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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역사신학의 해석학적 입장

 

 

 

1970년대 이래 그리스도 신학계는 하느님의 계시가 개인과 사회,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종결되지 않고 개방되어 있는 과정인 역사로서 발생한다고 보는 소위 역사신학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역사를 평가하는 데에서 입장을 조금씩 달리하는 대표적인 신학자들, 판넨베르그(W. Pannenberg)와 몰트만(J. Moltmann), 멧츠(J.B. Metz)와 카스퍼(W. Kasper) 등의 해석학적 입장을 살펴 보기로 한다.

 

I. 판넨베르그의 보편사적 해석학

 

판넨베르그(W. Pannenberg, 1928- )는 약관 30세에 교수가 되어 60년대부터 세계적 명성을 얻고, 65세에 정년은퇴할 때까지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활약한 개신교 신학자이다. 그는 금세기 20년대부터 거의 반세기에 걸쳐 서구 개신교 신학계를 지배하던 '말씀의 신학'으로부터 주도권을 이어받아 현대 신학사조의 주류를 이루는 '역사의 신학'을 정립한 바있다. 판넨베르그 신학사상의 특징은, '성서'에로만 정향하여 그리스도 신앙의 특수성 내지 절대성을 제시하는 데 주력을 경주하는 개신교 신학자들의 일반적 경향과는 달리, 실제로 발생한 '역사'(歷史)에로 정향하여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성을 제시하려고 진력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성 요청은 사도적 교부시대부터 제기되어왔다. 판넨베르그는 이 보편성 요청의 타당성을 신학 방법론적 사유안에서 제시하려고 시도하는 데에서 학자로서의 치밀성을 보여준 바 있다. 판넨베르그의 신학사상은 현대 역사적 상황속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성 요청을 적절하게 제시하는 시범적 시도라고 간주 할 수 있다. 60년대 신학계에 사상적 전환을 이룩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판넨베르그의 해석학적 입장을 파악하고자 한다. 주로 70년대까지 발표된 작품분석을 통해서 그의 해석학적 통찰을 구명하려고 한다. 우선 판넨베르그 해석학의 기본 취지를 파악하고, 이어서 그의 해석학의 방법원리를 이해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판넨베르그 신학사상의 중심이자 해석학의 지평으로 규정되는 '보편역사'의 실상을 구명한 뒤에 비판적 사유를 간단히 첨가하고자 한다.

 

1. 판넨베르그 해석학의 기본 취지

신학자로서의 판넨베르그의 해석학의 기본입장은 현대 해석학적 통찰의 지평안에 위치한다. 그에게 있어서 신학적 해석학의 문제 설정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 개재하는 역사적 간격(歷史的 間隔) 내지 상위성(相違性)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생겨난다. 신학적 해석학은 역사적으로 유일회성을 지닌 과거의 계시사건이 오늘날 어떻게 인간을 만나고 어떻게 이 현대인을 위한 현실적 구원의 진리가 될 수 있는가를 구명하는 과제를 지닌다.
신학은 하느님의 역사적 계시의 현실화를 위해 진력하는 가운데 이중적 역사적 간격을 오늘날에 와서 점차적으로 더욱 분명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신학은 과거의 계시사건 자체와 이에 대해서 보도하는 성서적 증언 사이에 개재하는 간격에 대해서도 더욱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다. 판넨베르그는 오늘날 그리스도 신학이 처해있는 새로운 문제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다. "사실과 의미 사이의 괴리, 역사와 케뤼그마 사이의 괴리, 예수의 역사와 이에 관한 신약성서의 다채로운 증언들 사이의 괴리가 현 신학의 문제성을 일면을 드러내고 있다. 다른 편에서, 우리는 신약성서 텍스트의 사고세계와 우리 자신의 현재 사이에 개재하는 엄청난 괴리를 발견하게 된다. 현대 해석학은 이와 같이 전적으로 변모된 상황속에서 변모하기 이전의 내용을 반복하는 역사적인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판넨베르그 해석학은 '말씀의 신학'의 해석학, 특히 불트만계열의 '실존론적 해석학'과의 쟁론관계 속에서 그 특성을 잘 드러낸다.
바르트나 불트만처럼 '말씀의 신학'을 전개하는 신학자들은 하느님의 계시사건을 구체적 역사안에 정초하지 않고 신학을 전개하였다. 판넨베르그는 이러한 '변증법적 신학'이나 '실존론적 신학'과 같은 '말씀의 신학'의 해석학적 입장을 비판한다. 그는 하느님의 계시사건을 애당초부터 인간의 실존성취와 관련시켜서 파악하고, 인간의 물음과 하느님에 대한 물음을 동일시하는 것은 신앙의 주관주의와 개인주의에로 이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는 과거의 당시와 현재 사이에 개재하는 역사적 상위성의 문제가 진지하게 고려되어 있지 않으며, 세계 안에서 현실적으로 발생한 역사(歷史, Geschichte)가 인간의 역사성(歷史性, Geschichtlichkeit)에로 용해되어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구체적인 세속역사(Profangeschichte)와 '구세사'(Heilsgeschichte)를 구별하는 쿨만(O. Cullmann, 1902- )등이 전개하는 재래의 '구세사적 신학'이나 '말씀의 신학'이 해석학적 문제 설정의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라고 보고 '보편역사의 신학'의 정립을 요청하고 나선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사실과 해석 사이의 상위성을 역사적 인식의 차원에서 초극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해석과 역사비판적 지식을 보편역사 안에서 화해 내지 조정하고자 시도한다. 여기서 판넨베르그는 사실(Faktum: 경험과학의 대상)과 의미(Sinn), 또는 가치(Wert: 윤리학과 형이상학의 대상)를 분리하였던 칸트의 유산을 버리고 이를 통합시키려 했던 헤겔(G. W. F. Hegel, 1770-1831)의 노선을 따른다. 판넨베르그는 한 역사적 사건이 역사의 맥락 내지 관련성 안에서만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역사 외부로부터의 해석에 의존함으로써 역사로부터 결코 헤어날 수 없음을 간파하고 보편역사를 역사적 사건이해의 지평으로 규정하게 된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보편역사를 해석학의 지평으로 규정하는 데 있어서, 그의 스승인 하이델베르그(Heidelberg) 대학교의 구약학자 폰 라드(G. von Rad, 1901-1971)가 정립한 바 있는 전승사(傳承史,  berlieferungsgeschichte)개념을 원용한다. 폰 라드에게 있어서 역사는 하느님에게서 발해진 약속과 실제로 이루어진 성취가 긴장속에서 펼쳐지는 전승사건의 과정이다. 전승사는 전승들의 계승 속에서 사실과 그 의미가 교합되어 진행하는 과정인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폰 라드처럼 실재적 역사(Wirkliche Geschichte)와 해석된 역사(Gedeutete Geschichte)를 대치시키는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거슬러 사실과 그 의미의 원천적 통합을 주장한다. 판넨베르그는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에 나타나는 역사적 해석학과 신학적 해석학의 이원론에 반대하고 두 해석학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역사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판넨베르그는 현대 신학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 사실과 의미,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이성과 신앙 사이의 상반성 내지 괴리를 '보편역사적 해석학'의 입장에서 해결하려는 것이다. 과거 역사적 사건 속에서 발생한 하느님의 계시에로 접근하는 길은 실존이나 초역사에로의 길이 아니고 역사적 탐구의 길밖에 없다고 보고, 역사적 사실에서 하느님의 역사(役事)를 제시하려는 노력에서 우리는 실존론적 해석학과 구별되는 판넨베르그 해석학의 특유한 취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해석학적 취지는 그리스도 신앙이 내세우는 보편성 요청의 타당성을 하느님 계시의 장(場)인 역사속에서 제시하려는 신학적 취지로부터 나온다고 볼 수 있겠다.

 

2. 판넨베르그 보편사적 해석학의 원리

판넨베르그는 1963년에 발표한 저명한 논문, "해석학과 보편역사"(Hermeneutik und Universalgeschichte)에서 자신의 해석학적 입장을 체계적으로 개진한다. 그는 여기서 과거와 현재사이에 개재하는 역사적 상위성을 극복하려는 현대 해석학에서의 노고를 고려하고, 특히 전승사적 내지 '영향사적 해석학'을 전개하는 하이델베르그의 철학자 가다머의 해석학적 통찰을 비판적으로 원용하면서 그 나름의 고유한 해석학적 입장, '보편사적 해석학'을 정립하고자 시도한다. 그가 가다머의 해석학적 통찰에 거의 결정적으로 의존하기는 하지만, 가다머가 전승된 텍스트의 해석을 하나의 '대화'와 비견하고, 언어의 진술 기능을 부정적으로 평가는 데 대해서는 이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판넨베르그는 언어의 대상관련성(Gegenstandsbezug)과 언어와 사회적 생활의 유대관계를 깊이 통찰하고 언어의 진술 기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1889-1951)과 분석적 언어철학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다. 판넨베르그가 현대 정신과학자들이 전개하는 해석학적 제이론을 자신의 해석학적 사유에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은 1973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과학이론과 신학』(Wissenschaftstheorie und Theologie)에서도 역력히 발견할 수 있다.
판넨베르그는 가다머의 해석학적 통찰에 의지하면서 현대인에게 도전해오는 과거사건의 역사적 상위성은 이질적인 그대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신약성서의 저서들도 일차적으로 하느님에 대해서 보도하고, 그리고 세계와 그 역사의 사건들 안에서의 하느님의 역사를 보도하며, 인간에 대한 성서의 보도들 역시 하느님과 그의 역사에 대한 보도에 의해서 규정되는 데 비해서, 불트만은 역전된 관점을 지니고 있음을 비판한다. 판넨베르그는 불트만의 제자들인 푹스와 에벨링의 언어사건의 해석학 역시 역사를 인간의 역사성 안에로 용해시키는 실존신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해석학의 역사적 상위성의 문제를 적합하게 처리하였다고 보지 않는다. 판넨베르그는 가다머가, 1960년에 출간된 역저 『진리와 방법』(Wahrheit und Methode)에서 과거와 현재사이에 개재하는 역사적 상위성의 문제를 진지하게 취급합으로써 해석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진보를 이룩하였다고 본다. "가다머는 해석되어야 할 텍스트의 역사적 상황과 해석자의 현재 사이에 개재하는 상위성이 효력을 발할 수 있도록 진력한다. 바로 이 상위성이 현재의 이해를 향한 텍스트의 요청을 표현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가다머에게서는 좁은 의미에서의 해석학적이고 역사적인 동기들이 서로 삼투(渗透)한다. 여기서 역사적 상위성은 이해경위 자체를 위해서 결정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판넨베르그는 실존론적 신학의 입장과는 달리, 과거와 현재의 역사적 상위성을 지양하지 않고 그대로 존중하면서, 두 지평을 포괄하는 하나의 포괄적 지평이 이룩되는 가운데 이해가 형성된다는 가다머의 통찰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다. 그런데 판넨베르그는 이해성취에서 요청되는 포괄적인 지평을 보편역사로 규정함으로써 가다머의 해석학의 입장을 벗어나서 그 나름의 '보편역사의 해석학'을 정립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2.1  '지평융합'으로서의 이해규정
판넨베르그는 해석학에서 관건이 되는 '이해'(Verstehen)를 규정하는 데에서 가다머의 통찰을 원용한다. 가다머는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 그리고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기점을 넘어서 그 나름의 해석학적 입장을 정립하였다.
2.1.1 가다머는, 앞에서 살펴 본 바처럼, 이해의 해석학적 순환구조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모든 이해, 따라서 모든 해석(解釋, Auslegung)과 전달에서 작용하는 '전이해' 개념을 그 나름대로 규정하고 있다. 가다머는 인간 현존재가 미래의 가능성을 지향하여 기투된 존재일 뿐 아니라, 먼저 과거로부터 유래하는 존재임을 해석학적 사유에서 진지하게 취급한 것이다. 가다머는 역사가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역사에 속하여 있다고 보면서, '선입견'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전승역사로부터 전래되어 현존재를 규정하는 '전이해'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이해 자체도 주체성의 행동이라고 생각하기보다,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중재되는 전승과정에로 들어서는 것으로 생각하자는 것이다.
인간의 전이해는 그가 유래하는 전승으로 말미암아 제약되어 있기 때문에, 가다머에 의하면 해석학적 순환은 '이해를 전승의 운동과 해석자의 운동의 교환관계'로 파악된다. 그리고 참된 이해란 텍스트에서 거론되는 사상(事象)과 제휴되어 있어야 하고, 전승에 접속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인간이 전승과 항상 똑같이 친숙하지는 않다. 전승은 이타성과 친숙성 사이에서 고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사이' 안에 해석학의 참된 장(場)이 있다고 가다머는 보는 것이다. 여기서 해석학 일반의 중요문제, 시간적 간격의 역사적 상위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문제는 해석자가 자신을 저자와 그의 작품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시간적 간격을 어떻게 극복하고 이해를 성취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가다머는 텍스트의 역사적 상황과 해석자의 현재 사이에 개재하는 간격 내지 상위성을 지양시킬 것이 아니라, 이를 의식적으로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연결시키는 이른바 '지평융합'을 형성케함으로써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지금 전승된 텍스트를 해석하려는 해석하려는 해석자의 역사적 지평과 과거의 텍스트의 지평은 우선 동일하지 않다. 두 지평의 상위성을 확인하는 것이 해석경위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해석자의 현지평은 고정, 경직되어 있지 않고, 변화내지 확대가 가능하다. 이해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해석자의 지평에 있어 처음에는 낯설고 이질적이던 실재가 그 지평과 함께 해석자에 수용될수 있을 정도로 그의 현지평이 확대된다고 가다머는 본다. 이러한 과거의 지평에로의 입장전치는 해석자가 자신의 부분성뿐만 아니라, 해석해야 할 낯선 텍스트의 부분성을 극복하는 '보다 높은 일반성에로의 고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평의 융합이 이루어질 때 전승이 비로소 해석자에게 이해될 수 있다. 이해란 결국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두 지평의 융합이 이루어지는 경위인 셈이다. 가다머는 이렇게 이해를 '지평융합'으로 파악함으로써 역사적 사고를 해석학의 원리 정립에 수용하고 있다.
가다머는 이러한 이해경위가 성공적인 대화 속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대화자들은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가운데, 대화가 시작되기 이전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공동적인 상태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대화가 시작될 때의 대화자의 부분적인 지평들이 새롭고 포괄적인 지평에로 고양되는 지평융합이 성공적인 대화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2.1.2 이 점에 있어 판넨베르그는 가다머와 견해를 달리한다. 판넨베르그는 방법적으로 성취되어야 하는 해석은 대화 속에서 생기는 것과 같은 비사유적 이해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본다. 대화가 성공적이어서 대화자들이 서로를 이해할 때에, 이러한 이해를 성취케 하는 포괄적인 지평은 반드시 명시적으로 주제화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대화 속에서는 부분적인 개별주제에 관해 이해가 이루어짐으로써, 전체적으로 서로 의사가 소통됨을 나타내고자 한다. 개별주제에서 이루어지는 이해는 이를테면 전체안에서 이해가 이루어짐을 가늠하는 텍스트가 되는 셈이다. 대화자들이 서로 동의하게 되는 실재 전체가 명시적으로 대화의 주제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석을 방법론적으로 전개해 나갈 경우에는 이해경위가 명시적으로 사유되어야 한다고 판넨베르그는 보고 있다. 해석의 적정성 여부는 이해경위의 명시적 사유를 통해서만 검토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전승된 텍스트의 사고세계와 구별되는 해석학의 사고세계가 각기 나름의 위치를 지니면서도 서로 관련을 맺을 수 있게 되는 하나의 종합을 구하고, 하나의 포괄적인 이해지평을 명시적으로 정식화할 것을 요청한다. 그래서 이 포괄적 지평이 텍스트의 지평과 함께 해석자 자신의 지평까지 함께 포괄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석자 자신의 삶은 이 포괄적 지평 안에서 성취되는데, 이 지평을 정식화하려는 노력은 전승된 텍스트를 방법론적으로 해석하라는 요청 이외에 다른 근원을 지닐 수 있다고 판넨베르그는 보는 것이다.
판넨베르그가 여기서 뜻하는 다른 근원이란 진리 전체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기본자세를 말한다. 사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의 전체성을 실재의 전체성과 유대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실재의 전체성을 의식하고자 추구함으로써 비로소 실재의 전체성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대화 속에서 이해가 이루어질 경우에도 그 추진력은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있다. 이것은 하나의 진리가 만사를 포괄하는 진리로서의 주제가 되지 않을 때에도 그러하다. 진리의 단일성을 추구하려는 동일한 노력이 포괄적인 지평을 기획토록 추진하는 것이다. 방법론적인 텍스트 해석의 특수 요청이 이러한 지평의 기획을 촉구하는 것은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전승된 내용의 방법론적 해석이 실재를 전체로서 이해하려는 인간의 기본과제에 참여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해경위에서 결정적인 사항은, 새로 기획된 지평은 텍스트의 '어떠한 것'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복합적인 전체 실상을 함께 포착할 수 있기에 충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역사와 현재의 인간 삶 사이의 조정이 사유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를 밝히는 것이다. 가다머는 현재의 진리를 역사를 통하여 전체적으로 조정하는 헤겔식의 입장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가다머는 역사와 현재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조정의 개방성을 강조한다. 그는 현재의 지평이 항상 체험에 의하여 규정되는데, 이 체험과정은 본시 부정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숙하고 현명하게 되는 것은 그저 단순하게 체험을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항시 새로운 체험에 개방되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에벨링은 언어의 진술성격을 언어의 인격적 전달성격에 대치시키고 진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런데 가다머는 언어의 진술 기능을 인격적 전달 기능에 대치시키려 하지 않고, 진술을, 언급된 말의 의미와 상황에 적합한 이해를 위한 지평을 형성하는 '진술되지 않은 것의 무한성'과 대치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진술이 포괄적인 지평을 사라지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모든 진술된 말은 하나의 무한한, 발언되지 않은 의미 배경을 지닌다는 가다머의 통찰은 이해의 문제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해석학의 일차 과제는, 전승된 텍스트의 말을 그것의 원천적이면서 발언되지 않은 의미연관성에로 전치시키고서, 저자가 우리 해석자에게 전승한 이 텍스트의 말을 작성할 당시의 상황으로부터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판넨베르그는 이러한 작업은 진술된 것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본다. 함축된, 발언되지 않은 의미지평은 진술을 파악함으로써 비로소 이해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다머의 논증은 진술의 발언되지 않은 의미지평에 유의하지 않고 진술을 추상적으로 취급하는 경우에 해당하리라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가다머의 논증을 따르면, 해석자가 언어의 진술형식을 능가하거나, 진술형식의 뒷전에 처지지 않게 되고, 해석자로서 발언되지 않은 것에 대한 본래의 진술 속에서 함께 작용하는 것을 진술화하게 된다고 본다. 그는 해석이 저자를 이해하려는 한, 바로 해석을 통해서 저자가 텍스트를 작성할 당시 그에게도 무의식적으로 함께 작용하던 모든 것이 비로소 실제로 진술화되고 명시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해석된 텍스트야말로 그것의 의미 지평에 관하여 이전에는 알지 못하던 정도로 객관화된 텍스트이다." 대화에서는 사상(事象)을 언어화, 즉 진술화하는 일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대화의 주제가 되는 사상 안에서 자신을 알려줌으로써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이 사상관련성은 해석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해석은 대화와는 다른 구조를 지니기는 하나, 여기서도 텍스트의 진술로부터 거기서 뜻하는 사상(事象) 전체를 언어화, 진술화하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가다머는 현재의 진리를 역사를 통하여 전체적으로 중재시키려는 헤겔식 입장으로부터 떠나  결코 하나의 절대지식에로 지양될 수 없는 인간 체험의 유한성을 지적한다. 그런데 판넨베르그는 가다머가 해석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묘사하는 현성들은 기묘하게도 그가 바로 회피하려는 보편적 역사관념의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지적한다. 이 점은 가다머가 해석학적 사건을 '지평융합'으로 새로 정식화하는 데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텍스트를 해석할 때에, 해석자는 텍스트의 당시와 저자의 현재 사이에 개재하는 역사적 상위성이 해석학적인 가교가 놓여짐으로써 보전되어 머물고, 텍스트의 배후에서 언급되지 않은 의미지평 즉, 텍스트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 물어야 하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텍스트가 생겨난 역사적 지평을 계발할 필요가 있다고 판넨베르그는 말한다. 그리고 텍스트의 역사적 상황이 해석자의 현재와 사리적(事理的)으로 연결되는 길은 텍스트가 작성되기에 이른 당시의 상황과 현재 사이에 개재하는 역사의 연관성을 묻는 길뿐이라고 그는 보고 있다. 판넨베르그는 텍스트의 이해는, 당시를 현재와 연결시키되, 오늘 당장 현전하는 것뿐만아니라 현재 가능한 것의 미래지평과도 연결시키는 전체 역사와의 연관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의미는 미래의 빛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을 현재의 상황과 함께 미래의 지평과도 함께 실제로 연결시키는 역사관만이 해석자의 제약된 현재지평과 텍스트의 역사적 지평을 융합시키는 포괄적인 지평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당시의 현재가, 서로의 역사적 고유성과 상위성이 포괄적 지평 속에서 서로 존속하면서, 둘 모두를 포괄하는 역사연관성의 단일성 안에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가다머는 전승된 것의 언어성의 체험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세계역사의 철학의 사변적 주장'을 회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판넨베르그는 가다머의 이러한 입장은 난점을 지닌다고 보고 있다. 이해는 항상 텍스트 안에서 진술된 사상(事象)을 통하여 중재된다. 그러나 이 사상은 텍스트 속에서, 해석자의 현재지평이 아니고 텍스트가 생성된 역사적 상황과 함께 연관된, 언급되지 않고 머문 지평의 전체 안에서 언어화된다. 이렇게 해석자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의 언어성에 대한 사유는 지평융합을 통해서 메워져야 할, 두 지평의 역사적 상위성의 문제로 이끈다. 판넨베르그는 이 관계의 언어성에 대한 사유만으로는 이 상위성의 간격을 메울 수 없다고 본다. 간격을 메우는 것은 진술된 사상이 역사적 실재임이 시야에 드러남으로써 진술된 사상의 영역 자체에서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3 보편사적 해석학의 정립 요청
판넨베르그는 진리개념 자체를 본질적으로 역사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진리를 상대적으로 해소시키려 하지 않고, 진리의 단일성을 각 사상(事象)의 시간을 초월한 동일성으로 생각할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한다. 진리는 역사의 흐름의 전체로서 포착될뿐이라고 그는 보고 있다. 인간이나 자연, 건축, 법률 등에 대한 추상적 일반 개념만이 시간을 초월하여 동일하게 생각될 뿐이며, 이 시간을 초월한 일반성에 이의 추상성과 긍정적 진리가 위치한다는 것이다. 이 일반 개념들은 이 개념들이 뜻하는 사상(事象)의 역사에로 지양됨으로써 비로소 본연의 진리에로 이를 수 있다고 판넨베르그는 말한다. 그는 모든 인식이 사상에 대한 추상적 일반적 개념으로 시작하나, 이러한 시초의 추상적 표상들은 사상들의 역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개별화되어 이해되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판넨베르그는 가다머와는 달리 이처럼 한 텍스트의 사상이해는 이 사상의 역사의 기획을 요청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기획의 지평 속에서만 역사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제약된 텍스트의 사상전망들과 해석자의 현재의 사상전망들이 사리적으로 서로 관련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각기 다른 사상영역들이 서로 함께 속하기 때문에, 해석학적 과제는 이러저러한 특수한 사상영역의 역사의 기획뿐만 아니라, 상이한 모든 사상영역의 변화하는 관계를 포괄하는 보편역사의 기획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보편역사의 맥락 안에서만 텍스트의 '당시'가 해석자의 '오늘'과 비로소 연결되어 이들의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상위성이 말소되지 않고, 이 둘을 연결시키는 역사의 연관 속에서 보전되면서 가교가 놓이게 된다."
판넨베르그는 가다머와 함께 사람들이 전승된 텍스트를 대하고 탐구하는 본래의 주된 관심은 해당되는 사상의 현대 전망이 의문스럽다는 점에 근거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전승된 텍스트들은 해석자의 현재의 사상이해와 관련하여 해석자 자신과 상관하다는 것이다. 문제되는 사상의 진리가 현재의 전망 속에서도 아직 궁극적이고 절대적으로 소여되어 있지 않고 의문스럽게 머물고, 앞으로의 체험에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전승된 텍스트 역시 현재의 전망 속에서도 가치를 드러내지 않은 사상의 새로운 면모에 유의하라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승된 텍스트가 자신의 역사적 의미로써는 현재 사상의 문제성을 해결치 못한다 하더라도, 문제를 보다 훌륭하고 독창적으로 해결하도록 자극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승된 텍스트를 목전에 현전하는 사상의 지평과 관련시킬 뿐만 아니라. 현재의 미래지평과도 관련시킴으로써, 현재의 사상이해의 문제성과 관련시켜서 사상에 대한 현재이해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해석학적 요청의 의미라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가다머의 이러한 견해 속에서 불트만의 영향을 느끼고 있다.
보편사적 해석은 전승된 텍스트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 텍스트의 배후를 추적하여, 여기서 추구된 사실 내지 사건을 해석자의 현재까지도 포함시켜서 보편사적 의미연관성 속에서 구론하는 것이다. 이처럼 보편사적 해석양식은 일종의 우회로를 택한다. 즉 해석자가 텍스트의 배후에로 우회하여 텍스트에 깔려 있고, 여기서 증언되는 사건에 이르러 해석자 자신의 현재에로 이르는 가교를 설정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사건은 그 고유성과 의미를 사건의 연관성, 맥락속에서만 지닐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해당사건으로부터 가까운 주위일 뿐, 처음부터 보편역사 자체가 관건이 되지는 않는다. 특정인물 내지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이 처해 있던 시대와 그들과 밀접한  생활주위의 지평에서부터 이들을 파악하는 것으로 족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생활주위나 저 특정시대는 보다 폭넓은 사건의 연관성 속에서만 본연의 의미를 정확히 드러낸다. 그리고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 내지 인물들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들과 밀접한 인근 생활주변과 시대를 넘어서 보다 넓은 연관성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의 의미가 깊으면 깊을수록, 연관시켜야 할 관련사항이 그만큼 더 포괄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별난 사건과 인물의 참된 의미를 최소한 대략적으로나마 올바로 파악하려면 이들의 배후와 관련된 시대 및 생활주변을 파악함은 물론 보편역사의 차원에서의 의미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이해되어야 할 과거사건과 해석자의 현재사이에 개재하는 역사적 간격은 지양되지 않고 온전히 보존되어야 한다. 과거사건의 '당시'가 당시성을 버리고 현재의 한 가능성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당시'는 더 이상 '당시의 것'이 아니고 역사는 지양된다. 당시는 당시의 것으로 현재와 관련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 맺어지는 연관은 해석자가 자신의 현재에 만족치 않고, 보다 바람직한 현존재의 성취를 위해 역사적 유산에 대해서 물을 때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물음을 통해서, 현재 인간이 자신의 현존재의 가능성을 이해하는 데 익숙하게 된다는 것을 지적한 불트만의 해석학은 딜타이와 하이데거의 해석학과 함께 이정표적 사상이라고 본다. 현재의 인간존재의 가능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전승된 텍스트에 대한 물음을 제기해야 하는 필연성 속에서 불트만은 전승을 통해서 현재의 인간이 '요청'되고 의문시된다고 보았다. 판넨베르그는 이점이 불트만이 이룩한 본연의 발전이라고 본다. 불트만은 역사로부터 인간이 자신의 자기이해에 대한 '요청', '물음'을 체험하고 책임져야 하는 '결단'에로 부름받았다는 점에서 딜타이와 구별된다고 보았다.
전승된 텍스트가 당시의 형태로서 해석자에게 주장을 내세울 때, 해석자는 이 요청에 대해 미리 제한을 가할 수 없고, 자신을 당시의 특수성에 내맡겨야 한다고 판넨베르그는 말한다. 해석자는 텍스트가 관련되어 있는 당시의 상황을 자기 자신의 현재 상황과는 상이한 대로 파악해야 하고 이 상이성을 현재와 관련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해석자의 전이해 내지 문제 설정이 전승된 텍스트에 의해 유동적으로 변화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적인 것의 역사적 간격이 보전되면, 당시 발생한 사건이 현재와 맺어지는 유대는 오늘을 당시와 잇는 역사연관성 속에서밖에는 달리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학적 문제 설정은 보편역사에로 귀착된다고 판넨베르그는 지적하고 있다.
판넨베르그는 현재에 대해 전승된 텍스트가 지니는 '요청' 적용의 정당성이 있다고 본다. 전승된 텍스트가 제기하는 요청을 현재에 적용하는 문제는 불트만 이래 신학적 해석학에서 큰 역할을 담당해오고 있다. 물론 전승의 요청은 항상 되풀이하여 의문스러운 것으로 머문다. 이 요청은 현재 문제성을 위한 전승된 것의 개현시키는 힘을 통해서 매 현재에 자신의 정당성을 새롭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판넨베르그는 전승된 텍스트로부터 도대체 개현하는, 열어 젖히는 힘이 나아갈수 있다는 것은, 현재의 사상이해가 절대적 이해가 아니고 유한한 전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의문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의문스러운 점을 지니고 있는 현재의 실재이해는 개방된 미래에 직면하여 전승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사상(事象)이 일찍이 이에 대해서 말하고 기록된 것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다머가 강조하는 전승된 것의 적용의 중요성이 자리하고 있다고 판넨베르그는 보고 있다. 그는 적용이 해석학적 과제 일반의 한 소인을 형성하며, 특히 법률적이고 신학적인 해석학에서 중요함을 지적한다.
판넨베르그는 적용이 역사적으로 구명될 텍스트의 자기이해를 넘어서 현재의 가능성을 지향함으로써 '당시와 오늘을 조정하는 과제'를 지니는 한, 적용의 문제는 다시 보편사적 문제성에로 이른다고 말한다. 여기서 전승전체의 단일성이, 전승된 텍스트와 통교하는 가운데에서 생기는 적용 실적을 판단할 수 있는 지평을 비로소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승된 텍스트를 현재의 사상의 문제성에 적용하는 것의 합당성은 현재 상황과 당시 상황 사이에 개재하는 역사적 상위성을 고려하면서, 아울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상황을 연결시키는 것에 대하여 고려하지 않고는 검토될 수 없다고 판넨베르그는 보는 것이다. 그는 전승 전체에 대한 역사적 사유가 현재 특정한 행동을 취할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며, 전승된 것을 현재의 문제해결을 위해 적용토록 한다고 딜타이처럼 생각하고 있다. 물론 판넨베르그는 보편역사의 기획이 자신의 사변적 요청을 통하여 이러한 가능성들을 개현시키는 대신에, 오히려 은폐시킬 수 있음을 시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획의 부정성은 모든 인간적 사고에 불가피하게 속하고, 따라서 보편역사의 기획에도 속하는 유한성을 시사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보다 개선된 보편역사의 기획을 요청함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가다머는 헤겔의 절대개념의 체계가 인간 체험의 지양할 수 없는 유한성을 무시하고 비약을 범하였다고 올바로 지적하였다. 헤겔에게서 미래는 더 이상 개방된 미래로서 생각될 수 없다. 미래가 항상 되풀이하여 놀라움을 자아내게 하는 체험들을 가져 온다는 점에서, 미래의 개방성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지양할 수 없는 인간 체험의 유한성을 오인하는 자세와 개별적인 것을 일반적인 것 속에로 예속시켜버리는 추상화 내지 일반화의 경향은 함께 속한다. 이 점들은 보편역사철학을 기획한 헤겔의 기도(企圖)가 문제점을 안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가다머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직시하고 그 나름대로 또 다른 보편역사의 체계를 시도하지 않는다. 실제로, 인간 체험의 유한성과 함께 미래의 개방성 그리고 개인적인 것의 고유독자성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이를 보전하는 보편역사관을 기획하는 과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역사의 전체는 그 종말에 가서야 전모를 드러낼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판넨베르그는 신학자로서 이러한 문제성들을 진지하게 고려하면서도 보편역사의 관념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역사의 종말이 잠정적으로 알려진 종말로 이해될 수 있으며, 역사 종말에 대한 우리 지식의 잠정성에 대한 사유 안에서 미래의 지평이 개방되고 인간 체험의 유한성이 보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잠정적이고 선취적으로 도달된 종말로부터 소여된 전체로서의 역사관은 오늘날 이스라엘-유다전승과의 맥락속에 선 예수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역사이해임을 지적한다.
이처럼 판넨베르그는 해석학의 주제가 보편역사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규정한다. 그는 현재와의 역사적 상위성을 지닌 전승된 텍스트의 이해는 개방된 미래의 지평과 현재 행동을 취할 가능성을 부여하는 지평을 다 함께 내포하는 보편역사적 사고 안에서만 방법적으로 사리에 맞게 취급될 수 있기 때문임을 가다머의 전승사적 해석학의 통찰을 비판적으로 원용하면서 치밀한 논리 전개로써 제시하였다. 판넨베르그는 이와 같은 보편역사적 해석학의 정립을 통하여 그리스도 신학의 보편성, 요청의 타당성을 방법원리면에서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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