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동신교회 권성수 목사-
평자가 권성수 목사님의(이하 ‘권 목사’) 이름을 처음으로 접한 때가 1990년 여름이다. 그 당시 그는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로 재임하고 있었는데, 그 해 5월에 귀한 책을 번역해 냈다. 영국 셰필트 대학 해석학 교수인 안토니 씨슬톤(Anthony C. Thiselton)의 저서 <두 지평>(THE TWO HORIZONS)이 그것이었다. 부제로는 “하이데거, 불트만, 가다머, 그리고 비트겐스타인에 관한 신약적 해석학과 철학적 서술”을 달았다. 그 당시 판넨베르크의 해석학을 중심으로 계시론에 관한 주제로 학위논문을 쓰고 있던 평자는 그 책을 서점에서 발견하고 눈이 번쩍했다. 특히 이 책은 “판넨베르크에 있어서의 역사와 해석학”이라는 항목을 무려 16쪽 이상에 걸쳐서 할애하고 있었으니, 판넨베르크에 관한 번역 자료의 태부족으로 인해서 애를 먹던 평자가 얼마나 반가워했으리라는 건 두 말할 것도 없다. 그 책은 내 학위논문 참고문헌 목록에 들어있다.
평자는 이 책이 반가웠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놀랍기도 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학자들의 면면을 보면 이 책의 번역자가 한국의 보수신학을 대표하는 총신대학교 교수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부분이 약간 심리적인 부담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권 목사는 이 책이 본문의 지평과 현대의 지평에 편중되는 성경해석의 편견과 아집과 선입관을 교정하고 독자의 시야를 확대시킬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단서를 달았다.
역자는 성경해석학의 철학적 측면의 표준서인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본문 지평과 해석자 지평의 “융합”(fusion)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본문지평이 해석자 지평을 “변혁”(transformation) 시켜야 한다고 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신학도의 필독서로 권하고 싶은 이유가 바로 시야 확대에 있다. <중략> 성경의 객관적 절대권위는 결코 포기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두지평, 총신대학출판부, 1990, 13 쪽, 역자 서문에서)
어쨌든지 위의 책은 실제로 내 논문 작성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 뒤로 성서를 보는 내 시각을 심화시켰고, 더 나아가서 요즘 행하고 있는 설교비평 작업에도 여전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 당시 평자는 앞으로 보수적인 학자들과의 학문적인 대화를 비롯해서, 설교자들 사이에도 신앙적 소통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엿보았다.
얼마 전에 권 목사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기독교사상에 연재되는 내 글을 읽는 분 중에서 한 분이 일반 목사들보다는 신학대학교 교수 출신 목사들의 설교에서 배울 게 많다면서, 대구동신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권 목사를 추천했다. 권 목사는 동신교회에서 목회도 뛰어나게 잘 하시고, 특히 명설교자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다는 것이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듣기 싫은 설교를 억지로 듣고 글을 쓰기보다는 내 영혼을 끌어당기는 설교를 듣고 그것을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평자로서도 꿩 먹고 알 먹는 격이 아니겠는가. 17년 전의 작은, 그러나 소중한 추억을 되살리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평자는 동신교회 권 목사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설교 은사
권 목사가 전업 목회자요, 설교자로 방향을 바꾼 것은 잘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학문적인 소양이 부족하다는 말이 아니라 설교자로서의 은사가 매우 출중하다는 의미이다. 그는 천성적으로 머리보다는 마음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다. 신자들을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목회하고 설교하는 목사의 교회가 부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구동신교회는 2007년도에 들어서 주일공동예배를 4부로 확장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예배 참석자가 늘었다고 한다.
권 목사의 신앙적인 열정은 젊었을 때부터 두드러졌다. 그는 학생시절 힘든 일을 만났을 때 청계산 기도원 바위 위에 앉아 욥기 1-42장을 정독한 일이 있다고 한다. 욥기를 읽어본 분들은 알겠지만 “무죄한 자의 고난”이라는 주제를 담은 이 성서는 웬만한 결기가 아니고는 읽어내기 힘들다. 그런데 청년 권성수는 그 말씀을 바위 위에 앉아서, 혹시 무릎을 꿇은 게 아닐는지, 읽어냈다.(내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총신대학출판부, 1990, 45 쪽. 이하 ‘발’) 루터가 영적인 대답을 얻기 위해서 무릎으로 성 베드로 성당 앞에 있는 계단을 기어 올라갔던 것처럼 그는 그렇게 자기 몸을 던지면서까지 치열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풀어보려고 애쓴 젊은이였다.
그의 마음은 늘 이렇게 뜨겁고 간절하다. 그는 설교를 “우는 가슴으로” 전한다. 이런 그의 설교가 독자들의 가슴에도 “아픔으로” 부딪히기를 호소하고, 다 함께 이 현실을 “주님의 아픔”으로 품고 치료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발 4) 이 현실은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이며, 더구나 설교 문제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교회 강단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강단을 보면서 자칫하면 “잠자는 경비견”이나 “미친 경비견”의 극단에 빠질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듭니다. 전자는 보수 보수 하면서 자신도 자고 교인들도 재웁니다. 후자는 변혁 변혁 하면서 자신도 물고 교인들도 뭅니다. 전자의 메시지는 수면제이고, 후자의 메시지는 각광제(覺狂劑)입니다.(발 3)
그의 가슴은 아프다. 그의 설교는 “아픈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이야기”이다.(발 105) “예수님이 전하신 진리의 100분의 1도 깨닫지 못하는 저의 심정도 터질 정도로 아파죽겠는데” 예수님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하고 못견뎌한다. 하나님이 너무 위대하다는 사실을 “밤새도록 외치고 싶어” 한다. 영적으로 매우 민감한 그는 예수를 도덕군자나 혁명가로 보는 현대 사상 앞에서 이렇게 외친다. “저는 이것 때문에 울고 있습니다.”(발 163) 이런 열정은 최근의 설교에서도 그대로 전달된다. 그는 죄악에 물든 이 현실에 대한 청중들의 무감각을 안타까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청중들에게 먹이기 위해서 흡사 오체투지의 자세로 임하고 있다.
설교자로서의 연륜이 쌓일수록 그는 훨씬 강력하게 말씀을 선포하는 것 같다. 요즘 그는 설교 시간에 “아멘”이나 “할렐루야”를 외치기도 하고, 감정이 격해질 때는 손바닥을 연달아 두드리기도 했다. 예를 들어, 2006년 10월22일 “위기를 호기로 바꾸는 비결”(삼상 30:1-10)이라는 설교에서(이하 주일공동예배 설교는 월일로 표기) 청중들로 하여금 복음찬송을 부르게 했고, 설교의 중요한 대목에서는 할렐루야를 연달아 세 번이나 외칠 정도로 열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의 이런 열정은 일부 부흥사들에게 발견되는 작위적인 감정표현이 아니라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에게서 나오는 억제할 수 없는 영적 자기 표출이다. 평자가 보기에 다른 부분도 그렇지만 설교의 열정이라는 점에서 로이드 존스의 설교와 권 목사의 설교가 비슷한 길을 간다. 그들의 설교열정은 청중을 단지 설득하기 위한 수사가 아니라 영혼의 심층으로부터 밀려올라오는 영적 에너지의 발산이다. 이런 건 누구에게 배워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 그들만이 독보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설교자로서의 은사이다.
권 목사의 설교가 호소력이 있는 이유는 청중을 향한 열정과 영적인 에너지가 가득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매우 뛰어난 설교 언어가 구사된다는 사실에도 놓여 있다. 그는 청중들의 신앙적 깨우침을 감각적으로 증가시키는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에게 반항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그는 “백기를 들고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발 52)하고 말했다. “돈이 궁하면 다음 날 봉급을 가불하십시오. 그러나 내일 고통을 오늘 가불하지 마십시오.”(발 96)라거나 “믿음의 T-임파구로 염려의 암세포를 죽이십시다.”는 표현, “현실은 다 막혀도 하늘을 향해 고속도로가 활짝 열려 있습니다.”(발 129)는 표현은 그의 설교에 지천이다.
권 목사의 설교행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성서의 진리를 청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하기 위해서 끌어들이는 인문학적 정보들이 매우 풍부하고 전문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청중들의 영적 요구와 실제적인 삶의 요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신학자들의 현학적인 탁상공론이나 목회자들의 실용적 목회기술공학을 넘어서 통전적인 영성을 제공하는데 탁월한 은사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지성과 영성이 결합된 설교자라는 말이다. 거기다가 목회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용할 줄도 알고, 세계 선교에 대한 열망이 유달리 강하기도 하다. 동신교회의 해외선교가 다른 교회를 따라하는 게 아니라 그들만의 고유한 선교전략에 의해서 실행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런 점들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작년에는 탄자니아에 5천만 원을 지원해서 우물을 팠으며, 6천만 원으로 구호 식량을 제공했다.(12월3일) 동신교회는 당장 효과를 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조금 더 먼 내일을 내다보고 간접 선교에 막대한 재정을 투자하고 있다.
평자가 보기에 권 목사는 목회자로서나 설교자로서 이미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고 있으며, 그런 경지가 앞으로 강화되면 강화됐지 허물어지지 않을 것 같다. 그 어떤 기준으로 놓고 본다 하더라도 권 목사는 한국교회 지도자 중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뛰어난 사람임에 틀림없다. 한국교회의 오늘과 내일을 그에게서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전제하면서 평자는 권 목사의 설교에 다른 잣대로 말을 걸려고 한다. 이 잣대는 권 목사가 전공한 성경해석학이다. 그는 성경해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앞에서 언급한대로 해석학의 고전이라고 일컬어질 만한 <두 지평>을 번역한 학자이며 설교자이다. 질문은 이것이다. 그는 해석학에 근거해서 설교하고 있는가? 그의 성경해석학은 정도를 걷고 있는가?
치유 설교
평자는 일단 대구동신교회의 홈페이지에서 권 목사가 주일공동예배에 행한 설교 17편을 검토했다. 설교가 행해진 기간은 2006년 9월-12월이다. 설교 텍스트가 없었기 때문에 축자적으로 인용하는 데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데는 별 문제는 없었다. 우선 본문과 날짜는 제외하고 차례대로 제목만 열거해보겠다.
상한 마음의 치료자, 파라다이스의 회복, 신속한 치료와 영혼의 만족, 은혜의 치료, 고통은 성숙의 길, 북핵시대에 민족이 살 길, 위기를 호기로 바꾸는 비결,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 성령님과 상담하세요, 관계치유의 원리,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 수용(acceptance)의 치유, 세계선교의 원천, 이런 교육에 희망이 있다. 훈련 받으면 희망이 보인다, 성찬의 복음, 경외의 기쁨.
제목은 설교의 압축파일과 같다. 위의 제목들을 자세히 보시라.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는 치유와 관계되는 것들이다. 치료자, 회복, 치료, 만족, 비결, 상담, 관계치유, 행복, 수용, 희망, 훈련 등등, 모든 단어들이 치유와 한 묶음으로 처리될 수 있다. 권 목사의 설교는 청중들의 상한 심령을 치유하는 데 집중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치유하시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역시 우리를 치유하시는 분이라는 점에서 그의 설교는 성서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평자의 눈에는 이 설교 제목들이 의아하게 보였다. 그 제목들은 일반 상담학에서 관심을 갖는 것들이다. 기독교 신앙이 삶에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욕을 불어넣어주기 위한 상담학과 어깨를 같이 할 수는 없다.
이런 문제는 약간 미묘하기 때문에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다. 평자의 생각에 성서텍스트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하는 설교자는 인간관계 회복과 자기 존엄성 회복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청중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직면하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물론 설교 행위에서 청중들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건 바람직하다. 아니 총체적으로 치유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치유는 설교자의 몫이 아니라 성령의 몫이다. 우리는 청중들과 성령이 만날 수 있는 영적인 계기를 여는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직접 나서서 청중들을 치유하려고 해서는 곤란하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가? 이건 기독교 신학의 기초만 알면 당연히 나오는 대답이다. 생명이 온전히 하나님의 배타적 사건이라면 그 치유도 오직 하나님의 소관이다. 생명이 인간에 의해서 처리될 수 없듯이 인간 치유도 역시 사람에 의해서 가능한 사건이 아니다. 설교자가 옆에서 약간 도움을 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도움은 줄 수 없으며, 오히려 설교자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하는 경우 성령의 치유를 차단하는 일이 많다. 평자의 주장은 이것이다.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은 청중들을 치유하거나 계몽하거나 고쳐서 새 사람 만드는 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말씀에 직면하도록, 성령의 힘에 사로잡히도록 그 영적인 길을 안내하는 것뿐이다. 이런 점에서 치유를 근본 목표로 하는 설교는 방향 착오이다.
예를 들겠다. 여기 서로 사귀기 시작한 젊은 남녀가 있다고 하자. 이 두 사람이 은밀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그 자리에 남자의 한 친구가 와서 이들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말을 걸었다. “서로 자주 만나라. 편지도 쓰고 이벤트도 만들어야 한다. 절대 다른 여자나 남자를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공연히 다른 곳에 눈길을 주었다가는 큰 시험에 든다.” 더구나 이 친구는 이 말을 한번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했다. 이런 행위는 사랑을 시작하는 이 남녀를 돕는 게 결코 아니다. 이 친구는 데이트 자리에 끼어들지 않는 게 그들을 돕는 것이다.
평자는 권 목사의 설교에서 쓸데없이 잔소리를 길게 늘어놓는 친구의 과잉친절을 듣는 것 같았다. 비록 그 친절이 진정한 우정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친절로 인해서 정작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몰두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설교자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 그의 통치, 그의 종말론적 사건, 그의 생명 행위이다. 이런 일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설교시간이 모자라는 마당에 그는 왜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을, 이미 청중들과 성령과의 사이에서 당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그런 일들을, 그것도 매우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해서 거듭 반복해서 확인하고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이에 대한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 일단 동영상 설교 중에서 세 편만 간략히 따라가겠다.
상담의 원리
11월5일 “성령님과 상담하세요.”라는 설교는 요한복음 14:15-24절을 본문으로 한다. 권 목사는 성령이 우리의 상담에 응하고,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해줄 뿐만 아니라 능력을 제공한다고 설교의 문을 열었다. 이 설교는 크게 세 단락으로 구성된다. 첫째, 성령상담의 원리, 둘째, 성령상담의 실제, 셋째, 성령상담의 성숙이다. 예수가 말씀한 다른 보혜사, 즉 파라클레토스는 진리와 은혜의 영이신데, 그는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신다. 권 목사는 ‘성령상담의 실제’라는 대목에서 세 가지 실례를 들었다. 비만, 섹스중독, 관계균열이 그것이다. 예컨대 비만에 시달리는 사람은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부터 성령과 상담해야 한다. 상담이 진행되는 동안에 그는 냉장고 안의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할 것이며, 친구에게 전화를 걸도록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그 친구의 충고로 비만치료 소그룹에 참여해서 결국 비만을 해결한다는 것이다. 섹스중독과 인간관계 균열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성령상담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평자는 아주 진지하게 전하는 그의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미안하지만 웃음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설교에서 성령은 ‘해결사’였다. 만약 기독교 신앙을 이런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설교를 들을 것도 없다. 설교보다 훨씬 실감나는 이야기로 꾸며진 “리더스 다이제스트” 유의 책들을 읽으면 충분하다. 솔직하게 말하자. 그가 거론하고 있는 비만, 섹스중독, 관계균열이 성령상담으로 해결되는가? 그리고 더 궁극적으로 말하면,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가? 그런 문제들은 성령과의 상담이라는 방식이 아니라 건전한 상식으로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며, 거꾸로 아무리 성령과 상담하고 기도해도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들은 성령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상관이 있다 하더라도 부분적이고 간접적일 뿐이다.
특히 그의 설교에서 평자가 느낀 당혹감은 성서본문의 해석에 관한 문제이다.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관계를 삼위일체론적 구도 안에서 보도하고 있는 요한복음 14장에서 일종의 상담 원리를 발견하는 권 목사의 착상이 놀랍다. 파라클레토스에 대한 요한복음 기자의 보도는 역사적 예수와 재림의 지연 사이에 놓여 있는 초기 공동체의 신앙고백이다. 요한공동체는 역사적 예수의 구원론적 사건들이 성령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연속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신앙의 토대로 인식했다. 예수와 성령의 일치라는 초기 기독교 신앙의 인식론적 신비를 심도 있게 다루지 않고, 비만과 섹스중독과 관계균열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평자는 망연(茫然)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본문으로 무슨 설교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설교 작성법 강의가 아니지만, 그래도 독자들을 위해서 한 마디 한다면 다음과 같다. 역사적 예수가 지금 우리에게 현존하지는 않지만 그와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성령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면 우리는 바로 그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더구나 요한은 그 파라클레토스를 “진리의 영”이라고(17절) 규정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거나 경험하기 원하는 성령은 바로 이 진리와 연관된다. 기독교인은 교회 안만이 아니라 밖에 이르는 모든 세상에서 이런 보편적인 진리와 연관된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설교자는 역사적 예수와 성령과 진리의 관계를 요한복음 기자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정확하게 설명하고, 그것의 구체적인 적용 문제들을 찾아내는 것으로 한편의 설교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기독교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차원에 속하는 본문이 권 목사의 설교에서 상담 원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희망찬 교육
권 목사는 2006년 대강절 절기 동안에 이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았다. 12월3일에는 “세계 선교의 원천”(행 13:1-3), 10일에는 “이런 교육에 희망이 있다.”(신 6:4-9), 17일에는 “훈련받으면 희망이 보인다.”(잠 3:11-17), 24일에는 “성탄의 복음”(눅 2:8-14)이었다. 그게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으신 분이 교회력을 무시한다는 게 말이다. 평자는 일 년 열두 달 대강절 설교를 하고 싶다. 우리에게 예수가 재림한다는 사실보다 더 큰 메시지가 어디 있는가? 그 때는 바로 생명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그때가 현실적으로는 아직(not yet) 오지 않았지만 영적으로는 이미(already) 온 것으로 믿고, 그렇게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아닌가. 아마 권 목사는 신자들을 신자답게 만드는 일에 마음을 쏟느라 대강절 절기를 신경 쓰지 못하는지 모른다. 그가 대강절 두 번째 주일에 행한 설교 “이런 교육에 희망이 있다.”는 다음과 같다.
권 목사는 오늘의 한국교육에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예컨대 철학과가 폐과되고 사교육비가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이 설교도 크게 세 단락으로 구분된다. 첫째, 희망찬 교육, 둘째, 유대인의 축복, 셋째, 유대인의 교육이 그것이다. 희망찬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접속해야 하고, 삼대(三代) 교육을 시키고,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 권 목사에 따르면 이런 방식으로 희망을 안고 사는 민족이 있는데, 유대인들이 대표적이다. 그는 유대인이 받은 축복을 세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했다. 첫째, 세계 인구의 0.2%인 유대인들이 노벨상의 30%를 수상했다. 둘째, 미국의 4대 메이저 방송국을 유대인이 장악했으며, 셋째, 미국 상하원의 7%가 유대인이고, 8대 명문대학 학생의 30%가 유대인이다. 이들이 뛰어난 이유는 바로 신명기 6:4절 이하에서 진술된 “쉐마”(들으라) 교육 때문이라는 것이다.
평자는 그의 열정적인 설교에 마음이 움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저건 아닌데!” 하는 찜찜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는 사실을 그는 구구절절이 설명했다. 그는 거꾸로 설교한 셈이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뛰어난 업적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즉 그들의 교육 방법론이 아무리 뛰어났다 하더라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지 못했다면 그 모든 것들이 허물어지는 것이라는 설교가 마땅한 것 아닐는지. 그의 설교는 케리그마의 기독론이 아니라 세속적인 교육학에 기울어진 셈이다.
더구나 세계사적 안목이 어느 정도 주어진 설교자라고 한다면 유대인들의 업적을 이렇게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지는 못한다. 유대인들이 오피니언 리더로 자리하고 있는 미국이 세계의 평화를 일방적으로 깨는 전쟁에 너무나 쉽게 나서고, 군수산업을 배부르게 하는 등, 하나님의 평화를 깨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그대로 보이고 있다면 결국 그들의 교육은 실패한 것 아닐는지. 미국의 제국주의적 난폭성이 반드시 유대계 미국인들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겠지만, 유대인의 세속 장악력을 놓고 권 목사처럼 일방적으로 유대인의 축복 운운할 수는 없다.
그는 왜 그렇게 설교했을까? 미국사회에 내재한 근본적인 문제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유대인들과 팔레스틴 사이의 분쟁에 대해서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인간의 중층적 삶과 역사를 당연히 알고 있을 권 목사가 이렇게 쉽게 중심을 잃는 이유는 청중들을 치유하는 일에, 조금 더 적나라하게 표현해서 청중들을 닦달하는 일에 몰두한다는 데에 놓여있다. 지나친 사랑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법이다. 청중들을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게 하기 위해서, 자녀들을 그렇게 강력하게 교육시키도록 강요하기 위해서 그는 매우 선정적인, 그래서 결국 비신앙적인 논리를 밀고 나갔다. 이 대목에서도 성서는 해석되지 않고 규범으로 적용되고 있을 뿐이다.
설교, 혹은 선동
권 목사가 10월15일 주일공동예배에서 행한 설교 “북핵시대에 민족의 살 길”(신 28:7-14)은 그런 선정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아무리 북한의 핵실험이 이루어진 직후의 설교였다고 하더라도 성경해석학의 권위자인 그가 신명기 본문을 흡사 극우보수 신문의 사설처럼 적용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는 설교의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10분 이상에 걸쳐서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해서 벌어진 안보위기와 그 원인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햇볕정책이 지금까지의 현상만 놓고 본다면 결과적으로 실패한 게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지적은 역사를 단면적으로만 보는 어리석음이다. 그는 햇볕정책 때문에 북의 핵실험이라는 위기 상황에서도 나라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못 보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외면한 것 같다. 이 설교에서 그는 현 정부의 안일한 대처로 인해서 벌어지고 있는 안보의 먹구름 앞에서 민족의 살길을 크게 세 단락으로 설명했다.
첫째, 바로 보자. 권 목사에 의하면 현시국은 김정일이라는 이리가 양을 향해 “나 엄마야, 문 열어.” 하고 말하는 형국이다. 그는 북의 핵이 기본적으로 남한을 겨냥한다고 단정했다. 김정일은 총으로 발사할 수 있는 핵무기를 개발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총으로 발사가 가능한 핵이라면 일본이나 미국이라기보다는 당연히 남한을 대상으로 한다.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이며, 그는 그런 정보를 어디서 얻은 것일까? 핵을 만들지 말라고 말리는 미국이 잘못인가, 핵을 만든 김정일 정권이 잘못인가, 하고 따지는 그는 미국의 핵에 대해서는 왜 입을 다물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는 금강산 여행을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했다.(신자들의 웃음) 자신이 북한정권을 비판했기 때문에 그곳에 갔다가 순교 당할지 모른다는 염려인지, 아니면 그 여행경비가 결국 북한정권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한 건지 모르겠지만, 공식적인 설교 시간에 이런 말을 버젓이 하는 그의 중심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에 반해 C.C.C.(대학생선교회, 총재 김준곤)는 핵실험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은 11월 초에 7년 전부터 꾸준히 전개해오던 ‘젖염소보내기’를 그대로 실행했다.
둘째, 바로 살라. 권 목사는 남한의 안보불감증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한국 밖에서는 핵실험의 여파를 크게 염려하는데, 실제 한국 사람들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사실을 못마땅해 했다. 그건 곧 정부와 지식인의 잘못이며, 근본적으로 안보불감증은 도덕불감증에 원인이 있다고 역설했다. 안보불감증과 도덕불감증의 일치라, 재미있는 발상이다. 그는 지금 무얼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평화의 댐 건설을 위한 국민모금을 다시 대대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말인가, 서울시청 앞에 모여 핵실험 반대 대중집회를 열자는 건가, 아니면 유사시를 대비해서 쌀과 생수와 라면을 사재기해야 한다는 말인가, 주식을 내다팔고 그 돈으로 집집마다 달러와 금을 사들여야 한다는 말인가.
셋째, 정녕 산다. 권 목사는 북한만이 아니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도 모두 우리의 잠재적 위협이라고 보면서, 여호와만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습니다. 할렐루야!” 이 설교의 결론은 원론적으로는 옳지만 당위에 머물고 말았다. 하나님이 왜 개인과 민중의 생존을 지키시는 분인지에 대한 해석은 없이 당연한 말씀만 강조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삶으로써 하나님을 우리 편으로 만들면 하늘과 땅의 모든 복이 우리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청중들에게 설득하는 행위는 설교가 아니라 선동에 가깝다. 설교는 성서가 말하는 어떤 결론을 청중들에게 주입하는 게 아니라 그 결론에 이르는 그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영성을 심화하는 말씀의 해석행위이기 때문이다.
청중들은 설교자가 성경구절을 인용하기만 하면 그게 바로 성서를 해석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설교자들도 이런 착각에서 자유롭지 않다. 많은 설교자들이 본문의 깊이로 들어가기보다는 많은 성경구절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설교한다. 설교자와 청중이 이런 방식의 설교에 길들어지면 결국 설교는 말재주에 머물고 말 것이다. 한국교회 강단이 이미 이런 위기에 깊숙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만한 분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위의 설교에서 권 목사는 신명기를 인용했다. 그러나 평자는 그의 설교에서 신명기 본문의 세계가 열리는 걸 경험하지 못했다. 신명기는 형식적으로 모세의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지만 후기 왕조 시대의 사건들을 배경으로 한다. 이스라엘의 긴 역사 경험을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라는 구도로 해명하고 고백하는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고유한 신학이다. 그들이 왜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는지 역사 신학적으로 추적하고, 이에 근거해서 오늘의 역사를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설교가 두 발을 굳게 딛고 있어야 할 성서해석이다. 이런 해석 없이 성구인용의 방식으로 설교하는 경우에 결국 성서텍스트는 왜곡될 개연성이 높다. 이런 방식의 설교는 흡사 이종격투기인 K1 선수들의 감투정신을 자극하기 위한 코치의 발언을 문자 그대로 일상에 적용하는 행태와 비슷하다.
흑백논리
지금 평자는 기분이 불쾌하다. 짝사랑하던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심정이다. 권 목사가 역사와 현실에 대해서 평자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성경해석학 전문가에게 기대했던 설교에 대한 기대감이 여지없이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뛰어난 설교자이며 목회자로 정평이 난 그분의 주일공동예배 설교에서 비만치료를 위한 성령상담과 안보불감증을 개탄하는 목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일이 우연하게 벌어진 건 아니다. 평자는 권 목사의 다른 설교와 강해서 두 권을 꼼꼼히 살폈다. 2006년 1월에 출간된 <산상수훈>(이하 ‘수훈’)은 마태복음 5-7장을 대구동신교회에서 시리즈로 강해한 책이며, 앞서 한번 인용했던 <내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1990년)는 총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여러 교회에서 행한 설교 묶음집이다. 이 두 책 사이에는 16년이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 사이에 흐르는 신앙적 토대는 최근의 동영상 설교에서 발견한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권 목사가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성서해석의 깊이를 외면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다. 평자가 보기에 그의 삶과 신앙과 목회와 설교를 추동해나가는 토대는 ‘흑백논리’이다. 바로 이것, 선악 이원론적 패러다임인 흑백구도에서 그는 성서를 읽고, 세상을 보고, 그렇게 설교한다.
권 목사에게는 흑과 백이 너무나 뚜렷하게 구분되어 보이는 것 같다. 악은 물론 세상이다. 그가 볼 때 세상은 썩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한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고 말씀하실 때 세상이 어떤 세상이라고 시사 하셨는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세상이 썩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미 썩었고 점점 더 부패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세상은 말하자면 부패의 미끄럼틀 위에서 더 심한 부패 쪽으로 급속도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다.(수훈 101)
평자는 그의 이런 해석을 접할 때마다 연민을 느낀다. 그는 심각할 정도로 성서텍스트를 왜곡한다. 평신도들의 눈에는 이런 왜곡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예수는 세상이 썩었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런 걸 암시하지도 않으셨다. 소금의 짠 맛을 강조하신 것뿐이다. 소금에는 방부의 기능도 있지만 음식을 먹을거리로 만드는 맛의 기능이 훨씬 본질적이다. 로마의 한 작가는 소금을 태양에 버금갈 정도로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소금은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존재론적인 능력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 즉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수의 이 아포리즘을 세상이 썩었다는 논증의 기초로 삼다니, 유구무언이다. 이는 곧 그가 세상을 흑백논리로 재단한다는 사실의 증거인데, 이런 논리는 그의 강해설교에 널려 있다.
이 세상은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어두워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과 멸망을 모른다. 이 세상은 스스로 개화된 것으로 평가한다. 지식과 학문의 재생이란 의미에서 르네상스 시대도 있었고, 이성이 만물의 척도라는 계몽사조 시대도 있었고, 각자가 진리의 빛을 소유하고 있다는 지금의 후현대주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세상은 죄와 사망의 어둠 천지이다.(수훈 114)
눈을 뜨면 유혹의 사자들이 우리를 둘러싼 것을 본다. 세상에서 밥 먹고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이런 유혹들을 피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사자들의 입을 막으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사자들의 입을 막으실 수 있다.(수훈 274)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서 세상과 대립하고 있었다. 선임을 잘못 만났을 때 당하는 군대에서의 어려움이야 누구나 겪는 일이니까 그렇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신앙 문제로 인해서 같은 동네의 친구들에게 핍박을 받았다고 한다. 친구들은 그를 따돌리고 심지어 그의 머리에 오줌을 누기까지 했다고 하니(수훈 90) 어린 소년 권성수가 받았을 상처가 어땠을는지 상상이 간다. 이런 경험이 각인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세상을 향한 적개심이 그의 설교에 거의 구조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죄로 오염된 세상에서 늘 죄와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오염시키는 죄를 깨끗이 청산하고 죄를 증오하는 것이 바로 성결케 하는 것일 겁니다.(발 76)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는데 우리가 여기 살고 있는 주변에 바알 신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물질주의적 향락의 신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저기 강남에 가 보십시오. 요즈음 향락의 신들이 얼마나 버글거리고 있습니까? 텔레비전을 틀어보시지요.(수훈 207)
혹시 평자가 권 목사의 설교 중에서 일부만을 문제 삼아 침소봉대하는 거 아닌가, 하고 오해할 분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 주제만 다루려고 해도 이 글쓰기의 지면이 모자랄 정도로 그의 설교는 흑백논리로 무장되어 있었다. 더 나아가 그는 청중들을 과도하게 공포 분위기로 끌어들인다. 철없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 강좌와 다를 게 하나도 없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들어보라.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생각하라. 지옥의 화염을 기억하라. 지옥의 고통을 미리 맛보는 어리석음을 피하라. 제7계명을 범하면 내 명예가 어떻게 되고 내 가정이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하라. 에이즈를 떠올리라. 순간의 쾌락이 영원한 파멸을 낳는다. 간음하면 평생 가슴에 주홍글씨를 달고 다니기 쉽다. 눈 뽑힌 삼손을 생각하라.(수훈 173)
권 목사에 의하면 악한 세상은 우리가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정복해야 할 대상이다.
가나안인들은 종교와 문화면에서 전적으로 부패한 사람들로서 너무도 가증스러워서 그 땅 자체가 그들을 토해낼 정도였다. 만일 이스라엘이 그들의 관습을 추종하면 그들처럼 망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전멸하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대(對)가나안 전쟁은 거룩한 전쟁으로 우상의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전쟁이었다.(수훈 199)
과연 그의 성서해석은 옳은가? 가나안의 모든 것이 그렇게 부패했는가? 성서의 이러한 보도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순진해서 좋기는 하지만 어리석음을 피할 수 없다. 성서기자들이 유목민이었던 유대인들과 농경민이었던 가나안 사람들과의 문화갈등을 종교적 충돌로 묘사하고 있지만 약간의 문화사적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걸 근거로 해서 기독교 밖의 모든 문명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이런 대목도 역시 평신도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성서해석과 신학을 전공한 설교자들이 바르게 설교해야 할 책임이 막중하다. 그런데 권 목사는 기독교 이외의 모든 문명을 적대적으로 대한다. 심지어 그는 데이빗 브레이너드라는 미주 인디언 선교사의 선교활동을 설명하면서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을 모독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미주 인디언들이 얼마나 문제가 많았습니까? 아주 무지합니다. 저속한 이교사상에 빠져서 자기들을 해치고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순수하고 독실한 기독교 신앙으로 끌어냈습니다. 그들의 도덕을 개혁했습니다. 그들의 생활을 개혁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활기찬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들을 변혁시켰습니다.(발 144)
약간의 책읽기 훈련이 된 사람들은 인디언들의 삶이 생태적으로 매우 높은 경지에 올라섰다는 사실을 안다. 권 목사가 그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파괴한 미국 사람들의 문제점을 지적하지는 못할망정 인디언을 무지하다고 말한다는 건 그야말로 독단이요 독선이다. 그런 시각이라면 오늘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에게 행하는 폭력 행위나 미국의 이라크 침략 행위도 옹호될 수밖에 없으리라.
타락/속량 영성
권 목사는 왜 교회 밖의 세상을 그렇게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볼까? 물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따라서 이 세상은 구약의 가나안처럼 악하다는 권 목사의 입장이 그렇게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의 주류가 바로 이런 선악이원론에 근거해서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를 가리켜 매튜 폭스는 타락/속량 영성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영성은 원래 성서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평자는 그의 설명이 신학적으로 옳다고 본다.
특히 서양 종교가 떨쳐버려야 할 것인즉 배타적인 타락/속량(fall/redemtion) 영성 모델이다. 신학과 성서연구, 신학교와 수도자 수련, 성인전과 심리학을 여러 세기 지배한 이 이원론적, 가부장적 모델의 신학은 죄와 탓과 원죄로 시작되고 일반적으로 속량으로 끝난다. 타락/속량 영성은 믿는 이들에게 새 창조계나 창조성, 정의 구현과 사회개혁, 에로스나 놀이나 기쁨을 가르치지 않으며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만다. 땅을 사랑하거나 우주를 돌보기를 가르칠 줄 모르며, 열정을 하도 겁내는 나머지 인간 역사상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인 아나윔의 열정적 호소에 귀 기울이지 못한다. 열정을 이처럼 겁내는 터에 연인들의 체험을 영성적이고 신비적인 일로 경축하도록 도와줄 길이 있을 리 없다. 이 전통은 예술가나 예언자,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여자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지 못했다.(매튜 폭스, 창조영성 길라잡이, 원복, 9 쪽)
권 목사의 설교를 접한 평자의 마음은 영 개운치가 못하다. 지성과 영성이 뛰어난 그가, 모범적으로 교회를 성장시키고 있는 그가, 21세기의 전형적인 목회자요 설교자로 본이 될 만한 그가 오직 타락/속량 영성이라는 범주에 묶여서 결국 하나님의 창조 영성에 깃든 생명의 비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설령 타락/속량 구도가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가르침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을 금과옥조로 삼아서 설교한다면 그는 훨씬 중요하고 본질적인 영성을 놓치고 말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현장에서는 타락/속량 영성이 여전히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왔을 뿐만 아니라 그런 신학을 배웠다.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주의와 경건주의 및 각성운동은 한국교회의 정신적 지주나 마찬가지이다. 권 목사가 크게 영향을 받은 스펄전,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빌리 그레함 같은 인물들을 보라. 그들은 죄 문제를 설교의 중심에 놓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이런 죄 영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오해는 마시라. 죄가 신학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중심에 설 수 없다는 말이다.
글쓰기를 마치면서 평자는 젊은 설교자들에게 권성수 목사가 공역한 <두 지평>을 강력히 추천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설교자가 왜 성서텍스트를 규범으로 이용하거나 아니면 텍스트의 본문주석이나 역사비평에 머물지 않고 언어사건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성서텍스트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이 어떤 해석학적 토대에서 융합하여 새로운 지평으로 지양(Aufhebung)될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설교는 바로 이것, 즉 영적인 “새로운 지평”을 청중들에게 전하는 작업이다. 시인들은 남의 시를 표절하지 않고 새로운 시의 세계로 몰입하듯이 설교자는 그런 새로운 영적 지평을 여는 일에 집중한다. 그런 지평을 모르는 설교자가 목회적 열정이 강한 경우에, 아무리 동기가 순수하더라도 그는 결국 청중을 종교적으로 억압하거나 또는 기만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기독교사상, 2007년 2월)
죄가 신학적으로 중심에 설 수 없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미숙하다고 말씀하신 부분은
충분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이며, 구원은 하나님과의 완벽한 연합의 회복이라고 보는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죄의 문제는 그저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중심적인 내용이 될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정목사님이 항상 주장하시는 인문학적 성경읽기때문에
오히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의 심각성을 너무 단순히만 바라보시는 건 아닐까요?
군생활을 통해 김남준 목사님의 저서를 10권 넘게 읽으며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열광하며 심취했던 전력이 있는 까닭에
구름 님과 임마누엘 님의 말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러나 구름님께서는 '보수'로서의 정체성에 자부심을 갖는
다른 신학교 학생들과 대화 할때 전형적으로 느끼는 바와 같이
'인본주의적 신학', '성경 고등비평', '자유주의 신학'을
불건전한, 더 나아가 악으로 규정하고
그와 대척점에 선 신학이념을 건전하고 선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옅보입니다.
(제 옅은 판단일 뿐이니 아니라면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원인은 님께서 깔뱅의 신학에 뿌리깊은 동의를 하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과연 님께서는 깔뱅의 신학이 수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그 가치가 유효한 확고 부동한 신학이라고 생각하시는 지요?
깔뱅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들 그리고 그 청교도들에 열광하는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님과 우리나라 김남준 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위험성은 '죄'의 문제에 편집증적인 집착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 땅을 성도의 삶에서 하루 하루 죄를 이겨내는 성화의 사명을
매우 중요시 생각하며 임마누엘님의 말씀과 같이 인문학적 성서읽기가
오히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심각성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에도 충분히 동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죄 문제는 분명 '주요한' 것이지 결코 '중심'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깔뱅 신학의 강조점일 뿐입니다.
깔뱅과 그 후예들 (저역시 이에 포함되겠지요)이
죄 문제에 너무도 집착한 나머지 깔뱅 본인은
처참한 이단 처형을 자행했고 청교도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이는 지난친 죄문제에 대한 직착으로 쉽게 이분법적인 사고에 젖어
선과 악을 극단적으로 구분한 나머지 벌어진 비극입니다.
성경의 중심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 입니다.
'속죄'는 이러한 하나님의 장대한 드라마를 구성하는
주요배경이자 '요소'일 뿐이지 이것이 중심에 서는 순간
앞서 언급한 엄청난 오류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죄문제를 소홀히 생각하지 않으며
이에 대해 체계적인 신학을 정립한 깔뱅과 청교도들
특별히 김남준 목사님께 많은 고마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러한 깔뱅의 신학은 제게 분명한 '극복'의 대상입니다.
어느 특정 신학 체계가 결코 성경전체를 역동적으로 흘러가는
하나님 나라를 덮을수 없기 때문이지요.
참된 신학에 있어 옳고 그름, 맞음과 틀림을 분명히 나눌 필요가 있지만
그와 동시에 '다름의 수용' 역시 필수적 요소 입니다.
이를 간과한채 '다름'의 문제를 마치 레드컴플렉스에 빠진
매카시스트들 처럼 '자유주의' 라는 굴레를 씌워 쉽게 비난하는 것은
성경을 참되게 이해하는데 분명한 걸림돌입니다.
분명 저보다 연장자일텐데 이런 무례한 글 올려 무척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허나 조심스럽게 마무리하며 마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지만
또한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인지와 지각에 매여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바로 매일 결코 성경을 손에 놓을수 없는 까닭이겠지요.
하루하루 우리의 무지함을 고백하며 말씀묵상과 기도에 정진하며
이에 대한 바른 길을 제시해주는 여러 신학책들을 부지런히 읽으며...
또한 이를 극복해가는 것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바른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린 신학생의 주제넘는 조언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구름님과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참된 은혜와 평강이 더욱 풍성히 넘치시길 기도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이성이 주가 되는 신학은 현대신학이 아니라, 현대신학이전의 신학인 자유주의 신학이죠..
결자해지 차원에서 다시금 답을 올립니다.
님의 글에는 '보수' 신학에 자부심을 갖는이들의 전형적인 논술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마치 지난 비극의 현대사 속에서
조금의 이념적 차이만 있어도 '빨갱이'라 몰아세우며
단죄했던 모습과 유사합니다.
님께서는 제가 속한 예장 통합과 기장 그리고 감리교 신학의 정체성을
'인본주의적 신학의 추구'라고 단언하셨는데
한번이라도 저희 장신대 혹은 한신대나 감신대에서 수업을
들어보신거나 각 교단 신학의 정체성을 주도하시는 분과
직접 대화를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리고 현대신학이 마치 줄끊어진 연과 같이
인간의 이성이 주가 되어 이리 저리 나부끼는 모양이고
"인간의 이성이 도구로 나서지만,그 이성은 성령의 돌보심으로
신앙으로 말미암는 두렵고 떨림의 겸손의 신학"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셨는데
현대 신학 책을 한권이라도 제대로 읽어보신다면
바우로 님의 지적과 같이 1차 세계대전, 혹은 칼바르트 이전의
자유주의 신학과 오늘날의 현대신학의 차이점을
금세 구분하실수 있으실 겁니다.
님께서는 앞서 올리실 글에서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을
정체성으로 밝히셨는데 이는 저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깔뱅의 종교개혁 사상을 지지합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난날 깔뱅 사상의 폐해를 극복하는 것역시
분명한 과제입니다.
현대신학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그리고
타교단 신학과 이곳 다비아의 신학흐름에 대해
주의 깊고 충분한 검토없이 쉽사리 '인간의 이성을 주로 삼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정죄하는 것은 너무도 무모한 발언입니다.
그 어느 신학 규범도 결코 완벽할수 없으며 끊임없는
진리의 재발견과 재해석을 위한 신학 훈련만이
깔뱅의 신학을 참으로 깔뱅답게 할수 있는
그리하여 근본주의를 피할수 있는 길일것입니다.
사실 저역시 신학을 공부하기 전까지
님과 거의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신학을 공부하면서 제가 그동안 얼마나 무지했고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미천한 인간의 이성으로 신앙을 쉽게 재단하는 사람들은
현대 신학자들중 극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님께서는 단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실체없는 적을 오인해서 칼을 휘두르고 계십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성경의 권위에 대한 님의 진지한 태도에 대해
저역시 충분히 동의 하며 공감합니다.
그러나 대화를 배제한 신념을 철저한 독선에 빠질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신다면 님께서는 더욱 온전히
성경을 이해하실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주제넘은 글 다시 올려 정말 죄송하시고
늘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인간의 죄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앞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은총이 죄보다 상위 개념이라는 뜻으로 한 말이지
결코 죄가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는데 필연적으로 다루어야할 문제가 "죄"의 문제입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놓고 볼 때 직접적으로 "죄"의 문제를
끊임없이 다루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입니다.
현대의 신학자들과 몇 백년전의 청교도 신학자들을 놓고 볼 때
적어도 '죄 문제' 만큼은 청교도들이 윌등합니다.
각자 장단이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 나라는 죄 문제 처리없이 그냥 슬그머니 받을수 없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또한 인용하신 매튜 폭스의 글로 미뤄볼 때,
매튜 폭스의 개인적 경험의 부재가 엿보입니다.
"타락/속량 영성은 믿는 이들에게 새 창조계나 창조성,
정의 구현과 사회개혁, 에로스나 놀이나 기쁨을 가르치지 않으며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만다. "
매튜 폭스는 타락/속량 영성을 가진 사람들을 획일화 하고 있네요.
그런 사람을 만나보지 못해서인지...
타락/속량 영성을 강조하면서도 창조와 정의 구현, 사회개혁,
신이 창조한 '즐거움'을 누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왜 없을까요?
문제는 타락/속량 영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타락/속량 영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 영성에 깊이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격이 되어 버린것이지요..
타락/속량 영성에 깊이 들어간다면
매튜 폭스가 말한 그런 주제들에 대해서도 당연히 관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타락/속량 영성을 강조하는 분들이
왜 그렇게 가끔 비상식적 행동을 하는가?
바로 그 점이 '타락/속량 영성'이 타당성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
좋은 의견을 주셨군요.
타락/영성의 깊이에 들어가면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말에 일단 동의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런 패러다임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삶의 환희 마저 불안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아래의 이야기에 대해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잔치 님이 제시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죄를 회개하라는 건가요?
메타노이아가 바로 죄를 가리키나요?
삶의 방향 전환이 아니던가요?
삶의 방향 전환과 죄 범하지 말라는 말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타락/속량 패러다임에 묶여 있는 분들의 설교는
삶의 방향전환이 아니라
술 담배 하지 말고,
포르노 보지 말고,
도박 하지 말고 ... 이런 걸 말하더군요.
이런 건 하라 하지 말라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그 생명의 통치를 접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들이 재미 없게 됩니다.
물론 이런 게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요.
잔치 님은
신구약 전체가 죄 문제를 끊임없이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고 보는군요.
저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창조, 화해, 평화가 크게 보이고,
죄는 이미 패배한 것으로 보이던데요.
하나님 나라로의 방향 전환이 맞습니다.
큰 틀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방향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사건이
요한복음과 로마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거듭남" 입니다.
그것이 터닝 포인트이죠.
따라서 회개는 "거듭남"을 시작으로 하는 삶의 전환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거듭났다고 모두가 방향을 전환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거듭남이 방향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사건이지,
방향 전환과 그 길을 향한 전진 자체를 보장하는 사건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뒤에는 분명 달라진 것은 있습니다.
내 안에 '죄'의 영향력과 '성령'의 도우심이 공존하게 되는 것이죠.
많은 기독 선배들이 주창했고 제가 경험하기에도
'죄'는 결국 지독한 자아 사랑 곧 자신이 하고픈 대로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앞으로 한 여자만 평생 사랑하고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사실 어떤 매력이 철철 넘치는 여자가 날 유혹한다면
자신이 별로 없을것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정면으로 배격되는 인생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언제나 살아 있는 것이죠.
이런 모습들이 인간의 실존이므로 이것을 외면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과 같이 강단에서 소리만 지르는 설교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답을 제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주님이 창조하신 삶의 환희는 율법 안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물론 율법을 어기며 즐기는 환희도 있고
율법과 관계없이 주님께서 특별히 허락하시는 환희도 있습니다만
창조주가 만든 세상의 보편 원칙이 그의 뚯대로 사는 사람에게
가장 큰 환희가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간음하는 인생도 나름 즐겁지요.
그런데 그 기쁨을 한 여자와 평생 깊은 관계를 맺고 사는 기쁨과 비교 할 수 있을까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그 둘 중 어떤 기쁨이
인간 생명을 진정으로 풍요롭게 하는지 우리는 다 압니다.
타락/속량 패러다임에 묶여 사는 사람들이 항상 죄 문제에 전전긍긍하며
인생의 기쁨도 모른 채 매일 유혹과 시험 걱정만 가득 찬 인생을 살지는 않습니다.
유명했던 청교도들의 가정사를 살펴보면 얼마나 가족 간에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지요!
제가 보기에 가장 멋진 로맨티스트들이 청교도들이었습니다.
아내에 대한 정신적 육체적 정절을 잘 지키는 사람일수록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게 됩니다.
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은 곧 참된 창조의 영성을
직접 살아내고자 하는 노력의 표현입니다.
죄가 이미 패배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죄는 여전히 활동 중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 죄의 운명에 대한 심판이 내렸지만 그 판결이 아직 집행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정죄 받은 죄와 사탄이 활동하는 것이 현세의 상황입니다.
따라서 죄의 실패를 선포하되 그 영향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주의해야 합니다.
목사님께서 죄 문제를 논할 때 자주 말씀하시는 ‘레드 콤플렉스’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사회차원의 문제인가요?
아니면 결국 개인의 왜곡된 이기심의 발현인가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것들을 죄로 규정하고 있지요.
결론적으로,
많은 설교에서 단순히 죄를 “무엇을 하지 말라” 라는 차원으로 말하고 있다면
그 설교자는 아직 죄가 뭔지 잘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실효성 없는 설교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은 찬성입니다.
그런데 그런 설교가 많다고 해서
죄와 속량의 영성이 이제는 강조되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죄와 속량을 여전히 강조하되 그 설교가 더욱 심화되어야 합니다.
‘존 오웬’ 같은 위대한 청교도의 죄에 대한 분석과 처방은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죄에 대하여 설교하는 많은 설교자들이 꼭 접해봐야 합니다.
물론 평신도들도 그렇지만요.
또한 '죄에 대한 설교의 질적 심화'와 함께 그 죄의 반대편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삶이 얼마나 멋지고 매력적인지'도 설교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실제적으로 동기부여가 되고 변화의 노력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설교하려면 설교자가 그런 삶을 살아내야 하는데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런 설교도 드물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죄문제를 성경의 중심으로 보지않고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가 중심이라는 주장들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결국 예수님의 이땅에 오심은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고,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해결되는 영역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던가요? 죄라는 대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라는 집안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또는 악에 대한 우리의 설교는 어떤 방향을 지녀야 하는지요? 죄와 악은 우리가 그냥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인간현상으로 전제하고, 우리의 신앙의 중심 부분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대부분 이해하고 있다고 보여 집니다. 좋은 답변들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 목사님께서 코멘트 해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죄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지요?
어떤 결정된 대답이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이건 다른 주제에도 똑같이 해당되는 겁니다.
창조 문제도 어떻게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니고,
종말도 그렇고,
칭의와 성화도 그렇습니다.
모든 신앙의 주제들은 다른 것들과의 관계 안에 들어 있어요.
그 관계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거지요.
예컨대 오늘의 창조 세계가 어떻게 허물어지고 있지요?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는 건 분명하지요.
그런 파괴 행위가 죄의 현상입니다.
그걸 문제 삼아야겠지요.
너희는 죄인이야, 하는 일반론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들을 찾아야 합니다.
성 문제도 그렇습니다.
성욕을 죄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게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작동되는가에 따라서 죄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죄 현상이라는 것도 시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인간 삶의 이해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를 하는 사람들은
죄 일반론에 떨어질 게 아니라
구체적인 문제들을 통해서 그걸 말해야겠지요.
이런 점에서 기독교 윤리가 필요합니다.
조직신학의 관점에서 보는 죄와
윤리학에서 보는 죄가
충분하게 해석되어서
우리의 삶을 창조적으로 끌어나가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인간론 공부도 필요하고,
사회과학 공부나 철학 공부도
여기에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모두 인간 삶을 이해하는 길들이니까요.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
독단적으로 죄를 말하기 시작하면
현실성을 잃는 거 아닐까요?
끝으로,
제가 죄 중심의 영성을 비판하는 이유는
중세기에 작동되던 삶의 이해에 근거해서
오늘의 삶을 재단하기 때문입니다.
원하시는 설명이 됐는지....
다를바가 없음을 뼈저리게(?) 느껴서
저는 그 분석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점에서 목사님과 차이가 있는 것 같네요...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에서 계속 나타나는 신앙의 연습이라는 측면에 대해서 목사님이 말씀하신 비평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고, 이는 참으로 기억하고 싶은 내용이었습니다.
거지가 왕의 은혜로 인해서 갑작스럽게 왕자가 되었을 때, 그 왕자의 과거의생활 패턴이 그 현재의 왕자됨의 장애로 작용하고 있는 문제를 다루면서, 박영선 목사는 과거의 거지 생활을 버리고 현재의 진짜 왕자됨의 삶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왕자의 삶을 연습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에서 목사님은 왕자가 왕자됨의 삶에 천착하기 위해서는 왕자의 삶을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왕과 함께 시간을 많이 갖도록 하고 왕과 나누는 교제를 통해서 오히려 거지의 삶에서 벗어난 왕자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맛본 신자들이 세속적인 상황에 거리를 둘 수 있는 힘은 바로 성서의 세계가 드러내 보여주는 하나님의 신비와 성령님의 활동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말씀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저는 설교자로서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짜로 그런가 말입니다.
로마서가 말하는 죄의 세력은 목사님의 말씀보다 훨씬 더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종의 싸움의 대상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죄는 개념도 아이디어도 아닌 구체적인 실체로서 우리를 사로 잡아오는 것을 봅니다. 좀더 심각한 대상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말하셨군요.
"그러나 저는 설교자로서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짜로 그런가 말입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비평에서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은
단지 그분이 말하는 칭의와 성화의 분열현사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그런 우화가 바로 오늘 현실 교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설교하는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초점은 오직 하나님, 그의 나라, 그의 통치, 그의 생명, 종말이라는 거지요.
기본적으로 그런 시각을 갖고 성서를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서기자들도 모두 그런 통찰력을 갖고 있었으며,
그들 나름으로 그런 힘에 의존하고 있었지요.
이제 제기되는 질문은 실제 신자들의 삶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거지요?
그건 기본적으로 설교자의 영역이 아닙니다.
내가 보기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시인이 되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있다고 합시다.
선생인 우리는 그들을 억지로 시인이 되게 할 수는 없어요.
시인은 배우는 게 아니라 타고 나는 것일지 몰라요.
다만 선생인 우리는 좋은 시들을,
진짜 시인들이 쓴 시들을 그들에게 읽어주고 해석해주는 일밖에는
할 일이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설교자는 바로 성서를 그런 식으로 신자들에게 알리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실제로 신자들의 삶이 중요하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들이 변화되어야겠지요.
저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변화하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고,
변화된다고 해더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요.
이런 점에서 청교도 설교자들을 제가 비판합니다.
그들은 신자들을 닦달하지요.
웨슬레 때문에 영국이 무혈혁명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젊은 목사님이신 것 같군요.
신자들의 변화에 대해서 기대할 것도,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은 그냥 사람일 뿐이드라구요.
조금 교양이 있거나 없거나 하는 차이인데,
그것도 중요하다면 중요한지 모르겠지요.
그런데요.
성서의 놀라운 세계를 통해서 존재론적인 변화를 얻는 분들이 있어요.
그게 중요한 거지요.
어떤 세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는 이제 전혀 다른 식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것도 한꺼번에 되는 건 아니겠지만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서로 모이면 그게 하나의 운동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설교개혁도 운동의 차원에서 벌어져야 할 것 같더군요.
말이 길었네요.
목사님이 무언가 정확한 것을 짚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목회 현실과의 괴리에서 약간 혼란을 겪는 것 같기도 해서
뭔가 도움을 주는 말을 하려다가 이렇게 됐습니다.
천천히, 그러나 뜨거운 마음으로 이 길을 가 봅시다. 아자!
제가 속해 있는 합동측 목회자들은 신학교 교수들도 마찬가지지만 거의 예외 없이 성도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런 성도의 변화에 대한 가시적 성과가 바로 목사의 역량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 온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래서 교수들이 가르칠 때도 또한 선배목사들이 목회적 조언을 할 때도 모두 어떻게 양때들을 변화시킬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니 저 역시 그렇게 목회를 배웠고 그런 식으로 목회를 해 왔는데, 제 역량의 부족인지는 모르겠으나 성도들은 저를 통해 변화되지 않더군요....
한때 무엇인가 변화된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가도 곧 제자리에 돌아오고 아니 더 나빠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회복되어 열심을 내는 듯 하더니 하루 아침에 배신하여 교회를 떠나버리기도 하니...... 도대체 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도의 변화를 위해 차마 웃을 수도 없는 프로그램들이나 주장들이 각종 세미나에서 흔하게 제기되는 것을 보면 이런 일들이 제 목회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변화가 목사로서 당연하게 일구어야할 열매라면 ‘목사가 여집사의 속옷을 벗으라면 벗을 시늉을 할 정도 목사에게 충성하게 만들어야 성도가 변한다’라는 비상식적인 주장들이 나올리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변화가 목사의 힘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몇천명씩 목회자들이 모이는 세미나에서 주장되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이 성도의 변화에 대한 생각은 우리 교단에서는 너무 뿌리 깊고(아마 사랑의 교회를 중심으로 한 몇몇 우리 교단의 큰 교회들이 이루었다는 제자훈련의 성공사례 때문인 듯합니다), 동료 목사님의 생각들도 확고해서 정용섭 목사님의 견해를 몇 번 비추었다가 무슨 이단 비슷한 취급을 당한 경험도 있습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는 근본주의적 견해와 정용섭 목사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어쩌면 다른 신학적 차이점 보다 이게 더 근본적이고 큰 차이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신앙에 의한 변화는 내가 만약 신앙을 갖지 않았다면, 내가 현재 누리고 있는 이 정도의 변화조차도 누리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을 해보면, 내게 일어난 신앙에 의한 변화는 분명히 내 삶의 근원에서부터 원초적으로 발생한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신앙이 없었다면 나는 "현재의 나"에 훨씬 못미치는 상황에 놓여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보면 "현재의 나"는 그런대로 신앙의 열매가 아닐까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삶에 대한 시각과 전망에서 저는 분명하게 예전과 그 방향과 그 궤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저에게서 이를 부인할 근거는 거의 없다고 보여집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성도들이 하나님 경험을 통해서 적어도 이런 시각과 전망을 달리하는 근원적인 삶의 차원의 변경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를 굳이 성경의 표현을 빌린다면, 사도 바울의 칭의와 요한의 거듭남 등의 용어로 표현 가능한 구원 현상이 아닐까 합니다.
문제는 거듭남 또는 칭의의 경험은 저 나름의 방법으로 어느 정도 인식 가능하지만, 그 자리에서 좀더 앞으로 나아가려는 진짜 왕자됨의 비유 안에 있는 표상, 즉 성화의 경우에, 그것은 시인의 시인됨의 경우처럼 시를 배우고 듣고, 그 시의 세계를 접하고 맛보는 시의 나라 경험으로 시인이 되는 것처럼 나이브하지 않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시인의 경우, 시를 배우고 익히는 시의 세계 경험은 시의 영역으로 들어가도록 하고, 그는 이를 통해서 우여곡절이 없을 수 없겠지만, 진정 시인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의 서정의 경우에는 좀더 민감한 날카로움이 도사리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그것을 로마서의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라는 죄에 대한 자기 절망의 모습에서 봅니다. 물론 역설적으로 그런 영혼의 곤고함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려지기도 하지만, 죄는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의 힘있는 폭군으로서, 때로 은혜를 조롱하면서까지도 우리의 길을 가로막고 쓰러뜨리기도 합니다.
정목사님의 짤막한 글을 마치 경구처럼 읽고 생각하는 동안 정목사님의 세계 안으로 일정 부분 들어가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참으로 중요한 주제이도 하고,
요원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나는 내 딸들이 좀 의젓해지고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이 되었으면 하고
바랄 때도 많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
내 딸들은 그렇게 존재하는 것으로 나는 만족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아있다는 것보다 더 큰 효도는 없다고 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존재하고 싶어요.
어떻게 변화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나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거지요.
그래서 신자들에게도 변화하라고 닦달할 생각도 없고
기대하지도 않아요.
변화라는 게 대단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다만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과정에서 생명의 신비에 놀라워하고
심취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신자들이 동성애자들이라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알콜 중독자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물론 아내에게 폭력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건 뜯어 말려야겠지요.
파렴치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적당하게 방향을 제시해야겠지요.
그렇지 않은,
그러니까 삶의 취향이 다른 사람들을
반드시 청교도적으로 만들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오늘 내가 또 쓸데 없이 말이 많았군요.
곽선희 목사님의 설교를 오늘 읽으면서 다시 울컥하는 생각이 들었기때문입니다.
다음달 기상 설교비평에 곽목사님의 설교를 대상으로 합니다.
이미 대구성서아카데미 인터넷에 올라왔지요.
그건 몇년 전에 여기 모임에서 한 강의 내용입니다.
이번에 그걸 기초로 하고
다른 설교를 보충했습니다.
도대체 저런 게 무슨 설교일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마지막 대목을 <영적인 소화불량>이라고 잡았습니다.
그게 바로 저희 딜레마입니다.
소망교회를 5만명 이상의 교회로 성장시킨,
한 시대를 풍미한 곽 목사님의 설교에서 나는 왜
소화불량을 느끼는 걸까요?
주의 은총이.
계시역사적인 변화도 생각하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후에 완전히 변화되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 사도도 승천하신 주님을 체험한 후에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에 바울 사도가 성령 체험을 따로이 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만 그도 또한 성령님을 선물로 받았음은 자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제자들-사도 바울 포함-은 완전히 변화된 사람으로서 그 다음부터는 자동적으로 그 삶이 유지되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은 이에 대한 명백한 대답입니다.
그는 육체를 쳐서 복종케 한다고,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는 성도의 삶의 대전제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면서 "오직 성령으로 충만되라"도 마찬가지이지요.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아라.
성령님께서 다스리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시고 계시기에 그 다스림을 받아들여 생활하라.
성령님의 역사를 받아들여 거듭났었던 때와 같이 현재적으로도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여라.
곧 지속적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갈릴리의 한 산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이를 부인하거나 실천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실천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보다도 스스로를 더 지혜롭다고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왕자가 아버지인 왕과 함께 생활하며 왕을 경험하는 것과
왕자가 그 경험을 바르게 받아들이고 왕자답도록 연습하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 아닙니다.
다른 측면일 뿐입니다.
아버지인 왕과 함께 생활하며 왕을 경험한 왕자라고 하더라도 그 왕과는 전혀 별개의 폭군들이 나타난 인간의 역사가 그 사실을 아주 선명하게 증거하고 있지요.
하나님 경험과 삶의 변화!
자신 안에서 그것을 현실에서 열매 맺는 것과 다른 이들이 열매 맺도록 섬김에 있어서 어려운 사안임은 분명하지만 그 원리 자체가 어려운 것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원리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기에 현실화도 어렵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문제는 그 원리를 받아들여 그 원리 안에 거하기를 거부하는 인간일 뿐이지요. 곧 죄입니다.
이제 목회도 20년이 넘었는데 목회적인 차원에서도 퍽이나 공감하는 내용이 있군요.
목회해 보니 우리가 사람을 변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말로 변화 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목사의 사명은 말씀을 잘 전하는 것이고 변화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말씀의 종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주제 넘는 일이더군요. 분수를 모르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말씀을 말씀되게 외치는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위엣 분들이 너무 어려운 문자를 많이 쓰셔서 읽는데 제가 좀 수고가 많습니다만ㅎㅎㅎ 감사하고요.
정목사님의 말씀에 참 공감 합니다. 목회 경험적으로 인간의 변화는 우리가 손댈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장로교 목사입니다만 성화를 믿지 않습니다. 죄송하게도.
내가 아는 많은 분들, 가까이서 뵌분들 , 기도 많이하고 성자같다는 분들을 가까이서 볼때 느끼는 역겨움 등등은 우리를 몹시도 실망시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떠냐고 내게 물으면 난 할말이 없답니다. 나도 성화가 되지 않는데 뭘...
어느날 그로 인해 너무 마음아파 기도하다가 이런 확신을 가졌습니다.
"네 할 일이나 해라. 그사람들 변화 되는 일에 신경쓰지 말고 너나 잘해라"""
그 후로 인간의 변화에 대해서는 주께 다 맡기게 되었고 나의 최선을 다하기로 했습니다.
목회자의 사명은 첫째 말씀의 종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 감사의 글을 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인간변화보다는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에서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군요.
힘 자라는 데까지 이 길을 함께 가보십시다.
행복한 설, 주일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사역자의 바른 사역 - 씨 뿌리고 물주기 -을 방편으로 자라게 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저나 다른 지체들을 볼 때에 제 자신의 수고가 그에 걸맞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라게 하심을 막고 있는 모습이 답답하였던 것입니다.
동시에 씨 뿌리고 물 주는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말씀 집중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것과 그 하나님 말씀을 생활화하도록 연습시키는 것을 동시에 내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
여기에서 말씀 전파란 불신자에게 복음의 기본적인 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 복음의 기초와 깊은 것을 함께 가르치는 것을 뜻하니까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주장을 펼때 주관을 숨기고 객관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목회자의 객관은 진리입니다.
부디 정용섭님의 주장이 주관이 아니시길 바라며. 늘 코람데오의 모습을 잊지 아니하시는 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창조 기사는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 인류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창조 영성은 창세기 1장26-28절에서 잘 설명됩니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이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영성 회복을 위한 구속을 즉시 약속했고(창3:15절)
예수님이 구속을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했지만(사복음서)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서신들).
그럼 무엇을 위한 구속입니까?
즉 속량영성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창조영성의 회복입니다.
즉 구원은 구속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고 창조영성의 회복에 목적을 둡니다.
그러나 속량의 은총을 받지 못한다면 창조 영성의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속량의 은총을 받으려면 죄의 심각성을 알아야 합니다.
흔히 칼빈주의에서 죄만 심각하게 본다고 말하지만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살것을 그가 주장합니다.
이런 그의 주장을 보면서도 칼빈이 타락과 속량의 영성만 강조했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지요.
독자가 부분적으로 해석한 결과입니다.
이렇게 창조, 타락 그리고 구원은
논리적으로도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결코 분리되지 못할 정도로 하나의 유기적인 시스템을 구성합니다.
그러나 우린 이 시스템에 한 가지 더 추가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재림 사건을 통한 구속의 완성입니다.
즉 창조, 타락, 구속과 재림,
이들은 기독교 성경에서 하나의 논리적인 주제를 말하는 유기적인 시스템을 구성합니다.
마치 지체들로 구성된 몸처럼...
그렇다면 이 시스템이 노리는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이 목표 달성을 위해 이 시스템을 구성하는 개념들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들 사이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는 논쟁보다는 어느 하나 모두 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하나를 무시하는 태도는 벌써 비성경적입니다.
무시하면 우리 스스로 신앙의 근거를 무너트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 시스템이 노리는 최종적인 목표는
하나님 나라라는 구체적인 실체일 수 있고 또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하나님 나라다 또는 하나님의 영광이다라고 서로 다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자유주의자를 포함한 역사를 좋아하는 성경신학자같은 목회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보수주의자를 비롯한 논리를 좋아하는 조직신학자같은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겠지요.
구속 이후 신자들이 변하느냐 문제는 참으로 목회자의 심각한 관심사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심고 물을 주되 자라게 하는 이는 오로지 하나님입니다.
목회자들은 심고 물을 줄뿐입니다.
성장 여부는 만물의 권자인 부활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것이 청지기의 겸손이며 충성입니다.
그럼 어떻게 심고 물을 주어야 합니까?
열심히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구원의 은총을 받도록 하고
그리고 성장을 위해 말씀을 말씀답게 증거함으로 물을 잘 주는 것입니다.
불필요하게 비료를 많이 섞어 뿌리면 나무가 상하거나 성장이 안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을 주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때늦게 댓글에 참가했습니다.
저는 안식월을 얻어 조국에서 쉬고 있는 선교사입니다.
저도 성경 해석에 참 관심이 많습니다.
대체로 정목사님의 비평에 동감합니다.
샬롬!
죄라는 말에 우린 민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도둑이 제 발저린다는 속담이 내 말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인으로 정죄하신 이유는 우리가 미워서가 아니고
주실 새생명의 비밀이 너무나 대단하고 또한 우리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 새생명을 밟는 수순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 하면 칼빈을 떠올리것이 아니라 속죄자가 떠올라야 하지요
죄 하면 정죄를 떠올릴것이 아니라 용서가 떠올라야 하지요
신학자들이 신학자이기전에 먼저는 죄인이었고
복음을 통해 구속받은 사실을 믿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요
여기에서부터 본 게임(?)에 돌입합니다
이것을 하시려고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것입니다
'죄'로인해 죽은 것을 십자가에 묻어버리고 하늘 탯줄을 연결하십니다
'의'로인해 산 것에 새생명을 공급하십니다
태어나야 젖을 물릴것이 아닙니까
사도들도 제자들도 신학자들도 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보다 먼저 간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서 이것을 미리보고 와서 기록한것 아닙니까
히브리서가 진술하기를 믿음의 선조들이 다 달렸고 우리 차례라는 겁니다
죄라는 섬찟한 말에 놀라지 마시고 용서해 놓으신 수순을 박수치며 감사드리십시다
고난의 주가 이제는 영광과 새생명의 주로 다시 오셨습니다
영광의 주를 자꾸 가시관 씌워서 십자가로 떠미시면 진보가 아니라 퇴보입니다
고난의 주는 아직도 의인인 줄 알고있는 죄인들에 대해서 유효하고
구원받은 이후 여러 종류의 죄문제로 유혹받을때 유효한것입니다
죄 짐을 지신 구속주에 믿음을 고정시켜놓으면 인간이 보기엔 경건해보여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카지노를 들락거리다 그만두고 새생명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그 입에서 카지노를 말하지 않겠지요
과거를 말하는 이유는 현재의 삶이 너무나 가치가 있기에 비교적으로 말할 때만 사용하겠지요
그의 말의 촛점은 현재의 새생명인 것 입니다
정목사님의 믿음의 진보보다 그만큼 우리의 진보가 더디고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아직 남들이 가보지 않은 길을 먼저간 사람들이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 우린 알아듣지도, 관심도 없는 편이지요
산 사람은 산 이야기하고 죄인은 죄 이야기하고 죽은 사람은 죽은 이야기를 하는 것도 보편적인 인간사입니다
정죄하는 사람치고 죄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모습이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잘 모르면서 그렇게 하긴 하지만...
오늘은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 제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온 종일 설교비평을 읽어나가면서 조금 흥분이 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