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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2174 추천 수 0 2010.10.01 10:30:53

진리는 존재한다.진리는 다만 존재할 뿐,진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진리에 대해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있다해도 그것은 모두 거짓이 될 것이다.




진리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없다. 설명이 필요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진리는 <존재한다.>


진리는 그대를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다. 진리는 그대의 안에도 밖에도 있다.


진리에 대해 어떤 결론을 끌어낼 필요가 없다.

 



진리는 이미 결론지어졌다! 그대는 진리 안에 있다. 진리가 없다면 그대는 존재할 수 없다.


진리를 잃어버릴방법은 없다.진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러나 그대는 진리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잠에빠져서 진리를 인식하지 못한다.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철학이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진리에 대해 알려고 더 많이 노력하면 할수록 그대는 더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 진리를 알려는 노력자

 

체가 그대를 엉뚱한 길로 인도한다.


진리는 느껴질 수 있지만, 알려질 수는 없다. 이 말은 진리가 그대 앞에 현존하고,

 
그대가 진리 앞에 현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진리와 그대가 서로 만나고 하나가 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진리는 객관화될 수 없다. 그대는 진리를 저만치 떨어진 곳에 놓고 볼 수 없다.


진리를 손 안에 잡고 볼 수도없다. 그대는 제 삼자의 입장에서 진리를 관찰할 수 없다.

 

오로지 진리의 내부에서, 진리와 하나가 됨에 의해서만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느낌이 유일한 앎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아는 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 곧 길이라고.




지식은 일종의 무지無知(ignorance)이다. ignorance'는 ignor(무시하다)와 ance(명사형 어미)로 나눌

 

 수 있다.


그대는 진리를 무시한다. 그것이 무지無知의 의미이다. 진리는 이미 여기에 있다.


무지란 이미 존재하는 진리를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지식을 가질수록 더 무지해진다.

 

왜냐하면 안다고 생각할수록 이미 존재하는것을 더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론과 도그마,교리,

 

경전에 눈이 멀어 더 이상 실체를 볼 수 없다. 말과 언어의 미로에 빠져 그의 눈은 구름이 잔뜩 끼어버렸

 

다. 그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생각의 구름에 휩싸일수록,더 마음에 사로잡힐수록 그대는 그만큼 더 진리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지식은 필요없다.오로지 순진무구한 가슴만이,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고 예민하게 열려있는 가슴이

 

필요할뿐이다.알려고 노력하지 말라. 알려는 노력은 일종의 폭력이다.

 

그 노력 안에서 그대는 실체를 공격하고 겁탈한다.




이것이 내가 '학문(science)은 실체에 대한 강간'이라고 말하는이유이다.

 

'science'라는 말은 '아는 것(to know)'을 의미하는 어근에서 나왔다.학문은 지식이다.

 

그러나 종교(religion)는 지식이 아니다.종교는 사랑이다.

 

'religion'이라는 말은 함께 묶는다는 뜻의 어근에서 나왔다.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종교라는 말의 의미이다.




진리는 느껴지는 것이다.진리는 살아있는 경험이다.그러므로 진리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간에

 

그 말은진리가 아닐 것이다. 말해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다.

 




지금까지 말해진 것, 그리고 앞으로 말해질 수 있는 어떠한 말도 진리와 아무 관계도 없다.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진리는 매우 미묘하고 불가해(不可解)한 것이다.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마음을 통해서는 진리를 알 수 없다. 마음은 계속해서 빗나간다.

 

왜냐하면 마음의 기능자체가 반진리(反眞理:anti-truth)적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기능은 비실존적(non-existential)이다. 마음은 실존하지 않는 것에 대해 작용한다.

 

마음은 과거나 미래로 줄달음친다. 그러나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

 

는 것이다. 마음은 오로지 과거나 미래에 대해 작용할 뿐이다. 현재에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지금-여기에 있을 수 있다면,돌연 그대는 마음으로부터 미끌어져 나온다.

 

지금-여기에서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생각은 그대를 지금-여기에서 멀리 끌어낼 것이다.

 

단 하나의 생각만 있어도 그대는 지금-여기에서 수 천마일이나 벗어난다.

 

지금-여기에 존재할 때, 생각은 존재할 수 없다. 생각이 떠오를 공간이 없다.

 




마음은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작용한다.마음은 허구와 상상 속에서 작용한다. 마음은 꿈이다!


마음에 의해서는 진리를 알 수 없다.

 

내가 진리는 결코 알려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이다.

 
진리는 가슴에 의해 느껴지는 것이다.

 

머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기적인 단일체로써의 그대자신, 그대의 전체성에 의해 느껴지는 것이다.

 

진리를 알 때에는 그대의 머리와 가슴, 뼈, 혈관, 내장, 발가락까지도 진리를 안다.

 

그대의 숨결도 진리를 안다. 즉, 그대의 온몸, 그대의 존재자체가 진리를 아는 것이다.

 

진리는 그렇게 존재전체에의해 알려지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진리는 느껴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의미이다. 진리는 직접적인 경험이다.

 




한 승려가 조주(趙州)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조주가 대답했다.

"법당 안에 있는 것이지."

승려가 말했다.

"법당 안에 있는 것은 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이 아닙니까?"

"그렇지."

승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부처란 무엇입니까?"

조주가 대답했다.

"법당 안에 있는 것이지."



조주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질문은 터무니없다. 그래서 나도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그대의 질문은 어리석다.


그리고 어리석은 질문에 대해 지성적인 대답이란 있을 수 없다."




조주는 이 승려의 질문자체가 넌센스(nonsense)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붓다란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자체가 넌센스인 것이다. 붓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할 게 없다.

 

그것은 하나의 각성이며 경험이다. 붓다는그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경험인 것이다.

 

경전을 통해서는 붓다를 알 수 없다. 붓다를 아는 자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유일한 방법은 그대가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그대는 그 경험이 일어나도록 허용해야 한다.




불교의 언어적인 용법에 있어서 '붓다'라는 말은 진리와 동격으로 취급된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 거의 말하지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붓다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한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붓다가 되면-'붓다'라는 말은 그대가 깨달았다는 의미이다 -진리는 저절로

 

 드러난다.그러니 진리에 대해 말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물어야 할 것은 깨달음에 대한 것이다.

 

깨달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물어라.깨달으면 진리가 거기에 있다.깨닫지 못하면 진리는 없다.




그러므로 가장 기본적이고 실제적인 질문은 깨달음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 질문 또한 대답될 수 없다.그대는 직접 깨달아야 한다.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제자가 선사에게 물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깨달음의 요체(要諦)가 무엇이냐고 제게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선사가 말했다.

"그에게 이렇게 말하게.이것이 그것이다!"

이것이 그것이다!- 무슨 대답이 이런가? 그는 바로 눈 앞의 실체를 지시한다.-이것!



인도의 가장 뛰어난 철학서인 베단타(Vedanta)에서는 '그것이 너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선사(禪師)들은 '이것'에 대해 말한다.확실히 선사들의 이해는 베단타보다 더 심오하다.

 

왜냐하면 '저것'은 말하는 순간 다시 먼 미래로 가 버리기 때문이다.'이것'은 현재이다.

 

이것이 저것이다.이쪽 기슭이 저쪽 기슭이다.이 삶이 유일한 삶이며,이 순간이 영원이다.




이 순간을 살 수 있다면,이 순간 여기에 존재할 수 있다면 그때엔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족하다.

 

그때엔 고뇌할 필요도,질문할 필요도 없다.질문하기도 전에 이미 대답이 전해진다.

 

대답은 항상 여기에 있었다.다만 우리가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선(禪)의 모든 노력은 그대에게 그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깊이 잠들어 있다.인간은 비몽사몽간에 살아간다.

 

인간은 활동하고,일하고,태어나고,살고,죽지만 거의 몽유병환자와 같다.

 

인간의 마음은 매우 무디다.마음에서 지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지성적인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지성적인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지성적인 사람들은 있지만

 

지성적인 마음이란 없다.지성이란 마음이 떨어져 나갈때 생기는 것이다.




마음은 결코 독창적이지도 혁명적이지도 않다.마음은 항상 전통을 답습한다.

 

마음은 항상 반복적이고 기계적이다.마음은 로보트처럼 움직인다.

 

마음은 똑같은 것을 계속해서 되풀이한다.그것은 마치 컴퓨터와 같다.

 

그대가 무슨 음식을 주던간에 마음은 계속해서 그것을 되새김질한다.

그대의 마음과 그 기능을 관찰해 본적이 있는가?

 

마음에 새로운 일이란 일어나지 않는다.마음에 관한 한 새로운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그 때문에 그대는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대는 그 새로운 일들을 계속 무시한다.그대는 마음이라는 어리석은 도구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

 

마음을 사용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마음은 기억의 저장창고로써는 훌륭한 도구이다.

 

그러나 실체를 볼 수 있는 도구는 아니다.마음에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박쥐처럼 눈이 멀었다. 마음은 결코 지성적일 수 없다.

 

오로지 무심(無心:no-mind)만이 지성적이다. 무심만이 독창적이고 혁명적이다.



마음은 그대를 일종의 마비상태에 빠뜨린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투영이라는 무거운 짐에 눌려서 그대는 겨우 목숨을 연명해 간다.

 

그대는 최소한도로 살아간다. 그대는 최대한으로 살지 못한다.

 

그대 삶의 불꽃은 꺼질듯 말듯 가물거린다.

그러나 과거에 긁어모았던 사념과 먼지를 털어내면 불꽃은 다시 힘차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대의 삶 전체가 하나의 불꽃이 된다.그 불꽃은 연기도 없이 순수하게 타오른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생각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의식(consciousness),이것이 깨달음이다.

 

사념에 빠지지 말고 주의를 기울여라. 생각이 모여들 때마다 즉시 그것을 분산시켜라.

 

사념으로부터 빠져 나오라! 나무를 볼 때에 그대와 나무 사이에 생각이라는 장막을 치지 말라.

 

마음의 재잘거림없이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라.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그대의 내면에서도 의식(consciousness)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느껴라......

 

그러나 그에 대해 생각하지는 말라.

 

 

주장하거나 설명하지 말라. 그에 대해 말하지 말라. 그저 존재하라.

 

그러면 서서히 깨달음의 그림자가 느껴지기 시작할 것이다. 돌연 깨달음의 세계를 힐끗 보게 될 것이다.

 

부패하고 곰팡이 냄새 나는 그대의 방 안에 상쾌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듯이,

 

그대 영혼의 어두운 밤에 한 줄기 빛이 비치듯이, 그렇게 깨달음의 세계가 다가올 것이다.

 

돌연 다시 생명을 얻은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대는 나자로(Lazarus)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을 것이다.나자로가 죽었다.

 

예수는 나자로를 매우 사랑했었다.나자로의 누이가 예수에게 나자로의 죽음을 알렸다.

 

예수가 그 소식을 접한 것은 나자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후였다.

 

예수는 나자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프게 울고 있었다.

예수가 말했다.

"울지 말라. 내가 그를 다시 살려내겠다!"


아무도 예수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나자로는 죽었다!

나자로의 누이가 말했다.

"그는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그의 시신은 이미 부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시신이 보관되어 있는 무덤으로 가서 돌문을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 어두운 동굴에 대고 예수는 소리쳤다.

"나자로여! 어서 나오라!"

그러자 나자로가 살아서 걸어나왔다.



아마 이것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마 이것은 비유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름다운 비유이다.

 

그 대의 눈을 들여다 보면서 나는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다.



"나자로여! 어서 나오라!"



그대는 죽어서 부패해 가고 있다. 그대는 아직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다.

 

그대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대의 첫번째 탄생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첫번째 탄생은 그대에게 어떤 외형적인 틀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것으론 충분치 않다.

 

그대는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그대에게 일어난 첫번째 탄생은 단지 육체적인 것이다.

 

그대에겐 영적인 탄생이 필요하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니고데모(Nicodemus)라는 사람이 한 밤중에 예수를 찾아왔다.

 

그는 매우 부유하고 존경받는 사람이었으며,유태인 사이에는 잘 알려진 유명한 학자였다.

 

그는 낮에 예수를 찾아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는 학식있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런 그가 일개 목수의 아들을 찾아간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더구나 예수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의 아버지뻘쯤 되는 나이였다.


그러니 그가 낮에 예수를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없는 밤에 예수를 찾아갔다.

예수가 그에게 물었다.

"왜 낮에 오지 않았소?"

니고데모가 말했다.

"나는 두려웠습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는 웃었을 것이다.

예수가 말했다.

"니고데모,여기 온 목적이 무엇이오?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이오?"

니고데모가 말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신을 알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진리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예수가 말했다.


"그대는 거듭나야 하오."

니고데모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다시 여자의 자궁 안에 들어가야한단 말입니까?

 

 지금 농담을 하고 계신 겁니까?"



예수가 말했다.

"농담이 아니오. 나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오. 그대는 다시 태어나야 하오.

 

그대는 지나치게 겁이 많소. 이것은 삶이라 할 수도 없소. 그대에겐 용기가 없소.

 

그대는 다시 태어나야 하오! 그대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오.

 

오로지 새로운 사람만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소.

 

그런데 그대는 나를 만나는 것조차도 사람들을 피해 밤에 와야만 했소.

 

그렇게 겁이 많으니 어떻게 진리를 알 수 있겠소? 어떻게 신과 대면할 수 있단 말이오?

 

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완전히 벌거벗어야 하오.

 

그대에게 쏟아지는 존경과 학문적인 명성을 모두 포기해야 할 것이오.

 

그대는 에고를 포기해야 하오. 이것이 '거듭남' 의 의미요."


첫번째 탄생은 육체적인 탄생이다.거기에 만족하지 말라. 그것으론 충분치 않다.

 

두번째 탄생이 있어야 한다.

 
첫번째 탄생은 엄마와 아버지를 통해 이루어졌다. 두번째 탄생은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대는 마음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그것이 그대의 거듭남이 될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나무는 지금까지보다 더 푸르러질 것이며 꽃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삶은 지금까지 그대가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 생생해질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살아있는 정도만큼만 삶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생생하게 살아있지 않다면 그대는 삶을 알 수 없다.

 

그대가 무엇이든 간에, 그대는 그 한도내에서 삶을 인식한다.



마음은 감옥이다.마음을 제거하라. 어떻게 진리를 아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마음을 없애느냐 하는 것이다.


이 끊임없는 무지와 무시를 어떻게 없애느냐, 어떻게 하면 진리--이미 그 자리에 존재하는,

 

그리고 항상 그 자리에 있었던 진리--


와 만나 함께 흐르고 고동치며 이 자리에 벌거벗은 채 존재하느냐? 그것이 문제이다

 

 

 

어떤 사람이 중국의 유명한 시인인 양만리(楊萬里)에게 물었다.


"시란 무엇입니까?"


그가 말했다.


"만일 당신이 시를 단지 단어의 문제로 말한다면,나는 단어를 제거한 시가 훌륭한 시라고 말할 것이오. 또 당신이 시를 단지 의미의 문제로 말한다면,나는 의미를 제거한 시가 훌륭한 시라고 말할 것이오. 그러나 당신이 '단어도 없고 의미도 없다면 시는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오.


'단어를 없애고 의미를 없애도 시는 여전히 거기에 있다.'"

 

사실,그럴때에만 시가 있을 수 있다. 언어와 의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돌연 폭발하듯이 시가 솟아오른다. 시는 그대 존재의 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종교는 철학보다는 시에 가깝다. 철학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 든다.그러나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철학은 모든 것을 요리조리 억지로 꿰맞출 뿐,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종교는 삶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삶을 살려고 노력할 뿐이다. 종교는 삶을 해결해야할 문제로 취급하지 않는다.종교는 삶을 살아야할 신비로 다룬다.


종교는 삶을 호기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경외의 눈으로 본다. 삶에 대한 엄청난 경외감, 거기에 종교가 있다.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기적이다! 내가 왜 여기에 존재하는지, 그대가 왜 여기에 존재하는지 그 이유는 설명될 수 없다. 이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우주가 나무와 새, 사람들과 더불어스스로 움직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알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주는 다만 존재할 따름이다. 그러나 우주는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우주는 불가사의하다! 그것은 불합리하지만 아름답기 그지없다.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그 이유를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이유를 묻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말한다.우주 안에서 기뻐하라.그것을 즐겨라! 그것과 일체가 되라! 서로의 안으로 파고드는 연인들처럼 그 안에 녹아 들어라. 그것을 오르가즘(orgasm)의 경험이 되게 하라.

 

그러나 서양에서 종교라는 말은 매우 좋지않은 뉘앙스를 풍긴다. '종교'라는 단어자체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지경에 이르렀다. 서양에서 종교라는 말은 돌처럼 딱딱한 성직자와 교회를 연상시킨다.

 종교는 심각하고 우울해보이는 사람들을 생각나게 한다. 서양의 종교는 춤추고 노래하고 축제를 즐길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종교가그런 능력을 잃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신학일 뿐이다.

 

신학은 죽은 종교이다.

서양에서는 신학이 종교를 지배한다. 그러나 신학이 종교를 지배하게 되면 종교는 철학으로 전락한다. 사실,신학화된 종교는 철학의 축에 끼지도 못하다.

 

철학은 의심을 통해 존재하지만 신학은 믿음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능한 철학이며,진정한 의미에서는 철학이라고도 할 수 없다.

 

종교는 신앙이나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다. 종교는 경외감에 기초한다. 종교는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신비에토대를 둔다. 그 신비를 느끼고 인식하라. 그 신비를 보라. 눈을 뜨라.그리고 대대로 물려받은 먼지를 털어내라.


그대의 거울을 청소하라! 그리곤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이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지 보라. 얼마나 많은 장관(壯觀)이 그대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지 보라. 왜 그대는 눈을 감고 있는가? 그대는 왜 그렇게 우울한 얼굴로앉아 있는가? 그대는 왜 춤추지 못하는가? 왜 웃지 못하는가?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은 옳다.그것은 신학자들이 신을 죽였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이 춤추고있을 때 신은 살아있다. 그러나 신학자들이 신을 증명하려고 애쓸 때,신은 죽고 만다.두 사람이 사랑에 빠질 때 신은 즐거움에 고동치고 열광한다.그대가 꽃을 들여다 볼 때 신은 살아있다.

 

그때,그대는 그 자리를 뜰 수 없다.
무엇인가 그대를 압도한다.별을 쳐다보면서 이 우주의 신비와 하나가 될 때, 그리고 그대의 배가 저쪽 기슭을 향해 항해하기 시작할 때,그 때에 신은 살아있다. 그대가 노래부를 때......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이 그저 랄랄랄하는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기쁨의 표현 안에 신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대가 살아있을 때에는 신 또한 살아있다.그대가 살아있지 않다면 그대의 신이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겠는가? 그대의 신은 그대에게 속한다.그대가 죽으면 그대의 신도 죽는다.그대의 신은 그대 이상이 될 수 없다.왜냐하면 신은 그대 내면의 가장 중심적인 핵(core)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이 무엇인지 알기 원한다면 더 생생하게 살아있으라. 더 신성해지라.신이 무엇인지 알기 원한다면,알려고 하지 말고 느끼도록 힘쓰라. 신은 가슴의 문을 통해 오기 때문이다.

 

신은 엄청난 신비이다. 신을 삶 또는 존재로 부를 수도 있다. 삶은 엄청난 신비이다. 삶의 가장 중심에 있는 성소(聖所)에 들어간다해도 그대는 그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성스러운 사원은 불가사의하다. 그것은 믿기 힘들다.

 

그대가 신을 알았다해도, 그대는 신을 알았다고는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신은 신비라고 말하는 의미이다. 알려지지 않았을 때, 그는 미지의 세계에 남아있다. 알려졌을 때 또한 그는 알 수 없는 존재이다.


볼 수 없을 때, 그는 하나의 신비이다. 보여질 때, 그는 더 큰 신비가 된다.그 신비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신비는 그대보다 훨씬 더 크다. 그대는 그 안에 용해될 수는 있지만 그 신비를 해결할 수는 없다.

 

서양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선(禪)적인 태도에 아주 근접한 인물이다.그는 철학적인 문제는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그 문제들을 분해시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놔둘 때,우리는 난생 처음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할 게 없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그대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전부이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철학은 다만 모든 사물을 우리들 앞에 가져다 놓을 뿐,아무 것도 설명하거나 추론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 보일 때에는 아무 것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 삶은 신비이다. 아무 것도 설명할 게 없다.모든 것이 그대 앞에 열려있기 때문이다. 삶은 바로 그대 앞에 있다.그 삶과 마주치라! 삶과 만나라! 용기를 내라! 그것이 선(禪)의 태도이다.

 

이제 나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도록 그대를 도울 것이다.나는 이 선의 일화들을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만 그 이야기들 속으로 들어가도록 그대를 부추키고 유혹할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을
맛보라고 그대를 설득하는 게 전부이다.

 

양고조(梁高祖)가 금강경을 설명해 달라고
부대사(傅大士)를 초빙했다.

 

금강경은 보석 중의 보석이다.금강경은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말해진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금강경에 있는 붓다의 말은 가장 소중한 것들이다. 금강경의 기본적인 관점은,아무 것도 설명될 수 없다는것이다. 삶은 불가해(不可解)하다. 삶은 아무리 설명해도 불충분하며,모든 철학은 매우 협소하다는 것이 증명될 뿐이다.삶의 하늘은 너무나 광대해서 어떠한 가설이나 이론으로 그 하늘을 제한할 수 없다.



붓다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그는 열개에서 열 두개의 문제를 목록으로 작성했고,
그의 제자들은 붓다가 마을에 들어서기 전에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 열 두개의 문제에 대해서는 묻지 마시오. 스승님은 대답하지 않을 것이오."
붓다에게 대답할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만일 그가 대답할 수 없다면 세상의 누가 대답할 수 있겠는가?


그 문제들은 대답될 수 없는 것들이다.그 것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낫다.

어느 누구도 붓다에게 신에 대해 물을 수 없었다. 붓다는 신이 존재한다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양쪽 다 옳은 대답이 아니라고 말했다. 신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당한 말이다. 신은 긍정과 부정을 초월한다.

 

신은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다.신은 둘 다를 넘어선다.신은 이분법을 초월한다.<있다>와 <없다>는 이중성을 만들어낸다. 존재는 하나이다. 유기적으로 하나이다. 존재는 부정과 긍정 양자(兩者)를 다 포함한다.
형이상학적인 질문들에 대해 붓다는 '묻지 말라'고 말했다.

 

양고조(梁高祖)는 또 하나의 붓다인 부대사(傅大士)에게 자신의 궁전으로 가서 금강경을 설명해 달라고 청했다.
불교인들은 금강경을 이해하기를 열망한다.금강경은 불합리하기 그지없다.금강경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아무 설명도 없기 때문이다.금강경에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말들이 들어있지만 그에 대해 어떠한 철학체계도 세워지지 않았다. 금강경은 원자처럼 따로 떨어져 있다. 금강경의 토대는,아무 것도 말해질 수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자의 도덕경과 같다.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말해진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말해진 진리는 비진리가 된다.진리를 말하면 그것은 거짓이 된다.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이해하란 말인가?

 

황제는 금강경을 읽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깨달은 사람에게 묻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금강경,또는 그런 종류의 경전은 완전히 비논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금강경과 같은 경전을 논리적으로분류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금강경은 그대를 매우 혼란시킬 것이다. 그대는 그 경전을 계속해서 암송하고,
그 읆조림의 가락을 즐길 수는 있다. 그러나 경전 속의 신비로 뚫고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다.그 신비는 오로지살아있는 각자(覺者)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부대사는 단상에 올라가더니 앞에 놓인
책상을 꽝 내려쳤다.
그리고는 단상에서 내려와
아무 말없이 떠났다.

 

이것이 금강경에 대한 그의 설명이었다.그는 엄청난 일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그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가?


그 첫번째는, 진리는 행동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로는 충분치 않다. 만일 황제가 선사의 걷는 모습을 잘 관찰했다면,거기에 금강경에 대한 설명이 있었을 것이다. 선사는 아름답고 우아하며 품위있게 걸었다.


그의 걸음걸이에 금강경에 대한 주석이 있었다. 그는 붓다처럼 걸었을 것이다. 그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붓다였다. 그는 붓다처럼 깨달음의 빛을 방사하고 있었다. 그는 궁전 안에 새로운 우주를 갖고 왔을 것이다. 그것은 생동감이 넘치는 우주였다. 그의 문은 열려 있었다. 황제에게 눈이 있었다면 그는 붓다가 왔음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지구 위를 걷고 있는 붓다였다.다만 모습과 이름이 달랐을 뿐이다.

 

부대사는 단상에 올라가더니 앞에 놓인
책상을 꽝 내려쳤다.

 

그는 왜 단상을 내려쳤을까? 그는 황제가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황제의 의식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황제를 깨우기 위하여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밑으로 내려와......

 

그의 행동은 멋있다! 그 외에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누군가 잠들어 있다면,그에게 소리치고 문을 두드려 깨우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부대사는 단상에 올라가더니 앞에 놓인책상을 꽝 내려쳤다.

그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 다음에 그는 의젓하게 내려왔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떠났다.

 

만일 그가 금강경에 대해 입을 열었다면,그는 자신이 금강경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폭로하는 격이 되었을 것이다.
금강경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금강경은 진리 자체이다.그러므로 금감경에 대해 입을 연다면
그것은 진리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다! 금강경에 대한 주석이란 침묵뿐이다.황제에게
침묵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다면,그는 금강경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떠났다.

 

그가 그렇게 갑자기 떠나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왜냐하면 그 이상의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에게 진리를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이젠 더 이상 꾸물거리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갑자기 선사가 떠나버리자 황제는 또 한번 충격받았다. 선사는 황제를 뿌리까지 뒤흔들었을 것이다.그는 태풍처럼 불어와서 황제의 나무를 뿌리 채 뽑아버렸다! 황제는 선사가 그처럼 무례하게 행동하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다. 선사의 행동은 무한한 자비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눈에는 거칠고 무례한 행동으로 보였을 것이다.

 

일본같은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예절에 사로잡혀 있다.그들의 얼굴은 모두 가짜이다. 모든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다닌다! 일본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거짓된 얼굴의 소유자이다. 그들은 항상 웃음띈 얼굴로 치장한다.


황제는 매우 충격받았을 것이다. 그는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었다......그리고 선사는 별안간에 떠나버렸다!
황제는 약속된 날을 오래동안 기다려왔을 것이다. 그는 선사가 무엇인가 말해주기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그는 선사가 자신을 깨우쳐주고 도움을 주기를 기다려왔다. 드디어 기다리던 선사가 왔다. 그런데 선사는 단상에 올라가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떠나버렸다!

 

얼마동안 황제는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황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선사는 엉뚱한 행동으로 황제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황제가 조금만 깨어있었다면 그 순간 새로운 차원이 열렸을 것이다. 선사는 그 새로운 차원으로 황제를 초청하고 기다렸다.그러나 황제는 완전히 잠들어 있었다.선사가 소리를 질렀다해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나자로여! 어서 나오라!'하고 부른다해도 황제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선사는 떠났고 황제는 크게 충격받았다. 잠시동안 그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지공(誌公)이 물었다.
"여쭙기 황송하지만 그를 이해하셨는지요?"

 

보통사람에게도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 하물며 황제에게 '폐하! 이해하셨는지요?' 하고 묻는다는 것은......
이 사람,지공(誌公)은 대단한 이해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선사의 행동이 암시하는 바를 이해했다.그는 선사의 걸음걸이에서 우아함을 보았다.그는 침묵 안에서 빛나는 깨달음의 광채를 보았다. 그는 선사의 눈이 자비심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았다. 그는 산들바람처럼 조용하고 신선하게 다가오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황제가 안스러웠다.

 

"여쭙기 황송하지만 그를 이해하셨는지요?"
황제는 슬프게 머리를 저었다.

 

황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슬펐다. 그리고 이 신하가 황제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이제 황제는 자신의 눈 앞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났었다는 것을 안다. 그는 충분히 활용할 수도 있었을 기회가 지나갔다는 것을 안다. 이제 그는 그 기회를 놓쳤음을 안다.

 

황제는 슬프게 머리를 저었다.

 

역사 이래,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있다. 붓다,예수,짜라투스트라,크리슈나같은 인물들이
세상에 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또한 그들을 이해하는 사람도 극소수이다.황제는 군중의 상징이다.
황제는 다수의 대중을 의미한다.

 

붓다가 와서 이 세상을 거닌다.그는 이 세상에 다른 세상을 가져온다.그는 말로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져온다.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눈 있는 자는 보라!"

 

진리가 그들 앞에 서 있었다.신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신은 수 없이 지구에 왔다. 신은 지구에 관심이 많다!
수 많은 형상들 안에서 신은 그대를 찾고 있다.그대가 신의 관심 밖이라곤 생각하지 말라.


그대만이 신을 찾고 있는 게 아니다. 신 또한 그대를 찾고 있다. 여러 형상들 안에서,여러가지 방법으로그대를 부르고 있다. 때로는 피리를 부는 크리슈나의 모습으로,때로는 침묵하는 붓다의 모습으로, 때로는 삶의혁명을 부르짖는 예수의 모습으로,그렇게 수 많은 방법으로 신은 그대를 향해 팔을 뻗고 있다.가끔씩은 그대의
손이 신의 손에 닿기도 한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때로는 희미한 빛과 전율이 뼈속 깊이 관통
하지만 그대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대는 그것을 설명하려 든다.

몇년 전, 한 여성이 나를 찾아 왔다. 그녀는 내 발을 잡고 앞에 업드려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그녀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두려워졌다.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내 발을 놓더니 뒤로 물러나 앉았다.


내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대의 내면에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다. 왜 뒤로 물러나는가?"


그녀가 말했다.


"나는 대학교수이며 심리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회귀이며 퇴행현상입니다. 나는 어린시절로 퇴행했음이 틀림없습니다. 당신은 내게 아버지의 형상처럼 작용했습니다.이런 현상은 별 게 아닙니다. 물론 무슨 일인가 일어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린시절을 향한 과거퇴행적 기억회상일 뿐입니다. 이건 일종의
최면술입니다. 당신은 시선을 통해 나를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녀는 이리저리 짜맞춰서 설명을 늘어놓았다.

 

 

무엇인가 큰 변화가 일어날 찰라였다. 한 순간만 더 지났으면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조금만 더 있었다면 그녀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나기 직전에,그녀는 두려워져서
뒤로 물러났다.물론 그녀는 지성적이고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뛰어난 합리화의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즉시 상황을 합리화시켰다.


"이것은 일종의 최면술이거나 어린시절로의 퇴행일 것입니다. 당신은 내게 죽은 아버지의 모습을 떠오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제,실제로 일어났던 일은 심리학적인 설명을 통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신은 여러번 그대를 찾아왔지만, 그때마다 그대는 뒤로 물러났다.신은 그대와 함께 걸었으나 그대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신은 여러차례 그대에게 소리쳤다.


"나자로! 어서 나오라!"


그러나 그대는 귀기울이지 않았다.그대는 이렇게 생각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이겠지. 내 이름은 나자로가 아니니까."

 

그대에게 말하겠다.-나자로는 바로 그대의 이름이다!

 

여기 이 선의 일화를 단순히 하나의 이야기로만 생각하지 말라. 이것이 붓다가 했던 일이다. 이것이 보디달마,노자,장자가 했던 일이다. 그들은 그대에게 소리쳤으며,그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러나 극소수의 사람들만이그것을 이해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경우에 심하게 화를 낸다. 그들은 분개한다.왜냐하면 그들의 잠이
방해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름답고 달콤한 꿈을 꾸며 잠자고 있었다.그런데 누군가 그들의 잠을 방해한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고,만수르(Mansoor)를 죽이고,소크라테스를 독살한 이유이다. 이들은 사람들의 잠을 방해했던 것이다.

 

"여쭙기 황송하지만 그를 이해하셨는지요?"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질문이다.사람들은 계속해서 자신이 이해했다고 믿는다.그러나 이런 믿음이 그들의 무지를 지켜주는 것이다. 앎을 향한 첫번째 단계는 자신이 알지 못함을 아는 것이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자신이 진리를 무시해 왔음을 겸손하게 깨닫는 것, 이것이 앎의 첫번째 단계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강가에 떠 있는 통나무 위에 개구리 네마리가 앉아 있었다. 갑자기 통나무가 물결에 휩쓸려 서서히 떠내려가기시작했다. 개구리들은 신이나고 몹시 흥분했다. 왜냐하면 그런 항해는 난생처음이었기 때문이다.얼마쯤 가다가 첫 번째 개구리가 말했다.


"이 통나무는 정말 신기하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잖아! 이런 통나무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두 번째 개구리가 말했다.


"여보게,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인가? 이 나무는 다른 나무와 다를 게 없네.나무는 움직이지 못한다구. 움직이는 것은 강물이야. 강물이 바다로 흐르면서 우리와 통나무를 떠내려가게 하는 거란 말일세."


세 번째 개구리가 말했다.


"천만에! 나무도 강물도 움직이지 않네. 움직이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지. 마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지."이제,세 마리의 개구리는 서로가 옳다고 다투기 시작했다. 말싸움이 더 격렬해지고 목청이 높아졌지만 그들은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었다.


그때, 문득 그들은 나머지 한 마리의 개구리에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그 네 번째 개구리는 그들의 언쟁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아무 말도 않고 평화롭게 앉아 있었다.그들이 네 번째 개구리에게 의견을 물었다.


네 번째 개구리가 말했다.


"자네들 모두 옳네. 아무도 틀리지 않았어. 통나무도 강물도 우리의 마음도 모두 움직이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네.


왜냐하면 움직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아무데로도 갈 곳이 없기 때문이지."

세 마리의 개구리는 몹시 화가 났다.그들 중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주장이 완전히 옳지 않으며,다른 두 마리의개구리가 완전히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기가 모른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 멍청한 네 번째 개구리가 뭘 안다고! 그것은 그들의 에고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다음에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이런 일은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그 세마리의 개구리는 합심해서 네 번째개구리를 강물로 밀어버렸던 것이다!

 

진리가 그대의 문을 두드릴 때, 문을 열고 손님을 환영하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진리가 문을 두드리는순간,돌연 그대는 지금까지 거짓 속에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그대는 자신의 주장과 사상이 모두거짓이었음을 깨닫는다. 진리와 마주칠 때,돌연 그대의 삶 전체가 무의미해진다.

 

그대의 과거는 다만 어둠에지나지 않았다.그러므로 에고가 진리를 받아들이기는 매우 힘들다.차라리 진리를 부정하고 문을 걸어잠그는 것이 더 마음 편하다. 붓다나 예수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더 낫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매우 힘들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한다는 것은 매우 굴욕적인일이다. 더우기 황제라는 신분에서는 더욱 그렇다. 황제들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신의대리인으로 행세한다. 그들은 지상에 재림한 신의 화신이다. 그들은 권력을 갖는다. 그리고 권력은 눈을 멀게 만든다. 그대에게 돈과 권력이 있고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때,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란 매우 힘들다. 다른 사람들이 그대를 현자로 생각할 때, 그대 자신의 무지를 깨닫기란 정말 어려운 노릇이다.

 

"여쭙기 황송하지만 그를 이해하셨는지요?"


황제는 슬프게 머리를 저었다.

황제는 겸손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비록 눈이 멀긴했지만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선사가 무슨 선물을 주었는지 알지 못했다.하지만 그는 거만하고 편협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가능성이 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음을 슬퍼했다. 그는 분노하지 않았다.

 

명심하라. 분노와 슬픔은 똑같은 에너지의 두 측면이다.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이다. 황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분노하거나 슬퍼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분노했다면,황제는 선사를 죽였을 것이다. 그는 선사를 감옥에 가두고 처형했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슬퍼했다. 거기에 희망이 있다.


슬픔에는 아름다운 일면이 있다.슬픔은 창조적으로 될 수 있다.그러나 분노는 항상 파괴적이다.만일 그가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면, 그는 선사가 자신을 모욕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러나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기회를 놓쳤다!"

 

만일 그대가 그처럼 겸손할 수 있다면 그대에게는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황제는 표적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멀지않아 그는 제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저런,부대사가 그토록 자상하게 일러주었건만!"

 

단상을 내리치고,우아하게 걸음으로써 선사는 황제의 궁전에 붓다의 세계를 가져왔다.그렇다! 선사의 설명은 더 이상 훌륭할 수 없었다.그는 할 수 있는 말은 다 했다.그는 어떤 상황을 만들었으며,그 상황 안에서 황제는 얼마든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었다.그는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선사에게는 어떤 잘못도 없다. 그보다 훌륭한 가르침은 있을 수 없다. 사실,그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선사와 같은 사람이 궁전을 찾아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황제가 찾아가야만했다. 그러나 선사는 자비심으로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직접 궁전을 방문했다.사실은 제자가 스승을 찾아가야 한다.그러나 때로는 스승이 제자를 찾아가는 경우도 있다.순수한 자비심과 사랑에서 말이다.선사는 깨달음의 불꽃을 활활 태웠다.그는 자신의 모습을 남김없이 드러내 보였다.그날처럼 그렇게 그가 활활 타오르며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드러내 보인 적은 없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많다.붓다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다른 선사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그들은 단상에 서서 좌중을 죽 둘러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상을 내려왔다. 하지만 이 부대사처럼 단상을 내리치며 황제를 혼수상태에서 흔들어 깨우려고 시도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 지공의 말은 옳다. 바로 그 순간에,어떤 변형이 일어날 수 있었다.
조변(趙弁)은 이렇게 읊었다.

 

돌연,뇌성벽력이 울리고....
마음의 문이 왈칵 열린다.
아,노인 하나가 제 집처럼
그 곳에 앉아 있다.

 

선사는 갑자기 천둥치는 소리를 만들었다.만일 황제가 이 엄청난 자비와 아름다움,이 선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바로 그 순간에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렸을 것이다.폭발하듯이 열렸을 것이다.

 

아,노인 하나가 제 집처럼
그 곳에 앉아 있다.

 

그대는 이미 그대가 찾고 있는 그것이다.그대가 찾는 것은 이미 그대 안에 앉아 있다.그것은 그대가 태어나기 전부터 거기에 있었다.

 

아,노인 하나가 제 집처럼
그 곳에 앉아 있다.

 

그러나 황제는 그것을 놓쳤다.
나는 날마다 그대에게 소리치고 있다.물론 나는 단상을 내려치지 않는다.나는 그대의 머리를 내리친다! 왜냐하면 그대의 혼수상태는 황제보다 훨씬 더 깊기 때문이다.단상을 내려치는 것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단상을 내려치면 그대는 내게 화를 낼 가능성이 높다. 그대는 슬퍼하지도 않을 것이다.그래서 나는 그대의 머리를 망치로 사정없이 내려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말하든 간에, 내가 말하기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나의 말들은 진리와 아무 관계도 없다.진리는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나의 말은 다만 망치질일 뿐이다.그 망치질로 인해 그대가 깨어난다면,그대는 진리를 보게 될 것이다.이것은 다만 하나의 기회를 만드는 작업일 뿐이다.나는 그대를 거칠게 흔들어 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저항하지 않는다면,나에게 협조하고 나와 함께 갈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대가 나를 신뢰하고 용기를 갖는다면, 그때 나의 말은 그대의 잠을 깨우는 뇌성벽력이 될 것이다.

 

삶은 소리도 없이 미끌어지듯 흘러가고......매 순간 그대는 그것을 놓치고 있다.이제 그 정도면 됐다! 그대는 너무 오랫동안 놓쳐왔다. 이제 그것은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그대는 이 습관을 파괴해야 한다.나와 나의 현존에 의해 축복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용기를 내는 것이다.그대의 무덤에서 나오라! 죽어있는 것은 그대의 껍질일 뿐이다. 그대는 결코 죽을 수 없다.이것이 나자로의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이다. 껍질만이 죽을 뿐 그대는 결코 죽지 않는다.깊은 곳에서 삶은 영원히 흐른다. 그대의 무덤에서 뛰어나오라! 앞으로 내 달려라!
깊이 잠들은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 뇌성벽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것이 모든 스승들이 하는 일이다.

 

돌연,뇌성벽력이 울리고....
마음의 문이 왈칵 열린다.
아,노인 하나가 제 집처럼
그 곳에 앉아 있다.

 

선(禪)에서 말하는 이 노인이란 신을 의미한다. 이 '노인'이란 말은 아름답다.그것은 그대의 본성을 가르킨다.그것은 가장 오래되고 영원한 그대의 본성이다. 마음을 떨쳐버리라! 생각을 멈추라! 더 주의깊게 깨어있으라! 나무를 보고 새소리를 들을 때,생각이라는 장막을 치지말라. 직접 만나라! 진리는 지금 여기에서 빛나고 있다. 진리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대의 깨어남이 필요할 뿐이다. 진리는 이미 여기에 있다.

 

나는 그대를 흔들어 깨운다.자신이 안다고는 생각하지 말라.그대는 아무 것도 모른다.그대의 지식이란 진리를 무시하는 방편일 뿐이다. 이 무지를 떨쳐 버리라.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함에 의해서는 무지를 떨쳐버릴 수 없다. 지식을 떨쳐버림에 의해서만 무지를 벗어날 수 있다.
지식은 앎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지식이 떨어져 나갈 때,앎의 꽃이 피어난다.

 

알겠는가?

 

 

 

종교적으로 볼 때,가장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는 인간이 깊이 잠들어 있다는 것이다.육체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인간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인간은 생각하고 일하고 걷고 상상하고 꿈꾸지만 그 밑바탕에는 삶의 기본적인 토대로써 끊임없이 잠이 이어진다.그대가 진정으로 깨어나는 순간은 드물다.그런 경우는 손가락으로 꼽을만큼 아주 드물다.그대가 칠십년을 산다고 치면 일곱번만 깨어나도 아주 많은 경우에 속한다.

 

 

사람들은 로보트처럼 산다.로보트는 기계적으로는 효율적일지 모르지만 자각(自覺)이 없다.바로 이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우리는 수 많은 문제에 부닥치지만 그 문제들은 모두 깊은 잠에서 생기는 부산물이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이 잠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선(禪)은 잠에서 깨어나 의식의 각성을 이루려는 노력이다.모든 종교는 더 의식적이 되려는 노력,삶에 더 많은 의식의 각성을 가져오려는 노력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인간의 잠이 깊은 동일시(identification)와 집착(attachment)으로 구성된다고 강조한다.


인간의 삶에는 두 층이 있다.하나는 본질적인 층이며 다른 하나는 부대적(附帶的인 층, 비본질적인 층이다.본질적인 것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그러나 부대적인 것은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다.본질적인 것은 영원하다.그것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그러나 부대적인 것은 우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다.그런데 우리는 부대적인 것에 너무 집착하고 본질적인 것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돈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돈은 부대적인 (accidental)것이다. 돈은 본질적인 삶과 아무 관계도 없다.인간은 집과 자동차,부인이나 남편,아이들,인간관계에 너무 집착한다.모든 관계는 부대적인 것이다.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20세기를 '부대적(附帶的)인 시대(the accidental century)'부르는 사람들이 있다.맞는 말이다.사람들은 돈,권력,명예,지위등 부대적인 것에 너무 집착해서 살고있다.그러나 죽을 때에는 그 모든 것을 남겨두고 가야 한다.알렉산더같은 사람조차 빈손으로 죽었다!

 

위대한 신비주의자가 죽었다.천국에 도착했을 때,그는 신에게 물었다.
"20세기에는 왜 예수님같은 인물이 태어나지 않습니까?"
신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야.어림도 없는 일이지! 20세기에 세 명의 현자(賢者)와 한 명의 숫처녀를 어디에서 구한단 말이냐?"

 

 

이십세기는 부대적인 것이 가장 횡행하는 시대이다.인간은 <나의 것>,<나의 소유물>에 너무 집착하게 되었다.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망각했다.사람들은 <나(I)>를 잊었으며 <나의 것(my)>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나의 것>이 더 중요하게 될 때,사람들은 부대적인 것에 더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나(I)>가 더 중요한 위치에 남아있을 때에 <나의 것(my)>은 충실한 하인일 뿐이다.그때에는 그대가 주인이다.그대는 노예가 아니다.주인이 될 때,그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을 살게 된다.

 

이렇듯 순수한 <나>가 존재하는 본처(本處)를 선(禪)에서는 '본래면목'이라고 부른다.이 <나>는 에고와 아무 관계도 없다.에고는 모든 비본질적인 소유물의 중심일 뿐이다.에고는 <나의 것>이 축적된 것이다.내 집, 내 차,나의 신분,나의 종교,나의 경전,나의 도덕성,나의 성격,나의 가족,나의 유산,나의 전통,-이 모든 <나의 것>들은 계속해서 축적되고 에고로써 굳어진다.


선(禪)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너의 진면목을 발견하라.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그 본래 얼굴을 발견하라.네가 죽어서도 다시 가지게 될 그 얼굴을 발견하라."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그대가 자신의 얼굴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간에 그 얼굴은 부대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다.그대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본다.그대는 내면으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느끼지 못한다.그대는 밖에서 자신의 얼굴을 본다.그대는 자신의 진면목을 아는가? 그대는 단지 거울이 비춰주는 얼굴을 알 뿐이다.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 거울이다.

 

남편은 부인에게 "여보,당신은 정말 아름답소!"하고 말한다.그러면 부인은 자신이 정말 예쁘다고 생각한다.당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당신은 정말 지혜롭고 지적인 분이십니다.당신은 보기 드물게 훌륭하신 분입니다." 하고 말하면 그대는 그 말을 믿기 시작한다.또 어떤 사람들은 그대를 비난하고 미워하며 화를 낸다.그때,그대는 그들의 말을 인정하지 않지만 무의식 깊은 곳에는 그들의 말이 축적된다.

 

 

어떤 사람은 그대를 아름답다고 말하고,또 어떤 사람은 못 생겼다고 말한다.어떤 사람은 그대를 현명하다고 말하고,다른 사람은 바보같다고 말한다.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 그대는 거울에 의존해서만 자신을 얼굴을 볼 수 있다.그런데 양쪽 모두가 거울이다.그대는 자신을 바보라고 말하는 거울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어쨌든 그 거울은 그렇게 말했고,나름대로 거울의 임무를 다했다.그대는 그 말을 애써 무시하고 의식하지 않으려할지도 모른다.그러나 하나의 거울이 그대를 보고 바보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지워지지않고 그대의 무의식 속에 남을 것이다.

 

 

그대는 거울을 믿는다.그때,그대는 분열될 수 밖에 없다.왜냐하면 그대에게는 수 많은 거울이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그 거울들은 저마다 다른 말을 한다.어떤 사람은 그대를 현명하다고 말한다.그것은 그대가 현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의견이 그렇다는 말이다.또 어떤 사람은 그대를 어리석다고 말한다.그것은 그대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말이다.그들은 다만 자신의 싫고 좋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그들은 그대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한다.그들은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지 그대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누구인지 보여줄 수 있는 거울은 없다.거울들은 단지 그대의 표면,그대의 피부만을 보여준다.그러나 그대의 피부가 그대는 아니다.그대 자신은 매우 깊은 곳에 있다.그대는 육체가 아니다.젊은 육체도 언젠가는 늙어버릴 것이다.건강하고 아름답던 육체도 어느 날 갑자기 불구가 되거나 마비상태에 빠질지도 모를 일이다.활기에 넘치던 그대도 언젠가는 생명력이 쇠퇴하여 바람빠진 고무풍선처럼 되어버릴 것이다.그러나 그대는 표피에 있지 않다! 진정한 존재는 그대의 중심에 있다.

 


부대적인 것에 몰두하는 사람은 표피 위에 산다.그러나 본질적인 인간은 중심에 머문다.
유태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겠다.이 이야기는 대단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

 

한 남자가 있었다.그는 항상 잠에 취해 있었다.그는 언제 어디서나 잠잘 준비가 되어 있었다.군중들이 많이 모이는 모임에서도,연주회장에서도,중요한 회의석상에서도 그는 앉은 채 잠자곤했다.

 

그대는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 사람은 곧 그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그대는 이 사람과 수 없이 많이 마주쳤을 것이다.어떻게 그를 피할 수 있겠는가? 그는 바로 그대이다!

 

그는 온갖 이상한 포즈로 잠을 잤다.그는 팔을 머리 뒤로 돌려 깍지를 끼고 선 채로 자기도 했다.그는 극장에서도,거리에서도,교회에서도 잠을 잤다.어디를 가든지 그의 눈은 잠에 취해 있었다.

 

만일 그가 힌두교인이었다면 물구나무를 서서 잤을 것이다.나는 그런 식으로 잠을 자는 힌두교인들을 본 적이 있다.많은 요기(yogi)들이 물구나무 서서 자는 재주를 갖고 있다.그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긴 하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다만 많은 훈련이 요구될 뿐이다.

 

이웃들의 말에 따르면,그는 큰 불이 났을 때에도 잠에 골아떨어져 있던 적이 일곱번이나 되었다. 한번은 그를 구출하여 길가에 내려 놓았는데도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결혼식에서도 잠에 취해 있었다.결혼서약이 진행되는 동안,사람들은 신랑인 그를 깨우기 위해 촛대로 여러번 내리쳐야 했다.그는 간신히 서약을 끝낸 다음 곧바로 잠에 골아떨어졌다.

 

그대의 결혼식과 신혼여행을 생각해 보라.그대는 진정으로 깨어있었는가? 그대는 항상 잠에 취해 있었다!

 

한번은 그가 침대에 누어 곤하게 자고 있었다.잠결에 그는 거리에서 천둥소리가 들리고 침대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그래서 그는 밖에 비가 내리나보다하고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하니 더 달콤한 잠에 빠져 들었다.그는 따뜻한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대는 어떤 일을 잠결에 해석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그대는 알람시계를 맞춰놓고 잠을 자지만,알람이 울릴 때면 종이 울리는 교회 안에 있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마음은 속임수를 부린다.그래서 알람소리로 인해 잠이 방해받는 것을 교묘히 피해간다.

 

잠을 깼을 때,그는 이상한 허공을 보았다.부인도 없고 침대도 없었다.이불도 없었다.그는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려 했지만 내다볼 창문이 없었다.그는 삼층 침실로부터 뛰어내려가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뛰어내려갈 계단이 없었다.더구나 고함칠 공기도 없었다.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했지만 문도 사라지고 없었다.모든 것이 어디론가 증발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한 가운데 그는 잠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러나 곧 그는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잠잘 지구(地球)가 없었다. 그는 절망해서 세상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세상이 사라질 때까지 잠을 잔 것이다.세상이 없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하지? 어디로 일하러 가야하지?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가야할까? 특히 요즈음은 물가가 비싼 시대가 아닌가? 달걀 한 꾸러미에 일 달러 이십 센트나 한다.그리고 친구에게 오달러 받을 게 있는데.아내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녀 또한 세상과 함께 사라진 것일까? 내 호주머니에 있던 삼십달러는?"

 

갑자기 세상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면 그대 또한 이런 식으로 생각할 것이다.그대는 그 밖에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그대는 달걀값,직장,부인,돈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그대는 그 밖에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세상이 사라졌다! 그런데 그대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기계적으로 생각한다.

 

그는 생각했다.
"만일 잠자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하지? 세상이 사라졌는데 어디에 몸을 눕혀야하지? 그리고 가게에 물건쌓는 일은 누가 끝내지? 우유가 마시고 싶다면 어디에서 우유를 사지?"

 

 

그대도 이렇게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잠들 때에는 머리 밑에 세상이 있었는데 깨어보니 세상이 없다!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죽었을 때에는 모든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갑자기 세상이 사라진다.돌연 그대는 이 세상에 속해있지 않다.갑자기 그대는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이것은 죽은 사람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왜냐하면 그대가 무엇을 알든간에 그것은 표면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이다.죽었을 때에 돌연 그대의 표면이 사라진다.그대는 중심에 던져진다.그런데 그대는 중심의 언어를 모른다.그대는 중심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그 중심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허공처럼 보일 것이다.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 망설이며 한 동안 서 있었다.그러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에라,집어치우자! 세상이 사라진들 무슨 상관이랴? 극장에 가서 영화나 보며 시간을 때우는 게 좋겠다."


그러나 그는 세상과 함께 극장 또한 사라진 것을 알고는 놀랐다.
그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이것 참 큰 일을 저질렀군! 잠에 취해서 큰 일을 저질렀어.만일 그렇게 깊이 잠들지 않았다면 다른 것들과 더불어 사라질 수도 있었을텐데! 그나저나 어디가서 우유를 구하지? 아침에는 우유를 한잔 마시는 맛이 그만인데! 그리고 마누라는 어찌 된 것일까? 누구와 함께 사라진 것일까? 만일 어떤 놈패이랑 눈이 맞아서 도망쳤다면 내 그 여편네를 가만두지 않겠어!"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시계를 보고자했다.그런데 시계를 찾을 수 없었다.양쪽 주머니를 뒤져 보아도 무한한 허공만이 있을 뿐,아무것도 만져지는 것이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산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세상이 사라진 것은 그렇다치자.나는 세상에는 관심이 없으니까.어차피 내 세상도 아닌데 뭘. 하지만 내 시계! 왜 내 시계가 사라져야 하지? 흠집 하나없는 새 시계인데!


그나저나 어디가야 우유를 구할 수 있을까? 아침에는 우유 한잔 마시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없는데. 나는 이렇게 엄청난 비극 속에서도 잠을 자고 있었어.그러니 이렇게 최악의 경우를 당해도 싸지. 도와주세요. 도-와- 주-세-요!


내 뇌는 어디에 있지? 그전에는 뇌가 어디에 있었을까? 왜 나는 세상과 마누라를 잘 감시하지 못했을까? 왜 그들이 사라지도록 수수방관했을까?"
그는 후회하며 허공에 대고 머리를 찧었다.그러나 허공은 매우 부드러웠다.아무리 머리를 찧어도 그의 이마는 상처 하나 없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이다.그대는 주변에 환상의 세계를 창조한다.그대는 죽을 때 가지고 가지도 못할 물건들에 집착한다.그대는 언젠가 수중에서 사라질 물건들에 계속 집착한다.

 

그래서 힌두교인들은 이 세상을 '환상'이라고 부른다.'세상'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그들은 세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말은,그대가 잠으로부터 세상을 창조했다는 뜻이다.그 세상은 마야(maya),즉 환상이다.그것은 꿈의 세계이다.

 

누가 그대의 부인인가? 그런 생각자체가 어리석은 것이다.누가 그대의 남편인가? 누가 그대의 아이인가? 그대조차도 그대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그대의 소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대조차도 그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관찰한 적이 있는가? 그대는 그대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존재계에 속한다.

 

그대 자신의 내면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라.그러면 자아(self)가 사라지는 지점에 도달할 것이다.그 곳엔 무아(no-self)의 상태가 있을 뿐이다. 그 상태를 초자아(the Supreme Self)라고 부를 수도 있다.어떻게 부르든 그것은 단지 용어의 차이일 뿐이다.그대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어떤 것들이 떠오르는 것을 느낀 적이 있는가? 그대의 욕망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그대의 생각 또한 그대에게 속하지 않는다.심지어는 그대의 의식(consciousness)조차도 그대가 창조한 것이 아니다.그것들은 그대에게 주어진 것이다.그것은 그대가 창조한 것이 아니다.어떻게 그대가 그것을 창조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갑자기 세상에 태어났다.....마술처럼! 그리고 그대는 항상 시작과 끝의 중간지점에 있다.그대는 시작에 대해 알지 못한다.시작은 그대의 권한 밖에 있다.끝 또한 마찬가지이다. 단지 중간지점에서만 그대는 창조할 수 있다.그 지점에서만 그대는 계속해서 꿈을 창조할 수 있다.이것이 인간이 부대적인(accidental) 존재가 된 방식이다.
주의하라! 더욱 더 본질적인 존재가 되라.부대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라. 오로지 영원한 것만이 진리이다.항상 이것을 명심하라.순간적인 것은 진리가 아니다.순간적인 것을 주의하라.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라.

 

 

한 아일랜드 노인이 호텔을 나왔다.버스를 타러 가다가,그는 방 안에 우산을 놔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그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신혼부부가 투숙하고 있었다.행여 그들의 허니문을 방해할까봐 노인은 방문 앞에 무릎을 꿇고 열쇠구멍에 귀를 대고는 방 안의 동태를 살폈다.


"이 사랑스런 눈은 누구우 꺼?"
노인의 귀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이 꺼!"
여자가 대답했다.
"그러면 이 오똑한 코는 누구우 꺼?"
"자기이 꺼!"
여자가 대답했다.
남자가 계속해서 물었다.
"이 앵두같은 입술은 누구우 꺼?"
"자기이 꺼!"
여자가 흥분에 들뜬 교태로운 목소리로 응답했다.
"그러면......"
남자가 또 물으려고 할 때,노인은 더 이상 문 밖에 서 있을 수 없었다.노인은 열쇠구멍에 입을 대고 소리쳤다.


"그 침대 옆에 있는 노란색 우산은 내 꺼요!"

 

<내 것>이라는 이 게임은 가장 어리석은 게임이다.하지만 세상은 이런 게임으로 가득 차 있다.이 지구는 그대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그대가 죽은 뒤에도 지구는 이 자리에 남을 것이다.그대가 갖고 있는 다이아몬드는 그대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그리고 그대가 죽은 뒤에도 있을 것이다.다이아몬드는 그대를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다이아몬드는 그대에게 소유되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이 소유라는 게임은 가장 바보같은 게임이다.하지만 사람들의 삶은 이런 게임이 전부이다.

 


구제프(Gurdjieff)는 이렇게 말했다.
"사물과 자신을 결부시키고 동일시하는 것을 포기하면,멀지 않아 그대의 본질적인 존재와 마주칠 것이다."

 

 

그것이 포기(renunciation)의 기본적인 의미이다.포기,또는 산야스(sannyas)는 세상을 단념하고 히말라야나 수도원으로 도망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세상으로부터 도망쳐 수도원에 들어간다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그대는 똑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여기 이 세상에서는 집이 그대의 것이었고 부인이 그대의 것이었다.이제는 수도원이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종교가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그대의 것'이라는 사실에는 아무 차이도 없을 것이다.

 

 

<나의 것>이라는 소유의식은 계속될 것이다.소유욕은 외부적인 장소와 아무 관계도 없다.소유의식은 내면의 환상,내면의 꿈이며 잠이다.

 

 

그대가 어디에 있건 아무 것도 단념할 필요가 없는 것, 이것이 진정한 포기(renunciation)의 의미이다.왜냐하면 그대는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포기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포기했다는 말은 그대가 어떤 것을 소유했었는데 이제는 단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하지만 소유한 적도 없는 것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포기는 그대가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그대는 사물을 이용할 수 있지만 소유할 수는 없다.그대는 이 지구상에 영원히 살아있지 않을 것이다.그러니 어떻게 소유할 수 있겠는가?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다.어떤 것을 이용하고 그것에 대해 감사할 수는 있다.자신을 이용하도록 허락해 준 사물에 대해 그대는 감사해야 한다.그 사물은 유용한 수단이다.하지만 그것을 소유할 수는 없다.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것이 진정한 포기이다.진정한 포기는 소유한 물건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소유의식 자체를 버리는 것이다.이것을 구제프는 '동일시(同一視)에서의 탈피(getting unidentified)'라고 불렀다.이것이 바울(Baul)들이 '아드하르 마누쉬(Ardhar Manush)',즉 본질적 인간의 체현이라고 부른 것이다.이것이 선(禪)에서 '본래면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오쇼             돈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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