 같이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② 복음서들은 무엇보다도 초대교회의 편집의 산물이라는 것이 양식비평의 기본적인 가정이다. 복음기자들은 신약서가 쓰여지기 전에 교회내에 돌아다니던 여러 가지 독립적이며 서로 상충되는 구전(口傳)을 합쳐 연결짓기를 꾀하였다. 이 방법의 개척자인 칼 엘 슈밑이 말한대로, “우리는 예수께서 직접 주신 이야기를 접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예수께 관한 이야기만을 접할 뿐이다”고 했다.
③ 양식비평의 목적은 기록된 복음서들 배후에 있는 구전들의 역사를 분석하는 것이다. 복음서들은 “복음서들 전의 복음”을 찾으려는 우리의 연구를 위하여 사용하는 원 자료일 뿐이다고“고 한다.
④ 이 수법의 첫 단계는 복음서 안에 있는 문서, 시간, 장소 등의 표시는 비역사적이며 믿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이야기의 구조를 떼어 내버리고서 시초의 뻬대 곧 초대교회가 인위적으로 꿰어매기 전의 낱낱의 삽화(揷花)와 교훈들을 찾아야 한다고 한다.
⑤ 이 작업이 끝나면 각각의 구절들은 이적 이야기, 변론적인 교훈, 예언, 명언(名言)등으로 분류된다. 이 각각은 특유한 고정된 형식이 있다. 그래서 이 고정된 형식에 가까운 어느 전승을 발견하면 그것이 정통 전승인지 이차적인 전승인지, 초기의 사료인지 후기의 것인지, 믿을만한 전승인지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⑥ 이런 방법론의 결과는 최소한 매우 회의적이다. 불트만에게는 역사적인 근거는 주로 예수의 가르침에 있고 그의 하신일의 기록에는 없고 더구나 그의 품위의 묘사에는 없다. 예수께서 사시고 또 분석한 끝에 그가 하셨다고 판정되는 여러일들을 하셨다는 것은 그가 의심치는 않는다. 그러나 그외는 모두 의심한다.

5) 불트만의 양식비평의 방법 자체가 신약의 성격을 여러 면에서 크게 오해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오해들이다.
① 복음서가 항상 계속적인 사건의 연대기를 수록한 것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렇댜고 양식비평이 주장하듯이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아무 믿을만한 역사적인 개략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넓은 역사적인 개략의 범위내에서 각 복음서 기자들은 자기 목적에 맞게 자료를 배열하였다. 복음서 기자들에게서 그들이 의도하지고 않은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매우 어설픈 비평인 것이다.
② 양식비평은 복음서 저자들응 불공평하게 취급한다. 마태. 마가. 누가를 겨우 문서편집자로 전략시키고 복음서를 자가모순적인 기록으로 만든다. 복음서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을만한 증거들로서 기본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③ 양식비평은 기독교를 그리스도에게서 분리시킨다. 복음서들을 산출하는데 있어서 가장 창조적인 역할은 그리스도가 하지않고 기독교계가 하였다는 것이 이 연구방법의 일대 가설이다. 그러나 신약의 메시지는 사회에 중심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하였다(고후 4:5). 교회는 바울이나 그의 동류 사도들과 같이 증인이요 창조자가 아니었다(고전 4:1-2).
④ 양식비평은 기독교를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킨다. 불트만과 그 아류(亞流)는 초대교회 안에서 예수에 대한 정확한 전승의 수호자로서의 사도들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한다. 사도들은 기독교와 그리스도의 사실 및 교리들에 관한 권위있는 보도의 출처였다.
⑤ 양식비평은 역사적인 사실과 기록된 문서간의 시간적 간격이 얼마 안되다는 사실을 믿는 듯 하다. 복음서가 쓰여질 때는 사도들과 목격자중 다수가 생존하고 있었다. 믿는 사회의 사화(史話)나 신화(神話)의 수집, 창안, 순회의 시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예수의 생애의 사건들은 공중(公衆)의 눈에 숨기우지 아니하였었다(행 2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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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잎새의 꿈

2010.03.20 11:48:51

저별과 달님.. 원문보기는 정회원으로만 제한되어 있던데

퍼와도 (저작권법에) 문제없는 글인지요?

확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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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2010.03.20 11:57:25

정회원만 보라는 것은 일단 카페에 가입 권장을 위한 것이구요..

저는 시온성 카페의 정회원인데 스크랩과 글을 알리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레벨:10]차성훈

2010.03.20 17:38:50

바르트 틸리히 불트만은 아직도 저런 소리를 듣네요. 한 2050년은 되야 제대로 평가를 받으려는지...

[레벨:1]조이

2010.03.20 23:17:39

정목사님의 판넨베르크는 2050년,

바르트는 2100년, 불트만은 2150년,

틸리히는 말세가 지나서..

우리나라 보수적인 교회 풍토에서는 당분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걱정 되시는지 이런 글을 옮겨오시는군요.

하긴 울나라 지성계도 딱 이수준이죠.

[레벨:10]차성훈

2010.03.21 01:56:09

뭐 세계 수준은 말할 능력도, 필요도 없겠지만 판넨베르크는 좀 앞당겨도 될 것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뭐, 바르트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 암암리에 받아드리는 분위기라고 봅니다. 아예 바르티안으로 채워지는 신학교들도 적잖고, 교회 현장에서도 알고 말하는 건지는 몰라도 많은 메시지들이 바르트의 급진적인 '하나님 중심성'과 유사하거든요. 단적으로, 부흥사들이 외치고 다니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라던지 좀 젊은 목사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한 손엔 성경을, 한 손엔 신문을' 이런 말들을 과연 누가 한 말일까요?ㅎㅎ 물론 바르트 신학을 전적으로 지향한다기 보다는 근본주의의 급진성과 비슷한 색채를 발견해서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더 많지요. 아이러니 한건 바르트를 자유주의의 괴수로 보는 양반들이 더욱 바르트적인 메시지를 좋아한다는거죠.)

 

최근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읽히기 시작하는 책들(예를 들면, 스탠리 그렌츠라던지)을 보면 오늘날 상황(뭐, 철학이나 과학 등)과 소통하려는 시도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라인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판넨베르크나 몰트만 쪽과 맞닿아 있는 경우들이 많다고 하더군요.(뭐, 저에게 신빙성을 물으신다면 전 도망가겠습니다만ㅎㅎㅎㅎ) 어찌 보면 희망사항일 수도 있지만요.

[레벨:14]닥터케이

2010.03.22 08:08:33

다비아가 출범(?)한지 꽤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런 저급한 수준의 신학비평글들이 올라온다는게 신기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그렇군요...  요즘 왠만한 신대원의 학생들도 이런 내용의 리포트는 안 쓰지 싶은데... 한국교회는 그 나물에 그 밥을 벗어날 수 없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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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2010.03.24 23:48:57

이 글을 쓴 사람은 오랜 시간 신학 공부를 하고 적어도 박사과정 공부는 한걸로 알고 있습니다.

닥터케이 님이 이 글을 저급한 수준의 글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님은 비록 비평의 글이지만 이 정도로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님이 진보 같으시니 보수 신학자 누구든지 한번 제대로 평가해 주실래요?

그러면 제가 이 글이 저급한 수준이라는 님의 말에 공감 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제가 볼때 한국의 신대원 학생중에서   비록 비평이 포함된 글이지만

이 정도로 여러 신학자들을 자신의 신학적 사유로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평가할수 있는 학생이  과연 몇명 이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레벨:14]닥터케이

2010.03.25 04:18:49

이 글은 본인이 직접 저술했다기 보다는 여러 사람들의 글에서 내용을 조금씩 발췌하여 하나의 문서로 편집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다른 책자에서 읽었던 익숙한 문장들이 여러군데서 눈에 띕니다). 주로 고신과 총신 계열의 저자들이 저술한 여러 책자들에 수록되어 있던 내용들을 발췌한 것으로서 이전의 저자들과 다른 새로운 견해나 이론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 정도의 요약 편집이라면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 시절에는 거창하게 신대원까지 갈 것 없이 신학과 학부생이면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신학전공자가 아니라도 관심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지요).

 

이 글을 차분히 읽어보면 각각의 신학자들에 대해 본질적인 것을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피상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즉, 비판의 대상을 제대로 연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설픈 비판을 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현상은 해당 신학자의 글을 직접 읽고 충분히 고찰해 본 것이 아니라 그 신학자에 대한 요약서적(주로 비판적 입장에서 쓰여진) 들을 위주로 읽으면서 형성된 일종의 편견이 작용한 결과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근본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그룹에서 20세기 신학자들에 대해 이런 식의 피상적인 비판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부 참고할 만한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상당부분은 오히려 해당 신학자들의 주장을 왜곡하여 독자에게 잘못 전달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저급하다는 표현을 쓴 것이지요.

 

외람되지만, 저별과달님이 주로 읽으시는 글들의 내용은 특정 신학적 조류에 편향되어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물론, 평신도가 폭넓고 균형잡힌 신학지식을 익힌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며,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혼란을 가중하게 하는 해로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다비아에 올라오는 글들을 대충이라도 이해하고 따라잡을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양한 신학적 입장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볼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나간 저의 글들을 참고하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진보적인 성향의 신학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다만, 보수적인 신학의 바탕위에서 균형잡힌 건전한 신학을 추구할 따름이지요. (진보적인 신학을 하시는 분들에게 제 글이 진보적이라고 말하면 크게 웃을것입니다). 보수 신학자들을 저보고 평가해보라 하셨는데, 평범한 평신도로서 그럴 입장도 아니지만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박형룡이니 누구니 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자 마음먹으면 못할 것도 없지만 (인용하신 글 속에도 박형룡의 해악이 여러군데서 배어나옵니다) 과연 그게 지금의 저별과달님에게 무슨 덕이 되겠습니까? 비판을 위한 비판은 아무에게도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신학에 대한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비판은 이미 여러 사람들이 가했기 때문에 제가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합니다. 그러한 비판론들은 도처에 널려있기 때문에 저별과달님이 언젠가 그런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질 때가 오면 제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별과달님이 기존의 신학관에서 평안함을 느끼고 은혜를 받으면서 거기에 안주하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굳이 억지로 그 둥지를 깨부셔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다만 그 편안한 둥지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신다면 현재로서는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며, 또한 언젠가는 둥지밖으로 날개짓을 펼칠때도 있을 것입니다.

 

다비아에 오시는 상당수의 회원분들은 이미 그 둥지가 몸에 걸맞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몸부림을 치고 있는 분들이 대다수이지요. 저별과달님이 올려주신 글에 대해 회원들의 반응이 다소 시큰둥하거나 냉소적인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즉, 올려주신 내용들은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기도 하거니와 이제는 그런 주장들이 별로 공감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상기의 문서에 요약된 내용을 여과없이 받아들이면 안된다는 것이며, 여력이 된다면 해당 신학자들의 저서를 직접 읽어보시고 나름대로 평가를 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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