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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석학의 지평으로서의 보편역사 이해

판넨베르그는 해석학의 문제해결을 위해 보편역사의 기획을 요청한다. 그런데 종결되지 않고 계속 진행중인 역사의 과정속에서 보편역사관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우리는, 해석학의 지평으로 규정된 보편역사를 판넨베르그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가까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판넨베르그는 '말씀의 신학'과 구별되는 '역사의 신학'을 정립하려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그는 바로 해석학의 문제가 보편역사의 기획을 요청한다고 보는 한편, 보편역사적 관점이 바로 이스라엘-그리스도교적 신(神) 사상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강조한다. "시간의 간격이 어떻게 메워지고, 텍스트와 해석자가 공동의 지평을 통해서 어떻게 유대를 이룩할 수 있는가 하는 해석학적 문제는 보편역사의 물음에로 귀착된다. 그러나 보편역사적 사고 자체가 성서적 신(神)사상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 성서적 하느님으로부터 비로소 전체 실재가 최종목표를 지향하는 항상 새롭고 유일무이한 사건들의 역사로 이해되어왔다. 유다 묵시문학과 그리스도교 역사신학을 통하여 보편역사의 테마가 근세의 역사철학에 계승된 것이다. 보편역사가 성서적 신 사상 없이 도대체 단일성으로서 이해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판넨베르그가 1959년, 독일 부퍼탈(Wuppertal)에 소재하는 베텔 부퍼탈 신학대학의 동료 강사들의 모임에서 행한 강연 "구원사건과 역사"의 서두는 그의 역사관을 읽을 수 있는 명제로 시작한다. "역사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가장 포괄적인 지평이다. 모든 신학적질문과 답변은 세계앞에서는 아직 감추어져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이미 계시되어 있는 미래를 지향해서 하느님이 인류와 함께 그리고 인류를 통해서 당신의 전창조와 함께 이룩하시는 역사(歷史)의 틀 안에서만 의미를 지닐 뿐이다." 판넨베르그는 전체로서의 역사를 하느님의 역사(役事)요, 계시로 파악하고 있다. 판넨베르그는 소위 '판넨베르그 서클'의 구성원들인 하이델베르그의 동료 학자들과 함께 1960년 10월 발표하고 편찬해 낸 [역사로서의 계시](Offenbarung als Geschichte)에서 자신의 입장을 명제화하여 정립한다. 여기서 그는 하느님의 자기 개현(Selbsterschlie ung)으로서 계시의 엄격한 개념이 헤겔에게서 최초로 드러났다고 말하면서, 그의 역사관이 헤겔의 역사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판넨베르그는 역사신학의 출발점이 실존론적 '말씀의 신학'에서처럼 의문에 처해지는 인간 실존으로부터 제기되는 하느님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역사적 전체성으로서 세계역사에서 수행되는 하느님 증명이라고 한다. 보편성 요청을 내세우는 그리스도 신앙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의 역사적 계시라면, 신앙의 대상도 마땅히 역사적 탐구방법에 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판넨베르그는 신앙의 역설성을 강조하고 신앙의 결단성격에 집착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계식의 명증성에 대해 확신하는 듯하다. "신성(神性)의 특수 현현과는 구별되게 역사의 계시는 보는 눈을 가진 사람 누구에게나 열리어 있다. 역사계시는 보편적 성격을 지닌다." 판넨베르그는 '구세사가'인 쿨만처럼 계시를 역사로 이해한다. 그러나 쿨만이 세속역사의 사건들과 신앙에만 도달 가능한 구세사의 사건들 사이의 질적인 구별을 고수하기 때문에, 판넨베르그는 쿨만의 입장으로부터 간격을 취하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자신의 역사신학의 관점이 역사적으로 실증될수 있다는 주장을 표방한다. "이러한 유형의 역사신학은 원칙적으로 역사적으로 검증될 수 있다고 한다는 점에서, 재래의 구세사적 사고와는 구별된다." 이 때문에 판넨베르그는 실제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을 파악하는 데에서 시작하여 이 사건이 지니는 하느님 계시의 성격을 구명하고자 한다.
판넨베르그가 영국 역사가 콜링우드(R.G. Collingwood)의 입장에 의지하여 적용하는 역사적 탐구방법은 원칙적으로 도달가능한 모든 역사현상을 파악코자 한다. 그런데 그는 모든 역사적 관심은 선택을 내린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가의 개성에 의해 제약되기도 하지만, 신학적 관심자체가 이러한 선택적 경향을 지닌다고 말한다. 판넨베르그는 신학적 역사적 관심은 즉시 나자렛 예수의 종말론적 역운(終末論的 歷運)으로 이끌거나 참조토록 하는 소여성을 즐겨 택하는 경향을 지닌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선택 경향이 신학적 역사관안에서 이스라엘 하느님의 보편요청을 제기하고, 나자렛 예수가 이 하느님의 권위를 결정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교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다른 모든 역사적 사건이 이 종말론적 사건과 연유되고 접촉된다는 것을 가능한 한 발견하여, 이스라엘 하느님과 나자렛 예수 안에서 발생한 그의 계시의 보편성이 확증된 것으로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유형의 역사적 소여성, 역사적 사건들을 향하는 것이 역사탐구의 법칙이라 말하고 신학적 역사탐구는 역사적인 개별 사건탐구를 초자연적 가설로 대치시켜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강력히 표명한다.
판넨베르그는 이러한 역사탐구의 입장에서 창조로부터 종말까지의 보편역사를 하느님의 계시로 파악한다. 그런데 헤겔에 있어서는 역사 자체가 하느님의 현현이었다. 그는 역사를 이미 완성된 전체로 보았다. 헤겔 이래 그리스도 신학에서 하느님의 직접적인 계시관이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데 반해서, 판넨베르그는 하느님의 역사적 계시의 간접적 성격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성서증언에 의하면 신(神) 현현의 양식에서와 같이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역사행업(歷史行業)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는 하느님의 역사적(歷史的) 계시가 하느님에 대해 간접적으로 무엇인가를 계시하는 하느님의 행업으로서의 사건들이라고 본다. 그는 말씀의 신학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감도(感導)의 의미로서의 말씀은 계시로서의 역사(歷史)를 구성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권위적 계시 요청을 내세우는 것에로의 복귀를 의미할 것이다." 하느님의 행업으로서 개별적인 역사적 사건은 하느님의 부분적인 계시를 중재시킬 뿐이다. 하느님의 충만한 자기 계시는 역사(歷史)가 전체로서 계시로 이해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나 역사의 최종 의미는 그 종말에 가서야 온전히 드러난다. 그런데 역사과정이 진행중인 현재 어떻게 보편역사의 기획이 가능한가?
역사는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포괄적 틀(Rahmen)이다. 인간은 전체 역사의 의미가 지금은 아직 감추어져 있음을 체험하고 있다. 역사의 어느 사건의 의미도 자체로는 명료하게 규정되거나 파악될 수 없다. 여하한 역사적 사건의 의미는 다른 역사적 사건, 시대적 상황과의 관계와 상위성 속에서 드라나게 된다. 역사과정이 진행되는 현재 역사적 사건들의 본연의 의미는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미래에 가서야, 최후 미래에 가서야 의미를 전체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지나간 사건과 현재사건의 의미는 기나긴 전승사 내지 영향사 속에서만 개현된다. 이 과거와 현재 발생하는 사건의 의미는 역사의 총체가 시야에 들어올 때에야 온전하게 드러날 것이다. 역사 전체로부터 개별적인 사건 내지 인물 본연의 의미가 전모를 드러낸다.
그리고 현재로는 인간의 진리 자체가 온전히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역사의 의미연관성의 전체속에서 인간의 진리와 본질은 이미 지금이 아니라, 완성된 전체에 직면하여서 인식되고 적절하게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든 시대의 인간은 자신과 직접 관련되는 역사의 의문점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자그마한 삶의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고 존속케 하는 전체역사의 의미에 대해서 전실존을 걸고 묻는다. 보편역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사실상 모든 시대의 인간을 규정하고 사로잡는 물음이라고 볼수 있다. 인간의 구체적 현존은 이 역사의 보편적 지평속에서 영위된다 그 때문에 어느 한순간도 인간은 보편역사의 의미에 대한 포괄적인 물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셈이다. 그런데 역사의 단일성, 보편성은 역사의 의미를 온전히 부여하는 종말에 가서야 드러나게 될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이 보편사적 지평을 구약성서적 계시관과 유대시킨 것이다. 역사는 개별적인 우연적인 사건들로 이루어진다. 이 역사적 사건의 '우연성'이 역사의 '단일성'내지 '보편성'에 의해 흡수되거나 지양되어서는 안된다. 반면에, 개별적인 우연적 사건들 사이에 보편적 의미연관성이 가능한데, 이는 역사가 하느님의 역사적 행업(歷史的 行業)으로서 계시인 한에서 가능하다고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역사를 초월하면서, 개별적 역사사건들을 가능케 하고 역사의 단일성이 초월적으로 정초되어 있다는 견해를 판넨베르그는 피력하고 있다.
구약 속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위한 역사적(歷史的) 행업속에서 간접적으로 계시되고 인식된다. 여기서 역사와 하느님의 계시는 불가분리적으로 함께 연계되어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발생한 하느님의 역사적(歷史的) 계시는 잠정적이며, 새로운 계시에 의해 대치가 가능하다.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사건들이 앞서 발생했던 사건들을 해소시키고 이 역사(歷史)의 하느님의 다른 면모를 드러낸다. 구약의 단계에서는 모든 인간과 시간, 그리고 전체 역사를 포용하는 구원행업 속에서의 하느님의 보편적 계시가 발생하지 않고 있다. 야훼는 당신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개별적인 역사행업(歷史行業) 속에서 강대한 분으로 계시하였을 뿐이다. 하느님이 모든 사건의 주님으로서 등장할 때에, 그가 인류의 역사를 종말로, 완성에로 이끌 때에 비로소 이 하느님의 하나님임의 보편적 계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후기 이스라엘의 묵시문학적 희망은 인류역사의 주로서의 하느님의 자기 현시를 목표로 지향하고 있다. 묵시훈학적 희망은 '사자(死者)의 부활'(Auferstehung der Toten)을 모든 인간에게 하느님의 권세와 영광이 드러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역사계획이 숨겨져 있는 지혜와 그 의미가 계시되는 사건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 후기 유다 묵시문학적 사상의 대두와 함께 전체 실재를 포용하고 종말론적 사건 속에서의 의미부여를 지향하고 있는 보편적 역사지평이 열리게 되었다고 판넨베르그는 보고 있다. 보편역사의 구세사에로의 확대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을 통해서 성취되기는 하였다. 하지만 이스라엘 하느님의 보편성에 대한 직관은 묵시문학의 단계에 이르러 최초로 체계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묵시문학가들에게는 야훼의 법이 전체세계사건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전체만이 야훼의 신성을 궁극적으로 계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사건의 종말에 가서야 야훼가 한 분이자 유일한 하느님으로 궁극적으로 계시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묵시문학의 전통에서 '사자들의 부활'이 포괄적이고 보편적 사건으로서 역사의 종말에 가서 발생하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사건으로 기대된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나자렛 예수의 역운, 특히 그의 부활속에서 역사의 종말이 앞당겨져 선취적으로 발생하였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 사건을 보편적인, 모든 역사를 포괄하는 자기 현시 속에서의 하느님의 종말론적 계시로 규정한다. "하느님의 신성의 보편적 계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나 나자렛 예수의 역운(歷運)속에서 모든 사건의 종말이 선취적으로 발생한 한, 비로소 실현되었다." "그리스도 사건은 고립된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이 사건이 이스라엘과의 하느님 역사(歷史)의 지체인 한, 이스라엘 하느님의 신성을 계시한다." 판넨베르그는 예수의 등장과 역운 속에서 지금까지 어떠한 새로운 사건이나 체험으로 능가되거나 추월되지 않은 궁극적 실재와 진리가 발생하였다는 점을 사자 부활과 창조의 쇄신을 기대해온 유다 묵시문학적 전통에 연관시켜 강조하고 있다. 그는 보편역사적 성격을 띤 유다 묵시문학에서 기대되었던 말시적(末時的) 사자 부활사건이 나자렛 예수에게서 종말론적 실재로서 역사 안에서 현실적으로 발생하였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판넨베르그 그리스도론의 본연의 중심과 출발점은 예수 부활사건이다. 그는 부활사건의 보편역사적 의미를 규정하면서 그리스도론의 기본문제를 새로 제기토록 한다. 그는 예수 부활 안에서의 하느님의 보편적 신성의 계시성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적(史的) 유일회성을 모든 시대의 인간을 위한 그의 보편적 의미와 중재시킬 수 있다고 본다. "초대 그리스도교 사상의 지평속에서 예수의 부활은 역사의 종말이 그에게서 이미 사건이 되어서, 그 자신과 그의 메시지와의 관계여하에 따라 모든 인간의 궁극적 운명이 결정된다고 예수가 부활 이전에 주장한 것이 지금 예기치 않은 형식으로 확인되었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도래하는 하느님의 주권을 통하여 이끌려지게 될 역사의 종말이 예수의 등장과 역운속에서 이미 현존하는 실재가 되어 있어, 이를 테면 예수로부터모든 사건과 인간의 전체성이자 본질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적 전승은 예수안에서의 하느님의 궁극적인 계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그의 그리스도론을 부활 전 예수가 내세웠던 전권요청의 성격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여기서 그는 예수의 등장과 메시지에 나타난 특수한 면모를 지적한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면서, 자신의 현존 속에서 하느님의 전권능을 행사하였다. 예수는 인간의 운명이 그 자신에 대한 입장 표명에서 결정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예수는 하느님만이 내세울 수 있는 권위를 감히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예수의 판결과 행동 속에서의 하느님 판결의 성취는 하느님에 의한 확인을 필요로 한다고 판넨베르그는 보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내세웠던 보편적 요청에 대한 하느님으로부터의 확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 속에서 하느님의 종말적 역사행업의 묵시문학적 희망이 성취되었다고 판넨베르그는 본다.
판넨베르그가 예수의 부활을 종말론적 실재로 파악하는 점에서, 그는 '말씀의 신학'을 전개하는 불트만과 푹스와 견해를 같이한다. 불트만에게서 그리스도 사건은 세계사의 종말을 의미한다. 예수의 부활은 보편적 부활의 시작을 뜻하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현재의 실존이 종말론적 실존이고, 역사는 종말론에 의하여 삼켜졌다고 보여진다. 불트만에게서는 종말이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므로 보편역사적 과정의 의미에서 역사는 끝난 것이다. 불트만은 그리스도 사건이후 종말을 단순히 미래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현재적인 것으로 이해하여서, 역사의 과정을 미래로부터 현재 안으로 들어와 현실화되어나가는 종말의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이제 역사는 결정적으로 이미 성취된 종말의 지평속에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불트만의 종말론을 '현재적 종말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이에 대해서 예수 부활과 함께 발생한 종말이 잠정적으로 사전에 발생하였음을 강조하여 역사의 틀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종말]은 역사의 테두리 안에서 단지 잠정적으로 선취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예수의 인격속에서 역사의 종말이 이미 선취되었다는 진술의 의미 역시 묵시문학의 역사관의 테두리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역사가 결코 끝나지 않았음을 역설한다. 판넨베르그는 오히려 역사의 종말이 이미 현존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전체로서의 역사이해가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역사의 종말인 예수 그리스도가, 세계사건을 포괄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원리로 이용될 수는 없다고 본다. 종말의 개벽인 예수 부활은 인간의 이성에게는 다마스커스로 가던 바울로의 눈을 멀게했던 것과 같은 빛과 같다는 것이다. 그는 종말이 그토록 신비스럽고 엄청나고 파악할 수 없는 양식으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종말의 선취로부터 역사의 흐름을 계산해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처럼 판넨베르그는 역사의 종말의 선취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도 인간의 역사인식의 유한성과 잠정성을 아울러 고려한다. 한 개별적인 사건이 역사의 종말에 가서야 자신의 온전한 의미를 제시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도 해당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등장과 역운 속에서 본래 무엇이 발생하였는지를 종국적으로는 아직 모르고 있다. 그러나 이 유보(留保)자체가 저 사건의 궁극성에 속한다. 이 궁극성은 진전하는 시간과 이 시간에 매여 있는 인식의 역사적 상대성 한가운데에서는, 예수의 역운에 속한 의미의 인식이 아직 종결되어 있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다" 판넨베르그는 우리 현대인이 종말의 '이미'(Schon)와 '아직 아니'(noch-nicht) 사이의 긴장관계속에서 살아간다고 본다. 그런데 이 '이미'와 '아직 아니'의 긴장성은 그리스도인의 주관적 체험에 위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역사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종말론적 전망 속에서의 역사의 새로운 성격을 보존하고자 한다.
판넨베르그는 하느님을 만사를 규정하는 실재(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실재의 전체와 관련을 맺게 마련이라고 그는 본다. 하느님에 대해 거론하고 실재의 전체에 대해 거론하는 것은 똑같지는 않으나 서로 제약한다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어떤 양식으로건 하느님을 생각지 않고 실재 전체에 대해 거론할 수 없으리라고 본다.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모든 유한한 실재의 전체성에 대한 생각을 함축한다는 것은, 실재의 전체가 아직 종결되어 있지 않고 완성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되어서 아직 현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당하다고 그는 말한다. 이것은 실재의 전체성이 현전하는 것이 아니요, 아직 개방된 미래를 지향하는 역사의 과정으로 생각되어야 하는 것을 말할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만사를 규정하는 실재로서의 하느님은 인격적이기는 하나 역사의 하느님으로 생각되어야 하리라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인의 하느님은 당신을 개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아직 종결되지 않은 역사의 하느님으로 드러냈음을 지적한다.
그런데 나자렛 예수에게서 유다 묵시문학에서 기대되었던 말세적 사자 부활사건이 발생하였다. 유다 묵시문학의 기대는 모든 인간의 부활을 지향하는데, 이 사건은 지금까지 예수에게서만 발생하였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부활사건은 역사 종말의 선취이고 종말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종말론적 실재가 예수 부활속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일반적 사자 부활의 종말론적 미래는 예수 부활의 종말론적 사건과 양적 상위성을 지닐 뿐, 질적 상위성을 지니지 않는다고 판넨베르그는 보고 있다. 예수 부활에서 발생한 종말의 선취는 여하한 세계내적사건에 의해서도 능가되거나 추월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예수의 등장과 역운 속에서 역사의 종말이 이미 현전하는 실재가 되어서, 여기서부터 실재의 전체성이, 모든 사건과 모든 인간적 삶의 본질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예수 안에서의 하느님의 궁극적 계시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예수를 하느님의 종말론적 계시자로 선포하여왔다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예수의 역사가, 아직 종결되지 않은 하느님의 궁극적 미래가 임박한 것으로 각인되어 있고 이 하느님의 궁극적 계시의 선취인 한, 이 선취로부터 예수와 함께 발생한 건의 궁극성을 확실케 하고 실현하는 충동으로 나아간다고 본다. 그래서 예수의 역사는 새로운 역사를 자아낸다는 것이다. 예수의 역사로부터 나아가는 충동을 통하여 인간과 세계의 실재가 변모하기 때문에 이 실재의 전체성을 규정하는 힘으로서의 하느님의 이해와 예수 안에서의 그의 계시이해 역시 변화된다고 판넨베르그는 말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계시는 예수의 역사 속에서 궁극적으로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종결되어 현전하는 어떤 것은 아니며, 예수의 역사 역시 이러한 의미에서 아직 종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는 그분의 주권이 여전히 도래중에 있는 역사의 하느님의 계시로서 항시 새로 이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판넨베르그는 역사의 전체성이 나자렛 예수 안에서 발생한 하느님 계시전승의 과정 안에서 늘 새로 구성되는 셈이라고 말한다. "예수 안에서의 계시와 함께 역사의 전체성을 구성하는 하느님이 역사의 과정에로 친히 진입하면서, 동시에 이 역사의 미래로서, 이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바와는 구별되어 머물거나 늘 새롭게 자신을 구별하는, 도래하는 하느님으로서 진입해 들어왔다." 판넨베르그는 하느님은 당신의 종말론적 계시의 과정 속에서 역사에 내재하고, 역사의 전체성을 예수의 역사라는 역사내적 사건으로부터 내심(內深)으로부터 규정하여서 당신을 하느님으로서 만사를 규정하는 실재로서 드러낸다고 보고 있다.
판넨베르그는 그리스도교적 전승의 해석학적 과정 속에서 실재의 전체성이 예수로부터 늘 새롭게 나타난다고 본다. 이로 말미암아 해석학적 과정은 정지되지 않고, 이 전체성을 확실케하고 실현시키려는 노력을 통해서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드러나는 전체성 내용의 제약성 체험을 통해서 실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단계의 과정이 촉진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유형의 전체 이해는 선취에 의거하기 때문에, 전체의 모든 새로운 이해는 전체를 지향하면서도 전체가 아닌 순전한 선취로 자신을 드러내는 한, 자체 안에 모순을 지닌다고 판넨베르그는 지적한다. 이것이 개별적인 단계에 해당한다면, 단계에서 단계로 이끄는 과정 역시 궁극적인것(하느님의 미래자체)의 선취의 단일성으로서 예수의 역사 안에서 이 역사의 석명(釋明)으로 이해되리라고 판넨베르그는 말한다. 그는 역사의 전체성의 개현된 지평속에서만 현재는 그리스도교적 전승사의 원천으로서 예수의 특수성이 보전되어 머물면서, 이 특수성으로부터 그리스도교 역사의 해석학적 과정을 진행시키는 바, 현재를 변모케 하는 충동들이 나아가야 하도록 자신의 위치를 이해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판넨베르그는 역사적 탐구에 의하여 도달가능한 예수의 역사적 사건을 종말의 사전사건화(事前事件化)로 이해하면서, 이 선취된 종말사건으로부터 나아가는 전승과정을 보편역사로 규정한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보편역사적이고 묵시문학적 지평속에서의 부활사건해석으로써, 역시 보편역사관을 정립했던 독일 관념론 안에서의 하느님의 역사계시 표상과 유대되어 있는 단점과 문제들을 극복한 것으로 믿는다. "전체 역사만이 한 분 하느님의 신성을 증명하고, 이 결과가 모든 역사의 종말에 가서야 비로소 생겨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사건이 역사의 종말을 앞당겨 발생시키는 한, 개별적 사건인 그리스도 사건이 하느님의 계시로서 절대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같은 이유에서 종말의 사전 발생으로서의 그리스도 사건은 후대에 어떤 사건에 의해서도 추월될 수 없으며, 인간이 종말의 개방된 미래를 향하여 가는동안에는 그 의미가 온전히 파악되지 않은 채 머물 것이다." 그는 모든 인간의 하느님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의 하느님이 나자렛 예수 안에서 자신의 신성을 궁극적으로 계시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보편역사 기획을 요청하는 해석학적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믿으며 여기서 인간의 보편적 물음에 대한 보편적인 해답을 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4. 비판적 맺음말

지금까지 판넨베르그 해석학의 실상을 파악하고자 시도하였다. 그의 해석학의 입장에 대한 간략한 평가를 내리고자 한다.
4.1 판넨베르그의 해석학은 금세기 50년대 까지 주도적이었던 '말씀의 신학' 계열의 해석학적 입장의 일방성 내지 편협성을 지양하고 신학적 해석학사에서 '역사의 신학'시대의 문을 열어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희망의 신학'과 '정치신학'을 전개하는 몰트만과 멧츠 같은 신학자들의 해석학적 입장들이 구별점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판넨베르그가 정립한 보편역사의 신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판넨베르그의 해석학적 기본 통찰에는 그의 신관, 역사관, 세계관, 그리스도관, 종말관, 인간관, 성서관, 신앙관 등 대부분의 주요 신학 주제들이 요약되어 담겨있다. 이들은 각기 개별적으로 깊이 연구, 토의되어야 할 만한 문제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판넨베르그의 해석학적 입장만을 파악하려는 여기서 이 문제들에 관하여 개별적으로 충분한 입장 표명을 하기란 불가능하고 그의 해석학적 통찰이 해석학적 문제제기에서 뜻하는 바를 시사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
이해가 일반적으로 성취될 때, 이른바 '해석학적 순환'이 발생한다. 해석학적 순환은 이해 속에서의 전체적인 것과 부분적인 것 사이의 교환적 관계가 이루어져서 이해의 단일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지칭한다. 즉 부분적인 것은 전체로부터 이해되고 전체는 자신의 부분적 요소들에 의해 이해된다는 것이다. 고대 수사학에서 이미 주지되어 있었고 쉴라이어마허 이래 해석학에서 명백히 이해구조로 규정된 이 문제는 하이데거에 의해서 심화되고 첨예화되었다. 하이데거에게서 해석학은 본시 자기 자신을 세계와 역사 속에서 이해하면서 주석 내지 해석하는 인간의 해석학적 본질에서부터 이해의 문제를 규정하려는 노력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실재에 대한 전이해는 세계안에서의 실존과 함께 더불어 주어진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불트만은 이러한 해석학적 통찰의 지평에서 '전이해' 개념을 실존신학적으로 규정하였다. 불트만은 세계적 존재자로서 자기 자신의 실존에 대한 질문에로 움직이는 인간의 질문성 속에서 하느님에 대한 전이해가 역사적인 하느님의 계시역사(啓示役事)와 해후하기 전에 이미 형성되었다고 보고, 이 전이해를 하느님의 역사적 계시이해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계시이해의 전제로 규정된 전이해는 인간의 질문이기 때문에 전판단(前判斷)의 의미로서 규정된 해답은 아니다.  계시에 대한 전이해를 가진 인간이 역사적 계시와 해후할 때에 해석학적 순환과정이 발생한다. 그런데 불트만은 진정한 이해를 해석되어야 할 역사적 작품 속에서 만나는 요청에 청종(聽從)하는 것이라고 봄으로써, 해석자가 전승된 텍스트로부터 자기이해에로의 한 가지 요청을 체험하고, 책임있는 결단에로 호출되었다는 데에서 실존론적 해석의 의미를 보고 있다. 요컨대 그는 모든 역사적 전승내용의 중요성을 자신의 실존론적 해석학으로서 인간 실존의 기본 결단행위의 단순한 분모 속에서 본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보편역사의 신학 입장으로부터 해석학에서의 주요 개념인 '전이해'와 '해석학적 순환'의 성격을 불트만과는 달리 규정한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역사를 간접적이기는 하나 하느님의 계시로 규정하는 한편, 인간을 하느님이 주도하는 전승역사의 틀 안에서 생존하는 역사적 존재로 보고 있다. 인간은 이처럼 전승과 삶의 관계를 지니는 가운데 실존을 영위하기 때문에, 그가 전승내용에 대해서 지니는 '전이해' 역시 전승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선입견'의 성격을 불가피하게 지니고 있음을 판넨베르그는 가다머에 의존하여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전이해들은 인간들이 처한 역사적 환경에 따라 다양할 수 있음이 아울러 강조된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이해해야 할 전승된 텍스트가 해석자의 현재와 지니는 역사적 간격이 실존론적 문제 설정에 의해 사전에 차단되어, 인간학적 현존이해에 예속되어서는 안되고, 해석자는 당시의 텍스트의 특수성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해석자는 전승된 텍스트가 관련되어 있는 당시의 상황을 자기 자신의 현재와는 다른 그대로 일단 파악하고 나서 이 상이성을 현재와 관련시키라는 것이다. 당시적인 것의 역사적 간격이 보전되면, 당시적인 것과 현재와의 유대는 오늘을 당시와 잇는 역사 연관성 밖에는 달리 이루어질 수가 없다. 판넨베르그는 이렇게 해석학적 문제 설정이 보편역사의 기획문제에로 귀착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실재이해의 성취는 보편역사의 지평융합으로서의 해석학적 순환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판넨베르그는 보편역사의 지평융합이 의식적으로 발생하는 가운데 해석자의 전이해나 문제설정이 불트만에게는 아직 사유되지 않은 양식으로 전승된 텍스트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는 보편역사만이 지상 예수의 등장시대와 우리 자신의 현재 사이에 개재하는 간격을 넘어서서 해석학적 문제 해결을 위한 지반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본 점에서 신학적 해석학사에서 새로운 장(場)을 개척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그가 모든 사건의 전체성을 봄으로써 모든 사건의 원천에 대해서 해답할 수 있고, 모든 사건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보편역사를 이해의 포괄적 지평으로, 명시적으로 규정하자는 해석학적 입장은 불트만 계열의 실존론적 해석학의 일방적이고 편협한 규정을 지양시켜 진일보하게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 신앙은 계시의 하느님을 오로지 역사의 장(場)에서만 만날 수 있다. 그리스도 신앙은 신화도 영지주의도 아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발생한 사건 위에 정초하여 있으면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타당성을 주장하는 보편성 요청을 내세우고 있다. 계몽주의의 대두 이래 의문시되어온 '권위적 신학'의 입장을 포기하고, 구체적 내용이 없는 '케뤼그마'의 배후에서 역사적 사건을 향하여 사적(史的) 사실을 신학적 해석학의 원리로 규정한 판넨베르그의 취지는 정당하다. 이 역사의 중재는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적 객관성을 보장하고 아울러 주관적인 종교의식으로부터 신앙을 보호한다. 현대인이 임의로 조종할 수 없는 과거사건의 역사적 상위성이 신앙의 객관성을 보장한다고 말할 수 있다.
4.2 판넨베르그는 보편역사를 해석학적 기준으로 선택함으로써 헤겔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판넨베르그는 전체성으로 이해된 그리스도교를 새로 이해하고 있어서 '그리스도교적 헤겔주의자'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판넨베르그의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취된 역사 종말에 대한 보편역사의 의미해석이고자 하는 점에서, 판넨베르그는 헤겔의 역사철학을 묵시문학적-종말론적 관점에서 재수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판넨베르그가 전개하는 '역사의 신학'이 '이성의 신학'으로 이어지는 사실에서도, 그의 헤겔과의 밀접한 연관성이 다시 드러난다.
문제는 판넨베르그의 역사관이 성서-그리스도교적 역사관을 충실히 제시하는가 하는 것이다. 몰트만은 판넨베르그의 역사신학이 희랍의 우주신학의 사고구조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하면서, 역사가 진실로 '역사적으로' 이해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몰트만은 계시가 판넨베르그에게서 로고스(λογοζ)의 징표하에 위치하고, 참신한 것에 대한 '약속'의 성격을 진실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사실 판넨베르그가 인간 실존의 역사성 아닌,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결정적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실제로 그가 말하는 보편역사관에서 개별 인간의 역운과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온갖 부정적 사건과 고통의 문제가 얼마나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는가는 의문으로 남는다. 그리스도 신앙의 걸림돌 성격도 보편역사의 기획 안에서 중화되어버려 그리스도 십자가의 냉엄한 실재가 결과적으로 간과되기에 이른다.

 

 

출처 :행복†충전소 원문보기   글쓴이 : 익명회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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