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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르트 로마서 제2판 1922/손성현역/복있는사람

로마서1장18-32절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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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롬1:18-21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하나님! 우리는 이 말을 쓰면서도 그것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한다. 믿는 사람은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믿는 사람은 욥처럼,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높은 곳에 계시기에 다만 두려워할 뿐인 하나님을 사랑하며, 루터처럼 “deus absconditus”[숨어 계시는 하나님, 사45:15]을 사랑한다. 바로 그에게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다. 오직 그만이 구원을 받는다. “갇힌 사람만 강해지고, 낮은 사람만 높여지며, 비어 있는 것만 채워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만이 무엇인가 된다”(루터). 그러나 경외함이 없는 사람, 순종함이 없는 사람 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가 심판자를 사랑하지 않는 한 반드시 맞이하게 되는 심판이며, 우리가 ‘아니요’를 긍정하지 않는 한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아니요’다. 그 진노는 이 세상의 현존재와 존재 상태에 대한 저항을 우리의 저항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언제 어디서나 예고되는 저항이며, 우리가 문제를 문제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 언제나 그대로 남아 있는 삶의 문제다. 또한 그 진노는 우리의 한계성과 소멸성인데, 우리가 그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한 그러하다. 우리가 맞이하게 될 심판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아주 엄연한 사실이다. 그 심판은 다가오는 세상의 빛, 그 세상이 가져다주는 구원의 빛으로 들어가느냐 마느냐는 믿음의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에 달려 있다. 설령 우리가 믿음 대신 걸림돌을 선택한다 해도(1:16) 심판은 엄연한 사실이다. 시간은 영원에 비추어 보면 무(無)에 불과하다는 것, 모든 사물은 그 근원과 종말에 비추어 보면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 우리는 죄인이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다. 비록 그 장벽이 우리에게 출구를 열어 주지 못한다 해도 말이다.
삶은 그 모든 의심과 의혹 가운데서도 계속 진행되며, 비록 우리에게 붙은 거대한 물음표를 보지 못한다 해도, 그 삶과 더불어 우리도 우리의 길을 간다. 인간은 설령 자신이 구원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해도, 그가 타락한 존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때 장벽은 그저 장벽일 뿐 출구가 되지 않는다. 죄수는 죄수일 뿐 간수가 되지 않는다. 그때 기다림은 기쁨이 아니며, 피할 수 없는 것을 씁쓸하면서도 달콤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하다. 그때 거부는 소망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반항이다. 그때 우리 실존의 풍요로운 역설은 부지불식간에 벌레에 먹힌 자국이 된다. 부정도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그런 [이 세상 내부의] 것에 불과하다. 그때 거룩하신 하나님 대신 운명, 질료, 만유, 우연, 숙명이 들어선다. 우리가 불신앙의 거짓 신(1:17)에게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게 되었다면, 그것은 통찰력이 생겼다는 증거다. 하나님의 진노가 가져올 최후의 결과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부활의 믿음 없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이름과는 모순되게도 이 세상의 현존재와 존재 상태를 긍정하는 신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한다. 마치 자신이 진노를 발하는 하나님, 우리를 언짢아하는 하나님, 우리를 외면할 수 있는 하나님, ‘아니요’라고 말해야 하는 참 하나님인 것처럼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 대단히 주저하고 조심해야 한다. 진정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의 최종 결정, 그분의 참된 드러남이 될 수 없다! 거짓 신이 진지하게 하나님이라 불릴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맞닥뜨리는 분은 실제로 항상 하나님이다. 물론 불신앙도 어떤 신과 맞닥뜨린다. 다만 불신앙은 자기에게 감춰진 하나님의 진리 속으로 파고들지 않는 탓에, 마치 바로처럼 그 하나님에게 부딪혀 산산이 조각날 뿐이다(9:15-18). “하나님이 만드신 인생의 모든 장애와 손상, 죽음의 숙명까지 포함하여 모든 연약함과 속박은 하나님의 반응이다”(쵠델).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반응을 직접 알아차리지 못하므로 거기에 부딪혀 파멸할 수밖에 없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흔적이다. 다만 우리가 믿음이 아니라 걸림돌을 선택한 탓에 온 세상은 절대적인 수수께끼에 휩싸여 그 가운데 하나님의 진노만이 유일한 흔적으로 남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신앙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다[갈6:7]. 하나님의 진노는 그리스도 밖에서, 그리스도 없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다.

“그리스도 밖에서, 그리스도 없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의 모든 경외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난다. 이것은 아직 부활에 이르지 못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과 하나님 관계의 주된 특징이다. 그 관계에는 경외함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면서 우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그분에게 드린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우리와 같은 선상에, 사물들과 같은 선상에 놓는다. 우리는 그분이 “누군가를 필요로 하신다”[행17:25]고 생각하며, 우리가 여러 가지 다른 관계를 잘 관리하는 것처럼 그분과의 관계도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넉살 좋게 그분께 가까이 가기도 하고, 분별없이 그분을 우리 가까이 끌고 오기도 한다. 우리는 거리낌 없이 그분과 습관적인 관계를 맺는다. 우리는 거리낌 없이 그분을 헤아리면서 그것이 그다지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감히 그분의 친구, 후원자, 대변인, 중재자 노릇을 하려고 한다. 그때 우리는 영원을 시간과 혼동한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경건하지 않음(경외하지 않음)이다. 이 관계가 불의한[불순종한] 관계다. 우리는 이 관계에서 슬며시 스스로 주인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와 요구이며, 하나님도 여기에 맞춰 주어야 한다. 우리의 교만은 다른 모든 것에 더하여 초월 세계의 인식과 그 안으로의 진입까지 요구한다. 우리의 행위는 더욱 심오한 근거를 원하며, 저 세상의 찬사와 상급을 원한다. 우리 삶의 욕망은 경건한 시간을 갈망하며, 그 시간이 영원까지 연장되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 세상의 왕좌에 앉히면서 사실은 우리 자신이 앉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분을 “믿으면서” 우리 자신을 의롭게 여기고 탐닉하고 숭배한다. 우리의 경건이란 우리 자신과 이 세상을 장엄하게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모순을 경건하게 아껴 감추는 것이다. 우리의 경건이란 온갖 겸손과 감동의 티를 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영원과 혼동한다. 이것이 우리의 불의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 밖에서, 그리스도 없이, 부활의 이편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다. 이때는 아직 제정신 차리라는 부름을 받기 전이다. 그때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으로 인정되지 않고,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은 사실 인간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실현하면서 거짓 신을 섬기고 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 두 번째로 언급한 특징이 시간적으로는 앞선 것이다. 인간은 먼저 자기 자신 때문에 길을 잃고, 그 다음에 거짓 신 때문에 길을 잃는다. 우리는 먼저 “너희가…하나님과 같이 되어"[창3:5]라는 [뱀의] 약속을 듣고, 그 다음에 영원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먼저 인간들을 높이 추어올리고, 그 다음에 하나님에 대한 거리를 오판한다. 그리스도 밖에서, 그리스도 없이 이루어지는 관계의 핵심은 노예의 불의(불순종)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에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우리와 관련지어 생각한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해 생각하는 것보다 높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땅히 이런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그런 존재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존재 이상이 되지 못하시는 것이다. 슬그머니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머잖아 참 하나님과는 공공연히 거리를 두게 된다. 그런 작은 하나님은 당연히 크신 참 하나님이 없어도 아쉬움 없이 잘 지내야 한다. 인간은 진리 곧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두고 캡슐에 넣고 자기의 기준에 끼어 맞춤으로써 그 진리의 엄중함과 영향력을 탈취했고, 진리를 천박하고 무력하고, 무용한 것으로 만들었으니, 결국 진리를 비(非)진리로 바꿔 놓은 것이다. 이것이 그의 경건하지 않음으로 환히 드러나고, 이것은 그를 늘 새로운 불의(불순종)로 곤두박질치게 한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나면 우상이 출현하지 않을 수 없다. 우상이 숭배를 받을 때 인간은 자기가 참 하나님이라고 느끼며, 자기가 피조물인 그 우상을 만든 창조자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세상, 곧 우리 세상의 경계이자 우리의 구원을 의미하는 새로운 세상을 보지 못하게 하는 반항이다. 이러한 반항 위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뿐이다.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을 알 만한 것(Der Gottesgedanke)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부활과 더불어 동터 오는 진리. 곧 알려지지 않았던 하나님께서 인간을 제약하고 지양하신다는 진리가 이제는 알려진 진리가 되었다. 이 사실이 진리의 수난사에서 볼 수 있는 비극이다. 인간 정신의 가장 원초적인, 그러면서도 가장 발전된 자기 성찰은 “절망하는 겸손”, “이성의 자기 비꼼”(코엔 H.Cohen)에서 계속 발견된다. 그것은 우리의 한계를 통찰할 때, 또한 우리에게 그 한계를 주시는 분이요 우리 한계의 지양이 되시는 분을 바라볼 때 나타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분이며, 이 알지 못함(Nicht-Wissen)이야말로 우리 앎의 문제이며 근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것과 같은 인격체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그런 존재가 아님[비존재](Nicht-Sein)이야말로 우리 인격을 지양하고 우리의 인격에 새로운 토대가 된다는 사실 말이다.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것, 곧 우리의 실존에 놓인 절대적인 타율성의 통찰이야말로 자율성이다. 우리가 그 같은 “하나님을 알 만 한 것”에 저항한다면, 그것은 어떤 낯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고유한 내면에 저항하는 것이며, 어떤 아득한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것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것[하나님을 알 만한 것]에 대한 기억은 물음과 경고로서 항상 우리와 함께한다. 그분은 은폐된 심연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가 걷는 길의 처음과 마지막에 있는 은폐된 고향이기도 하다. 만일 우리가 그분에게 충실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충실하지 않은 셈이 된다.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 보여 알려졌나니.”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잊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말해야 한다. 곧 그분에 대해 우리가 전혀 겸손하지 않고 사려깊지않고 경악하지도 않는 것이 마치 당연한 일처럼 되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항상 이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의 지혜는 모든 주어져 있는 것[소여성]의 근원(Ursprung)이 주어져 있지 않음[비소여성]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가장 명철한 인생철학들도 모든 지식의 시초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사실[잠1:7]을 일찌감치 진단했다. 욥기의 저자나 전도서의 저자 솔로몬처럼 확 트이고 공정한 시선을 가진 사람들도 직관의 거울 속에서 그것의 원형, 곧 직관될 수 없고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높으심을 일찌감치 재발견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든 하나님을 고소하는 사람이든 하나님을 우리와 똑 같은 존재처럼 생각하고 있다면, 언제나 폭풍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것이다{욥38:1}. 언제나 그 음성은 우리의 깨달음을 촉구하시니, 곧 우리에게 너무 높고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관해 우리가 무지한 말을 늘어놓고 있음[욥42:3]을 깨달으라고 하신다. 우리의 현존재와 존재 상태의 문제성, 공허함, 존재하는 모든 것과 우리 존재의 전적인 의문성은 언제나 우리 앞에 펼쳐진 교과서와 같다. 절대적인 수수께끼에 휩싸인 하나님의 “작품”이란 (동물원!) 하나님 한분, 하나님 자신 외에는 그 어떤 직접적인 대답을 줄 수 없는 순수한 질문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우리를 우리의 한계와 대면하게 하시고 이로써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길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아니요’는 “창세로부터” 그가 만드신 작품에서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고요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종교적인 선입견에 갇히지 않고 바라볼 때,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고 파악할 수 있다. 만일 우리 자신이 나서서 막지만 않는다면,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우리를 가장 유익한 위기 속에 빠뜨리는 것을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다. 만일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알려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미 그 위기 안에 있다. 그러나 “분명히 보여 알려짐”이 아무리 확실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함”인데, 바로 이것이 부활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다. 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주님을 마땅히 경외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다른 모든 신과 구별되는 그분의 탁월성이며, 바로 이것이 그분을 하나님으로, 창조자와 구원자로 특징 짓는다(1:16). 시간과 영원이 만나는, 현재의 세상과 미래의 세계가 만나는 교차 선(1:4)은 실제로 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으며, “미리 선포된 것”이며(1:2), 언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의 심판 아래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남이 반드시 불가피했던 것은 아니다. 인간은 심판자를 인식하고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보지 않고 듣지 않았기에,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왜냐하면 그런 일은 그들이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상태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마13:13 병행본문]. 그들의 경건하지 않음도 핑계할 수 없으니, 이는 “분명히 보여 알려진” 하나님의 작품들이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에 관해 말해 주고, 또 이 세상의 자연적이고 정신적인 능력이라든가 그 밖의 다른 능력과 하나님을 나란히 두는 저 잘 알려진 거짓 신의 일에 미리부터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불순종도 핑계할 것이 없으니, 이는 “분명히 보여 알려진” 사실들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신성”을 증언하고 있고, 또한 자기 체험에 도취해 하나님에 관해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를 내세우는 종교적인 교만에 미리부터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캡슐에 넣어 버리고 이로써 그분의 진노를 자아냈다면, 이것은 다른 대안이 없어 불가피하게 행한 일이 결코 아니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17:27-28). 하지만 그분이 보기에는 상황이 전혀 다를 수 있다.

“하나님을 알되.” 우리 인생의 파악 불가능함, 불완전함, 하찮음을 단순히 바라볼 때 아는 것, 곧 하나님에 관한 지식(Kenntnis)은 인식(Erkenntnis)에 도달하지 못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아무리 미심쩍어 보여도, 우리는 [참] 하나님의 보이지 않음을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들어 한다. 창조주의 영원하고 근본적인 전제가 다른 사물들 위에 그것들과 더불어 있는 ‘사물 자체’(Ding an sich)가 되어 버렸다. 모든 구체성과 구별되는 살아 있는 추상(Abstraktion)이 또 하나의 구체성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아무리 최상의 구체성이라 해도 다른 구체성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바로 그 특정한 영(der Geist)이 그저 일반적인 하나의 영(ein Geist)이 되어 버렸다. 가까이 할 수 없는 분, 그래서 그토록 가까우신 분이 우리 체험의 대상, 영원히 불확실한 대상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그분의 빛-영원하신, 거기 “가까이 가지 못할 빛”[딤전6:16]-안에서 빛을 보는[시36:9] 대신, 그분을 다른 빛 가운데 하나의 빛이 되게 만든다. 그것이 아무리 가장 큰 빛, 초월적인 빛이라 해도 여전히 다른 빛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빛을 덧붙여 점화하고, 자연스럽게 사물 속에서도 자기 자신의 빛을 추구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알 수 없는 분이 아니라면, 우리의 의무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어디 있는가? 만일 하나님이 우리와 다른 것이 아니라면, 그분께 합당한 “감사”는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거짓 신 제우스에 맞서 프로메테우스가 저항하여 일어선 것은 지당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빛은 우리 안에서 어둠이 되었고[마6:23병행본문],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위에 임하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제 우리의 장벽은 그저 우리의 장벽이며, 하나님의 ‘아니요’는 ‘아니요’고, 그 의미도 마찬가지다. 무의미하게 홀로 선 인간은 이 세상에서 무의미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세력들과 마주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오직 참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마음이 (“분명히 보여 알려짐”으로) 영원에 대한 기억을 통해 부서질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참 하나님과의 관계는 욥의 길에서 이루어지는 관계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이러한 부서짐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의 생각은 허망하고 형식적이고 마냥 비판적이고 비생산적이며, 여러 현상의 풍요로움을 두루 섭렵하지도 못하고 개체를 전체의 맥락에서 파악하지도 못한다. 부서지지 않은 생각은 사물에 대한 진정한 관계를 스스로 단념한다. 반대로 부서지지 않은 마음, 곧 궁극적인 통찰을 통해 감시되지 않는 감정은 사유의 지배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그 마음은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인 상태에서 자기를 위한 존재성을 내보인다. 생각은 무정하고 이해에는 직관이 없어 공허해졌다. 마음은 분별력을 놓쳐 버렸고, 직관에는 개념이 없어서 맹목적인 것이 되었다. 영혼은 세상을 멀리하고 세상은 영혼이 없으니, 이는 영혼과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에 관한 인식 속에서 서로를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요, 인간이 참 하나님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 둘을 되찾으려면 참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잃어버려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헤매고 있는 밤의 원인, 우리 위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다.

결과 롬1:22-32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역설이 없고 영원이 없는 세계상, 알 수 없음이라는 배경이 없는 앎,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없는 종교,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선 ‘아니요!’에 대한 기억이 없는 인생관은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 단순함, 똑바름, 무엇보다 거침없음, 비교적 안전하고 조화로움, 실제 삶의 여러 가지 요구나 “경험”과 두루두루 일치함, 기분 좋은 불명료함, 모든 개념과 기준의 확대 가능함, 거기서 제공되는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자유주의적 전망, 이 모든 것 덕분에 이러한 토대는 언제나 신뢰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분명히 보여 알려짐”(1:20)을 포기하고 나서도 이 토대 위에서 얼마든지 자기는 지혜롭다고 착각할 수 있다. 밤에게도 나름의 지혜가 있다. 그러나 이제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마음이 어두어지기 시작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부서지지 않은 지혜의 광채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불가피한 것이 되어 버린 사물의 운행을 막을 수 없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내적인 실수 혹은 이론적인 실수가 아니라, 삶의 근본 자세가 잘못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허망한 생각과 어두운 마음에서 필연적으로 왜곡된 행위가 나온다. 부서지지 않은 인간이 자신의 확실한 길에서 자기 자신을 누리면 누릴수록, 그는 더욱 확실하게 어리석은 자가 된다. 심연의 망각, 고향의 망각에 기초한 한 삶의 설계, 곧 도덕은 더욱 확실하게 거짓이 된다. 그것을 깨닫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다시 말해, 하나님의 특별함에 대한 감각이 사라졌다. 빙하의 균열, 극 지대, 폐허 지대에 대한 생각, 곧 썩어질 것에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것을 향해 실제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그런 지대에 대한 생각이 사라졌다. 하나님과 인간의 간격은 그 근본적이고 날카로운 의미, 산(酸)과 같이 녹여 버리는 의미, 단 한 번에 결정적으로 주목되어야 할 의미를 상실했다. 한쪽에는 썩어지지 않는 것, 하나님의 근원성과 우월성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썩어질 것, 우리의 현조재와 존재 상태의 상대성과 제약성이 있다. 그런데 양쪽의 차이가 지워졌다. 이 차이를 볼 수 있는 눈이 멀어 버렸다. 이곳과 저곳, 우리와 전적 타자 사이의 한복판에 종교적 안개 혹은 잡탕 죽과 같은 것이 생겨나는데, 그곳에서는 다소간 성적인 색채가 가미된 천차만별의 교묘한 동일시와 혼합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인간적인 혹은 동물적인 사건이 하나님 체험(Erlebnis)으로 “경험”(erfahren)된다. 이러한 안개의 핵심은 망상(Wahn)이다. 곧 (위로부터 수직으로 내려오는) 기적 없이도, 모든 주어진 것의 지양 없이도, 탄생과 죽음 너머 저편에 있는 바로 그 유일 무이한 진리와 무관하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일치 혹은 그저 어떤 동맹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망상이다. 종교적인 체험은-그것이 어떤 단계의 체험이든- 그저 빈 공간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내용이고 그분을 소유한 것이며 그분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오직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참이며 또한 참이 될 수 있는 것을 뻔뻔하게도 미리 끌어오려고 하다가 실패할 뿐이다. 자신의 역사성과 사물성과 구체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런 종교적 체험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배반이다. 그것은 거짓 신, 곧 우상의 탄생이다. 그런 안개의 한복판에서 모든 썩어질 것이라는 표현이 하나의 비유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저 하나의 비유라는 사실이 망각된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존재의 우상과 맞바꾼다(시106:20). 인간이 자신의 두려움이나 욕망의 대상과 맺는 어떤 관계, 자기 생각이나 행위의 결과물과 맺는 관계, 그리고 자연이나 역사의 인상 깊은 현상과 맺는 관계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된다. 사람들은 그 관계를 너무나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이 관계가 궁극적으로는 창조주를, 그 알 수 없는 분을 지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 관계 자체를 파괴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분의 영광은 어떤 우상의 알려진 영광과는-그것이 아무리 정교하고 순수해도 저 영광과는 똑같을 수 없으므로- 결코 맞바꿀 수 없는 것인데도 그렇게 잘못 생각한다.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는 그 관계가 참이고자 하지 않을 때, 그 자체를 어떤 [인간적인] “경험”으로 응축하려고 하지 않을 때, 오히려 [인간적인 경험] 그 자체를 언제라도 즉각 지양하고 순수하게 열린 공간, [저편을 향한] 지시, 자극, 기회가 되고자 할 때만 참된 관계가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착각하면, 그때는 저 간접적인, 파생적인, 우회적인, 주인 없는 신성, 능력, 권세, 세력(8:38)이 등장하여 참 하나님의 빛을 물들이고 어둡게 만든다. 저 낭만적인 직접성의 제국(인도!)보다 간접성이 더한 곳은 없다. 인간의 토대가 되시는 궁극적인 분과 인간 사이의 질적인 간격이 무시되고 경시되는 곳에서는 반드시 페티시즘[물신숭배]이 들어서나니, 이는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속에서, 그리고 마침내 “썩어질 사람”(“인격”, “어린이”, 여성”)이나 그것의 정신적-물질적 창조물이나 조형물이나 표현(가족, 민족, 국가, 교회, 고향 등)속에서 하나님을 최초로 체험했다고 하는 것, 그럼으로써 모든 이러저러한 것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내버린다. 이렇게 해서 거짓 신, 우상이 세워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내버려 두사.” 그와 같은 혼동에는 보복이 따른다. 그 혼동 자체가 바로 벌이다. 참 하나님을 망각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그분의 진노의 분출이다. 그것은 그분을 잊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진노다(1:ㅣ18). 거짓 신을 세우는 시도는 바로 그 시도가 성공함으로써 스스로 보복을 당한다. 신격화된 자연의 힘, 영혼의 힘이 이제는 신이다. 그것들이 제우스, 마르스, 이시스[고대 이집트 풍요의 여신], 오시리스[고대 이집트 저승의 신, 이시스의 남편], 키벨레[프리기아 대지의 여신으로서 곡물의 결실과 다산을 상징], 아티스[키벨레의 사랑을 받는 프리기아의 소년]로서 우리 삶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이제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통해 결정된다. 필연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세워 놓은 목표 지점에 도달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모든 우상과 비유가 그 자체로 목표와 내용과 목적이 된다. 이제 인간은 여러 가지 사물들과 온갖 “자연”과 “문화”의 종이 되고 그것들의 노리갯감이 된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지양되고 재정립된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이제 인간이 가장 높은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 앞에서 인간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더 높은 존재는 없다. 하나님과 관계가 불순해지자 그의 삶도 불순함에 처박힌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잃어버리니 인간도 영광을 잃어버린다. 내면과 더불어 외면도 치욕을 당하고 영혼과 더불어 육체도 치욕을 당하니, 이는 인간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삶의 사물성(Dinglichkeit), 피조성은 불명예가 된다. 이제 리비도(Libido), 곧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의 선정성인 그 리비도가 인간의 모든 욕망과 갈망의 원천으로서 너무나 우려스럽고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이제 인간은 세상이 굴러가는 형편의 모든 치욕을 치욕으로 받아들여 참고 탄식하고 저주하면서도,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치욕을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이 세상의 잘 알려진 신을 체험하고자 했다. 그 알려진 신을 인간은 지금도 체험하고 있다.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으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타락은 금세 더욱 날카로운 형태를 취한다.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을 직접 체험한다는 것은 가끔 일어나는 혼동, 또한 놀이와 같은 혼동일 수도 있다. 그것은 비교적 피상적인 오류, 하나님의 진리를 온갖 세상 진리 속에 녹여 버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그런 가능성이 자리를 잡으면, 진리를 거짓과 맞바꾸는 심각한 역리(逆理)가 일어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하나님과 인간의 간격이 지워진 곳에서 그 사이의 한복판에 일어난 작은 안개는 구름바다로 변하고, 그러면 양극 자체는 분간이 되지 않는다. 알수 없는 하나님과의 대립은 반쯤 의식되다가 이제는 명백해진다. 눈이 부셔 잘 못 보던 눈이 이제는 병든 눈이 된다. 이따금 왕좌에 올라온 권세와 세력들은 거기에 아예 자리를 잡고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1:20)의 빛을 화환처럼 두르는데, 창조주이시며 영원한 근원이신 분은 점점 “더 추상적이고”, “더 이론적이고”, 더 인기가 없고 더 무의미한 존재가 된다. 세계 내부의 존귀와 영광 너머에 계신 알 수 없는 분의 앙상한 흔적,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의 저편에서 가끔 호명되는 최후의 비밀이 남아 있다고는 해도, 이른바 최고의 구체성이라는 거짓 신이 승리한다. 유일한 실재,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은 이제 경박한 것, 문제가 있는 것,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 반면 가장 경박하고 문제가 많고 비현실적인 것, 곧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이 세상, 그리고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므로 망가져 버린 인간은 안전성과 필연성과 현실성의 후광 속에 서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은 “경배하고 섬길”만하게 된다. 꼭 필요한 경우에는 창조주를 고려하지 않아도 괜찮다. [역설적으로] 이 점에 관해서는 자연과학적/역사적 세계관과 철학적/신학적 세계관은 겉으로 보기보다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세상은 단순히 하나님 옆에 나란히 서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하나님 자리에 들어선다. 세상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옛 스타일의 경건한 사람이 자기 하나님을 향해 가진 똑 같은 경건”(슈트라우스)을 요구한다. 이렇게 하나님이 된 세상(Gott-Welt)내부에서 일어나는 대립(자연과 문화, 물질주의와 관념주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세상과 교회, 제국주의와 민주주의 등)은 사실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설도 없고 부정도 없고 영원도 없는 이 세상 내부에서 대립일 뿐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내버려 두셨으니.” 부서지지 않은 자연성[본성]은 순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종교적으로 변형된다고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 안에는 항상 비(非)본성(Unnatur)과 반(反)본성(Widernatur)이 감춰져 있어 언제라도 박차고 나오려고 한다. 하나님을 세상과 맞바꾸는 것은 본성을 그냥 방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이 맞바꿈은 필수불가결하고 불가피한 것을 그것의 악마적 캐리커쳐[희화]와 맞바꾸는 것에 상응한다. 이제 이 희화라는 것이 근본적으로는 저 필수불가결하고 불가피한 것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주장하려 든다. 안 그래도 심각한 상황이 이제는 허무맹랑한 것을 향해 돌진한다. 리비도가 모든 것이 되고 인생은 무제한으로 선정적인 것이 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없어지고, 그 사이에 최후의 엄격한 장벽과 장애가 없어지면, “정상”과 변태 사이의 경계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28-31. 이러한 상황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첨예하게 드러내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렇게 도착(倒錯)된 관계 속에서도 아직 “분명히 보여 알려짐”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종교적인 교만을 거부하시는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최후 경고성의 성찰이다. 그 신비의 여운이 신이 된 세상의 세력들 위에도, 신격화된 우주 위에도 남아 있다. 거짓 신 위에 있는 이런 황폐한 흔적, 알 수 없는 분의 흔적이 방해를 받으면서도 가끔 예감과 전율로서 관철된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그칠 수 있다. 병든 눈은 보지 못하고, 인식의 결핍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 곧 “불가지”(고전15:34)가 될 수 있다.
28 또한 그들이 지식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그들은 진지하게 경탄하고 경악하는 능력을 잃었으며, 감정과 경험과 체험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는 능력도 잃었다. 그들은 위로부터 비치는 빛도 없고 배경도 없는 상태에서 어느 정도 제기발랄한 궤변의 범위에서 사유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로써 최후의 공허와 붕괴가 시작된다. 혼돈은 여러 요소로 분해되고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이제 원자들이 소용돌이친다. 이제 생존 투쟁이 광란을 일으킨다. 이성 자체가 비이성적인 것이 된다. 의무감이나 공동체 의식도 그 무게를 잃는다. 개인적 전횡과 사회적 불의가 판치는 세상이 열린다. 이것은 제정 로마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의 부서지지 않은 실존의 참된 본성이 여기서 드러나고 있다. 우리의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이제 우리에게 그분의 심판은 그야말로 심판이다. 그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불가능성을 그의 현실적이고 결정적인 불가능성으로 경험한다.
이러한 맥락을 깨닫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이것이 스스로를 어리석게 만드는(1:22) 밤의 지혜다. 그 지혜가 어리석은 것은 인간적인 일에 대한 표면적 관측이 끊임없이 실제 사실과 어긋나는데도 전혀 요동치 않고 그 관측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그 지혜는 인간의 부서지지 않는 길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고 있다. 그 방향과 목표의 의미를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다. 원인과 결과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자신에게 과감히 "그만!”이라고 외치지 못한다. 자신의 창조주를 망각한 인간을 항상 따라다니는 것, 그것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인생의 연약함에 대한 당황스러운 탄신(Klage)과 인간의 죄성에 대한-이 땅에서 그 이유를 찾고자 하면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고소(Anklage)이다. 그러나 마지막은 언제나 그들이 이 땅에 시선을 고정하고, 모든 근본적인 저항에 맞서 그것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죽음이 이러한 망각의 결과이며, 어둠 속을 방황하는 우리의 최후다. 이 사실이 그렇게도 명백한데, 그 망각된 것을 기억하는 일은 왜 그렇게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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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해 보시라고 로마서공부(http://dabia.net/xe/?mid=bible&category=505&page=2&document_srl=8497)도 링크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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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23.09.28 20:24:33

정말 대단하십니다. 

바르트의 <로마서주석>을 일반 신자가 꼼꼼히 읽는다는 게 믿겨지지 않습니다.

덕분에 저도 저 대목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군요.

이번 연휴에 책 읽기에 매진하겠다는 다비안들이 몇 분 계시던데,

이보다 더 풍성한 연휴 보내기도 없겠지요.

저는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 1권> 중에서 '삼위일체' 항목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이런 책들이 어떤 분들에게는 이론이나 관념이나 추상으로 여겨지겠으나

실제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분명한 spiritual reality랍니다.

복된 한가위 연휴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래는 오늘 저녁 산책길에 우리집 마당에 본 달풍경입니다.

9월28일.jpg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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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북소리]

2023.09.29 00:08:38

네 목사님..삼위일체 하나님 잘 가르쳐 주십시요.


reality에 대해 제 말로는 감히 표현하지 못하지만 

바르트의 글속에 흐르는 의미들이 그렇다고 사유합니다.


예로.."의인은 한때 갇힌 죄수였다가 간수가 된 사람, 신적인 현실성의 문지방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는 이 세상의 삶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음으로써, 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시간은 영원에 비추어 보면 무(無)에 불과하다는 것, 모든 사물은 그 근원과 종말에 비추어 보면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 우리는 죄인이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다."


직원들에게 목사님 읽으시려는 책(3권)을 추석선물로 받았습니다.

제가 읽어낼까하는 의문은 항상있지만 우선 읽어 보려고 합니다. 

때가 되면 또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


보름달처럼 가득함으로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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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23.10.03 21:19:38

'의인은 ... 신적인 현실성의 문지방을 지키는 사람이다...'

기가 막힌 명문장입니다.

바르트가 기독교계의 노벨문학상이라 할 ***상을 받았다는 게 실감나네요.

직원들에게 받았다는 책이 바로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쓴 연작 철학책을 가리키나요?

그 작은 공장 직원과 사장의 관계가 불가사의이군요.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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