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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 기도의 허구 (1)

조회 수 2768 추천 수 0 2010.03.04 23:02:10

소위 <명상 영성운동, 관상기도> 의 허구 (1)

                                                                                                              튤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교수

우리가 믿는 기독교 교계에는 요즘 말할 수 없으리만큼 여러 가지 희한한 교리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개 교회의 목사님들은 모르는 척 눈감아 주던지 아니면 몰라서 속수무책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교회는 점점 파괴되어 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아 진리의 복음이 왜곡되어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거나 믿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바울이 갈라디아 1;8-9에서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아주 엄한 어조로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대로 믿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요즘 잘못된 교리 중에 소위 <Contemplative Spirituality> (명상 영성 운동, 관상기도)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미 상당히 널리 교회에 파급되어 있고 지금도 계속 만연되어가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소위 “Soakers' Prayer" 라는 이상한 신앙 유형도 유행하고 있습니다. ”Soaker's Prayer" 란 최근에 등장한 운동인데 설교를 배격하고 가만히 앉아서 명상하면 머리에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 떠오르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 운동에 관해서 특강을 가질 기회가 있을 줄 압니다.  오늘은 교회를 좀먹고 있는  <명상 영성 운동> 에 관해서  한 시간 동안 강의하고 저 합니다.

항상 이상한 교리는 서부 California에서 시작되어 전국에 퍼집니다. 요즘 미국 California 주 Los Angeles 근처 아주사 대학의 Richard Foster 목사를 비롯한 많은 목사들이 정통기독교와는 다른 소위 <명상영성 운동> 을 권장하고 있어서 교계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들은 미국 내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에 여행하면서 많은 성도들에게 이런 빗나가는 영성운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Foster 목사가 쓴 책 <Celebration of Discipline. 20th Anniversary Edition>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1998 pp.30-31) 에 보면 성도가 기도할 때는 손바닥을 위로했다 아래로 뒤접었다 하면서 (palm up palm down) 기도해야 하나님에게 상달된다는 이상한 교리를 말합니다. 기도할 때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건 땅을 향하건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불교에서나 통하는 이런 이방종교의 가르침이 지금 뻐젓이 기독교에 도입되고 있다는데 우리는 우려를 금치 못합니다.  

요즘은 불교의 관행이 기독교에서 아무런 여과없이 그대로 통용됩니다  불교의 사찰에서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눈여겨 보십시오.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했다 위로 향하게 했다 합니다.  Foster 목사의 이 책이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주는데도 이 책은 어떤 신학교에서 강의시간에  참고 교재 목록에 올라갈 정도로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참으로 요즘의 기독교는 요지경입니다.

Richard Foster 목사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Azusa 대학교의 교수로 있는 분이면 나름대로 자기가 원하는 영성훈련을 전파하기위해서 많은 책을 집필하면서 <Renovare> 라는 교회 혁신 운동을 주도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Renovare Spiritual Formation Bible> 이라는 성경을 편집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의 사상은 주로 <Celebration of Discipline> 이라는 책에 잘 나타나는데 그의 책은 한때 New York Times 의 best seller 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고 미국 복음주의 출판협회의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물론 “복음주의” 라는 말 자체가 우리가 옛날에 알고 있던 그런 개념은 사라지고 새로운 의미의 단어로 변신했으니 “복음주의” 라는 말이 붙어 있다고 해서 모두 옛날의 복음주의 신학의 개념을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명상영성 운동을 <Contemplative Formation> 이라고 하기도하고 또는 <Contemplative Spirituality> 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왜 나쁜 것이며 왜 막아야 하는지 오늘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강의하고 저 합니다.

오늘 강의의 초점은 “명상” 혹은 “묵상” 한다는 말의 의미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기도는 어느 종교에서나 중요합니다. 기독교를 믿는 성도들은 어떻게 기도합니까? 사람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충만하지 않고 머리를 비우고 기도하면 무아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속을 비우면 무아지경에 이릅니다. 힌두교에서 이런 방법으로 기도합니다. 힌두교를 본 받아 오늘의 뉴에이지 운동가들이 그렇게 기도합니다. 앞서 언급한 Richard Foster 목사는 그가 새로 펴낸 책 <Life with God: Reading the Bible for Spiritual Transformation> 이란 책에서  이런 영성운동을 하면 <하나님의 운동선수> 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p.14). .  

그가 말하는 “영성운동” 이란 <금식, 기도, 성경연구, 봉사활동, 혼자서 하는 영적인 신앙고백, 예배, 명상, 그리고 정숙> 이라고 합니다.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분들은 영성 이란 말을 명상하는 기도, 즉 명상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연관을 짓는데 이런 일들이 과연 성경적인가 보도록 합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영성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기도할 때 무언으로 영성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나아가라고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는가 여부를 보자는 말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기도하는가?  이것은 힌두교에서 하는 기도방식입니다. 기독교 신자는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다. 침묵하면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머리를 비운채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기도 합니다.  이것이 명상영성운동을 하는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선 구약 시편을 보도록 합시다. 왜냐 하면 시편에 구약 사람들의 기도의 모습이 많이 기록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구약 시편은 이들 명상영성운동가들이 즐겨 인용하는 증거구절들이 많습니다. 구약의 시편기자들이 말하는 “잠잠할 지어다” 라는 말의 참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를 푸는 관건이 됩니다.  이 구절을 명상영성운동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로 줄겨 인용하는데 이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잠잠하라” 는 말의 참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시편 제1편을 보면, “ 복 있는 자는 주야로 주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 라고 가르치며 이런 사람은 만사가 형통한다고 가르칩니다 (시 1:1-3). 또한 시편 119:15, 23 등을 보십시오. 같은 내용입니다. 묵상하는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면 그런 묵상한다는 말이 성경에서 어떻게 행하는 것을 가르치는지 알아야 합니다.  특히 침묵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묵상한다, meditate” 란 말은 히브리어로 “하가” 인데 구약전체에 25번 나옵니다. “묵상 한다”  라는 말은 신약에서는 구약에서만큼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신약 빌립보 4;8에 보면 사도바울은 성도들에게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생각하라“ 란 말은 원문에서 ”로기조마이 logizomai"입니다.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서 명상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구약에서는 묵상을 언급할 때 필연코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한다는 말이며 막연하게 조용히 앉아서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바를 명상한다는 말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묵상” 은 그냥 속을 비우는 그런 묵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임이 분명합니다.  예를 들자면, 다윗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나서 하나님에게 부르짖습니다. “나를 주의 목전에서 버리지 마소서 주의 영을 내게서 떠나게 마옵소서 (시 51:11) 라고 기도하는 것을 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초점을 맞추고 명상을 통해서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했었다는 엄연한 진리를 꼭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 에 초점을 맞춘 이런 명상의 기도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마음을 더했고 그들의 이런  영성운동의 태도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신앙행위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신명기 28:1-68 참고).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면 형통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들은 한결같이 율법과 율례와 규례와 교훈과 말씀을 명상할 것을 권장했던 것입니다 (시편 1:2; 시 119:15, 23, 48, 78, 148 참고). 이스라엘 백성의 영성훈련에서 명상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본다면, 중간기에 나온 어느 외경에 보면 “너의 생각을 주의 율례에 두고 늘 그의 규례를 생각하라” 라고 말 합니다 (시라크 6:37 참고).  그러면 “명상” 이라는 히브리어 “하가” 나 “시아” 란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요?  히브리인들이명상할 때 하나님이 침묵을 강요했는가요?  이 점에 있어서 구약의 “명상” 이라는 말의 뜻이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구약을 보면 구약 어디에도 기도할 때 주관적 침묵의 의식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 이방신을 믿던가 아니면 기독교에서도 신비주의에 속한 사람들이 하는 행위입니다. 이에 대해 몇 가지로 생각해 봅시다.

첫째, 구약 사람들이 명상할 때 그 명상이 항상 “하나님의 율법” 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말은 성경적 명상은 기도할 때 한 마디 말도 없이 침묵을 지키며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 명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예를 들어서, 명상하는 일이 생각을 비우는 침묵을 유도하는 일, 다시 말하면 John Locke 가 말하는 “tabula rasa”(백지 상태) 상태에 들어간다고 가정합시다, 여기서 <tabula rasa> 라는 것은 우리 생각을 백지 상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백지를 만들어서 무엇이든 외부에서 들어오는 글을 쓸 수 있도록 준비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명상을 통해서 시편기자가 의미하는 것이  신앙이 좋은 성도가 기도할 때 심성이 tabula rasa 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사실이라고 가정 한다면 “내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바라나이다‘ 라고 기도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요? (시편 19:14).  

둘째, “명상‘ 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하가” 라는  말에는 “침묵” 이라는 의미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그 단어가 사용된 것을 보면,  “명상” 이라는 단어는 사자가 “으르렁 거린다” 는 의미로 쓰이는데 가령 이사야 31:4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무언의 침묵” 과는 정반대가 되는 말입니다.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가 침묵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둘은 서로 상반되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Richard Foster 나 그와 같은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위해 이 성경구정를 저들의 증거구절로 사용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셋째, 어떤 성경구절에 보면, “명상” 이란 “입”을 말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기를 “이 율법 책을 너의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모든 것을 지켜 행하도록 할지니 그리하면 너의 길이 형통할 것이라” 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 1:8). 이 성경구절에서 “입” 과 "묵상“ 과의 관계를 주목해 보십시오.  시편 19편에서 시편기자는 ”내 입의 말씀과 내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랍되기를 원 하나이다“ 라고했습니다 (시 19:14).  여기서도 시편기자는 ”말씀“ 과 ”묵상“ 을 병행하고 있는데 즉 “내 마음의 묵상” 과 ”내 입의 말씀“ 은 함께 병행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편기자는 시편 19편 14절에서 그가 하는 말과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가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명상“ 이라는 개념을 침묵이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요즘의 명상 이란 ”불교 신자처럼 또는 신비주의자들처럼 “침묵” 해야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명상할 때 성경을 나지막한 소리로 읽거나 암송했습니다.  즉 말씀이 없는 명상이란 생각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넷째로, 구약에 보면, 명상한다는 말은 생각하고 무엇인가 계획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가령 시편 2편을 보십시오, 시편 2편은 “어찌하여 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라고 시작 됩니다 (시 2:1). 재미있는 것은 영문 성경 (KJV) 에는 “imagine' 이라고 번역해 놓았지만 이는 계획한다는 뜻을 갖고 있는 말입니다.  명상한다는 것은 단지 말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생각하고 무엇인가 계획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성경에는 “민족들이 허사를 명상 하는고”라고 번역하기도합니다. (ASV 는 Peoples meditate a vain thing" 이라고 시 2:1을  번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고 이방들은 허사를 계획하며 명상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인 야웨 없이도 메시아 왕국을 건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시편 2편에 보면,  명상한다는 말은 마음의 상태에 여유가 생겨서 하나님을 대적할 생각을 품게 된다는 말입니다 (창 6:5; 창 11:6; 렘 17:9 등 참고).  그런 악한 명상이 속을 비운 침묵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힌두교에서 하는 것 같은 머리를 비우면서 명상한다는 행위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이런 점에 관해서 칼빈 선생은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가 허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까지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언의 명상을 해서 영성운동을 행하라고 교훈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점입니다.  명상 영성운동은 성경에 위배되며 사람이 만들어낸 생각에 불과하며 바꾸어 말하면, 이방종교에서 도입한 비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무엇이든 사람이 고안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므로 배척해야하며 따르면 죄가 됩니다.

기도할 때 말씀에 집중하지 않으면 명상은 곧 바로 신령주의 (Spiritism) 로 빠질 소지가 많습니다. 신접자 들의 명상이나 또 중얼거림에 대해서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엄히 경고하기를, 이사야 8:19절에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에게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여 주릴 것이라, 그 주릴 때에 번조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처다 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암혹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암흑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이사야 8:19-22) 라고 이사야가 말합니다.  

이 말씀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기도나 명상하는 사람은 성경에서 금하는 밀교의 경지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구절입니다 (신명기 18:9-14). Richard Foster 목사 자신도 이런 위험을 아는 듯  “무언의 명상” 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섰습니다. “나는 경고하고 저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언으로 하나님을 묵상할 때 우리는 영적 세계에 들어가는데 가끔 초자연적인 인도를 받을 때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다.  영계에는 여러 가지 다른 현상이 있는데 어떤 영적인 현상은 분명히 하나님과 협력하지 않는다” 라고 Richard Foster, Prayer, Finding the Heart's True Home (San Francisco: Harper Collins Publishers, 1992) 157면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서 Richard Foster 도 이런 위험성을 알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위험성이 있으면 성경에서 그런 명상을 하라고 명령한 것도 아니니 안 하면 그만입니다. 위험성을 무릅쓰고 무언의 명상을 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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