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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 기도의 허구(2)

조회 수 2717 추천 수 0 2010.03.04 23:05:43

소위  "명상 영성 훈련, 관상기도" 의 허구 (2) 최종회

                                                                                                              튤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교수

Richard Foster 목사가 이렇게 경계하는 것은 성경적인 명상이나 기도를 할 때는 왜 반드시 성경을 보고 성경의 말씀을 듣는 일이 병행되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인성으로서의 예수님을 마귀가 시험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광야에서 고독과 배고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시험을 당할 때 예수님은 무언의 기도로 일관한 것이 아니고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어서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그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마태복음 4:4, 7,10 절 참고).  마태는 예수님의 광야 시험 사건을 기록하면서 세 번이나 “대답하여 가라사대” 라는 말을 쓰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 하시는 동안 혼자 고독하게 계신 적이 여러 번 있지만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의 사역에서 침묵의 명상을 하셨다는 말은 없습니다. 항상 말씀으로 기도하셨고 (요 17) 말씀으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무언의 명상으로 일관하는 것은 불교나 힌두교의 관습이거나 신비주의자들의 관행입니다.

명상한다는 것은 내가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꿈꾸는 것 같은 그런 피상적 잠재의식적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상은 자기가 명상하는 주제에 마음을 집중하는 행위인데 그 주제는 성경이며, 성경에 어긋나는 생각이나 환상은 머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내어 ?는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신비주의는 명상을 설명하기를 개인의 생각은 덮어두고 이성적인 생각을 초월하며 어떤 알지 못할 황홀경으로 인도되어 극치의 신앙의 체험을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종류의 명상이나 묵상은  시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Alan Richardson 이 편집한 A Theological Word Book of the Bible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50) 라는 책 142면에 기고한  James S. McEwen 의  "Meditate," 라는 글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묵상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성도의 묵상은 말을 하지 않고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Thomas Merton 같은 뉴에이지 운동가의 말은 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묵상한다는 히브리어 (하가) 라는 말은 무언으로 묵상한다는 말이 아니라고 앞서 여러 번  말씀 드렸습니다. 이미 우리가 보았거니와 구약에서의 “묵상” 이라는 말은 믿음을 갖고 기도하는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과 규례와 법도를 생각하면서 말을 하는 의식 있는 (conscious) 기도 행위를 말한다는 점을 아주 분명히 강조 하고저 합니다.

이렇듯, 묵상은 주관적이 아니라 객관적입니다. 묵상은 내가 행하는 능동적 해위이며 남에게 지배를 받거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어떤 영향을 받으려는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적 묵상은 항상 의식적이며 (conscious), 뉴 에이지 운동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신도 모르는 무아지경에 들어간 무의식적인 행위 (unconscious activity) 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적인 명상은 조용하게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기도하고 소리 내어 말합니다. 심지어 사무엘 상 에 나오는 한나도 들릴듯 말듯하는 작은 소리로 기도했지만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을 엘리 제사장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소리 내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명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서 오래 동안 침묵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머리를 모두 비우는 것도 아닙니다.  머리를 어떻게 비웁니까?  묵상하는 대상이 하나님인데 머리를 비운다면 무엇 때문에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까? 흔히 목사님들 특히 신학이 약한 부흥강사들은 설교할 때 가끔 말하기를, “여러분은 기도할 때 머리를 비우tu야 합니다” 소리 지르는데 이는 비성경적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우리가 기도할 때 머리를 비우고 묵상에 잠기면 온갖 상념이 찾아오고 시편 1편의 말씀에서 가르쳐주는 묵상은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항상 기도할 때 머리를 비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San Francisco 남방 50 마일 근처에는 태평양 연안 경치 좋은 숲속에  Esalen Institute 라는 <뉴에이지 운동 훈련원> 이 있습니다. 여기는 요즘 한창 유행하는 “인간의 잠재력을 개발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곳인데 (human potential development). 강사들이 거기서 가르치는 것은 기도할 때 머리를 비우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머리를 완전히 비우고 심령을 외계에 전적으로 맡기면 초자연적인 능력이 들어오게 되고 신과 같이 된다고
힘 주어 가르칩니다.

물론 이들이 기도하는 기도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외계의 절대적 존재입니다. 그들은 천지에 있는 외계의 신에게 기도하는데 그들의 생각은 우주와 인간과 우주안의 모든 것은 모두 신의 일부라는 범신론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우리와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니고 따라서 기도하는 것도 우리처럼 여호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의 핵심은 누구에게 기도하건 머리를 비우면 온간 이상안 생각이 지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완전히 머리를 비워놓으면 여러 가지 이상한 생각이 머리에 들어오고 이상한 영상이 떠오르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잠재 능력을 극치로 개발하여 신과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실제로 신이 된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placebo (의약, 약이 아닌데 약의 효과를 내는 것)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 미국의 IBM AT&T GM 등 큰 회사들이 New Age 의 운동가들을 초청하여 회사원들의 작업의 능률을 향상하기위해서 행하는 세미나로 실제 상품화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Human Potential Development Movement 라고 합니다. John Ankerberg 와 John Weldon 의 Encyclopedia of New Age Movement 참고, 또한 Taxe Marrs 의 America Shattered (Austin, Tx: Living Truth 출판사) 참고,

요즘에 홍수같이 쏟아져 나오는 책들은 대개 성경을 외면하고 인간 자신에게 눈을 돌리도록 하는 인간 “잠재의식 개발” 이니 “적극적 사고방식 개발” “자존심 개발” 이니 하는 심리학에 성경을 예속시키는 서적 일색이라서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 읽으면 신앙을 버리게 됩니다.  아마 그 대표적인 책이 Joel Osteen 의 “긍정의 힘” 이라는 책일 것이며 Bruce Wilkinson 의 “야베스의 기도” 라는 책일 것입니다 이런 책들이 날개가 돋힌 듯 팔리는 이유는 사람들이 성경을 떠난다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교리를 가르치는가 보십시오. 성경은 분명히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그렇게 변해 버릴 것을 딤후 4장에 예언하고 있고 딤전 4장에서도 예언하고 있으며 또한 딤후 3장에서도 예언합니다. 오늘의 소위 Unidentified Flying Object (UFO, 미확인 비행물체) 도 그런 각도에서 설명됩니다. 무서운 속임수 (a great deception) 이 성행하면서 우리를 성경을 믿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촛점을 주님에게 맞추라고 가르칩니다. 빌립보 2:5에 “너희 속에 이 마을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마태복음 16장24절에서는 “주를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고 명령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인데 이런 뉴에이지를 권장하는 책들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현세에서 십자가를 피하고 현세중심으로 “성공”하며 “행복하게” 살자는 세속신학 뿐입니다. 요즘 중학생들에게 많이 읽히고 있는 The Secret 이라는 책도 그런 맥락입니다.  사람들은 분별력이 없어서 모두 이런 서적을 탐독하기를 좋아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일을 기피합니다. 기독교를 마치 개인의 무병장수 부귀영화를 약속하는 무속 신앙으로 착각합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모르거나 일부러 파괴하려는 사탄의 사역을 따라갑니다.

목상도 성경적 묵상에서 변질되어 갑니다.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 즉 말씀을 묵상하는 교리를 버리고 힌두교나 불교 등 이방신을 믿는 종교들의 관행을 따라가며 기독교의 독특성을 파괴하여 (obliterate) 결국은 어느 것이 진리이고 어느 것이 비 진리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하나의 종교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운동이 오늘날 색깔이 분명한 개혁주의 목회자의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매우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영의 눈이 어두운 일반 교인들은 그것을 모른 채 Brian McLaren 이나 Tony Jones 나 Doug Paggit 나 Rick Warren 등의 책을 탐독하며 비판 없이 따라갑니다.  아마도 앞으로 10년 후에는 “Emergent Church 운동을 지지하느냐?” 여부로 기독교가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질 것 같습니다.  이제는 신학교도 믿을 수 없습니다. 신학교 자체가 타락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간혹 좋은 신학교를 나왔다고 해도 학창시절에는 좋은 성적을 위해서 가르침에 순응하는체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면 모두 자기 편한 길로 가버리는 것이 오늘의 실태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믿음은 자기가 지켜나가야 하며 교회나 신학교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의 교계는 점점 “Emergent Church 운동" 편으로 기울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Emergent Church Movement 는 Brian McLaren 이나 Doug Paggit 같은 사람이 지도자로 있지요만 기독교를 ”재해석“ 하자는 것이며 기독교에 ”변화가 필요하다“ 는 것입니다. ”교리는 필요 없다“ 는 것입니다. 타종교과 야합하려면 기독교의 ”편협한“ 교리만을 고집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성경에서 다른 복음을 따라가지 말라고 고후 11장에서 여러 번 하나님이 경고해도 죄악에 물든 세대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고 공중에 권세 잡은 자를 따라갑니다.  바로 경계하고 인도하는 목사님이나 신학자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심한 핍박을 받거나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24장에서 말하는 ”대 환란, The Great Tribulation"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대 환난 시대에 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거짓 복음은 만연하고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떠나 귓맛 좋은 말만 좋아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으니 양의 옷을 입은 이리들, 거짓 선지자들은 우후죽순 처럼 도처에 창궐하여 이상한 가르침으로 교인들에게 독약을 먹이고 있는데도 교계 지도자들은 대부분 “교회의 숫자적 성장”.  만을 염두에 두고 교리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기독교의 현주소입니다.  오늘 진리의 복음, 개혁주의 신앙을 전하는 사람들은 설 땅이 없습니다..

성도가 성경말씀에 초점을 맞출 때, 명상은 기도하는 사람의 영혼만 아니라  전 인간이 명상에 참예하고 반응을 보이는데 몸으로는 말씀을 듣고 말하므로, 영적으로는 말씀을 인식하고 느끼고 순종하므로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육신과 영혼이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는 행위가 되어야 참다운 “묵상” 의 구실을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통> 이란 본인의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거룩하고 가장 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 사역, 기적, 법도, 그리고 그의 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그런 하나님과의 교통을 말하는데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읽어보십시오. 시편 1:2; 시 63:6;  시편 77:11-14; 시편 119: 15, 23, 27, 48 78; 시편 148; 시편 143:5, 시편 145:5 등을 참고할 것.

요즘 유행하고 있는 <명상영성 훈련> 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런 묵상은 성경적인 명상이 아닌 것이 분명함을 살펴보았습니다.  무언으로 기도한다고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자동적으로 불러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영성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만을 생각하고 외우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나아갈 수 있게 됨을 성경이 가르쳐 줍니다.  성경을 지적으로 연구하고 순종하면 그것이 곧 명상행위 인 것입니다. 머리를 비운다던지 무언으로 기도한다든지 한다고 해서  성경적 명상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악령의 지배를 받을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할 때 참다운 성경적 묵상이 가능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Contemplative Spirituality 운동에 속지 맙시다.  

에베소 4:14-15에 보면,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휼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 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속지 맙시다.  오늘 이런 <명상 영성 운동> 은 전 세계에 펴져 있건만 성도들은 아무런 성경지식이나 신학이 없으므로 맹종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경계합시다  주님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고 마태복음 24장에 말씀 하십니다.  Contemplative Formation  명상 영성운동, 이것은 가장 비성경적인 신앙운동으로 동양 신비주의와 연합하여 기독교의 독특성을 말살하려는 운동임이 분명합니다.  Richard Foster 와 Thomas Merton (뉴에이지 운동가) 으로 대표되는 이 운동은  요즘 한국에서는 이름만 대면 모두 알수 있는 대형교회 목사들중에도 이 운동에 가담하여 성경을 떠나는 분들이 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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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전혀 필요 없다고 여기는 자에게 가장 많이 필요하다

  - 스위팅-


[레벨:10]차성훈

2010.03.04 23:28:18

두 글 잘 읽었습니다.

다만, 소위 '튤립'으로 불리는 특정 전통에 편향되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적어도 제가 알기론 관상기도라는 신앙형태에 대해서는 '튤립'보다는 다른 관점에서부터의 접근이 더 유용할 것 같습니다.(...뭐, 개혁주의 전통에서 그쪽에 대해 그다지 많은 관심을 가진 것같진 않습니다만...) 예를 들면, 가톨릭 전통에서의 접근이라던지...

완전 다른 종교간의 대화도 아니라, 최소한 같은 바운더리 안에 있는 전통과 대화하기 위해선 보다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지 않나....싶네요.

 

뱀다리. 조엘 오스틴이나, 윌커슨과 브라이언 맥클라렌이나 '이머징 처치 운동'이 도매급으로 취급되는게 참 답답하네요. 토대로 두고 있는 문제 의식 자체가 다른 전통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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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2010.03.05 03:15:18

제가 알기로는 관상기도도 하나의 오랜 기독교 전통입니다. 

철학과 신학이 우리의 이성과 논리로 하느님을 알아가려는 맥락이라면,

관상기도는 직관의 세계로 하느님을 만나는 또 하나의 방법이겠지요.

우리가 오랫동안 지성을 사용해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방법을 써 왔기 때문에

이 방법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관상의 경지를

그렇게 자기잣대로 함부로 매도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는 마치 추상화를 이해 못하는 사람이

구상화만 그림이라고 우기는 것 같군요.

시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수필만 참된 문학이라고 억지 쓰는 것 하고 다를 바 없구요.

 

우리의 인식이나 언어가 가지는 한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말로 드리는 기도만이 참된 기도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언어로 드리는 기도가  참이라면, 또한

침묵 속에서 느끼는 하느님의 임재도 참일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무한하신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는, 우리는 말을 잃거나,

 말이 필요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관상기도라고 해서 의식없는 몰아지경이 아닙니다.

 올바른 관상에 이르기 위해 '렉시오 디비나' 라고 해서

반드시 성경 묵상과 병행하기를 권유하고요.

 

토마스 머튼 같은 영성가를 그렇게 간단히 단정짓는다는 것은 경솔한 일입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고 그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를 안다면 그렇게 함부로

다른 사람이 평생 추구해 온 영성적 삶을 자기식으로 재단할 수 없겠지요.

저는 우리 기독교인이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말이 난무하는 자기 중심적 기도에서  

관상기도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거든요

[레벨:16]정병선

2010.03.05 09:06:06

웃겨님,

끼어들기 처음이네요.

너무 옳은 말씀.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어서.....

말이 난무하는 자기 중심적 기도에서

관상기도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 바로 제 입장입니다.

한국교회는 너무 시끄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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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10.03.05 17:40:05

요즈음 관상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여러가지를 느낍니다.

성공회의 일년 성경 봉독 묵상 기준(예전에 따른 성경묵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이 주관하는 관상기도를 참석해보면, 나눔의 시간에서 적응이 잘 되지 않습니다.

관상기도시간에 꿈의 내용과 환상 그리고 주님께서 답을 주셨다 등은 일반 개신교 신자 입장에서 볼때는

많이 이해가 안갑니다.

 

물론 신부님이 다시 길을 잡아 주시지만 아직도 이런 부분에서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일반 교회에서 자란 편협적인 시각이 받아들이지 못한것은 아닐까라는 물음도 해봅니다.

 

일반적인 기도 형태가 아니라, 직관을 통한 하나님과 나와의 문답속에서 찾아가는 영성이 어렵네요.

여하간에 새로운 영성체험이라고 생각하기에 계속적으로 관상기도 모임에 참석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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