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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와 신학
- 정용섭 교수의 《설교비평》에 대한 신학적 단상-
정용섭 교수의 설교비평에는 한국 교회가 귀담아들어야 할 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요즘의 설교가 인간적 욕망을 부추기고 자극하며, 복음을 인간의 필요나 채워주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정 교수께서는 한국 교회에서 지금 복음이 설교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설교를 통해 기독교의 본질이 제대로 전달되며 설명되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문제 제기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바로 여기에서 정 교수의 설교비평과 관련하여 더 생각해 보아야할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설교를 통해 복음, 혹은 기독교의 본질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느냐 하는 물음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이 무엇이며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공통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 교수의 설교비평에 납득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신앙은 무엇이며 신학적 과제란 무엇인가에 대해 같은 입장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정 교수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만일 기독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면, 정 교수의 설교비평에 우리가 아무리 많이 공감하고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상 피상적인 수준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신학 전통
그간의 설교비평을 읽으면서 정 교수께서 갖고 계신 신앙과 신학에 대한 이해가 어떤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정 교수께서는 설교비평을 할 때 자주, 이런 설교자들이 있는 줄 여태까지 잘 몰랐으며, 그래서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그 설교자들을 대한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제게는 익숙한 설교자들을 정 교수께서는 처음 대하시는 걸 보면, 정 교수와 저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아마도 이런 형편은 그동안 한국 교회를 크게 양분(兩分)해온 신학적 전통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 교수의 설교비평을 통해서 신앙과 신학에 대한, 저와는 다른 입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 교수의 설교에 대한 비평에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도, 정 교수와 저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정 교수께서 기독교에 대한 바른 이해 ―많은 설교들에서 설명되는 것과는 대비되는― 라고 제시하는 입장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따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 발견한 것은 정 교수와 제가 어떤 설교를 대하여 거기에서 같은 문제점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같은 기준에 입각해 발견된 것은 아닐 수 있겠다는 점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정 교수와 저는 실상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차차 얘기되겠지만, 제게 있어서, 신학은 그 무게를 ‘신’(神)께 두고 신께서 의지적으로 보여주시는 계시만을 그 원리로 삼고 있다면, 정 교수께서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는 이른바 ‘학문’에 무게중심을 두고 신학을 해나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제가 인간의 근본적 특성을 죄인 됨에서 찾는다고 한다면, 정 교수께서는 인간에게 보다 적극적 의미에서의 가능성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대비점들은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라고 할 수 있는 복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정 교수와 저 사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빚어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신학적 차이가 설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차이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교비평 작업에서 정 교수께서는 기독교에 대한 다른 이해를 가진 설교자들을 정 교수의 신학이해에 따라 평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만일 실제로 정 교수의 설교비평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설교비평은 원래의 의도하던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관점과 기준을 가지고 다른 관점과 기준을 가진 사람의 행동을 평가한다면, 그 사람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의 평가는 단지 오해만을 불러올 뿐입니다. 먼저 기독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 공통된 기반이 마련되어야 비로소 설교의 목적과 내용에 대해서도 동의가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전제가 있어야 실질적으로 유익한 설교비평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복음에 대한 이해라든가 신학에 대한 이해에 있어 정 교수와 저 사이의 차이점을 검토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정 교수의 신학적 입장을 살펴보면서 크게 의문이 든 것은 두 가지 문제에서였습니다. 첫째는 신학적 인식론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고, 둘째는 여러 신학적 문제들과 직결되는 인간에 대한 이해에 관한 문제입니다.
판넨베르크 신학
정 교수의 신학을 살펴보기 위해 저는 먼저 판넨베르크 신학에 대해 살펴보아야 했습니다. 나중에 더 분명히 발견한 사실이지만, 정 교수께서 제시하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판넨베르크의 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판넨베르크의 계시론에 대해 책을 쓰시기도 했고(정용섭,《말씀신학과 역사신학― 판넨베르크의 계시론을 중심으로》), 《신학과 철학》, 《조직신학》과 설교집들을 비롯한, 판넨베르크의 여러 책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저는 판넨베르크 신학의 특징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그의 신학의 특징으로 크게 두 가지가 지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학의 두 가지 특징은 제가 정 교수와의 차이점으로 확인한 두 가지 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판넨베르크 신학의 독창적 개념은 ‘보편사’와 ‘미래성’이라고 합니다. 보편사 개념을 통해 신학은 역사와 연결되며, 미래성 개념을 통해 신학은 종말론적 특징을 지니게 됩니다.
첫째 특징은 역사 전체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보는 ‘보편사’ 개념입니다. 판넨베르크는 기독교 진리의 보편적 타당성을 합리적으로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신학이 보편사의 지평 안에서 통용되는 합리성이라는 기준에 합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강조는 신학을 계시에 매이지 않게 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판넨베르크는 “바르트가 강조하는 것처럼 신학이 계시라는 폐쇄되고 권위주의적인 개념에만 매달리게 될 때 신학은 보편성을 결여한 초라한 특수 학문이 되어 버리고 만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김영한, ‘볼파르트 판넨베르그’,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 196쪽). 그는 신학이 보편성을 띤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배타적인 계시와의 관련성을 끊어야 한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정 교수도 이런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말씀의 신학을 극복하여 전체 역사 가운데서 신학의 보편성을 찾고자 한다”(정용섭, 《말씀신학과 역사신학》, 148쪽).
둘째는 미래를 강조하는 종말론적 신학의 특성입니다. 판넨베르크는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과거와 현재를 결정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미래의 존재론적 우위성”입니다. 미래는 현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힘이라는 의미에서 창조적 성격을 띱니다. 결과적으로, 세계는 불변적으로 지속되는 질서가 아니라 열린 과정으로 파악됩니다. 현재를 결정하는 것은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열린 미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특징들은 정 교수께서 “인문학적 성서 읽기”를 강조하는 것과, 또 과거보다는 미래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하튼 판넨베르크 신학이 다음과 같이 요약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이성은 신앙의 적이 아니라 친구이며, 교회 전체의 삶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구속사 대신에 보편사, 맹목적 신앙보다는 이성적 통찰, 개인적 결단보다는 역사적 전승을 강조한다. 그는 기독교 진리의 합리성을 위하여 이성의 비판을 강조하는 이성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김영한, ‘볼파르트 판넨베르크’,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 217쪽)
이와 같은 특징은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제가 배워온 신학과 어떻게 다른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첫째, 제가 배운 바로는, 신학적 작업은 계시에 의존해서 이루어집니다. 신학의 계시 의존성이란, 신앙의 내용과 신학적 물음이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계시와, 인간 역사 속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초월적 하나님과 관계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철학이 신학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도 인정됩니다. 인식하는 이성의 유한성과 제한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패커의 다음과 같은 의문에 공감합니다. “나는 조직신학의 주제를 하나님에 관해 계시된 진리로 개념화 시키는 일이 적절한지 의문이 간다. … 이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과 진정한 하나님을 아는 것 사이를 이간시키는 것이다”(J. I. Packer,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Spirituality, pp. 2, 8.).
둘째, 역사, 더 구체적으로 ‘미래’에 대해서도 저는 다르게 이해합니다. 역사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셨으며, 미래, 곧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성취된다고 생각합니다. 판넨베르크가 역사를 “열린 과정”이라고 말한다면, 제가 배운 신학은 역사는 하나님의 뜻하심에 따라 정해져 있다고 여깁니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한 통치를 계속하시며 결국에는 당신께서 정하신 바대로 역사의 목적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즉 신(神)이라는 존재가 인격적이고 전능하다면 정당한 목표와 그것을 이룰 능력과 신실함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역사를 보며 신앙인이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선하신 분이시라는 점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분의 통치 아래에서 실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과 씨름을 벌이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사상들과의 씨름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과의 씨름 말이다”(알리스터 맥그래스,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 88쪽).
신학적 인식론
이제 정 교수의 신학에 대해 몇 가지 점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먼저 제가 정 교수의 신학적 이해에 관해 갖게 되는 의문은 계시와 관련된 것입니다. 계시에 대한 이해는 신학적 인식론의 문제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신학이 하나님에 대한 논의라고 하면, 대체 하나님에 대해 우리 인간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전통적인 답변은 인간은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일 것입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는 종교라는 점을 전제할 때, ‘계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은 이후 모든 신학적 논의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어떤 경로로 우리에게 도달하는지에 대해 정 교수께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계는 곧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에 접근하는 길이다. 이런 방식 말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도달하겠는가? 진리에 도달해 보려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사실 이런 인식론적 근거에서 이루어진다. (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192쪽)
앞서 살펴본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에 대한 강조와 맥을 같이하는 설명으로 보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하나님의 계시란 세계를 통해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의 창조자이시므로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며, 우리는 이에 주목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앎은 “하나님 스스로 자기의 본질을 노출하는 것에 대한 ‘자연적 앎’의 문제”라고 덧붙여 설명됩니다(정용섭, 《말씀신학과 역사신학》, 192쪽). 인간이 자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설명을 따라가면서, 정 교수의 계시 이해가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로 여기는 기독교의 전통적 이해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 교수의 이 같은 입장에는 이성적 판단에 따라 성경을 역사적 주관적 신앙고백 문서로만 받아들이려고 한 계몽주의 이후 학문의 결론이 그대로 전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저는 성경이야말로 계시의 외적 인식원리라는 전통적 입장을 따릅니다(Louis Berkhof,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 96.). 성경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 주신 특별한 계시라고 이해합니다. 성경에 담긴 내용이, 인간 쪽의 반응이 있기 전에, 인간에게 나타나시고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책이며, 인간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물론 저도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고 있으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이 그의 창조세계에 분명히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롬1:20).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중단하실 수 없으며, 그분이 지으신 세계를 그분의 역사로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계시만으로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큰 장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과 분리되었다고 천명합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져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눈이 멀어져, 해가 빛나고 있는데도 보지 못합니다. 따라서 세계만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기란 더더욱 어려워진 것입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둘 때, 하나님 편에서 온 보다 명확한 계시의 필요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왜 정 교수께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주신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근대성에 대한 요즘의 연구들이 보여주듯, 인간 이성을 최종적 판단자로 여긴 계몽주의적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경이 객관적 계시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합리적 인식론에 따른 결과입니다. 합리적 인식론이란 결국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판단되어 수용될 수 있는 것만 진리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성은 인간 고유의 인식 수단일 뿐, 진리의 원천이나 진리 판별의 절대적 기준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성에게 궁극적 판단 규범의 자리를 허락한 근대의 과학적 방법도 역시 진리를 찾아내는 유일하거나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서 레슬리 뉴비긴의 논평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성과 계시의 역할에 관한 논쟁에서의 문제점은 어떻게 경험된 자료를 이해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건들을 과연 전적으로 지금 세속적인 역사 기술에서 사용하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심리학적인 범주를 가지고 이해해야 하는가의 논쟁과, 이런 범주들의 유용성이나 적절함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이 이야기를 상술된 모든 사건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개인적인 의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인정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들이다. 이성은 사물의 진상에 관한 독자적인 정보의 출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 활동의 한 단면이다. 이성과 계시에 관한 오랜 논쟁에서 나타난 두 가지의 차이점은 각기 다른 정보의 출처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사회에서의 복음》, 29-30쪽)
인간이 이성적 판단을 근거로 성경을 계시로 인정하길 거부한 것은 이성의 역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성의 판단을 근거로 하여 계시의 진리성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신적 진리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정 교수께서는 초월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계시를 주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크게 생각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지적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요?
한편, 만일 하나님께서 의지를 갖고 우리에게 계시를 주신다면, 그 계시는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해 구속력을 띠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정 교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과학은 과학이다. 진화론은 과학적 현상적으로 진리일 뿐이고 기독교 신앙은 다른 지평에서 영적인 진리를 말한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지 독단론에 빠지지 말고 서로가 진리의 지평을 넓혀 가면 충분하다. (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215쪽)
정 교수께서는 신앙과 과학의 영역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과학과는 다른 지평의 영적 진리와만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칸트 이후의 계몽주의적 사고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고백이라는 생각 자체가 외부적인 객관적 기준틀인 진리에서 내적이며 주관적인 직관으로 바뀌어 버렸다. 또한 칸트 이후,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 할 내용을 정의하는 것은 어떤 외적인 권위가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가 되었다”(데이비드 웰즈, 《신학 실종》, 181쪽).
계몽주의의 영향 속에서 신학에서마저도 믿음은 배제되고 이성만이 절대적 판단기준으로 인정됩니다. 신학은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신앙에서 출발할 수 있는 것인데, 이제 계시 자체가, 주관적이라는 이유로, 신학의 논의에서 배척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성적 판단을 근거로 신학적 작업이 이루어지고, 성경에 기록된 초월자 하나님의 역사는 신화적 세계관에 근거한 진술일 뿐 현실성을 결여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성적 판단을 따라 신앙을 설명하려는 인간의 해석마저도 자의적 성격을 띠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적 판단에 대한 강조 역시 시대적 환경의 영향 속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터 버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각자 나름의 “타당성 구조”에 따라 판단합니다. 어떤 일이 타당한가에 대한 판단은 이미 전제되고 있는 어떤 사고 체계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이성적 판단을 최종적 기준으로 설정한 것부터가 근대 이후 계몽주의의 전제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합리적 인식론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전제 자체가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인식과 이해의 방법이 주로 합리성에 근거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성과 이성이 파악하는 자연의 질서가 모두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성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된 선물이라고 말해야 더 적절한 표현입니다. 이성이 하나님보다 앞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성을 절대적 기준이신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종교 개혁의 후예들은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 세계를 탐구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종교 개혁의 전통에서는 자연과 은혜 모두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영역이다. 종교 개혁 전통이 자연을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그 운동의 후예들에 의해서 근대 과학이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예들은 소위 ‘하나님의 두 번째 책’(자연)을 연구해서 자연의 저자와 그 분의 창조 세계를 더 잘 이해하려고 시도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과학이 ‘어떻게’라는 물음들에 대한 답변들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첫 번째 책인 성경은 ‘왜’라는 물음들에 대해서 대답을 제공해 주었다.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101쪽)
버스에 탄 사람이 버스를 밀 수 없듯이, 우리는 우리를 떠받치는 근거를 들여다보거나 조작할 수 없습니다. 욥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초월적 근거를 다 이해할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욥은 이 물음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정 교수께서 주장하시는 신학적 인식론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계시로서보다는, 주관적 수준의 ‘신앙고백’이라고 여겨집니다. 성경을 보편사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에 접근해간 사건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성경은 사실에 대한 증언으로서 갖는 객관성을 잃고, 인간의 주관적 산물로 격하되고 맙니다. 성경을 가변적인 ‘신앙고백’으로 취급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실재(實在)에 뿌리 내리지 못한, 주관적 의견만을 갖게 될 뿐입니다. 저는 이런 결론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이성적 판단에 따라 성경이 재단(裁斷)될 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과연 알 수 있겠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설교비평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정 교수께서는 왜 성경을 설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고 묻게 됩니다. 저는 성경이 하나님의 약속과 꾸짖음을 담고 있으며, 성육신으로 절정을 이루는 신적 계시라고 여깁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을 풀어주는 설교가 필요하며, 설교는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를 면밀히 이해하는 일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계몽주의자들이 변론하고자 했던 기독교라는 종교는 신과 자연과 인간에 관한 영원한 형이상학적 진리의 체계였다. 성경은 자연의 직접적인 관찰이나 내적인 인간의 관념들에 대한 성찰에 의해 발견될 수 없는 영원한 진리에 관한 정보의 출처다.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사회에서의 복음》, 32쪽)
인간 이해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성경관에 대한 해묵은 논쟁을 재연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계시에 대한 입장 차이는 신앙과 신학에 대한 이해에 있어 큰 차이를 빚어내는 두 번째 주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에 외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계시에 대한 이해는 무엇보다도 인간관(人間觀)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종교를 성립시키는 세 가지 요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가 성립하려면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는, 첫째, 그 종교의 주인이 되는 신(神)의 자기 설명, 둘째, 그 신과 인간과의 관계, 셋째, 세계와 역사의 목적에 대한 설명이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요건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샤머니즘이 되거나, 주술과 주문만이 있는 미신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세 가지 요건을 갖고 기독교 신앙을 다시 진술한다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구원주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믿는 신(神)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둘째, 그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구원자로 나타나십니다. 셋째, 모든 인간은, 그리고 이 세계와 역사는 종국에 가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구도를 통해 생각해보면, 정 교수와 제가 인간을 어떻게 다르게 이해하는지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정 교수께서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한다면, 저는 구속주 하나님을 강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서로 다른 인간관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죄(罪)에 대한 이해에 따라 하나님과 그분이 행하시는 일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로 귀결된다고 하겠습니다. 인간관에 있어서의 차이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전망에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 신앙고백의 핵심은 구원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구원주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속죄를 위해 성육신하셔서 인간으로서 생애를 보내신 후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사셨다는 것을 하나님 계시의 핵심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계시의 내용은 인간의 문제적 상태, 곧 죄(罪)를 심각하게 전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표현을 따르자면, 인간은 죄로 인해 야기된 죽음의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새로 태어나야 했고, 이를 위해 구원주 하나님인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할 때, 기독교 신앙의 필수적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고 그분의 살아나심과 연합하는 데에 있습니다(롬 6). 세례와 성찬이 보여주듯,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1). 이렇게 성경에서 발견하는 우리 신앙의 출발점은 인간이 구원주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형편에 처해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복음은 ‘죄’라고 불리는 심각한 현실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갖는 심각성을 염두에 둘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구원주로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사실에도 이미 내포되어 있지만, 인류가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데서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은 특별한 은총이며, 이 사건에 대한 계시는 특별한 계시라고 여겨져야 합니다. 예수의 사역을 통해, 인간은 눈을 뜨게 되며, 그에게 생명이 회복됩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으로 태어나기에, 구원의 은총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알지도 감지하지도 못합니다.
이 특별한 은총을 통해 주어지며 특별한 계시를 통해 알려지는 구원으로, 인간은 구원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인간이 세계를 통해 주신 계시와 창조 속에서 드러난 은총 속의 하나님, 곧 창조하시고 지금도 섭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만물을 자기 앞에 세우실 심판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한편, 정 교수께서 보여주는 인간 이해에 인간의 심각한 형편, 곧 죄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설교에 대한 비평에서도 그러했듯, 정 교수께서는 기독교적 삶에서 죄가 강조되는데 대해 우려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의식에 묶여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투쟁하고, 용서하고, 변혁해 나가도록 돕는다. 이 사실이 복음의 핵심이다”(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229쪽).
인간의 죄(罪)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을 때,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어떻게 이해될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 경우에는, 위에서 말한 세 요건으로 말해보자면, 강조점이 구원주 하나님보다는 창조주 하나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인간에게 죄라는 근본적 뒤틀림이 있다는 점을 그다지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펼치신 은혜, 곧 이른바 ‘일반 은총’의 측면만을 주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창조 때 주어진 은총과 그 창조로부터 알려진 하나님에 대한 계시에 주목할 때, 세계와 역사에 대한 이해 역시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통치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정 교수께서 취하시는 신학적 입장은 바로 이런 경향을 띠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 교수께서 인문학적 소양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저는 기독교의 복음을 판넨베르크처럼 인간 보편의 진리로서 이해하려는 의도를 읽게 됩니다. 물론, 복음은 인간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제시하는 새로운 삶이 인간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인 것일까요? 성경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열어놓는 새로운 인간상이 죄라는 근본적 문제 상황을 해결 받은 인간에게나 적용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과 그의 삶에 대해 탐구해온 그간의 인문학적 발견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신학적 작업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 백성의 특징을 이해하는데 있어, 성경이 진단하듯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이해는 피상적인 것에 그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며 하나님의 창조로 베풀어진 은총을 받은 존재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누구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와 연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별한 은총의 개입이 반드시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죄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인 이 특별한 은총은 인간 사이에 절대적 불연속을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는 그들 양자를 공통적으로 묶어낼 수 없는 근본적 차이가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굳이 인간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공통점을 찾자면, 그것은 죄가 주도권을 잡은 세상에 속한 죄인 된 본성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 이해의 차이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관점에 영향을 끼칩니다. 만일 죄에 대한 심각한 고려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행동이 만들어내는 역사와 사회도 창조라는 일반적 은총에 입각해 이해될 것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변증법적 과정에서 함께 일하는, 그분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때 인간의 죄인 됨이라는 특징이 중요한 변수로 고려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 정 교수께서는 미래의 종말의 향방은 인간의 역할에 따라 열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역사의 과정에 죄인인 인간이 과연 어떤 적극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정 교수의, 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사명에 대한 이해에 있어 이런 인간 이해가 그대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정 교수께서는, 한 설교비평문에서, 성서가 억울한 약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언급합니다. 그런데 저는 과연 성경의 핵심적 문제 제기가 그런 것인가 묻게 됩니다. 그것이 혹시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고백을 대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여성이나 소수 인종의 인권 문제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 혹 환경과 생태 문제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들이 각각 우리의 삶에 중요한 문제들이라는 점을 수긍하면서도,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강조가 기독교가 전하는 특별 은총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데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을 갖게 됩니다. 이런 이슈들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담아내는 근본적 주제라고 할 수 있을까요? 데이비드 웰스는 이런 요즘의 추세가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고백”이 사라진 데서 유래한다고 진단합니다.
현대라는 시기에, 하나님의 객관적인 진리와 시공간의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것에 대한 공적인 고백이라는 신앙고백은 학문 세계에서 매우 어색한 것이 되었다. … 이와 같이 일단 신앙고백이 사라져 버리자, 신학적 성찰이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신학적 성찰이 하나님 말씀의 연구라는 분야를 상실하게 되자, 동양적 영성에서 급진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스트 이데올로기에서 환경에 대한 관심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신학 성찰의 주제를 찾게 되었다. 더욱이 계급적인 관심사가 교회와 학문 세계에 끼어들어서 그 간격을 벌려 놓았다. (데이비드 웰스, 《신학 실종》, 156쪽)
죄에 대한 고려 없이 사회나 역사에 대해 논하는 것은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문제 제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죄에 대한 고려 없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는 방식도 성공적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역사와 실존은 모두 죄로 인한 왜곡, 오염, 부패를 증언할 뿐입니다. 기독교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으로, 죄로 인한 절망과 파멸의 현실을 깨고 재창조로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돌연한 은혜와 초월적 기적의 개입으로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되며, 새롭게 태어남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파멸의 운명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듯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식으로 세상과 역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죄에 사로잡힌 인간의 구원이 전제되어야만, 비로소 그 인간 개인이 이웃 곧 사회와 역사에 새롭게 관련되기 시작합니다. 죄인 됨으로부터의 해방이 개인에게 이루어질 때에야, 그에게 사회와 역사에서의 적극적 역할이 주어집니다. 저는 이런 역할을 ‘성화’라는 전통적 신학 개념 속에서 이해합니다. 성화의 과정을 통해 인간은 그 존재가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이와 같은 존재가 삶의 현장에서 이웃, 곧 사회와 역사 앞에 지는 책임이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로 비유되는 심판의 현장은 바로 이런 측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신앙적 실천적 책임은 구원에서 비롯된 불신자와의 다름, 곧 ‘죄’라는 측면에서의 다름인 ‘거룩’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거룩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죄인이란 하나님과 분리된 자이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그의 백성이요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었을 때, 산상설교가 가르치는 “빛과 소금”, “생명”, “진리”, “착한 행실”의 정의가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43 이하에서 설명하는,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이 보이는 신앙 인격적 정체성은 바로 이런 사람들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펼쳐진 삶은 이런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삶은 이 세상에서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도 완성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셨지만, 우리 인간은 아직 그분의 약속을 붙들고 그분의 성취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왜 이런 긴장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물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하나님의 전적인 예비하심에 맡겨져 있고, 때가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허락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기다림의 시간을 두시는 것은 그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 받는 성도들을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그 충만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람들을 부르시는 구원사역을 연장해나갈 시간이, 그리고 부름 받은 그분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되는 훈련과 완성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적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에베소서 2:22에서 “너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부부 사이의 관계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연합을 비교하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내용을 소유하기도 하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쓰임 받는 기관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 노릇 하시는 질서에 있어, 그리고 그분으로 말미암는 완성에 있어, 교회는 독특한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엡 4:13-16). 교회는 잘못 판단하고 세상에 타협하기도 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교회야말로 “진리를 함께 찾아가는 일을 인도함에 있어, 사고와 행위 모두에서 우리가 어디를 향해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를 안다”(뉴비긴, 263쪽)고 믿습니다.
신학의 근본 토대
사실 하나님께 무슨 일반적 은총과 특별한 은총이라는 구분이 있겠습니까? 어떻게 초월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시공의 세계에 갇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학적 성찰은 신앙을 그 대상으로 삼는 것인데, 신앙은 합리성을 넘어서는 대상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인간보다 크신, 초월적이신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성경에서 들으며, 그분을 신앙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께 얼마나 의존적 존재인가 하는 점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정 교수의 신학적 입장을 보면서 갖는 의문은, 정 교수께서 결국 하나님보다는 인간을 궁극적 기준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정 교수께서 기독교 신앙의 ‘신비’에 대해 여러 곳에서 재차 강조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신비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 구성된 신학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기독교 신앙이 인간으로는 넘볼 수 없는 차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우리의 차이가 빚어진 것일까요?
제 관찰로는 정 교수께서 전제하시는 신학은 사실보다는 의미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중대한 의미든 간에 그 의미가 발생한 터전인 사실이 견고할 때에만 비로소 그 사실에 의미가 담기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성적 판단에서 비롯되는 합리성이나 보편성의 이름으로, 사실을 재단하고 제한하며 배제하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신앙의 실제적 터전을 놓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 교수의 신학은 자신의 근거를 합리성을 근간으로 한 자기 확신에서 찾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합리성에 따라 판단되실 존재일까요? 오히려 우리의 합리성이 하나님의 주권을 근거로 판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신학이 어떤 것인지는 데이비드 웰스의 설명으로 더 분명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소 긴 인용이지만 함께 읽어보고 싶습니다. 데이비드 웰스에 따르면, 신학은 세 가지 필수적인 측면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들은 (1) 신앙고백적 요소(이 말은 성경을 ‘신앙고백’으로 여긴다고 말할 때처럼 ‘고백’으로서의 주관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2) 이 신앙고백에 대한 성찰, (3) 이 처음 두 요소에 기초한 영성입니다.
[첫째,] 신앙고백이란 교회가 믿는 내용이다. 신앙고백은 교리에 농축되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개신교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교회는 하나님이 영감 된 하나님 말씀을 통해 교회에 주신 진리를 고백한다. 어떤 주제라 해도 그 주제에 대해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느냐 또는 그 교훈을 어떤 식으로 엮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권위적인 진리가 기독교 생활과 실천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치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성경의 권위 아래 살아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수 세기 동안 교회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핵심적인 신앙고백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슬로건이다. 이 지식이 없으면,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하는 내용이 빠져 버리며, 믿음과 예배와 그 생명의 유지와 선포와 봉사의 수단을 잃게 된다. 신앙고백은 말 그대로 테올로기아(theologia), 즉 하나님 백성을 위해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서 모든 신학의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
신학의 두 번째 요소인 성찰에는 현대 세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지적인 싸움을 내포한다. 이런 성찰은 세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신학적 성찰에는 성경 안에 포함된 하나님의 계시 전체가 망라되어서 성경의 다양한 부분 사이의 연관성을 추구해 하나님의 성품과 행위와 의지를 계시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명료하게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그 성찰의 목표는 하나님이 주신 내용을 포괄적으로 이해해서 하나님의 생각이 교회의 생각 가운데 재현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있다. 둘째로, 신학적 성찰에는 과거에 대한 전체적인 연구가 포함되어야 한다. 신학적 성찰은 과거에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일하시고 역사하신 사실에서부터 현재의 폭풍우 가운데서 교회라는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해 주는 무게 중심을 찾아야 한다. 과거의 영적인 부요를 모으며, 현재를 절대화하지 않고 상대화해 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반성적인 성찰이다. 현재는 언제나 인간 정신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고양되어 있는 순간(혹은 어떤 은사주의자들이 생각하듯이,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고 착각하는 태도를 버릴 필요가 있다. 이런 태도는 교만과 어리석음을 향해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신학적 성찰은 신앙으로 고백되는 내용과 한 사회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작업은 매우 중요한데, 어느 한 시대의 사상과 가정이 교회의 마음과 생각 속으로 아주 강하게 침투하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현대성이 ‘정상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했다. 신학적 성찰이라는 특정한 맥락에서 말할 때, 교회는 현대성이 교회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지평에 교회의 생각을 맞추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현대성의 지평에 대해 하나님의 진리라는 강력한 해독제, 즉 교정 수단을 갖다 주어야 한다. 비신화화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현대성이다.
신학의 세 번째 요소에는 삶의 지혜, 즉 기독교적인 실천이 신앙고백의 기둥 위에 건설되고, 성찰의 발판에 둘러싸이도록 만드는 지혜를 구성하는 덕목을 계발하는 일이 포함된다. 이 말은 좀 단순하게 들린다. 내가 이 말을 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지금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종류의 영성이다. 이 영성은 그 성격에 있어서 도덕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존재상으로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 영성은 기독교적인 실천, 기독교적인 삶을 우선적으로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 진실의 문제로 보는 영성이며, 생각과 실천을 분리시키지 않는, 이런 분리를 거부하는 영성이다. 이런 영성이 존재할 때에만 어떤 주어진 상황 가운데서도 기독교적이 된다는 것,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난다. (데이비드 웰스, 《신학 실종》, 153-155쪽)
한편, 정 교수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역사 결정론에 머물러 있는 한,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감수성은 어느 정도 확보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섭리는 역동성을 상실한 일종의 프로그램으로 추락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역사의 우연이다. 그는 이미 예정된 부활을 확신하고 십자가를 선택한 게 아니라 자신의 모든 미래를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자기에게 다가온 십자가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예수의 완전한 순종이 바로 십자가 구원의 역동성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이미 예정되고 결정된 수순의 진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주술이고, 거꾸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절대적 순종과 신뢰의 결과로 생각하는 것은 역사이다. 그렇다. 기독교 신앙은 이미 결정된 길을 군말 없이 따라가는, 그래서 인간의 앙가주망이 근본적으로 차단된 숙명주의가 아니라 미래로 열린 길을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부단히 고뇌하고 결단하는 역사의식이다.
… <중략> …
신비라는 말은 어떤 궁극적인 실체가 은폐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생명은 그 리얼리티가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는 점에서 신비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앙의 신비는 역사의 신비에 자리하고 있다. 이에 반해 주술은 형식으로만 신비이지 실제로는 인간이 역사의 신비에서 감수해야 할 불안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와 생명의 신비를 파괴하는 인간의 자기 전략이고 자기 숭배이다. 주술은 결국 신앙의 신비를 파괴할 뿐이다. (정용섭, 《설교비평1 속 빈 설교 꽉찬 설교》, 29-30쪽)
정 교수와 저 모두가 신비를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설명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신비가 인간의 수준을 초월하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정 교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마저도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되실지 모른다는 차원에서 말하는 신비 같습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역사가 초월적이라는데 그 신비가 있고, ‘이미’와 ‘아직’ 사이의 종말적 현실에 그 은폐와 노출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비는 예수 안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 신비이며 그래서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성도들에게 신앙으로 확인되는 신비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보듯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하나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이것이 신비인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으나 우리의 눈에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들어와 있는 탓입니다.
기독교가 열어놓는 신비가 하나님 자신마저도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종말을 작정하셨다고 말하면, 그게 주술적인 말일까요? 정 교수께서는 인간이든 하나님이든 간에 누구도 미래를 확정해 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미래가 어떻게 완성될 것인지를 정하셨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역동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과연 모순일까요? 오히려 예수의 십자가가 결정된 수순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순종과 신뢰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 성경의 명시적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세례 요한에 의해 소개되었고, 예수 자신도 친히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러 오셨음을 공언했다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이것 역시 주술에 빠진 후대의 해석일 뿐일까요?
설교
정 교수의 지적대로 한국 교회 강단은 본문 해석이 부실합니다. 그것은 한국 교회 전체의 수준이 낮은 탓이기도 하고 설교자의 개인적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분명 속상하고 가슴 아픈, 우리 시대 한국 교회 설교자와 설교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설교자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고린도전서 1:26-31에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교자의 위상은 그가 갖고 있는 자질이나 능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쓰신다는 점에서 발견됩니다. 저는 설교자의 무능(無能)이 하나님을 분명히 드러내므로, 설교자는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쓰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설교자의 능력이나 열심은 이 무능함을 돕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설교자의 열심은 그 자신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항복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일 겁니다.
하나님께 설교자는 출애굽 사건의 모세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사용해 여러 기적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지팡이로부터 기적이 나오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팡이는 단지 들려서 쓰임 받을 뿐입니다. 모세의 역할이 이와 같습니다. 모세는 실은 하나님의 지팡이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 들려 기적을 일으키듯, 모세는 하나님께 들린 지팡이로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냅니다. 설교자 역시 모세처럼 하나님의 지팡이로 쓰임받습니다. 고린도전서 1:29에서 “자랑치 못한다”고 한 것은 설교자가 그를 통해 이루어진 일의 원인이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21절의 “전도의 미련한 것”에서도 확인됩니다. 전도가 왜 미련한 것이냐 하면,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로마서 10:9-15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이 어디에서 시작하는가를 역(逆)추적해보면 하나님이 그 시작이요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의 선한 결과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일 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설교가 철학, 소위 사람들의 판단에 부합하는 합리적 설명으로 이해될까봐 심히 두려워하고 떨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증거가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을 통해서만 효과를 낳게 된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고전 2:1-5).
기독교 신앙은 지식과 이해를 넘어서는 생명과 진리의 역동성, 곧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이시고 은혜로우신 개입에 정초되어 있습니다. 설교자가 그런 하나님께서 인간을 편들고 계신다는 점을 알고, 그 자신도 설교로써 그런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편들고 있다면, 그가 하는 설교는 기본은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의 설교를 비평하자면, 설교에서 신학이 실종된 현실을 먼저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설교는 신학에 튼튼히 뿌리내리고 있지 못합니다. 설교가 성경이 가르치는 계시의 내용을 제대로 담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계적이지 않으며, 이해관계에 매어있지 않으며, 인과율(因果律)을 넘어섭니다. 설교는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설교가 직면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는 ‘세속성’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걸어온 지난 모든 나날동안 끊임없이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해 온 것이 바로 세속성의 문제입니다. ‘세속성’이란 하나님이외의 것을 궁극적인 목적과 가치로 삼는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현대에 이 세속성은 절대를 부인하는 다원주의로, 개인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실용주의로, 값싼 보편성을 위한 대중성으로, 모양을 바꿔가며 우리를 시험하며 공격해 옵니다.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그분의 명령을 좇으며 그분만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교회 안에서도 성경을 펴서 가르치되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딤후 3:2) 성경이 전해주는 계시를 거스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는 말씀을 통해, 돈으로 되는 것, 곧 세상의 무가치한 것을 목적으로 삼는데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인간의 필요에 대해 말하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속주의가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 및 종교 개혁과 부흥, 선포와 회심에 고정시키는 대신에, 우리 자신과 우리 나라와 우리 세계와 우리의 시간과 공간과 우리의 순간에 고정시키고 있음이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각 지역의 크리스천 서점들과 강단들과 주일학교 커리큘럼과 방송과 종교적 담화에도 확연히 드러난다.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104쪽)
교회의 설교는 교회가 성경에서 배워 전통으로 물려받은 신앙고백에 근거하고 그 고백에 대한 신학적 통찰과 종합으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이로써 모든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제기하는 궁극적인 질문에 직면하여, 한 인간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게 될 때, 그의 곤고한 영혼은 비로소 평안과 위로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소위 닦달과 나열 등의 유치한 설교 행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에 제일 많이 하는 것이 닦달과 잔소리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수준 높고 훌륭한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이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우리가 늘 게으르고 무지하고 완악하다는 사실을 폭로합니다. 부모는 진정 자녀들을 사랑할 때 책망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설교는, 늘 죄와 싸우며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완성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 청중들에게 죄와의 싸움을,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주인 삼으려는 ‘자기 의(義)’와의 싸움을 싸우도록 애써 독려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시험 앞에 우리는 얼마나 자주 넘어집니까? 저는 다시금 마이클 호튼의 진단에 공감합니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간증들’을 생각해 보라. 개인적인 체험들을 ‘나누는 일’이 공동 기도와 공동 성경연구, 예배와 증거를 대신하고 있다. 개인의 영적인 자서전이 저 나사렛 사람의 생애와 시대를 대신해 버렸다”(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88쪽).
맺는말
토론이나 논쟁으로 정 교수나 저의 신학적 입장에 변화가 생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 교수의 설교비평을 읽으며 우리 각자의 견해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정 교수의 복음에 대한 열정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서로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참된 대화는 강요와 설득이라는 목적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기본 조건으로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 교수의 한국 교회 강단을 향한 비판이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애정에서부터 출발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저는 가슴깊이 그 충정에 공감합니다. 개인적으로 정 교수의 비평 속에서 범상치 않은 영적 통찰과 진정한 영성의 편린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 서로 다른 전통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진심과 목표는 같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영광과 자랑이 더 분명히 드러나고, 더 많은 영혼들에게 진리와 생명이 올바르게 증거 되며, 그럼으로써 한국 교회가 성숙해가는 데에 우리의 공통의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관점과 견해에 있어 많이 다르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 곧 ‘하나님과 복음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근본적 목적에서 일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다름과 같음 모두를 사용하셔서 한국 교회 앞에 우리의 사명이 합력하여 선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기독교사상, 2007년 5월호)
박영선 목사는 한양대학교 졸업, 총신대학교 신대원 졸업, 미국 리버티 벱티스트 세미나리 명박, 현재 남포교회 담임 목사이며, 합동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교수로 있다. 저서로 <구원의 완성 1,2>, <그제야 끝이 오리라>, <구원, 그 이후> 외 다수가 있다.
- 정용섭 교수의 《설교비평》에 대한 신학적 단상-
정용섭 교수의 설교비평에는 한국 교회가 귀담아들어야 할 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요즘의 설교가 인간적 욕망을 부추기고 자극하며, 복음을 인간의 필요나 채워주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정 교수께서는 한국 교회에서 지금 복음이 설교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설교를 통해 기독교의 본질이 제대로 전달되며 설명되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문제 제기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바로 여기에서 정 교수의 설교비평과 관련하여 더 생각해 보아야할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설교를 통해 복음, 혹은 기독교의 본질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느냐 하는 물음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이 무엇이며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공통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 교수의 설교비평에 납득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신앙은 무엇이며 신학적 과제란 무엇인가에 대해 같은 입장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정 교수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만일 기독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면, 정 교수의 설교비평에 우리가 아무리 많이 공감하고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상 피상적인 수준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신학 전통
그간의 설교비평을 읽으면서 정 교수께서 갖고 계신 신앙과 신학에 대한 이해가 어떤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정 교수께서는 설교비평을 할 때 자주, 이런 설교자들이 있는 줄 여태까지 잘 몰랐으며, 그래서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그 설교자들을 대한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제게는 익숙한 설교자들을 정 교수께서는 처음 대하시는 걸 보면, 정 교수와 저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아마도 이런 형편은 그동안 한국 교회를 크게 양분(兩分)해온 신학적 전통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 교수의 설교비평을 통해서 신앙과 신학에 대한, 저와는 다른 입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 교수의 설교에 대한 비평에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도, 정 교수와 저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정 교수께서 기독교에 대한 바른 이해 ―많은 설교들에서 설명되는 것과는 대비되는― 라고 제시하는 입장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따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 발견한 것은 정 교수와 제가 어떤 설교를 대하여 거기에서 같은 문제점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같은 기준에 입각해 발견된 것은 아닐 수 있겠다는 점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정 교수와 저는 실상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차차 얘기되겠지만, 제게 있어서, 신학은 그 무게를 ‘신’(神)께 두고 신께서 의지적으로 보여주시는 계시만을 그 원리로 삼고 있다면, 정 교수께서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는 이른바 ‘학문’에 무게중심을 두고 신학을 해나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제가 인간의 근본적 특성을 죄인 됨에서 찾는다고 한다면, 정 교수께서는 인간에게 보다 적극적 의미에서의 가능성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대비점들은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라고 할 수 있는 복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정 교수와 저 사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빚어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신학적 차이가 설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차이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교비평 작업에서 정 교수께서는 기독교에 대한 다른 이해를 가진 설교자들을 정 교수의 신학이해에 따라 평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만일 실제로 정 교수의 설교비평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설교비평은 원래의 의도하던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관점과 기준을 가지고 다른 관점과 기준을 가진 사람의 행동을 평가한다면, 그 사람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의 평가는 단지 오해만을 불러올 뿐입니다. 먼저 기독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 공통된 기반이 마련되어야 비로소 설교의 목적과 내용에 대해서도 동의가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전제가 있어야 실질적으로 유익한 설교비평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복음에 대한 이해라든가 신학에 대한 이해에 있어 정 교수와 저 사이의 차이점을 검토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정 교수의 신학적 입장을 살펴보면서 크게 의문이 든 것은 두 가지 문제에서였습니다. 첫째는 신학적 인식론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고, 둘째는 여러 신학적 문제들과 직결되는 인간에 대한 이해에 관한 문제입니다.
판넨베르크 신학
정 교수의 신학을 살펴보기 위해 저는 먼저 판넨베르크 신학에 대해 살펴보아야 했습니다. 나중에 더 분명히 발견한 사실이지만, 정 교수께서 제시하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판넨베르크의 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판넨베르크의 계시론에 대해 책을 쓰시기도 했고(정용섭,《말씀신학과 역사신학― 판넨베르크의 계시론을 중심으로》), 《신학과 철학》, 《조직신학》과 설교집들을 비롯한, 판넨베르크의 여러 책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저는 판넨베르크 신학의 특징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그의 신학의 특징으로 크게 두 가지가 지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학의 두 가지 특징은 제가 정 교수와의 차이점으로 확인한 두 가지 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판넨베르크 신학의 독창적 개념은 ‘보편사’와 ‘미래성’이라고 합니다. 보편사 개념을 통해 신학은 역사와 연결되며, 미래성 개념을 통해 신학은 종말론적 특징을 지니게 됩니다.
첫째 특징은 역사 전체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보는 ‘보편사’ 개념입니다. 판넨베르크는 기독교 진리의 보편적 타당성을 합리적으로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신학이 보편사의 지평 안에서 통용되는 합리성이라는 기준에 합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강조는 신학을 계시에 매이지 않게 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판넨베르크는 “바르트가 강조하는 것처럼 신학이 계시라는 폐쇄되고 권위주의적인 개념에만 매달리게 될 때 신학은 보편성을 결여한 초라한 특수 학문이 되어 버리고 만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김영한, ‘볼파르트 판넨베르그’,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 196쪽). 그는 신학이 보편성을 띤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배타적인 계시와의 관련성을 끊어야 한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정 교수도 이런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말씀의 신학을 극복하여 전체 역사 가운데서 신학의 보편성을 찾고자 한다”(정용섭, 《말씀신학과 역사신학》, 148쪽).
둘째는 미래를 강조하는 종말론적 신학의 특성입니다. 판넨베르크는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과거와 현재를 결정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미래의 존재론적 우위성”입니다. 미래는 현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힘이라는 의미에서 창조적 성격을 띱니다. 결과적으로, 세계는 불변적으로 지속되는 질서가 아니라 열린 과정으로 파악됩니다. 현재를 결정하는 것은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열린 미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특징들은 정 교수께서 “인문학적 성서 읽기”를 강조하는 것과, 또 과거보다는 미래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하튼 판넨베르크 신학이 다음과 같이 요약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이성은 신앙의 적이 아니라 친구이며, 교회 전체의 삶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구속사 대신에 보편사, 맹목적 신앙보다는 이성적 통찰, 개인적 결단보다는 역사적 전승을 강조한다. 그는 기독교 진리의 합리성을 위하여 이성의 비판을 강조하는 이성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김영한, ‘볼파르트 판넨베르크’,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 217쪽)
이와 같은 특징은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제가 배워온 신학과 어떻게 다른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첫째, 제가 배운 바로는, 신학적 작업은 계시에 의존해서 이루어집니다. 신학의 계시 의존성이란, 신앙의 내용과 신학적 물음이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계시와, 인간 역사 속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초월적 하나님과 관계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철학이 신학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도 인정됩니다. 인식하는 이성의 유한성과 제한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패커의 다음과 같은 의문에 공감합니다. “나는 조직신학의 주제를 하나님에 관해 계시된 진리로 개념화 시키는 일이 적절한지 의문이 간다. … 이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과 진정한 하나님을 아는 것 사이를 이간시키는 것이다”(J. I. Packer,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Spirituality, pp. 2, 8.).
둘째, 역사, 더 구체적으로 ‘미래’에 대해서도 저는 다르게 이해합니다. 역사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셨으며, 미래, 곧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성취된다고 생각합니다. 판넨베르크가 역사를 “열린 과정”이라고 말한다면, 제가 배운 신학은 역사는 하나님의 뜻하심에 따라 정해져 있다고 여깁니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한 통치를 계속하시며 결국에는 당신께서 정하신 바대로 역사의 목적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즉 신(神)이라는 존재가 인격적이고 전능하다면 정당한 목표와 그것을 이룰 능력과 신실함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역사를 보며 신앙인이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선하신 분이시라는 점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분의 통치 아래에서 실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과 씨름을 벌이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사상들과의 씨름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과의 씨름 말이다”(알리스터 맥그래스,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 88쪽).
신학적 인식론
이제 정 교수의 신학에 대해 몇 가지 점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먼저 제가 정 교수의 신학적 이해에 관해 갖게 되는 의문은 계시와 관련된 것입니다. 계시에 대한 이해는 신학적 인식론의 문제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신학이 하나님에 대한 논의라고 하면, 대체 하나님에 대해 우리 인간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전통적인 답변은 인간은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일 것입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는 종교라는 점을 전제할 때, ‘계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은 이후 모든 신학적 논의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어떤 경로로 우리에게 도달하는지에 대해 정 교수께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계는 곧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에 접근하는 길이다. 이런 방식 말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도달하겠는가? 진리에 도달해 보려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사실 이런 인식론적 근거에서 이루어진다. (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192쪽)
앞서 살펴본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에 대한 강조와 맥을 같이하는 설명으로 보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하나님의 계시란 세계를 통해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의 창조자이시므로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며, 우리는 이에 주목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앎은 “하나님 스스로 자기의 본질을 노출하는 것에 대한 ‘자연적 앎’의 문제”라고 덧붙여 설명됩니다(정용섭, 《말씀신학과 역사신학》, 192쪽). 인간이 자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설명을 따라가면서, 정 교수의 계시 이해가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로 여기는 기독교의 전통적 이해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 교수의 이 같은 입장에는 이성적 판단에 따라 성경을 역사적 주관적 신앙고백 문서로만 받아들이려고 한 계몽주의 이후 학문의 결론이 그대로 전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저는 성경이야말로 계시의 외적 인식원리라는 전통적 입장을 따릅니다(Louis Berkhof,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 96.). 성경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 주신 특별한 계시라고 이해합니다. 성경에 담긴 내용이, 인간 쪽의 반응이 있기 전에, 인간에게 나타나시고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책이며, 인간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물론 저도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고 있으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이 그의 창조세계에 분명히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롬1:20).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중단하실 수 없으며, 그분이 지으신 세계를 그분의 역사로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계시만으로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큰 장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과 분리되었다고 천명합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져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눈이 멀어져, 해가 빛나고 있는데도 보지 못합니다. 따라서 세계만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기란 더더욱 어려워진 것입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둘 때, 하나님 편에서 온 보다 명확한 계시의 필요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왜 정 교수께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주신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근대성에 대한 요즘의 연구들이 보여주듯, 인간 이성을 최종적 판단자로 여긴 계몽주의적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경이 객관적 계시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합리적 인식론에 따른 결과입니다. 합리적 인식론이란 결국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판단되어 수용될 수 있는 것만 진리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성은 인간 고유의 인식 수단일 뿐, 진리의 원천이나 진리 판별의 절대적 기준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성에게 궁극적 판단 규범의 자리를 허락한 근대의 과학적 방법도 역시 진리를 찾아내는 유일하거나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서 레슬리 뉴비긴의 논평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성과 계시의 역할에 관한 논쟁에서의 문제점은 어떻게 경험된 자료를 이해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건들을 과연 전적으로 지금 세속적인 역사 기술에서 사용하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심리학적인 범주를 가지고 이해해야 하는가의 논쟁과, 이런 범주들의 유용성이나 적절함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이 이야기를 상술된 모든 사건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개인적인 의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인정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들이다. 이성은 사물의 진상에 관한 독자적인 정보의 출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 활동의 한 단면이다. 이성과 계시에 관한 오랜 논쟁에서 나타난 두 가지의 차이점은 각기 다른 정보의 출처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사회에서의 복음》, 29-30쪽)
인간이 이성적 판단을 근거로 성경을 계시로 인정하길 거부한 것은 이성의 역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성의 판단을 근거로 하여 계시의 진리성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신적 진리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정 교수께서는 초월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계시를 주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크게 생각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지적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요?
한편, 만일 하나님께서 의지를 갖고 우리에게 계시를 주신다면, 그 계시는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해 구속력을 띠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정 교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과학은 과학이다. 진화론은 과학적 현상적으로 진리일 뿐이고 기독교 신앙은 다른 지평에서 영적인 진리를 말한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지 독단론에 빠지지 말고 서로가 진리의 지평을 넓혀 가면 충분하다. (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215쪽)
정 교수께서는 신앙과 과학의 영역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과학과는 다른 지평의 영적 진리와만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칸트 이후의 계몽주의적 사고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고백이라는 생각 자체가 외부적인 객관적 기준틀인 진리에서 내적이며 주관적인 직관으로 바뀌어 버렸다. 또한 칸트 이후,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 할 내용을 정의하는 것은 어떤 외적인 권위가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가 되었다”(데이비드 웰즈, 《신학 실종》, 181쪽).
계몽주의의 영향 속에서 신학에서마저도 믿음은 배제되고 이성만이 절대적 판단기준으로 인정됩니다. 신학은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신앙에서 출발할 수 있는 것인데, 이제 계시 자체가, 주관적이라는 이유로, 신학의 논의에서 배척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성적 판단을 근거로 신학적 작업이 이루어지고, 성경에 기록된 초월자 하나님의 역사는 신화적 세계관에 근거한 진술일 뿐 현실성을 결여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성적 판단을 따라 신앙을 설명하려는 인간의 해석마저도 자의적 성격을 띠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적 판단에 대한 강조 역시 시대적 환경의 영향 속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터 버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각자 나름의 “타당성 구조”에 따라 판단합니다. 어떤 일이 타당한가에 대한 판단은 이미 전제되고 있는 어떤 사고 체계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이성적 판단을 최종적 기준으로 설정한 것부터가 근대 이후 계몽주의의 전제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합리적 인식론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전제 자체가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인식과 이해의 방법이 주로 합리성에 근거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성과 이성이 파악하는 자연의 질서가 모두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성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된 선물이라고 말해야 더 적절한 표현입니다. 이성이 하나님보다 앞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성을 절대적 기준이신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종교 개혁의 후예들은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 세계를 탐구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종교 개혁의 전통에서는 자연과 은혜 모두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영역이다. 종교 개혁 전통이 자연을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그 운동의 후예들에 의해서 근대 과학이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예들은 소위 ‘하나님의 두 번째 책’(자연)을 연구해서 자연의 저자와 그 분의 창조 세계를 더 잘 이해하려고 시도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과학이 ‘어떻게’라는 물음들에 대한 답변들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첫 번째 책인 성경은 ‘왜’라는 물음들에 대해서 대답을 제공해 주었다.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101쪽)
버스에 탄 사람이 버스를 밀 수 없듯이, 우리는 우리를 떠받치는 근거를 들여다보거나 조작할 수 없습니다. 욥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초월적 근거를 다 이해할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욥은 이 물음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정 교수께서 주장하시는 신학적 인식론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계시로서보다는, 주관적 수준의 ‘신앙고백’이라고 여겨집니다. 성경을 보편사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에 접근해간 사건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성경은 사실에 대한 증언으로서 갖는 객관성을 잃고, 인간의 주관적 산물로 격하되고 맙니다. 성경을 가변적인 ‘신앙고백’으로 취급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실재(實在)에 뿌리 내리지 못한, 주관적 의견만을 갖게 될 뿐입니다. 저는 이런 결론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이성적 판단에 따라 성경이 재단(裁斷)될 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과연 알 수 있겠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설교비평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정 교수께서는 왜 성경을 설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고 묻게 됩니다. 저는 성경이 하나님의 약속과 꾸짖음을 담고 있으며, 성육신으로 절정을 이루는 신적 계시라고 여깁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을 풀어주는 설교가 필요하며, 설교는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를 면밀히 이해하는 일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계몽주의자들이 변론하고자 했던 기독교라는 종교는 신과 자연과 인간에 관한 영원한 형이상학적 진리의 체계였다. 성경은 자연의 직접적인 관찰이나 내적인 인간의 관념들에 대한 성찰에 의해 발견될 수 없는 영원한 진리에 관한 정보의 출처다.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사회에서의 복음》, 32쪽)
인간 이해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성경관에 대한 해묵은 논쟁을 재연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계시에 대한 입장 차이는 신앙과 신학에 대한 이해에 있어 큰 차이를 빚어내는 두 번째 주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에 외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계시에 대한 이해는 무엇보다도 인간관(人間觀)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종교를 성립시키는 세 가지 요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가 성립하려면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는, 첫째, 그 종교의 주인이 되는 신(神)의 자기 설명, 둘째, 그 신과 인간과의 관계, 셋째, 세계와 역사의 목적에 대한 설명이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요건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샤머니즘이 되거나, 주술과 주문만이 있는 미신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세 가지 요건을 갖고 기독교 신앙을 다시 진술한다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구원주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믿는 신(神)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둘째, 그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구원자로 나타나십니다. 셋째, 모든 인간은, 그리고 이 세계와 역사는 종국에 가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구도를 통해 생각해보면, 정 교수와 제가 인간을 어떻게 다르게 이해하는지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정 교수께서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한다면, 저는 구속주 하나님을 강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서로 다른 인간관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죄(罪)에 대한 이해에 따라 하나님과 그분이 행하시는 일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로 귀결된다고 하겠습니다. 인간관에 있어서의 차이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전망에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 신앙고백의 핵심은 구원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구원주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속죄를 위해 성육신하셔서 인간으로서 생애를 보내신 후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사셨다는 것을 하나님 계시의 핵심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계시의 내용은 인간의 문제적 상태, 곧 죄(罪)를 심각하게 전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표현을 따르자면, 인간은 죄로 인해 야기된 죽음의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새로 태어나야 했고, 이를 위해 구원주 하나님인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할 때, 기독교 신앙의 필수적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고 그분의 살아나심과 연합하는 데에 있습니다(롬 6). 세례와 성찬이 보여주듯,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1). 이렇게 성경에서 발견하는 우리 신앙의 출발점은 인간이 구원주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형편에 처해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복음은 ‘죄’라고 불리는 심각한 현실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갖는 심각성을 염두에 둘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구원주로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사실에도 이미 내포되어 있지만, 인류가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데서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은 특별한 은총이며, 이 사건에 대한 계시는 특별한 계시라고 여겨져야 합니다. 예수의 사역을 통해, 인간은 눈을 뜨게 되며, 그에게 생명이 회복됩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으로 태어나기에, 구원의 은총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알지도 감지하지도 못합니다.
이 특별한 은총을 통해 주어지며 특별한 계시를 통해 알려지는 구원으로, 인간은 구원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인간이 세계를 통해 주신 계시와 창조 속에서 드러난 은총 속의 하나님, 곧 창조하시고 지금도 섭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만물을 자기 앞에 세우실 심판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한편, 정 교수께서 보여주는 인간 이해에 인간의 심각한 형편, 곧 죄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설교에 대한 비평에서도 그러했듯, 정 교수께서는 기독교적 삶에서 죄가 강조되는데 대해 우려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의식에 묶여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투쟁하고, 용서하고, 변혁해 나가도록 돕는다. 이 사실이 복음의 핵심이다”(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229쪽).
인간의 죄(罪)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을 때,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어떻게 이해될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 경우에는, 위에서 말한 세 요건으로 말해보자면, 강조점이 구원주 하나님보다는 창조주 하나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인간에게 죄라는 근본적 뒤틀림이 있다는 점을 그다지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펼치신 은혜, 곧 이른바 ‘일반 은총’의 측면만을 주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창조 때 주어진 은총과 그 창조로부터 알려진 하나님에 대한 계시에 주목할 때, 세계와 역사에 대한 이해 역시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통치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정 교수께서 취하시는 신학적 입장은 바로 이런 경향을 띠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 교수께서 인문학적 소양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저는 기독교의 복음을 판넨베르크처럼 인간 보편의 진리로서 이해하려는 의도를 읽게 됩니다. 물론, 복음은 인간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제시하는 새로운 삶이 인간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인 것일까요? 성경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열어놓는 새로운 인간상이 죄라는 근본적 문제 상황을 해결 받은 인간에게나 적용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과 그의 삶에 대해 탐구해온 그간의 인문학적 발견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신학적 작업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 백성의 특징을 이해하는데 있어, 성경이 진단하듯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이해는 피상적인 것에 그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며 하나님의 창조로 베풀어진 은총을 받은 존재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누구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와 연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별한 은총의 개입이 반드시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죄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인 이 특별한 은총은 인간 사이에 절대적 불연속을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는 그들 양자를 공통적으로 묶어낼 수 없는 근본적 차이가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굳이 인간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공통점을 찾자면, 그것은 죄가 주도권을 잡은 세상에 속한 죄인 된 본성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 이해의 차이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관점에 영향을 끼칩니다. 만일 죄에 대한 심각한 고려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행동이 만들어내는 역사와 사회도 창조라는 일반적 은총에 입각해 이해될 것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변증법적 과정에서 함께 일하는, 그분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때 인간의 죄인 됨이라는 특징이 중요한 변수로 고려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 정 교수께서는 미래의 종말의 향방은 인간의 역할에 따라 열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역사의 과정에 죄인인 인간이 과연 어떤 적극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정 교수의, 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사명에 대한 이해에 있어 이런 인간 이해가 그대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정 교수께서는, 한 설교비평문에서, 성서가 억울한 약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언급합니다. 그런데 저는 과연 성경의 핵심적 문제 제기가 그런 것인가 묻게 됩니다. 그것이 혹시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고백을 대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여성이나 소수 인종의 인권 문제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 혹 환경과 생태 문제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들이 각각 우리의 삶에 중요한 문제들이라는 점을 수긍하면서도,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강조가 기독교가 전하는 특별 은총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데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을 갖게 됩니다. 이런 이슈들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담아내는 근본적 주제라고 할 수 있을까요? 데이비드 웰스는 이런 요즘의 추세가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고백”이 사라진 데서 유래한다고 진단합니다.
현대라는 시기에, 하나님의 객관적인 진리와 시공간의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것에 대한 공적인 고백이라는 신앙고백은 학문 세계에서 매우 어색한 것이 되었다. … 이와 같이 일단 신앙고백이 사라져 버리자, 신학적 성찰이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신학적 성찰이 하나님 말씀의 연구라는 분야를 상실하게 되자, 동양적 영성에서 급진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스트 이데올로기에서 환경에 대한 관심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신학 성찰의 주제를 찾게 되었다. 더욱이 계급적인 관심사가 교회와 학문 세계에 끼어들어서 그 간격을 벌려 놓았다. (데이비드 웰스, 《신학 실종》, 156쪽)
죄에 대한 고려 없이 사회나 역사에 대해 논하는 것은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문제 제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죄에 대한 고려 없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는 방식도 성공적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역사와 실존은 모두 죄로 인한 왜곡, 오염, 부패를 증언할 뿐입니다. 기독교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으로, 죄로 인한 절망과 파멸의 현실을 깨고 재창조로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돌연한 은혜와 초월적 기적의 개입으로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되며, 새롭게 태어남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파멸의 운명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듯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식으로 세상과 역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죄에 사로잡힌 인간의 구원이 전제되어야만, 비로소 그 인간 개인이 이웃 곧 사회와 역사에 새롭게 관련되기 시작합니다. 죄인 됨으로부터의 해방이 개인에게 이루어질 때에야, 그에게 사회와 역사에서의 적극적 역할이 주어집니다. 저는 이런 역할을 ‘성화’라는 전통적 신학 개념 속에서 이해합니다. 성화의 과정을 통해 인간은 그 존재가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이와 같은 존재가 삶의 현장에서 이웃, 곧 사회와 역사 앞에 지는 책임이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로 비유되는 심판의 현장은 바로 이런 측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신앙적 실천적 책임은 구원에서 비롯된 불신자와의 다름, 곧 ‘죄’라는 측면에서의 다름인 ‘거룩’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거룩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죄인이란 하나님과 분리된 자이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그의 백성이요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었을 때, 산상설교가 가르치는 “빛과 소금”, “생명”, “진리”, “착한 행실”의 정의가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43 이하에서 설명하는,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이 보이는 신앙 인격적 정체성은 바로 이런 사람들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펼쳐진 삶은 이런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삶은 이 세상에서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도 완성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셨지만, 우리 인간은 아직 그분의 약속을 붙들고 그분의 성취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왜 이런 긴장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물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하나님의 전적인 예비하심에 맡겨져 있고, 때가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허락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기다림의 시간을 두시는 것은 그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 받는 성도들을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그 충만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람들을 부르시는 구원사역을 연장해나갈 시간이, 그리고 부름 받은 그분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되는 훈련과 완성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적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에베소서 2:22에서 “너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부부 사이의 관계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연합을 비교하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내용을 소유하기도 하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쓰임 받는 기관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 노릇 하시는 질서에 있어, 그리고 그분으로 말미암는 완성에 있어, 교회는 독특한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엡 4:13-16). 교회는 잘못 판단하고 세상에 타협하기도 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교회야말로 “진리를 함께 찾아가는 일을 인도함에 있어, 사고와 행위 모두에서 우리가 어디를 향해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를 안다”(뉴비긴, 263쪽)고 믿습니다.
신학의 근본 토대
사실 하나님께 무슨 일반적 은총과 특별한 은총이라는 구분이 있겠습니까? 어떻게 초월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시공의 세계에 갇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학적 성찰은 신앙을 그 대상으로 삼는 것인데, 신앙은 합리성을 넘어서는 대상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인간보다 크신, 초월적이신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성경에서 들으며, 그분을 신앙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께 얼마나 의존적 존재인가 하는 점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정 교수의 신학적 입장을 보면서 갖는 의문은, 정 교수께서 결국 하나님보다는 인간을 궁극적 기준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정 교수께서 기독교 신앙의 ‘신비’에 대해 여러 곳에서 재차 강조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신비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 구성된 신학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기독교 신앙이 인간으로는 넘볼 수 없는 차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우리의 차이가 빚어진 것일까요?
제 관찰로는 정 교수께서 전제하시는 신학은 사실보다는 의미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중대한 의미든 간에 그 의미가 발생한 터전인 사실이 견고할 때에만 비로소 그 사실에 의미가 담기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성적 판단에서 비롯되는 합리성이나 보편성의 이름으로, 사실을 재단하고 제한하며 배제하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신앙의 실제적 터전을 놓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 교수의 신학은 자신의 근거를 합리성을 근간으로 한 자기 확신에서 찾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합리성에 따라 판단되실 존재일까요? 오히려 우리의 합리성이 하나님의 주권을 근거로 판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신학이 어떤 것인지는 데이비드 웰스의 설명으로 더 분명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소 긴 인용이지만 함께 읽어보고 싶습니다. 데이비드 웰스에 따르면, 신학은 세 가지 필수적인 측면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들은 (1) 신앙고백적 요소(이 말은 성경을 ‘신앙고백’으로 여긴다고 말할 때처럼 ‘고백’으로서의 주관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2) 이 신앙고백에 대한 성찰, (3) 이 처음 두 요소에 기초한 영성입니다.
[첫째,] 신앙고백이란 교회가 믿는 내용이다. 신앙고백은 교리에 농축되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개신교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교회는 하나님이 영감 된 하나님 말씀을 통해 교회에 주신 진리를 고백한다. 어떤 주제라 해도 그 주제에 대해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느냐 또는 그 교훈을 어떤 식으로 엮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권위적인 진리가 기독교 생활과 실천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치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성경의 권위 아래 살아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수 세기 동안 교회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핵심적인 신앙고백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슬로건이다. 이 지식이 없으면,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하는 내용이 빠져 버리며, 믿음과 예배와 그 생명의 유지와 선포와 봉사의 수단을 잃게 된다. 신앙고백은 말 그대로 테올로기아(theologia), 즉 하나님 백성을 위해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서 모든 신학의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
신학의 두 번째 요소인 성찰에는 현대 세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지적인 싸움을 내포한다. 이런 성찰은 세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신학적 성찰에는 성경 안에 포함된 하나님의 계시 전체가 망라되어서 성경의 다양한 부분 사이의 연관성을 추구해 하나님의 성품과 행위와 의지를 계시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명료하게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그 성찰의 목표는 하나님이 주신 내용을 포괄적으로 이해해서 하나님의 생각이 교회의 생각 가운데 재현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있다. 둘째로, 신학적 성찰에는 과거에 대한 전체적인 연구가 포함되어야 한다. 신학적 성찰은 과거에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일하시고 역사하신 사실에서부터 현재의 폭풍우 가운데서 교회라는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해 주는 무게 중심을 찾아야 한다. 과거의 영적인 부요를 모으며, 현재를 절대화하지 않고 상대화해 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반성적인 성찰이다. 현재는 언제나 인간 정신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고양되어 있는 순간(혹은 어떤 은사주의자들이 생각하듯이,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고 착각하는 태도를 버릴 필요가 있다. 이런 태도는 교만과 어리석음을 향해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신학적 성찰은 신앙으로 고백되는 내용과 한 사회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작업은 매우 중요한데, 어느 한 시대의 사상과 가정이 교회의 마음과 생각 속으로 아주 강하게 침투하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현대성이 ‘정상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했다. 신학적 성찰이라는 특정한 맥락에서 말할 때, 교회는 현대성이 교회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지평에 교회의 생각을 맞추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현대성의 지평에 대해 하나님의 진리라는 강력한 해독제, 즉 교정 수단을 갖다 주어야 한다. 비신화화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현대성이다.
신학의 세 번째 요소에는 삶의 지혜, 즉 기독교적인 실천이 신앙고백의 기둥 위에 건설되고, 성찰의 발판에 둘러싸이도록 만드는 지혜를 구성하는 덕목을 계발하는 일이 포함된다. 이 말은 좀 단순하게 들린다. 내가 이 말을 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지금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종류의 영성이다. 이 영성은 그 성격에 있어서 도덕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존재상으로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 영성은 기독교적인 실천, 기독교적인 삶을 우선적으로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 진실의 문제로 보는 영성이며, 생각과 실천을 분리시키지 않는, 이런 분리를 거부하는 영성이다. 이런 영성이 존재할 때에만 어떤 주어진 상황 가운데서도 기독교적이 된다는 것,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난다. (데이비드 웰스, 《신학 실종》, 153-155쪽)
한편, 정 교수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역사 결정론에 머물러 있는 한,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감수성은 어느 정도 확보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섭리는 역동성을 상실한 일종의 프로그램으로 추락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역사의 우연이다. 그는 이미 예정된 부활을 확신하고 십자가를 선택한 게 아니라 자신의 모든 미래를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자기에게 다가온 십자가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예수의 완전한 순종이 바로 십자가 구원의 역동성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이미 예정되고 결정된 수순의 진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주술이고, 거꾸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절대적 순종과 신뢰의 결과로 생각하는 것은 역사이다. 그렇다. 기독교 신앙은 이미 결정된 길을 군말 없이 따라가는, 그래서 인간의 앙가주망이 근본적으로 차단된 숙명주의가 아니라 미래로 열린 길을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부단히 고뇌하고 결단하는 역사의식이다.
… <중략> …
신비라는 말은 어떤 궁극적인 실체가 은폐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생명은 그 리얼리티가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는 점에서 신비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앙의 신비는 역사의 신비에 자리하고 있다. 이에 반해 주술은 형식으로만 신비이지 실제로는 인간이 역사의 신비에서 감수해야 할 불안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와 생명의 신비를 파괴하는 인간의 자기 전략이고 자기 숭배이다. 주술은 결국 신앙의 신비를 파괴할 뿐이다. (정용섭, 《설교비평1 속 빈 설교 꽉찬 설교》, 29-30쪽)
정 교수와 저 모두가 신비를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설명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신비가 인간의 수준을 초월하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정 교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마저도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되실지 모른다는 차원에서 말하는 신비 같습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역사가 초월적이라는데 그 신비가 있고, ‘이미’와 ‘아직’ 사이의 종말적 현실에 그 은폐와 노출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비는 예수 안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 신비이며 그래서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성도들에게 신앙으로 확인되는 신비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보듯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하나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이것이 신비인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으나 우리의 눈에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들어와 있는 탓입니다.
기독교가 열어놓는 신비가 하나님 자신마저도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종말을 작정하셨다고 말하면, 그게 주술적인 말일까요? 정 교수께서는 인간이든 하나님이든 간에 누구도 미래를 확정해 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미래가 어떻게 완성될 것인지를 정하셨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역동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과연 모순일까요? 오히려 예수의 십자가가 결정된 수순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순종과 신뢰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 성경의 명시적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세례 요한에 의해 소개되었고, 예수 자신도 친히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러 오셨음을 공언했다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이것 역시 주술에 빠진 후대의 해석일 뿐일까요?
설교
정 교수의 지적대로 한국 교회 강단은 본문 해석이 부실합니다. 그것은 한국 교회 전체의 수준이 낮은 탓이기도 하고 설교자의 개인적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분명 속상하고 가슴 아픈, 우리 시대 한국 교회 설교자와 설교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설교자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고린도전서 1:26-31에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교자의 위상은 그가 갖고 있는 자질이나 능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쓰신다는 점에서 발견됩니다. 저는 설교자의 무능(無能)이 하나님을 분명히 드러내므로, 설교자는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쓰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설교자의 능력이나 열심은 이 무능함을 돕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설교자의 열심은 그 자신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항복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일 겁니다.
하나님께 설교자는 출애굽 사건의 모세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사용해 여러 기적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지팡이로부터 기적이 나오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팡이는 단지 들려서 쓰임 받을 뿐입니다. 모세의 역할이 이와 같습니다. 모세는 실은 하나님의 지팡이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 들려 기적을 일으키듯, 모세는 하나님께 들린 지팡이로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냅니다. 설교자 역시 모세처럼 하나님의 지팡이로 쓰임받습니다. 고린도전서 1:29에서 “자랑치 못한다”고 한 것은 설교자가 그를 통해 이루어진 일의 원인이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21절의 “전도의 미련한 것”에서도 확인됩니다. 전도가 왜 미련한 것이냐 하면,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로마서 10:9-15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이 어디에서 시작하는가를 역(逆)추적해보면 하나님이 그 시작이요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의 선한 결과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일 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설교가 철학, 소위 사람들의 판단에 부합하는 합리적 설명으로 이해될까봐 심히 두려워하고 떨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증거가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을 통해서만 효과를 낳게 된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고전 2:1-5).
기독교 신앙은 지식과 이해를 넘어서는 생명과 진리의 역동성, 곧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이시고 은혜로우신 개입에 정초되어 있습니다. 설교자가 그런 하나님께서 인간을 편들고 계신다는 점을 알고, 그 자신도 설교로써 그런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편들고 있다면, 그가 하는 설교는 기본은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의 설교를 비평하자면, 설교에서 신학이 실종된 현실을 먼저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설교는 신학에 튼튼히 뿌리내리고 있지 못합니다. 설교가 성경이 가르치는 계시의 내용을 제대로 담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계적이지 않으며, 이해관계에 매어있지 않으며, 인과율(因果律)을 넘어섭니다. 설교는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설교가 직면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는 ‘세속성’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걸어온 지난 모든 나날동안 끊임없이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해 온 것이 바로 세속성의 문제입니다. ‘세속성’이란 하나님이외의 것을 궁극적인 목적과 가치로 삼는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현대에 이 세속성은 절대를 부인하는 다원주의로, 개인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실용주의로, 값싼 보편성을 위한 대중성으로, 모양을 바꿔가며 우리를 시험하며 공격해 옵니다.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그분의 명령을 좇으며 그분만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교회 안에서도 성경을 펴서 가르치되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딤후 3:2) 성경이 전해주는 계시를 거스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는 말씀을 통해, 돈으로 되는 것, 곧 세상의 무가치한 것을 목적으로 삼는데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인간의 필요에 대해 말하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속주의가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 및 종교 개혁과 부흥, 선포와 회심에 고정시키는 대신에, 우리 자신과 우리 나라와 우리 세계와 우리의 시간과 공간과 우리의 순간에 고정시키고 있음이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각 지역의 크리스천 서점들과 강단들과 주일학교 커리큘럼과 방송과 종교적 담화에도 확연히 드러난다.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104쪽)
교회의 설교는 교회가 성경에서 배워 전통으로 물려받은 신앙고백에 근거하고 그 고백에 대한 신학적 통찰과 종합으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이로써 모든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제기하는 궁극적인 질문에 직면하여, 한 인간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게 될 때, 그의 곤고한 영혼은 비로소 평안과 위로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소위 닦달과 나열 등의 유치한 설교 행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에 제일 많이 하는 것이 닦달과 잔소리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수준 높고 훌륭한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이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우리가 늘 게으르고 무지하고 완악하다는 사실을 폭로합니다. 부모는 진정 자녀들을 사랑할 때 책망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설교는, 늘 죄와 싸우며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완성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 청중들에게 죄와의 싸움을,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주인 삼으려는 ‘자기 의(義)’와의 싸움을 싸우도록 애써 독려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시험 앞에 우리는 얼마나 자주 넘어집니까? 저는 다시금 마이클 호튼의 진단에 공감합니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간증들’을 생각해 보라. 개인적인 체험들을 ‘나누는 일’이 공동 기도와 공동 성경연구, 예배와 증거를 대신하고 있다. 개인의 영적인 자서전이 저 나사렛 사람의 생애와 시대를 대신해 버렸다”(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88쪽).
맺는말
토론이나 논쟁으로 정 교수나 저의 신학적 입장에 변화가 생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 교수의 설교비평을 읽으며 우리 각자의 견해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정 교수의 복음에 대한 열정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서로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참된 대화는 강요와 설득이라는 목적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기본 조건으로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 교수의 한국 교회 강단을 향한 비판이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애정에서부터 출발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저는 가슴깊이 그 충정에 공감합니다. 개인적으로 정 교수의 비평 속에서 범상치 않은 영적 통찰과 진정한 영성의 편린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 서로 다른 전통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진심과 목표는 같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영광과 자랑이 더 분명히 드러나고, 더 많은 영혼들에게 진리와 생명이 올바르게 증거 되며, 그럼으로써 한국 교회가 성숙해가는 데에 우리의 공통의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관점과 견해에 있어 많이 다르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 곧 ‘하나님과 복음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근본적 목적에서 일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다름과 같음 모두를 사용하셔서 한국 교회 앞에 우리의 사명이 합력하여 선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기독교사상, 2007년 5월호)
박영선 목사는 한양대학교 졸업, 총신대학교 신대원 졸업, 미국 리버티 벱티스트 세미나리 명박, 현재 남포교회 담임 목사이며, 합동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교수로 있다. 저서로 <구원의 완성 1,2>, <그제야 끝이 오리라>, <구원, 그 이후> 외 다수가 있다.
2007.04.30 15:10:20
공부 많이 한 것 아닙니다.
의견 차이의 맥을 잘 짚어 정리한 것은 학자답습니다만,
칼뱅주의 보수 신학의 선입견으로 대충 읽고 자기 입맛대로 쓴 비평문일 뿐입니다.
역시, 서 있는 지평이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하게 만드는군요.
시간을 좀 내서 상세하게 댓글을 달겠습니다만,
누가 선입견을 배제하고 텍스트(성서 정경)에 충실한지,
그야말로 적반하장입니다.
칼뱅주의를 복음과 성서, 정통신앙과 아무렇지도 않게 동일시하는 저 뻔뻔스러움은,
(물론, 박 목사님께서 의식하시고 뻔뻔스러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칼뱅주의 보수 신학 그 자체가 그러하니까 박 목사님 개인의 잘못은 아니겠지요)
하루이틀 접한 것은 아닙니다만, 정말 징글맞습니다.
의견 차이의 맥을 잘 짚어 정리한 것은 학자답습니다만,
칼뱅주의 보수 신학의 선입견으로 대충 읽고 자기 입맛대로 쓴 비평문일 뿐입니다.
역시, 서 있는 지평이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하게 만드는군요.
시간을 좀 내서 상세하게 댓글을 달겠습니다만,
누가 선입견을 배제하고 텍스트(성서 정경)에 충실한지,
그야말로 적반하장입니다.
칼뱅주의를 복음과 성서, 정통신앙과 아무렇지도 않게 동일시하는 저 뻔뻔스러움은,
(물론, 박 목사님께서 의식하시고 뻔뻔스러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칼뱅주의 보수 신학 그 자체가 그러하니까 박 목사님 개인의 잘못은 아니겠지요)
하루이틀 접한 것은 아닙니다만, 정말 징글맞습니다.
2007.04.30 16:34:38
무명재님께서는 보수적인 신앙인들이나 신학자들에게 단단히 대이셨나 보군요. ^^
박 목사님께서는 본인의 신앙과 신학 노선에서 정 교수님의 신앙과 신학을 비교하셨고 그리고 인정하셨는데 "대충 읽고 자기 입맛대로 썼다", "뻔뻔스럽다" 혹은 "징글맞다" 등의 야유(?)는 무명재님답지 않게 생각되어 집니다. ^^::
무명재님의 답글을 읽고 있노라면 이곳에서는 보수적인 신앙인들은 글을 쓰기가 두렵게 느껴지는 걸요.
저는 박 목사님께서 쓰신 글의 마지막 부분인 "합력하여 선을 이뤘으면 한다"에 오히려 점수를 더 주고 싶네요.
박 목사님께서는 본인의 신앙과 신학 노선에서 정 교수님의 신앙과 신학을 비교하셨고 그리고 인정하셨는데 "대충 읽고 자기 입맛대로 썼다", "뻔뻔스럽다" 혹은 "징글맞다" 등의 야유(?)는 무명재님답지 않게 생각되어 집니다. ^^::
무명재님의 답글을 읽고 있노라면 이곳에서는 보수적인 신앙인들은 글을 쓰기가 두렵게 느껴지는 걸요.
저는 박 목사님께서 쓰신 글의 마지막 부분인 "합력하여 선을 이뤘으면 한다"에 오히려 점수를 더 주고 싶네요.
2007.04.30 17:01:53
무명재님의 열정을 이해 하지만
이번 경우는 언급이 지나쳐요.
그간 다비아에 참여하는 기본적인 이유가
무 의미한 소모전을 치루기 위함이 아니었기에
나름대로 자제 했었지요.
혼자 북치고 장고치는 차원을 넘어
이젠 확신으로 이어지는 부당함에
더 이상 침묵할 이유를 발견하기 힘들군요.
시간내서 상세하게 댓글를 달게다고 하셨으니 기다리지요.
최대한 성의있는 답글을 드리겠습니다.
이번 경우는 언급이 지나쳐요.
그간 다비아에 참여하는 기본적인 이유가
무 의미한 소모전을 치루기 위함이 아니었기에
나름대로 자제 했었지요.
혼자 북치고 장고치는 차원을 넘어
이젠 확신으로 이어지는 부당함에
더 이상 침묵할 이유를 발견하기 힘들군요.
시간내서 상세하게 댓글를 달게다고 하셨으니 기다리지요.
최대한 성의있는 답글을 드리겠습니다.
2007.04.30 17:31:53
‘설교를 통해 복음, 기독교의 본질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느냐 하는 물음,,’
후반부에서,
박 목사님의 대답을 들을 수 있더군요.
‘
인간의 역사와 실존은 모두 죄로 인한 왜곡, 오염, 부패를 증언할 뿐입니다.
기독교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으로,
죄로 인한 절망과 파멸의 현실을 깨고 재창조로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돌연한 은혜와 초월적 기적의 개입으로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되며,
새롭게 태어남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파멸의 운명에서 우리를,,,,,
죄인 됨으로부터의 해방이 개인에게 이루어질 때에야,,,
저는 이런 역할을 ‘성화’라는 전통적 신학 개념 속에서 이해합니다.
불신자와의 다름, 곧 ‘죄’라는 측면에서의 다름인 ‘거룩’이라고,,,
이 거룩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
물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하나님의 전적인 예비하심에 맡겨져 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람들을 부르시는 구원사역을 연장해나갈 시간이, 그리고
부름 받은 그분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되는
훈련과 완성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
’
맺는말
‘영광과 자랑, 더 많은, 한국 교회’
후반부에서,
박 목사님의 대답을 들을 수 있더군요.
‘
인간의 역사와 실존은 모두 죄로 인한 왜곡, 오염, 부패를 증언할 뿐입니다.
기독교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으로,
죄로 인한 절망과 파멸의 현실을 깨고 재창조로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돌연한 은혜와 초월적 기적의 개입으로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되며,
새롭게 태어남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파멸의 운명에서 우리를,,,,,
죄인 됨으로부터의 해방이 개인에게 이루어질 때에야,,,
저는 이런 역할을 ‘성화’라는 전통적 신학 개념 속에서 이해합니다.
불신자와의 다름, 곧 ‘죄’라는 측면에서의 다름인 ‘거룩’이라고,,,
이 거룩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
물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하나님의 전적인 예비하심에 맡겨져 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람들을 부르시는 구원사역을 연장해나갈 시간이, 그리고
부름 받은 그분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되는
훈련과 완성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
’
맺는말
‘영광과 자랑, 더 많은, 한국 교회’
2007.04.30 18:09:14
저도 무명재님의 말씀에 백번 공감합니다. 뭔가 제가 끈이 짧아서 제대로 표현을 못하겠을 뿐 그 글을 읽고 난 후에 문제 의식이 많이 느껴집니다... 무명재님께서 첫 운을 떼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정용섭 목사님께서 판넨베르크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정 목사님은 정 목사님 자신 속에 녹아서 다시 나오는 이야기를 다시 하고 계시구요, 박영선 목사님의 글은 자신의 이야기가 전혀 아니라고 느껴진다는 점... 보수신학자들의 대부분의 특징이겠지만 서구 신학 거장(?)들의 앵무새 역할만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오늘 반론도 서구 신학자 몇 명의 견해로 도배하는 수준이군요...
정목사님께서 보편성에 주력하고, 인간의 이성으로 하느님의 본질로 들어가려고 애쓰면서 하느님의 특별 계시를 무용화 하는 시도를 한다는 식으로 그런 표현을 하셨는데...
역으로 박영선 목사님을 위시한 보수 신학자들의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기독교는 세상과는 도저히 소통 불가능한 자폐증의 종교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참 진리라면, 세상 사람들 중에서도 전혀 종교심이 없는 사람들이면 몰라도 그 맘 속의 지성소를 소중히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라면, 기독교라는 낯선 종교 속에 흐르는 진리의 맥락을 통해 뭔가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식의 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선교가 의미가 있는 것이겠구요...
그리고 박 목사님을 위시한 보수 신학자들의 "특별 계시 이해" 가 낳은 산물은 뭐라고 할까... 말하자면 복음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 같은 그런 금기로 이해하게 만들어서 아예 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독교를 "생명을 잃은 박제화된 관념"의 종교로 전락하게 만들어버렸고 예수, 하나님, 부활, 삼위일체라는 것이 결국은 관념에서 관념으로 끝나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저는 보수적인 목사님들이 성서의 난해한 내용, 예를 들어서 고린도 전서의 15장의 전체를 꿰뚫어서 바울이 깨달은 “부활”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서 그 비의를 설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예 건드리지도 않더군요... 기껏해야 그 속에서 몇 구절 떼어 와서는 박제된 교리로서의 “부활”의 내용을 증명하는 노작을 반복할 따름이죠... 그런 패턴에서 어떻게 성서의 깊이를 이야기할 수가 있을까요?
저는 “특별 계시”란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폐쇄되었다거나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금기의 영역이란 의미가 아닌,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절대의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 확연히 드러났다는 그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산소가 “오투”로 밝혀지기 전에도 산소는 존재한 것처럼...
그리고 박영선 목사님은 창조주로서의 하느님보다는 구속주로서의 하느님께 더 큰 의미를 두시는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이분법적인 생각이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이 더욱 본원적인 뿌리라고 생각하며, 그 속에서 구속주로서의 하느님의 속성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없이 어떻게 구속주로서의 하느님이 나올 수 있는지 의아합니다... 그만큼 근본주의-혹은 개혁주의(?)- 개신교 신학의 천박성을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죄” 라는 것에 대한 단선적이고 평면적인 이해 -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단절” 이라는 한 마디로 끝이 나버리죠... 그리고는 성서 속에서 입 맛에 맞는 구절 구절 따와서 그 개념을 증명해내고, 이해만 하면 되구요-가 어떻게 우리 실존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서 그 속을 휘저을 수 있을까요? 저도 근본주의적인 죄 이해 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했고, 그 속에서 도움을 받으려고 노력해보았지만 오히려 숨이 더 막혔던 느낌을 기억합니다...
주절 주절 두서없이 지껄였습니다... 또 생각이 나면 쓰겠습니다...
정용섭 목사님께서 판넨베르크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정 목사님은 정 목사님 자신 속에 녹아서 다시 나오는 이야기를 다시 하고 계시구요, 박영선 목사님의 글은 자신의 이야기가 전혀 아니라고 느껴진다는 점... 보수신학자들의 대부분의 특징이겠지만 서구 신학 거장(?)들의 앵무새 역할만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오늘 반론도 서구 신학자 몇 명의 견해로 도배하는 수준이군요...
정목사님께서 보편성에 주력하고, 인간의 이성으로 하느님의 본질로 들어가려고 애쓰면서 하느님의 특별 계시를 무용화 하는 시도를 한다는 식으로 그런 표현을 하셨는데...
역으로 박영선 목사님을 위시한 보수 신학자들의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기독교는 세상과는 도저히 소통 불가능한 자폐증의 종교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참 진리라면, 세상 사람들 중에서도 전혀 종교심이 없는 사람들이면 몰라도 그 맘 속의 지성소를 소중히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라면, 기독교라는 낯선 종교 속에 흐르는 진리의 맥락을 통해 뭔가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식의 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선교가 의미가 있는 것이겠구요...
그리고 박 목사님을 위시한 보수 신학자들의 "특별 계시 이해" 가 낳은 산물은 뭐라고 할까... 말하자면 복음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 같은 그런 금기로 이해하게 만들어서 아예 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독교를 "생명을 잃은 박제화된 관념"의 종교로 전락하게 만들어버렸고 예수, 하나님, 부활, 삼위일체라는 것이 결국은 관념에서 관념으로 끝나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저는 보수적인 목사님들이 성서의 난해한 내용, 예를 들어서 고린도 전서의 15장의 전체를 꿰뚫어서 바울이 깨달은 “부활”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서 그 비의를 설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예 건드리지도 않더군요... 기껏해야 그 속에서 몇 구절 떼어 와서는 박제된 교리로서의 “부활”의 내용을 증명하는 노작을 반복할 따름이죠... 그런 패턴에서 어떻게 성서의 깊이를 이야기할 수가 있을까요?
저는 “특별 계시”란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폐쇄되었다거나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금기의 영역이란 의미가 아닌,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절대의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 확연히 드러났다는 그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산소가 “오투”로 밝혀지기 전에도 산소는 존재한 것처럼...
그리고 박영선 목사님은 창조주로서의 하느님보다는 구속주로서의 하느님께 더 큰 의미를 두시는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이분법적인 생각이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이 더욱 본원적인 뿌리라고 생각하며, 그 속에서 구속주로서의 하느님의 속성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없이 어떻게 구속주로서의 하느님이 나올 수 있는지 의아합니다... 그만큼 근본주의-혹은 개혁주의(?)- 개신교 신학의 천박성을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죄” 라는 것에 대한 단선적이고 평면적인 이해 -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단절” 이라는 한 마디로 끝이 나버리죠... 그리고는 성서 속에서 입 맛에 맞는 구절 구절 따와서 그 개념을 증명해내고, 이해만 하면 되구요-가 어떻게 우리 실존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서 그 속을 휘저을 수 있을까요? 저도 근본주의적인 죄 이해 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했고, 그 속에서 도움을 받으려고 노력해보았지만 오히려 숨이 더 막혔던 느낌을 기억합니다...
주절 주절 두서없이 지껄였습니다... 또 생각이 나면 쓰겠습니다...
2007.04.30 18:08:40
전통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아직 전통주의 신학의 틀안에서 생각하고자 하는 저에게 박목사님의 글을 이해가 많이 갑니다. 그런데, 박목사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서로 다른 신학적 틀속에서 다른 틀을 가진 목사님의 설교를 비평하는 것에 대한 적절치 못함을 지적하신것 같습니다.
정목사님의 설교 비평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 배웠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가지 드는 생각이 정목사님의 신학과 대부분 한국 목사님의 신학에 많은 차이가 아는데, 이런 설교비평이 어느정도 효과가 나타나겠느냐 입니다. 보수신학과 정목사님의 신학의 공통부분으로만 비평을 한다면 좋겠지만, 보수신학을 넘어서 비평을 하게 된다면, 차라리 설교비평보다는 신학논의가 더 옳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박목사님의 의도가 이런가 같습니다...
박목사님이 정통신학이 옳다고 주장하지도, 정목사님의 신학이 틀리다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다른틀 위에 서있다는 것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런데 밑에 댓글중 정통신학에 대해서 비판하시는 지요... 다른 신학틀 위에서 설교를 비평하는 것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목사님의 설교 비평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 배웠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가지 드는 생각이 정목사님의 신학과 대부분 한국 목사님의 신학에 많은 차이가 아는데, 이런 설교비평이 어느정도 효과가 나타나겠느냐 입니다. 보수신학과 정목사님의 신학의 공통부분으로만 비평을 한다면 좋겠지만, 보수신학을 넘어서 비평을 하게 된다면, 차라리 설교비평보다는 신학논의가 더 옳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박목사님의 의도가 이런가 같습니다...
박목사님이 정통신학이 옳다고 주장하지도, 정목사님의 신학이 틀리다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다른틀 위에 서있다는 것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런데 밑에 댓글중 정통신학에 대해서 비판하시는 지요... 다른 신학틀 위에서 설교를 비평하는 것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2007.04.30 18:09:08
● "제게 있어서, 신학은 그 무게를 ‘신’(神)께 두고 신께서 의지적으로 보여주시는 계시만을 그 원리로 삼고 있다면, 정 교수께서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는 이른바 ‘학문’에 무게중심을 두고 신학을 해나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제가 인간의 근본적 특성을 죄인 됨에서 찾는다고 한다면, 정 교수께서는 인간에게 보다 적극적 의미에서의 가능성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 정용섭 목사님의 신학이, 인간의 죄인된 실존을 부정하거나 경시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고,
정용섭 목사님께서 전공하신 판넨베르크 역시, 그리스도교 계시의 빛 아래서, 온당한 이성에 의한 사유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박영선 목사님은 모르시는 건지, 애써 무시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판넨베르크가 자연과학자들에게 촉구하는 바는,
자연과학의 사유 영역을 넘어서는 초월자를 상정하는 것이 자연과학에 반하는 것이 아니며,
도리어, 자연과학이 설정한 영역에 우주를 한정하여 파악하려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 아닙니까?
● "역사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셨으며, 미래, 곧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성취된다고 생각합니다. 판넨베르크가 역사를 “열린 과정”이라고 말한다면, 제가 배운 신학은 역사는 하나님의 뜻하심에 따라 정해져 있다고 여깁니다."
→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예정 신앙으로 설명해야 될 필연성을 저는 느낄 수 없습니다.
왜 역사를, 나아가 하느님까지도 정태적 세계관으로 파악하려 드는지요?
이러한 세계관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당신의 형상의 한 속성인 '자유'와 배치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확실성을 이렇게 객관적으로 담보하려 든다면, 결국 신앙은 구원이 아닌 억압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 [이 세계는 곧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에 접근하는 길이다. 이런 방식 말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도달하겠는가? 진리에 도달해 보려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사실 이런 인식론적 근거에서 이루어진다.] (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192쪽)
"앞서 살펴본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에 대한 강조와 맥을 같이하는 설명으로 보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하나님의 계시란 세계를 통해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의 창조자이시므로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며, 우리는 이에 주목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앎은 “하나님 스스로 자기의 본질을 노출하는 것에 대한 ‘자연적 앎’의 문제”라고 덧붙여 설명됩니다(정용섭, 《말씀신학과 역사신학》, 192쪽). 인간이 자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설명을 따라가면서, 정 교수의 계시 이해가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로 여기는 기독교의 전통적 이해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 교수의 이 같은 입장에는 이성적 판단에 따라 성경을 역사적 주관적 신앙고백 문서로만 받아들이려고 한 계몽주의 이후 학문의 결론이 그대로 전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계시만으로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큰 장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 인간이 자기초월성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궁극에 대한 관심이며, 종교도 여기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로 함몰되는 자기지향성 또한 갖고 있기에, 계시를 인식하는 데 한계가 있고,
결국, 죄인된 실존이랄 수 있는, 인식론적, 해석학적 자기함몰, 즉, 우상숭배에 빠지고 만다는 점은,
정 목사님과 판넨베르크는 물론, 현대의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도 기초적으로 긍정하는 바입니다.
문제는, 그렇다면, 인간은 불가지론적인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느냐, 어떻게 인간이 계시를 인식하느냐인데,
보편계시로서의 보편사, 세계를 통해서, 하느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을 수 있고,
이것이 세계 및 궁극에 대한 사유의 단초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발상이 무가치하고, 비복음적입니까?
그리고, 이러한 인식론이 그리스도교 전통과 다르다는 것도, 박 목사님의 독단적 판단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그리스도교 전통이 아니라는 겁니까?
단지, 인식론적 단초를 제시한 것에 대하여,
이성적 판단으로, 성서를 주관적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는 계몽주의적 전제를 깔고 있다느니,
그래갖고는 하느님에 대하여 "충분히" 알 수 없다느니,
(누가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단언합디까?)
이런 비약을 일삼는 것은 학자답지 못한 부당한 글쓰기입니다.
제가 짐작컨대, 박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인간에게(의) 큰 장애", "죄인됨"에 박 목사님께서,
'율법적'으로 집착하고, 강력한 선입견으로 전제하고 계시기에, 이러한 부당한 비약이 배태된다고 봅니다.
● "왜 정 교수께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주신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근대성에 대한 요즘의 연구들이 보여주듯, 인간 이성을 최종적 판단자로 여긴 계몽주의적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정 목사님께서, 하느님의 특별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그분을 통한 구원의 복음,
정경으로서의 성서를 부정한 적이 없는데,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누명을 씌웁니까?
부당한 전제를 마음대로 내려놓고,
자기 입맛대로, 보수근본주의의, 진보, 자유주의에 대한 예의 낡은 비난의 켸켸묵은 문구들을 들이대고 있는데,
비록 존경받는 신학자이시며 목회자이신 박 목사님이시지만,
위의 저의 댓글과 같이, 원색적인 비난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하지만 이성적 판단을 따라 신앙을 설명하려는 인간의 해석마저도 자의적 성격을 띠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적 판단에 대한 강조 역시 시대적 환경의 영향 속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터 버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각자 나름의 “타당성 구조”에 따라 판단합니다. 어떤 일이 타당한가에 대한 판단은 이미 전제되고 있는 어떤 사고 체계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이성적 판단을 최종적 기준으로 설정한 것부터가 근대 이후 계몽주의의 전제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합리적 인식론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전제 자체가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박 목사님께서는, 자신의 준거인 칼뱅주의 보수 신학, 예정 신앙에 대해서도
자의성, 상대성의 수식어를 붙이십니까?
"전제되고 있는 어떤 사고 체계"라고 언급하셨거니와,
정경으로서의, 특별 계시로서의 성서는,
초월자인 하느님께서 인간의 언어로 주신 말씀인데,
이 이중성의 구조를 지닌 성서 텍스트에 대하여,
텍스트 파악의 언어적, 역사적, 문화적(뭉뚱그려 인문적)인 다양한 방법론으로 접근하는 편과,
보수 신학과 예정 신앙의 선입견으로 독해하는 것,
어느 쪽이 공정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자연과학 등 인간 이성이, 그 영역을 벗어나는 세계라고 초월자와 궁극성을 부정하려는 이성주의, 과학주의가,
결코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차원에서의 보편사 신학이라면,
이것을 두고 인본주의라고, 그것도, 강고한 신앙적 선입견으로 필터링하여 하느님 말씀을 읽는 쪽이,
그렇게 비판한다면,
비난 이전에, 먼저 자신부터 돌아보라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 "정 교수께서 주장하시는 신학적 인식론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계시로서보다는, 주관적 수준의 ‘신앙고백’이라고 여겨집니다. 성경을 보편사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에 접근해간 사건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 관찰로는 정 교수께서 전제하시는 신학은 사실보다는 의미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 위에서도 말씀드렸거니와,
초월자인 하느님께서 인간의 언어로 주신 특별 계시가 성서입니다.
언어는 사고를 규정하지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초월자를 알 수 없다고 저도 백번 동의했습니다만,
'앎', 즉, 인식과 사고 행위란, 언어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초언어적이신 하느님께서 언어로 당신을 계시하셨다는 점에 대하여,
보수신학자들은 뭐라 답할랍니까?
이 딜레마, 인식론적, 해석학적 난점,
하느님과 인간과의 실존적 단절성,
이 사이에서, 근대 이후 개신교 신학자들은 치열하게 고민했던 겁니다.
그 실존적 고민을 두고 '주관적 수준'이라 폄하하는 그 준거는 무엇인가요?
사실, 기적이니, 사건이나 대상 그 자체만으로는 내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 대상과 내가 서로 유의미해지는 '만남'의 현상이 일어날 때,
서로에 대하여 말할 수 있고, 대화가 가능해지며,
성서 계시도 그 과정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은, 하느님의 케리그마를 일방적 선포로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드렸거니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당신의 형상으로서의 '자유'는,
상호 인격성이고, 이 상호 작용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역사를 이끌어가시고 당신의 구원 사역을 성취해 가신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인격적이고 살갑게 다가오는 사랑의 하느님을 말할 수 있지,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예정 속에 세계 역사를 진행해 가시는 하느님 상에서,
사랑의 십자가가 과연 맥락에 맞는지 의아합니다.
예정이니, 제왕적 일방성과 선포 등의 정태적, 객관적 인식으로
하느님을 파악하고, 신앙의 확실성을 담보하려 드는 것은,
제가 볼 때, 하느님의 속성을 축소, 왜곡하는 인본주의요, 불신앙입니다.
● "한편, 정 교수께서 보여주는 인간 이해에 인간의 심각한 형편, 곧 죄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설교에 대한 비평에서도 그러했듯, 정 교수께서는 기독교적 삶에서 죄가 강조되는데 대해 우려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의식에 묶여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투쟁하고, 용서하고, 변혁해 나가도록 돕는다. 이 사실이 복음의 핵심이다”(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229쪽)."
"인간의 죄(罪)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을 때,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어떻게 이해될까 생각해 봅니다."
→ 비단 박 목사님 뿐만 아니라, 보수주의자들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바인데,
그들은, 죄에 대하여 무수히 강조하지만,
정작, 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은 실존적, 언어적, 인식과 해석학적 딜레마에 대하여,
보수 진영의 논의를 접한 적이 없습니다.
저도 딴에는 두루두루 기웃거리는데도 말입니다.
제가 "선입견"이라 지적했거니와, 보수 신학은, 인간 언어의 속성과 인식의 한계에 대하여,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객관적, 수동적으로 수납하기에,
죄라는 것을, 하느님에 대한 불순종이라는 법률적, 상명하복적 류의 도식으로 쉽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전통적 그리스도교에 편만한 죄의식 또한, 이 맥락에서 파생되었다고 보구요.
그럴진대, 박 목사님이, 정 목사님의 신학에 대하여 죄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다고 비난하는 건,
적반하장이라는 겁니다.
→ 정용섭 목사님의 신학이, 인간의 죄인된 실존을 부정하거나 경시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고,
정용섭 목사님께서 전공하신 판넨베르크 역시, 그리스도교 계시의 빛 아래서, 온당한 이성에 의한 사유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박영선 목사님은 모르시는 건지, 애써 무시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판넨베르크가 자연과학자들에게 촉구하는 바는,
자연과학의 사유 영역을 넘어서는 초월자를 상정하는 것이 자연과학에 반하는 것이 아니며,
도리어, 자연과학이 설정한 영역에 우주를 한정하여 파악하려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 아닙니까?
● "역사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셨으며, 미래, 곧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성취된다고 생각합니다. 판넨베르크가 역사를 “열린 과정”이라고 말한다면, 제가 배운 신학은 역사는 하나님의 뜻하심에 따라 정해져 있다고 여깁니다."
→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예정 신앙으로 설명해야 될 필연성을 저는 느낄 수 없습니다.
왜 역사를, 나아가 하느님까지도 정태적 세계관으로 파악하려 드는지요?
이러한 세계관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당신의 형상의 한 속성인 '자유'와 배치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확실성을 이렇게 객관적으로 담보하려 든다면, 결국 신앙은 구원이 아닌 억압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 [이 세계는 곧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에 접근하는 길이다. 이런 방식 말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도달하겠는가? 진리에 도달해 보려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사실 이런 인식론적 근거에서 이루어진다.] (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192쪽)
"앞서 살펴본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에 대한 강조와 맥을 같이하는 설명으로 보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하나님의 계시란 세계를 통해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의 창조자이시므로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며, 우리는 이에 주목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앎은 “하나님 스스로 자기의 본질을 노출하는 것에 대한 ‘자연적 앎’의 문제”라고 덧붙여 설명됩니다(정용섭, 《말씀신학과 역사신학》, 192쪽). 인간이 자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설명을 따라가면서, 정 교수의 계시 이해가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로 여기는 기독교의 전통적 이해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 교수의 이 같은 입장에는 이성적 판단에 따라 성경을 역사적 주관적 신앙고백 문서로만 받아들이려고 한 계몽주의 이후 학문의 결론이 그대로 전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계시만으로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큰 장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 인간이 자기초월성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궁극에 대한 관심이며, 종교도 여기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로 함몰되는 자기지향성 또한 갖고 있기에, 계시를 인식하는 데 한계가 있고,
결국, 죄인된 실존이랄 수 있는, 인식론적, 해석학적 자기함몰, 즉, 우상숭배에 빠지고 만다는 점은,
정 목사님과 판넨베르크는 물론, 현대의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도 기초적으로 긍정하는 바입니다.
문제는, 그렇다면, 인간은 불가지론적인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느냐, 어떻게 인간이 계시를 인식하느냐인데,
보편계시로서의 보편사, 세계를 통해서, 하느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을 수 있고,
이것이 세계 및 궁극에 대한 사유의 단초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발상이 무가치하고, 비복음적입니까?
그리고, 이러한 인식론이 그리스도교 전통과 다르다는 것도, 박 목사님의 독단적 판단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그리스도교 전통이 아니라는 겁니까?
단지, 인식론적 단초를 제시한 것에 대하여,
이성적 판단으로, 성서를 주관적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는 계몽주의적 전제를 깔고 있다느니,
그래갖고는 하느님에 대하여 "충분히" 알 수 없다느니,
(누가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단언합디까?)
이런 비약을 일삼는 것은 학자답지 못한 부당한 글쓰기입니다.
제가 짐작컨대, 박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인간에게(의) 큰 장애", "죄인됨"에 박 목사님께서,
'율법적'으로 집착하고, 강력한 선입견으로 전제하고 계시기에, 이러한 부당한 비약이 배태된다고 봅니다.
● "왜 정 교수께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주신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근대성에 대한 요즘의 연구들이 보여주듯, 인간 이성을 최종적 판단자로 여긴 계몽주의적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정 목사님께서, 하느님의 특별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그분을 통한 구원의 복음,
정경으로서의 성서를 부정한 적이 없는데,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누명을 씌웁니까?
부당한 전제를 마음대로 내려놓고,
자기 입맛대로, 보수근본주의의, 진보, 자유주의에 대한 예의 낡은 비난의 켸켸묵은 문구들을 들이대고 있는데,
비록 존경받는 신학자이시며 목회자이신 박 목사님이시지만,
위의 저의 댓글과 같이, 원색적인 비난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하지만 이성적 판단을 따라 신앙을 설명하려는 인간의 해석마저도 자의적 성격을 띠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적 판단에 대한 강조 역시 시대적 환경의 영향 속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터 버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각자 나름의 “타당성 구조”에 따라 판단합니다. 어떤 일이 타당한가에 대한 판단은 이미 전제되고 있는 어떤 사고 체계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이성적 판단을 최종적 기준으로 설정한 것부터가 근대 이후 계몽주의의 전제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합리적 인식론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전제 자체가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박 목사님께서는, 자신의 준거인 칼뱅주의 보수 신학, 예정 신앙에 대해서도
자의성, 상대성의 수식어를 붙이십니까?
"전제되고 있는 어떤 사고 체계"라고 언급하셨거니와,
정경으로서의, 특별 계시로서의 성서는,
초월자인 하느님께서 인간의 언어로 주신 말씀인데,
이 이중성의 구조를 지닌 성서 텍스트에 대하여,
텍스트 파악의 언어적, 역사적, 문화적(뭉뚱그려 인문적)인 다양한 방법론으로 접근하는 편과,
보수 신학과 예정 신앙의 선입견으로 독해하는 것,
어느 쪽이 공정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자연과학 등 인간 이성이, 그 영역을 벗어나는 세계라고 초월자와 궁극성을 부정하려는 이성주의, 과학주의가,
결코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차원에서의 보편사 신학이라면,
이것을 두고 인본주의라고, 그것도, 강고한 신앙적 선입견으로 필터링하여 하느님 말씀을 읽는 쪽이,
그렇게 비판한다면,
비난 이전에, 먼저 자신부터 돌아보라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 "정 교수께서 주장하시는 신학적 인식론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계시로서보다는, 주관적 수준의 ‘신앙고백’이라고 여겨집니다. 성경을 보편사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에 접근해간 사건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 관찰로는 정 교수께서 전제하시는 신학은 사실보다는 의미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 위에서도 말씀드렸거니와,
초월자인 하느님께서 인간의 언어로 주신 특별 계시가 성서입니다.
언어는 사고를 규정하지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초월자를 알 수 없다고 저도 백번 동의했습니다만,
'앎', 즉, 인식과 사고 행위란, 언어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초언어적이신 하느님께서 언어로 당신을 계시하셨다는 점에 대하여,
보수신학자들은 뭐라 답할랍니까?
이 딜레마, 인식론적, 해석학적 난점,
하느님과 인간과의 실존적 단절성,
이 사이에서, 근대 이후 개신교 신학자들은 치열하게 고민했던 겁니다.
그 실존적 고민을 두고 '주관적 수준'이라 폄하하는 그 준거는 무엇인가요?
사실, 기적이니, 사건이나 대상 그 자체만으로는 내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 대상과 내가 서로 유의미해지는 '만남'의 현상이 일어날 때,
서로에 대하여 말할 수 있고, 대화가 가능해지며,
성서 계시도 그 과정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은, 하느님의 케리그마를 일방적 선포로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드렸거니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당신의 형상으로서의 '자유'는,
상호 인격성이고, 이 상호 작용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역사를 이끌어가시고 당신의 구원 사역을 성취해 가신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인격적이고 살갑게 다가오는 사랑의 하느님을 말할 수 있지,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예정 속에 세계 역사를 진행해 가시는 하느님 상에서,
사랑의 십자가가 과연 맥락에 맞는지 의아합니다.
예정이니, 제왕적 일방성과 선포 등의 정태적, 객관적 인식으로
하느님을 파악하고, 신앙의 확실성을 담보하려 드는 것은,
제가 볼 때, 하느님의 속성을 축소, 왜곡하는 인본주의요, 불신앙입니다.
● "한편, 정 교수께서 보여주는 인간 이해에 인간의 심각한 형편, 곧 죄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설교에 대한 비평에서도 그러했듯, 정 교수께서는 기독교적 삶에서 죄가 강조되는데 대해 우려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의식에 묶여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투쟁하고, 용서하고, 변혁해 나가도록 돕는다. 이 사실이 복음의 핵심이다”(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229쪽)."
"인간의 죄(罪)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을 때,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어떻게 이해될까 생각해 봅니다."
→ 비단 박 목사님 뿐만 아니라, 보수주의자들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바인데,
그들은, 죄에 대하여 무수히 강조하지만,
정작, 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은 실존적, 언어적, 인식과 해석학적 딜레마에 대하여,
보수 진영의 논의를 접한 적이 없습니다.
저도 딴에는 두루두루 기웃거리는데도 말입니다.
제가 "선입견"이라 지적했거니와, 보수 신학은, 인간 언어의 속성과 인식의 한계에 대하여,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객관적, 수동적으로 수납하기에,
죄라는 것을, 하느님에 대한 불순종이라는 법률적, 상명하복적 류의 도식으로 쉽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전통적 그리스도교에 편만한 죄의식 또한, 이 맥락에서 파생되었다고 보구요.
그럴진대, 박 목사님이, 정 목사님의 신학에 대하여 죄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다고 비난하는 건,
적반하장이라는 겁니다.
2007.04.30 18:20:25
드디어 그간의 '의도적 무시'에서 차분한 '반론'을 제기하시는 분이 계시군요.
환영할 일입니다.
그런데 박목사님께서는 자신의 신학사상이 '신께서 의지적으로 보여주시는 계시'만을 그 원천으로
삼고 있음을, 성경과 기독교 신학 전통에충실함을 밝히고 계시는군요.
그에 반면에 정목사님의 신학사상은 불완전한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근거를 두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의 한 아류 쯤으로 '차분하게' 치부하고 계시는 군요.
흥분한 목소리가 아닌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여전히 한국교회의 대다수의 교인들과 목회자들이 성서의 글자 하나하나를 문자적으로
믿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를 자유주의자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그간의 '설교비평'을 통해 '벌거벗은 임금님의 진실'을 드러낸 힘겨운 성과마저 한낱 근본에서
잘못 출발한 비뚤어진 한 자유주의자의 치기쯤으로 치부하게 만드는 '매직워드'가 아니던가요?
그 분의 차분함에서 '매카시즘의 서늘한 냉기'를 느끼는 것은 저의 오버인가요?
무명제님께서도 읽으셨나 보군요.
그렇게 흥분하시는 걸 보니......^ ^
상세한 댓글 기대가 됩니다.
언젠가부터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을 단지 한 개인의 설교를 점검하는 행위가 아니라
대립항과 반명제를 통한 '기독교 신앙의 이해 내지는 본질 찾기 '로 받아들이게 된 저로써는
정목사님께서 재반론을 생각치 않으신다니 좀 아쉽게 여겨집니다.
후학들에게는 좋은 깨우침의 기회가 될 것 같은데.......
추신: 허걱~~~
글을 메모장에서 쓰는 동안에 무려 11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네요.
그래도 고고씽~~~~^ ^
환영할 일입니다.
그런데 박목사님께서는 자신의 신학사상이 '신께서 의지적으로 보여주시는 계시'만을 그 원천으로
삼고 있음을, 성경과 기독교 신학 전통에충실함을 밝히고 계시는군요.
그에 반면에 정목사님의 신학사상은 불완전한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근거를 두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의 한 아류 쯤으로 '차분하게' 치부하고 계시는 군요.
흥분한 목소리가 아닌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여전히 한국교회의 대다수의 교인들과 목회자들이 성서의 글자 하나하나를 문자적으로
믿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를 자유주의자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그간의 '설교비평'을 통해 '벌거벗은 임금님의 진실'을 드러낸 힘겨운 성과마저 한낱 근본에서
잘못 출발한 비뚤어진 한 자유주의자의 치기쯤으로 치부하게 만드는 '매직워드'가 아니던가요?
그 분의 차분함에서 '매카시즘의 서늘한 냉기'를 느끼는 것은 저의 오버인가요?
무명제님께서도 읽으셨나 보군요.
그렇게 흥분하시는 걸 보니......^ ^
상세한 댓글 기대가 됩니다.
언젠가부터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을 단지 한 개인의 설교를 점검하는 행위가 아니라
대립항과 반명제를 통한 '기독교 신앙의 이해 내지는 본질 찾기 '로 받아들이게 된 저로써는
정목사님께서 재반론을 생각치 않으신다니 좀 아쉽게 여겨집니다.
후학들에게는 좋은 깨우침의 기회가 될 것 같은데.......
추신: 허걱~~~
글을 메모장에서 쓰는 동안에 무려 11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네요.
그래도 고고씽~~~~^ ^
2007.04.30 19:17:31
일찌기 정목사님께서는 이러한 힘겨운 작업을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 자탄 하셨지요.
.
.
무명재님의 이유 있는 흥분에 박수를 보냅니다.
진심으로...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 자탄 하셨지요.
.
.
무명재님의 이유 있는 흥분에 박수를 보냅니다.
진심으로...
2007.04.30 21:57:46
덧붙여서,
박 목사님께서 이 댓글을 보실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허공에 퍼질 질문이 되겠습니다만, 묻고 싶습니다.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및,
'창발(創發)적 진화'에 대하여 서술하시오-
라는 문제를 내 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 개념도 파악하고 있지 않으신 것 같기에, 더 화가 납니다.
그리고, 진보니 보수니 떠나서,
박 목사님은 기본적인 논지 전개에서 비약을 일삼고,
대충 급하게 비약해서, 보수주의 측의 상투적인 진보 신학 비난의 혐의를 뒤집어씌웁니다.
이 글 읽기 전까지는,
박 목사님에 대하여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박 목사님의 인격과 학문성에 의심이 갑니다.
이건 아닌 겁니다. 이런 식으로 글쓰지 마십시오. 가방 끈이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투적인 글,
솔직히, 지겹습니다.
레퍼토리가 이런 것 밖에 없답디까?
* 덧붙임: [기독교사상]이 아니라,
[목회와 신학] 정도에 실었으면 좋을 만한 글이었겠습니다.
[기상]의 독자들께서, 이런 상투적인 글은 분별해 내실텐데요.
[기상]이 박 목사님의 글까지도 실어주는 걸 보니,
좋은 차원에서인지, 그렇지 않은 건지, 아무튼,
이것도 교회 일치의 모습이라고 봐야 되나 허허...
박 목사님께서 이 댓글을 보실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허공에 퍼질 질문이 되겠습니다만, 묻고 싶습니다.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및,
'창발(創發)적 진화'에 대하여 서술하시오-
라는 문제를 내 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 개념도 파악하고 있지 않으신 것 같기에, 더 화가 납니다.
그리고, 진보니 보수니 떠나서,
박 목사님은 기본적인 논지 전개에서 비약을 일삼고,
대충 급하게 비약해서, 보수주의 측의 상투적인 진보 신학 비난의 혐의를 뒤집어씌웁니다.
이 글 읽기 전까지는,
박 목사님에 대하여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박 목사님의 인격과 학문성에 의심이 갑니다.
이건 아닌 겁니다. 이런 식으로 글쓰지 마십시오. 가방 끈이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투적인 글,
솔직히, 지겹습니다.
레퍼토리가 이런 것 밖에 없답디까?
* 덧붙임: [기독교사상]이 아니라,
[목회와 신학] 정도에 실었으면 좋을 만한 글이었겠습니다.
[기상]의 독자들께서, 이런 상투적인 글은 분별해 내실텐데요.
[기상]이 박 목사님의 글까지도 실어주는 걸 보니,
좋은 차원에서인지, 그렇지 않은 건지, 아무튼,
이것도 교회 일치의 모습이라고 봐야 되나 허허...
2007.04.30 19:55:09
박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바가 크게 두가지로 요약되네요.
신학 전통의 차이를 말씀하시며 틀이 다르기 때문에 일방적인 비평은 무의미 하다는 것 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성,계몽,계시,죄,인간,보편사,구속사 등을 말씀하시며 반대편(?) 전통에 대해 비평을 하셨습니다.
결론은 이 말씀을 하시고 싶은듯 하네요.
"박목사님 전통이 정통이다.
정목사님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이신론, 신신학의 아류다."
신학 전통의 차이를 말씀하시며 틀이 다르기 때문에 일방적인 비평은 무의미 하다는 것 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성,계몽,계시,죄,인간,보편사,구속사 등을 말씀하시며 반대편(?) 전통에 대해 비평을 하셨습니다.
결론은 이 말씀을 하시고 싶은듯 하네요.
"박목사님 전통이 정통이다.
정목사님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이신론, 신신학의 아류다."
2007.04.30 20:50:48
완전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두 분은 다 상당한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보면 두 분은 다 상당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빨간색과 노란색의 크레용을 각기 제 나름대로 사용합니다.
서로 너는 왜 나와 같은 색이 아니냐? 과도하게 판단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크레용이 아니라 연필이면서 크레용을 대신하려는 것입니다.
문제는 복음의 색깔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입니다. 색깔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이 왜곡 된 것은 매우 심각합니다.
정 교수님은 복음의 본질의 왜곡을 우려하십니다.
그러다가 자칫 복음의 색깔의 차이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박 목사님은 복음의 색깔의 차이를 인정합니다.
바라기는 복음의 본질 향상에 더욱 정진했으면 좋겠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보면 두 분은 다 상당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빨간색과 노란색의 크레용을 각기 제 나름대로 사용합니다.
서로 너는 왜 나와 같은 색이 아니냐? 과도하게 판단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크레용이 아니라 연필이면서 크레용을 대신하려는 것입니다.
문제는 복음의 색깔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입니다. 색깔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이 왜곡 된 것은 매우 심각합니다.
정 교수님은 복음의 본질의 왜곡을 우려하십니다.
그러다가 자칫 복음의 색깔의 차이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박 목사님은 복음의 색깔의 차이를 인정합니다.
바라기는 복음의 본질 향상에 더욱 정진했으면 좋겠습니다.
2007.04.30 21:05:10
처음에는 반론이라고 해서 준비를 많이 했네?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꼼꼼하게 다시 읽어보니 박영선 목사의 글은 말만 반론이지, 흠잡기에 불과한 것 같아요..
정박사님께서 저의 설교방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해주셨는데, 저는 저러저러해서 이러한 설교방식을 사용합니다 또는 이러이러한 설교방식도 저러저러해서 좋은 것 같은데, 정박사님의 생각은 어떠세요?라고 말하는 건전한 토론이 아닌, 상대방의 신학을 성서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매도하는 흠잡기인 것 같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꼼꼼하게 다시 읽어보니 박영선 목사의 글은 말만 반론이지, 흠잡기에 불과한 것 같아요..
정박사님께서 저의 설교방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해주셨는데, 저는 저러저러해서 이러한 설교방식을 사용합니다 또는 이러이러한 설교방식도 저러저러해서 좋은 것 같은데, 정박사님의 생각은 어떠세요?라고 말하는 건전한 토론이 아닌, 상대방의 신학을 성서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매도하는 흠잡기인 것 같다는 말이지요...
2007.04.30 23:41:04
속 좁은 신학자들의 글들 잘 읽었습니다^^
자신의 신학 노선에 조금이라도 부정적언급이 있으면 엄청 흥분들 하시는군요^^
그저 그려려니 하고 몇마디 리플이나 달면 될 것을^^
저도 박영선 목사님 설교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 하는 사람 이지만
그리 심하게 욕들을 만한 글은 아닌것 같은데^^ 여하튼
정목사님 글 올리신 보람 있겠습니다..ㅎㅎㅎ 리플들 보니 재미는있군요
자신의 신학 노선에 조금이라도 부정적언급이 있으면 엄청 흥분들 하시는군요^^
그저 그려려니 하고 몇마디 리플이나 달면 될 것을^^
저도 박영선 목사님 설교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 하는 사람 이지만
그리 심하게 욕들을 만한 글은 아닌것 같은데^^ 여하튼
정목사님 글 올리신 보람 있겠습니다..ㅎㅎㅎ 리플들 보니 재미는있군요
2007.04.30 23:59:31
전 이곳에 들어와서 정목사님의 신학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그런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댓글들을 보니깐 차라리 근본주의자로 사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박목사님이 이글을 여기에 직접 올린것도 아니며, 자신의 신학적 입장에서 충실했을 뿐입니다. 한국교회 대부분은 보수신학입니다. 그렇다면, 보수신학을 하는 목사님이 좀 다른 방향의 신학을 하는 분의 작업을 자신의 신학으로 판단하는게 뭐가 잘못인지요.
박목사님이 정목사님의 신학을 잘 이해하지 못한것이라면, 예의 있게 그것을 바르게 지적해 주시던지, 아니면 보수신학 자체가 정목사님의 신학을 비판할수 밖에 없는 것이라면, 박목사님이 아닌 보수신학 자체에 대한 비판을 가하십시요...
상당히 인격적인 글에 대한 너무나도 비인격적인 댓글에 실망을 합니다.
박목사님이 정목사님의 신학을 잘 이해하지 못한것이라면, 예의 있게 그것을 바르게 지적해 주시던지, 아니면 보수신학 자체가 정목사님의 신학을 비판할수 밖에 없는 것이라면, 박목사님이 아닌 보수신학 자체에 대한 비판을 가하십시요...
상당히 인격적인 글에 대한 너무나도 비인격적인 댓글에 실망을 합니다.
2007.05.01 03:30:57
무명재 님 그리스도 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사람 다운 글 쓰기를 해주십시오. 왜 그리 흥분하십니까? 여기와서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고 은혜를 경험하다가도 당신과 같은 사람의 글을 읽다보면 지식이 사람을 교만하게하고 망가뜨린다는 인상을 받게됩니다. 박영선 목사님의 면전앞에서 그런식의 언사를 퍼부을 자신 있습니까? 제발 자중하시고 겸손하게 자신의 주장을 전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2007.05.01 04:03:30
죽더라도 죄인이 아닌 예수.
죽었다 깨나도 죄인인 예수쟁이.
언제까지 이런 기독교여야 하나요?
인간은 신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다.
인간은 죄인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다.
인간을 죄인으로 얽어매면서,
그것이 기독교라고?
예수쟁이만 구원하는 신,
그가 예수라고?
푸하하~ ^^
죽었다 깨나도 죄인인 예수쟁이.
언제까지 이런 기독교여야 하나요?
인간은 신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다.
인간은 죄인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다.
인간을 죄인으로 얽어매면서,
그것이 기독교라고?
예수쟁이만 구원하는 신,
그가 예수라고?
푸하하~ ^^
2007.05.01 06:03:21
무명재님의 댓글을 보면서,
그동안 얼마나 님께서 말하는 보수주의니 칼뱅주의니 기타...에 속해있는 단체나 인물들에게 실망을 하셨는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면에서 저도 말씀들이자면 인간에게 소망을 두진 않습니다. 언젠가도 제 부족한 글에서 밝혔다시피....
그럼에도 안타깝습니다. 인간에게 소망을 갖어 보기도 합니다. 가끔씩요....
그중에 다비아공동체도 들어있구요.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작업에도 다소 위로와 소망을 붙들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개인적입니다만, 실망스러운것은 무명재님을 보고서 더 확실해졌네요. 특정 인물을 지명하는것은 옳지 않다는거 압니다. 그런데도 제가 님을 거론하는것은 그만큼 님에게(님은 인정하시지 않겠지만) 일말의 기대와 소망을 잠깐이나마 품었기때문입니다.
무명재님의 넓고 방대한 신학적 지식과 인문학적인 폭넓음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것은 여전합니다. 진심으로 한국교회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열정도 인정합니다. 다만 한가지 우려가 되는것이 있기에 감히 무례하게 댓글을 달아봅니다.
도대체 님은 어떤분의 설교에 조금이나마 은혜를 받으실지 궁금하네요. 물론 정목사님의 설교에는 받으시겠습니다만(추구하는방향과 가치관이 같다고 보기때문에...제가 잘못 볼수도 있겠네요) 그냥 사적인겁니다. 님의 문제의식과 비판의 당위성이 잘못이라는것은 아닙니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며 공감이 갑니다.
그런데도 안타까운것은 님의 성급한 진단입니다. 표현의 경솔함이랄까요...
님의글을 읽어보면 (제 입장에서는) 도무지 허점이 없습니다. 빈틈이나 취약한게 없이 짜임새가 있습니다. 왠만한 사람은 거의 흠을 잡기어려울정도로 완벽주의같아서 타당하면서도 숨이탁 막힙니다.
탁월한 논의와 방대한 식견이부럽고 얄미울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실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님에게는 타자에대한 배려가 극히 부족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소위 지식층들의 어쩔수 없는 특성이라고 보여집니다만 그것을 여지없이 무명재님에게서 볼수 있다는것에 더욱 화가납니다. 기대가 너무 커서일까요.
좀 성숙한 모습이 아쉽다는것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배움이 다른거야 어쩔수 없지않겠습니까. 내 생각과 논리에 부적절하면 그렇게 막 나가도 괜찮습니까?
도대체 무명재님의 그 많은 지식이 혹시 자신을 자신만의 논리로 완전 무장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으신지요? 쉬운말로 님은 자신의 학문적인 수준과 자기확신이 너무 투철하시지 않으신가를 여쭙는것입니다. 아마도 저와같이 생각하시는 분들도 없잖아 계시지만 지적하지 않는것은 님과의 논쟁에 자신이 없어서 일것입니다. 저도 자신없습니다.
앞으로 한국교회를 이끌어가실 분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만 그렇기에 한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님과의 논쟁에서 몇몇분들이 결국 다비아를 떠나신 분들도 있기에 우려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님이 다비아에서 중요한 위치를 (영향을) 줄만한 분이라는 것이지요. 좀 자세를 낮추심이 어떠실지 진심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앞으로 교회의 지도자가 되실분 아닙니까. 성공회에 속하시니까 물론 그 공회에서 결국은 주님을 전하고 증거하는 복된사역을 물론 지금도 하고 계시지만 본겪적으로 하셔야 할터인데 님이 말하는 대화나 소통에 있어서 좀더 유연하고 따뜻한 시선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과거 교회사를 통해 님이 그토록 알래르기증새를 보이는 칼뱅이나 루터,쯔빙글리등....이분들의 부정적인면만을 너무 부각시키기에 그럽니다. 어느시대를 막론하고 긍정과 부정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부분을 알아서 교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사람자체의 존재마저 부정하는게 보여서 우려를 하는것입니다. 평가는 우리가 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날에 하실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사람이라서 이렇게밖에 설명이 안되지만, 님께서는 바로 이런식의 태도를 경멸하시기에 그렇습니다.
모두 같은방향으로 가는것은 아닙니다. 각자 자기의 길을 갑니다. 그길이 틀렸다고 잡아댕기거나 억지로 소리칠 필요없습니다. 서로의길을 인정하고 존중해줍시다. 세상에,
어느누군들 타인에게 상처받지 않는사람 있을까요?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그 아픔을 극단적으로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상대가 틀렸다고 해도 부정하지는 맙시다. 어짜피 우리모두는 불완전하잖아요. 이기면 어떻고 지면 어때요.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때 사람들을 이기셨나요? 그냥 지셧습니다. 지는게 이긴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좀더 많이 알고 성숙한자가 미성숙한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지적이나 비판에서 그치지 마시고 함께가는길을 모색하는게 좋지않을까요? 제가 글에 두서가 없고 표현력이 뒤떨어져서 혹시 무명재님께서 여러가지 오해하기 쉽상입니다만, 제 마음이 제대로 전달이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 글이 유쾌하진 않겠죠.
다시한번, 정중하게 사과드립니다.
절대로 무명재님과 논쟁할 생각 없습니다. 제가 상대도 안되고요....
그저 다비아에 갓 들오온지 한 두어달 남짓하네요. 나름대로 느낀 촌평이랄까요....
하필이면 무명재님을 거론해서 드리는 댓글이라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어쩌면 운영진에게 경고가 주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것은 쪽지로 보내는게 예의가 되겠지만 제가 총대한번 매지요..... 무명재님의 재주와 학문과 신앙의 열정을 존중하기에 감히 딴지를 걸어봅니다
그만치 제가 님에게 많이 배우고 감사하기에 나름으로 느낀것을 적는것입니다.
모쪼록 주안에서 평강하십시오.
그동안 얼마나 님께서 말하는 보수주의니 칼뱅주의니 기타...에 속해있는 단체나 인물들에게 실망을 하셨는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면에서 저도 말씀들이자면 인간에게 소망을 두진 않습니다. 언젠가도 제 부족한 글에서 밝혔다시피....
그럼에도 안타깝습니다. 인간에게 소망을 갖어 보기도 합니다. 가끔씩요....
그중에 다비아공동체도 들어있구요.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작업에도 다소 위로와 소망을 붙들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개인적입니다만, 실망스러운것은 무명재님을 보고서 더 확실해졌네요. 특정 인물을 지명하는것은 옳지 않다는거 압니다. 그런데도 제가 님을 거론하는것은 그만큼 님에게(님은 인정하시지 않겠지만) 일말의 기대와 소망을 잠깐이나마 품었기때문입니다.
무명재님의 넓고 방대한 신학적 지식과 인문학적인 폭넓음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것은 여전합니다. 진심으로 한국교회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열정도 인정합니다. 다만 한가지 우려가 되는것이 있기에 감히 무례하게 댓글을 달아봅니다.
도대체 님은 어떤분의 설교에 조금이나마 은혜를 받으실지 궁금하네요. 물론 정목사님의 설교에는 받으시겠습니다만(추구하는방향과 가치관이 같다고 보기때문에...제가 잘못 볼수도 있겠네요) 그냥 사적인겁니다. 님의 문제의식과 비판의 당위성이 잘못이라는것은 아닙니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며 공감이 갑니다.
그런데도 안타까운것은 님의 성급한 진단입니다. 표현의 경솔함이랄까요...
님의글을 읽어보면 (제 입장에서는) 도무지 허점이 없습니다. 빈틈이나 취약한게 없이 짜임새가 있습니다. 왠만한 사람은 거의 흠을 잡기어려울정도로 완벽주의같아서 타당하면서도 숨이탁 막힙니다.
탁월한 논의와 방대한 식견이부럽고 얄미울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실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님에게는 타자에대한 배려가 극히 부족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소위 지식층들의 어쩔수 없는 특성이라고 보여집니다만 그것을 여지없이 무명재님에게서 볼수 있다는것에 더욱 화가납니다. 기대가 너무 커서일까요.
좀 성숙한 모습이 아쉽다는것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배움이 다른거야 어쩔수 없지않겠습니까. 내 생각과 논리에 부적절하면 그렇게 막 나가도 괜찮습니까?
도대체 무명재님의 그 많은 지식이 혹시 자신을 자신만의 논리로 완전 무장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으신지요? 쉬운말로 님은 자신의 학문적인 수준과 자기확신이 너무 투철하시지 않으신가를 여쭙는것입니다. 아마도 저와같이 생각하시는 분들도 없잖아 계시지만 지적하지 않는것은 님과의 논쟁에 자신이 없어서 일것입니다. 저도 자신없습니다.
앞으로 한국교회를 이끌어가실 분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만 그렇기에 한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님과의 논쟁에서 몇몇분들이 결국 다비아를 떠나신 분들도 있기에 우려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님이 다비아에서 중요한 위치를 (영향을) 줄만한 분이라는 것이지요. 좀 자세를 낮추심이 어떠실지 진심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앞으로 교회의 지도자가 되실분 아닙니까. 성공회에 속하시니까 물론 그 공회에서 결국은 주님을 전하고 증거하는 복된사역을 물론 지금도 하고 계시지만 본겪적으로 하셔야 할터인데 님이 말하는 대화나 소통에 있어서 좀더 유연하고 따뜻한 시선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과거 교회사를 통해 님이 그토록 알래르기증새를 보이는 칼뱅이나 루터,쯔빙글리등....이분들의 부정적인면만을 너무 부각시키기에 그럽니다. 어느시대를 막론하고 긍정과 부정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부분을 알아서 교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사람자체의 존재마저 부정하는게 보여서 우려를 하는것입니다. 평가는 우리가 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날에 하실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사람이라서 이렇게밖에 설명이 안되지만, 님께서는 바로 이런식의 태도를 경멸하시기에 그렇습니다.
모두 같은방향으로 가는것은 아닙니다. 각자 자기의 길을 갑니다. 그길이 틀렸다고 잡아댕기거나 억지로 소리칠 필요없습니다. 서로의길을 인정하고 존중해줍시다. 세상에,
어느누군들 타인에게 상처받지 않는사람 있을까요?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그 아픔을 극단적으로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상대가 틀렸다고 해도 부정하지는 맙시다. 어짜피 우리모두는 불완전하잖아요. 이기면 어떻고 지면 어때요.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때 사람들을 이기셨나요? 그냥 지셧습니다. 지는게 이긴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좀더 많이 알고 성숙한자가 미성숙한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지적이나 비판에서 그치지 마시고 함께가는길을 모색하는게 좋지않을까요? 제가 글에 두서가 없고 표현력이 뒤떨어져서 혹시 무명재님께서 여러가지 오해하기 쉽상입니다만, 제 마음이 제대로 전달이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 글이 유쾌하진 않겠죠.
다시한번, 정중하게 사과드립니다.
절대로 무명재님과 논쟁할 생각 없습니다. 제가 상대도 안되고요....
그저 다비아에 갓 들오온지 한 두어달 남짓하네요. 나름대로 느낀 촌평이랄까요....
하필이면 무명재님을 거론해서 드리는 댓글이라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어쩌면 운영진에게 경고가 주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것은 쪽지로 보내는게 예의가 되겠지만 제가 총대한번 매지요..... 무명재님의 재주와 학문과 신앙의 열정을 존중하기에 감히 딴지를 걸어봅니다
그만치 제가 님에게 많이 배우고 감사하기에 나름으로 느낀것을 적는것입니다.
모쪼록 주안에서 평강하십시오.
2007.05.01 07:26:30
반론을 제시한 분에게 너무 인신공격적인 댓글을
삼가야 한다는 의견, 적절한 지적이라 봅니다.
일단 이 반론은 정용섭 박사님의 설교비평에 대한 반론이니,
제 3자가 나서서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좋지 않을듯 합니다.
최영기 목사님께서 반론을 제기했을 때, 댓글로 논쟁이 계속 이어져서
그 교회의 교우님들의 신앙생활에 적지않은 부담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도 유익할 것 같군요.
다비아에 참여/구경하시는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예의를 갖추어서 조심스럽게 댓글을 다는 것이 좋겠지요.
좋은 5월 되이소~
삼가야 한다는 의견, 적절한 지적이라 봅니다.
일단 이 반론은 정용섭 박사님의 설교비평에 대한 반론이니,
제 3자가 나서서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좋지 않을듯 합니다.
최영기 목사님께서 반론을 제기했을 때, 댓글로 논쟁이 계속 이어져서
그 교회의 교우님들의 신앙생활에 적지않은 부담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도 유익할 것 같군요.
다비아에 참여/구경하시는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예의를 갖추어서 조심스럽게 댓글을 다는 것이 좋겠지요.
좋은 5월 되이소~
2007.05.01 08:38:25
인간을 죄의식에 쩌들게 만드는 말,
죄의식에 코 꿰어 비이성적으로 사고하게 만드는 말,
죄의식을 기독교의 금과옥조로 여기게 하는 말,
이런 어처구니없는,
늘오늘의 전 생애를 통해 귀에 못이 박혀,
징글맞기 그지없는 이런 무식한 폭력에서, 이제 벗어나고 싶은데,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그토록 예의에 어긋난 걸까?
어느 쪽이 더 폭력적인가, 어느 쪽이 인신공격인가?
죄의식에 코 꿰어 비이성적으로 사고하게 만드는 말,
죄의식을 기독교의 금과옥조로 여기게 하는 말,
이런 어처구니없는,
늘오늘의 전 생애를 통해 귀에 못이 박혀,
징글맞기 그지없는 이런 무식한 폭력에서, 이제 벗어나고 싶은데,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그토록 예의에 어긋난 걸까?
어느 쪽이 더 폭력적인가, 어느 쪽이 인신공격인가?
2007.05.01 09:25:31
'인신공격'이니 '폭력'이니 하는 어휘보다도 더 소름끼치는건..
차분하게, 그리고 점잖게 상대방을 매도하려는 태도가 아닐까요?
그 부분을 감지해 낸 젊은 혈기가 다소의 울분을 품고
조목조목 반박하는 태도를 가리켜 무조건 '인신공격' 운운하시는 분들의
독해능력이 의심스럽군요.
차분하게, 그리고 점잖게 상대방을 매도하려는 태도가 아닐까요?
그 부분을 감지해 낸 젊은 혈기가 다소의 울분을 품고
조목조목 반박하는 태도를 가리켜 무조건 '인신공격' 운운하시는 분들의
독해능력이 의심스럽군요.
2007.05.01 09:40:16
저도 보수 정통이라고 말하는 교회에 출석합니다. 물론 저의 삶도 그렇지만 그대로 살지 못하고 그러한 면이 많음을 압니다. 그런데 이 곳에 댓글을 읽어보면 정통보수나 여기에 댓글을 다신 분들이나 삶의 차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조금 실망스럽네요 지식만 쭉 늘어 놓았지 ...고민이란 말슴하셨는데 진정 고민이란 흔적을 못느끼네요 부족하지만 느낀바를 말씀드렸습니다.
2007.05.01 09:43:04
늘오늘 님과 구도자 님과 같이 생각하실 수도 있고,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언*어*사*용의 태도에서 정도가 지나치다는 겁니다.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신다면, 왜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서 더 좋은지,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봅니다.
절*제*된 언어로도 충*분*히 논의가 가능한데,
왜 자꾸 불필요한 (감정)싸움으로 번질 불필요한 빌미를 제공하시는지요?
말 되는 의견제시를 하면 누구나 다 읽고 판단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 편가르기를 조장하거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라모, 좋은날 되이소~~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언*어*사*용의 태도에서 정도가 지나치다는 겁니다.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신다면, 왜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서 더 좋은지,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봅니다.
절*제*된 언어로도 충*분*히 논의가 가능한데,
왜 자꾸 불필요한 (감정)싸움으로 번질 불필요한 빌미를 제공하시는지요?
말 되는 의견제시를 하면 누구나 다 읽고 판단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 편가르기를 조장하거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라모, 좋은날 되이소~~
2007.05.01 10:10:20
위의 댓글중에 어떤 사람이 박영선 목사님의 글에서 점잖게 상대방을 매도함을 느낀다는 말씀을 합니다. 그것은 순전히 자신들의 느낌이겠지요? 객관적으로 증명된 박영선 목사님의 심정이라고 밝힐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반론을 받으신 정용섭 목사님께서도 과연 점잖게 매도당했다고 느끼고 계실까요? 처음 댓글을 다신 정 목사님의 글을 읽어보면 그런 느낌을 발견하기가 어려습니다. 괜히 있지도 않은 사실을 제법 괜찮게 글을 분석한다는 명목으로 그렇게 막 나가지 마시기를 부탁합니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그렇게 박영선 목사님의 글을 평가하는 여러분의 댓글은 어떠 수준인지 한번 살펴볼까요? 우선 박 목사님의 의견에 조금이라도 동의를 표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독해 능력이 떨어진다"는 표현을 사용하신 분도 있고, 박목사님 개인을 향해서는 "인격과 학문성에 의심이 간다"는 표현을 사용한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여기가 소위 정의와 평활를 추구하고 지향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맞습니까? 인격이 얼마나 모가나고 비툴어져 있다면 함께 신앙의 여정을 걷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런식의 표현을 한다 말입니까? 박목사님의 한편의 반론으로 그분께 실망하고 그 분의 인격과 학문성까지 의심할 정도의 사람이시라면 학문을 차라리 포기하십시오. 세상 누가 당신의 입맛에 맛는 글을 전개하겠습니까? 이 시점에서는 너무 극단적인 표현을 동원해서 글을 올린것에 대해서 몇몇 분들이 사과해야 할 시점입니다. 무슨 지식의 조폭들도 아니고 도대체 이거 무엇하자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2007.05.01 10:27:28
강길님과 같은 분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제 생각엔, 어떤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차분하게 자기 말하는 거랑,
좀 격하게 말하는 거랑,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표준말이 교양있는 사람들이 쓰는 서울말이라는데,
그것을 강요하는 것 자체로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양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면 욕도 할 수 있지 않나요?
지금이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요.
(물론 욕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것 같은데요.)
내용으로 서로의 생각을 읽고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읽고 뭔말인지 모르겠으면 '뭔 말이냐?' 물으면 되지 않나요?
좀 싸가지 있게 말해라! 하는 것보다는요.
여기 오시는 분들을 배려한다고 하시는데,
글쎄, 정말 그래서 그런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놓고 이것저것 따진다고 싸가지 없다고 하지 마시고,
발전적으로 논의되는 운동을
오히려 가로막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오히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닐까요?
하지만 제 생각엔, 어떤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차분하게 자기 말하는 거랑,
좀 격하게 말하는 거랑,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표준말이 교양있는 사람들이 쓰는 서울말이라는데,
그것을 강요하는 것 자체로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양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면 욕도 할 수 있지 않나요?
지금이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요.
(물론 욕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것 같은데요.)
내용으로 서로의 생각을 읽고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읽고 뭔말인지 모르겠으면 '뭔 말이냐?' 물으면 되지 않나요?
좀 싸가지 있게 말해라! 하는 것보다는요.
여기 오시는 분들을 배려한다고 하시는데,
글쎄, 정말 그래서 그런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놓고 이것저것 따진다고 싸가지 없다고 하지 마시고,
발전적으로 논의되는 운동을
오히려 가로막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오히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닐까요?
2007.05.01 12:26:16
성급한 비판을 거두기를 바라며
저는 합신을 졸업하고 박영선 목사님께 설교학과 선택과목을 들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정용섭 목사님의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 비평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고 정용섭 목사님이 하시는 전체 작업에 대해 마음으로 박수를 치며 환영하는 사람입니다.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비평 두권의 책을 일주일 안에 읽고 또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와 그분이 비평하신 분들의 설교를 보면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의미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다. 저는 사실 후배들에게 박영선 목사님의 반론이 5월 기독교 사상에 실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대하면서 기다렸습니다. 박영선 목사님은 후배들에게 정용섭 목사님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분이 한국교회 설교에 대해 비평한 것에 대해서 귀 귀울릴 것이 많다고 하셨고 개혁주의 안에서도 저런 분이 한 분 있어야 하는데 라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자신의 것이 명확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것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용섭목사님에게 처음 댓글을 남길 때도 그 말을 했습니다. 때로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비평에 보면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받는 사람이 아파할 수 있는 또는 비난이라고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비난이라 생각하기보다 진지하게 설교를 따라가며 고심하며 사심없이 남긴 것이라 인정하였기에 겸허함으로 더 많은 것을 배우고자 한 것입니다. 무명재 같은 분에게는 개혁주의가 어쩌면 꽉 막혀있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느끼는 것은 오히려 여과장치 없이 뉘깔리듯 비판하는 그 자세가 더 막혀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얼마나 개혁주의에 대해 공부하셨고 박영선 목사님에 대해 연구하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물론 그 박식함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앎이란 상대방을 거부감 없이 설득하고 납득시킬 수 있는 힘이 아닐까요? 그렇게 설명해 놓았는데 이해 못해 라고 말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 같은 무지한 사람을 위해 상대방이 거부감 없이 받아드릴수 있도록 자신의 글을 다듬어 한번 더 쉽고 상세하게 자신의 주장을 피력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저도 겸허하게 한 수 배우겠습니다.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고 존중하는 두 분 목사님의 마음만 보아도 저는 흐믓한데 너무 제가 몰라서 그런가요 또 정용섭 목사님이 박영선 목사님의 반론에 다시 반론을 하지 않으신 것에는 배려와 열어놓음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공부하고 그리고 두분의 본심을 헤아린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비판을 하기를 간절이 부탁드립니다.
정용섭 목사님도 설교비평을 하면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을 늘 피력했습니다. 자신의 자격 문제 이것이 한국교회에 덕이 되는가 등 이런 고민 안에서 이루어진 설교비평이기에 가치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용섭 목사님은 당신의 설교는 이라는 말을 들으면 뜨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만큼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정용섭 목사님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겸허함이 없는 배려가 없는 비판은 상대를 향해 휘두르는 칼이 됩니다.
칼을 휘두르는 사람이기 이전에 상대를 끌어안을 수 있는 넓은 수용성을 가지기를 빕니다.
그러면 더 나누어 줄게 많치 않을까요?
주제 넘는 비판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합신을 졸업하고 박영선 목사님께 설교학과 선택과목을 들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정용섭 목사님의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 비평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고 정용섭 목사님이 하시는 전체 작업에 대해 마음으로 박수를 치며 환영하는 사람입니다.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비평 두권의 책을 일주일 안에 읽고 또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와 그분이 비평하신 분들의 설교를 보면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의미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다. 저는 사실 후배들에게 박영선 목사님의 반론이 5월 기독교 사상에 실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대하면서 기다렸습니다. 박영선 목사님은 후배들에게 정용섭 목사님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분이 한국교회 설교에 대해 비평한 것에 대해서 귀 귀울릴 것이 많다고 하셨고 개혁주의 안에서도 저런 분이 한 분 있어야 하는데 라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자신의 것이 명확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것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용섭목사님에게 처음 댓글을 남길 때도 그 말을 했습니다. 때로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비평에 보면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받는 사람이 아파할 수 있는 또는 비난이라고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비난이라 생각하기보다 진지하게 설교를 따라가며 고심하며 사심없이 남긴 것이라 인정하였기에 겸허함으로 더 많은 것을 배우고자 한 것입니다. 무명재 같은 분에게는 개혁주의가 어쩌면 꽉 막혀있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느끼는 것은 오히려 여과장치 없이 뉘깔리듯 비판하는 그 자세가 더 막혀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얼마나 개혁주의에 대해 공부하셨고 박영선 목사님에 대해 연구하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물론 그 박식함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앎이란 상대방을 거부감 없이 설득하고 납득시킬 수 있는 힘이 아닐까요? 그렇게 설명해 놓았는데 이해 못해 라고 말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 같은 무지한 사람을 위해 상대방이 거부감 없이 받아드릴수 있도록 자신의 글을 다듬어 한번 더 쉽고 상세하게 자신의 주장을 피력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저도 겸허하게 한 수 배우겠습니다.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고 존중하는 두 분 목사님의 마음만 보아도 저는 흐믓한데 너무 제가 몰라서 그런가요 또 정용섭 목사님이 박영선 목사님의 반론에 다시 반론을 하지 않으신 것에는 배려와 열어놓음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공부하고 그리고 두분의 본심을 헤아린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비판을 하기를 간절이 부탁드립니다.
정용섭 목사님도 설교비평을 하면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을 늘 피력했습니다. 자신의 자격 문제 이것이 한국교회에 덕이 되는가 등 이런 고민 안에서 이루어진 설교비평이기에 가치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용섭 목사님은 당신의 설교는 이라는 말을 들으면 뜨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만큼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정용섭 목사님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겸허함이 없는 배려가 없는 비판은 상대를 향해 휘두르는 칼이 됩니다.
칼을 휘두르는 사람이기 이전에 상대를 끌어안을 수 있는 넓은 수용성을 가지기를 빕니다.
그러면 더 나누어 줄게 많치 않을까요?
주제 넘는 비판이었다면 죄송합니다.
2007.05.01 12:23:18
글 같지도 않은 저의 글도 스포트 라이트를 받고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지만, 무명재님께만 화살이 돌아가는 것 같아서 그 화살을 저도 같이 맞을려고 댓글을 답니다...
"아주 점잖은 매도" 라는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댓글 상으로만이라도 박영선 목사님께 사과드립니다...
근본주의 기독교, 개혁주의 기독교에서 받은 저의 상처가 너무 컸었나 봅니다... 학교 다닐 때 저는 신앙적으로 상당히 고민을 많이 했고, 한 때 신앙을 버릴려고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공동번역 신약성서를 접하고, 뚫어지게 탐독하면서 뭔가 확실히 잡히지는 않지만 기독교를 버릴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부활이라는 거짓말(?)을 하는 사도들의 태도는 너무 진실했고, 그들의 변화는 너무 극적이었으며, 성서의 "맥락"을 읽으면서 도저히 부활을 믿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속해있던 선교단체는 IVF 계열이었는데, 그 곳에서는 거의 저의 진정성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고, 의료봉사라는 의료봉사는 다 따라다니고 사람들과 깊은 친분을 유지하며 지냈지만, 신앙적으로는 기껏해야 아웃사이더, 냉담자, 자유주의자, 인본주의자 취급 받았습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가 설화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자세히 읽어보면 창조 이야기는 두 가지가 완전히 다른 독립적인 이야기처럼 존재해요... 가인이 아벨을 죽였는데 가인은 다른 사람들이 동생을 죽인 자라고 자신을 죽일려고 하면 어떡하느냐는 이야기에서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사람들인가요?
+창세기가 설화라는 이야기는 얼토당토 하지 않은 불신앙적인 이야기다... 그리고 어디 다른 두 이야기가 있느냐? 니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어지는 이야기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계속적으로 출산을 했다...
*성서에 그런이야기는 없어요...성서 설화는 매끈한 스토리를 말할려는 것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면 성서의 창조 기사가 그리스 신화같은 그런 수준이란 말이냐?
*질적인 면에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동체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던 그 형은 저를 완전히 괄호 밖으로 내어 버렸습니다... 중보 기도회 참석도 잘 안하고, 자신이 이끄는 성경 공부 모임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는 주제에 무슨 신앙을 말하냐는 식이었죠...
그 형과는 지금도 인간적인 교류조차도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물론 감정적이었던 저의 실수도 있었음 인정합니다만...
그런데 그 당시 그 형들과 동기들이 주로 탐독하던 서적이 박영선 목사님과 김남준 목사님 등등 그런 분들의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재밌는 건 형들이 주로 보는 책들은 그 "신앙서적" 들이고 성서는 참고 자료로 활용되고 있었다는 아이러니 입니다... 저는 신앙서적들 제대로 본 것이 없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를 매일 탐독하고 감명깊은 말씀에 줄도 쳐가면서 보니까 한다는 말씀들이 "신앙서적 좀 봐라... 신앙 서적을 안보니까 성경이 제대로 이해가 안되지..." 물론 기독교인들의 특성상 아주 부드럽게 말씀들을 하십니다만...
저는 성서를 "줄글"로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줄글"로 볼 때 그 맥락에서는 교리가 완전히 담지 못하는 부분도 반드시 존재합니다... 성서는 폐쇄된 체계가 아닌 열려진 체계라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교리"라는 것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생각해야 옳습니다...
법조문처럼 "조각글"로 떼어 와서 교리를 변증하는 방법은 앞뒤가 바뀐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박영선 목사님이나 여러 유수의 신학자들의 책이 불편합니다... 그렇게 정통신학에서 비판하는 구원파,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같은 이단들의 방법론도 어떤 면에서는 "정통주의의 방법론이 극단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나라의 극우나 북한의 김정일의 극좌 - 김정일 자신은 스스로를 극좌라 생각하지 않겠지만-나 현상적으론 비슷한 모습을 보이니깐요)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그런다죠? "예수는 하느님이 아닌 선지자다" 이건 여호와의 증인들이 교리입니다... 성서에 보면 "선한 선생님 하니까 예수께서 나를 보고 선하다 하지 말라,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다." 라는 말씀 및 그런 비슷한 말씀들이 있는데, 그 말씀을 전체 맥락 무시하고, 조각글로, 표면적으로 이해하니깐 그런 교리가 나오고, 기독교의 "신비"가 완전히 훼손되어버렸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여기까지 오게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명재님의 문제 제기는 정당하다는 이야기를 하고싶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신학적 분위기에서는 비판이라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라는 그 강박관념을 깬 정 목사님의 노력은 참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목사님 조차도 스스로를 비판의 대상으로 열어놓았으니까요... 그래서 존경합니다...
"아주 점잖은 매도" 라는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댓글 상으로만이라도 박영선 목사님께 사과드립니다...
근본주의 기독교, 개혁주의 기독교에서 받은 저의 상처가 너무 컸었나 봅니다... 학교 다닐 때 저는 신앙적으로 상당히 고민을 많이 했고, 한 때 신앙을 버릴려고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공동번역 신약성서를 접하고, 뚫어지게 탐독하면서 뭔가 확실히 잡히지는 않지만 기독교를 버릴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부활이라는 거짓말(?)을 하는 사도들의 태도는 너무 진실했고, 그들의 변화는 너무 극적이었으며, 성서의 "맥락"을 읽으면서 도저히 부활을 믿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속해있던 선교단체는 IVF 계열이었는데, 그 곳에서는 거의 저의 진정성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고, 의료봉사라는 의료봉사는 다 따라다니고 사람들과 깊은 친분을 유지하며 지냈지만, 신앙적으로는 기껏해야 아웃사이더, 냉담자, 자유주의자, 인본주의자 취급 받았습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가 설화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자세히 읽어보면 창조 이야기는 두 가지가 완전히 다른 독립적인 이야기처럼 존재해요... 가인이 아벨을 죽였는데 가인은 다른 사람들이 동생을 죽인 자라고 자신을 죽일려고 하면 어떡하느냐는 이야기에서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사람들인가요?
+창세기가 설화라는 이야기는 얼토당토 하지 않은 불신앙적인 이야기다... 그리고 어디 다른 두 이야기가 있느냐? 니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어지는 이야기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계속적으로 출산을 했다...
*성서에 그런이야기는 없어요...성서 설화는 매끈한 스토리를 말할려는 것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면 성서의 창조 기사가 그리스 신화같은 그런 수준이란 말이냐?
*질적인 면에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동체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던 그 형은 저를 완전히 괄호 밖으로 내어 버렸습니다... 중보 기도회 참석도 잘 안하고, 자신이 이끄는 성경 공부 모임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는 주제에 무슨 신앙을 말하냐는 식이었죠...
그 형과는 지금도 인간적인 교류조차도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물론 감정적이었던 저의 실수도 있었음 인정합니다만...
그런데 그 당시 그 형들과 동기들이 주로 탐독하던 서적이 박영선 목사님과 김남준 목사님 등등 그런 분들의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재밌는 건 형들이 주로 보는 책들은 그 "신앙서적" 들이고 성서는 참고 자료로 활용되고 있었다는 아이러니 입니다... 저는 신앙서적들 제대로 본 것이 없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를 매일 탐독하고 감명깊은 말씀에 줄도 쳐가면서 보니까 한다는 말씀들이 "신앙서적 좀 봐라... 신앙 서적을 안보니까 성경이 제대로 이해가 안되지..." 물론 기독교인들의 특성상 아주 부드럽게 말씀들을 하십니다만...
저는 성서를 "줄글"로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줄글"로 볼 때 그 맥락에서는 교리가 완전히 담지 못하는 부분도 반드시 존재합니다... 성서는 폐쇄된 체계가 아닌 열려진 체계라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교리"라는 것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생각해야 옳습니다...
법조문처럼 "조각글"로 떼어 와서 교리를 변증하는 방법은 앞뒤가 바뀐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박영선 목사님이나 여러 유수의 신학자들의 책이 불편합니다... 그렇게 정통신학에서 비판하는 구원파,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같은 이단들의 방법론도 어떤 면에서는 "정통주의의 방법론이 극단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나라의 극우나 북한의 김정일의 극좌 - 김정일 자신은 스스로를 극좌라 생각하지 않겠지만-나 현상적으론 비슷한 모습을 보이니깐요)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그런다죠? "예수는 하느님이 아닌 선지자다" 이건 여호와의 증인들이 교리입니다... 성서에 보면 "선한 선생님 하니까 예수께서 나를 보고 선하다 하지 말라,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다." 라는 말씀 및 그런 비슷한 말씀들이 있는데, 그 말씀을 전체 맥락 무시하고, 조각글로, 표면적으로 이해하니깐 그런 교리가 나오고, 기독교의 "신비"가 완전히 훼손되어버렸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여기까지 오게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명재님의 문제 제기는 정당하다는 이야기를 하고싶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신학적 분위기에서는 비판이라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라는 그 강박관념을 깬 정 목사님의 노력은 참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목사님 조차도 스스로를 비판의 대상으로 열어놓았으니까요... 그래서 존경합니다...
2007.05.01 12:32:33
팽팽한 접전이 볼만합니다.
저는 감히 이런 분위기에는 수준이 미달이기에
그저 눈으로만 즐기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이런 글을 남기려는 것은
이런 역사적인 현장에 나도 있었음을 남기고 싶은 욕심이랄까
하여간 늘오늘 님의 추임새도 끝내주고
때때로 끼어드어 숨고르기를 유도하는 강길님도 좋구요.
빈의자님의 말대로
그 끝이 어디일까를 가늠할 수 없게 하는
무명재님의 날 시퍼렇게 선 칼끝이 섬찟한 공포를 느끼게 하는
이쯤해서 뉴욕님이 등장하실거란 생각인데....
저도 처음에는 정중하고 예의바른
그래서 너무 인신공격적인 것보다는
그저 나름의 의견을 필력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는데
읽어가다가 드는 느낌이
아예 이런 분위기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야 더 예리해질 것도 같고
분위기도 왠지 살벌한 게 더 깊은 것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감히 이런 분위기에는 수준이 미달이기에
그저 눈으로만 즐기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이런 글을 남기려는 것은
이런 역사적인 현장에 나도 있었음을 남기고 싶은 욕심이랄까
하여간 늘오늘 님의 추임새도 끝내주고
때때로 끼어드어 숨고르기를 유도하는 강길님도 좋구요.
빈의자님의 말대로
그 끝이 어디일까를 가늠할 수 없게 하는
무명재님의 날 시퍼렇게 선 칼끝이 섬찟한 공포를 느끼게 하는
이쯤해서 뉴욕님이 등장하실거란 생각인데....
저도 처음에는 정중하고 예의바른
그래서 너무 인신공격적인 것보다는
그저 나름의 의견을 필력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는데
읽어가다가 드는 느낌이
아예 이런 분위기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야 더 예리해질 것도 같고
분위기도 왠지 살벌한 게 더 깊은 것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2007.05.01 12:40:41
조금은 서로 감정이 상하는 일이 생긴 것 같긴 하지만, 오히려 잘 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조용 조용히 존중만 해주면서 쉬쉬하는 것 보다는, 어떤 땐 치고 박고 싸우고 완전히 커밍 아웃하고 나면 서로의 결점과 약점도 더 잘 볼 수가 있을 것같고 오히려 서로 더 깊은 이해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2007.05.01 13:06:47
저에 대한 말이 많이 나왔네요.
그런데, 저를 비난하시는 분들 가운데,
제가 단 댓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잘못이라고,
납득할 수 없다고 제시한 분이,
단 한 분도 안 계십니다.
단지, 무례하다는 그런 말 뿐인데,
그 한 마디 하시려면, 뭣하러 그렇게 길게들 쓰십니까?
솔직히, 허탈합니다.
저는 박 목사님의 글에 대하여,
왜 사리에 닿지 않는지, 본문의 대목까지 뽑아가며,
조목조목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나름, 성실하게 답을 달았는데,
그것이 무례하다니, 하나마나한 말 아닙니까?
과연 어느 쪽이 감정 싸움으로 몰아가고 있는 겁니까?
저한테 비난의 화살을 겨누시는 분들,
대답들 해 보시죠.
생산적인 반박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기다리는나무님,
저한테, 당신이 개혁주의를 얼마나 아느냐고 비판하시기 전에,
위의 글을 쓰신 박 목사님께,
목사님께서 정 목사님 및 판넨베르크의 신학을 얼마나 자세히 읽었느냐고
묻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얘기되고 있는 바는,
정 목사님의 신학과 설교 비평을 비판하는 박 목사님의 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볼 때, 위의 글은, 무성의하게, 조금 읽고
박 목사님 당신의 선입견대로 쓴 비평이라는 흔적이 역력하기에,
제가 굳이 구구하게 말을 늘어놓은 겁니다.
아마도, 박 목사님은,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개념을 모르는 게 확실합니다.
'창발적 진화' 개념은 듣도보도 못했을 거구요.
박 목사님의 글 자체가, 당신은 이러한 기본 개념들에 무지하다는 걸 드러냅니다.
그러면서, 보편사 운운하며 정 목사님의 신학을 비판합니까?
스스로 모순이라고 생각 안 해보셨나 보지요?
그런데, 정 목사님의 보편사 개념이 이성주의, 자유주의 어쩌고 운운하는 것은,
식자들의(저는 이 부류에 끼지 못합니다만) 웃음거리만 될 뿐입니다.
어쩌자고, 자신의 무지와 무성의한 독서를 스스로 폭로하는 글을,
[기상]에 실으셨답니까?
참으로 용감하십니다.
그런데, 저를 비난하시는 분들 가운데,
제가 단 댓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잘못이라고,
납득할 수 없다고 제시한 분이,
단 한 분도 안 계십니다.
단지, 무례하다는 그런 말 뿐인데,
그 한 마디 하시려면, 뭣하러 그렇게 길게들 쓰십니까?
솔직히, 허탈합니다.
저는 박 목사님의 글에 대하여,
왜 사리에 닿지 않는지, 본문의 대목까지 뽑아가며,
조목조목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나름, 성실하게 답을 달았는데,
그것이 무례하다니, 하나마나한 말 아닙니까?
과연 어느 쪽이 감정 싸움으로 몰아가고 있는 겁니까?
저한테 비난의 화살을 겨누시는 분들,
대답들 해 보시죠.
생산적인 반박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기다리는나무님,
저한테, 당신이 개혁주의를 얼마나 아느냐고 비판하시기 전에,
위의 글을 쓰신 박 목사님께,
목사님께서 정 목사님 및 판넨베르크의 신학을 얼마나 자세히 읽었느냐고
묻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얘기되고 있는 바는,
정 목사님의 신학과 설교 비평을 비판하는 박 목사님의 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볼 때, 위의 글은, 무성의하게, 조금 읽고
박 목사님 당신의 선입견대로 쓴 비평이라는 흔적이 역력하기에,
제가 굳이 구구하게 말을 늘어놓은 겁니다.
아마도, 박 목사님은,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개념을 모르는 게 확실합니다.
'창발적 진화' 개념은 듣도보도 못했을 거구요.
박 목사님의 글 자체가, 당신은 이러한 기본 개념들에 무지하다는 걸 드러냅니다.
그러면서, 보편사 운운하며 정 목사님의 신학을 비판합니까?
스스로 모순이라고 생각 안 해보셨나 보지요?
그런데, 정 목사님의 보편사 개념이 이성주의, 자유주의 어쩌고 운운하는 것은,
식자들의(저는 이 부류에 끼지 못합니다만) 웃음거리만 될 뿐입니다.
어쩌자고, 자신의 무지와 무성의한 독서를 스스로 폭로하는 글을,
[기상]에 실으셨답니까?
참으로 용감하십니다.
2007.05.01 12:52:25
우선 잘 읽었습니다.
정목사님 설교비평에 다시 반론을 제기하려했다는 시도에 대해 박목사님의 용기(?)에 점수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감정적인 사람이라 그 용기만으로도 박수를 드리고 싶습니다. 화면이 아닌 프린터를 해서 종이로 읽던지 해야겠다 생각합니다. 화면은 아직 되씹기에 익숙치 않아서....
정목사님 설교비평에 다시 반론을 제기하려했다는 시도에 대해 박목사님의 용기(?)에 점수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감정적인 사람이라 그 용기만으로도 박수를 드리고 싶습니다. 화면이 아닌 프린터를 해서 종이로 읽던지 해야겠다 생각합니다. 화면은 아직 되씹기에 익숙치 않아서....
2007.05.01 13:07:43
그 참.. 살벌한 논쟁을 바라시는 분들이 제법 계시는군요~
여기는 정용섭 목사님의 홈 그라운드입니다.
박영선 목사님께서 반론을 <기상>에 게재하셨다면,
정식으로 반론을 제기하신 것인데
정용섭 목사님의 홈 그라운드에서 너무 조심성 없게 댓글을 단다면
제 3자의 입장에서는 신학논쟁은 차치하고라도
정용섭 목사님과 다비안들의 판정패입니다.
명백히 부당한 주장은, 굳이 다비안들이 험하게 뭐라 하지 않아도,
사람들 알아 볼 겁니다. 그리고, 알아 보지 못한다면
이곳에서 말해도 소용없을 테지요.
특히나, 박영선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는 교회의 교인들과
제자분들의 입장을 고려해야 하겠지요.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 담임목사님 글에 달린 댓글들에는
민감할 수밖에 없거든요. 저번 최영기 목사님 때도 그랬죠.
하여, 박영선 목사님꼐서 선 자리가 틀렸다는 것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양자간의 오해는 풀고, 화해의 길을 살펴보고,
남은 과제들은 무엇인지 정리하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신앙은 절대로 윽박지름이 아니라죠? ㅋㅋ
그리고, 신앙이란 이유로 사람을 유린해서도 안 되겠죠?
그라모, 저는 이만..
여기는 정용섭 목사님의 홈 그라운드입니다.
박영선 목사님께서 반론을 <기상>에 게재하셨다면,
정식으로 반론을 제기하신 것인데
정용섭 목사님의 홈 그라운드에서 너무 조심성 없게 댓글을 단다면
제 3자의 입장에서는 신학논쟁은 차치하고라도
정용섭 목사님과 다비안들의 판정패입니다.
명백히 부당한 주장은, 굳이 다비안들이 험하게 뭐라 하지 않아도,
사람들 알아 볼 겁니다. 그리고, 알아 보지 못한다면
이곳에서 말해도 소용없을 테지요.
특히나, 박영선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는 교회의 교인들과
제자분들의 입장을 고려해야 하겠지요.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 담임목사님 글에 달린 댓글들에는
민감할 수밖에 없거든요. 저번 최영기 목사님 때도 그랬죠.
하여, 박영선 목사님꼐서 선 자리가 틀렸다는 것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양자간의 오해는 풀고, 화해의 길을 살펴보고,
남은 과제들은 무엇인지 정리하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신앙은 절대로 윽박지름이 아니라죠? ㅋㅋ
그리고, 신앙이란 이유로 사람을 유린해서도 안 되겠죠?
그라모, 저는 이만..
2007.05.01 13:08:14
'설교비평'이라는 숙제는 해도해도 끝나지 않는 것임에는 분명한 것 같구,
결국엔 자신과의 끝없는 고독한 싸움 같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네요^.^
이를테면..,
박영선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신학적 개념들을 당신의 설교에 적용해도 비평이 될 것 같구...
정용섭목사님이 하나님 다음으로 섬기시는듯 보이는 판넨베르그의 조직신학 틀로 이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정목사님의 설교를 비평해도 ...^^.
그럼 니가 한번 비평해 보라!!!고 다그치는 다비안님들의 성화가 들리는군요ㅎㅎㅎㅎ
성도님들로부터 듣는 설교비평에도 힘겨워하는 바보같은 목사이기에..
남의 설교 갖고 함부로 비평하기를 두려워 한답니다.
결국엔 자신과의 끝없는 고독한 싸움 같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네요^.^
이를테면..,
박영선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신학적 개념들을 당신의 설교에 적용해도 비평이 될 것 같구...
정용섭목사님이 하나님 다음으로 섬기시는듯 보이는 판넨베르그의 조직신학 틀로 이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정목사님의 설교를 비평해도 ...^^.
그럼 니가 한번 비평해 보라!!!고 다그치는 다비안님들의 성화가 들리는군요ㅎㅎㅎㅎ
성도님들로부터 듣는 설교비평에도 힘겨워하는 바보같은 목사이기에..
남의 설교 갖고 함부로 비평하기를 두려워 한답니다.
2007.05.01 13:28:48
이곳 다비아의 특성상
아래 향린교회 조헌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줄 알았는데....
이곳 다비아의 취지 중에는 보수적인 전통(지평)에 있거다 그 영향 아래에 있는 분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시작했다는 정 용섭 목사님의 댓글이 기억납니다. (세상읽기 중 베낀글 149 번 참조 : "다비아는 사실 ** 님 같은 분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시작한 사이트였지요. 보수적이고 독실하지만 아직 세계 개방성에 이르지 못한 분들에게 그 신학적 영성을 제공하려는 것이었어요.")
긴말 하지 않아도 이곳 다비아에는 그런 분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눈팅에 그치지만 나름 이곳 다비아 회원 중 다수를 이루고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논리에서 이기는데 사람은 떨어져 나가고......
신학과 신앙은 별개의 문제일까?
전 보수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지만, 확실한건 아직 세계개방성에 이르지 못했는데요....
벌써 질릴려고 합니다. (제가 그렇다는데 누가 말리겠습니까?)
"예의를 갖춘(?) 무식한 자들이여!
나의 예의 없음을 논리적으로 규명하라!!! "
아래 향린교회 조헌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줄 알았는데....
이곳 다비아의 취지 중에는 보수적인 전통(지평)에 있거다 그 영향 아래에 있는 분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시작했다는 정 용섭 목사님의 댓글이 기억납니다. (세상읽기 중 베낀글 149 번 참조 : "다비아는 사실 ** 님 같은 분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시작한 사이트였지요. 보수적이고 독실하지만 아직 세계 개방성에 이르지 못한 분들에게 그 신학적 영성을 제공하려는 것이었어요.")
긴말 하지 않아도 이곳 다비아에는 그런 분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눈팅에 그치지만 나름 이곳 다비아 회원 중 다수를 이루고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논리에서 이기는데 사람은 떨어져 나가고......
신학과 신앙은 별개의 문제일까?
전 보수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지만, 확실한건 아직 세계개방성에 이르지 못했는데요....
벌써 질릴려고 합니다. (제가 그렇다는데 누가 말리겠습니까?)
"예의를 갖춘(?) 무식한 자들이여!
나의 예의 없음을 논리적으로 규명하라!!! "
2007.05.01 13:43:56
저도 그 간 한국교회(정통주의 보수진영)를 향한
정 교수님의 대화요청에
왜 이리 아무 대답이 없는지 의문이었습니다.
박영선 목사님의 긴 답글을 읽으면서
소위 보수와 진보간의 신학의 차이를 발견하지만
동시에 상호교류의 가능성을 감지 할수 있었습니다.
이제 시작이지만 서로를 향해 애정어린 권고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이러한 바람직한 시도를 오히려 적대적 관계로 고착시키는 기회로 활용하며
개념없이 내두르는 칼춤에 일일이 장단 맛출 필요는 없겠지요.
이단을 통해서도 배움을 얻었던 선조의 지혜를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박 목사님의 성의있는 의견과
정 교수님의 유연한 반응이 인상적 입니다.
정 교수님의 대화요청에
왜 이리 아무 대답이 없는지 의문이었습니다.
박영선 목사님의 긴 답글을 읽으면서
소위 보수와 진보간의 신학의 차이를 발견하지만
동시에 상호교류의 가능성을 감지 할수 있었습니다.
이제 시작이지만 서로를 향해 애정어린 권고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이러한 바람직한 시도를 오히려 적대적 관계로 고착시키는 기회로 활용하며
개념없이 내두르는 칼춤에 일일이 장단 맛출 필요는 없겠지요.
이단을 통해서도 배움을 얻었던 선조의 지혜를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박 목사님의 성의있는 의견과
정 교수님의 유연한 반응이 인상적 입니다.
2007.05.01 13:53:22
물론 무명재님의 말씀이 날카로울 수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상대방을 자극하는 언사로 느껴질 수 있지만, "개념없는 칼춤" 이란 말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무명재님을 비판하는 분들의 말씀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일치와 은혜로운 분위기, 대충 대충 봉합하는 그런 태도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죄송합니다만...
무명재님을 비판하는 분들의 말씀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일치와 은혜로운 분위기, 대충 대충 봉합하는 그런 태도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죄송합니다만...
2007.05.01 14:12:32
첫날처럼님,
설득력 있는 비판은 상대에 대한 선 이해를 전제합니다.
곧 왜 상대가 이러한 의견을 개진 하는가에 대한 성찰입니다.
이 과정이 소흘한 비판은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지요.
사용되는 용어에 대한 기본이해 조차 결여 됐음에도
난무하기에 '개념없는 칼춤' 이지요. 아니 어설픈 칼춤 이지요.
공명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공허한 소음을
화음으로 승화해서 듣기에는 아직 갈길이 멀군요.
설득력 있는 비판은 상대에 대한 선 이해를 전제합니다.
곧 왜 상대가 이러한 의견을 개진 하는가에 대한 성찰입니다.
이 과정이 소흘한 비판은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지요.
사용되는 용어에 대한 기본이해 조차 결여 됐음에도
난무하기에 '개념없는 칼춤' 이지요. 아니 어설픈 칼춤 이지요.
공명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공허한 소음을
화음으로 승화해서 듣기에는 아직 갈길이 멀군요.
2007.05.01 14:18:32
무명재님 잘 알고 계시군요. 누가 당신의 주장을 비판한답니까? 당신의 글쓰는 태도를 비판하는것 아닙니까? 위에서 어떤 분이 댓글을 남겼듯이 우리는 당신의 학문적 수준과는 비교도 않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의 글쓰는 태도는 문제가 있습니다. 당신은 이제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글의 길이까지 간섭을 하시고 있습니다.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대구 성서 아카데미 홈페이지에서 무슨 역활을 맡은 사람이기에 정식으로 회원으로 가입해서 글을 올리는 사람들의 글의 양까지 간섭할려고 하십니까? 당신이 조목조목 비판한 박목사님의 글 내용을 두고 흥분하는것이 아닙니다. 많은것을 배울수 있는 귀한 자료요 원천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격과 학문성"을 운운하는것은 욕을 얻어 먹을 짓임에 틀림없습니다. 어디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바우로 님께서 김성관 목사님에 대해서 조금 격한 표현을 사용했을때 정용섭 목사님께서 공식적으로 사과하라고 하신 댓글이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정식 루트를 통해 올린 반론문을 향해서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 한편의 글을 보고 "인격이 의심스럽다" "목회와 신학에나 어울릴 글이다" 이 따위의 표현을 한단 말입니까? 위의 첫날처럼 님 처럼 일단 사과를 하십시오. 그게 순서이고 이 홈피가 더욱더 좋은 방향으로 갈수 있는 길입니다. 아무리 흥분을 하셔도 그렇게 하시는것 아닙니다. 인정하십니까?
.
.
2007.05.01 14:29:12
제 입장은 사랑채에 따로 쓴 글에서 밝혔구요,
인정 못하겠습니다.
학문적인 전문 잡지에 박 목사님께서 학문적인 비평으로 올리신 글에 대하여,
학문적 함량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논지 전개에서부터 결함이 있다라고,
그래서 학자적 소양마저 의심되는 폭력적 글쓰기라 비판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되지 않거든요.
학문적인 글에 대하여 학문적 판단으로 부적절하다라고 평가한 데 대하여,
대장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께서는,
구체적으로 지적들을 한 마디도 않으시니,
저는 귀담아 듣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학문적으로 갈것까지도 없어요. 기본적 논지 전개는,
요새 중고등학생들도 논술 공부 하면서 다 배웁니다.
보통 수준의 학력을 갖고, 국어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다 파악할 수 있는 겁니다.
문제는, 독서와 글쓰기의 성실성이지요.
인정 못하겠습니다.
학문적인 전문 잡지에 박 목사님께서 학문적인 비평으로 올리신 글에 대하여,
학문적 함량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논지 전개에서부터 결함이 있다라고,
그래서 학자적 소양마저 의심되는 폭력적 글쓰기라 비판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되지 않거든요.
학문적인 글에 대하여 학문적 판단으로 부적절하다라고 평가한 데 대하여,
대장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께서는,
구체적으로 지적들을 한 마디도 않으시니,
저는 귀담아 듣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학문적으로 갈것까지도 없어요. 기본적 논지 전개는,
요새 중고등학생들도 논술 공부 하면서 다 배웁니다.
보통 수준의 학력을 갖고, 국어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다 파악할 수 있는 겁니다.
문제는, 독서와 글쓰기의 성실성이지요.
2007.05.01 14:40:16
무명재님 동일한 주장을 전개하더라도 예의라는게 있습니다. 자 다른것 다 집어치우고 한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아직도 박영선 목사님의 인격이 형편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한편의 글만봐도 다 훤히 그 분의 인격이 보이십니까?
2007.05.01 15:04:59
참 이상한 분이군요. 예의 운운하면서 논의의 촛점을 흐린다니요. 저는 그렇게 한적 없습니다. 언제 제가 그렇게 했단 말입니까? 참 자기식의 필링을 강하게 주장하시는 분이군요. 저는 다만 상대방의 글을 평가할때 충분하지도 않은 정보를 가지고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는 말자는 이야기를 한 것 뿐입니다. 오히려 저의 주장은 이런부분에서 더욱 상대편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킨다면 더욱 논지에 집중할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비 본질적인 부분에서의 무례한 표현떄문에 여기에 회원으로 가입한 적지 않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느냐 말입니다. 도대체 누가 논지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까? 논지에 집중하지 않는 무례함을 거두라고 하는 그 무례함부터 거두어 주세요. 그런식의 표현을 삼가야지 더욱 건강하게 이 홈피가 발전할수 있는것 아닙니까?
2007.05.01 15:19:39
누가 논지에 집중하지 말라고 합니까? 더욱더 논지에 집중합시다. 진심입니다. 그러면 논지에 집중한다고 해서 막말에 가까운 표현이 동시에 용납되어야 합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원고 파일을 기상에서 받아 여기 올렸습니다.
목회와 강의에 바쁘신 중에서 이런 장문의 글을 쓰셨다는 게 놀랍습니다.
서로의 신학적 차이를 적절하게 제시하신 것 같습니다.
이 글에 대한 저의 대답은 없을 겁니다.
대신 중간의 입장에서 다비안들께서 기탄없이 평가해주시면 좋겠군요.
감사.
오자가 있어서 고치는 길에 몇 마디 덧붙입니다.
박영선 목사님은 전에게 전화를 몇번이나 주시면서
꼭 필요한 적업을 하고 있노라고 덕담을 주신 분이십니다.
저는 지난 2월(?)쯤인가 직접 남포교회로 찾아뵙기도 했지요.
키도 크시고 잘 생기셨고, 성품도 좋으시고,
목회도 뛰어나게 잘 하십니다.
위의 글은 기독교 사상에서 특집으로 다룬 한 대목입니다.
다른 분들도 몇분이 글을 쓰셨지요.
저는 박영선 목사님이 저의 설교비평 작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차이를 지적한 것입니다.
신학 안에 차이가 없다면 발전도 없겠지요.
그런 점에서 필요한 지적이엇다고 봅니다.
다만 그게 차이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신학적인 차이라기보다는 개념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계시, 종말, 미래, 역사, 성서, 존재, 인식, 해석 등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대글을 다시는 분들이 그렇게 흥분할 건 없는 것 같군요.
그냥 뭐가 다른지,
무슨 지적이 옳은지,
뭐 그런 이야기를 편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박영선 목사님은 소위 말이 통하는 몇 안 되는 어른 중의 한분이시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