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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와 신학
- 정용섭 교수의 《설교비평》에 대한 신학적 단상-
정용섭 교수의 설교비평에는 한국 교회가 귀담아들어야 할 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요즘의 설교가 인간적 욕망을 부추기고 자극하며, 복음을 인간의 필요나 채워주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정 교수께서는 한국 교회에서 지금 복음이 설교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설교를 통해 기독교의 본질이 제대로 전달되며 설명되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문제 제기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바로 여기에서 정 교수의 설교비평과 관련하여 더 생각해 보아야할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설교를 통해 복음, 혹은 기독교의 본질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느냐 하는 물음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이 무엇이며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공통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 교수의 설교비평에 납득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신앙은 무엇이며 신학적 과제란 무엇인가에 대해 같은 입장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정 교수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만일 기독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면, 정 교수의 설교비평에 우리가 아무리 많이 공감하고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상 피상적인 수준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신학 전통
그간의 설교비평을 읽으면서 정 교수께서 갖고 계신 신앙과 신학에 대한 이해가 어떤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정 교수께서는 설교비평을 할 때 자주, 이런 설교자들이 있는 줄 여태까지 잘 몰랐으며, 그래서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그 설교자들을 대한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제게는 익숙한 설교자들을 정 교수께서는 처음 대하시는 걸 보면, 정 교수와 저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아마도 이런 형편은 그동안 한국 교회를 크게 양분(兩分)해온 신학적 전통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 교수의 설교비평을 통해서 신앙과 신학에 대한, 저와는 다른 입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 교수의 설교에 대한 비평에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도, 정 교수와 저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정 교수께서 기독교에 대한 바른 이해 ―많은 설교들에서 설명되는 것과는 대비되는― 라고 제시하는 입장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따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 발견한 것은 정 교수와 제가 어떤 설교를 대하여 거기에서 같은 문제점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같은 기준에 입각해 발견된 것은 아닐 수 있겠다는 점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정 교수와 저는 실상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차차 얘기되겠지만, 제게 있어서, 신학은 그 무게를 ‘신’(神)께 두고 신께서 의지적으로 보여주시는 계시만을 그 원리로 삼고 있다면, 정 교수께서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는 이른바 ‘학문’에 무게중심을 두고 신학을 해나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제가 인간의 근본적 특성을 죄인 됨에서 찾는다고 한다면, 정 교수께서는 인간에게 보다 적극적 의미에서의 가능성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대비점들은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라고 할 수 있는 복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정 교수와 저 사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빚어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신학적 차이가 설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차이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교비평 작업에서 정 교수께서는 기독교에 대한 다른 이해를 가진 설교자들을 정 교수의 신학이해에 따라 평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만일 실제로 정 교수의 설교비평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설교비평은 원래의 의도하던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관점과 기준을 가지고 다른 관점과 기준을 가진 사람의 행동을 평가한다면, 그 사람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의 평가는 단지 오해만을 불러올 뿐입니다. 먼저 기독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 공통된 기반이 마련되어야 비로소 설교의 목적과 내용에 대해서도 동의가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전제가 있어야 실질적으로 유익한 설교비평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복음에 대한 이해라든가 신학에 대한 이해에 있어 정 교수와 저 사이의 차이점을 검토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정 교수의 신학적 입장을 살펴보면서 크게 의문이 든 것은 두 가지 문제에서였습니다. 첫째는 신학적 인식론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고, 둘째는 여러 신학적 문제들과 직결되는 인간에 대한 이해에 관한 문제입니다.
판넨베르크 신학
정 교수의 신학을 살펴보기 위해 저는 먼저 판넨베르크 신학에 대해 살펴보아야 했습니다. 나중에 더 분명히 발견한 사실이지만, 정 교수께서 제시하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판넨베르크의 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판넨베르크의 계시론에 대해 책을 쓰시기도 했고(정용섭,《말씀신학과 역사신학― 판넨베르크의 계시론을 중심으로》), 《신학과 철학》, 《조직신학》과 설교집들을 비롯한, 판넨베르크의 여러 책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저는 판넨베르크 신학의 특징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그의 신학의 특징으로 크게 두 가지가 지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학의 두 가지 특징은 제가 정 교수와의 차이점으로 확인한 두 가지 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판넨베르크 신학의 독창적 개념은 ‘보편사’와 ‘미래성’이라고 합니다. 보편사 개념을 통해 신학은 역사와 연결되며, 미래성 개념을 통해 신학은 종말론적 특징을 지니게 됩니다.
첫째 특징은 역사 전체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보는 ‘보편사’ 개념입니다. 판넨베르크는 기독교 진리의 보편적 타당성을 합리적으로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신학이 보편사의 지평 안에서 통용되는 합리성이라는 기준에 합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강조는 신학을 계시에 매이지 않게 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판넨베르크는 “바르트가 강조하는 것처럼 신학이 계시라는 폐쇄되고 권위주의적인 개념에만 매달리게 될 때 신학은 보편성을 결여한 초라한 특수 학문이 되어 버리고 만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김영한, ‘볼파르트 판넨베르그’,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 196쪽). 그는 신학이 보편성을 띤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배타적인 계시와의 관련성을 끊어야 한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정 교수도 이런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말씀의 신학을 극복하여 전체 역사 가운데서 신학의 보편성을 찾고자 한다”(정용섭, 《말씀신학과 역사신학》, 148쪽).
둘째는 미래를 강조하는 종말론적 신학의 특성입니다. 판넨베르크는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과거와 현재를 결정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미래의 존재론적 우위성”입니다. 미래는 현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힘이라는 의미에서 창조적 성격을 띱니다. 결과적으로, 세계는 불변적으로 지속되는 질서가 아니라 열린 과정으로 파악됩니다. 현재를 결정하는 것은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열린 미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특징들은 정 교수께서 “인문학적 성서 읽기”를 강조하는 것과, 또 과거보다는 미래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하튼 판넨베르크 신학이 다음과 같이 요약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이성은 신앙의 적이 아니라 친구이며, 교회 전체의 삶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구속사 대신에 보편사, 맹목적 신앙보다는 이성적 통찰, 개인적 결단보다는 역사적 전승을 강조한다. 그는 기독교 진리의 합리성을 위하여 이성의 비판을 강조하는 이성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김영한, ‘볼파르트 판넨베르크’,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 217쪽)
이와 같은 특징은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제가 배워온 신학과 어떻게 다른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첫째, 제가 배운 바로는, 신학적 작업은 계시에 의존해서 이루어집니다. 신학의 계시 의존성이란, 신앙의 내용과 신학적 물음이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계시와, 인간 역사 속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초월적 하나님과 관계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철학이 신학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도 인정됩니다. 인식하는 이성의 유한성과 제한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패커의 다음과 같은 의문에 공감합니다. “나는 조직신학의 주제를 하나님에 관해 계시된 진리로 개념화 시키는 일이 적절한지 의문이 간다. … 이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과 진정한 하나님을 아는 것 사이를 이간시키는 것이다”(J. I. Packer,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Spirituality, pp. 2, 8.).
둘째, 역사, 더 구체적으로 ‘미래’에 대해서도 저는 다르게 이해합니다. 역사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셨으며, 미래, 곧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성취된다고 생각합니다. 판넨베르크가 역사를 “열린 과정”이라고 말한다면, 제가 배운 신학은 역사는 하나님의 뜻하심에 따라 정해져 있다고 여깁니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한 통치를 계속하시며 결국에는 당신께서 정하신 바대로 역사의 목적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즉 신(神)이라는 존재가 인격적이고 전능하다면 정당한 목표와 그것을 이룰 능력과 신실함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역사를 보며 신앙인이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선하신 분이시라는 점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분의 통치 아래에서 실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과 씨름을 벌이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사상들과의 씨름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과의 씨름 말이다”(알리스터 맥그래스,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 88쪽).
신학적 인식론
이제 정 교수의 신학에 대해 몇 가지 점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먼저 제가 정 교수의 신학적 이해에 관해 갖게 되는 의문은 계시와 관련된 것입니다. 계시에 대한 이해는 신학적 인식론의 문제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신학이 하나님에 대한 논의라고 하면, 대체 하나님에 대해 우리 인간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전통적인 답변은 인간은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일 것입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는 종교라는 점을 전제할 때, ‘계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은 이후 모든 신학적 논의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어떤 경로로 우리에게 도달하는지에 대해 정 교수께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계는 곧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에 접근하는 길이다. 이런 방식 말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도달하겠는가? 진리에 도달해 보려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사실 이런 인식론적 근거에서 이루어진다. (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192쪽)
앞서 살펴본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에 대한 강조와 맥을 같이하는 설명으로 보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하나님의 계시란 세계를 통해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의 창조자이시므로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며, 우리는 이에 주목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앎은 “하나님 스스로 자기의 본질을 노출하는 것에 대한 ‘자연적 앎’의 문제”라고 덧붙여 설명됩니다(정용섭, 《말씀신학과 역사신학》, 192쪽). 인간이 자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설명을 따라가면서, 정 교수의 계시 이해가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로 여기는 기독교의 전통적 이해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 교수의 이 같은 입장에는 이성적 판단에 따라 성경을 역사적 주관적 신앙고백 문서로만 받아들이려고 한 계몽주의 이후 학문의 결론이 그대로 전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저는 성경이야말로 계시의 외적 인식원리라는 전통적 입장을 따릅니다(Louis Berkhof,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 96.). 성경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 주신 특별한 계시라고 이해합니다. 성경에 담긴 내용이, 인간 쪽의 반응이 있기 전에, 인간에게 나타나시고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책이며, 인간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물론 저도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고 있으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이 그의 창조세계에 분명히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롬1:20).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중단하실 수 없으며, 그분이 지으신 세계를 그분의 역사로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계시만으로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큰 장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과 분리되었다고 천명합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져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눈이 멀어져, 해가 빛나고 있는데도 보지 못합니다. 따라서 세계만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기란 더더욱 어려워진 것입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둘 때, 하나님 편에서 온 보다 명확한 계시의 필요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왜 정 교수께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주신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근대성에 대한 요즘의 연구들이 보여주듯, 인간 이성을 최종적 판단자로 여긴 계몽주의적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경이 객관적 계시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합리적 인식론에 따른 결과입니다. 합리적 인식론이란 결국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판단되어 수용될 수 있는 것만 진리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성은 인간 고유의 인식 수단일 뿐, 진리의 원천이나 진리 판별의 절대적 기준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성에게 궁극적 판단 규범의 자리를 허락한 근대의 과학적 방법도 역시 진리를 찾아내는 유일하거나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서 레슬리 뉴비긴의 논평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성과 계시의 역할에 관한 논쟁에서의 문제점은 어떻게 경험된 자료를 이해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건들을 과연 전적으로 지금 세속적인 역사 기술에서 사용하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심리학적인 범주를 가지고 이해해야 하는가의 논쟁과, 이런 범주들의 유용성이나 적절함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이 이야기를 상술된 모든 사건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개인적인 의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인정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들이다. 이성은 사물의 진상에 관한 독자적인 정보의 출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 활동의 한 단면이다. 이성과 계시에 관한 오랜 논쟁에서 나타난 두 가지의 차이점은 각기 다른 정보의 출처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사회에서의 복음》, 29-30쪽)
인간이 이성적 판단을 근거로 성경을 계시로 인정하길 거부한 것은 이성의 역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성의 판단을 근거로 하여 계시의 진리성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신적 진리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정 교수께서는 초월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계시를 주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크게 생각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지적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요?
한편, 만일 하나님께서 의지를 갖고 우리에게 계시를 주신다면, 그 계시는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해 구속력을 띠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정 교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과학은 과학이다. 진화론은 과학적 현상적으로 진리일 뿐이고 기독교 신앙은 다른 지평에서 영적인 진리를 말한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지 독단론에 빠지지 말고 서로가 진리의 지평을 넓혀 가면 충분하다. (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215쪽)
정 교수께서는 신앙과 과학의 영역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과학과는 다른 지평의 영적 진리와만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칸트 이후의 계몽주의적 사고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고백이라는 생각 자체가 외부적인 객관적 기준틀인 진리에서 내적이며 주관적인 직관으로 바뀌어 버렸다. 또한 칸트 이후,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 할 내용을 정의하는 것은 어떤 외적인 권위가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가 되었다”(데이비드 웰즈, 《신학 실종》, 181쪽).
계몽주의의 영향 속에서 신학에서마저도 믿음은 배제되고 이성만이 절대적 판단기준으로 인정됩니다. 신학은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신앙에서 출발할 수 있는 것인데, 이제 계시 자체가, 주관적이라는 이유로, 신학의 논의에서 배척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성적 판단을 근거로 신학적 작업이 이루어지고, 성경에 기록된 초월자 하나님의 역사는 신화적 세계관에 근거한 진술일 뿐 현실성을 결여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성적 판단을 따라 신앙을 설명하려는 인간의 해석마저도 자의적 성격을 띠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적 판단에 대한 강조 역시 시대적 환경의 영향 속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터 버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각자 나름의 “타당성 구조”에 따라 판단합니다. 어떤 일이 타당한가에 대한 판단은 이미 전제되고 있는 어떤 사고 체계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이성적 판단을 최종적 기준으로 설정한 것부터가 근대 이후 계몽주의의 전제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합리적 인식론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전제 자체가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인식과 이해의 방법이 주로 합리성에 근거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성과 이성이 파악하는 자연의 질서가 모두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성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된 선물이라고 말해야 더 적절한 표현입니다. 이성이 하나님보다 앞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성을 절대적 기준이신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종교 개혁의 후예들은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 세계를 탐구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종교 개혁의 전통에서는 자연과 은혜 모두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영역이다. 종교 개혁 전통이 자연을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그 운동의 후예들에 의해서 근대 과학이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예들은 소위 ‘하나님의 두 번째 책’(자연)을 연구해서 자연의 저자와 그 분의 창조 세계를 더 잘 이해하려고 시도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과학이 ‘어떻게’라는 물음들에 대한 답변들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첫 번째 책인 성경은 ‘왜’라는 물음들에 대해서 대답을 제공해 주었다.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101쪽)
버스에 탄 사람이 버스를 밀 수 없듯이, 우리는 우리를 떠받치는 근거를 들여다보거나 조작할 수 없습니다. 욥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초월적 근거를 다 이해할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욥은 이 물음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정 교수께서 주장하시는 신학적 인식론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계시로서보다는, 주관적 수준의 ‘신앙고백’이라고 여겨집니다. 성경을 보편사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에 접근해간 사건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성경은 사실에 대한 증언으로서 갖는 객관성을 잃고, 인간의 주관적 산물로 격하되고 맙니다. 성경을 가변적인 ‘신앙고백’으로 취급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실재(實在)에 뿌리 내리지 못한, 주관적 의견만을 갖게 될 뿐입니다. 저는 이런 결론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이성적 판단에 따라 성경이 재단(裁斷)될 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과연 알 수 있겠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설교비평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정 교수께서는 왜 성경을 설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고 묻게 됩니다. 저는 성경이 하나님의 약속과 꾸짖음을 담고 있으며, 성육신으로 절정을 이루는 신적 계시라고 여깁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을 풀어주는 설교가 필요하며, 설교는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를 면밀히 이해하는 일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계몽주의자들이 변론하고자 했던 기독교라는 종교는 신과 자연과 인간에 관한 영원한 형이상학적 진리의 체계였다. 성경은 자연의 직접적인 관찰이나 내적인 인간의 관념들에 대한 성찰에 의해 발견될 수 없는 영원한 진리에 관한 정보의 출처다.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사회에서의 복음》, 32쪽)
인간 이해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성경관에 대한 해묵은 논쟁을 재연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계시에 대한 입장 차이는 신앙과 신학에 대한 이해에 있어 큰 차이를 빚어내는 두 번째 주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에 외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계시에 대한 이해는 무엇보다도 인간관(人間觀)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종교를 성립시키는 세 가지 요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가 성립하려면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는, 첫째, 그 종교의 주인이 되는 신(神)의 자기 설명, 둘째, 그 신과 인간과의 관계, 셋째, 세계와 역사의 목적에 대한 설명이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요건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샤머니즘이 되거나, 주술과 주문만이 있는 미신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세 가지 요건을 갖고 기독교 신앙을 다시 진술한다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구원주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믿는 신(神)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둘째, 그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구원자로 나타나십니다. 셋째, 모든 인간은, 그리고 이 세계와 역사는 종국에 가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구도를 통해 생각해보면, 정 교수와 제가 인간을 어떻게 다르게 이해하는지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정 교수께서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한다면, 저는 구속주 하나님을 강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서로 다른 인간관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죄(罪)에 대한 이해에 따라 하나님과 그분이 행하시는 일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로 귀결된다고 하겠습니다. 인간관에 있어서의 차이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전망에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 신앙고백의 핵심은 구원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구원주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속죄를 위해 성육신하셔서 인간으로서 생애를 보내신 후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사셨다는 것을 하나님 계시의 핵심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계시의 내용은 인간의 문제적 상태, 곧 죄(罪)를 심각하게 전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표현을 따르자면, 인간은 죄로 인해 야기된 죽음의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새로 태어나야 했고, 이를 위해 구원주 하나님인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할 때, 기독교 신앙의 필수적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고 그분의 살아나심과 연합하는 데에 있습니다(롬 6). 세례와 성찬이 보여주듯,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1). 이렇게 성경에서 발견하는 우리 신앙의 출발점은 인간이 구원주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형편에 처해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복음은 ‘죄’라고 불리는 심각한 현실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갖는 심각성을 염두에 둘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구원주로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사실에도 이미 내포되어 있지만, 인류가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데서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은 특별한 은총이며, 이 사건에 대한 계시는 특별한 계시라고 여겨져야 합니다. 예수의 사역을 통해, 인간은 눈을 뜨게 되며, 그에게 생명이 회복됩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으로 태어나기에, 구원의 은총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알지도 감지하지도 못합니다.
이 특별한 은총을 통해 주어지며 특별한 계시를 통해 알려지는 구원으로, 인간은 구원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인간이 세계를 통해 주신 계시와 창조 속에서 드러난 은총 속의 하나님, 곧 창조하시고 지금도 섭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만물을 자기 앞에 세우실 심판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한편, 정 교수께서 보여주는 인간 이해에 인간의 심각한 형편, 곧 죄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설교에 대한 비평에서도 그러했듯, 정 교수께서는 기독교적 삶에서 죄가 강조되는데 대해 우려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의식에 묶여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투쟁하고, 용서하고, 변혁해 나가도록 돕는다. 이 사실이 복음의 핵심이다”(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229쪽).
인간의 죄(罪)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을 때,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어떻게 이해될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 경우에는, 위에서 말한 세 요건으로 말해보자면, 강조점이 구원주 하나님보다는 창조주 하나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인간에게 죄라는 근본적 뒤틀림이 있다는 점을 그다지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펼치신 은혜, 곧 이른바 ‘일반 은총’의 측면만을 주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창조 때 주어진 은총과 그 창조로부터 알려진 하나님에 대한 계시에 주목할 때, 세계와 역사에 대한 이해 역시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통치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정 교수께서 취하시는 신학적 입장은 바로 이런 경향을 띠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 교수께서 인문학적 소양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저는 기독교의 복음을 판넨베르크처럼 인간 보편의 진리로서 이해하려는 의도를 읽게 됩니다. 물론, 복음은 인간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제시하는 새로운 삶이 인간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인 것일까요? 성경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열어놓는 새로운 인간상이 죄라는 근본적 문제 상황을 해결 받은 인간에게나 적용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과 그의 삶에 대해 탐구해온 그간의 인문학적 발견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신학적 작업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 백성의 특징을 이해하는데 있어, 성경이 진단하듯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이해는 피상적인 것에 그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며 하나님의 창조로 베풀어진 은총을 받은 존재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누구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와 연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별한 은총의 개입이 반드시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죄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인 이 특별한 은총은 인간 사이에 절대적 불연속을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는 그들 양자를 공통적으로 묶어낼 수 없는 근본적 차이가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굳이 인간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공통점을 찾자면, 그것은 죄가 주도권을 잡은 세상에 속한 죄인 된 본성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 이해의 차이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관점에 영향을 끼칩니다. 만일 죄에 대한 심각한 고려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행동이 만들어내는 역사와 사회도 창조라는 일반적 은총에 입각해 이해될 것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변증법적 과정에서 함께 일하는, 그분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때 인간의 죄인 됨이라는 특징이 중요한 변수로 고려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 정 교수께서는 미래의 종말의 향방은 인간의 역할에 따라 열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역사의 과정에 죄인인 인간이 과연 어떤 적극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정 교수의, 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사명에 대한 이해에 있어 이런 인간 이해가 그대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정 교수께서는, 한 설교비평문에서, 성서가 억울한 약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언급합니다. 그런데 저는 과연 성경의 핵심적 문제 제기가 그런 것인가 묻게 됩니다. 그것이 혹시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고백을 대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여성이나 소수 인종의 인권 문제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 혹 환경과 생태 문제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들이 각각 우리의 삶에 중요한 문제들이라는 점을 수긍하면서도,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강조가 기독교가 전하는 특별 은총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데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을 갖게 됩니다. 이런 이슈들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담아내는 근본적 주제라고 할 수 있을까요? 데이비드 웰스는 이런 요즘의 추세가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고백”이 사라진 데서 유래한다고 진단합니다.
현대라는 시기에, 하나님의 객관적인 진리와 시공간의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것에 대한 공적인 고백이라는 신앙고백은 학문 세계에서 매우 어색한 것이 되었다. … 이와 같이 일단 신앙고백이 사라져 버리자, 신학적 성찰이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신학적 성찰이 하나님 말씀의 연구라는 분야를 상실하게 되자, 동양적 영성에서 급진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스트 이데올로기에서 환경에 대한 관심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신학 성찰의 주제를 찾게 되었다. 더욱이 계급적인 관심사가 교회와 학문 세계에 끼어들어서 그 간격을 벌려 놓았다. (데이비드 웰스, 《신학 실종》, 156쪽)
죄에 대한 고려 없이 사회나 역사에 대해 논하는 것은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문제 제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죄에 대한 고려 없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는 방식도 성공적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역사와 실존은 모두 죄로 인한 왜곡, 오염, 부패를 증언할 뿐입니다. 기독교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으로, 죄로 인한 절망과 파멸의 현실을 깨고 재창조로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돌연한 은혜와 초월적 기적의 개입으로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되며, 새롭게 태어남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파멸의 운명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듯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식으로 세상과 역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죄에 사로잡힌 인간의 구원이 전제되어야만, 비로소 그 인간 개인이 이웃 곧 사회와 역사에 새롭게 관련되기 시작합니다. 죄인 됨으로부터의 해방이 개인에게 이루어질 때에야, 그에게 사회와 역사에서의 적극적 역할이 주어집니다. 저는 이런 역할을 ‘성화’라는 전통적 신학 개념 속에서 이해합니다. 성화의 과정을 통해 인간은 그 존재가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이와 같은 존재가 삶의 현장에서 이웃, 곧 사회와 역사 앞에 지는 책임이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로 비유되는 심판의 현장은 바로 이런 측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신앙적 실천적 책임은 구원에서 비롯된 불신자와의 다름, 곧 ‘죄’라는 측면에서의 다름인 ‘거룩’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거룩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죄인이란 하나님과 분리된 자이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그의 백성이요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었을 때, 산상설교가 가르치는 “빛과 소금”, “생명”, “진리”, “착한 행실”의 정의가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43 이하에서 설명하는,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이 보이는 신앙 인격적 정체성은 바로 이런 사람들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펼쳐진 삶은 이런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삶은 이 세상에서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도 완성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셨지만, 우리 인간은 아직 그분의 약속을 붙들고 그분의 성취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왜 이런 긴장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물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하나님의 전적인 예비하심에 맡겨져 있고, 때가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허락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기다림의 시간을 두시는 것은 그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 받는 성도들을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그 충만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람들을 부르시는 구원사역을 연장해나갈 시간이, 그리고 부름 받은 그분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되는 훈련과 완성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적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에베소서 2:22에서 “너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부부 사이의 관계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연합을 비교하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내용을 소유하기도 하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쓰임 받는 기관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 노릇 하시는 질서에 있어, 그리고 그분으로 말미암는 완성에 있어, 교회는 독특한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엡 4:13-16). 교회는 잘못 판단하고 세상에 타협하기도 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교회야말로 “진리를 함께 찾아가는 일을 인도함에 있어, 사고와 행위 모두에서 우리가 어디를 향해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를 안다”(뉴비긴, 263쪽)고 믿습니다.
신학의 근본 토대
사실 하나님께 무슨 일반적 은총과 특별한 은총이라는 구분이 있겠습니까? 어떻게 초월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시공의 세계에 갇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학적 성찰은 신앙을 그 대상으로 삼는 것인데, 신앙은 합리성을 넘어서는 대상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인간보다 크신, 초월적이신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성경에서 들으며, 그분을 신앙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께 얼마나 의존적 존재인가 하는 점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정 교수의 신학적 입장을 보면서 갖는 의문은, 정 교수께서 결국 하나님보다는 인간을 궁극적 기준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정 교수께서 기독교 신앙의 ‘신비’에 대해 여러 곳에서 재차 강조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신비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 구성된 신학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기독교 신앙이 인간으로는 넘볼 수 없는 차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우리의 차이가 빚어진 것일까요?
제 관찰로는 정 교수께서 전제하시는 신학은 사실보다는 의미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중대한 의미든 간에 그 의미가 발생한 터전인 사실이 견고할 때에만 비로소 그 사실에 의미가 담기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성적 판단에서 비롯되는 합리성이나 보편성의 이름으로, 사실을 재단하고 제한하며 배제하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신앙의 실제적 터전을 놓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 교수의 신학은 자신의 근거를 합리성을 근간으로 한 자기 확신에서 찾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합리성에 따라 판단되실 존재일까요? 오히려 우리의 합리성이 하나님의 주권을 근거로 판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신학이 어떤 것인지는 데이비드 웰스의 설명으로 더 분명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소 긴 인용이지만 함께 읽어보고 싶습니다. 데이비드 웰스에 따르면, 신학은 세 가지 필수적인 측면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들은 (1) 신앙고백적 요소(이 말은 성경을 ‘신앙고백’으로 여긴다고 말할 때처럼 ‘고백’으로서의 주관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2) 이 신앙고백에 대한 성찰, (3) 이 처음 두 요소에 기초한 영성입니다.
[첫째,] 신앙고백이란 교회가 믿는 내용이다. 신앙고백은 교리에 농축되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개신교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교회는 하나님이 영감 된 하나님 말씀을 통해 교회에 주신 진리를 고백한다. 어떤 주제라 해도 그 주제에 대해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느냐 또는 그 교훈을 어떤 식으로 엮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권위적인 진리가 기독교 생활과 실천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치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성경의 권위 아래 살아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수 세기 동안 교회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핵심적인 신앙고백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슬로건이다. 이 지식이 없으면,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하는 내용이 빠져 버리며, 믿음과 예배와 그 생명의 유지와 선포와 봉사의 수단을 잃게 된다. 신앙고백은 말 그대로 테올로기아(theologia), 즉 하나님 백성을 위해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서 모든 신학의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
신학의 두 번째 요소인 성찰에는 현대 세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지적인 싸움을 내포한다. 이런 성찰은 세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신학적 성찰에는 성경 안에 포함된 하나님의 계시 전체가 망라되어서 성경의 다양한 부분 사이의 연관성을 추구해 하나님의 성품과 행위와 의지를 계시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명료하게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그 성찰의 목표는 하나님이 주신 내용을 포괄적으로 이해해서 하나님의 생각이 교회의 생각 가운데 재현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있다. 둘째로, 신학적 성찰에는 과거에 대한 전체적인 연구가 포함되어야 한다. 신학적 성찰은 과거에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일하시고 역사하신 사실에서부터 현재의 폭풍우 가운데서 교회라는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해 주는 무게 중심을 찾아야 한다. 과거의 영적인 부요를 모으며, 현재를 절대화하지 않고 상대화해 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반성적인 성찰이다. 현재는 언제나 인간 정신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고양되어 있는 순간(혹은 어떤 은사주의자들이 생각하듯이,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고 착각하는 태도를 버릴 필요가 있다. 이런 태도는 교만과 어리석음을 향해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신학적 성찰은 신앙으로 고백되는 내용과 한 사회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작업은 매우 중요한데, 어느 한 시대의 사상과 가정이 교회의 마음과 생각 속으로 아주 강하게 침투하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현대성이 ‘정상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했다. 신학적 성찰이라는 특정한 맥락에서 말할 때, 교회는 현대성이 교회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지평에 교회의 생각을 맞추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현대성의 지평에 대해 하나님의 진리라는 강력한 해독제, 즉 교정 수단을 갖다 주어야 한다. 비신화화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현대성이다.
신학의 세 번째 요소에는 삶의 지혜, 즉 기독교적인 실천이 신앙고백의 기둥 위에 건설되고, 성찰의 발판에 둘러싸이도록 만드는 지혜를 구성하는 덕목을 계발하는 일이 포함된다. 이 말은 좀 단순하게 들린다. 내가 이 말을 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지금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종류의 영성이다. 이 영성은 그 성격에 있어서 도덕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존재상으로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 영성은 기독교적인 실천, 기독교적인 삶을 우선적으로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 진실의 문제로 보는 영성이며, 생각과 실천을 분리시키지 않는, 이런 분리를 거부하는 영성이다. 이런 영성이 존재할 때에만 어떤 주어진 상황 가운데서도 기독교적이 된다는 것,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난다. (데이비드 웰스, 《신학 실종》, 153-155쪽)
한편, 정 교수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역사 결정론에 머물러 있는 한,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감수성은 어느 정도 확보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섭리는 역동성을 상실한 일종의 프로그램으로 추락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역사의 우연이다. 그는 이미 예정된 부활을 확신하고 십자가를 선택한 게 아니라 자신의 모든 미래를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자기에게 다가온 십자가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예수의 완전한 순종이 바로 십자가 구원의 역동성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이미 예정되고 결정된 수순의 진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주술이고, 거꾸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절대적 순종과 신뢰의 결과로 생각하는 것은 역사이다. 그렇다. 기독교 신앙은 이미 결정된 길을 군말 없이 따라가는, 그래서 인간의 앙가주망이 근본적으로 차단된 숙명주의가 아니라 미래로 열린 길을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부단히 고뇌하고 결단하는 역사의식이다.
… <중략> …
신비라는 말은 어떤 궁극적인 실체가 은폐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생명은 그 리얼리티가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는 점에서 신비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앙의 신비는 역사의 신비에 자리하고 있다. 이에 반해 주술은 형식으로만 신비이지 실제로는 인간이 역사의 신비에서 감수해야 할 불안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와 생명의 신비를 파괴하는 인간의 자기 전략이고 자기 숭배이다. 주술은 결국 신앙의 신비를 파괴할 뿐이다. (정용섭, 《설교비평1 속 빈 설교 꽉찬 설교》, 29-30쪽)
정 교수와 저 모두가 신비를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설명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신비가 인간의 수준을 초월하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정 교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마저도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되실지 모른다는 차원에서 말하는 신비 같습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역사가 초월적이라는데 그 신비가 있고, ‘이미’와 ‘아직’ 사이의 종말적 현실에 그 은폐와 노출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비는 예수 안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 신비이며 그래서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성도들에게 신앙으로 확인되는 신비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보듯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하나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이것이 신비인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으나 우리의 눈에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들어와 있는 탓입니다.
기독교가 열어놓는 신비가 하나님 자신마저도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종말을 작정하셨다고 말하면, 그게 주술적인 말일까요? 정 교수께서는 인간이든 하나님이든 간에 누구도 미래를 확정해 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미래가 어떻게 완성될 것인지를 정하셨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역동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과연 모순일까요? 오히려 예수의 십자가가 결정된 수순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순종과 신뢰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 성경의 명시적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세례 요한에 의해 소개되었고, 예수 자신도 친히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러 오셨음을 공언했다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이것 역시 주술에 빠진 후대의 해석일 뿐일까요?
설교
정 교수의 지적대로 한국 교회 강단은 본문 해석이 부실합니다. 그것은 한국 교회 전체의 수준이 낮은 탓이기도 하고 설교자의 개인적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분명 속상하고 가슴 아픈, 우리 시대 한국 교회 설교자와 설교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설교자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고린도전서 1:26-31에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교자의 위상은 그가 갖고 있는 자질이나 능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쓰신다는 점에서 발견됩니다. 저는 설교자의 무능(無能)이 하나님을 분명히 드러내므로, 설교자는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쓰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설교자의 능력이나 열심은 이 무능함을 돕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설교자의 열심은 그 자신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항복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일 겁니다.
하나님께 설교자는 출애굽 사건의 모세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사용해 여러 기적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지팡이로부터 기적이 나오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팡이는 단지 들려서 쓰임 받을 뿐입니다. 모세의 역할이 이와 같습니다. 모세는 실은 하나님의 지팡이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 들려 기적을 일으키듯, 모세는 하나님께 들린 지팡이로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냅니다. 설교자 역시 모세처럼 하나님의 지팡이로 쓰임받습니다. 고린도전서 1:29에서 “자랑치 못한다”고 한 것은 설교자가 그를 통해 이루어진 일의 원인이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21절의 “전도의 미련한 것”에서도 확인됩니다. 전도가 왜 미련한 것이냐 하면,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로마서 10:9-15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이 어디에서 시작하는가를 역(逆)추적해보면 하나님이 그 시작이요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의 선한 결과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일 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설교가 철학, 소위 사람들의 판단에 부합하는 합리적 설명으로 이해될까봐 심히 두려워하고 떨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증거가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을 통해서만 효과를 낳게 된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고전 2:1-5).
기독교 신앙은 지식과 이해를 넘어서는 생명과 진리의 역동성, 곧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이시고 은혜로우신 개입에 정초되어 있습니다. 설교자가 그런 하나님께서 인간을 편들고 계신다는 점을 알고, 그 자신도 설교로써 그런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편들고 있다면, 그가 하는 설교는 기본은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의 설교를 비평하자면, 설교에서 신학이 실종된 현실을 먼저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설교는 신학에 튼튼히 뿌리내리고 있지 못합니다. 설교가 성경이 가르치는 계시의 내용을 제대로 담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계적이지 않으며, 이해관계에 매어있지 않으며, 인과율(因果律)을 넘어섭니다. 설교는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설교가 직면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는 ‘세속성’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걸어온 지난 모든 나날동안 끊임없이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해 온 것이 바로 세속성의 문제입니다. ‘세속성’이란 하나님이외의 것을 궁극적인 목적과 가치로 삼는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현대에 이 세속성은 절대를 부인하는 다원주의로, 개인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실용주의로, 값싼 보편성을 위한 대중성으로, 모양을 바꿔가며 우리를 시험하며 공격해 옵니다.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그분의 명령을 좇으며 그분만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교회 안에서도 성경을 펴서 가르치되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딤후 3:2) 성경이 전해주는 계시를 거스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는 말씀을 통해, 돈으로 되는 것, 곧 세상의 무가치한 것을 목적으로 삼는데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인간의 필요에 대해 말하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속주의가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 및 종교 개혁과 부흥, 선포와 회심에 고정시키는 대신에, 우리 자신과 우리 나라와 우리 세계와 우리의 시간과 공간과 우리의 순간에 고정시키고 있음이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각 지역의 크리스천 서점들과 강단들과 주일학교 커리큘럼과 방송과 종교적 담화에도 확연히 드러난다.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104쪽)
교회의 설교는 교회가 성경에서 배워 전통으로 물려받은 신앙고백에 근거하고 그 고백에 대한 신학적 통찰과 종합으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이로써 모든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제기하는 궁극적인 질문에 직면하여, 한 인간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게 될 때, 그의 곤고한 영혼은 비로소 평안과 위로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소위 닦달과 나열 등의 유치한 설교 행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에 제일 많이 하는 것이 닦달과 잔소리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수준 높고 훌륭한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이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우리가 늘 게으르고 무지하고 완악하다는 사실을 폭로합니다. 부모는 진정 자녀들을 사랑할 때 책망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설교는, 늘 죄와 싸우며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완성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 청중들에게 죄와의 싸움을,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주인 삼으려는 ‘자기 의(義)’와의 싸움을 싸우도록 애써 독려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시험 앞에 우리는 얼마나 자주 넘어집니까? 저는 다시금 마이클 호튼의 진단에 공감합니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간증들’을 생각해 보라. 개인적인 체험들을 ‘나누는 일’이 공동 기도와 공동 성경연구, 예배와 증거를 대신하고 있다. 개인의 영적인 자서전이 저 나사렛 사람의 생애와 시대를 대신해 버렸다”(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88쪽).
맺는말
토론이나 논쟁으로 정 교수나 저의 신학적 입장에 변화가 생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 교수의 설교비평을 읽으며 우리 각자의 견해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정 교수의 복음에 대한 열정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서로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참된 대화는 강요와 설득이라는 목적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기본 조건으로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 교수의 한국 교회 강단을 향한 비판이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애정에서부터 출발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저는 가슴깊이 그 충정에 공감합니다. 개인적으로 정 교수의 비평 속에서 범상치 않은 영적 통찰과 진정한 영성의 편린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 서로 다른 전통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진심과 목표는 같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영광과 자랑이 더 분명히 드러나고, 더 많은 영혼들에게 진리와 생명이 올바르게 증거 되며, 그럼으로써 한국 교회가 성숙해가는 데에 우리의 공통의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관점과 견해에 있어 많이 다르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 곧 ‘하나님과 복음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근본적 목적에서 일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다름과 같음 모두를 사용하셔서 한국 교회 앞에 우리의 사명이 합력하여 선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기독교사상, 2007년 5월호)
박영선 목사는 한양대학교 졸업, 총신대학교 신대원 졸업, 미국 리버티 벱티스트 세미나리 명박, 현재 남포교회 담임 목사이며, 합동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교수로 있다. 저서로 <구원의 완성 1,2>, <그제야 끝이 오리라>, <구원, 그 이후> 외 다수가 있다.
- 정용섭 교수의 《설교비평》에 대한 신학적 단상-
정용섭 교수의 설교비평에는 한국 교회가 귀담아들어야 할 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요즘의 설교가 인간적 욕망을 부추기고 자극하며, 복음을 인간의 필요나 채워주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정 교수께서는 한국 교회에서 지금 복음이 설교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설교를 통해 기독교의 본질이 제대로 전달되며 설명되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문제 제기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바로 여기에서 정 교수의 설교비평과 관련하여 더 생각해 보아야할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설교를 통해 복음, 혹은 기독교의 본질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느냐 하는 물음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이 무엇이며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공통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 교수의 설교비평에 납득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신앙은 무엇이며 신학적 과제란 무엇인가에 대해 같은 입장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정 교수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만일 기독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면, 정 교수의 설교비평에 우리가 아무리 많이 공감하고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상 피상적인 수준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신학 전통
그간의 설교비평을 읽으면서 정 교수께서 갖고 계신 신앙과 신학에 대한 이해가 어떤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정 교수께서는 설교비평을 할 때 자주, 이런 설교자들이 있는 줄 여태까지 잘 몰랐으며, 그래서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그 설교자들을 대한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제게는 익숙한 설교자들을 정 교수께서는 처음 대하시는 걸 보면, 정 교수와 저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아마도 이런 형편은 그동안 한국 교회를 크게 양분(兩分)해온 신학적 전통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 교수의 설교비평을 통해서 신앙과 신학에 대한, 저와는 다른 입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 교수의 설교에 대한 비평에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도, 정 교수와 저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정 교수께서 기독교에 대한 바른 이해 ―많은 설교들에서 설명되는 것과는 대비되는― 라고 제시하는 입장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따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 발견한 것은 정 교수와 제가 어떤 설교를 대하여 거기에서 같은 문제점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같은 기준에 입각해 발견된 것은 아닐 수 있겠다는 점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정 교수와 저는 실상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차차 얘기되겠지만, 제게 있어서, 신학은 그 무게를 ‘신’(神)께 두고 신께서 의지적으로 보여주시는 계시만을 그 원리로 삼고 있다면, 정 교수께서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는 이른바 ‘학문’에 무게중심을 두고 신학을 해나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제가 인간의 근본적 특성을 죄인 됨에서 찾는다고 한다면, 정 교수께서는 인간에게 보다 적극적 의미에서의 가능성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대비점들은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라고 할 수 있는 복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정 교수와 저 사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빚어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신학적 차이가 설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차이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교비평 작업에서 정 교수께서는 기독교에 대한 다른 이해를 가진 설교자들을 정 교수의 신학이해에 따라 평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만일 실제로 정 교수의 설교비평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설교비평은 원래의 의도하던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관점과 기준을 가지고 다른 관점과 기준을 가진 사람의 행동을 평가한다면, 그 사람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의 평가는 단지 오해만을 불러올 뿐입니다. 먼저 기독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 공통된 기반이 마련되어야 비로소 설교의 목적과 내용에 대해서도 동의가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전제가 있어야 실질적으로 유익한 설교비평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복음에 대한 이해라든가 신학에 대한 이해에 있어 정 교수와 저 사이의 차이점을 검토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정 교수의 신학적 입장을 살펴보면서 크게 의문이 든 것은 두 가지 문제에서였습니다. 첫째는 신학적 인식론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고, 둘째는 여러 신학적 문제들과 직결되는 인간에 대한 이해에 관한 문제입니다.
판넨베르크 신학
정 교수의 신학을 살펴보기 위해 저는 먼저 판넨베르크 신학에 대해 살펴보아야 했습니다. 나중에 더 분명히 발견한 사실이지만, 정 교수께서 제시하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판넨베르크의 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판넨베르크의 계시론에 대해 책을 쓰시기도 했고(정용섭,《말씀신학과 역사신학― 판넨베르크의 계시론을 중심으로》), 《신학과 철학》, 《조직신학》과 설교집들을 비롯한, 판넨베르크의 여러 책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저는 판넨베르크 신학의 특징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그의 신학의 특징으로 크게 두 가지가 지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학의 두 가지 특징은 제가 정 교수와의 차이점으로 확인한 두 가지 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판넨베르크 신학의 독창적 개념은 ‘보편사’와 ‘미래성’이라고 합니다. 보편사 개념을 통해 신학은 역사와 연결되며, 미래성 개념을 통해 신학은 종말론적 특징을 지니게 됩니다.
첫째 특징은 역사 전체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보는 ‘보편사’ 개념입니다. 판넨베르크는 기독교 진리의 보편적 타당성을 합리적으로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신학이 보편사의 지평 안에서 통용되는 합리성이라는 기준에 합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강조는 신학을 계시에 매이지 않게 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판넨베르크는 “바르트가 강조하는 것처럼 신학이 계시라는 폐쇄되고 권위주의적인 개념에만 매달리게 될 때 신학은 보편성을 결여한 초라한 특수 학문이 되어 버리고 만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김영한, ‘볼파르트 판넨베르그’,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 196쪽). 그는 신학이 보편성을 띤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배타적인 계시와의 관련성을 끊어야 한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정 교수도 이런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말씀의 신학을 극복하여 전체 역사 가운데서 신학의 보편성을 찾고자 한다”(정용섭, 《말씀신학과 역사신학》, 148쪽).
둘째는 미래를 강조하는 종말론적 신학의 특성입니다. 판넨베르크는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과거와 현재를 결정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미래의 존재론적 우위성”입니다. 미래는 현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힘이라는 의미에서 창조적 성격을 띱니다. 결과적으로, 세계는 불변적으로 지속되는 질서가 아니라 열린 과정으로 파악됩니다. 현재를 결정하는 것은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열린 미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특징들은 정 교수께서 “인문학적 성서 읽기”를 강조하는 것과, 또 과거보다는 미래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하튼 판넨베르크 신학이 다음과 같이 요약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이성은 신앙의 적이 아니라 친구이며, 교회 전체의 삶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구속사 대신에 보편사, 맹목적 신앙보다는 이성적 통찰, 개인적 결단보다는 역사적 전승을 강조한다. 그는 기독교 진리의 합리성을 위하여 이성의 비판을 강조하는 이성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김영한, ‘볼파르트 판넨베르크’,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 217쪽)
이와 같은 특징은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제가 배워온 신학과 어떻게 다른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첫째, 제가 배운 바로는, 신학적 작업은 계시에 의존해서 이루어집니다. 신학의 계시 의존성이란, 신앙의 내용과 신학적 물음이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계시와, 인간 역사 속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초월적 하나님과 관계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철학이 신학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도 인정됩니다. 인식하는 이성의 유한성과 제한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패커의 다음과 같은 의문에 공감합니다. “나는 조직신학의 주제를 하나님에 관해 계시된 진리로 개념화 시키는 일이 적절한지 의문이 간다. … 이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과 진정한 하나님을 아는 것 사이를 이간시키는 것이다”(J. I. Packer,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Spirituality, pp. 2, 8.).
둘째, 역사, 더 구체적으로 ‘미래’에 대해서도 저는 다르게 이해합니다. 역사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셨으며, 미래, 곧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성취된다고 생각합니다. 판넨베르크가 역사를 “열린 과정”이라고 말한다면, 제가 배운 신학은 역사는 하나님의 뜻하심에 따라 정해져 있다고 여깁니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한 통치를 계속하시며 결국에는 당신께서 정하신 바대로 역사의 목적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즉 신(神)이라는 존재가 인격적이고 전능하다면 정당한 목표와 그것을 이룰 능력과 신실함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역사를 보며 신앙인이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선하신 분이시라는 점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분의 통치 아래에서 실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과 씨름을 벌이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사상들과의 씨름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과의 씨름 말이다”(알리스터 맥그래스,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 88쪽).
신학적 인식론
이제 정 교수의 신학에 대해 몇 가지 점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먼저 제가 정 교수의 신학적 이해에 관해 갖게 되는 의문은 계시와 관련된 것입니다. 계시에 대한 이해는 신학적 인식론의 문제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신학이 하나님에 대한 논의라고 하면, 대체 하나님에 대해 우리 인간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전통적인 답변은 인간은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일 것입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는 종교라는 점을 전제할 때, ‘계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은 이후 모든 신학적 논의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어떤 경로로 우리에게 도달하는지에 대해 정 교수께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계는 곧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에 접근하는 길이다. 이런 방식 말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도달하겠는가? 진리에 도달해 보려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사실 이런 인식론적 근거에서 이루어진다. (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192쪽)
앞서 살펴본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에 대한 강조와 맥을 같이하는 설명으로 보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하나님의 계시란 세계를 통해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의 창조자이시므로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며, 우리는 이에 주목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앎은 “하나님 스스로 자기의 본질을 노출하는 것에 대한 ‘자연적 앎’의 문제”라고 덧붙여 설명됩니다(정용섭, 《말씀신학과 역사신학》, 192쪽). 인간이 자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설명을 따라가면서, 정 교수의 계시 이해가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로 여기는 기독교의 전통적 이해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 교수의 이 같은 입장에는 이성적 판단에 따라 성경을 역사적 주관적 신앙고백 문서로만 받아들이려고 한 계몽주의 이후 학문의 결론이 그대로 전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저는 성경이야말로 계시의 외적 인식원리라는 전통적 입장을 따릅니다(Louis Berkhof,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 96.). 성경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 주신 특별한 계시라고 이해합니다. 성경에 담긴 내용이, 인간 쪽의 반응이 있기 전에, 인간에게 나타나시고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책이며, 인간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물론 저도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고 있으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이 그의 창조세계에 분명히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롬1:20).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중단하실 수 없으며, 그분이 지으신 세계를 그분의 역사로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계시만으로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큰 장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과 분리되었다고 천명합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져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눈이 멀어져, 해가 빛나고 있는데도 보지 못합니다. 따라서 세계만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기란 더더욱 어려워진 것입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둘 때, 하나님 편에서 온 보다 명확한 계시의 필요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왜 정 교수께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주신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근대성에 대한 요즘의 연구들이 보여주듯, 인간 이성을 최종적 판단자로 여긴 계몽주의적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경이 객관적 계시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합리적 인식론에 따른 결과입니다. 합리적 인식론이란 결국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판단되어 수용될 수 있는 것만 진리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성은 인간 고유의 인식 수단일 뿐, 진리의 원천이나 진리 판별의 절대적 기준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성에게 궁극적 판단 규범의 자리를 허락한 근대의 과학적 방법도 역시 진리를 찾아내는 유일하거나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서 레슬리 뉴비긴의 논평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성과 계시의 역할에 관한 논쟁에서의 문제점은 어떻게 경험된 자료를 이해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건들을 과연 전적으로 지금 세속적인 역사 기술에서 사용하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심리학적인 범주를 가지고 이해해야 하는가의 논쟁과, 이런 범주들의 유용성이나 적절함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이 이야기를 상술된 모든 사건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개인적인 의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인정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들이다. 이성은 사물의 진상에 관한 독자적인 정보의 출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 활동의 한 단면이다. 이성과 계시에 관한 오랜 논쟁에서 나타난 두 가지의 차이점은 각기 다른 정보의 출처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사회에서의 복음》, 29-30쪽)
인간이 이성적 판단을 근거로 성경을 계시로 인정하길 거부한 것은 이성의 역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성의 판단을 근거로 하여 계시의 진리성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신적 진리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정 교수께서는 초월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계시를 주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크게 생각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지적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요?
한편, 만일 하나님께서 의지를 갖고 우리에게 계시를 주신다면, 그 계시는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해 구속력을 띠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정 교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과학은 과학이다. 진화론은 과학적 현상적으로 진리일 뿐이고 기독교 신앙은 다른 지평에서 영적인 진리를 말한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지 독단론에 빠지지 말고 서로가 진리의 지평을 넓혀 가면 충분하다. (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215쪽)
정 교수께서는 신앙과 과학의 영역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과학과는 다른 지평의 영적 진리와만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칸트 이후의 계몽주의적 사고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고백이라는 생각 자체가 외부적인 객관적 기준틀인 진리에서 내적이며 주관적인 직관으로 바뀌어 버렸다. 또한 칸트 이후,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 할 내용을 정의하는 것은 어떤 외적인 권위가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가 되었다”(데이비드 웰즈, 《신학 실종》, 181쪽).
계몽주의의 영향 속에서 신학에서마저도 믿음은 배제되고 이성만이 절대적 판단기준으로 인정됩니다. 신학은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신앙에서 출발할 수 있는 것인데, 이제 계시 자체가, 주관적이라는 이유로, 신학의 논의에서 배척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성적 판단을 근거로 신학적 작업이 이루어지고, 성경에 기록된 초월자 하나님의 역사는 신화적 세계관에 근거한 진술일 뿐 현실성을 결여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성적 판단을 따라 신앙을 설명하려는 인간의 해석마저도 자의적 성격을 띠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적 판단에 대한 강조 역시 시대적 환경의 영향 속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터 버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각자 나름의 “타당성 구조”에 따라 판단합니다. 어떤 일이 타당한가에 대한 판단은 이미 전제되고 있는 어떤 사고 체계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이성적 판단을 최종적 기준으로 설정한 것부터가 근대 이후 계몽주의의 전제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합리적 인식론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전제 자체가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인식과 이해의 방법이 주로 합리성에 근거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성과 이성이 파악하는 자연의 질서가 모두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성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된 선물이라고 말해야 더 적절한 표현입니다. 이성이 하나님보다 앞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성을 절대적 기준이신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종교 개혁의 후예들은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 세계를 탐구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종교 개혁의 전통에서는 자연과 은혜 모두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영역이다. 종교 개혁 전통이 자연을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그 운동의 후예들에 의해서 근대 과학이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예들은 소위 ‘하나님의 두 번째 책’(자연)을 연구해서 자연의 저자와 그 분의 창조 세계를 더 잘 이해하려고 시도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과학이 ‘어떻게’라는 물음들에 대한 답변들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첫 번째 책인 성경은 ‘왜’라는 물음들에 대해서 대답을 제공해 주었다.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101쪽)
버스에 탄 사람이 버스를 밀 수 없듯이, 우리는 우리를 떠받치는 근거를 들여다보거나 조작할 수 없습니다. 욥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초월적 근거를 다 이해할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욥은 이 물음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정 교수께서 주장하시는 신학적 인식론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계시로서보다는, 주관적 수준의 ‘신앙고백’이라고 여겨집니다. 성경을 보편사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에 접근해간 사건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성경은 사실에 대한 증언으로서 갖는 객관성을 잃고, 인간의 주관적 산물로 격하되고 맙니다. 성경을 가변적인 ‘신앙고백’으로 취급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실재(實在)에 뿌리 내리지 못한, 주관적 의견만을 갖게 될 뿐입니다. 저는 이런 결론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이성적 판단에 따라 성경이 재단(裁斷)될 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과연 알 수 있겠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설교비평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정 교수께서는 왜 성경을 설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고 묻게 됩니다. 저는 성경이 하나님의 약속과 꾸짖음을 담고 있으며, 성육신으로 절정을 이루는 신적 계시라고 여깁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을 풀어주는 설교가 필요하며, 설교는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를 면밀히 이해하는 일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계몽주의자들이 변론하고자 했던 기독교라는 종교는 신과 자연과 인간에 관한 영원한 형이상학적 진리의 체계였다. 성경은 자연의 직접적인 관찰이나 내적인 인간의 관념들에 대한 성찰에 의해 발견될 수 없는 영원한 진리에 관한 정보의 출처다.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사회에서의 복음》, 32쪽)
인간 이해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성경관에 대한 해묵은 논쟁을 재연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계시에 대한 입장 차이는 신앙과 신학에 대한 이해에 있어 큰 차이를 빚어내는 두 번째 주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에 외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계시에 대한 이해는 무엇보다도 인간관(人間觀)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종교를 성립시키는 세 가지 요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가 성립하려면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는, 첫째, 그 종교의 주인이 되는 신(神)의 자기 설명, 둘째, 그 신과 인간과의 관계, 셋째, 세계와 역사의 목적에 대한 설명이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요건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샤머니즘이 되거나, 주술과 주문만이 있는 미신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세 가지 요건을 갖고 기독교 신앙을 다시 진술한다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구원주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믿는 신(神)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둘째, 그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구원자로 나타나십니다. 셋째, 모든 인간은, 그리고 이 세계와 역사는 종국에 가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구도를 통해 생각해보면, 정 교수와 제가 인간을 어떻게 다르게 이해하는지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정 교수께서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한다면, 저는 구속주 하나님을 강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서로 다른 인간관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죄(罪)에 대한 이해에 따라 하나님과 그분이 행하시는 일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로 귀결된다고 하겠습니다. 인간관에 있어서의 차이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전망에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 신앙고백의 핵심은 구원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구원주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속죄를 위해 성육신하셔서 인간으로서 생애를 보내신 후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사셨다는 것을 하나님 계시의 핵심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계시의 내용은 인간의 문제적 상태, 곧 죄(罪)를 심각하게 전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표현을 따르자면, 인간은 죄로 인해 야기된 죽음의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새로 태어나야 했고, 이를 위해 구원주 하나님인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할 때, 기독교 신앙의 필수적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고 그분의 살아나심과 연합하는 데에 있습니다(롬 6). 세례와 성찬이 보여주듯,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1). 이렇게 성경에서 발견하는 우리 신앙의 출발점은 인간이 구원주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형편에 처해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복음은 ‘죄’라고 불리는 심각한 현실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갖는 심각성을 염두에 둘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구원주로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사실에도 이미 내포되어 있지만, 인류가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데서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은 특별한 은총이며, 이 사건에 대한 계시는 특별한 계시라고 여겨져야 합니다. 예수의 사역을 통해, 인간은 눈을 뜨게 되며, 그에게 생명이 회복됩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으로 태어나기에, 구원의 은총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알지도 감지하지도 못합니다.
이 특별한 은총을 통해 주어지며 특별한 계시를 통해 알려지는 구원으로, 인간은 구원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인간이 세계를 통해 주신 계시와 창조 속에서 드러난 은총 속의 하나님, 곧 창조하시고 지금도 섭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만물을 자기 앞에 세우실 심판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한편, 정 교수께서 보여주는 인간 이해에 인간의 심각한 형편, 곧 죄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설교에 대한 비평에서도 그러했듯, 정 교수께서는 기독교적 삶에서 죄가 강조되는데 대해 우려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의식에 묶여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투쟁하고, 용서하고, 변혁해 나가도록 돕는다. 이 사실이 복음의 핵심이다”(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229쪽).
인간의 죄(罪)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을 때,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어떻게 이해될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 경우에는, 위에서 말한 세 요건으로 말해보자면, 강조점이 구원주 하나님보다는 창조주 하나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인간에게 죄라는 근본적 뒤틀림이 있다는 점을 그다지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펼치신 은혜, 곧 이른바 ‘일반 은총’의 측면만을 주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창조 때 주어진 은총과 그 창조로부터 알려진 하나님에 대한 계시에 주목할 때, 세계와 역사에 대한 이해 역시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통치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정 교수께서 취하시는 신학적 입장은 바로 이런 경향을 띠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 교수께서 인문학적 소양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저는 기독교의 복음을 판넨베르크처럼 인간 보편의 진리로서 이해하려는 의도를 읽게 됩니다. 물론, 복음은 인간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제시하는 새로운 삶이 인간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인 것일까요? 성경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열어놓는 새로운 인간상이 죄라는 근본적 문제 상황을 해결 받은 인간에게나 적용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과 그의 삶에 대해 탐구해온 그간의 인문학적 발견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신학적 작업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 백성의 특징을 이해하는데 있어, 성경이 진단하듯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이해는 피상적인 것에 그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며 하나님의 창조로 베풀어진 은총을 받은 존재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누구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와 연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별한 은총의 개입이 반드시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죄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인 이 특별한 은총은 인간 사이에 절대적 불연속을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는 그들 양자를 공통적으로 묶어낼 수 없는 근본적 차이가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굳이 인간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공통점을 찾자면, 그것은 죄가 주도권을 잡은 세상에 속한 죄인 된 본성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 이해의 차이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관점에 영향을 끼칩니다. 만일 죄에 대한 심각한 고려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행동이 만들어내는 역사와 사회도 창조라는 일반적 은총에 입각해 이해될 것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변증법적 과정에서 함께 일하는, 그분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때 인간의 죄인 됨이라는 특징이 중요한 변수로 고려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 정 교수께서는 미래의 종말의 향방은 인간의 역할에 따라 열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역사의 과정에 죄인인 인간이 과연 어떤 적극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정 교수의, 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사명에 대한 이해에 있어 이런 인간 이해가 그대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정 교수께서는, 한 설교비평문에서, 성서가 억울한 약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언급합니다. 그런데 저는 과연 성경의 핵심적 문제 제기가 그런 것인가 묻게 됩니다. 그것이 혹시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고백을 대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여성이나 소수 인종의 인권 문제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 혹 환경과 생태 문제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들이 각각 우리의 삶에 중요한 문제들이라는 점을 수긍하면서도,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강조가 기독교가 전하는 특별 은총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데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을 갖게 됩니다. 이런 이슈들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담아내는 근본적 주제라고 할 수 있을까요? 데이비드 웰스는 이런 요즘의 추세가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고백”이 사라진 데서 유래한다고 진단합니다.
현대라는 시기에, 하나님의 객관적인 진리와 시공간의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것에 대한 공적인 고백이라는 신앙고백은 학문 세계에서 매우 어색한 것이 되었다. … 이와 같이 일단 신앙고백이 사라져 버리자, 신학적 성찰이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신학적 성찰이 하나님 말씀의 연구라는 분야를 상실하게 되자, 동양적 영성에서 급진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스트 이데올로기에서 환경에 대한 관심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신학 성찰의 주제를 찾게 되었다. 더욱이 계급적인 관심사가 교회와 학문 세계에 끼어들어서 그 간격을 벌려 놓았다. (데이비드 웰스, 《신학 실종》, 156쪽)
죄에 대한 고려 없이 사회나 역사에 대해 논하는 것은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문제 제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죄에 대한 고려 없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는 방식도 성공적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역사와 실존은 모두 죄로 인한 왜곡, 오염, 부패를 증언할 뿐입니다. 기독교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으로, 죄로 인한 절망과 파멸의 현실을 깨고 재창조로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돌연한 은혜와 초월적 기적의 개입으로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되며, 새롭게 태어남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파멸의 운명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듯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식으로 세상과 역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죄에 사로잡힌 인간의 구원이 전제되어야만, 비로소 그 인간 개인이 이웃 곧 사회와 역사에 새롭게 관련되기 시작합니다. 죄인 됨으로부터의 해방이 개인에게 이루어질 때에야, 그에게 사회와 역사에서의 적극적 역할이 주어집니다. 저는 이런 역할을 ‘성화’라는 전통적 신학 개념 속에서 이해합니다. 성화의 과정을 통해 인간은 그 존재가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이와 같은 존재가 삶의 현장에서 이웃, 곧 사회와 역사 앞에 지는 책임이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로 비유되는 심판의 현장은 바로 이런 측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신앙적 실천적 책임은 구원에서 비롯된 불신자와의 다름, 곧 ‘죄’라는 측면에서의 다름인 ‘거룩’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거룩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죄인이란 하나님과 분리된 자이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그의 백성이요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었을 때, 산상설교가 가르치는 “빛과 소금”, “생명”, “진리”, “착한 행실”의 정의가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43 이하에서 설명하는,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이 보이는 신앙 인격적 정체성은 바로 이런 사람들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펼쳐진 삶은 이런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삶은 이 세상에서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도 완성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셨지만, 우리 인간은 아직 그분의 약속을 붙들고 그분의 성취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왜 이런 긴장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물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하나님의 전적인 예비하심에 맡겨져 있고, 때가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허락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기다림의 시간을 두시는 것은 그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 받는 성도들을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그 충만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람들을 부르시는 구원사역을 연장해나갈 시간이, 그리고 부름 받은 그분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되는 훈련과 완성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적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에베소서 2:22에서 “너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부부 사이의 관계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연합을 비교하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내용을 소유하기도 하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쓰임 받는 기관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 노릇 하시는 질서에 있어, 그리고 그분으로 말미암는 완성에 있어, 교회는 독특한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엡 4:13-16). 교회는 잘못 판단하고 세상에 타협하기도 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교회야말로 “진리를 함께 찾아가는 일을 인도함에 있어, 사고와 행위 모두에서 우리가 어디를 향해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를 안다”(뉴비긴, 263쪽)고 믿습니다.
신학의 근본 토대
사실 하나님께 무슨 일반적 은총과 특별한 은총이라는 구분이 있겠습니까? 어떻게 초월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시공의 세계에 갇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학적 성찰은 신앙을 그 대상으로 삼는 것인데, 신앙은 합리성을 넘어서는 대상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인간보다 크신, 초월적이신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성경에서 들으며, 그분을 신앙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께 얼마나 의존적 존재인가 하는 점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정 교수의 신학적 입장을 보면서 갖는 의문은, 정 교수께서 결국 하나님보다는 인간을 궁극적 기준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정 교수께서 기독교 신앙의 ‘신비’에 대해 여러 곳에서 재차 강조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신비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 구성된 신학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기독교 신앙이 인간으로는 넘볼 수 없는 차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우리의 차이가 빚어진 것일까요?
제 관찰로는 정 교수께서 전제하시는 신학은 사실보다는 의미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중대한 의미든 간에 그 의미가 발생한 터전인 사실이 견고할 때에만 비로소 그 사실에 의미가 담기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성적 판단에서 비롯되는 합리성이나 보편성의 이름으로, 사실을 재단하고 제한하며 배제하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신앙의 실제적 터전을 놓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 교수의 신학은 자신의 근거를 합리성을 근간으로 한 자기 확신에서 찾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합리성에 따라 판단되실 존재일까요? 오히려 우리의 합리성이 하나님의 주권을 근거로 판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신학이 어떤 것인지는 데이비드 웰스의 설명으로 더 분명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소 긴 인용이지만 함께 읽어보고 싶습니다. 데이비드 웰스에 따르면, 신학은 세 가지 필수적인 측면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들은 (1) 신앙고백적 요소(이 말은 성경을 ‘신앙고백’으로 여긴다고 말할 때처럼 ‘고백’으로서의 주관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2) 이 신앙고백에 대한 성찰, (3) 이 처음 두 요소에 기초한 영성입니다.
[첫째,] 신앙고백이란 교회가 믿는 내용이다. 신앙고백은 교리에 농축되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개신교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교회는 하나님이 영감 된 하나님 말씀을 통해 교회에 주신 진리를 고백한다. 어떤 주제라 해도 그 주제에 대해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느냐 또는 그 교훈을 어떤 식으로 엮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권위적인 진리가 기독교 생활과 실천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치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성경의 권위 아래 살아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수 세기 동안 교회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핵심적인 신앙고백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슬로건이다. 이 지식이 없으면,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하는 내용이 빠져 버리며, 믿음과 예배와 그 생명의 유지와 선포와 봉사의 수단을 잃게 된다. 신앙고백은 말 그대로 테올로기아(theologia), 즉 하나님 백성을 위해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서 모든 신학의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
신학의 두 번째 요소인 성찰에는 현대 세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지적인 싸움을 내포한다. 이런 성찰은 세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신학적 성찰에는 성경 안에 포함된 하나님의 계시 전체가 망라되어서 성경의 다양한 부분 사이의 연관성을 추구해 하나님의 성품과 행위와 의지를 계시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명료하게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그 성찰의 목표는 하나님이 주신 내용을 포괄적으로 이해해서 하나님의 생각이 교회의 생각 가운데 재현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있다. 둘째로, 신학적 성찰에는 과거에 대한 전체적인 연구가 포함되어야 한다. 신학적 성찰은 과거에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일하시고 역사하신 사실에서부터 현재의 폭풍우 가운데서 교회라는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해 주는 무게 중심을 찾아야 한다. 과거의 영적인 부요를 모으며, 현재를 절대화하지 않고 상대화해 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반성적인 성찰이다. 현재는 언제나 인간 정신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고양되어 있는 순간(혹은 어떤 은사주의자들이 생각하듯이,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고 착각하는 태도를 버릴 필요가 있다. 이런 태도는 교만과 어리석음을 향해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신학적 성찰은 신앙으로 고백되는 내용과 한 사회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작업은 매우 중요한데, 어느 한 시대의 사상과 가정이 교회의 마음과 생각 속으로 아주 강하게 침투하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현대성이 ‘정상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했다. 신학적 성찰이라는 특정한 맥락에서 말할 때, 교회는 현대성이 교회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지평에 교회의 생각을 맞추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현대성의 지평에 대해 하나님의 진리라는 강력한 해독제, 즉 교정 수단을 갖다 주어야 한다. 비신화화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현대성이다.
신학의 세 번째 요소에는 삶의 지혜, 즉 기독교적인 실천이 신앙고백의 기둥 위에 건설되고, 성찰의 발판에 둘러싸이도록 만드는 지혜를 구성하는 덕목을 계발하는 일이 포함된다. 이 말은 좀 단순하게 들린다. 내가 이 말을 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지금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종류의 영성이다. 이 영성은 그 성격에 있어서 도덕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존재상으로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 영성은 기독교적인 실천, 기독교적인 삶을 우선적으로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 진실의 문제로 보는 영성이며, 생각과 실천을 분리시키지 않는, 이런 분리를 거부하는 영성이다. 이런 영성이 존재할 때에만 어떤 주어진 상황 가운데서도 기독교적이 된다는 것,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난다. (데이비드 웰스, 《신학 실종》, 153-155쪽)
한편, 정 교수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역사 결정론에 머물러 있는 한,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감수성은 어느 정도 확보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섭리는 역동성을 상실한 일종의 프로그램으로 추락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역사의 우연이다. 그는 이미 예정된 부활을 확신하고 십자가를 선택한 게 아니라 자신의 모든 미래를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자기에게 다가온 십자가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예수의 완전한 순종이 바로 십자가 구원의 역동성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이미 예정되고 결정된 수순의 진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주술이고, 거꾸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절대적 순종과 신뢰의 결과로 생각하는 것은 역사이다. 그렇다. 기독교 신앙은 이미 결정된 길을 군말 없이 따라가는, 그래서 인간의 앙가주망이 근본적으로 차단된 숙명주의가 아니라 미래로 열린 길을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부단히 고뇌하고 결단하는 역사의식이다.
… <중략> …
신비라는 말은 어떤 궁극적인 실체가 은폐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생명은 그 리얼리티가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는 점에서 신비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앙의 신비는 역사의 신비에 자리하고 있다. 이에 반해 주술은 형식으로만 신비이지 실제로는 인간이 역사의 신비에서 감수해야 할 불안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와 생명의 신비를 파괴하는 인간의 자기 전략이고 자기 숭배이다. 주술은 결국 신앙의 신비를 파괴할 뿐이다. (정용섭, 《설교비평1 속 빈 설교 꽉찬 설교》, 29-30쪽)
정 교수와 저 모두가 신비를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설명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신비가 인간의 수준을 초월하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정 교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마저도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되실지 모른다는 차원에서 말하는 신비 같습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역사가 초월적이라는데 그 신비가 있고, ‘이미’와 ‘아직’ 사이의 종말적 현실에 그 은폐와 노출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비는 예수 안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 신비이며 그래서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성도들에게 신앙으로 확인되는 신비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보듯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하나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이것이 신비인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으나 우리의 눈에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들어와 있는 탓입니다.
기독교가 열어놓는 신비가 하나님 자신마저도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종말을 작정하셨다고 말하면, 그게 주술적인 말일까요? 정 교수께서는 인간이든 하나님이든 간에 누구도 미래를 확정해 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미래가 어떻게 완성될 것인지를 정하셨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역동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과연 모순일까요? 오히려 예수의 십자가가 결정된 수순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순종과 신뢰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 성경의 명시적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세례 요한에 의해 소개되었고, 예수 자신도 친히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러 오셨음을 공언했다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이것 역시 주술에 빠진 후대의 해석일 뿐일까요?
설교
정 교수의 지적대로 한국 교회 강단은 본문 해석이 부실합니다. 그것은 한국 교회 전체의 수준이 낮은 탓이기도 하고 설교자의 개인적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분명 속상하고 가슴 아픈, 우리 시대 한국 교회 설교자와 설교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설교자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고린도전서 1:26-31에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교자의 위상은 그가 갖고 있는 자질이나 능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쓰신다는 점에서 발견됩니다. 저는 설교자의 무능(無能)이 하나님을 분명히 드러내므로, 설교자는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쓰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설교자의 능력이나 열심은 이 무능함을 돕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설교자의 열심은 그 자신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항복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일 겁니다.
하나님께 설교자는 출애굽 사건의 모세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사용해 여러 기적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지팡이로부터 기적이 나오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팡이는 단지 들려서 쓰임 받을 뿐입니다. 모세의 역할이 이와 같습니다. 모세는 실은 하나님의 지팡이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 들려 기적을 일으키듯, 모세는 하나님께 들린 지팡이로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냅니다. 설교자 역시 모세처럼 하나님의 지팡이로 쓰임받습니다. 고린도전서 1:29에서 “자랑치 못한다”고 한 것은 설교자가 그를 통해 이루어진 일의 원인이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21절의 “전도의 미련한 것”에서도 확인됩니다. 전도가 왜 미련한 것이냐 하면,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로마서 10:9-15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이 어디에서 시작하는가를 역(逆)추적해보면 하나님이 그 시작이요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의 선한 결과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일 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설교가 철학, 소위 사람들의 판단에 부합하는 합리적 설명으로 이해될까봐 심히 두려워하고 떨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증거가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을 통해서만 효과를 낳게 된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고전 2:1-5).
기독교 신앙은 지식과 이해를 넘어서는 생명과 진리의 역동성, 곧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이시고 은혜로우신 개입에 정초되어 있습니다. 설교자가 그런 하나님께서 인간을 편들고 계신다는 점을 알고, 그 자신도 설교로써 그런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편들고 있다면, 그가 하는 설교는 기본은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의 설교를 비평하자면, 설교에서 신학이 실종된 현실을 먼저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설교는 신학에 튼튼히 뿌리내리고 있지 못합니다. 설교가 성경이 가르치는 계시의 내용을 제대로 담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계적이지 않으며, 이해관계에 매어있지 않으며, 인과율(因果律)을 넘어섭니다. 설교는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설교가 직면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는 ‘세속성’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걸어온 지난 모든 나날동안 끊임없이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해 온 것이 바로 세속성의 문제입니다. ‘세속성’이란 하나님이외의 것을 궁극적인 목적과 가치로 삼는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현대에 이 세속성은 절대를 부인하는 다원주의로, 개인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실용주의로, 값싼 보편성을 위한 대중성으로, 모양을 바꿔가며 우리를 시험하며 공격해 옵니다.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그분의 명령을 좇으며 그분만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교회 안에서도 성경을 펴서 가르치되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딤후 3:2) 성경이 전해주는 계시를 거스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는 말씀을 통해, 돈으로 되는 것, 곧 세상의 무가치한 것을 목적으로 삼는데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인간의 필요에 대해 말하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속주의가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 및 종교 개혁과 부흥, 선포와 회심에 고정시키는 대신에, 우리 자신과 우리 나라와 우리 세계와 우리의 시간과 공간과 우리의 순간에 고정시키고 있음이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각 지역의 크리스천 서점들과 강단들과 주일학교 커리큘럼과 방송과 종교적 담화에도 확연히 드러난다.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104쪽)
교회의 설교는 교회가 성경에서 배워 전통으로 물려받은 신앙고백에 근거하고 그 고백에 대한 신학적 통찰과 종합으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이로써 모든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제기하는 궁극적인 질문에 직면하여, 한 인간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게 될 때, 그의 곤고한 영혼은 비로소 평안과 위로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소위 닦달과 나열 등의 유치한 설교 행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에 제일 많이 하는 것이 닦달과 잔소리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수준 높고 훌륭한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이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우리가 늘 게으르고 무지하고 완악하다는 사실을 폭로합니다. 부모는 진정 자녀들을 사랑할 때 책망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설교는, 늘 죄와 싸우며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완성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 청중들에게 죄와의 싸움을,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주인 삼으려는 ‘자기 의(義)’와의 싸움을 싸우도록 애써 독려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시험 앞에 우리는 얼마나 자주 넘어집니까? 저는 다시금 마이클 호튼의 진단에 공감합니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간증들’을 생각해 보라. 개인적인 체험들을 ‘나누는 일’이 공동 기도와 공동 성경연구, 예배와 증거를 대신하고 있다. 개인의 영적인 자서전이 저 나사렛 사람의 생애와 시대를 대신해 버렸다”(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88쪽).
맺는말
토론이나 논쟁으로 정 교수나 저의 신학적 입장에 변화가 생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 교수의 설교비평을 읽으며 우리 각자의 견해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정 교수의 복음에 대한 열정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서로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참된 대화는 강요와 설득이라는 목적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기본 조건으로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 교수의 한국 교회 강단을 향한 비판이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애정에서부터 출발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저는 가슴깊이 그 충정에 공감합니다. 개인적으로 정 교수의 비평 속에서 범상치 않은 영적 통찰과 진정한 영성의 편린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 서로 다른 전통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진심과 목표는 같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영광과 자랑이 더 분명히 드러나고, 더 많은 영혼들에게 진리와 생명이 올바르게 증거 되며, 그럼으로써 한국 교회가 성숙해가는 데에 우리의 공통의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관점과 견해에 있어 많이 다르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 곧 ‘하나님과 복음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근본적 목적에서 일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다름과 같음 모두를 사용하셔서 한국 교회 앞에 우리의 사명이 합력하여 선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기독교사상, 2007년 5월호)
박영선 목사는 한양대학교 졸업, 총신대학교 신대원 졸업, 미국 리버티 벱티스트 세미나리 명박, 현재 남포교회 담임 목사이며, 합동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교수로 있다. 저서로 <구원의 완성 1,2>, <그제야 끝이 오리라>, <구원, 그 이후> 외 다수가 있다.
2007.05.03 23:13:23
정정희님, 그냥 우스개 소리를 인용했던 것인데...
개골개골개골 이라고 썼던 글줄 위로 여덟 째 줄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괜한 말을 쓴 거 같으네요.
개골개골개골 이라고 썼던 글줄 위로 여덟 째 줄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괜한 말을 쓴 거 같으네요.
2007.05.04 12:40:09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댓글 다 읽으려면 환갑을 넘길 것 같아 걍 씁니다.
'기상'의 한종호 편집장에게 정 목의 설교비평 당한 분들에게 반박을 하라고 했더니
박 목 혼자만 했다고 하길레 "역시, 그 싸나이가?" 했습니다.
그런데 박 목의 글을 보니 역시 '그 나물에 그 밥' 이었습니다.
즉, 안들어도 뻔한 소리였다는 거죠.
뭘 달리 할 말이 있겠습니까?
녹음 테이프는 누가 틀어도 똑 같은 소리가 나는 것 아닙니까?
나는 박 목처럼 현실적으로 영업 잘하는 이들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어떤 분이 테잎을 한 보따리 주길레
남의 테이프 설교 절대 안 듣는 사람이지만
준 분의 성의가 가상해서 한달 동안 운전하면서 다 들었죠.
내용은 전혀 관심 밖인데 설교를 통해서 나타나는그 분의 인품과 청교도적 신앙에 대해서
정말로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더라구요.
그러나 결국은 루리는 헤어지고 말았지요.
그것은 뒤돌아보고 싶지 않은 점을 만나고 말았는데 바로 '미니 스커트' 사건이었습니다.
세상 풍조에 휩쓸리는 것을 지적하면서
"미니 스터트 입고 다니는 것, 하나도 안 예뻐요.
여러분들의 딸이 입고 다니면 다리 몽둥이를 부러 뜨려서라도 입고 당하지 못하게 하세요!!!"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분의 말하려고 하는 의도를 100% 이해하지만 이런 시각이니 말해 무엇하갔시요?
나는 미니 스커트가 예쁘기만 하던데.
그나 나나 그냥 그렇게 살다 죽어야지 별 수 있겠어요.
혹시 천당에서 만나도 각 방 쓰고.
그대신 살아 있는 동안
나는 거리에 나가면 아가씨들 다리 즐겁게 감상하고 다니고
박 목은 눈쌀 찌프리며 다니는 차이가 있겠지만.
세상이 그 분들 믿는대로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구원받고 죄 않짓고
거룩한 생활하고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고 세상 모든 문제에는 하나님이 역사 하심을 기다리고'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얼매나 좋갔습네까?
다국적기업 문제도 없고, 군산복합체 문제도 없고. 신자유주의도 없고, MD 체제도 없고,
아! 행복 하여라!
단순한 유치원 세계여!
댓글 다 읽으려면 환갑을 넘길 것 같아 걍 씁니다.
'기상'의 한종호 편집장에게 정 목의 설교비평 당한 분들에게 반박을 하라고 했더니
박 목 혼자만 했다고 하길레 "역시, 그 싸나이가?" 했습니다.
그런데 박 목의 글을 보니 역시 '그 나물에 그 밥' 이었습니다.
즉, 안들어도 뻔한 소리였다는 거죠.
뭘 달리 할 말이 있겠습니까?
녹음 테이프는 누가 틀어도 똑 같은 소리가 나는 것 아닙니까?
나는 박 목처럼 현실적으로 영업 잘하는 이들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어떤 분이 테잎을 한 보따리 주길레
남의 테이프 설교 절대 안 듣는 사람이지만
준 분의 성의가 가상해서 한달 동안 운전하면서 다 들었죠.
내용은 전혀 관심 밖인데 설교를 통해서 나타나는그 분의 인품과 청교도적 신앙에 대해서
정말로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더라구요.
그러나 결국은 루리는 헤어지고 말았지요.
그것은 뒤돌아보고 싶지 않은 점을 만나고 말았는데 바로 '미니 스커트' 사건이었습니다.
세상 풍조에 휩쓸리는 것을 지적하면서
"미니 스터트 입고 다니는 것, 하나도 안 예뻐요.
여러분들의 딸이 입고 다니면 다리 몽둥이를 부러 뜨려서라도 입고 당하지 못하게 하세요!!!"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분의 말하려고 하는 의도를 100% 이해하지만 이런 시각이니 말해 무엇하갔시요?
나는 미니 스커트가 예쁘기만 하던데.
그나 나나 그냥 그렇게 살다 죽어야지 별 수 있겠어요.
혹시 천당에서 만나도 각 방 쓰고.
그대신 살아 있는 동안
나는 거리에 나가면 아가씨들 다리 즐겁게 감상하고 다니고
박 목은 눈쌀 찌프리며 다니는 차이가 있겠지만.
세상이 그 분들 믿는대로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구원받고 죄 않짓고
거룩한 생활하고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고 세상 모든 문제에는 하나님이 역사 하심을 기다리고'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얼매나 좋갔습네까?
다국적기업 문제도 없고, 군산복합체 문제도 없고. 신자유주의도 없고, MD 체제도 없고,
아! 행복 하여라!
단순한 유치원 세계여!
2007.05.04 12:36:57
결국 지목사님도 참여를 하셨군요.
안들어 오신다 했는데
너무 기대들이 컸던 것 같습니다.
어차피 태생에 한계성을 가지는 것인데
반대편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일거라는 생각입니다.
거기서도 역시 이쪽을 그렇게 바라보겠지요.
그러나 저러나 천국도 요즘은 각방쓴답니까?
편해서 좋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좀 섭섭합니다.
거기서마나 보고 싶었던
아니 함께하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난 그분한테 카드와 고스톱을 좀 배워볼려구요.
근데 그 분이 늘 아타까움에 한숨섞인 소리로 내뱉던
유치원 수준의 신앙 모습이란 표현을 목사님께 다시 듣는군요.
한국에서 뵙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제 형편이 그래서 그랬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뵙겠지요.
안들어 오신다 했는데
너무 기대들이 컸던 것 같습니다.
어차피 태생에 한계성을 가지는 것인데
반대편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일거라는 생각입니다.
거기서도 역시 이쪽을 그렇게 바라보겠지요.
그러나 저러나 천국도 요즘은 각방쓴답니까?
편해서 좋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좀 섭섭합니다.
거기서마나 보고 싶었던
아니 함께하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난 그분한테 카드와 고스톱을 좀 배워볼려구요.
근데 그 분이 늘 아타까움에 한숨섞인 소리로 내뱉던
유치원 수준의 신앙 모습이란 표현을 목사님께 다시 듣는군요.
한국에서 뵙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제 형편이 그래서 그랬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뵙겠지요.
2007.05.04 12:49:46
시드니님 왜 이러십니까? 몇일전에도 무명재 님과도 글쓰는 태도에 대해서 치열하게 다툰적이 있습니다만 왜 그렇게 비아냥 거리는 투로 글을 쓰십니까? 목회활동에 대해서 영업이라 표현하신 진심은 무엇입니까? 박 목사님이 종교 장사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서로에 대해서 이런 언사들이 오고 간다면 이거 점점 곤란해집니다. 서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인정은 있어야 하는것 아닙니까? 미니스커트에 관한 내용도 다시 한번 들어보세요. 박 목사님이 어디에 포커스를 맞추고 이야기 하고 있는 가를 제대로 파악을 하고 나서 비판하십시오. 그렇게 지엽적인 내용 하나를 뽑아서 사람을 난도질하기 시작하면 다 병신됩니다. 오랫동안 박목사님 설교를 들어오고 있는 사람으로서 시드님께서 이야기하고 비아냥 거리는 그런 목적으로 미니스커트 입은 자녀를 혼내주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님께서도 그 의도를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이라고 해놓고서 이러시면 곤란하지요. 상대한 대한 진심과 의도를 충분히 파악하셨다면 이해하셔야 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마지막 부분에서는 보수 진영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신앙에 대해서 굉장히 비아냥 거리시는 태도를 보이는데요.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구원받고 죄 않짓고 거룩한 생활하고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고 하나님이 역사 하심을 기다리면서 살아가야만 되는 우리의 현실이 아무 고민없고 탄식도 없는 유치원 생활 처럼 단순한 삶 같아 보입니까? 아니요. 아주 치열합니다. 때로는 심장이 터져 나갈것 같은 고통이 우리들의 삶가운데도 여전히 상존합니다. 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현실을 묘사하면서 나열해 놓은 다국적 기업의 문제, 군산복합체 문제, 신자유주의 문제, 엠디 문제 등을 님께서 소속되어있고 함께하는 사람들만 고민하고 있는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치열하고 사유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보수진영에도 아주 많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아 행복하여라! 단순한 유치원 세계여! 라고 하는 식의 문구를 가지고 특정 사람들의 신앙의 수준과 고민을 비하는 일은 삼가해 주십시오. 기분이 굉장히 상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보수 진영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신앙에 대해서 굉장히 비아냥 거리시는 태도를 보이는데요.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구원받고 죄 않짓고 거룩한 생활하고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고 하나님이 역사 하심을 기다리면서 살아가야만 되는 우리의 현실이 아무 고민없고 탄식도 없는 유치원 생활 처럼 단순한 삶 같아 보입니까? 아니요. 아주 치열합니다. 때로는 심장이 터져 나갈것 같은 고통이 우리들의 삶가운데도 여전히 상존합니다. 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현실을 묘사하면서 나열해 놓은 다국적 기업의 문제, 군산복합체 문제, 신자유주의 문제, 엠디 문제 등을 님께서 소속되어있고 함께하는 사람들만 고민하고 있는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치열하고 사유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보수진영에도 아주 많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아 행복하여라! 단순한 유치원 세계여! 라고 하는 식의 문구를 가지고 특정 사람들의 신앙의 수준과 고민을 비하는 일은 삼가해 주십시오. 기분이 굉장히 상합니다.
2007.05.04 13:18:45
그리고, 영업이 뭐 나쁜건가요? 목사이기전에 명예도 얻고싶고 자녀교육도 잘시키고 싶은것...
다 인간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목사들이 위선을 벗고 솔직해질순 없는지.....
다 인간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목사들이 위선을 벗고 솔직해질순 없는지.....
2007.05.04 13:22:20
정정희 님 저도 일정 부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공간은 설교에 대한 비평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양쪽 진영의 사람들 그리고 중간자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곳 아닙니까? 그런데 상대방 진영 그것도 반론을 제기한 당사자를 향해서 "예수님을 빙자해서 영업한다" 이렇게 표현하면 그 다음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 전개되는것 아니겠습니까? 사석에서 그리고 속으로 그러한 마음과 의견을 가지고 있는것 하고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내 질러버리는 것 하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요. 그것도 제 삼자를 향해서 그런것도 아니고 그 당사자를 향해서 하는거라면 애시당초 카운트 파트로 인정도 못하겠다는 선언 아닌가요?
2007.05.04 13:28:30
저는 지목사님(시드니님) 글을 몇 번 읽어서 그런지, 대장님이 위 댓글을 너무 심각하게 읽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저같으면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첫 줄부터 씨익~ 웃기기 시작해서 (죄송합니다, 나쁜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도저히 대장님이 느끼신 것 같은 심각한 어조로는 읽어지지가 않던걸요.
2007.05.04 13:53:32
빈이 님의 의견 감사합니다. 지 목사님께서 표현하신 내용들을 읽어보면 나쁜의도나 심각한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업이란 표현을 비롯해서 유치원등등은 유쾌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가 다국적기업 문제등과 맞물려 나온것이지 않습니까? 유머스럽게 글을 적으셨지만 기분은 좋지 않네요.
2007.05.04 14:26:14
목사님이 종교활동을 장사한다고 표현하면 더 이상 할 말 없지요. 그것도 거대한 국제적 조직을 가지고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내적으로 솔직한 고백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말하면 간첩질하는 것이 됩니다. 보안법을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의도가 그런데 있지는 않을테지요. 하느님도 아니면서 하느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교만의 극치는 자신의 죄인된 실상을 깨닿기 위한 철저한 울부짖음인가요?
2007.05.04 14:39:35
저도 대장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올바른 비평은 상대방에게 열린사고를 갖게 해주는데 비해 단순한 비아냥거림은 닫힘마음만 갖게 해주니까요. 정용섭 목사님의 글은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비평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에 비해, 몇몇분들의 글들을 읽어보면 그냥 비아냥거림으로만 들리는 것 같아서 좀 씁쓸하긴 하네요.
2007.05.04 14:41:41
대장 님! 마음을 거슬렸다면 미안 합니다.
그러나 제 소신은 "유머가 없으면 말하지 않는다" 입니다.
비야냥이 아닙니다.
인테넷에서 저 자신도 골치아프고 논리가 치열한 글은 읽기싫습니다.
나는 해학과 풍자가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입니다.
'영업'이라는 말에 격앙하시는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수한 감정 부럽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확하게 목회가 '영업'이라는 말로 이해 합니다.
아니면 위선이지요.
저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심어준 개교회 주의의 영업을 솔직히 인정하고
최소한의 상도의는 지켜 나가는 목회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너의 불행은 나의 행복'인 한국교회의 현실을 꾸며서는 안됩니다.
회칠한 무덤이 될 수 있지요.
대장님은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목회 현장'의 분위기를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솔직 합시다.
유치원 이야기
유치원 생에게도 고민은 있습니다. 치열하게.
유치원생 다운 방법으로.
신앙의 유치원생들은 유치원 다운 방법으로 울고 불고 통성기도에 회개 자복에 몸부림치지요.
서울 시청 앞에까지 가서.
이건 진심입니다.
님의 눈에는 시청 앞 기독교 유치원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제 소신은 "유머가 없으면 말하지 않는다" 입니다.
비야냥이 아닙니다.
인테넷에서 저 자신도 골치아프고 논리가 치열한 글은 읽기싫습니다.
나는 해학과 풍자가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입니다.
'영업'이라는 말에 격앙하시는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수한 감정 부럽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확하게 목회가 '영업'이라는 말로 이해 합니다.
아니면 위선이지요.
저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심어준 개교회 주의의 영업을 솔직히 인정하고
최소한의 상도의는 지켜 나가는 목회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너의 불행은 나의 행복'인 한국교회의 현실을 꾸며서는 안됩니다.
회칠한 무덤이 될 수 있지요.
대장님은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목회 현장'의 분위기를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솔직 합시다.
유치원 이야기
유치원 생에게도 고민은 있습니다. 치열하게.
유치원생 다운 방법으로.
신앙의 유치원생들은 유치원 다운 방법으로 울고 불고 통성기도에 회개 자복에 몸부림치지요.
서울 시청 앞에까지 가서.
이건 진심입니다.
님의 눈에는 시청 앞 기독교 유치원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2007.05.04 14:48:04
*지 목사님[시드니 님]은
원래 글을 호탕하고 유머스럽게 쓰시는 분이시니,
이해들 하이소~
비난이라기보다는 그래도 기대를 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못내 좀 아쉽더라.
그래서, 험한 말을 좀 한다. 그리 이해들 하이소~
*저도 문외한으로 어줍짢은 관전평을 하면,
정 목사님과 박 목사님 두분 다
기독교 전통을 소중히 여기며 신앙의 정수를 지키려 하시는 정통주의자들(?)이신데,
한쪽은 지킴의 형식으로, 한쪽은 변화/열림/재해석의 형식으로
신학과 설교를 하시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사실 알고 보면, 두 기둥이 다 필요하겠지요.
원래 글을 호탕하고 유머스럽게 쓰시는 분이시니,
이해들 하이소~
비난이라기보다는 그래도 기대를 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못내 좀 아쉽더라.
그래서, 험한 말을 좀 한다. 그리 이해들 하이소~
*저도 문외한으로 어줍짢은 관전평을 하면,
정 목사님과 박 목사님 두분 다
기독교 전통을 소중히 여기며 신앙의 정수를 지키려 하시는 정통주의자들(?)이신데,
한쪽은 지킴의 형식으로, 한쪽은 변화/열림/재해석의 형식으로
신학과 설교를 하시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사실 알고 보면, 두 기둥이 다 필요하겠지요.
2007.05.04 15:08:27
한국교회가 시드니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유치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겠습니까?
시청 앞의 기독교 유치원도 보입니다. 유치원도 아니지요 유아원이지요. 그리고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는 수 많은 목사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그 분들 중에 나와 어떤 주제를 가지고 진지한 토론을 하고 있는 중이라면 그 분을 향해서 "당신 목회를 통해 영업하시는 분이지요" 이렇게 말하지는 않을겁니다. 그렇게 해버리면 상대방에서 이렇게 반격을 가해오겠지요 "니 죽을래" 이런식으로 흘러가면 정말 토론과 논의의 의도가 심각하게 왜곡되어지기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적어도 박영선 목사님이 목회를 통해서 영업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단정해버릴만한 요소도 없고요. 더욱이 박 목사님은 다른 대형교회 목사들이 시청앞에서 유치원을 열고 있을때 그 유치원에 대해서 격렬한 언어로 비판을 가하신분 입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제가 공부하고 파악한 박영선 목사님은 시드니 님께서 비판하고 계시는 그런 악질적인 목사들과 다른 내용을 지닌분이 틀림없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의견만은 절대 아닙니다. 보수진영에 속해 있으면서 공부를 진지하게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느끼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시드니의 지 목사님! 굳이 이런자리에서 그렇게 표현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한국교회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를 그런식으로 표현해서는 곤란하지요. 저 역시 지금 한국교회가 과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일까 하는 의구심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중의 한명입니다. 그러나 이런 공간에서는 서로 정해 놓지는 않았지만 지켜야 할 선과 도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 질러버리고 싶은 마음 많지만 자제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질문해 올리겠습니다. 시드님의 지 목사님! 목사님께서도 지금 목회를 통한 영업을 하고 계신가요? 다른 분들과는 다르게 상도를 지키면서 말입니다.
시청 앞의 기독교 유치원도 보입니다. 유치원도 아니지요 유아원이지요. 그리고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는 수 많은 목사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그 분들 중에 나와 어떤 주제를 가지고 진지한 토론을 하고 있는 중이라면 그 분을 향해서 "당신 목회를 통해 영업하시는 분이지요" 이렇게 말하지는 않을겁니다. 그렇게 해버리면 상대방에서 이렇게 반격을 가해오겠지요 "니 죽을래" 이런식으로 흘러가면 정말 토론과 논의의 의도가 심각하게 왜곡되어지기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적어도 박영선 목사님이 목회를 통해서 영업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단정해버릴만한 요소도 없고요. 더욱이 박 목사님은 다른 대형교회 목사들이 시청앞에서 유치원을 열고 있을때 그 유치원에 대해서 격렬한 언어로 비판을 가하신분 입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제가 공부하고 파악한 박영선 목사님은 시드니 님께서 비판하고 계시는 그런 악질적인 목사들과 다른 내용을 지닌분이 틀림없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의견만은 절대 아닙니다. 보수진영에 속해 있으면서 공부를 진지하게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느끼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시드니의 지 목사님! 굳이 이런자리에서 그렇게 표현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한국교회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를 그런식으로 표현해서는 곤란하지요. 저 역시 지금 한국교회가 과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일까 하는 의구심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중의 한명입니다. 그러나 이런 공간에서는 서로 정해 놓지는 않았지만 지켜야 할 선과 도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 질러버리고 싶은 마음 많지만 자제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질문해 올리겠습니다. 시드님의 지 목사님! 목사님께서도 지금 목회를 통한 영업을 하고 계신가요? 다른 분들과는 다르게 상도를 지키면서 말입니다.
2007.05.04 15:31:24
대장 님!
님은 박 목사님을 잘 아시고 좋은 영향을 많이 받으셨군요. 나는 그 분을 전혀 모릅니다. 다만 설교 잘 하는 큰 교회 목사님이라는 것 밖에는.
다만 본의 아니게 그분의 설교를 한 달 내내 들으면서 참 진심으로 열심히 하시는 데 '이건 아닌데 하는 것'을 여러번 느낀 것 밖에는 없습니다.
오래되어서 내용은 다 잊었지만 '미니 스커트'이야기가 기억나서 쓴 것 뿐입니다.
시청 앞에 모인 분들과 박 목사님과 어떻게 다른지 저는 몰랐습니다. 많이 다른가보군요.
신학적 지평에서는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 했습니다.
저는 제 삶을 통하여 영업의 원칙을 지키면서 살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습니다.
지금도 징그럽게 많은(정말 징그럽습니다) 이민 교회를 하지 않고 제 손으로 밥 벌어 먹고 살면서
목회적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낸 책 '뒤틀린 영성' 한번 보시면 이해애 도움이 되실줄 믿습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대장 님의 분기탱천한 그 모습이 정말 부럽습니다.
저도 한 때는 그렇게 순수했었습니다.
지금은 능구렁이가 다 됐지만.
님은 박 목사님을 잘 아시고 좋은 영향을 많이 받으셨군요. 나는 그 분을 전혀 모릅니다. 다만 설교 잘 하는 큰 교회 목사님이라는 것 밖에는.
다만 본의 아니게 그분의 설교를 한 달 내내 들으면서 참 진심으로 열심히 하시는 데 '이건 아닌데 하는 것'을 여러번 느낀 것 밖에는 없습니다.
오래되어서 내용은 다 잊었지만 '미니 스커트'이야기가 기억나서 쓴 것 뿐입니다.
시청 앞에 모인 분들과 박 목사님과 어떻게 다른지 저는 몰랐습니다. 많이 다른가보군요.
신학적 지평에서는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 했습니다.
저는 제 삶을 통하여 영업의 원칙을 지키면서 살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습니다.
지금도 징그럽게 많은(정말 징그럽습니다) 이민 교회를 하지 않고 제 손으로 밥 벌어 먹고 살면서
목회적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낸 책 '뒤틀린 영성' 한번 보시면 이해애 도움이 되실줄 믿습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대장 님의 분기탱천한 그 모습이 정말 부럽습니다.
저도 한 때는 그렇게 순수했었습니다.
지금은 능구렁이가 다 됐지만.
2007.05.04 16:19:14
목사님 감사합니다. 예 저는 박영선 목사님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목사입니다. 한 때 이 놈의 보수 진영에 속한 거의 모든 교회가 가짜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서 교회를 등지고 살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침례교라고 하는 성장배경 탓인지 때려 죽어도 저는 성경을 보수적인 관점에서 보는 길을 벗어나진 못하겠더라고요. 그 때 저의 탈출구요 해방구가 박영선 목사님이셨습니다. 이 보수진영에 속해 있으면서도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고 바르게 설교하고 목회할려는 분이 계셨구나 하는 사실이 저에게 참 많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 때 이후로 박목사님의 거의 모든 책과 테잎을 다 읽고, 듣고 살았지요. 사실 요즘에는 좀 약해지시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더욱이 박목사님의 성화론에 대해서는 저도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서 더욱 그러합니다. 최근 몇년 동안은 성화를 지나치게 강조하시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저는 성도에게 성화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나 전체적인 입장에서 보면 정말 보수진영에 이만한 분이 없지요. 사람됨도 진솔하시고 모르는 사람이 도움을 요청해도 다 들어주실 만큼 훌륭한 분이십니다. 태어나서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한번도 거절하신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 교회 부목사님들이나 신학생들의 말을 들어보면 인격이나 사람됨이 흠 잡을때가 없는 분이라고 하더라고요. 이쪽 진영에서 보면 참 귀하고 귀한 목사님입니다. 중심과 인격이 저와같은 후배들에게 귀한 영향을 끼칠만한 분이시지요. 사실 메세지도 많이 다릅니다. 시청 앞에 성도들을 동원하는 목사들들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정말 그렇습니다. 이것은 여러가지 자료들로 증명 가능한 사실입니다.
살아가시는 스타일이 저와 비슷하네요. 저도 제도권 교회에서 안수 받고 그 지긋지긋한 생활을 던져버리고 나 홀로 벌판으로 나왔습니다. 마치 손학규 지사처럼요.(비유가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학원에서 영어 가르치면서 먹고 삽니다. 주말에는 교회로 모이고요. 저는 순수하지 않는 구렁이입니다.
여하튼 저 보다 마음 넓은 목사님 만나게 되서 너무 좋네요. 평안하시고 또 만나지요.
살아가시는 스타일이 저와 비슷하네요. 저도 제도권 교회에서 안수 받고 그 지긋지긋한 생활을 던져버리고 나 홀로 벌판으로 나왔습니다. 마치 손학규 지사처럼요.(비유가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학원에서 영어 가르치면서 먹고 삽니다. 주말에는 교회로 모이고요. 저는 순수하지 않는 구렁이입니다.
여하튼 저 보다 마음 넓은 목사님 만나게 되서 너무 좋네요. 평안하시고 또 만나지요.
2007.05.04 16:20:10
이 번 계기로 존경할만한 어른 한 분을 알게 된 것 너무 큰 소득입니다... 대장 목사님의 진면목도 알게 되고... 하여튼 이래 저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007.05.04 21:14:15
저도 대장 목사님께 정중하게 다시 인사 올립니다~
위의 박영선 목사님의 글에 대한 저의 생각은 변함이 없사오나,
대장 목사님께 대한 결례는 깍듯이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서로의 생각과 관점이 다르므로 앞으로도 다툼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모두가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믿음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이기에,
분명, 좋은 길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아마도 제가 연하요 후배일텐데(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이 곳에서의 만남이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합니다^^
위의 박영선 목사님의 글에 대한 저의 생각은 변함이 없사오나,
대장 목사님께 대한 결례는 깍듯이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서로의 생각과 관점이 다르므로 앞으로도 다툼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모두가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믿음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이기에,
분명, 좋은 길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아마도 제가 연하요 후배일텐데(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이 곳에서의 만남이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합니다^^
2007.05.04 23:55:27
이런 모습이 한국교회의 희망인 거죠^^
이 처럼 진솔한 고민이 더해지면 비록 지금은 부족한 모습이 더욱 많으나
언젠가는 함께 생명을 나누며 호흡하는 아름다운 시간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대장님 무명재님 당신들의 외침이 소중합니다. 감사하구요...
삶의 언저리에서 몸부림치는 선배님들이 있어 행복합니다. 마지막 그날까지 지금의 모습을.....
이 처럼 진솔한 고민이 더해지면 비록 지금은 부족한 모습이 더욱 많으나
언젠가는 함께 생명을 나누며 호흡하는 아름다운 시간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대장님 무명재님 당신들의 외침이 소중합니다. 감사하구요...
삶의 언저리에서 몸부림치는 선배님들이 있어 행복합니다. 마지막 그날까지 지금의 모습을.....
2007.05.05 00:01:09
박영선 목사님으로 인해 서로에 대한 소중한 고민이 시작된 것 같아 감사를 드립니다.
정용섭,박영선 두분의 이름이 한국교회의 역사속에 아름답게 기억되기를 소망합니다.
생명의 긴장감이 지속되기를 .......
정용섭,박영선 두분의 이름이 한국교회의 역사속에 아름답게 기억되기를 소망합니다.
생명의 긴장감이 지속되기를 .......
2007.05.05 02:38:21
와 ~~~
다비아 역사에 이렇게 많은 댓글 봣시유^^
누구 좀 검색해서 조사할분 안계시남유^^
(죄송합니다ㅡ.ㅡ)
이제 빈의자가 정리할때가 된건가요^^
짝짝짝!!!!
또 혹시....
다비아 역사에 이렇게 많은 댓글 봣시유^^
누구 좀 검색해서 조사할분 안계시남유^^
(죄송합니다ㅡ.ㅡ)
이제 빈의자가 정리할때가 된건가요^^
짝짝짝!!!!
또 혹시....
2007.05.05 06:38:47
대장 목사님!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대장 목사님의 인품과 사유체계가 마음에 드는군요.
한국교회 안에서 '순수하지 않은 구렁이'의 역할이
빛나시길 기대해 봅니다.^^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대장 목사님의 인품과 사유체계가 마음에 드는군요.
한국교회 안에서 '순수하지 않은 구렁이'의 역할이
빛나시길 기대해 봅니다.^^
2007.05.05 19:25:25
무명재님이 나타나셔서 제가 앞서 약속한 대로 조금 끼겠습니다.
그렇다고 무명재님과 다시 토론을 해 보자는 의미는 아니고...
그동안 다비아에 들어와서 이곳에서는 어떤 생각을 펼치시는가 싶어 여기저기 글을 찾아 읽었습니다.
박영선 목사님의 글로 야기된 쟁점에 대해서 한 번 짚고 마무리지어도 지어야 할 것 같구요...
결국 초점은 축자영감과 이성주의로 모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논점을 좁혀서 가만히 살펴보면 이 두가지도 사실은 한 가지 문제인 듯싶습니다.
이 문제는 박영선 목사님의 글의 중심 주제이고 여기 논란의 핵심도 바로 그것이니 전면에 드러내고
한 번 이야기해 보자는 것입니다.
토론해 보자는 말이 심정적으로 거부감을 일으키면 그런 말은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는 이유는 여기 와서 느낀 점이 바로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들 생각하시는지
글들을 봐도 제게 명확하게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펼치면 창세기 첫 장부터 논란이 시작됩니다.
창조론부터 수없이 등장하는 이적들이 그 출발점이고, 그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기독교를 비이성적인 자폐 종교로 만들지 말자는 글을 봤는데 그런 반면 여기 등장하시는 분들이 다들 그렇게만 생각하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즉 무엇이 이성적이고 무엇이 비이성적인가 하는 문제에 혼동이 오는 것 같다는 거지요.
저쪽 사랑채에서 이 문제를 이야기해 보면서 느낀 것입니다. 서로 다른 개념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늘예랑님이 '합리주의를 노출된 신비주의로 본다'는 말씀에 동의한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뜻에도 나타나 있듯이 이 문제가 그렇게 단순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또 과학이야기를 하는 곳에 가 보니 창조과학에 대한 비아냥이 곳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정용섭 목사님의 신학단상에 보니 부활을 글자 그대로 믿지 않으시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고...
아직도 여기 글을 전부 보지 않은 제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여러 번 질문했지만 답이 없으니 제가 먼저 개념 정리를 하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성과 합리주의에 대해서 위에 언급한 늘예랑 님이나 저쪽 게시판의 NewYork님은 다른 의미로 사용하시지만 우선 상대성이론이나 양자론 또는 비유클리트기하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말하는 뉴튼식의 일상적인 이성과 합리주의로 국한하겠습니다.
이런 입장의 이성과 합리주의로는 성경의 창조와 이적들은 당연히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언설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 이면에 어떤 뜻이 있는가를 보자는 것이 인문학적인 성경 읽기의 핵심이라고 이해한다면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인지요. 우선 그것부터 알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처음 접한 여자들이 심히 놀라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무서움과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알려야 겠다고 달려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분명히 같은 사건을 말하는 것 같은데 왜 이런 오류(?)가 있는지는 저도 그 이상 말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을 글자 그대로 믿지 않겠다고 선언한다면 그건 불신앙이니까 아예 이런 주제를 가지고 시간 낭비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아닌 것 같고...
정용섭 목사님도 부활에 대해 쓰신 글을 보니 예수님이 몸으로 다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생각은 당연히 그 당시부터 있었던 것 같은데 누가복음 24:37절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靈)으로 생각했다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해 예수님은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고 하시며 손과 발을 만져 보게 하시고 생선 한 토막을 잡수셨습니다. 영(靈)이 아니라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고 이해한다면 결국 성경 말씀대로 하면 아직도 마음에 의심하는 것인데 그렇게 의심할 수밖에 없다면 뭔가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제가 묻고 싶은 것입니다. 혹 그것이 상대성이론이나 양자론 또는 비유클리트기하학을 모른다고 말하는 이성과 합리주의에 근거한 것인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 당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전해주는 기록을 글자그대로 믿지 못할 때는 그만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예수라는 청년이 유대 땅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그 기록의 진위를 누구나 의심하지 않습니다. 의심할 때는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하거든요. 성경에서 그 당시 있었던 일에 대해서 기록으로 남겨 주었다면 믿어야 합니다. 그렇데 믿지 못할 때는 그에 상응하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 근거가 무엇인지요?
요한복음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이 모여 있던 집안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문이 닫혔는데(요20:26)' 들어오셨습니다. 몰론 말도 안되는 일이지요. 암튼 스르르 벽을 똟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말이 안된다고 한다면 우리가 살고 세상은 과연 말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사람이 저 옥토끼가 사는 달에 간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미국에 있는 사람 말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런 이야기 계속하면 너무 유치하죠?)
그럼 조금 유식하게 격을 높여 말해서 양자론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중력가속기는 옥토끼 이야기와는 격에서 사뭇 다르지 않습니까?
양자론에서 물체는 어딘가에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근저를 이루는 미시세계에서는 명백하게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렇게 말하면 '말이 안된다'는 것인데, 그것을 양자론에서는 nonlocality라고 말합니다.
문밖에 서 계시던 예수님이 집안으로 들어오시려면 문이든 벽을 통과하든 중간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양자론에서는 A지점에서 B지점으로 그냥 갑니다. 프랑크상수만큼의 간격을 그냥 갑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를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말입니다...
문밖(A지점)에서 집안(B지점)으로 그냥 이동한 것이 그렇게 말이 안되는 일인가요?
미국에 있는 친구 목소리을 옆에서 이야기하듯 듣게 만든 핸드폰도 결국 양자론 덕분인데
우리는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데 아직 뉴튼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더 놀라운 일도 있습니다.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를 두고 스컬리와 드륄이 했던 실험에 의하면 시간적으로 뒤의 일이 시간적으로 앞선 일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양자론에서 아주 흥미로운 실험입니다.
곁길로 빠져서, 예수님과 열 명의 문둥병자 이야기를 해 보면...
어느 날 예수님 앞에 열 명의 문둥병자가 나타났습니다. 왜 나타났는지는 물어볼 것도 없이 문둥병이 낫기를 원해서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즉 문둥병이 나았으니 율법에 따라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찬송가처럼 '눈에는 아무 증거가 없습니다.'
그 뒤의 사건은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그 중 문둥병이 나은 한 명이 예수께 나아와 감사를 표했던 것을 알뿐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제대로 말도 못하고 그 앞을 떠난 문둥병자들은 아마도 논란이 많았겠지요. 우리가 이미 나았다는 것일까? 말도 안돼, 이 팔을 봐 여전하잖아, 사기꾼 아니야? 아니야 그래도 나앗길래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신 게 아닐까? 흥! 맘대로 해, 나는 관두겠어. 그 사기꾼을 믿었던 내가 바보천치지. 아니야 난 그래도 가 보겠어...
똑같이 예수님 앞에서 같은 말을 들은 사람 가운데 제사장에게 간 사람은 문둥병이 나았을 것입니다. 가지 않은 사람은 낫지 않았을 테구요. 이 사건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그 에피소드를 생각해 보면 프로세스가 그럴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문둥병이 나은 사람은 도대체 어느 시점에 나은 것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순간? 아니면 제사장 앞에서? 아니면 제사장 앞을 떠나 서서히 점진적으로? 위에 말한 찬송은 예수님 앞에서 이미 문둥병이 나았고 증거는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나게도 위에 언급한 양자론의 실험이 마치 이것을 설명해 주는 듯합니다.
스컬리와 드륄의 실험에 의하면 나중에 입자로 관측이 시도된 빛은 처음 출발부터 입자의 성질을 나타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빛은 파동의 성질을 갖습니다.
즉, 나중에 제사장 집에 간 문둥병자는 예수님 앞에서 이미 나은 사람입니다. 또 결국 제사장 집에 가지 않은 문둥병자는 처음부터 낫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것을 생각하면 박영선 목사님의 닫힌 종말론과 판넨베르크와 정용섭 목사님의 열린 종말론이 악수를 나눌 수도 있겠다는 힌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금이야 명백한 역사지만, 앗시리아가 근 2천년 동안 역사에서 사라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는 많은 사람들은 성경의 앗시리아(앗수르)에 대한 기록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앗시리아가 망한지 210년 후 그 폐허를 지나간 크세노폰은 [일만인의 퇴각]에서 그 폐허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일반인도 아닌 역사가인데 말이지요.
그리고 2400여 년이 지난 1845년 A.H.레이어드 경이 티그리스 상류에서 그 폐허를 다시 발견하고 그것이 사르곤(사20:1) 궁전임을 밝혀낼 때까지 앗시리아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비이성적이요 비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늘예랑님 말씀처럼 그것이 어느 순간 신비의 탈을 벗고 노출되면(발굴되면) 슬그머니 합리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크세노폰 이야기는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에서 예전에 본 것입니다.
우리가 비합리주의에서 합리주의에로 격론을 벌이며 이동하는 동안
성경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고...
이런 걸 생각하면 아주 재미있지 않습니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성경을 어떤 의미의 이성주의 또는 합리주의로 대하시는지요...
정말 궁금합니다.
무명재 님은 아직도 생각에 변함이 없다 하시는데 어떻게 다른지는 말씀해 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가능하면 그렇게 생각하시는 근거도?
그렇다고 무명재님과 다시 토론을 해 보자는 의미는 아니고...
그동안 다비아에 들어와서 이곳에서는 어떤 생각을 펼치시는가 싶어 여기저기 글을 찾아 읽었습니다.
박영선 목사님의 글로 야기된 쟁점에 대해서 한 번 짚고 마무리지어도 지어야 할 것 같구요...
결국 초점은 축자영감과 이성주의로 모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논점을 좁혀서 가만히 살펴보면 이 두가지도 사실은 한 가지 문제인 듯싶습니다.
이 문제는 박영선 목사님의 글의 중심 주제이고 여기 논란의 핵심도 바로 그것이니 전면에 드러내고
한 번 이야기해 보자는 것입니다.
토론해 보자는 말이 심정적으로 거부감을 일으키면 그런 말은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는 이유는 여기 와서 느낀 점이 바로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들 생각하시는지
글들을 봐도 제게 명확하게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펼치면 창세기 첫 장부터 논란이 시작됩니다.
창조론부터 수없이 등장하는 이적들이 그 출발점이고, 그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기독교를 비이성적인 자폐 종교로 만들지 말자는 글을 봤는데 그런 반면 여기 등장하시는 분들이 다들 그렇게만 생각하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즉 무엇이 이성적이고 무엇이 비이성적인가 하는 문제에 혼동이 오는 것 같다는 거지요.
저쪽 사랑채에서 이 문제를 이야기해 보면서 느낀 것입니다. 서로 다른 개념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늘예랑님이 '합리주의를 노출된 신비주의로 본다'는 말씀에 동의한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뜻에도 나타나 있듯이 이 문제가 그렇게 단순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또 과학이야기를 하는 곳에 가 보니 창조과학에 대한 비아냥이 곳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정용섭 목사님의 신학단상에 보니 부활을 글자 그대로 믿지 않으시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고...
아직도 여기 글을 전부 보지 않은 제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여러 번 질문했지만 답이 없으니 제가 먼저 개념 정리를 하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성과 합리주의에 대해서 위에 언급한 늘예랑 님이나 저쪽 게시판의 NewYork님은 다른 의미로 사용하시지만 우선 상대성이론이나 양자론 또는 비유클리트기하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말하는 뉴튼식의 일상적인 이성과 합리주의로 국한하겠습니다.
이런 입장의 이성과 합리주의로는 성경의 창조와 이적들은 당연히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언설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 이면에 어떤 뜻이 있는가를 보자는 것이 인문학적인 성경 읽기의 핵심이라고 이해한다면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인지요. 우선 그것부터 알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처음 접한 여자들이 심히 놀라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무서움과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알려야 겠다고 달려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분명히 같은 사건을 말하는 것 같은데 왜 이런 오류(?)가 있는지는 저도 그 이상 말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을 글자 그대로 믿지 않겠다고 선언한다면 그건 불신앙이니까 아예 이런 주제를 가지고 시간 낭비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아닌 것 같고...
정용섭 목사님도 부활에 대해 쓰신 글을 보니 예수님이 몸으로 다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생각은 당연히 그 당시부터 있었던 것 같은데 누가복음 24:37절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靈)으로 생각했다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해 예수님은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고 하시며 손과 발을 만져 보게 하시고 생선 한 토막을 잡수셨습니다. 영(靈)이 아니라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고 이해한다면 결국 성경 말씀대로 하면 아직도 마음에 의심하는 것인데 그렇게 의심할 수밖에 없다면 뭔가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제가 묻고 싶은 것입니다. 혹 그것이 상대성이론이나 양자론 또는 비유클리트기하학을 모른다고 말하는 이성과 합리주의에 근거한 것인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 당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전해주는 기록을 글자그대로 믿지 못할 때는 그만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예수라는 청년이 유대 땅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그 기록의 진위를 누구나 의심하지 않습니다. 의심할 때는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하거든요. 성경에서 그 당시 있었던 일에 대해서 기록으로 남겨 주었다면 믿어야 합니다. 그렇데 믿지 못할 때는 그에 상응하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 근거가 무엇인지요?
요한복음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이 모여 있던 집안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문이 닫혔는데(요20:26)' 들어오셨습니다. 몰론 말도 안되는 일이지요. 암튼 스르르 벽을 똟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말이 안된다고 한다면 우리가 살고 세상은 과연 말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사람이 저 옥토끼가 사는 달에 간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미국에 있는 사람 말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런 이야기 계속하면 너무 유치하죠?)
그럼 조금 유식하게 격을 높여 말해서 양자론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중력가속기는 옥토끼 이야기와는 격에서 사뭇 다르지 않습니까?
양자론에서 물체는 어딘가에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근저를 이루는 미시세계에서는 명백하게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렇게 말하면 '말이 안된다'는 것인데, 그것을 양자론에서는 nonlocality라고 말합니다.
문밖에 서 계시던 예수님이 집안으로 들어오시려면 문이든 벽을 통과하든 중간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양자론에서는 A지점에서 B지점으로 그냥 갑니다. 프랑크상수만큼의 간격을 그냥 갑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를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말입니다...
문밖(A지점)에서 집안(B지점)으로 그냥 이동한 것이 그렇게 말이 안되는 일인가요?
미국에 있는 친구 목소리을 옆에서 이야기하듯 듣게 만든 핸드폰도 결국 양자론 덕분인데
우리는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데 아직 뉴튼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더 놀라운 일도 있습니다.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를 두고 스컬리와 드륄이 했던 실험에 의하면 시간적으로 뒤의 일이 시간적으로 앞선 일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양자론에서 아주 흥미로운 실험입니다.
곁길로 빠져서, 예수님과 열 명의 문둥병자 이야기를 해 보면...
어느 날 예수님 앞에 열 명의 문둥병자가 나타났습니다. 왜 나타났는지는 물어볼 것도 없이 문둥병이 낫기를 원해서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즉 문둥병이 나았으니 율법에 따라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찬송가처럼 '눈에는 아무 증거가 없습니다.'
그 뒤의 사건은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그 중 문둥병이 나은 한 명이 예수께 나아와 감사를 표했던 것을 알뿐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제대로 말도 못하고 그 앞을 떠난 문둥병자들은 아마도 논란이 많았겠지요. 우리가 이미 나았다는 것일까? 말도 안돼, 이 팔을 봐 여전하잖아, 사기꾼 아니야? 아니야 그래도 나앗길래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신 게 아닐까? 흥! 맘대로 해, 나는 관두겠어. 그 사기꾼을 믿었던 내가 바보천치지. 아니야 난 그래도 가 보겠어...
똑같이 예수님 앞에서 같은 말을 들은 사람 가운데 제사장에게 간 사람은 문둥병이 나았을 것입니다. 가지 않은 사람은 낫지 않았을 테구요. 이 사건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그 에피소드를 생각해 보면 프로세스가 그럴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문둥병이 나은 사람은 도대체 어느 시점에 나은 것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순간? 아니면 제사장 앞에서? 아니면 제사장 앞을 떠나 서서히 점진적으로? 위에 말한 찬송은 예수님 앞에서 이미 문둥병이 나았고 증거는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나게도 위에 언급한 양자론의 실험이 마치 이것을 설명해 주는 듯합니다.
스컬리와 드륄의 실험에 의하면 나중에 입자로 관측이 시도된 빛은 처음 출발부터 입자의 성질을 나타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빛은 파동의 성질을 갖습니다.
즉, 나중에 제사장 집에 간 문둥병자는 예수님 앞에서 이미 나은 사람입니다. 또 결국 제사장 집에 가지 않은 문둥병자는 처음부터 낫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것을 생각하면 박영선 목사님의 닫힌 종말론과 판넨베르크와 정용섭 목사님의 열린 종말론이 악수를 나눌 수도 있겠다는 힌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금이야 명백한 역사지만, 앗시리아가 근 2천년 동안 역사에서 사라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는 많은 사람들은 성경의 앗시리아(앗수르)에 대한 기록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앗시리아가 망한지 210년 후 그 폐허를 지나간 크세노폰은 [일만인의 퇴각]에서 그 폐허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일반인도 아닌 역사가인데 말이지요.
그리고 2400여 년이 지난 1845년 A.H.레이어드 경이 티그리스 상류에서 그 폐허를 다시 발견하고 그것이 사르곤(사20:1) 궁전임을 밝혀낼 때까지 앗시리아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비이성적이요 비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늘예랑님 말씀처럼 그것이 어느 순간 신비의 탈을 벗고 노출되면(발굴되면) 슬그머니 합리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크세노폰 이야기는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에서 예전에 본 것입니다.
우리가 비합리주의에서 합리주의에로 격론을 벌이며 이동하는 동안
성경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고...
이런 걸 생각하면 아주 재미있지 않습니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성경을 어떤 의미의 이성주의 또는 합리주의로 대하시는지요...
정말 궁금합니다.
무명재 님은 아직도 생각에 변함이 없다 하시는데 어떻게 다른지는 말씀해 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가능하면 그렇게 생각하시는 근거도?
2007.05.05 18:25:15
이학전공하신 분이 진득한 습작으로 문인등단까지 하셨으니..,
이런 분 가벼이 상대하기에는 벅찰듯..^.^
신뢰 받는 분이 적정선에서 예우해 드리는 게..
'비평 위한 글쓰기 신드롬'에 젖어 있는 다비안에 참이슬 한 잔 권하고 싶은데..
한 잔 권한 김에 관전평 한마디.
'물.통' 신학(현재 Drew의 조직신학)으로 보면, 그놈이 그넘이고 그년이 그미다.
이런 분 가벼이 상대하기에는 벅찰듯..^.^
신뢰 받는 분이 적정선에서 예우해 드리는 게..
'비평 위한 글쓰기 신드롬'에 젖어 있는 다비안에 참이슬 한 잔 권하고 싶은데..
한 잔 권한 김에 관전평 한마디.
'물.통' 신학(현재 Drew의 조직신학)으로 보면, 그놈이 그넘이고 그년이 그미다.
2007.05.05 21:16:19
데미 님,
이 칸은 그만 진도 나가도 되는데
자꾸 꼬리를 이어가는 것 같아서
아무래도 한 말씀드려야겠군요.
대글을 잘 읽었습니다.
사유와 글쓰기 훈련이 되신 분들이 이렇게 참여해주시니
다비아가 훨씬 생기발랄해지는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마 데미 님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서로의 기본적 사유 틀이 소통되지 않으면 대화는 더디거나
제 자리에 머물거나, 막히거나 옆으로 새는 것 같습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위에서 데미 님이
제가 몸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지적하셨네요.
어디서 그걸 찾으셨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혼령적인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말한 적은 많지요.
문제는 몸이 무어냐 하는 겁니다.
성서에서도 몸을 소마, 또는 사르크스라고 구분하지요.
부활의 몸은 훨씬 더 심층적이랍니다.
그런데 데미 님은 무슨 몸을 생각하면서 그런 글을 쓰시는지요.
생물학적인 차원의 이 몸으로 부활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하잖아요.
제 설교에서 강조되었지만 부활은 소생이 아니라 변형이랍니다.
종말론적 부활생명으로의 변형입니다.
이 말을 설명하려면 '종말론'을 설명해야 합니다.
이런 게 서로의 대화를 더디게 하는 겁니다.
데미 님에게 종말론을 다시 설명할 수는 없잖아요.
나는 한번도 도구적 이성주의를 지지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데미 님은 그런 것처럼 강조하시네요.
더구나 이성과 계시는 서로 다른 지평의 개념이랍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이성적이냐, 계시론적이냐, 하고 대립 구도로 따지거든요.
지평이 다른 데 말입니다.
이성은 인간의 인식론적 지평이고,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론적 지평입니다.
이성과 믿음은 물론 같은 지평에서 논의가 가능합니다.
여기서도 무엇을 이성이라고 하는지,
믿음은 신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충분히 논의되어야 합니다.
도마에게 몸을 만져보라는 구절과 부활을 경험한 여자들에 관한 설구에 근거해서
성서를 문자대로 믿지 않으면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것 맞나요?
성서는 해석되지 않으면 죽은 문자로 남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이상한 현상으로 나타난 그 부활 경험의 실질이 무엇인지는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에요.
끝으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이성이냐, 계시냐
또는 과학이냐 종교냐
또는 합리냐 신비냐 등등,
이런 대립이 문제가 아니라
성서텍스트와 기독교 역사를 진리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행위이자
동시에 결단이고 참여랍니다.
저는 한번도 계시론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고,
몸의 부활을 전제하지 않은 적이 없고,
도구적 합리주의에 빠진 적이 없습니다.
오직 원초적 기독교 신앙 경험을 오늘 내가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해석하려는 것뿐입니다.
데미 님,
여기서 제 변명을 하려는 건 아니었고,
데미 님의 논리를 반박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이 논의는 여기서 접고
다른 논의로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끼어든 것 뿐입니다.
참고적으로,
박영선 목사님과의 테니스 시합은
양쪽의 시간이 맞이 않아서
6월로 넘겼습니다.
6월28일(목) 오전에 제가 남포교회로 가기로 했습니다.
한번 놀러오세요.
이 칸은 그만 진도 나가도 되는데
자꾸 꼬리를 이어가는 것 같아서
아무래도 한 말씀드려야겠군요.
대글을 잘 읽었습니다.
사유와 글쓰기 훈련이 되신 분들이 이렇게 참여해주시니
다비아가 훨씬 생기발랄해지는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마 데미 님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서로의 기본적 사유 틀이 소통되지 않으면 대화는 더디거나
제 자리에 머물거나, 막히거나 옆으로 새는 것 같습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위에서 데미 님이
제가 몸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지적하셨네요.
어디서 그걸 찾으셨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혼령적인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말한 적은 많지요.
문제는 몸이 무어냐 하는 겁니다.
성서에서도 몸을 소마, 또는 사르크스라고 구분하지요.
부활의 몸은 훨씬 더 심층적이랍니다.
그런데 데미 님은 무슨 몸을 생각하면서 그런 글을 쓰시는지요.
생물학적인 차원의 이 몸으로 부활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하잖아요.
제 설교에서 강조되었지만 부활은 소생이 아니라 변형이랍니다.
종말론적 부활생명으로의 변형입니다.
이 말을 설명하려면 '종말론'을 설명해야 합니다.
이런 게 서로의 대화를 더디게 하는 겁니다.
데미 님에게 종말론을 다시 설명할 수는 없잖아요.
나는 한번도 도구적 이성주의를 지지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데미 님은 그런 것처럼 강조하시네요.
더구나 이성과 계시는 서로 다른 지평의 개념이랍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이성적이냐, 계시론적이냐, 하고 대립 구도로 따지거든요.
지평이 다른 데 말입니다.
이성은 인간의 인식론적 지평이고,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론적 지평입니다.
이성과 믿음은 물론 같은 지평에서 논의가 가능합니다.
여기서도 무엇을 이성이라고 하는지,
믿음은 신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충분히 논의되어야 합니다.
도마에게 몸을 만져보라는 구절과 부활을 경험한 여자들에 관한 설구에 근거해서
성서를 문자대로 믿지 않으면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것 맞나요?
성서는 해석되지 않으면 죽은 문자로 남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이상한 현상으로 나타난 그 부활 경험의 실질이 무엇인지는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에요.
끝으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이성이냐, 계시냐
또는 과학이냐 종교냐
또는 합리냐 신비냐 등등,
이런 대립이 문제가 아니라
성서텍스트와 기독교 역사를 진리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행위이자
동시에 결단이고 참여랍니다.
저는 한번도 계시론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고,
몸의 부활을 전제하지 않은 적이 없고,
도구적 합리주의에 빠진 적이 없습니다.
오직 원초적 기독교 신앙 경험을 오늘 내가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해석하려는 것뿐입니다.
데미 님,
여기서 제 변명을 하려는 건 아니었고,
데미 님의 논리를 반박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이 논의는 여기서 접고
다른 논의로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끼어든 것 뿐입니다.
참고적으로,
박영선 목사님과의 테니스 시합은
양쪽의 시간이 맞이 않아서
6월로 넘겼습니다.
6월28일(목) 오전에 제가 남포교회로 가기로 했습니다.
한번 놀러오세요.
2007.05.07 09:51:34
정용섭 목사님,
송구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또 이렇게 댓글로나마 대면할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여기저기 글을 읽고 이해한 것이 부족할 수도 있고 오독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방식의 글쓰기가 사태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겠다는 토론 방법론을 적용시킨 것입니다. '아니 그게 아닌데..' 이렇게 이어지는 과정이 문제를 좀더 세밀하게 파악하는 방법이 되니까요. 댓글에서 과격하신 분들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쳐서 저도 다른 쪽으로 치우치는 모션을 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목사님이 친히 답을 하실 줄은 모르고...
저 사람이 배우는 과정으로 이런 방법론을 택했구나 하고 이해해 주십시오.
좀더 많은 글을 접하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배우겠습니다.
부활체에 대한 제 글은 정목사님 의 글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은 죽기 이전의 본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여 말한 것입니다. 100% 똑같은 것은 아님이 분명하지만 영(靈)은 아니고 생선을 잡수실 수 있는 즉 생물학적 차원을 포함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해석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딱 하나만 질문드려도 될까요...
도마에게 몸을 만져보라는 구절의 의미를 생물학적 차원이 아닌 것으로 해석하시나요?
도구적 이성주의에 대한 것도 설마하니 정 목사님께서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렇게 말하면 여기 댓글 토론에 참여하신 분들이 나서 교정을 하는 과정에서 보다 세밀하게 분간이 되리라는 계산을 했던 것입니다. 목사님이 자유주의자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나서시기 전에 누구 하나 지적하는 사람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암튼 목사님의 우려를 십분 이해하고 이제 토론은 접겠습니다.
저는 그냥 아무리 댓글이지만 난장판이 되는 건 좀 그렇다 싶어 끼어들게 된 것입니다.
저도 다비안으로 회원 가입했습니다. 적군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6월에 박목사님 만나시면 춘천 사는 성도교회 출신이 다비아에서 나대더라고 안부 전해주십시요.
목사님, 많이 배우겠습니다. 주안에서 평안하십시요.
송구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또 이렇게 댓글로나마 대면할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여기저기 글을 읽고 이해한 것이 부족할 수도 있고 오독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방식의 글쓰기가 사태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겠다는 토론 방법론을 적용시킨 것입니다. '아니 그게 아닌데..' 이렇게 이어지는 과정이 문제를 좀더 세밀하게 파악하는 방법이 되니까요. 댓글에서 과격하신 분들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쳐서 저도 다른 쪽으로 치우치는 모션을 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목사님이 친히 답을 하실 줄은 모르고...
저 사람이 배우는 과정으로 이런 방법론을 택했구나 하고 이해해 주십시오.
좀더 많은 글을 접하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배우겠습니다.
부활체에 대한 제 글은 정목사님 의 글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은 죽기 이전의 본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여 말한 것입니다. 100% 똑같은 것은 아님이 분명하지만 영(靈)은 아니고 생선을 잡수실 수 있는 즉 생물학적 차원을 포함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해석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딱 하나만 질문드려도 될까요...
도마에게 몸을 만져보라는 구절의 의미를 생물학적 차원이 아닌 것으로 해석하시나요?
도구적 이성주의에 대한 것도 설마하니 정 목사님께서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렇게 말하면 여기 댓글 토론에 참여하신 분들이 나서 교정을 하는 과정에서 보다 세밀하게 분간이 되리라는 계산을 했던 것입니다. 목사님이 자유주의자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나서시기 전에 누구 하나 지적하는 사람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암튼 목사님의 우려를 십분 이해하고 이제 토론은 접겠습니다.
저는 그냥 아무리 댓글이지만 난장판이 되는 건 좀 그렇다 싶어 끼어들게 된 것입니다.
저도 다비안으로 회원 가입했습니다. 적군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6월에 박목사님 만나시면 춘천 사는 성도교회 출신이 다비아에서 나대더라고 안부 전해주십시요.
목사님, 많이 배우겠습니다. 주안에서 평안하십시요.
2007.05.06 10:05:17
데미님의 좋은 글 잘 읽었으며 많은 도움 되었습니다.
부활체에 관한 문제의경우 저도 데미님 처럼
정용섭 목사님의 글들을 이해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글에는 뉘앙스라는것이
있는데 정목사님의 글이 약간의 오해의 소지를 가질 수 있는 느낌이 들때가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 입니다.
부활체에 간한 제 의견과 정용섭 목사님의 입장은 "죽은자의 부활과 오늘의 삶"
이라는 정목사님의 설교와 그 설교에 달릴 리플들 읽어 보시면 도움이 될듯 합니다
(벌써 읽으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부활체에 관한 문제의경우 저도 데미님 처럼
정용섭 목사님의 글들을 이해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글에는 뉘앙스라는것이
있는데 정목사님의 글이 약간의 오해의 소지를 가질 수 있는 느낌이 들때가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 입니다.
부활체에 간한 제 의견과 정용섭 목사님의 입장은 "죽은자의 부활과 오늘의 삶"
이라는 정목사님의 설교와 그 설교에 달릴 리플들 읽어 보시면 도움이 될듯 합니다
(벌써 읽으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2007.05.06 11:17:40
글 행간을 보면 박영선목사 반론글이 기상에 실리기까지의 과정이 엿보여 꽤 재밌다.
한자어‘고군부투’를‘나대더라’는 우리말로 고치며 안부전해 달라는 분의
‘선배를 위한 후배의 미션?!..,’어쨋거나 작가적 상상력은 즐거운 일이다.
각설하고!
복음주의 진영에 서 있는 두 분이 가끔씩은 네트 위 칼바람으로 서로의 뫔을 다잡아 가면서
치열하고 정직한 품격 있는 열린 토론(대화)을 진행해 가기를 기대한다.
두 분의 건강한 대화가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이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꼬여 있는 한국교회 영성의 축복이다.
후배 포프의 매서운 지적에 격분한 비트겐슈타인이 부지깽이 내동이치고 나갔던 행위조차
치열하고 정직한 토론으로 읽는 것은 나의 오독일까?
한자어‘고군부투’를‘나대더라’는 우리말로 고치며 안부전해 달라는 분의
‘선배를 위한 후배의 미션?!..,’어쨋거나 작가적 상상력은 즐거운 일이다.
각설하고!
복음주의 진영에 서 있는 두 분이 가끔씩은 네트 위 칼바람으로 서로의 뫔을 다잡아 가면서
치열하고 정직한 품격 있는 열린 토론(대화)을 진행해 가기를 기대한다.
두 분의 건강한 대화가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이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꼬여 있는 한국교회 영성의 축복이다.
후배 포프의 매서운 지적에 격분한 비트겐슈타인이 부지깽이 내동이치고 나갔던 행위조차
치열하고 정직한 토론으로 읽는 것은 나의 오독일까?
2007.05.06 12:00:43
비트겐슈타인은 왜 부지깽이를 휘둘렀을까? 책을 읽으신 것 같군요. 저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칼 포퍼의 지적에 비트겐슈타인이 부지깽이를 휘두르고 나간 이유가 그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회동이 치열하고 정직한 토론의 장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의 장면이죠. 책의 내용도 그러하고요.
포퍼가 지적한 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입장을 전향한 이후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용도폐기해버린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것이었기에 토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부지깽이를 내던진 뒤 나가 버린 것입니다. 치열하긴 하되 핀트를 잘못 집은 만남의 장으로 두 거장이 벌인 해프닝이었죠... 인용으로선 부적절하다고 생각되어 집니다만 stratosphere 님의 대승적 취지는 공감하는 바입니다...^^
칼 포퍼의 지적에 비트겐슈타인이 부지깽이를 휘두르고 나간 이유가 그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회동이 치열하고 정직한 토론의 장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의 장면이죠. 책의 내용도 그러하고요.
포퍼가 지적한 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입장을 전향한 이후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용도폐기해버린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것이었기에 토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부지깽이를 내던진 뒤 나가 버린 것입니다. 치열하긴 하되 핀트를 잘못 집은 만남의 장으로 두 거장이 벌인 해프닝이었죠... 인용으로선 부적절하다고 생각되어 집니다만 stratosphere 님의 대승적 취지는 공감하는 바입니다...^^
2007.05.06 12:46:16
님이 읽고 남긴 글품 속에 저의 비트겐슈타인 사람됨 알음이
지적하신 부적절한 인용의 모양새로나마 어렴풋 스며 있지요^.~
아무쪼록 님의 ‘다식’이 삶의 정황에서 ‘박학’되어,
널리 나눠 주기를 바랍니다.
배워서 남 주는 것 맞지요?
지적하신 부적절한 인용의 모양새로나마 어렴풋 스며 있지요^.~
아무쪼록 님의 ‘다식’이 삶의 정황에서 ‘박학’되어,
널리 나눠 주기를 바랍니다.
배워서 남 주는 것 맞지요?
2007.05.06 12:51:15
비트겐슈타인이 부지깽이를 들고 설친 사건의 실체가 궁금했는데
'볼'님께서 요약설명해 주시니 사건의 전말이 대충 눈에 그려지는군요.
볼테르님께 감사.
'볼'님께서 요약설명해 주시니 사건의 전말이 대충 눈에 그려지는군요.
볼테르님께 감사.
2007.05.07 14:17:54
여기 댓글이 더 이상 길어지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정 목사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이런 모순된 행동이라니~! '낙서금지'란 낙서처럼.^^)
하지만 위의 제 댓글에서 목사님께 드렸던 도마에 관련된 질문을 철회하려고 씁니다.
코람데오 님이 언급하신 정목사님의 '죽은자의 부활과 오늘의 삶'이란 설교를 찾아 읽었습니다.
충분히 공감하고 그 주제를 다루는 정 목사님의 태도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본문도 그렇고 특히 설교 밑에 정목사님이 다신 긴 댓글에서 말이죠.
그리고 코람데오 님이 다신 댓글에도 감명을 받고 공감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는 단백질차원(물질적)의 몸과 영적인 차원의 몸을 구분한
정용섭 목사님의 구분법은 자칫 위험하다는 생각입니다.
...(중략)...
부활한 예수의 몸은 우리인간의 손으로 만질수 있고, 또한 부활하지 않은 사람들과
대화도 할 수 있으며, 물고기도 먹을 수 있었다고 증언 하고 있습니다..."
정 목사님의 말씀은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히 그게 아닌데 그걸 들은 사람들이 '말 전하기 게임'처럼
나중에 엉뚱한 소리를 할 수도 있겠네요.
3차원 원기둥을 정확히 이해한 분이 '원기둥은 원이며 사각형이다' 라고 말하면
그걸 들은 2차원 사람들이 이때다 싶어 원이네 사각형이네 일대 혈투를 벌이듯이 말입니다.
우선 다비아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느끼겠습니다....
그리고 stratosphere 님, 제 글 관심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 썼다 수정한 것까지 보셨나요?^^
Voltaire 님, 저쪽 게시판의 토론이 약간 논점이 흐려지긴 했지만 쟁토방 같은데 자리를 잡고
서두르지 말고 끈기있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제가 쟁토방에 둥지를 틀께요.
그리고 참, 여기 게시판의 댓글을 카피해서 옮기신 것 같은데 어찌하셨죠?
여긴 안되도록 해 놓은 거 같은데... (프리실라님 도움으로 해결했슴~!)
댓글 수 늘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ㅎㅎ
(이런 모순된 행동이라니~! '낙서금지'란 낙서처럼.^^)
하지만 위의 제 댓글에서 목사님께 드렸던 도마에 관련된 질문을 철회하려고 씁니다.
코람데오 님이 언급하신 정목사님의 '죽은자의 부활과 오늘의 삶'이란 설교를 찾아 읽었습니다.
충분히 공감하고 그 주제를 다루는 정 목사님의 태도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본문도 그렇고 특히 설교 밑에 정목사님이 다신 긴 댓글에서 말이죠.
그리고 코람데오 님이 다신 댓글에도 감명을 받고 공감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는 단백질차원(물질적)의 몸과 영적인 차원의 몸을 구분한
정용섭 목사님의 구분법은 자칫 위험하다는 생각입니다.
...(중략)...
부활한 예수의 몸은 우리인간의 손으로 만질수 있고, 또한 부활하지 않은 사람들과
대화도 할 수 있으며, 물고기도 먹을 수 있었다고 증언 하고 있습니다..."
정 목사님의 말씀은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히 그게 아닌데 그걸 들은 사람들이 '말 전하기 게임'처럼
나중에 엉뚱한 소리를 할 수도 있겠네요.
3차원 원기둥을 정확히 이해한 분이 '원기둥은 원이며 사각형이다' 라고 말하면
그걸 들은 2차원 사람들이 이때다 싶어 원이네 사각형이네 일대 혈투를 벌이듯이 말입니다.
우선 다비아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느끼겠습니다....
그리고 stratosphere 님, 제 글 관심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 썼다 수정한 것까지 보셨나요?^^
Voltaire 님, 저쪽 게시판의 토론이 약간 논점이 흐려지긴 했지만 쟁토방 같은데 자리를 잡고
서두르지 말고 끈기있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제가 쟁토방에 둥지를 틀께요.
그리고 참, 여기 게시판의 댓글을 카피해서 옮기신 것 같은데 어찌하셨죠?
여긴 안되도록 해 놓은 거 같은데... (프리실라님 도움으로 해결했슴~!)
댓글 수 늘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ㅎㅎ
2007.05.06 17:18:59
예, 기다리겠습니다. 근데 벌써 두지랑님이 주제 하나를 꼭지 잡으셨네요...거기도 같이 동참해보심이...^^
(더이상 쓰다간 정목사님께 혼날 것 같아 튑니다 ^^;)
(더이상 쓰다간 정목사님께 혼날 것 같아 튑니다 ^^;)
2007.05.06 23:39:21
깊이있는 신학적 사유와 재치있는 위트, 진지한 고민, 순수한 신앙적 열정, 수준높은 글쓰기
모든 것이 마음에 듭니다.
무엇보다 함석헌 선생님이 한국민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셨던 부분..
깊이 파고들지를 못한다는...
그러나 이 넘치는 댓글들을 보신다면 이제는 어느 정도 안심을 하실 수 있지 않을런지...
학회나 세미나에 가보면 "그 나물에 그 밥"인데도 누구 하나 치열하게 물로 늘어지는 법이 없었는데...
차라리 그런 내용도 없는 부실한 세미나보다는 이 게시판이 더욱 의미있고 가치있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조금씩 상대방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만 있다면...금상첨화겠지요.
(물론 세련된 분들인지라 그런 노력들이 깃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많이 배우겠습니다. 샬롬!
모든 것이 마음에 듭니다.
무엇보다 함석헌 선생님이 한국민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셨던 부분..
깊이 파고들지를 못한다는...
그러나 이 넘치는 댓글들을 보신다면 이제는 어느 정도 안심을 하실 수 있지 않을런지...
학회나 세미나에 가보면 "그 나물에 그 밥"인데도 누구 하나 치열하게 물로 늘어지는 법이 없었는데...
차라리 그런 내용도 없는 부실한 세미나보다는 이 게시판이 더욱 의미있고 가치있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조금씩 상대방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만 있다면...금상첨화겠지요.
(물론 세련된 분들인지라 그런 노력들이 깃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많이 배우겠습니다. 샬롬!
2007.05.08 13:08:11
그냥 눈으로만 참여하다가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정목사님 박목사님 두 분 다 제가 존경하는 분들이고, 특히 박영선 목사님은 10년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저에게 아주 큰 영향력을 미치고 계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이 두분의 글을 마주 대할 수 있는 것도 영광인데, '대장'님 의 댓글들을 대하면서 저하고 같은 노선(?)인것 같아 외롭지가 않구요....^^거기다가 제 침례교 선배님이신것에 대해선 아주 무한한 영광을 느낍니다. '대장'님(아니 목사님!) 언제 시간되시면 만나서 많은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선한 영향력을 저에게 끼쳐주시고 많은 가르침 부탁 드립니다.
이곳에 들어오시는 많은 분들과 대우를 달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
열정만으로 안되고 열심만으로 안되는게 성경을 깨닫는 부분인데, 저의 생각과 신학적 소견들이 이 사이트를 통해 또다른 모습으로 투사되어 나타나는 것 같아 아주 흥겹고 즐겁습니다.
아주 많은 것 배우고 나갑니다. ....
정목사님 박목사님 두 분 다 제가 존경하는 분들이고, 특히 박영선 목사님은 10년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저에게 아주 큰 영향력을 미치고 계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이 두분의 글을 마주 대할 수 있는 것도 영광인데, '대장'님 의 댓글들을 대하면서 저하고 같은 노선(?)인것 같아 외롭지가 않구요....^^거기다가 제 침례교 선배님이신것에 대해선 아주 무한한 영광을 느낍니다. '대장'님(아니 목사님!) 언제 시간되시면 만나서 많은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선한 영향력을 저에게 끼쳐주시고 많은 가르침 부탁 드립니다.
이곳에 들어오시는 많은 분들과 대우를 달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
열정만으로 안되고 열심만으로 안되는게 성경을 깨닫는 부분인데, 저의 생각과 신학적 소견들이 이 사이트를 통해 또다른 모습으로 투사되어 나타나는 것 같아 아주 흥겹고 즐겁습니다.
아주 많은 것 배우고 나갑니다. ....
2007.05.09 22:24:28
마지막으로 한 마디...
겁도 없이 이 글은 프린트해서 읽어보겠다고, 프린트 한 순간 무려 88페이지.... 그렇지만, 열심히 읽고, 다시 한 번 많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토론에 있어서 감정의 역할, 상대방을 쉽게 판단 정죄할 수 있는 우리의 모습 아니 나의 모습, 토론의 성립을 위한 인내, 토론의 건강한 진행을 위한 입장배려... 앞으로 이런 성품적 특징을 많이 배우고, 이번 논쟁을 통해서, 저도 미국 콜로라도의 산골에 살고 있지만, 종종 참여해야 겠다는 마음이 들어 이렇게 흔적 남깁니다. 참고로, 굳이 저를 설명하라면, '보수'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미국 문화와 한국 문화를 줄타기 하는 1.5세로서 (금번 조승희 군 사건을 통하여 1.5세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넓어져 감사드립니다) 1세 목회를 헤매며 하고 있고, 성경과 신학을 조화하여 정말 잘 하고 싶은 그런 사람입니다. 종종 대화 참여 할 때 잘 보아주십시오. :)
겁도 없이 이 글은 프린트해서 읽어보겠다고, 프린트 한 순간 무려 88페이지.... 그렇지만, 열심히 읽고, 다시 한 번 많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토론에 있어서 감정의 역할, 상대방을 쉽게 판단 정죄할 수 있는 우리의 모습 아니 나의 모습, 토론의 성립을 위한 인내, 토론의 건강한 진행을 위한 입장배려... 앞으로 이런 성품적 특징을 많이 배우고, 이번 논쟁을 통해서, 저도 미국 콜로라도의 산골에 살고 있지만, 종종 참여해야 겠다는 마음이 들어 이렇게 흔적 남깁니다. 참고로, 굳이 저를 설명하라면, '보수'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미국 문화와 한국 문화를 줄타기 하는 1.5세로서 (금번 조승희 군 사건을 통하여 1.5세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넓어져 감사드립니다) 1세 목회를 헤매며 하고 있고, 성경과 신학을 조화하여 정말 잘 하고 싶은 그런 사람입니다. 종종 대화 참여 할 때 잘 보아주십시오. :)
2007.05.09 23:08:55
뉴라이프님! 안녕하세요?
미국에서 목회 하고 계시군요.
'성경과 신학을 조화하여 정말 잘 하고 싶으시다'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네요. 자주 오셔서 참여해 주세요.^^
미국에서 목회 하고 계시군요.
'성경과 신학을 조화하여 정말 잘 하고 싶으시다'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네요. 자주 오셔서 참여해 주세요.^^
2007.05.18 00:25:58
남포교회에서 사역하는 분에게 듣기로 교회에서 당구, 테니스, 탁구로 목사님 이기는 분이 없다고 하던데... 정말 기대가 되네요...^^; 당구 같은 경우 1000을 치신다고 하시던데...ㅋㅋ
2007.05.19 00:30:33
나쯔맨 님,
박영선 목사님의 테니스 실력에 대한 소문이 그렇게 파다하군요.
좋습니다.
6월28일이면 마지막 심판 때처럼
모든 게 드러납니다.
아자!!!!
박영선 목사님의 테니스 실력에 대한 소문이 그렇게 파다하군요.
좋습니다.
6월28일이면 마지막 심판 때처럼
모든 게 드러납니다.
아자!!!!
2007.05.21 18:41:44
제 수준으론 너무 어려워서 그저 결론이 어떻게 날까하고 있었는데 ... 다음에 더 많이 배울 기회가 있을것 같습니다. 근데 두 분 목사님의 테니스 결과는 이곳에 올려주시겠지요? 그게 젤 궁금합니다. ^*^"
2007.06.05 23:07:31
여기는 본문에 충실하기 보다 댓글에 충실하다는 느낌이 들고요, 인간의 죄성(?)이랄까요? 싸움구경하는 재미가 솔솔합니다. 사실 소위 말하는 한국의 보수 신앙, 보수신학이 전세계적으로 봤을때 신학적 majority가 아니라 minority라는 사실입니다. 학적인 얘기는 아니지만, 몇년전에 김요석 선교사님의 간증을 읽고 동영상으로도 보았는데요. 이분이 튀빙겐에서 15년동안 공부하면서 튀빙겐 교수들이나 학생들한테 꼴통 보수라고 놀림당하고 왕따당하고 했다네요. 그래도 꿋꿋이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학위도 받아왔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 신학교강단에서 가르치니 사람들이 자유주의라고 매도했답니다.
제가 볼때 정용섭 목사님의 신학적 입장은 자유주의자들이 보았을때 완전 꼴통 보수주의 입장이구요, 한국의 신학적 정서로 봤을때는 계몽주의요, 자유주의 비스무리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정치적으로도 유럽에서 보았을때 미국은 보수, 진보가 없이 모두다 보수이고,
한국도 마찬가지 우리 울타리 안에서는 보수니 진보니 치구박고 싸우지만 밖에서 내다봤을때는 다 보수라는 거지요. 결론은 정용섭 목사님도 칼바르트나, 존스토트나, 로이드존스나 뭐 다 같은 부류 아니냐? 이런의견을 피력하셨고, 뭐 장점이나 비슷한 점만 취한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한국에서 보수주의가 강한데서 신학을 하다보면 또 같지 않은 미세한 차이점들이 존재하겠지요..
김요석 선교사님이나 김진홍 목사님이 설교할적에 비슷한 뉘앙스를 풍긴 적이 있는데,
민중의 눈물가운데 거하시는 주님! 문둥병 환자들가운데 살아계신 주님!
그냥 글로 표현하면 그 뉘앙스를 잘 캐치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심지어 표현하는 단어하나조차
그 심상이나 느낌을 풍긴다는 것. 그것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패러다임이든 아니면 익숙한 삶의 양식이든...
차이는 존재하기 마련이나,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만이 객관적이시므로... 이러쿵 저러쿵 할 수 없겠지요..욥의 논쟁에서 보여지듯이... 하지만 제가 보기엔..
여기 댓글들 가운데의 논쟁의 대부분은 정서적인 문제이고, 논지나 논리, 이성의 잣대등 이런 문제는 아닌듯 싶습니다. 신앙의 정서가 다르다고 너무 매도하지 맙시다.
지난주에 학교에서 총신대 류응길교수와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세미나가 있었는데요.
아무튼 재미있었고 차이점이 무엇이고 동일점이 무엇인지 조금 알 수 있었구요.
공통적인 부분은 한국교회의 설교에 대한 진단..그리고 대안제시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점을 보인 것 말구는
크게 다른 점도 없었을 뿐 아니라, 배우는 내용에 있어서도 판넨베르크니 현대신학에 대해서 배우긴 하지만
크게 관심있는 부분은 아니라서 열심히 공부하진 않지만, 신학공부도 꾸준히 해야 뭐 대화라도 되겠다 싶네요
대학교 1학년때 신학이 뭔지도 모르면서 현대신학에 대해 심취해서 이책 저책 읽고 칼로 논리로 막 난도질하고 다니곤 했는데요.. 뭐 그런거에 목숨 건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것 같네요... 주저리 주저리 논지도 없고
그냥 알아서 해석하시고 알아서 들으시면 좋을 듯..
아무튼... 재밌게 잘 봤습니다.
제가 볼때 정용섭 목사님의 신학적 입장은 자유주의자들이 보았을때 완전 꼴통 보수주의 입장이구요, 한국의 신학적 정서로 봤을때는 계몽주의요, 자유주의 비스무리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정치적으로도 유럽에서 보았을때 미국은 보수, 진보가 없이 모두다 보수이고,
한국도 마찬가지 우리 울타리 안에서는 보수니 진보니 치구박고 싸우지만 밖에서 내다봤을때는 다 보수라는 거지요. 결론은 정용섭 목사님도 칼바르트나, 존스토트나, 로이드존스나 뭐 다 같은 부류 아니냐? 이런의견을 피력하셨고, 뭐 장점이나 비슷한 점만 취한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한국에서 보수주의가 강한데서 신학을 하다보면 또 같지 않은 미세한 차이점들이 존재하겠지요..
김요석 선교사님이나 김진홍 목사님이 설교할적에 비슷한 뉘앙스를 풍긴 적이 있는데,
민중의 눈물가운데 거하시는 주님! 문둥병 환자들가운데 살아계신 주님!
그냥 글로 표현하면 그 뉘앙스를 잘 캐치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심지어 표현하는 단어하나조차
그 심상이나 느낌을 풍긴다는 것. 그것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패러다임이든 아니면 익숙한 삶의 양식이든...
차이는 존재하기 마련이나,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만이 객관적이시므로... 이러쿵 저러쿵 할 수 없겠지요..욥의 논쟁에서 보여지듯이... 하지만 제가 보기엔..
여기 댓글들 가운데의 논쟁의 대부분은 정서적인 문제이고, 논지나 논리, 이성의 잣대등 이런 문제는 아닌듯 싶습니다. 신앙의 정서가 다르다고 너무 매도하지 맙시다.
지난주에 학교에서 총신대 류응길교수와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세미나가 있었는데요.
아무튼 재미있었고 차이점이 무엇이고 동일점이 무엇인지 조금 알 수 있었구요.
공통적인 부분은 한국교회의 설교에 대한 진단..그리고 대안제시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점을 보인 것 말구는
크게 다른 점도 없었을 뿐 아니라, 배우는 내용에 있어서도 판넨베르크니 현대신학에 대해서 배우긴 하지만
크게 관심있는 부분은 아니라서 열심히 공부하진 않지만, 신학공부도 꾸준히 해야 뭐 대화라도 되겠다 싶네요
대학교 1학년때 신학이 뭔지도 모르면서 현대신학에 대해 심취해서 이책 저책 읽고 칼로 논리로 막 난도질하고 다니곤 했는데요.. 뭐 그런거에 목숨 건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것 같네요... 주저리 주저리 논지도 없고
그냥 알아서 해석하시고 알아서 들으시면 좋을 듯..
아무튼... 재밌게 잘 봤습니다.
2007.06.06 14:35:20
오랜 만에 이 꼭지에 들어와 봅니다.
어디나 차이가 있게 마련이고 Jordan 님 말씀처럼 서로 차이를 가지고 으르렁 거려도 다른 사람이 볼 때
큰 차이가 없는 문제로 의견이 갈라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 꼭지의 토론에서 나타난 설왕설래는 근본적인 어떤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이 근본적인 문제에서 서로 갈라집니다.
'역사적인 예수'와 그에 근거한 구원이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입니다.
결국 있다면 이런 논쟁은 민감한 주제요 개인적으로 결론이 나야 하는 중요한 주제지만,
어차피 없다면 주저리주저리 이런 말이든 저런 말이든 상관이 없는,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Jordan 님은 이미 없다는 쪽으로 기우신 것 같군요...
이 문제가 흑백논리로 처리될 문제가 아니라는 견해 또한 만만찮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을 읽고 자칭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이라면 '역사적 예수'를 부인하더라도
구원이 없다는 말에 쉽사리 동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택은 당연하게도 '날이 갈수록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게' 된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그게 당연한 것이,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기려는 내적 갈등이 만만찮기 때문입니다.
어디나 차이가 있게 마련이고 Jordan 님 말씀처럼 서로 차이를 가지고 으르렁 거려도 다른 사람이 볼 때
큰 차이가 없는 문제로 의견이 갈라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 꼭지의 토론에서 나타난 설왕설래는 근본적인 어떤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이 근본적인 문제에서 서로 갈라집니다.
'역사적인 예수'와 그에 근거한 구원이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입니다.
결국 있다면 이런 논쟁은 민감한 주제요 개인적으로 결론이 나야 하는 중요한 주제지만,
어차피 없다면 주저리주저리 이런 말이든 저런 말이든 상관이 없는,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Jordan 님은 이미 없다는 쪽으로 기우신 것 같군요...
이 문제가 흑백논리로 처리될 문제가 아니라는 견해 또한 만만찮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을 읽고 자칭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이라면 '역사적 예수'를 부인하더라도
구원이 없다는 말에 쉽사리 동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택은 당연하게도 '날이 갈수록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게' 된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그게 당연한 것이,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기려는 내적 갈등이 만만찮기 때문입니다.
2007.06.06 19:38:56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저는 골수 고신파이구요. 지난주에 정용섭목사님이 저희 학교에 왔드랬습니다. 제가 이제껏 배워왔고 믿고 있는 기본 진리에 대한 ... 딱집어서 이야기 한다면 성경관이 다르더랬습니다. 진보쪽에서 보면 축자영감설이니, 유기적영감설이니.. 현대의 진보한 신학적 검증을 받아들이지 않고 전통 전통하는 이전의 것에만 매여있는 보수신학이 고리타분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저는 제가 배우고 믿고 있는 바를 옳다고 여기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짜피 관점이 다른이상, 같은 용어를 쓰고 같은 문제 제기를 한다고 해도 이미 그 용어에 대한 정의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합일점은 찾기 힘들구요. 논쟁은 끝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논쟁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저는 이렇든 저렇든 결론은 나지 않으니까 어짜피 한쪽이 옳다고 해서 기존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체계나 신념을 포기할 사람은 없기 때문에, 그게 그거다 라는 뉘앙스로 표현한 겁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더 진보적인 사람들이 보았을때는 이것은 아무런 차이도 아닌 것 가지고 차이가 난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정용섭 목사님은 자신이 직접 자신은 칼바르트의 성경관을 따른다고 했습니다. 진보적인 신학노선에서는 칼바르트가 칼빈의 개혁주의 사상을 그대로 전수했다고 여기고요. 우리같은 비주류에서는 칼바르트의 시도는 타당하나 자유주의 신학이 보수주의로 들어오게 만든 관문 역할을 했다고 배웁니다. 물론 칼바르트의 장점이 많지만 그의 성경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자유주의자들도 역사적 예수를 인정하든 안하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 예수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이 진리다. 뭐 이런식으로 이야기 하지만 데미님 말대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게 된다라는 사실앞에서 과연 그것이 옳으냐 타당하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저는 불가지론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좋은 것이 좋은것이다. 그게 그거다 라고 이야기 한것이 아니고,
어떤 신학논쟁의 끝이 없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것입니다. 아직도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의 예정론도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결론이 안났는데, 이런 신학논쟁은 시간낭비요 정력낭비요 또한 구원의 확신과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는데 연약한 자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보았을때는 아마 교회 교인들끼리 자기들끼리 싸우고 볶고 난리친다라고 받아들일겁니다.
이단논쟁도 그렇구요. 그렇지만 어느정도의 균형이랄까. 동일점을 찾고,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공동이해. 이런 부분. 난제점을 깊이 파기보다는 알고있는것, 더 확실히해야 할 부분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사실상 그것만 확고히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진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 주저리 주저리 말이 길었네요.
제 생각이나 데미님 생각이나 같은 것 같은데, 제가 표현력이 부족해서 약간 오해하신듯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물론 자유주의자들도 역사적 예수를 인정하든 안하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 예수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이 진리다. 뭐 이런식으로 이야기 하지만 데미님 말대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게 된다라는 사실앞에서 과연 그것이 옳으냐 타당하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저는 불가지론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좋은 것이 좋은것이다. 그게 그거다 라고 이야기 한것이 아니고,
어떤 신학논쟁의 끝이 없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것입니다. 아직도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의 예정론도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결론이 안났는데, 이런 신학논쟁은 시간낭비요 정력낭비요 또한 구원의 확신과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는데 연약한 자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보았을때는 아마 교회 교인들끼리 자기들끼리 싸우고 볶고 난리친다라고 받아들일겁니다.
이단논쟁도 그렇구요. 그렇지만 어느정도의 균형이랄까. 동일점을 찾고,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공동이해. 이런 부분. 난제점을 깊이 파기보다는 알고있는것, 더 확실히해야 할 부분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사실상 그것만 확고히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진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 주저리 주저리 말이 길었네요.
제 생각이나 데미님 생각이나 같은 것 같은데, 제가 표현력이 부족해서 약간 오해하신듯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2007.06.06 21:20:40
Jordan 님, 님의 댓글을 제가 조금 오해했었나 봅니다.
여기 댓글 토론에 참여하면서 님이 지적하신 점 저도 십분 느끼고 있었습니다.
암튼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기 댓글 토론에 참여하면서 님이 지적하신 점 저도 십분 느끼고 있었습니다.
암튼 만나서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