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을 위한 책갈피입니다. 나누고 싶은 책 내용이나 소개하고 싶은 글들은 이곳에 올려주세요~
요즘 연말과 연시의 어수선한 틈에 일도 손에 안 잡히고 해서, 노벨
상을 탄 과테말라 작가의 <대통령 각하>를 읽어보기도 하고, 여편네와
어린놈을 데리고 <二五時>의 영화를 구경하기도 했다. 치질이 도져서
술도 안 먹은 탓도 있지만 오랜만에 조용하게 가라앉아서 쉴 수 있었다.
먹고 자고 읽고 잡담을 하고 하는 것이, 평범하게 시간을 즐기면서 사
는 맛이 꿀처럼 달다. 한적한 마루의 난로 옆의 의자에 앉아서 사과궤짝
에 비치는, 마루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따뜻한 햇볕을 바라보고 있으면
잠시나마 이런 안정된 고독을 편하게 즐기고 있는 것이 한없이 죄스럽
기까지도 하다. 물을 뜨러 부엌에 내려가서 마당을 바라보면, 라일락
장미 전나무들이 일렬로 서있는 풍경이 천국처럼 조용하고, 五월의 꽃
동산보다도 아름답다. 마음은 <대통령 각하>나 <二五時>가 격려하는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해 불같이 타오르면서, 이상하게도 몸은 낙천과 기
독의 가르침이 대극을 향해 줄달음질치는 것이 이상하다.
본지의 원고청탁을 받았을 때도 오늘의 교육이 교육사상 유례없는 타
락상을 보이고 있는 데 대해서 가차없이 까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
고, 최소한도 사립국민학교의 이사장같은 사이비교육자들의 횡포와 착
취에 대한 당국의 방임이나,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몸서리치는 상품화의 악폐 정도는 빈정대주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흥
분을 하고 붓을 들고 보면 써지지가 않는다. 원인은 더 깊은 데 있다. 내
가슴속에 있다. 흥분을 하지 못하게 하는 획일주의의 교묘한 세포파괴
의 크나큰 영향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가슴속에 있다.
나는 얼마 전에도 <라디오界>라는 제목의, 도저히 이곳에서는 발표할 수
없는 내용의 작품을 써놓은 것이 있고 뒤미처서 <먼지>라는 작품을 쓰
게 되었는데, 이 두 작품은 유물론과 유심론만한 대척적인 차이가 있
는 것이 우습다. 유심적인 면에서는 요즘의 나는 헨델을 따라가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모든 문제는 우리집의 울타리 안에서 싸워져야 하고
급기야는 내 안에서 싸워져야 한다.
<二五時>를 보고 나서, 포로수용소를 유유히 걸어나와서 철조망 앞에
서 탄원서를 들고 보초가 쏘는 총알에 쓰러지는 소설가를 생각하면서,
나는 몇번이고 가슴이 선뜩해졌다. 아아, 나는 작가의--만약에 내가
작가라면-- 사명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타락해있는 것이 아
닌가. 나는 마비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이 극장에, 이 거리에, 저 자동
차에, 저 텔레비전에, 이 내 아내에, 이 내 아들놈에, 이 안락에, 이 무
사에, 이 타협에, 이 체념에 마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마비되어 있지
않는 자신에 마비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극장을 나오면서 옆에서
따라오는 여편네와 애놈까지도 보기가 싫어졌다. 집에 돌아와서 아
이놈은 기분이 좋아서 이불을 깔아놓은 자리 위에서 후라이 보이니 구
봉서니 오현경이니 남진이니의 흉내를 내면서 우리들을 웃기려고 했지
만 나는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화를 내고 말았다. 그날 밤은
나는 완전히 내 자신이 타락했다는 것을 자인하고 나서야 잠이 들었지
만,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서 마루의 난로 위의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역시 원수는 내 안에 있구나, 하는 생각
이 또 든다. 우리집 안에 있고 내 안에 있다. 우리집 안에 있고 내 안
에 있는 敵만 해도 너무나 힘에 겨웁다. 너무나도 나는 자디잔 일들에
시달려왔다. 자디잔 일들이 쌓아올린 무덤 속에 내 자신이 파묻혀있는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옛날의 어떤 성인의 일까지도 생각이 나고는 한
다. 자기집 문앞에서 집안사람들도 모르게 한평생을 거지질을 하다가
죽은 그 성인은 아마 집안의 자디잔 일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뼈
저리게 느낄 수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나는 본지가 칭하는 <自由題>의 수필도 쓰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러다가 며칠후에 다시 이 글을 쓰고 싶은 생
각을 들게 한 것이 역시 마루의 난로 위에 놓인 주전자의 조용한 물 끓
는 소리다. 조용히 끓고 있다. 갓난애기의 숨소리보다도 약한 이 노래
소리가 <대통령 각하>와 <二五時>의 巨獸같은 현대의 諸惡을 거꾸러뜨
릴 수 있다고 장담하기도 힘들지만, 못 거꾸러뜨린다고 장담하기도 힘
든다. 나는 그것을 <二五時>를 보는 관중들의 조용한 반응에서 감득할
수 있었다.
김수영 전집2 산문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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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읽은 김수영의 짧은 산문입니다. 오래전(2000년 인쇄)에 출판된 책이라
국한 혼용되어 있네요. 그대로 옮겼습니다. 겨울 동冬 자가 생각이 안나 '종'
자에서 한자를 찾는 어리석음까지 겪으면서 힘겹게 썼사오니 읽어주십시요.ㅎ
이 글은 1960년대 초에 쓰여진 것 같습니다.
김수영!!
철학자 강신주가 김수영에게 자신의 계보를 이을 것이라고 한
사랑과 자유 저항의 시인, 김수영
산문은 처음으로 읽어 보네요.
김수영의 색깔이 물씬 나는 글인것 같습니다.
그냥 느낌으로만...
시간되면 김수영전집을 한 번 읽어 볼 수 있을런지 모르겠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