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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목사의 설교 비평에 답한다.
매월 정용섭 목사님(이하 ‘정목사’)의 설교 비평의 글을 읽는 일에 기쁨을 갖고 읽었던 독자가 바로 그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진보교회의 대표로 알려진 향린교회의 목사이니까 언젠가는 그 비평의 대상이 되긴 하겠지만 이민목회 20여년의 삶을 접고 고국으로 돌아온 햇수가 짧아 아직은 공개적인 비평의 대상이 되기에는 이르다고 보고 있었는데, 그 때가 도적같이 임하고 말았다!
비평이라고 하는 것은 비판적 안목에서 출발하는 것이니까 비평의 대상이 된 사람이 만족할 만한 비평은 사실상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자기 성찰에 힘써온 비판적 지성인으로 자각하고 있는 필자로서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비평에 동의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어차피 사람에 따라 보는 관점은 다른 것이니까 다르다는 것에 무슨 시비가 있을 수 있으랴. 그러나 그 비평이 학문적 객관성을 상실하고 글 쓰는 이 주관에 따른 곧 비판을 위한 비평으로 보일 때, 그 대상자는 선뜻 동의할 수가 없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정목사의 설교 비평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이유이다.
조목사=독립투사?
우선 정목사는 필자의 설교에 비평을 하는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향린교회와 조목사가 2년 동안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운동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마치 독립운동에 나선 독립투사처럼 매우 결연한 태도로 이 문제에 맞서고 있다.” 물론 지금도 평택미군기지 확장반대를 위한 현수막을 내걸고 있고 이에 관련하여 여러 집회에 참여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를 마치 평택문제에 목회의 생사를 건 ‘독립투사’로 묘사하는 것은 정목사가 오늘의 민족 현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어떠한지 그리고 향린교회의 목회와 필자에 대한 편견이 어떠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명의 목사가 행한 사회적 신앙 실천운동을 ‘독립투사’라고 표현한 것은 무슨 의도인가? 이는 대화와 평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21세기에 1930년대 일제 때의 운동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구시대적인 유물이라는 의미에서 하는 소리가 아닌가? 물론 정목사가 그렇게 느꼈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교회와 목사를 열린 시각을 갖고 접근하는가, 아니면 닫힌 시각을 갖고 접근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신앙인은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성서에서 야훼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히브리 노예들의 소리를 듣고 인간을 찾아오신다. 바로 이렇게 애타하는 마음이 자궁을 뜻하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이다. 지금 쓰라린 가슴을 안고 맨손으로 평생을 걸려 일구어온 땅을 미군기지로 내어주고 떠나야 했던(지난 백년 사이에 그들은 세 번이나 이렇게 쫓겨났다!) 수 백 명의 대추리 도두리 농부들의 아픔을 정 목사는 과연 긍휼의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지금 정목사는 다른 목사와는 달리 향린교회의 목회에까지 그 비평의 폭을 넓히고 있다. 이어지는 글에서 정목사는 향린교회의 개혁성이나 국악예배, 그리고 민중신학의 산실로서의 향린교회의 독보적 위치에 대해 칭찬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미 첫 문장에서부터 독자들에게 조목사는 독립투사로 그리고 향린교회는 그를 따르는 일제하의 전투적 부대로 암시를 준 다음 얘기를 진행하는 것이 과연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성령의 열림과 생명성을 매번 주장하는 목사로서 적절한 태도인가?
작금의 우리 사회의 보수적 이념성 그리고 사학법 재개정을 주장하고 성조기를 앞세워 시청 앞에서 집회를 여는 반사회적이고 반민족적인 교회의 행태가 가져온 폐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정목사께서 이런 식으로 말문을 연다고 하는 것에 대해 실망스러움을 금치 못한다. 자칭 개혁적이라고 말하는 정목사가 설교의 지평을 떠나 굳이 향린교회 목회에 대해 언급을 하고자 했다면 오히려 이런 기회를 통해 이러한 개혁적인 교회가 더 많아져야 남한 교회에 희망이 있을 것이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물론 정목사와 필자는 살아온 삶의 길이 다르고 민족의 미래를 바라보는 눈이 다르고 통일에 향한 열정의 강도가 다르다. 이렇게 다른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정목사에게 주어진 공간 안에서 정당한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같은 얘기라 하더라도 근거를 제시한 다음 마지막에서 어떤 결론을 짓는 것과 아예 처음부터 어떤 결론을 제시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은 천지차이이다. 더구나 필자를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그리고 이미 백편이 넘는 설교 가운데 단지 두세 편만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비평하는 것으로 필자의 전부를 믿게 만드는 좁은 공간 안에서 ‘조목사=독립투사’라고 결론짓고 시작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비평방법인가? 솔직히 말하면 필자는 그런 ‘투사’가 될 기질이 부족해서 항상 고민해 왔다. 평택문제만 하더라도 가톨릭의 문정현신부님을 뵈올 때마다 그분의 투철한 정의감과 열정 앞에서 언제나 고개가 숙여졌다. 그런 필자에게 ‘독립투사‘라니! 그건 너무나도 과분한 칭호이다. 정목사가 필자의 비겁함을 잘 몰라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필자는 그렇게 불릴 자격이 없다. 다만 오늘 예수님이 함께 했을 그런 사람들이 누구인지 고민하고 그들의 아픔에 동행 했을 따름이다.
곁가지의 얘기이지만 정목사는 2006년도의 필자의 설교 횟수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2006년 한 해 동안 서른 번 남짓의 주일설교만 했다. 두 달간의 안식휴가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주일공동예배의 설교를 가장 적게 하면서도 제대로 된 연봉을 받는 설교자는 한국에서 조 목사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평신도설교를 비롯한 강단개방에 앞서가는 교회로 잘했다고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다른 뜻으로 말하는 것인지 필자로서는 의아스럽다. 설교 비평이라고 하는 것이 설교의 질을 논하자고 하는 것인데 설교의 양이 얘기되고 그리고 이에 연관하여 연봉이 등장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마도 땅값 비싼 명동에 위치한 교회이니까 향린 교인들은 모두 부자들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설교와 목회
정목사도 교회목회는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목사의 목회활동을 설교에 한정하여 보는 것은 옳지 않다. 필자는 남한의 교회 목회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다고 보고 있다. 그러기에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출석하여 설교를 듣는 것으로 신앙을 대체하는 뜨내기 교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나는 목사의 역할 중에 설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켜 사도로 보내셨듯이 교인들을 불러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내어 보내는 것이 목회의 근본이다. 평신도 설교는 바로 그러한 목회 훈련의 한 과정이다. 혹 정목사는 평신도설교를 외부목사들에게 부탁하듯이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평신도들에게 설교를 준비시키는 일은 목사에게 있어 한편의 설교를 만드는 일보다 더 많은 노력과 기도가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설교는 어떤 의미에서 교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일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평신도 설교의 효과는 얼마나 있을까? 필자의 경험으로는 수 십 번의 설교를 듣는 것보다 한 번의 평신도 설교를 함으로써 더 큰 신앙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 목사님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강단을 개방하고 교인들에게 (특별 신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평신도라는 단어도 적절치 않다. 필자는 교회목회자와 생활목회자로 구분하고 있다.) 설교의 기회를 주고 믿음의 훈련을 시켰으면 좋겠다. 특별한 절기를 맞아 삶을 나누도록 하면 더욱 좋다.(장애인주일 등)
정목사는 필자를 평화 원리주의자 그리고 현실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자로 묘사하고 있다. 필자는 규정받는 것을 싫어하여 남을 규정하는 일을 피하려 하지만 정목사의 규정에 대해 일정부분 동의한다. 설교자가 원형으로 삼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원리주의자라는 말을 타협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예수님이야 말로 원리주의자가 아니셨는가? 자신 앞에 십자가의 죽음이 놓여 져 있는 것을 알면서도 타협 없이 계속 걸으셨다면 예수님이야 말로 철저한 원리주의자이셨다는 것이 필자의 예수 이해이다. 또한 예수님은 당시의 지배자들을 비난하고 이런 지배체제의 상징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채찍을 들어 그 안을 헤집어 놓았으니 이분이야 말로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셨는가? 만약 현실을 감안하셨다면 그렇게 무모한 일을 하셨을까?
설교자는 예수님을 따라 평화의 원리에 입각해서 이상에 가까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성서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이자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였고 이 하나님 나라는 정의와 평화로 요약된다. 설교자는 이 땅에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가 종말론적으로 실현되었음을 선포하고 자신의 목회와 삶에서 그렇게 실천하면 된다. 목사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근본 원리를 선포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각자의 삶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하면 된다. 필자는 현재 남한의 설교자들이 30분의 짧은 설교 안에 원리와 적용 모두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그렇게 하니까 교인들의 주체적 사고를 가로막고 설교 내용은 깃털마냥 가벼워지고 윤리도덕적인 하나의 강령으로 결론짓고 신도들을 행복과 사랑이라는 모호한 환상의 심리의 세계로 인도하고 만다. 그리하여 결론에서 ‘주 안에서 능치 못함이 없다.’는 상투적 구호가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내 경험으로 본다면 전하고자 하는 하나의 신앙의 원리만 얘기하는데도 30분 이상이 걸린다.
현실 인식의 차이
필자의 설교에 대한 정목사의 가장 주된 비평은 사회정치 현실에 대한 지나친 언급으로 보고 있다. 정치설교라는 표현을 쓰진 않았지만, 설교에 있어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반대 운동 국가보안법 철폐 그리고 한미FTA에 관한 시대적 이슈에 대해 빈도나 내용에 있어 설교가 지켜야 할 정도(正道)를 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교회와 정치라는 조직신학적 논쟁에 대해서는 이미 정목사께서 나의 설교 비평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필자는 솔직히 말하면 이 주제에 관련한 조직신학적 논쟁에는 자신도 없거니와 별 관심도 없다. 필자는 다만 오늘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그리고 24년의 미국에서의 소수자의 경험을 통해 민족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나라고 하는 한 개인의 삶은 결코 풀리지 않는다는 역사인식을 갖고 있다. 이 역사인식에서 오늘 한국 민족의 최대 과제는 평화통일이며 이를 위해서는 분단사고의 극복이 우선시 되어야 하고 이 극복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미군주둔이라고 하는 현실인식을 갖고 있다. 나는 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모두 다 이러한 역사 인식을 갖고 있다고 보고 있고 예수님도 그 폭은 다르지만 출발에서는 같다고 보고 있다.(“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마태 15장 24절)
게다가 정목사는 독일 유학생활을 통해 독일 국민들이 갖는 통일에 대한 기쁨과 자부심을 직접 맛보았을 것이다. 지난 2년여 동안 남한사회에서 가장 큰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은 바로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의 문제요 국가보안법 철폐요 한미FTA협정이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목사로서 이 민족사회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목사는 이러한 필자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그 빈도와 속도에 대해 질문할 것이다. 이점에서 나이는 같지만 한국의 진보적인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배경을 갖고 미국의 진보적이고 실증적인 성서신학을 전공한 필자와 보수적인 성결교단의 배경을 갖고 독일의 보수적이고 관념적인 판넨베르크 조직신학을 전공한 정목사와는 사회정치적 현안 문제에 대한 인식과 참여 방식에 있어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하다.
정목사가 평택의 미군 기지를 직접 가서 본 적이 있는지는 몰라도 지난 3년 935일 동안 그곳에서는 몇 차례의 대형평화집회를 포함해서 주민들의 촛불집회가 하루도 빠짐없이 열렸다. 전국적으로 참석한 사람들의 총 숫자를 더하면 아마도 수 십 만 명에 이를 것이다. 이라크에서 아들을 잃고 평화운동가로 변신한 신디 헨 여사를 비롯한 미국 일본 캐나다 호주의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의 사람들이 이곳에 직접 가서 평화를 기원했다. 주민들이 스스로 쌀을 거두어 세운 대추초등학교 건물이 경찰의 포크레인에 의해 부서지던 1년 전 그날! 국제평화회의에 참석한 세계교회협의회 각국 대표 50여명의 목사들 또한 그 대추리 입구에서 경찰들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거리에 서서 기도집회를 가진 바 있다. 단연코 국내외적으로 제일 큰 사회적 이슈였다. 소수자의 인권에 대해 관심하는 신앙인이라면 적어도 한 두 번은 이곳을 방문해서 추방의 아픔을 당하는 자들을 위로하여야 옳았고 또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면서 이 땅의 평화의 문제를 고민하는 설교자라면 평택의 미군기지 얘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평택미군기지 확장의 부당함을 고발하기 위해 미군의 숫자가 줄어드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나는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알 수 없다. 그것도 원고지 70-80매의 분량의 설교 중 두세 줄로 언급하는 일이 비판을 받아야 되는지 필자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말고 그냥 미군기지 확장반대를 외치라는 말인가? 아니면 그런 얘기 자체를 설교 중에는 언급하지 말라는 말인가? 정목사 자신 또한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는 일에 서명하였다고 말하는데, 그는 그러한 자신의 실체를 어떻게 보여주었는가? 사석의 자리에서 친구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 것인가? 평화를 외치는 사람이 많아도 평화가 오지 않고 전쟁이 계속되는 것은 전쟁하는 사람은 목숨을 걸고 하는 반면에 평화를 외치는 사람은 목숨을 걸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어느 평화운동가의 뼈아픈 충고가 있다.
그리고 정목사의 부모님이 이 대추리의 한 주민이었다면 그건 정부가 하는 일이니 빨리 포기하고 주는 대로 보상받아 나오라고 얘기했을까? 난 지금도 빈손으로 평생을 일구어 온 자식 같은 땅을 미군들의 전쟁기지로 내어주고 떠나야만 했던 주민들의 눈물 젖은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나는 예수님이 당시 경제적으로 차별받고 정치적으로 억압받던 갈릴리 민중들과 함께 하면서 지도자들을 비난하였듯이 예수님을 따라 그렇게 살려하고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비난받아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정목사는 오늘의 남한사회에서 갈릴리를 어디로 보고 있는지 묻고 싶다. 설교라고 하는 것은 오늘의 갈릴리가 어디인지 그리고 오늘의 예수는 어떻게 행동 했을 것인지를 성서를 통해 묻고 이에 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정목사가 루터의 ‘두 왕국론’과 칼빈의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의 서로 다른 예를 들면서 “여기서 누가 옳은가 하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자신들의 신학에 근거해서, 그리고 자신들이 처한 고유한 삶의 자리에서 자신들의 길을 간 그들을 오늘의 관점으로 재단하거나 매도할 수 없다.”고 분명히 얘기해 놓고 왜 필자의 설교비평에서는 선을 넘었다고 ‘재단’하거나 독립투사라고 ‘매도’하는가? 가치판단은 유보한 채 비평을 전개할 수는 없었을까?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간 누구나가 그러하듯이 정목사 또한 사회적 가치이념과 개인의 신념이 있을 것이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재단하거나 매도할 수 없다.’라는 얘기를 꺼내지 말든가. 하지 말자고 하면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와 정치
세간에서 흔히 묻듯이 삶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어디까지가 정치이고 어디까지가 종교일까? 세상적으로 말하면 6일은 정치인으로 사는 것이고 하루는 종교인으로 사는 것일까? 아니 과연 정치와 종교의 차이가 있다면 그 경계선은 누가 긋는가? 아니 그 경계선이라는 것이 학문의 세계를 벗어나 실제의 삶 속에서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기도와 노동의 차이가 있는가? 교인들은 교회 문밖만 나서면 현실정치와 사회적 현안의 문제들을 갖고 신앙인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데, 여기에 목사는 이런 논의들은 나라의 정치인들의 몫으로 넘기고 영혼의 문제에만 관심하자고 말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물론 정목사를 포함한 대다수의 보수 신앙인들 또한 이러한 성속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교회와 신학의 잘못된 행태에 말로는 비판하지만 실제 삶에 있어 그리고 삶을 드러내는 설교에 있어 그가 얼마나 진실되느냐?는 실존적인 질문이 남아 있을 따름이고, 그가 생각하는 경계선과 내가 생각하는 경계선에 본질적인 차이가 남아 있을 따름이다.
구약성서에서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는 예언자들은 입만 열면 왕과 나라들에 대해 비판하고 심지어는 저주까지도 하는데 오늘 이 시대에서 이런 역할은 누가 담당해야 하는 것인가? 21세기 남한의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그런 예언자는 필요치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역할은 누가 감당해야 하는 것인가? 정치학자들의 몫인가? 정목사는 예언자의 역할을 한 문익환목사를 존경한다고 하는데 문익환목사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애쓰는 나를 향해서 잘한다고 박수는 치지 못해도 다름에 대한 배려는 지켜야 하지 않았을까? 설교는 정치연설도 아니고 신학강연과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누가 그 다름의 기준을 정하느냐에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벽을 허물라고 하셨는데, 이는 과연 정치적 발언인가 아니면 종교적인 발언인가? 궁전의 벽이 아니라고 했으니 종교적인 발언에 그치고 마는 것인가? 예수님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했는데, 바리새인들은 정치적인 발언으로 오해한 것인가?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종교와 정치의 이분법적 사고는 과연 가능했는가? 현재 노무현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로마 황제를 비판했다면 이는 정치적인 발언이자 동시에 종교적인 발언이었다. 왜냐하면 로마의 황제는 정치의 수장임과 동시에 종교적 숭배의 대상인 신이었기 때문이다. 성서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성서가 갖고 있는 그 시대적 사고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점에서 필자와 정목사는 성서이해에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고 정치와 종교의 경계에 대한 해묵은 논쟁에 있어서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또 다른 문자주의의 위험
정목사는 바울의 로마서 13장을 언급하며 “예수는 로마 제국주의에 항거하라!고 선동하지 않으셨다.”고 단정한다. 물론 복음서 어디에도 이런 구절은 없다. 필자는 이러한 정목사의 단정적인 언사에 갑작스레 슬픔이 밀려온다. 정목사의 성서에 대한 이해가 이런 정도로 단선적이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전 대형교회 목사들을 향한 설교비평에서 성서의 문자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할 때, 정목사는 필자는 성서 이해의 방식이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서 필자는 완전한 차이를 느낀다.
성서에 씌어져 있는 문자 그대로 읽어내는 것이 문자주의의 위험성이라면 역으로 성서에 문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역사적 사실이 없거나 혹은 예수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것 또한 문자주의이기 때문이다. 정목사는 나의 설교 ‘니고데모와 키에르케고르’를 길게 인용하면서 니고데모에 관한 성서구절 사이에 담긴 행간의 의도를 읽어내는 나의 해석에 깊이 감동받고 있는 듯하다. 그런 정목사가 복음서의 다른 기록에서는 왜 이러한 행간의 의도를 읽어내려고 하지 않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예수는 로마 제국주의에 항거하라고 선동하지 않으셨다.’는 구절이 없으니까 그런 일이 없다고 단정한다면,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 후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겨라. 그리고 칼이 없는 사람은 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는 누가복음 22장 36절 말씀에 근거해서 예수는 폭력 혁명을 꾀했다는 말로 결론을 유출해 낸다면 어떤 반론을 제기할지 알 수 없다.
또 다른 성서의 예를 들어보자. 기독교인들은 거의 대부분 매 주일 사도신조를 고백하고 여기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를 죽인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다고 말하는 구절은 없다. 아마 이 얘기를 듣는 독자들은 모두 놀랄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하고. 만약 우리가 선입견 없이 빌라도에 관련된 복음서의 구절들을 읽어보면 복음서 저자들은 빌라도의 책임을 면제해주기 위해 매우 의도적인 노력들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마태복음을 보면 “빌라도는 그들이 시기하여 예수를 넘겨주었음을 알았다‘고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꿈 얘기를 하며 ‘당신은 그 옳은 사람에게 아무 관여도 하지 마세요.’라고 당부하는 얘기가 나오고 빌라도는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 하고 말한다. 그러자 온 백성이 말하기를 ‘그 사람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 라고 외친다. 누가복음 또한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내가 친히 심문하여 보았지만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했소. 이 사람은 사형을 받을 만한 일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라고 분명히 밝히고 놓아주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군중들이 ‘예수를 죽이고 바라바를 놓아주시오!’하고 소리칠 때, 빌라도는 무려 세 번씩(!)이나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단 말이오?’ 라고 반론하며 예수를 놓아주고 싶어서 안달한다. 요한복음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이오?’라고 묻는 진리추구자로 등장하고 유다 사람들 앞에 서서 ‘내가 그에게 아무런 혐의도 찾아내지 못하였다’고 무죄선언을 하고 오히려 유월절의 관례에 따라 예수를 놓아줄 것을 제의한다. 19장 12절에서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힘썼다.’고 증언한다. 이상 세복음서는 빌라도에게 매우 분명한 면죄부를 주고 있다. 다만 마가복음에서만 세복음서와 같은 분명한 면죄부를 주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마가 또한 빌라도가 대제사장들이 시기한 나머지 예수를 자기에게까지 끌고 왔다는 것과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를 하고, 민란을 막기 위해서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분명히 복음서는 빌라도에게 예수 죽음에 책임이 없고 유대인들에게만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왜 교회는 사도신조를 통해 지난 2,000년 동안 줄기차게 빌라도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가? 차라리 양쪽 다 책임이 있다고 말하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으니 문제이다. 복음서가 옳거나 사도신조가 옳거나 둘 중 하나이지 둘 다 옳을 수는 없다. 한쪽이 거짓이거나 아니면 어느 한쪽이 알면서도 어떤 편의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필자의 해석은 빌라도에게 책임이 있었지만, 복음전파라는 현실적 목적을 위해 책임이 없는 것처럼 복음서 저자들이 각색을 했다는 것이다.
그 역사적 배경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예수 죽음 이후 30여년이 지나 서기 66년경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때 로마는 예루살렘 성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초토화시킨다. 이때로부터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고향으로부터 쫓겨나는 디아스포라 유랑의 시대가 시작한다.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모아 복음서를 기록하기 시작할 때는 이렇게 로마의 유대인 탄압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이다. 예수는 유대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대부분의 유대 사람들 또한 로마에 적대적이라는 소문이 나면 복음전파는 끝장이다. 자신들이 쓴 복음문서가 로마 당국에 의해 정부를 비판하는 불온문서로 찍히면 예수께서 당부하신 하나님 나라 운동은 거기서 끝나고 만다. 일제가 우리의 선조들로 하여금 출애굽기나 요한계시록과 같이 해방이나 자유의 생각을 품게 하는 성경조차 공적으로 읽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우리의 역사도 이를 반증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서 저자들은 복음운동을 위해 약간의 각색을 할 수 밖에 없다. 로마는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그리고 모든 책임은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 죽음의 정치성은 종교성으로 제한되고 만다. 또 많은 진보신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너무 개인 영성화하고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구속적 차원으로 변질시켰다고 말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것 또한 바울의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보인다. 그리고 실상 이런 변질이 있었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가? 그리고 로마의 기독교 국교화는 세속 권력과의 밀착으로 기독교의 타락이 시작하는 시점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로 인해 기독교의 세계화가 이루어졌고 동방에 사는 우리에게까지 예수 복음이 전해졌으니 역사가 갖는 역설이요 모순이기도 하다.
정목사는 복음서에 반로마적인 예수님의 말씀이 없는 이유를 이렇게 폭넓은 역사적 시각에서 접근할 수는 없었을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과연 가이사의 것이 어디에 있는가? 세상의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 않는가? 하는 역설을 읽어낼 수는 없었을까? 예수는 로마가 지배하던 식민지 시대에 직접 수탈을 당하는 한 유대백성으로 살았고 그리고 수탈을 당하며 살아가는 갈릴리의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과 함께 거하셨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갈릴리는 역사적으로 끊임없는 민중 폭동이 일어난 발원지라는 점에서 예수 또한 당연히 로마의 지배에 대해 비판적이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는 없었을까? 폭력으로 대항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로마의 한 지방 통치자였던 헤롯을 여우에 비유하여 경멸하는 것을 보아서도 정치지배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역사가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의 십자가 처형은 분명히 자국민들에게는 행하지 않고 로마정부에 반역하는 정치범들을 처형하는 사형방법이었기에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정치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은 분명히 옳다. 단지 종교적인 이유만이라면 스데반의 경우와 같이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일 수도 있었다. 따라서 예수죽음에는 반드시 빌라도의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복음서 글로는 그렇지 않지만, 전해 내려오는 얘기를 통해 이런 정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초대 교부들은 니케아 공의회 이후 사도신조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는 구절을 넣게 된 것이다. 초대교부들은 예수의 죽음이 정치적이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말하는 정치적이라는 말은 광의적인 의미이다. 그런데 정목사는 정치라는 말을 협의적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 같다. 정목사는 말한다. “필자의 생각에 예수 사건은 오히려 정치경제, 사회문화적 차원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생명 사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혁명가가 아니라 바로 메시아이다. 정치적 혁명으로 생명사건이 완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내가 생명을 회복하려는 광의(廣意)의 의미에서 말하는 정치적인 발언을 협의(狹意)의 정치적 혁명으로 이해하고 있다. 정목사는 필자에게 묻는다. “그런데 그는 왜 교회강단에서 정치적인 문제에 발을 깊숙이 들여놓는가?” 그건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계가 (광의의) 정치세계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당 정치인은 아니다. 법조문 하나하나를 관심하는 국회의 정치인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세상의 바름을 위해 애쓰는 정치인이다. 목사는 누구인가? 하늘의 정(正)을 이 땅에 치(治)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아닌가? 이를 정치(政治)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의 정치적 발언은 다윗 왕을 견제하는 나단선지자의 역할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하라는 주님의 기도 속에서 나는 이러한 구체적인 부름을 듣고 있다.
구체적 예를 들어보자. 교인들이 고민하는 한미FTA에 관련하여 목사가 어떤 발언을 하는 것이 정치적인 일이 되는가? 사안을 따라 어떤 정치인을 선택하라는 얘기는 정치발언이 되겠지만, 한미FTA 협정 체결로 인한 양극화와 민중들이 당할 아픔에 대해 경고하는 것은 신앙의 범주에 속한 얘기이자, 목사의 책무이다. 교회 강단을 그렇게 협소하게 보는 정목사의 주장대로라면 예수의 나사렛 선언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은 경제학자의 일로 돌려야 할 것이고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일은 군사령관의 일로 그리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는 일은 의사의 일로 돌려야 할 것이다. 나는 정목사가 다른 보수적인 목사들과 같이 이 나사렛 해방선언을 영해(靈解)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혁명(革命)이란 단어도 그 말 그대로 세상을 혁신(革新)하는 하늘의 명령(命令)이라고 폭넓게 이해할 수는 없을까? 남한의 기독교인들은 왜 혁명 그러면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을 떠올리며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까? 75세의 아브라함의 고향 탈출도 혁명이고 히브리 노예들의 이집트 탈출도 혁명이다. 예수를 만나 거듭나는 믿음의 사건이란 결국 과거의 자기를 탈출하는 깨달음의 혁명 사건이 아닌가?
성서에서 사회정치역사적 상황을 빼고 문자 그대로 읽어낸다면 그야말로 성서는 모순투성이고 예수님의 행적은 아리송할 수밖에 없다. 보다 폭넓게 읽어나가야 한다. ‘예수는 로마에 항거하라’고 말했다는 구절이 없다는 논리를 펴는 정목사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나 헤롯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고 로마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이는 마치 일제시대에 친일파에는 적대적이었지만 일제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모순되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된다.
흔히 성서주석을 할 때 말씀은 텍스트요 오늘의 현실은 컨텍스트라는 단순대비에 자주 빠지는데 크게 보아 정목사 또한 이런 단순 방식에 머물고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잘못된 가정을 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는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상관관계란 이런 것이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가 곧 오늘의 우리 상황에 대비시키는 텍스트가 아니라 성서의 문자와 그 문자를 둘러싸고 있는 당시의 사회적 정황과의 상관긴장관계가 바로 우리가 적용해야 할 텍스트인 것이다. 예를 들면 A라는 사회적 상황에서 B라는 성서의 구절이 나왔다면, A와 B 사이에 놓여 있는 C라는 상관긴장관계가 성서의 텍스트가 되어 오늘의 A+라는 새로운 상황에 적용할 때 B+라는 새로운 성서의 텍스트가 나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설교자들이 해야 하는 성서주석의 작업이다.
무거운 은혜. 과연 그러한가?
그간 필자가 읽어온 대형교회 복음주의권 목사님들을 향한 정목사의 설교 비평은 대체로 그 내용이 너무 가볍다는 것이 주된 비판이었다. 그런데 ‘값싼 은혜, 무거운 은혜’라는 제목에서도 분명히 밝혔지만, 필자에 대한 설교는 반대로 무겁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가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에 비해 무겁다는 상대적 평가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필자는 스스로 여전히 예수님의 설교에 비하면 너무나도 가볍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누가 자기 형제를 바보라 부른다고 해서 지옥에나 가라고 소리친 적도 없고, 잘못된 일을 했다고 해서 손을 자르거나 발을 자르라고 외친 적도 없고, 형제를 실족케 하였다고 해서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라고 충고한 적도 없다. 평화가 아니라 불을 던지러 왔고 가족 사이에 분쟁을 가져오기 위해 오셨다는 예수님의 설교야 말로 너무너무 무거운 것이 아닌가?
정목사는 결론에서 마태복음의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예수님의 초청을 빗대어 복음이란 바로 이렇게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는 ‘값비싼’ 초청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난 도대체 헷갈린다. 이 성서구절을 반복적으로 외치는 복음주의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설교를 비판해온 정목사가 나의 설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다시금 이 구절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 구절 또한 그리 간단하게 해석되는 구절이 아니다. 이 마태복음 구절에서 정작 중요한 단어는 이 ‘다 내게로 오라’는 초청에 이어지는 ‘나의 멍에를 함께 메고 가자’는 문구에 있다고 본다.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끌어야 하는 팔레스타인의 농사에서 한 마리는 다른 한 마리가 이끄는 대로 가야 한다. 자기 힘을 빼야 한다. 그래야만 하루의 일을 보다 쉽게 마칠 수 있다. 힘이 센 자 앞에서 버티면 결국 자기 손해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거운 짐을 벗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목에 메어진 멍에를 벗어 던지라는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혼자 지던 멍에를 벗는 대신 예수님의 멍에를 함께 메는 자기 포기와 헌신을 의미한다. 곧 십자가 순종의 삶에 대한 초청이다. 정목사는 이 함께 멍에를 메자고 하는 십자가의 초청을 가볍게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여전히 무겁다. 구원을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가르쳤던 사도 바울 또한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라고 한탄하고 있다. 구원에는 감사의 기쁨도 있지만, 동시에 무거움의 실천도 있다. 갈라디아서가 가르치는바 믿음만으로 의인이 되는 기쁨도 있지만 야고보서가 가르치는 실천의 가르침도 있다. 기독교 영성이란 바로 전자의 기쁨으로 후자의 실천을 행하는 힘이다.
향린교회의 현장
우리가 누군가의 말을 옮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그 말 속에 담긴 상대방의 진심이다.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긴 글에서 짧은 문장을 인용할 때는 전체 문맥을 잘 살핀 뒤에 맥락에 따라 그 문장을 비판해야지 전후 문맥을 고려함 없이 아무런 예비지식도 없는 제삼자를 향해 불쑥 한 구절을 내미는 것은 지성과 객관을 생명으로 하는 학자로서의 정당한 태도는 아니다. 마치 ‘성전의 벽을 허물라’는 예수님의 발언에서 이 문구만을 문제 삼아 예수는 민중폭동을 주창하였다고 고발하는 바리새인이나 제사장의 태도가 이런 것이었다. 내가 30분이 넘어가는 설교 말미에서 채 1분도 걸리지 않는 마지막 문장을 들이밀고 조목사의 설교는 이런 식이다! 라고 단정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바른 비평의 방법이 아니다. 정목사도 지적하였지만 나의 설교는 어쩌면 한편의 단편소설과 같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말미에 이르러 문학적 반전을 꾀하는 강조의 문장이 많다. 그 문장만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정목사가 지적한대로 과장이나 억지 그리고 선동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체 설교를 들은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결론들은 물이 흘러들어옴과 같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정목사에게는 온당치 않고 무거운 보이는 말들이 향린교인들에게는 값비싼 은혜의 초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장을 ‘와서 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모든 목사마다 자기가 서 있는 교회의 특수한 상황이 있다. 필자가 설교하는 향린교회는 남한 내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진보적인 교회이다. 한 눈으로는 성서를 그리고 다른 한 눈으로는 민중의 고통 받는 현실을 보는 신앙인들이 모인 곳이다. 제3세계적인 시각인 남미의 해방신학과 민중신학 그리고 통일신학의 진보적 성서 해석을 목말라 하는 교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향린교회가 아니라면 애당초 교회에 발을 집어넣지 않을 비판적 지식인도 있고 교회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교회 자체를 떠날 만큼 (믿음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남한의 기독교의 행태에 대해 매우 실망한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그들은 향린교회를 자신들의 막장교회라고 부른다. 그들에게는 최후의 남은 구원의 방주이다. 기나긴 방황 끝에 향린교회를 찾아온 많은 젊은이들은 진보 개혁적 사회사상과 성서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대다수는 민족의 평화적 통일과 자주를 교회목회의 우선과제로 여기고 있는 실천가들이다. 필자는 향린교회의 목회나 필자의 설교가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이유가 어느 교회보다 민족자주적인 의미에서 분명하고 크다는 것이다. 만약 기독교가 구체적 역사 상황에 상관없이 똑같은 구원만을 선포하셨다면 성서가 그렇게 두꺼울 필요도 없고, 복음서를 4권이나 가질 필요가 없다. 조직신학자의 눈에는 각기 다른 공동체에 선포된 4권의 복음서가 같을지 몰라도 구체적 현실을 중시하는 성서신학자인 나에게는 매우 다른 것이다. 교회라는 이름은 같지만 필자가 매주일 설교를 해야 하는 향린교회라는 자리는 바로 이렇게 다른 자리이다.
옳고 그름이 아니다. 필자에게 어떤 선을 넘었다고 비평하는 정목사가 만약 향린교회에서 설교하게 된다면, 다른 교회에서 했던 원고를 그대로 들고 오지는 않을 것이다. 설교 비평은 단순히 한 목사의 설교의 내용을 비평자의 자기 신학이라는 고정된 자리에서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비평하고자 하는 설교자의 삶과 신학 그리고 그가 서 있는 목회현장을 고려하는 가변적 기준을 가질 때에 비로소 양자가 서로 소통하는 참다운 비평의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필자는 정목사를 향린교회에 초청하여 교인들이 함께 동참하는 진정한 설교 비평을 하고 함께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열린 대화를 하고 싶다.
설교비평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한 목사의 수 십 편의 설교를 읽고 평을 한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목사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적어도 비평하려는 목사가 섬기는 그 교회가 일반적 기준에서 벗어나는 교회라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한번쯤은 직접 와서 보아야 하지 않았을까? 물론 목회하는 목사로서 쉽지 않은 일이기에 동영상으로 설교를 들었을 것이고 예배의 분위기를 파악하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한된 영상을 통해 보는 것과 예배에 직접 참여해서 그 분위기를 체득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정목사가 알지 못하는 더 큰 놀라운 사건이 향린의 예배 속에 있다. 그것은 향린 교회가 국악예배나 평신도 설교 그리고 평신도목회에 있어서 개혁적인 길을 걷을 뿐만 아니라, 더 큰 개혁도 시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2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는바 모든 교우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드리는 공동 축도이다. 조직신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도신조 대신에 국악풍의 독자적인 신앙고백을 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겠지만, 공동축도 또한 매우 위험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향린교회는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따라 축도를 단지 목사(교회목회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신도들(생활목회자)이 함께 공유해야 하는 하늘의 축복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예배의 마지막에서 온 교우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그 사랑의 체온을 느끼며 서로를 향해 축복을 비는 이 공동축도에서 성령의 자유와 해방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구원의 초청을 듣는다.
정목사께서 한번이라도 직접 예배에 참여하여 기쁨에 넘치는 향린교인들의 반응을 보았더라면 “민중들의 영혼을 신경과민하게 만드는 무거운 은혜라는” 혹은 “이런 주장은 흡사 유신시대 조회시간에 행한 교장 선생님의 훈화가 아닌가” 하는 무책임한 얘기는 결코 하지 않았으리라! 더 나아가 예수님이 함께 하셨던 갈릴리사람들이 오늘 남한의 역사 현실에서 누구인지 알아보고 그리고 그들의 아픔을 더 깊이 이해하고 체득하기 위해 고통 받는 그들의 삶에 몸으로 접근하였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설교 비평이 전개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여전히 날카롭고 통찰력 있는 설교 비평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를 드린다. 지금까지 내게 이런 충심어린 설교 비평을 해준 사람이 정목사외에는 한 사람도 없었으니 진정 정목사의 설교비평의 길과 하나님 나라 운동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한다. (기독교사상, 2007년 6월호)
매월 정용섭 목사님(이하 ‘정목사’)의 설교 비평의 글을 읽는 일에 기쁨을 갖고 읽었던 독자가 바로 그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진보교회의 대표로 알려진 향린교회의 목사이니까 언젠가는 그 비평의 대상이 되긴 하겠지만 이민목회 20여년의 삶을 접고 고국으로 돌아온 햇수가 짧아 아직은 공개적인 비평의 대상이 되기에는 이르다고 보고 있었는데, 그 때가 도적같이 임하고 말았다!
비평이라고 하는 것은 비판적 안목에서 출발하는 것이니까 비평의 대상이 된 사람이 만족할 만한 비평은 사실상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자기 성찰에 힘써온 비판적 지성인으로 자각하고 있는 필자로서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비평에 동의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어차피 사람에 따라 보는 관점은 다른 것이니까 다르다는 것에 무슨 시비가 있을 수 있으랴. 그러나 그 비평이 학문적 객관성을 상실하고 글 쓰는 이 주관에 따른 곧 비판을 위한 비평으로 보일 때, 그 대상자는 선뜻 동의할 수가 없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정목사의 설교 비평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이유이다.
조목사=독립투사?
우선 정목사는 필자의 설교에 비평을 하는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향린교회와 조목사가 2년 동안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운동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마치 독립운동에 나선 독립투사처럼 매우 결연한 태도로 이 문제에 맞서고 있다.” 물론 지금도 평택미군기지 확장반대를 위한 현수막을 내걸고 있고 이에 관련하여 여러 집회에 참여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를 마치 평택문제에 목회의 생사를 건 ‘독립투사’로 묘사하는 것은 정목사가 오늘의 민족 현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어떠한지 그리고 향린교회의 목회와 필자에 대한 편견이 어떠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명의 목사가 행한 사회적 신앙 실천운동을 ‘독립투사’라고 표현한 것은 무슨 의도인가? 이는 대화와 평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21세기에 1930년대 일제 때의 운동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구시대적인 유물이라는 의미에서 하는 소리가 아닌가? 물론 정목사가 그렇게 느꼈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교회와 목사를 열린 시각을 갖고 접근하는가, 아니면 닫힌 시각을 갖고 접근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신앙인은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성서에서 야훼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히브리 노예들의 소리를 듣고 인간을 찾아오신다. 바로 이렇게 애타하는 마음이 자궁을 뜻하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이다. 지금 쓰라린 가슴을 안고 맨손으로 평생을 걸려 일구어온 땅을 미군기지로 내어주고 떠나야 했던(지난 백년 사이에 그들은 세 번이나 이렇게 쫓겨났다!) 수 백 명의 대추리 도두리 농부들의 아픔을 정 목사는 과연 긍휼의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지금 정목사는 다른 목사와는 달리 향린교회의 목회에까지 그 비평의 폭을 넓히고 있다. 이어지는 글에서 정목사는 향린교회의 개혁성이나 국악예배, 그리고 민중신학의 산실로서의 향린교회의 독보적 위치에 대해 칭찬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미 첫 문장에서부터 독자들에게 조목사는 독립투사로 그리고 향린교회는 그를 따르는 일제하의 전투적 부대로 암시를 준 다음 얘기를 진행하는 것이 과연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성령의 열림과 생명성을 매번 주장하는 목사로서 적절한 태도인가?
작금의 우리 사회의 보수적 이념성 그리고 사학법 재개정을 주장하고 성조기를 앞세워 시청 앞에서 집회를 여는 반사회적이고 반민족적인 교회의 행태가 가져온 폐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정목사께서 이런 식으로 말문을 연다고 하는 것에 대해 실망스러움을 금치 못한다. 자칭 개혁적이라고 말하는 정목사가 설교의 지평을 떠나 굳이 향린교회 목회에 대해 언급을 하고자 했다면 오히려 이런 기회를 통해 이러한 개혁적인 교회가 더 많아져야 남한 교회에 희망이 있을 것이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물론 정목사와 필자는 살아온 삶의 길이 다르고 민족의 미래를 바라보는 눈이 다르고 통일에 향한 열정의 강도가 다르다. 이렇게 다른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정목사에게 주어진 공간 안에서 정당한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같은 얘기라 하더라도 근거를 제시한 다음 마지막에서 어떤 결론을 짓는 것과 아예 처음부터 어떤 결론을 제시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은 천지차이이다. 더구나 필자를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그리고 이미 백편이 넘는 설교 가운데 단지 두세 편만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비평하는 것으로 필자의 전부를 믿게 만드는 좁은 공간 안에서 ‘조목사=독립투사’라고 결론짓고 시작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비평방법인가? 솔직히 말하면 필자는 그런 ‘투사’가 될 기질이 부족해서 항상 고민해 왔다. 평택문제만 하더라도 가톨릭의 문정현신부님을 뵈올 때마다 그분의 투철한 정의감과 열정 앞에서 언제나 고개가 숙여졌다. 그런 필자에게 ‘독립투사‘라니! 그건 너무나도 과분한 칭호이다. 정목사가 필자의 비겁함을 잘 몰라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필자는 그렇게 불릴 자격이 없다. 다만 오늘 예수님이 함께 했을 그런 사람들이 누구인지 고민하고 그들의 아픔에 동행 했을 따름이다.
곁가지의 얘기이지만 정목사는 2006년도의 필자의 설교 횟수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2006년 한 해 동안 서른 번 남짓의 주일설교만 했다. 두 달간의 안식휴가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주일공동예배의 설교를 가장 적게 하면서도 제대로 된 연봉을 받는 설교자는 한국에서 조 목사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평신도설교를 비롯한 강단개방에 앞서가는 교회로 잘했다고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다른 뜻으로 말하는 것인지 필자로서는 의아스럽다. 설교 비평이라고 하는 것이 설교의 질을 논하자고 하는 것인데 설교의 양이 얘기되고 그리고 이에 연관하여 연봉이 등장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마도 땅값 비싼 명동에 위치한 교회이니까 향린 교인들은 모두 부자들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설교와 목회
정목사도 교회목회는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목사의 목회활동을 설교에 한정하여 보는 것은 옳지 않다. 필자는 남한의 교회 목회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다고 보고 있다. 그러기에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출석하여 설교를 듣는 것으로 신앙을 대체하는 뜨내기 교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나는 목사의 역할 중에 설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켜 사도로 보내셨듯이 교인들을 불러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내어 보내는 것이 목회의 근본이다. 평신도 설교는 바로 그러한 목회 훈련의 한 과정이다. 혹 정목사는 평신도설교를 외부목사들에게 부탁하듯이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평신도들에게 설교를 준비시키는 일은 목사에게 있어 한편의 설교를 만드는 일보다 더 많은 노력과 기도가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설교는 어떤 의미에서 교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일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평신도 설교의 효과는 얼마나 있을까? 필자의 경험으로는 수 십 번의 설교를 듣는 것보다 한 번의 평신도 설교를 함으로써 더 큰 신앙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 목사님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강단을 개방하고 교인들에게 (특별 신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평신도라는 단어도 적절치 않다. 필자는 교회목회자와 생활목회자로 구분하고 있다.) 설교의 기회를 주고 믿음의 훈련을 시켰으면 좋겠다. 특별한 절기를 맞아 삶을 나누도록 하면 더욱 좋다.(장애인주일 등)
정목사는 필자를 평화 원리주의자 그리고 현실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자로 묘사하고 있다. 필자는 규정받는 것을 싫어하여 남을 규정하는 일을 피하려 하지만 정목사의 규정에 대해 일정부분 동의한다. 설교자가 원형으로 삼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원리주의자라는 말을 타협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예수님이야 말로 원리주의자가 아니셨는가? 자신 앞에 십자가의 죽음이 놓여 져 있는 것을 알면서도 타협 없이 계속 걸으셨다면 예수님이야 말로 철저한 원리주의자이셨다는 것이 필자의 예수 이해이다. 또한 예수님은 당시의 지배자들을 비난하고 이런 지배체제의 상징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채찍을 들어 그 안을 헤집어 놓았으니 이분이야 말로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셨는가? 만약 현실을 감안하셨다면 그렇게 무모한 일을 하셨을까?
설교자는 예수님을 따라 평화의 원리에 입각해서 이상에 가까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성서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이자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였고 이 하나님 나라는 정의와 평화로 요약된다. 설교자는 이 땅에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가 종말론적으로 실현되었음을 선포하고 자신의 목회와 삶에서 그렇게 실천하면 된다. 목사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근본 원리를 선포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각자의 삶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하면 된다. 필자는 현재 남한의 설교자들이 30분의 짧은 설교 안에 원리와 적용 모두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그렇게 하니까 교인들의 주체적 사고를 가로막고 설교 내용은 깃털마냥 가벼워지고 윤리도덕적인 하나의 강령으로 결론짓고 신도들을 행복과 사랑이라는 모호한 환상의 심리의 세계로 인도하고 만다. 그리하여 결론에서 ‘주 안에서 능치 못함이 없다.’는 상투적 구호가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내 경험으로 본다면 전하고자 하는 하나의 신앙의 원리만 얘기하는데도 30분 이상이 걸린다.
현실 인식의 차이
필자의 설교에 대한 정목사의 가장 주된 비평은 사회정치 현실에 대한 지나친 언급으로 보고 있다. 정치설교라는 표현을 쓰진 않았지만, 설교에 있어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반대 운동 국가보안법 철폐 그리고 한미FTA에 관한 시대적 이슈에 대해 빈도나 내용에 있어 설교가 지켜야 할 정도(正道)를 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교회와 정치라는 조직신학적 논쟁에 대해서는 이미 정목사께서 나의 설교 비평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필자는 솔직히 말하면 이 주제에 관련한 조직신학적 논쟁에는 자신도 없거니와 별 관심도 없다. 필자는 다만 오늘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그리고 24년의 미국에서의 소수자의 경험을 통해 민족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나라고 하는 한 개인의 삶은 결코 풀리지 않는다는 역사인식을 갖고 있다. 이 역사인식에서 오늘 한국 민족의 최대 과제는 평화통일이며 이를 위해서는 분단사고의 극복이 우선시 되어야 하고 이 극복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미군주둔이라고 하는 현실인식을 갖고 있다. 나는 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모두 다 이러한 역사 인식을 갖고 있다고 보고 있고 예수님도 그 폭은 다르지만 출발에서는 같다고 보고 있다.(“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마태 15장 24절)
게다가 정목사는 독일 유학생활을 통해 독일 국민들이 갖는 통일에 대한 기쁨과 자부심을 직접 맛보았을 것이다. 지난 2년여 동안 남한사회에서 가장 큰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은 바로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의 문제요 국가보안법 철폐요 한미FTA협정이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목사로서 이 민족사회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목사는 이러한 필자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그 빈도와 속도에 대해 질문할 것이다. 이점에서 나이는 같지만 한국의 진보적인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배경을 갖고 미국의 진보적이고 실증적인 성서신학을 전공한 필자와 보수적인 성결교단의 배경을 갖고 독일의 보수적이고 관념적인 판넨베르크 조직신학을 전공한 정목사와는 사회정치적 현안 문제에 대한 인식과 참여 방식에 있어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하다.
정목사가 평택의 미군 기지를 직접 가서 본 적이 있는지는 몰라도 지난 3년 935일 동안 그곳에서는 몇 차례의 대형평화집회를 포함해서 주민들의 촛불집회가 하루도 빠짐없이 열렸다. 전국적으로 참석한 사람들의 총 숫자를 더하면 아마도 수 십 만 명에 이를 것이다. 이라크에서 아들을 잃고 평화운동가로 변신한 신디 헨 여사를 비롯한 미국 일본 캐나다 호주의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의 사람들이 이곳에 직접 가서 평화를 기원했다. 주민들이 스스로 쌀을 거두어 세운 대추초등학교 건물이 경찰의 포크레인에 의해 부서지던 1년 전 그날! 국제평화회의에 참석한 세계교회협의회 각국 대표 50여명의 목사들 또한 그 대추리 입구에서 경찰들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거리에 서서 기도집회를 가진 바 있다. 단연코 국내외적으로 제일 큰 사회적 이슈였다. 소수자의 인권에 대해 관심하는 신앙인이라면 적어도 한 두 번은 이곳을 방문해서 추방의 아픔을 당하는 자들을 위로하여야 옳았고 또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면서 이 땅의 평화의 문제를 고민하는 설교자라면 평택의 미군기지 얘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평택미군기지 확장의 부당함을 고발하기 위해 미군의 숫자가 줄어드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나는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알 수 없다. 그것도 원고지 70-80매의 분량의 설교 중 두세 줄로 언급하는 일이 비판을 받아야 되는지 필자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말고 그냥 미군기지 확장반대를 외치라는 말인가? 아니면 그런 얘기 자체를 설교 중에는 언급하지 말라는 말인가? 정목사 자신 또한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는 일에 서명하였다고 말하는데, 그는 그러한 자신의 실체를 어떻게 보여주었는가? 사석의 자리에서 친구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 것인가? 평화를 외치는 사람이 많아도 평화가 오지 않고 전쟁이 계속되는 것은 전쟁하는 사람은 목숨을 걸고 하는 반면에 평화를 외치는 사람은 목숨을 걸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어느 평화운동가의 뼈아픈 충고가 있다.
그리고 정목사의 부모님이 이 대추리의 한 주민이었다면 그건 정부가 하는 일이니 빨리 포기하고 주는 대로 보상받아 나오라고 얘기했을까? 난 지금도 빈손으로 평생을 일구어 온 자식 같은 땅을 미군들의 전쟁기지로 내어주고 떠나야만 했던 주민들의 눈물 젖은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나는 예수님이 당시 경제적으로 차별받고 정치적으로 억압받던 갈릴리 민중들과 함께 하면서 지도자들을 비난하였듯이 예수님을 따라 그렇게 살려하고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비난받아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정목사는 오늘의 남한사회에서 갈릴리를 어디로 보고 있는지 묻고 싶다. 설교라고 하는 것은 오늘의 갈릴리가 어디인지 그리고 오늘의 예수는 어떻게 행동 했을 것인지를 성서를 통해 묻고 이에 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정목사가 루터의 ‘두 왕국론’과 칼빈의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의 서로 다른 예를 들면서 “여기서 누가 옳은가 하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자신들의 신학에 근거해서, 그리고 자신들이 처한 고유한 삶의 자리에서 자신들의 길을 간 그들을 오늘의 관점으로 재단하거나 매도할 수 없다.”고 분명히 얘기해 놓고 왜 필자의 설교비평에서는 선을 넘었다고 ‘재단’하거나 독립투사라고 ‘매도’하는가? 가치판단은 유보한 채 비평을 전개할 수는 없었을까?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간 누구나가 그러하듯이 정목사 또한 사회적 가치이념과 개인의 신념이 있을 것이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재단하거나 매도할 수 없다.’라는 얘기를 꺼내지 말든가. 하지 말자고 하면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와 정치
세간에서 흔히 묻듯이 삶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어디까지가 정치이고 어디까지가 종교일까? 세상적으로 말하면 6일은 정치인으로 사는 것이고 하루는 종교인으로 사는 것일까? 아니 과연 정치와 종교의 차이가 있다면 그 경계선은 누가 긋는가? 아니 그 경계선이라는 것이 학문의 세계를 벗어나 실제의 삶 속에서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기도와 노동의 차이가 있는가? 교인들은 교회 문밖만 나서면 현실정치와 사회적 현안의 문제들을 갖고 신앙인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데, 여기에 목사는 이런 논의들은 나라의 정치인들의 몫으로 넘기고 영혼의 문제에만 관심하자고 말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물론 정목사를 포함한 대다수의 보수 신앙인들 또한 이러한 성속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교회와 신학의 잘못된 행태에 말로는 비판하지만 실제 삶에 있어 그리고 삶을 드러내는 설교에 있어 그가 얼마나 진실되느냐?는 실존적인 질문이 남아 있을 따름이고, 그가 생각하는 경계선과 내가 생각하는 경계선에 본질적인 차이가 남아 있을 따름이다.
구약성서에서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는 예언자들은 입만 열면 왕과 나라들에 대해 비판하고 심지어는 저주까지도 하는데 오늘 이 시대에서 이런 역할은 누가 담당해야 하는 것인가? 21세기 남한의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그런 예언자는 필요치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역할은 누가 감당해야 하는 것인가? 정치학자들의 몫인가? 정목사는 예언자의 역할을 한 문익환목사를 존경한다고 하는데 문익환목사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애쓰는 나를 향해서 잘한다고 박수는 치지 못해도 다름에 대한 배려는 지켜야 하지 않았을까? 설교는 정치연설도 아니고 신학강연과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누가 그 다름의 기준을 정하느냐에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벽을 허물라고 하셨는데, 이는 과연 정치적 발언인가 아니면 종교적인 발언인가? 궁전의 벽이 아니라고 했으니 종교적인 발언에 그치고 마는 것인가? 예수님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했는데, 바리새인들은 정치적인 발언으로 오해한 것인가?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종교와 정치의 이분법적 사고는 과연 가능했는가? 현재 노무현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로마 황제를 비판했다면 이는 정치적인 발언이자 동시에 종교적인 발언이었다. 왜냐하면 로마의 황제는 정치의 수장임과 동시에 종교적 숭배의 대상인 신이었기 때문이다. 성서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성서가 갖고 있는 그 시대적 사고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점에서 필자와 정목사는 성서이해에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고 정치와 종교의 경계에 대한 해묵은 논쟁에 있어서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또 다른 문자주의의 위험
정목사는 바울의 로마서 13장을 언급하며 “예수는 로마 제국주의에 항거하라!고 선동하지 않으셨다.”고 단정한다. 물론 복음서 어디에도 이런 구절은 없다. 필자는 이러한 정목사의 단정적인 언사에 갑작스레 슬픔이 밀려온다. 정목사의 성서에 대한 이해가 이런 정도로 단선적이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전 대형교회 목사들을 향한 설교비평에서 성서의 문자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할 때, 정목사는 필자는 성서 이해의 방식이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서 필자는 완전한 차이를 느낀다.
성서에 씌어져 있는 문자 그대로 읽어내는 것이 문자주의의 위험성이라면 역으로 성서에 문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역사적 사실이 없거나 혹은 예수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것 또한 문자주의이기 때문이다. 정목사는 나의 설교 ‘니고데모와 키에르케고르’를 길게 인용하면서 니고데모에 관한 성서구절 사이에 담긴 행간의 의도를 읽어내는 나의 해석에 깊이 감동받고 있는 듯하다. 그런 정목사가 복음서의 다른 기록에서는 왜 이러한 행간의 의도를 읽어내려고 하지 않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예수는 로마 제국주의에 항거하라고 선동하지 않으셨다.’는 구절이 없으니까 그런 일이 없다고 단정한다면,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 후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겨라. 그리고 칼이 없는 사람은 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는 누가복음 22장 36절 말씀에 근거해서 예수는 폭력 혁명을 꾀했다는 말로 결론을 유출해 낸다면 어떤 반론을 제기할지 알 수 없다.
또 다른 성서의 예를 들어보자. 기독교인들은 거의 대부분 매 주일 사도신조를 고백하고 여기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를 죽인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다고 말하는 구절은 없다. 아마 이 얘기를 듣는 독자들은 모두 놀랄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하고. 만약 우리가 선입견 없이 빌라도에 관련된 복음서의 구절들을 읽어보면 복음서 저자들은 빌라도의 책임을 면제해주기 위해 매우 의도적인 노력들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마태복음을 보면 “빌라도는 그들이 시기하여 예수를 넘겨주었음을 알았다‘고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꿈 얘기를 하며 ‘당신은 그 옳은 사람에게 아무 관여도 하지 마세요.’라고 당부하는 얘기가 나오고 빌라도는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 하고 말한다. 그러자 온 백성이 말하기를 ‘그 사람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 라고 외친다. 누가복음 또한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내가 친히 심문하여 보았지만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했소. 이 사람은 사형을 받을 만한 일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라고 분명히 밝히고 놓아주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군중들이 ‘예수를 죽이고 바라바를 놓아주시오!’하고 소리칠 때, 빌라도는 무려 세 번씩(!)이나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단 말이오?’ 라고 반론하며 예수를 놓아주고 싶어서 안달한다. 요한복음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이오?’라고 묻는 진리추구자로 등장하고 유다 사람들 앞에 서서 ‘내가 그에게 아무런 혐의도 찾아내지 못하였다’고 무죄선언을 하고 오히려 유월절의 관례에 따라 예수를 놓아줄 것을 제의한다. 19장 12절에서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힘썼다.’고 증언한다. 이상 세복음서는 빌라도에게 매우 분명한 면죄부를 주고 있다. 다만 마가복음에서만 세복음서와 같은 분명한 면죄부를 주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마가 또한 빌라도가 대제사장들이 시기한 나머지 예수를 자기에게까지 끌고 왔다는 것과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를 하고, 민란을 막기 위해서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분명히 복음서는 빌라도에게 예수 죽음에 책임이 없고 유대인들에게만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왜 교회는 사도신조를 통해 지난 2,000년 동안 줄기차게 빌라도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가? 차라리 양쪽 다 책임이 있다고 말하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으니 문제이다. 복음서가 옳거나 사도신조가 옳거나 둘 중 하나이지 둘 다 옳을 수는 없다. 한쪽이 거짓이거나 아니면 어느 한쪽이 알면서도 어떤 편의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필자의 해석은 빌라도에게 책임이 있었지만, 복음전파라는 현실적 목적을 위해 책임이 없는 것처럼 복음서 저자들이 각색을 했다는 것이다.
그 역사적 배경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예수 죽음 이후 30여년이 지나 서기 66년경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때 로마는 예루살렘 성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초토화시킨다. 이때로부터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고향으로부터 쫓겨나는 디아스포라 유랑의 시대가 시작한다.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모아 복음서를 기록하기 시작할 때는 이렇게 로마의 유대인 탄압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이다. 예수는 유대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대부분의 유대 사람들 또한 로마에 적대적이라는 소문이 나면 복음전파는 끝장이다. 자신들이 쓴 복음문서가 로마 당국에 의해 정부를 비판하는 불온문서로 찍히면 예수께서 당부하신 하나님 나라 운동은 거기서 끝나고 만다. 일제가 우리의 선조들로 하여금 출애굽기나 요한계시록과 같이 해방이나 자유의 생각을 품게 하는 성경조차 공적으로 읽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우리의 역사도 이를 반증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서 저자들은 복음운동을 위해 약간의 각색을 할 수 밖에 없다. 로마는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그리고 모든 책임은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 죽음의 정치성은 종교성으로 제한되고 만다. 또 많은 진보신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너무 개인 영성화하고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구속적 차원으로 변질시켰다고 말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것 또한 바울의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보인다. 그리고 실상 이런 변질이 있었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가? 그리고 로마의 기독교 국교화는 세속 권력과의 밀착으로 기독교의 타락이 시작하는 시점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로 인해 기독교의 세계화가 이루어졌고 동방에 사는 우리에게까지 예수 복음이 전해졌으니 역사가 갖는 역설이요 모순이기도 하다.
정목사는 복음서에 반로마적인 예수님의 말씀이 없는 이유를 이렇게 폭넓은 역사적 시각에서 접근할 수는 없었을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과연 가이사의 것이 어디에 있는가? 세상의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 않는가? 하는 역설을 읽어낼 수는 없었을까? 예수는 로마가 지배하던 식민지 시대에 직접 수탈을 당하는 한 유대백성으로 살았고 그리고 수탈을 당하며 살아가는 갈릴리의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과 함께 거하셨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갈릴리는 역사적으로 끊임없는 민중 폭동이 일어난 발원지라는 점에서 예수 또한 당연히 로마의 지배에 대해 비판적이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는 없었을까? 폭력으로 대항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로마의 한 지방 통치자였던 헤롯을 여우에 비유하여 경멸하는 것을 보아서도 정치지배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역사가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의 십자가 처형은 분명히 자국민들에게는 행하지 않고 로마정부에 반역하는 정치범들을 처형하는 사형방법이었기에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정치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은 분명히 옳다. 단지 종교적인 이유만이라면 스데반의 경우와 같이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일 수도 있었다. 따라서 예수죽음에는 반드시 빌라도의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복음서 글로는 그렇지 않지만, 전해 내려오는 얘기를 통해 이런 정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초대 교부들은 니케아 공의회 이후 사도신조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는 구절을 넣게 된 것이다. 초대교부들은 예수의 죽음이 정치적이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말하는 정치적이라는 말은 광의적인 의미이다. 그런데 정목사는 정치라는 말을 협의적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 같다. 정목사는 말한다. “필자의 생각에 예수 사건은 오히려 정치경제, 사회문화적 차원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생명 사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혁명가가 아니라 바로 메시아이다. 정치적 혁명으로 생명사건이 완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내가 생명을 회복하려는 광의(廣意)의 의미에서 말하는 정치적인 발언을 협의(狹意)의 정치적 혁명으로 이해하고 있다. 정목사는 필자에게 묻는다. “그런데 그는 왜 교회강단에서 정치적인 문제에 발을 깊숙이 들여놓는가?” 그건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계가 (광의의) 정치세계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당 정치인은 아니다. 법조문 하나하나를 관심하는 국회의 정치인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세상의 바름을 위해 애쓰는 정치인이다. 목사는 누구인가? 하늘의 정(正)을 이 땅에 치(治)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아닌가? 이를 정치(政治)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의 정치적 발언은 다윗 왕을 견제하는 나단선지자의 역할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하라는 주님의 기도 속에서 나는 이러한 구체적인 부름을 듣고 있다.
구체적 예를 들어보자. 교인들이 고민하는 한미FTA에 관련하여 목사가 어떤 발언을 하는 것이 정치적인 일이 되는가? 사안을 따라 어떤 정치인을 선택하라는 얘기는 정치발언이 되겠지만, 한미FTA 협정 체결로 인한 양극화와 민중들이 당할 아픔에 대해 경고하는 것은 신앙의 범주에 속한 얘기이자, 목사의 책무이다. 교회 강단을 그렇게 협소하게 보는 정목사의 주장대로라면 예수의 나사렛 선언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은 경제학자의 일로 돌려야 할 것이고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일은 군사령관의 일로 그리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는 일은 의사의 일로 돌려야 할 것이다. 나는 정목사가 다른 보수적인 목사들과 같이 이 나사렛 해방선언을 영해(靈解)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혁명(革命)이란 단어도 그 말 그대로 세상을 혁신(革新)하는 하늘의 명령(命令)이라고 폭넓게 이해할 수는 없을까? 남한의 기독교인들은 왜 혁명 그러면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을 떠올리며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까? 75세의 아브라함의 고향 탈출도 혁명이고 히브리 노예들의 이집트 탈출도 혁명이다. 예수를 만나 거듭나는 믿음의 사건이란 결국 과거의 자기를 탈출하는 깨달음의 혁명 사건이 아닌가?
성서에서 사회정치역사적 상황을 빼고 문자 그대로 읽어낸다면 그야말로 성서는 모순투성이고 예수님의 행적은 아리송할 수밖에 없다. 보다 폭넓게 읽어나가야 한다. ‘예수는 로마에 항거하라’고 말했다는 구절이 없다는 논리를 펴는 정목사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나 헤롯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고 로마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이는 마치 일제시대에 친일파에는 적대적이었지만 일제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모순되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된다.
흔히 성서주석을 할 때 말씀은 텍스트요 오늘의 현실은 컨텍스트라는 단순대비에 자주 빠지는데 크게 보아 정목사 또한 이런 단순 방식에 머물고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잘못된 가정을 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는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상관관계란 이런 것이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가 곧 오늘의 우리 상황에 대비시키는 텍스트가 아니라 성서의 문자와 그 문자를 둘러싸고 있는 당시의 사회적 정황과의 상관긴장관계가 바로 우리가 적용해야 할 텍스트인 것이다. 예를 들면 A라는 사회적 상황에서 B라는 성서의 구절이 나왔다면, A와 B 사이에 놓여 있는 C라는 상관긴장관계가 성서의 텍스트가 되어 오늘의 A+라는 새로운 상황에 적용할 때 B+라는 새로운 성서의 텍스트가 나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설교자들이 해야 하는 성서주석의 작업이다.
무거운 은혜. 과연 그러한가?
그간 필자가 읽어온 대형교회 복음주의권 목사님들을 향한 정목사의 설교 비평은 대체로 그 내용이 너무 가볍다는 것이 주된 비판이었다. 그런데 ‘값싼 은혜, 무거운 은혜’라는 제목에서도 분명히 밝혔지만, 필자에 대한 설교는 반대로 무겁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가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에 비해 무겁다는 상대적 평가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필자는 스스로 여전히 예수님의 설교에 비하면 너무나도 가볍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누가 자기 형제를 바보라 부른다고 해서 지옥에나 가라고 소리친 적도 없고, 잘못된 일을 했다고 해서 손을 자르거나 발을 자르라고 외친 적도 없고, 형제를 실족케 하였다고 해서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라고 충고한 적도 없다. 평화가 아니라 불을 던지러 왔고 가족 사이에 분쟁을 가져오기 위해 오셨다는 예수님의 설교야 말로 너무너무 무거운 것이 아닌가?
정목사는 결론에서 마태복음의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예수님의 초청을 빗대어 복음이란 바로 이렇게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는 ‘값비싼’ 초청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난 도대체 헷갈린다. 이 성서구절을 반복적으로 외치는 복음주의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설교를 비판해온 정목사가 나의 설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다시금 이 구절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 구절 또한 그리 간단하게 해석되는 구절이 아니다. 이 마태복음 구절에서 정작 중요한 단어는 이 ‘다 내게로 오라’는 초청에 이어지는 ‘나의 멍에를 함께 메고 가자’는 문구에 있다고 본다.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끌어야 하는 팔레스타인의 농사에서 한 마리는 다른 한 마리가 이끄는 대로 가야 한다. 자기 힘을 빼야 한다. 그래야만 하루의 일을 보다 쉽게 마칠 수 있다. 힘이 센 자 앞에서 버티면 결국 자기 손해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거운 짐을 벗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목에 메어진 멍에를 벗어 던지라는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혼자 지던 멍에를 벗는 대신 예수님의 멍에를 함께 메는 자기 포기와 헌신을 의미한다. 곧 십자가 순종의 삶에 대한 초청이다. 정목사는 이 함께 멍에를 메자고 하는 십자가의 초청을 가볍게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여전히 무겁다. 구원을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가르쳤던 사도 바울 또한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라고 한탄하고 있다. 구원에는 감사의 기쁨도 있지만, 동시에 무거움의 실천도 있다. 갈라디아서가 가르치는바 믿음만으로 의인이 되는 기쁨도 있지만 야고보서가 가르치는 실천의 가르침도 있다. 기독교 영성이란 바로 전자의 기쁨으로 후자의 실천을 행하는 힘이다.
향린교회의 현장
우리가 누군가의 말을 옮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그 말 속에 담긴 상대방의 진심이다.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긴 글에서 짧은 문장을 인용할 때는 전체 문맥을 잘 살핀 뒤에 맥락에 따라 그 문장을 비판해야지 전후 문맥을 고려함 없이 아무런 예비지식도 없는 제삼자를 향해 불쑥 한 구절을 내미는 것은 지성과 객관을 생명으로 하는 학자로서의 정당한 태도는 아니다. 마치 ‘성전의 벽을 허물라’는 예수님의 발언에서 이 문구만을 문제 삼아 예수는 민중폭동을 주창하였다고 고발하는 바리새인이나 제사장의 태도가 이런 것이었다. 내가 30분이 넘어가는 설교 말미에서 채 1분도 걸리지 않는 마지막 문장을 들이밀고 조목사의 설교는 이런 식이다! 라고 단정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바른 비평의 방법이 아니다. 정목사도 지적하였지만 나의 설교는 어쩌면 한편의 단편소설과 같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말미에 이르러 문학적 반전을 꾀하는 강조의 문장이 많다. 그 문장만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정목사가 지적한대로 과장이나 억지 그리고 선동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체 설교를 들은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결론들은 물이 흘러들어옴과 같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정목사에게는 온당치 않고 무거운 보이는 말들이 향린교인들에게는 값비싼 은혜의 초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장을 ‘와서 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모든 목사마다 자기가 서 있는 교회의 특수한 상황이 있다. 필자가 설교하는 향린교회는 남한 내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진보적인 교회이다. 한 눈으로는 성서를 그리고 다른 한 눈으로는 민중의 고통 받는 현실을 보는 신앙인들이 모인 곳이다. 제3세계적인 시각인 남미의 해방신학과 민중신학 그리고 통일신학의 진보적 성서 해석을 목말라 하는 교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향린교회가 아니라면 애당초 교회에 발을 집어넣지 않을 비판적 지식인도 있고 교회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교회 자체를 떠날 만큼 (믿음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남한의 기독교의 행태에 대해 매우 실망한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그들은 향린교회를 자신들의 막장교회라고 부른다. 그들에게는 최후의 남은 구원의 방주이다. 기나긴 방황 끝에 향린교회를 찾아온 많은 젊은이들은 진보 개혁적 사회사상과 성서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대다수는 민족의 평화적 통일과 자주를 교회목회의 우선과제로 여기고 있는 실천가들이다. 필자는 향린교회의 목회나 필자의 설교가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이유가 어느 교회보다 민족자주적인 의미에서 분명하고 크다는 것이다. 만약 기독교가 구체적 역사 상황에 상관없이 똑같은 구원만을 선포하셨다면 성서가 그렇게 두꺼울 필요도 없고, 복음서를 4권이나 가질 필요가 없다. 조직신학자의 눈에는 각기 다른 공동체에 선포된 4권의 복음서가 같을지 몰라도 구체적 현실을 중시하는 성서신학자인 나에게는 매우 다른 것이다. 교회라는 이름은 같지만 필자가 매주일 설교를 해야 하는 향린교회라는 자리는 바로 이렇게 다른 자리이다.
옳고 그름이 아니다. 필자에게 어떤 선을 넘었다고 비평하는 정목사가 만약 향린교회에서 설교하게 된다면, 다른 교회에서 했던 원고를 그대로 들고 오지는 않을 것이다. 설교 비평은 단순히 한 목사의 설교의 내용을 비평자의 자기 신학이라는 고정된 자리에서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비평하고자 하는 설교자의 삶과 신학 그리고 그가 서 있는 목회현장을 고려하는 가변적 기준을 가질 때에 비로소 양자가 서로 소통하는 참다운 비평의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필자는 정목사를 향린교회에 초청하여 교인들이 함께 동참하는 진정한 설교 비평을 하고 함께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열린 대화를 하고 싶다.
설교비평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한 목사의 수 십 편의 설교를 읽고 평을 한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목사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적어도 비평하려는 목사가 섬기는 그 교회가 일반적 기준에서 벗어나는 교회라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한번쯤은 직접 와서 보아야 하지 않았을까? 물론 목회하는 목사로서 쉽지 않은 일이기에 동영상으로 설교를 들었을 것이고 예배의 분위기를 파악하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한된 영상을 통해 보는 것과 예배에 직접 참여해서 그 분위기를 체득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정목사가 알지 못하는 더 큰 놀라운 사건이 향린의 예배 속에 있다. 그것은 향린 교회가 국악예배나 평신도 설교 그리고 평신도목회에 있어서 개혁적인 길을 걷을 뿐만 아니라, 더 큰 개혁도 시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2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는바 모든 교우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드리는 공동 축도이다. 조직신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도신조 대신에 국악풍의 독자적인 신앙고백을 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겠지만, 공동축도 또한 매우 위험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향린교회는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따라 축도를 단지 목사(교회목회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신도들(생활목회자)이 함께 공유해야 하는 하늘의 축복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예배의 마지막에서 온 교우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그 사랑의 체온을 느끼며 서로를 향해 축복을 비는 이 공동축도에서 성령의 자유와 해방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구원의 초청을 듣는다.
정목사께서 한번이라도 직접 예배에 참여하여 기쁨에 넘치는 향린교인들의 반응을 보았더라면 “민중들의 영혼을 신경과민하게 만드는 무거운 은혜라는” 혹은 “이런 주장은 흡사 유신시대 조회시간에 행한 교장 선생님의 훈화가 아닌가” 하는 무책임한 얘기는 결코 하지 않았으리라! 더 나아가 예수님이 함께 하셨던 갈릴리사람들이 오늘 남한의 역사 현실에서 누구인지 알아보고 그리고 그들의 아픔을 더 깊이 이해하고 체득하기 위해 고통 받는 그들의 삶에 몸으로 접근하였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설교 비평이 전개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여전히 날카롭고 통찰력 있는 설교 비평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를 드린다. 지금까지 내게 이런 충심어린 설교 비평을 해준 사람이 정목사외에는 한 사람도 없었으니 진정 정목사의 설교비평의 길과 하나님 나라 운동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한다. (기독교사상, 2007년 6월호)
2007.05.30 16:12:22
조목사님은 일단 '와보라'라고 말씀하시는군요. 기쁨에 넘치는 교인들의 반응은 사이비종교에도 있는 법인데, 그 반응을 보고 자기를 평가해달라고 하시는군요. 설교를 비평했을 뿐인데, 자신의 업적이 평가받은 듯 기분나빠하시는 게 역력합니다. 자신의 목회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신 분인 것은 분명한데, 설교비평반론을 읽어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내가 어떤 사람인데 니가 감히 날 평가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평소에 '잘한다 잘한다'하는 소리에만 익숙해져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반응이죠.
반론이 아니라 반감입니다.
반론이 아니라 반감입니다.
2007.05.30 17:16:50
내가 어떤 사람인데 니가 감히 날 평가해, 라는 부분이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요.
제가 독해력이 나쁜것인지...
에쩨르님, 너무 심각한 비난이시네요.
조목사님에게 잘한다 잘한다라고 칭찬하는 사람이 한국기독교에서 도대체 몇이나 되길래...
제가 독해력이 나쁜것인지...
에쩨르님, 너무 심각한 비난이시네요.
조목사님에게 잘한다 잘한다라고 칭찬하는 사람이 한국기독교에서 도대체 몇이나 되길래...
2007.05.30 19:08:19
정세웅님 그래서 제가 느낌이라고 썼습니다.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글전체에서 풍기는 느낌.
조목사님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계시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한다 잘한다하고 칭찬하는 사람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향린교회 교인들이죠.
조목사님 스스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향린교회를 자신들의 막장교회라고 부른다. 그들에게는 최후의 남은 구원의 방주이다"
향린교회가 최후의 남은 구원의 방주가 되어서는 안되죠.
조목사님은 향린교회에 나름대로 프라이드를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자기 메세지에도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비평을 비평으로 듣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죠.
조목사님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계시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한다 잘한다하고 칭찬하는 사람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향린교회 교인들이죠.
조목사님 스스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향린교회를 자신들의 막장교회라고 부른다. 그들에게는 최후의 남은 구원의 방주이다"
향린교회가 최후의 남은 구원의 방주가 되어서는 안되죠.
조목사님은 향린교회에 나름대로 프라이드를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자기 메세지에도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비평을 비평으로 듣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죠.
2007.05.31 11:33:37
살군님의 정의대로, 하나님의 실재를 인간의 말로 어떻게 선포하느냐가 설교라면, 그 상황과 현실을 철저하게 반영한 말씀이어야만 인간의 말로 전해질 것입니다. 사실 모든 성경은 다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 쓰여진 글이 아닙니까? 어떤 특별한 상황을 일반화시키면 안되구요, 어느 성경이든지 그 상황을 무시하거나 간과하면 구체적인 삶 가운데 다가오시고 말을 거시는 하나님을 지나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든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취향이나 이데올로기를 포함해서,하나님의 말씀은 그 상황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저는 조목사님의 반론에 대체적으로 깊이 공감합니다. 이것은 곧, 더 치열하게 삶의 현장에 들어가지 못한 정목사님의 비평에 대한 아쉬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든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취향이나 이데올로기를 포함해서,하나님의 말씀은 그 상황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저는 조목사님의 반론에 대체적으로 깊이 공감합니다. 이것은 곧, 더 치열하게 삶의 현장에 들어가지 못한 정목사님의 비평에 대한 아쉬움이기도 합니다.
2007.05.31 17:02:53
향린교회의 특징이자 한계... 완전히 규정해버릴수는 없지만 "거대담론"에만 너무 집착한다는 느낌이 너무 강합니다... 개인의 신앙적인 고민이나 나눔, 갈등, 문제 해결 같은 것을 내놓다가는 그저 배부른 소리한다는 핀잔을 받을 것만 같은 분위기... 다들 너무 완벽해서 그런 문제는 훌쩍 뛰어넘고 바로 거대담론으로 넘어가도 될 만한 경지의 분들이라서 그럴 지도 모릅니다만...
또한 항상 민중을 생각하시는 분들인데... 왠지 실제 민중들은 그 분들을 대하는 것이 그렇게 편하지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반적인 보수 교회는 전도 폭발, 태신자 운동 등의 사업으로 교인들이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있다면, 향린 교회 같은 경우에는 전혀 다른 방향의 또 다른 사업에 치중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도 많이 듭니다...
또한 항상 민중을 생각하시는 분들인데... 왠지 실제 민중들은 그 분들을 대하는 것이 그렇게 편하지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반적인 보수 교회는 전도 폭발, 태신자 운동 등의 사업으로 교인들이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있다면, 향린 교회 같은 경우에는 전혀 다른 방향의 또 다른 사업에 치중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도 많이 듭니다...
2007.05.31 17:01:02
또 한 가지 이야기를 해본다면... 예를 들어서 저의 부모님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실 계기도 없었고, 생각들이 등걸처럼 굳어져서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반공의식과 냉전적 사고 방식 속에 갖혀 계십니다... 그렇지만 이야기 해보면 정말 생각만큼 그렇게 답답하신 분들도 아니고, 또한 자식들을 전 존재로 사랑하시고 이런 저런 문제를 풀어나가시는데 혜안과 경륜을 가지신 존경받을 만한 분들입니다...
향린 교회의 기준에서는 우리 부모님은 완전히 "반동"으로 분류될지도 모릅니다... 너무 극단적인 예를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사상적 경직성"으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의 가능성의 문제도 제기하고 싶습니다... 좀 많이 치우쳐 있다는 거죠... 오른 편에서가 아닌 아닌 왼 편에서의 근본주의적 가능성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해서는 굉장히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려고 애쓴다고는 하는데, 그 객관성이 너무 오바되어 표현된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하기야 그도 그럴 것이 교조적으로야 북한만큼 민중적인 나라도 없을테니까요...
물론 다비아가 그런 것처럼 향린교회도 저처럼 무식하게 한 가지 색깔로 이야기할 수만은 없는 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건 인정하고싶습니다...
향린 교회의 기준에서는 우리 부모님은 완전히 "반동"으로 분류될지도 모릅니다... 너무 극단적인 예를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사상적 경직성"으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의 가능성의 문제도 제기하고 싶습니다... 좀 많이 치우쳐 있다는 거죠... 오른 편에서가 아닌 아닌 왼 편에서의 근본주의적 가능성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해서는 굉장히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려고 애쓴다고는 하는데, 그 객관성이 너무 오바되어 표현된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하기야 그도 그럴 것이 교조적으로야 북한만큼 민중적인 나라도 없을테니까요...
물론 다비아가 그런 것처럼 향린교회도 저처럼 무식하게 한 가지 색깔로 이야기할 수만은 없는 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건 인정하고싶습니다...
2007.05.31 17:25:04
교회적 정황, 목회자 개인의 특성이 탈색되어야만 진정한 설교가 가능한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일이죠.
오늘날, 사람, 지역 이라는 것을 고민하지 않고, 텍스트 해석의 방향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런 해석에 있어서 중점을 두는 가치와 기준이 다르겠죠.
전통이든, 신학이든 기존의 해석이며, 그러기에 언제든 부정될 수 있고
(지금 우리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를 충분히 해명해 주지 않는한,
그런면에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통신학의 틀이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를 충분히 해명해주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음을 항상 열린마음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를 거부하지 않는한
왜 예수는 그리스도인가를 논하는 해석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며, 그런 차이란 단순한 의견일 뿐입니다.
물론 그 의견이 당사자에게는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진정성의 차원이겠죠.
첫날처럼님의 부모님처럼, 님께서 조목사님과 혹은 향린교회 교인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면
부모님에게서 느낀것과 똑같은 것을 느끼실 수 있지 않을까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일이죠.
오늘날, 사람, 지역 이라는 것을 고민하지 않고, 텍스트 해석의 방향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런 해석에 있어서 중점을 두는 가치와 기준이 다르겠죠.
전통이든, 신학이든 기존의 해석이며, 그러기에 언제든 부정될 수 있고
(지금 우리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를 충분히 해명해 주지 않는한,
그런면에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통신학의 틀이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를 충분히 해명해주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음을 항상 열린마음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를 거부하지 않는한
왜 예수는 그리스도인가를 논하는 해석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며, 그런 차이란 단순한 의견일 뿐입니다.
물론 그 의견이 당사자에게는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진정성의 차원이겠죠.
첫날처럼님의 부모님처럼, 님께서 조목사님과 혹은 향린교회 교인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면
부모님에게서 느낀것과 똑같은 것을 느끼실 수 있지 않을까요?
2007.05.31 23:49:28
다른 모든 것 보다도.. 한 설교자의 설교를 비평하기 위해 정목사님께서 취할 수 있는 자료와 그것을 취할 시간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점과 (그래서 편협한 비평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또 한가지 비평을 위한 비평이란 느낌을 누구나 가질 수 있다는 점은 어느정도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신가요?
2007.06.01 04:32:19
고대 이스라엘의 일종의 역사서적, 시편, 법률서적 등이
히브리성서로 우리 앞에 남아있고,
예수에 대한 기억을 결집한 몇몇 판본과,
사도들의 일상 속에 씌어진 편지글,
그리고 묵시 문서가, 신약성서로 우리 앞에 있습니다.
공통점은 직접 신을 얘기했다기보다는,
사람들이 몸 붙여 살아가며, 투쟁하는 현장을 담고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성서를 통해 비로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언제나 여전히 활동하시고 계신다는 것이고요.
우린 우리 시대의 세계관, 경제구조, 정치질서 등에 매인 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역사를 통해, 자연과학을 통해,
정치 현실을 통해, 예술을 통해,, 등등,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한편 성과에 자랑스러워하고, 한편 처절한 한계를 경험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질문합니다.
성서는 대답을 제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질문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우리가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주님,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설교자는 그리고 청중은
주님께 내어놓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나그네라고 본다면,
세상을 초월한 무엇을 이미 손에 쥐고 있다는 듯한,
엘리트로서의 설교자, 선민으로서의 청중이란 일종의 착각이죠.
성속을 구분하는 판결서로서의 성서란 일종의 착각이죠.
특정 세계관을 벗는다고 벗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현재의 세계관/가치관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면서,
그 한계와 오류를 거듭 수정해나가면서,
세상을 읽고, 성서를 읽는 것,
거듭 하나님을 질문하는, 우리네 기독인의 삶의 방식이 아닐까요.
p.s. 살군님의 진중한 글을 읽다가, 답글은 아니고, ^^;
나름 열심히 생각을 쥐어짜 보았습니다. ^^
히브리성서로 우리 앞에 남아있고,
예수에 대한 기억을 결집한 몇몇 판본과,
사도들의 일상 속에 씌어진 편지글,
그리고 묵시 문서가, 신약성서로 우리 앞에 있습니다.
공통점은 직접 신을 얘기했다기보다는,
사람들이 몸 붙여 살아가며, 투쟁하는 현장을 담고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성서를 통해 비로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언제나 여전히 활동하시고 계신다는 것이고요.
우린 우리 시대의 세계관, 경제구조, 정치질서 등에 매인 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역사를 통해, 자연과학을 통해,
정치 현실을 통해, 예술을 통해,, 등등,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한편 성과에 자랑스러워하고, 한편 처절한 한계를 경험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질문합니다.
성서는 대답을 제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질문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우리가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주님,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설교자는 그리고 청중은
주님께 내어놓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나그네라고 본다면,
세상을 초월한 무엇을 이미 손에 쥐고 있다는 듯한,
엘리트로서의 설교자, 선민으로서의 청중이란 일종의 착각이죠.
성속을 구분하는 판결서로서의 성서란 일종의 착각이죠.
특정 세계관을 벗는다고 벗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현재의 세계관/가치관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면서,
그 한계와 오류를 거듭 수정해나가면서,
세상을 읽고, 성서를 읽는 것,
거듭 하나님을 질문하는, 우리네 기독인의 삶의 방식이 아닐까요.
p.s. 살군님의 진중한 글을 읽다가, 답글은 아니고, ^^;
나름 열심히 생각을 쥐어짜 보았습니다. ^^
2007.06.01 06:12:10
설교 비평 반론 관전평 (평소 글쓰기 습관대로 경어체를 쓰지 않았다)
솔직히 나는 그동안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에 대하여 꼭 필요하고 귀한 일을 하는구나 하면서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정 목사님의 비평의 대상이 되는 소위 한국 교회에서 잘 나가는 보수교회의 목사님들의 설교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와 신학적인 패러다임이 비슷할 조헌정 목사님을 비평했다기에 비로소 자세히 읽어 보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조 목사님을 전혀 모른다. 우연하게 지나가는 길에 5 년 전에 워싱턴의 그의 교회에 갔다가 다른 2 명의 한신 출신의 목사님들과 몇 시간 환담을 나눈 것 밖에 없다. 그 후 그가 향린교회에 부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국에서 한가롭고 개량한복에 고무신을 걸치고 있던 그의 모습과 투쟁의 최전선인 향린교회의 모습과 잘 매치가 되지 않았었다.
조 목사님의 설교를 비평하는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동안 정 목사님이 단골로 비평해왔던 보수 교회의 현장과는 전혀 다른 향린교회 현장을 정 목사님이 얼마나 느낄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조 목사님의 반론을 보면 역시 정 목사님의 현장감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한국 최근대사에서 향린 교회가 걸어왔던 고난의 가시밭길, 그리고 미국 교회라는 안온한 환경에서 향린교회라는 투쟁의 현장으로 뛰어든 조 목사님을 이해하지 않고는 아무리 학문적으로 비평 한다고 해도 절반의 이해 밖에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 되었다.
조 목사님의 반론은 정 목사님이 자신에 대하여 결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을 몇몇 문구에 대하여 과민하게 반응을 보인 것 외에는 정작 정 목사님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이참에 보수적인 목사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 놓은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정 목사님의 설교 비평은 그야말로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려준 격인 셈이다.
보수교회의 총아인 박영선 목사님의 반론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식이라면 조 목사님은 한반도 정의 평화를 위한 투쟁의 최전선에 서있는 교회의 목사님답게 ‘투사’적인 반론을 폈다.
그러나 정작 나라면 반론하고 싶을 대목은 언급이 되지 않았다.
정 목사님이
“한미 FTA를 파기하고, 미군을 당장 철수 시키고, 재벌을 해체하고, 새만금을 원점으로 돌리고, 지금 당장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쪽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원룸 아파트를 제공하고, 저소득층에게 의료와 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국내 노동자들과 동일한 노동법을 제공한다면 그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것인가?”하고 비판한 부분에 대하여
나라면
“그렇다!
그렇게만 된다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세상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가 몸 붙여 사는 한반도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이 되고 한이 되는 것이다.”라고 반론 하겠다.
그동안 정 목사님으로부터 보수진영으로부터 너무 진보적이라는 공격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진보진영으로부터 진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엉? 같은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하는.
그동안에도 다른 사이버 동네에서 무슨 소리인지는 도무지 모르겠지만 정 목사님을 비난하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었지만.
즉 이번 비평으로 양 쪽 어느 한 쪽에도 속하지 않은 어중간한 정 목사님의 색깔이 분명히 들어나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르게 표현하면 정 목사님이 선 곳은 바로 양쪽의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상황이다.
나같이 확실히 진보적인 사람이 가진 칼은 보수주의를 해부 할 수 있는 한 쪽의 날 밖에 없지만 정 목사님은 진보 보수 양쪽을 모두 해부할 수 있는 양 쪽의 날이 선 칼을 가진 셈이다.
정 목사님의 역활은 한국 교회 현장에서 흔치 않은 역활이다.
예수님은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하셨는데 아무쪼록 정 목사님은 이참에 고동색 개량한복을 팔아서라도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관절과 골수를 쪼갤 수 있는 양 쪽에 날이 선 검 하나 장만 하시기를 바란다.
나처럼 평생 싸움꾼도 아닌 얌전한 골샌님 같은 정 목사님에게 적이 점점 많이 생기게 되었다.
진심으로 축하할 일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평화를 주러 오지 않고 검을 주러 오셨다고 했지 않았던가?
정 목사님이여! 한국 교회를 위하여 칼을 힘차게 휘두르시라!
솔직히 나는 그동안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에 대하여 꼭 필요하고 귀한 일을 하는구나 하면서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정 목사님의 비평의 대상이 되는 소위 한국 교회에서 잘 나가는 보수교회의 목사님들의 설교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와 신학적인 패러다임이 비슷할 조헌정 목사님을 비평했다기에 비로소 자세히 읽어 보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조 목사님을 전혀 모른다. 우연하게 지나가는 길에 5 년 전에 워싱턴의 그의 교회에 갔다가 다른 2 명의 한신 출신의 목사님들과 몇 시간 환담을 나눈 것 밖에 없다. 그 후 그가 향린교회에 부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국에서 한가롭고 개량한복에 고무신을 걸치고 있던 그의 모습과 투쟁의 최전선인 향린교회의 모습과 잘 매치가 되지 않았었다.
조 목사님의 설교를 비평하는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동안 정 목사님이 단골로 비평해왔던 보수 교회의 현장과는 전혀 다른 향린교회 현장을 정 목사님이 얼마나 느낄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조 목사님의 반론을 보면 역시 정 목사님의 현장감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한국 최근대사에서 향린 교회가 걸어왔던 고난의 가시밭길, 그리고 미국 교회라는 안온한 환경에서 향린교회라는 투쟁의 현장으로 뛰어든 조 목사님을 이해하지 않고는 아무리 학문적으로 비평 한다고 해도 절반의 이해 밖에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 되었다.
조 목사님의 반론은 정 목사님이 자신에 대하여 결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을 몇몇 문구에 대하여 과민하게 반응을 보인 것 외에는 정작 정 목사님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이참에 보수적인 목사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 놓은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정 목사님의 설교 비평은 그야말로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려준 격인 셈이다.
보수교회의 총아인 박영선 목사님의 반론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식이라면 조 목사님은 한반도 정의 평화를 위한 투쟁의 최전선에 서있는 교회의 목사님답게 ‘투사’적인 반론을 폈다.
그러나 정작 나라면 반론하고 싶을 대목은 언급이 되지 않았다.
정 목사님이
“한미 FTA를 파기하고, 미군을 당장 철수 시키고, 재벌을 해체하고, 새만금을 원점으로 돌리고, 지금 당장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쪽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원룸 아파트를 제공하고, 저소득층에게 의료와 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국내 노동자들과 동일한 노동법을 제공한다면 그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것인가?”하고 비판한 부분에 대하여
나라면
“그렇다!
그렇게만 된다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세상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가 몸 붙여 사는 한반도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이 되고 한이 되는 것이다.”라고 반론 하겠다.
그동안 정 목사님으로부터 보수진영으로부터 너무 진보적이라는 공격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진보진영으로부터 진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엉? 같은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하는.
그동안에도 다른 사이버 동네에서 무슨 소리인지는 도무지 모르겠지만 정 목사님을 비난하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었지만.
즉 이번 비평으로 양 쪽 어느 한 쪽에도 속하지 않은 어중간한 정 목사님의 색깔이 분명히 들어나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르게 표현하면 정 목사님이 선 곳은 바로 양쪽의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상황이다.
나같이 확실히 진보적인 사람이 가진 칼은 보수주의를 해부 할 수 있는 한 쪽의 날 밖에 없지만 정 목사님은 진보 보수 양쪽을 모두 해부할 수 있는 양 쪽의 날이 선 칼을 가진 셈이다.
정 목사님의 역활은 한국 교회 현장에서 흔치 않은 역활이다.
예수님은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하셨는데 아무쪼록 정 목사님은 이참에 고동색 개량한복을 팔아서라도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관절과 골수를 쪼갤 수 있는 양 쪽에 날이 선 검 하나 장만 하시기를 바란다.
나처럼 평생 싸움꾼도 아닌 얌전한 골샌님 같은 정 목사님에게 적이 점점 많이 생기게 되었다.
진심으로 축하할 일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평화를 주러 오지 않고 검을 주러 오셨다고 했지 않았던가?
정 목사님이여! 한국 교회를 위하여 칼을 힘차게 휘두르시라!
2007.06.01 11:31:13
조헌정 목사님의 반론에 대한 해명 (1)
위에서 지 목사님이 지적한 것처럼
독립투사와 연봉 운운은 좋은 뜻으로 쓴 건데
저희 표현에 문제가 있었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조 목사님의 신학을 문제 삼은 게 아니라,
물론 거기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몇 마디 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주일공동예배의 설교행위를 문제삼은 것입니다.
주일공동예배의 설교는 오직 케리그마에 집중되어야 하는데,
과연 조 목사님의 설교가 그런 자리에 섰는가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지요.
케리그마는 예수를 통해서, 또는 예수에게서 일어난 하나님 나라를 그 내용으로 합니다.
물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왜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유에 의해서 주어지는,
또는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기본적으로 대강절에 놓인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단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 앞에서 우리는 무능력합니다.
이런 건 종말론과 칭의론, 또는 기독론이라는 신학적인 개념을 굳이 거론하지 않고,
단순히 저의 개인적인 삶에 비추어본다고 한더라도 분명합니다.
저는 네 두 딸들에게 참된 생명을 가르칠 수가 없더군요.
나도 사실을 잘 모르기도 하구요.
도대체 제 딸들에게 제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무언가 말을 하기는 하지만 그런 것들은 대개 계몽에 불과하답니다.
그래서 가능한대로 그 아이들의 삶을 간섭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성령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나는 그 아이들의 삶에 최소한으로만 개입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저는 신학, 목회, 삶의 주도권을 성령에게 맡기는 겁니다.
그런 말은 너무 추상적이고, 또는 진부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보인다면 할 수 없지만
제 생각에는 훨씬 다이나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다 하고,
목사가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깊이 알고 있으며,
청중들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 목사들은, 나를 포함해서
완전히 무기력합니다.
자신의 말이 청중들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도 모르고,
넘치는 자신감으로 설교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중설교자들에게서 그런 게 보이고,
간혹 진보쪽 인사들에게서도 그게 보입니다.
비약이긴 하지만
FTA 반대집회에 참가했던 어떤 택시 기사 분이 분신하신 적이 있습니다.
죽음을 선택한 그분의 심정을 저는 감히 평가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일에 생명을 바칠 수밖에 만든 어떤 악한 힘이
그에게 작용한 거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드는 건 분명합니다.
생명을 던질 만한 사안이 아닌 것에 생명을 걸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악한 힘의 작용일 테니까 말입니다.
몇년전에도 어떤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약간의 사회적 물의로 인해서
자살하신 적이 있더더군요.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훨씬 신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적용의 문제는 가능한대로 직접적으로 다루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군사독재 밑에서도 침묵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군사독재 시대와 지금도 다른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런 문제는 일단 접겠습니다.
생각은 서로 다르게 할 수 있고, 달라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이 있겠지요.
조 목사님의 신학과 저의 신학이 다르기는 하지만
역사를 변혁해내야 한다는 진보 노선에서는 동일합니다.
종말론을 견지하는 목사가 어떻게 진보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다만 케리그마에 집중해야 할 주일공동예배의 설교에서
디테일한 정치 경제적인 문제까지 거론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제기였습니다.
저는 겁이 많은 사람이래서 그런지 몰라도
그렇게 설교하기가 두렵거든요.
위에서 지 목사님이 지적한 것처럼
독립투사와 연봉 운운은 좋은 뜻으로 쓴 건데
저희 표현에 문제가 있었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조 목사님의 신학을 문제 삼은 게 아니라,
물론 거기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몇 마디 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주일공동예배의 설교행위를 문제삼은 것입니다.
주일공동예배의 설교는 오직 케리그마에 집중되어야 하는데,
과연 조 목사님의 설교가 그런 자리에 섰는가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지요.
케리그마는 예수를 통해서, 또는 예수에게서 일어난 하나님 나라를 그 내용으로 합니다.
물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왜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유에 의해서 주어지는,
또는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기본적으로 대강절에 놓인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단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 앞에서 우리는 무능력합니다.
이런 건 종말론과 칭의론, 또는 기독론이라는 신학적인 개념을 굳이 거론하지 않고,
단순히 저의 개인적인 삶에 비추어본다고 한더라도 분명합니다.
저는 네 두 딸들에게 참된 생명을 가르칠 수가 없더군요.
나도 사실을 잘 모르기도 하구요.
도대체 제 딸들에게 제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무언가 말을 하기는 하지만 그런 것들은 대개 계몽에 불과하답니다.
그래서 가능한대로 그 아이들의 삶을 간섭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성령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나는 그 아이들의 삶에 최소한으로만 개입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저는 신학, 목회, 삶의 주도권을 성령에게 맡기는 겁니다.
그런 말은 너무 추상적이고, 또는 진부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보인다면 할 수 없지만
제 생각에는 훨씬 다이나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다 하고,
목사가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깊이 알고 있으며,
청중들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 목사들은, 나를 포함해서
완전히 무기력합니다.
자신의 말이 청중들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도 모르고,
넘치는 자신감으로 설교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중설교자들에게서 그런 게 보이고,
간혹 진보쪽 인사들에게서도 그게 보입니다.
비약이긴 하지만
FTA 반대집회에 참가했던 어떤 택시 기사 분이 분신하신 적이 있습니다.
죽음을 선택한 그분의 심정을 저는 감히 평가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일에 생명을 바칠 수밖에 만든 어떤 악한 힘이
그에게 작용한 거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드는 건 분명합니다.
생명을 던질 만한 사안이 아닌 것에 생명을 걸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악한 힘의 작용일 테니까 말입니다.
몇년전에도 어떤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약간의 사회적 물의로 인해서
자살하신 적이 있더더군요.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훨씬 신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적용의 문제는 가능한대로 직접적으로 다루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군사독재 밑에서도 침묵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군사독재 시대와 지금도 다른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런 문제는 일단 접겠습니다.
생각은 서로 다르게 할 수 있고, 달라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이 있겠지요.
조 목사님의 신학과 저의 신학이 다르기는 하지만
역사를 변혁해내야 한다는 진보 노선에서는 동일합니다.
종말론을 견지하는 목사가 어떻게 진보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다만 케리그마에 집중해야 할 주일공동예배의 설교에서
디테일한 정치 경제적인 문제까지 거론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제기였습니다.
저는 겁이 많은 사람이래서 그런지 몰라도
그렇게 설교하기가 두렵거든요.
2007.06.01 13:50:44
저 개인적으로는 향린 교회가 "민족교회"의 이상을 가장 잘 실현하고 있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평가합니다... 예배 형식 및 내용의 토착화에 대한 노력이 아주 세련된 형태로 자리를 잡아간다는 강한 인상을 받구요... 그러면서도 제 느낌엔 기독교 전통과 단절 되는 느낌도 거의 없었구요... 여느 교회에서 드렸던 예배보다도 더 많이 준비된, 엄숙하고 거룩한 예배였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향린교회는 교회 운영의 투명성, 민주성, 합리성에 있어서도 다른 교회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향린교회에 성도님들도 몇 분 알고 있습니다... 참 좋은 분들이고, 생각이 열려있고 합리적이며 바른 분들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조헌정 목사님도 향린 교회의 내적인 영성의 심화에도 천착하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향린 교회 내부에서도 그런 요구들이 있었던 것 같구요...
저는 여전히 향린교회를 사랑합니다... 신앙을 다시금 진지하게 돌아보게한 계기를 만들어준 교회이니까요... 향린교회 게시판에 개념없는 악플러들이 설칠때 저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향린교회 편에 서서 싸우기도 했구요...
제가 위에서 쓴 글은 분명히 편파적인 글입니다... 향린교회를 너무 평면적으로 평가를 한 것이구요... 그렇지만 다분히 의도적이었습니다... 극단적인 표현을 통해서 그럴 수도 있는 위험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애정의 표현이겠죠...
지금은 향린교회를 떠나셨지만, 정 목사님께서 홍근수 목사님의 설교를 비평해주셨으면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 색깔에 있어서는 조헌정 목사님 보다도 더 분명한 분이니깐요...
저희 담임 목사님께서 설교 하실때 성서의 말씀은 그냥 꿔다논 보릿자루처럼 한 번 읽고는 일제시대 때부터 현대사까지 아주 극우적인(?) 시각으로 설교 시간을 채우신 적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편협했고 공감이 되지 않는 내용이었습니다... 다분히 목적 의식(?)이 느껴지기도 했구요...
그런데 홍근수 목사님도 설교시간 내내 자신의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어떤 사안에 대한 의견으로 도배하시던 모습을 보이시던 적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이야기 하시는 말의 진실성에서야 저는 홍 목사님의 손을 들어주겠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목사가 투사가 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들을 그렇게 내몰았던 슬픈 역사적인 현실들이 과거에 존재했고 지금도 그런 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설교 단상에서까지 투사가 되어야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 면에서 정 목사님의 문제 제기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향린교회에 성도님들도 몇 분 알고 있습니다... 참 좋은 분들이고, 생각이 열려있고 합리적이며 바른 분들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조헌정 목사님도 향린 교회의 내적인 영성의 심화에도 천착하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향린 교회 내부에서도 그런 요구들이 있었던 것 같구요...
저는 여전히 향린교회를 사랑합니다... 신앙을 다시금 진지하게 돌아보게한 계기를 만들어준 교회이니까요... 향린교회 게시판에 개념없는 악플러들이 설칠때 저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향린교회 편에 서서 싸우기도 했구요...
제가 위에서 쓴 글은 분명히 편파적인 글입니다... 향린교회를 너무 평면적으로 평가를 한 것이구요... 그렇지만 다분히 의도적이었습니다... 극단적인 표현을 통해서 그럴 수도 있는 위험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애정의 표현이겠죠...
지금은 향린교회를 떠나셨지만, 정 목사님께서 홍근수 목사님의 설교를 비평해주셨으면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 색깔에 있어서는 조헌정 목사님 보다도 더 분명한 분이니깐요...
저희 담임 목사님께서 설교 하실때 성서의 말씀은 그냥 꿔다논 보릿자루처럼 한 번 읽고는 일제시대 때부터 현대사까지 아주 극우적인(?) 시각으로 설교 시간을 채우신 적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편협했고 공감이 되지 않는 내용이었습니다... 다분히 목적 의식(?)이 느껴지기도 했구요...
그런데 홍근수 목사님도 설교시간 내내 자신의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어떤 사안에 대한 의견으로 도배하시던 모습을 보이시던 적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이야기 하시는 말의 진실성에서야 저는 홍 목사님의 손을 들어주겠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목사가 투사가 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들을 그렇게 내몰았던 슬픈 역사적인 현실들이 과거에 존재했고 지금도 그런 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설교 단상에서까지 투사가 되어야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 면에서 정 목사님의 문제 제기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2007.06.01 16:33:38
제는 디테일한 정치 경제라고 하시는 정목사님의 시각이 협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이미 조목사님이 반론을 통해 정치와 경제가 오늘 우리 삶의 현실이라는 점을 설명하신 것 같구요. 저 역시 케리그마는 삶의 그체적인 상황이나 사건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봅니다. 목사들이 세상과 성도들의 삶 앞에 무기력하다는 것은 동의합니다만, 그렇게 무기력한 모습으로 서서(넘어지거나 숨거나 피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인 삶의 현실 앞에 풀고 내어 놓아야 할 존재임에도 틀림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디테일한 내용들은 단 위에서 분명하게 선포되어야 할 케리그마와 나뉠 수는 없는 영역이라 생각됩니다.
2007.06.01 18:08:42
조헌정 목사님의 반론에 대한 해명 (2)
조 목사님은 반론 글 앞 부분(설교와 목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설교자는 예수님을 따라 평화의 원리에 입각해서 이상에 가까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성서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이자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였고 이 하나님 나라는 정의와 평화로 요약된다. 설교자는 이 땅에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가 종말론적으로 실현되었음을 선포하고 자신의 목회와 삶에서 그렇게 실천하면 된다. 목사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근본 원리를 선포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각자의 삶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하면 된다.
위의 글은 "평화 원리주의자"라는 나의 지적에 대한 반론이었다.
조 목사님은 내가 말한 원리를 '평화의 원리',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근본원리'라고 받아들이셨는데,
약간 핀트가 어긋난 것 같다.
내가 말한 원리는 어떤 경향성을 가리킨다.
즉 조 목사님이 샬롬 개념을 규범적으로 적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쨌든지 바로 위에서 인용한 조 목사님의 진술은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똑같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걸 목회에서 실천하면 된다.
조 목사님도 그렇게 하고, 나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차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조 목사님은 원리로 생각하는 반면에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조 목사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정의와 평화로 요약했다.
옳은 말이지만 정확한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정의와 평화에만 갇히는가.
사랑, 기쁨, 자유도 역시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며 개념이다.
더 정확하게는,
아직도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의 힘을 모른다고 하는 게 옳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잘 모르듯이,
우리가 지금 생명의 신비를 잘 모르듯이
하나님의 나라, 통치, 그 능력을 모른다.
다만 부분적으로 그것을 경험하며,
그 경험의 언어적 진술와 역사 과정이 곧 성서이다.
정의와 평화도 하나님 나라 속성의 한 부분이지
그것으로 요약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컨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인 예수의 부활을 정의와 평화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나는 부활을 은폐된 하나님의 궁극적인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생명이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살며,
신자들에게 그런 기다림의 영성을 가르치고 싶다.
물론 정의와 평화가 중요한 개념임에는 틀림없다.
나도 지금 개인적으로
<대구경북 목회자 정의평화 실천협의회> 공동의장으로 활동(?)한다.
조 목사도 서울 지역에서 이 조직에서 활동하시는 것으로 안다.
한민족의 정의와 평화,
한국교회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최선을 다 하려고 한다.
여기서도 문제는 무엇이 정의와 평화인가에 대한 생각이
약간씩, 또는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무엇이 정의이며, 평화라는 말인가?
그것의 사전적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양극화를 비롯해서 군사문화에 이르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런 문제에서는
나도 조 목사 못지 않게 심각하게 생각하며,
조 목사가 한국에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20년전 민주항쟁 때부터 그 프락시스에 나름으로 참여했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과학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평화를 우리가 생산해내는 것으로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조 목사는 주한 미군이야말로
한반도 평화를 가록막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과연 그런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적로는 미군이 한반도를 떠났으면 좋겠다.
그러나 당장 그렇게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북한 사이에
얽히고 얽힌 국제역학관계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게 별로 없다.
다만 당장의 미군철수가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낭만적인 생각이 아닐는지.
미군철수로 북한이 공연한 불장난을 할 수도 있고,
중국과 러시아가 공연한 트집을 잡을 수도 있다.
현재 미군이 일정한 균형추 역할을 하는 건 아닐는지.
오히려 미군주둔이 미봉책이지만 현재 평화의 구실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조금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국제정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런 주제를 더 이상 말하기 싫다.
그래서 설교자로서 나는 강단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조 목사가 이런 문제에서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긴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크게 차이가 없을 것이다.
조 목사나 나나 모두 성경과 신학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강단에서는 정치와 경제에 관한 주제를 전혀 언급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고
문제를 제기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위의 김경태 님이 그런 쪽의 시각을 갖고 계신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하나님 나라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지 구체적인 사안까지,
그러니까 전문가들 사이에도 논란이 분분한 문제까지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특히 주일공동예배 강단에서 말이다.
조 목사는 약극화를 심화시킬 게 뻔하기 때문에
미국과의 에프티에이 협상을, 체결을 반대한다고 선포하신다.
에프티에이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인 정의와 평화에 적대적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그는 어떤 신학적 근거에서 이런 확신에 이르신 것인지, 조금 궁금하다.
양극화의 주범이기 때문인가?
설교비평 글에도 밝혔지만 나도 미국 에프티에이 반대 서명에 동참했다.
그건 한국 땅에서 살아가는 지성인으로서 의지를 천명한 것이지
에프티에이가 하나님 나라와 대립한다는 확신에서 나온 행위는 아니다.
에프티에이는 노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먹고 사는 문제'일 뿐이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먹고살려는 몸부림이다.
만약 우리가 그런 대세를 거스르고도 버텨낼 힘이 있다면,
무조건 반대해도 좋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조 목사는 에프티에이로 인해서 벌어질 한국 농사의 황폐화를 걱정하시는 것 같다.
그건 에프티에이와 상관 없이 이미 그런 길로 들어선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문제도 내 영역을 벗어난다.
이런 국제무역 문제에 관해서 내가 구체적으로 언급할 내용은 별로 없어서
아주 상식적인 선에서만 말할 뿐이다.
에프티에이에 대한 호, 불호를 교회 강단에서 외치는 행위가
나에게는 평화 원리주의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말하는 중이다.
이 말은 무조건 나쁜 뜻은 아니다.
어쩌면 목사들은 그렇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
자발적 청빈을 몸소 실천해야 할지 모른다.
목사들은 앞장 서서 승용차 안타기 운동을 벌여야 할지 모른다.
목사들도 승려와 신부들처럼 철저한 무소유를 실천해야 할지 모른다.
더 나아가서 경쟁력 중심의 이 썩어빠진 공교육을 해체하기 위해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기 운동라도 벌여야하지 않겠는가.
모든 교회는 일부(상당부분의) 시설을 개조해서
노숙자를 위한 쉼터로 제공해야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실천해야 할 것들은 끝이 없다.
내가 지금 에프티에이의 문제점을 호도하기 위해서
다른 문제를 끌어들이는 게 아니다.
조 목사님은 어떤 근거에서
에프티에이를 하나님 나라에 대립하는 것으로,
가장 적대적인 것으로 판단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게 그렇게 흑백으로 구분되는 사안인가?
나는 목사들이 발언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쉽지는 않다.
이 세상의 일들은 그렇게 간단히 재단될 수 없이
복잡하게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학교에서 실시되고 있는 강의 평가제를
중등교육 현장에도 실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은데,
이에 대해서 목사는 할 말이 없다.
물론 매사에 침묵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설교에서 비교적 구체적으로 거론하는 문제는
동성애자들과 외국노동자들을 비롯한 소수자들 문제이다.
동성애자는 죄가 아니라고 성적 취향에 불과하며,
외국노동자들의 삶을 우리와 동일하게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분단문제, 미군문제, 에프티에이 문제도 물론 언급할 때가 있다.
다만 그런 것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하는지에 대해서 언급하지
반대, 찬성으로 내 의사를 표명하지 않는다.
이라크 파병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으로는 반대하지만
대통령의 정치적 판단에 의한 것으로 보고,
판단을 유보하는 실정이다.
말이 자꾸 길어졌다.
우리는 어떻게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판단할 수 있을까.
그건 각자의 영적 시각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것의 결과는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나는 지금이 바로 침묵할 때라고 생각한다.
특히 주일공동예배의 설교에서...
(쉽께 쓰려고 높임말이 아니라 평문으로 썼음)
조 목사님은 반론 글 앞 부분(설교와 목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설교자는 예수님을 따라 평화의 원리에 입각해서 이상에 가까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성서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이자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였고 이 하나님 나라는 정의와 평화로 요약된다. 설교자는 이 땅에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가 종말론적으로 실현되었음을 선포하고 자신의 목회와 삶에서 그렇게 실천하면 된다. 목사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근본 원리를 선포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각자의 삶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하면 된다.
위의 글은 "평화 원리주의자"라는 나의 지적에 대한 반론이었다.
조 목사님은 내가 말한 원리를 '평화의 원리',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근본원리'라고 받아들이셨는데,
약간 핀트가 어긋난 것 같다.
내가 말한 원리는 어떤 경향성을 가리킨다.
즉 조 목사님이 샬롬 개념을 규범적으로 적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쨌든지 바로 위에서 인용한 조 목사님의 진술은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똑같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걸 목회에서 실천하면 된다.
조 목사님도 그렇게 하고, 나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차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조 목사님은 원리로 생각하는 반면에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조 목사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정의와 평화로 요약했다.
옳은 말이지만 정확한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정의와 평화에만 갇히는가.
사랑, 기쁨, 자유도 역시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며 개념이다.
더 정확하게는,
아직도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의 힘을 모른다고 하는 게 옳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잘 모르듯이,
우리가 지금 생명의 신비를 잘 모르듯이
하나님의 나라, 통치, 그 능력을 모른다.
다만 부분적으로 그것을 경험하며,
그 경험의 언어적 진술와 역사 과정이 곧 성서이다.
정의와 평화도 하나님 나라 속성의 한 부분이지
그것으로 요약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컨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인 예수의 부활을 정의와 평화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나는 부활을 은폐된 하나님의 궁극적인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생명이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살며,
신자들에게 그런 기다림의 영성을 가르치고 싶다.
물론 정의와 평화가 중요한 개념임에는 틀림없다.
나도 지금 개인적으로
<대구경북 목회자 정의평화 실천협의회> 공동의장으로 활동(?)한다.
조 목사도 서울 지역에서 이 조직에서 활동하시는 것으로 안다.
한민족의 정의와 평화,
한국교회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최선을 다 하려고 한다.
여기서도 문제는 무엇이 정의와 평화인가에 대한 생각이
약간씩, 또는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무엇이 정의이며, 평화라는 말인가?
그것의 사전적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양극화를 비롯해서 군사문화에 이르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런 문제에서는
나도 조 목사 못지 않게 심각하게 생각하며,
조 목사가 한국에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20년전 민주항쟁 때부터 그 프락시스에 나름으로 참여했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과학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평화를 우리가 생산해내는 것으로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조 목사는 주한 미군이야말로
한반도 평화를 가록막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과연 그런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적로는 미군이 한반도를 떠났으면 좋겠다.
그러나 당장 그렇게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북한 사이에
얽히고 얽힌 국제역학관계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게 별로 없다.
다만 당장의 미군철수가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낭만적인 생각이 아닐는지.
미군철수로 북한이 공연한 불장난을 할 수도 있고,
중국과 러시아가 공연한 트집을 잡을 수도 있다.
현재 미군이 일정한 균형추 역할을 하는 건 아닐는지.
오히려 미군주둔이 미봉책이지만 현재 평화의 구실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조금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국제정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런 주제를 더 이상 말하기 싫다.
그래서 설교자로서 나는 강단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조 목사가 이런 문제에서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긴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크게 차이가 없을 것이다.
조 목사나 나나 모두 성경과 신학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강단에서는 정치와 경제에 관한 주제를 전혀 언급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고
문제를 제기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위의 김경태 님이 그런 쪽의 시각을 갖고 계신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하나님 나라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지 구체적인 사안까지,
그러니까 전문가들 사이에도 논란이 분분한 문제까지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특히 주일공동예배 강단에서 말이다.
조 목사는 약극화를 심화시킬 게 뻔하기 때문에
미국과의 에프티에이 협상을, 체결을 반대한다고 선포하신다.
에프티에이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인 정의와 평화에 적대적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그는 어떤 신학적 근거에서 이런 확신에 이르신 것인지, 조금 궁금하다.
양극화의 주범이기 때문인가?
설교비평 글에도 밝혔지만 나도 미국 에프티에이 반대 서명에 동참했다.
그건 한국 땅에서 살아가는 지성인으로서 의지를 천명한 것이지
에프티에이가 하나님 나라와 대립한다는 확신에서 나온 행위는 아니다.
에프티에이는 노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먹고 사는 문제'일 뿐이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먹고살려는 몸부림이다.
만약 우리가 그런 대세를 거스르고도 버텨낼 힘이 있다면,
무조건 반대해도 좋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조 목사는 에프티에이로 인해서 벌어질 한국 농사의 황폐화를 걱정하시는 것 같다.
그건 에프티에이와 상관 없이 이미 그런 길로 들어선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문제도 내 영역을 벗어난다.
이런 국제무역 문제에 관해서 내가 구체적으로 언급할 내용은 별로 없어서
아주 상식적인 선에서만 말할 뿐이다.
에프티에이에 대한 호, 불호를 교회 강단에서 외치는 행위가
나에게는 평화 원리주의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말하는 중이다.
이 말은 무조건 나쁜 뜻은 아니다.
어쩌면 목사들은 그렇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
자발적 청빈을 몸소 실천해야 할지 모른다.
목사들은 앞장 서서 승용차 안타기 운동을 벌여야 할지 모른다.
목사들도 승려와 신부들처럼 철저한 무소유를 실천해야 할지 모른다.
더 나아가서 경쟁력 중심의 이 썩어빠진 공교육을 해체하기 위해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기 운동라도 벌여야하지 않겠는가.
모든 교회는 일부(상당부분의) 시설을 개조해서
노숙자를 위한 쉼터로 제공해야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실천해야 할 것들은 끝이 없다.
내가 지금 에프티에이의 문제점을 호도하기 위해서
다른 문제를 끌어들이는 게 아니다.
조 목사님은 어떤 근거에서
에프티에이를 하나님 나라에 대립하는 것으로,
가장 적대적인 것으로 판단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게 그렇게 흑백으로 구분되는 사안인가?
나는 목사들이 발언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쉽지는 않다.
이 세상의 일들은 그렇게 간단히 재단될 수 없이
복잡하게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학교에서 실시되고 있는 강의 평가제를
중등교육 현장에도 실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은데,
이에 대해서 목사는 할 말이 없다.
물론 매사에 침묵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설교에서 비교적 구체적으로 거론하는 문제는
동성애자들과 외국노동자들을 비롯한 소수자들 문제이다.
동성애자는 죄가 아니라고 성적 취향에 불과하며,
외국노동자들의 삶을 우리와 동일하게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분단문제, 미군문제, 에프티에이 문제도 물론 언급할 때가 있다.
다만 그런 것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하는지에 대해서 언급하지
반대, 찬성으로 내 의사를 표명하지 않는다.
이라크 파병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으로는 반대하지만
대통령의 정치적 판단에 의한 것으로 보고,
판단을 유보하는 실정이다.
말이 자꾸 길어졌다.
우리는 어떻게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판단할 수 있을까.
그건 각자의 영적 시각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것의 결과는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나는 지금이 바로 침묵할 때라고 생각한다.
특히 주일공동예배의 설교에서...
(쉽께 쓰려고 높임말이 아니라 평문으로 썼음)
2007.06.01 22:43:04
자꾸 그리고 감히 정목사님께 토를 다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정목사님의 논리대로라면 목사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강단에선 침묵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도대체 목사가 강단에서 어느정도 말해야 하고, 어느 정도까지는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겁니까? 결국 개인의 영성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다는 말씀이라면 조목사님에 대한 정목사님의 비판은 상당부분 잘못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정목사님이 각자의 영적 시각에 따라 강단에서 하신 조목사님의 설교내용을 문제삼았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침묵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해야만 합니다. 때로는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하고 때로는 반대하고 찬성하기도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면에서 이 시대에 향린교회나 조목사님의 설교의 역할은 대단히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모든 교회나 설교자의 모델은 아니겠지만 정치와 사회전반에 걸쳐 성경의 말씀을 해석해 낸 바람직한 한 표본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저는, 자신의 생각은 이렇지만 침묵하고 역사에 맡기는 영성보다는 조금 극단일 수있지만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욕을 당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또는 제 삼의 반응을 일으키더라도 시대를 읽으면서 해석해 낸 성경의 말씀을 선포하는 - 결단코 침묵하지 않고 - 영성이 더 좋아보입니다.
2007.06.02 00:11:13
김경태 님,
'죄송'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진짜루요.
강단에서 행해지는 정치경제 발언의 수위는
개인의 영성에 따랄 수밖에 없다는 저의 진술에 근거해서
저의 설교비평이 모순이라고 말씀하신 거, 맞지요?
옳은 지적이군요.
나는 내 영적 시각으로 그분의 설교를 판단했을 뿐입니다.
내 비평이 옳은지 아닌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지요.
그건 성령의 몫, 다르게 말하면 역사의 몫이겠지요.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한 마디만 더.
어떤 설교자는 강단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씹더군요.
빨갱이라는 말도 나올 걸요?
어떤 설교자는 에프티에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설교도 합니다.
반북 친미 설교는 단골메뉴구요.
이라크 파병에 찬성하는 설교도 많아요.
이런 이슈를 찬성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하는 설교가 괜찮다는 말씀이시지요?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설교하기 힘들더군요.
아마 내 신앙이 실질은 없고 순전히 관념에 떨어져버렸나 봅니다.
그래도 뭐, 즐겁게 설교하고, 글 쓰고, 비평하고, 그렇게 해볼랍니다.
좋은 밤이 되소서.
'죄송'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진짜루요.
강단에서 행해지는 정치경제 발언의 수위는
개인의 영성에 따랄 수밖에 없다는 저의 진술에 근거해서
저의 설교비평이 모순이라고 말씀하신 거, 맞지요?
옳은 지적이군요.
나는 내 영적 시각으로 그분의 설교를 판단했을 뿐입니다.
내 비평이 옳은지 아닌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지요.
그건 성령의 몫, 다르게 말하면 역사의 몫이겠지요.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한 마디만 더.
어떤 설교자는 강단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씹더군요.
빨갱이라는 말도 나올 걸요?
어떤 설교자는 에프티에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설교도 합니다.
반북 친미 설교는 단골메뉴구요.
이라크 파병에 찬성하는 설교도 많아요.
이런 이슈를 찬성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하는 설교가 괜찮다는 말씀이시지요?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설교하기 힘들더군요.
아마 내 신앙이 실질은 없고 순전히 관념에 떨어져버렸나 봅니다.
그래도 뭐, 즐겁게 설교하고, 글 쓰고, 비평하고, 그렇게 해볼랍니다.
좋은 밤이 되소서.
2007.06.02 08:12:33
정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주일공동예배의 설교는 오직 케리그마에 집중되어야 하는데,
과연 조 목사님의 설교가 그런 자리에 섰는가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지요.
케리그마는 예수를 통해서, 또는 예수에게서 일어난 하나님 나라를 그 내용으로 합니다.
물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왜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유에 의해서 주어지는,
또는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
이말에 저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조목사님과 정목사님의 다름이 여기서 출발되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조목사님의 하나님나라를 우리가 만들어낼수 있는 어떤 상태 라고고 생각하는것과
과연 그럴까 라는 정목사님의 의문말입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은 하나에서 부터 열까지 다 할려고 하는 경향이 아주 짙어보입니다.
정치,경제 문화 ...기타등등 외에도
개인적인 취향까지 어떻게 해볼려고 하더군요.
설교시간에 개인적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입장을 바꿔야
하나님의 나라가 올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광경은
제생각엔 신자들의 영성을 결국 암담하게 할뿐이라는걸
눈치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겁니다.
정치적노선이 바뀌면 신자들도 그들의 생각을 또 바꿔야 할테니까요..
이런논리대로 라면 ...
정치적으로는
대통령을 잘 뽑으면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되는거 아닌가요??
같은 정치적입장에 선 사람을 잘 뽑으면 하나님나라가 오던가요??
정치는 정치인이하고 ,자연과학하는 사람은 그길을 가면 돼는 거예요
설교자들의 핵심은 이것저것 참견하지말고
옳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해석하는 겁니다.
이것만 평생하기에도 모자를 시간들 아닌가요??
다른것 기웃거릴 여유가 있으신지요??
정말 하나님 말씀에 대면하신 분들이라면 ..이럴시간 없을것 같은데요...
...스스로 전지전능자인 하나님의 역할을 다 하려고 하는지 알수가 없어요..
설교자들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만 천착하자는 말은
삶과 신앙을 따로 보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삶은 신자들 스스로 살게 하시고,, 신앙은 성령님이 이끌게 하는것이 옳은거예요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신자들에게나 성령에게나 관여하지 못하는 겁니다..
자신들의 일이 뭔지 까먹는 설교자들은 신자들에게나 성령님에게나 오버하는겁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앞에서 말입니다...
신자들의 삶을 바꿔볼려고 피곤해진 설교자들때문에 성도들도 피곤해진 사람들
많아요....9시뉴스에서나 들어야할 것을 교회에서 또들어야 합니까??
기본적으로 복음도 GOOG NEWS니까 뉴스긴 뉴스네요 ㅋㅋㅋ
결론적으로
교회에선 다른 소리가 나야한다고 생각해요
세상에선 들어볼수 없는 소리가 있는곳이 교회입니다...
"주일공동예배의 설교는 오직 케리그마에 집중되어야 하는데,
과연 조 목사님의 설교가 그런 자리에 섰는가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지요.
케리그마는 예수를 통해서, 또는 예수에게서 일어난 하나님 나라를 그 내용으로 합니다.
물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왜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유에 의해서 주어지는,
또는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
이말에 저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조목사님과 정목사님의 다름이 여기서 출발되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조목사님의 하나님나라를 우리가 만들어낼수 있는 어떤 상태 라고고 생각하는것과
과연 그럴까 라는 정목사님의 의문말입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은 하나에서 부터 열까지 다 할려고 하는 경향이 아주 짙어보입니다.
정치,경제 문화 ...기타등등 외에도
개인적인 취향까지 어떻게 해볼려고 하더군요.
설교시간에 개인적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입장을 바꿔야
하나님의 나라가 올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광경은
제생각엔 신자들의 영성을 결국 암담하게 할뿐이라는걸
눈치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겁니다.
정치적노선이 바뀌면 신자들도 그들의 생각을 또 바꿔야 할테니까요..
이런논리대로 라면 ...
정치적으로는
대통령을 잘 뽑으면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되는거 아닌가요??
같은 정치적입장에 선 사람을 잘 뽑으면 하나님나라가 오던가요??
정치는 정치인이하고 ,자연과학하는 사람은 그길을 가면 돼는 거예요
설교자들의 핵심은 이것저것 참견하지말고
옳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해석하는 겁니다.
이것만 평생하기에도 모자를 시간들 아닌가요??
다른것 기웃거릴 여유가 있으신지요??
정말 하나님 말씀에 대면하신 분들이라면 ..이럴시간 없을것 같은데요...
...스스로 전지전능자인 하나님의 역할을 다 하려고 하는지 알수가 없어요..
설교자들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만 천착하자는 말은
삶과 신앙을 따로 보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삶은 신자들 스스로 살게 하시고,, 신앙은 성령님이 이끌게 하는것이 옳은거예요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신자들에게나 성령에게나 관여하지 못하는 겁니다..
자신들의 일이 뭔지 까먹는 설교자들은 신자들에게나 성령님에게나 오버하는겁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앞에서 말입니다...
신자들의 삶을 바꿔볼려고 피곤해진 설교자들때문에 성도들도 피곤해진 사람들
많아요....9시뉴스에서나 들어야할 것을 교회에서 또들어야 합니까??
기본적으로 복음도 GOOG NEWS니까 뉴스긴 뉴스네요 ㅋㅋㅋ
결론적으로
교회에선 다른 소리가 나야한다고 생각해요
세상에선 들어볼수 없는 소리가 있는곳이 교회입니다...
2007.06.02 08:24:11
살군님 ^^;
‘설교가 목회자의 세계관 아래 놓여있다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설교는 ‘설교자의 생각, 의견, 말’입니다.
다만, 기독교의 전통 안에서 용납되는 생각, 의견, 말인지를
질문할 수 있고, 질문해야 하겠지요.
설교를 현실에 대한 목회자의 의견표명의 도구로 사용하면서도,
정작 사회현실에 대한 인식능력은 일반인의 상식수준에도 못미치고,
나아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주장하는 신성모독까지,,,
제발 설교자들이 사회와 역사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마시길,, ^^
‘설교가 목회자의 세계관 아래 놓여있다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설교는 ‘설교자의 생각, 의견, 말’입니다.
다만, 기독교의 전통 안에서 용납되는 생각, 의견, 말인지를
질문할 수 있고, 질문해야 하겠지요.
설교를 현실에 대한 목회자의 의견표명의 도구로 사용하면서도,
정작 사회현실에 대한 인식능력은 일반인의 상식수준에도 못미치고,
나아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주장하는 신성모독까지,,,
제발 설교자들이 사회와 역사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마시길,, ^^
2007.06.02 08:32:26
각론상으로는 조헌정 목사님 말씀이 옳다고 봅니다. 설교가 마땅히 세상사에 관심을 표명해야 합니다. 교회가 가난하고 병들고 억압받는 자를 위해 일하고, 불의를 위해 싸우고 사회 곳곳에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 애쓰고 수고함이, 어찌 하나님 나라의 일과 무관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하나님 나라는 이들 너머에 있다고 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여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기에 있는 것도 아닌, 너희 가운데 있다"는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들의 총합보다 더 크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향린교회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교회들도, 향린교회가 추구하는 최우선적인 하나님 나라의 사역과 또 조 목사님의 설교를 따라가야 하겠지요. 그 좋은 하나님 나라 사역과 설교를 몇 몇 교회만 하게 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리고 이왕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조직적이고 전문적으로 하려면, 교회별로 전문화된 사역 및 설교자가 보다 세분화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의 각 이슈에 대해 전문화된 교회 및 전문화된 설교자가 필요할 것입니다. - 양극화문제, FTA, 환경문제, 식생활과 생명문제, 아프리카 기아문제, 북한 어린이문제, 남북통일 문제, 정신대 문제, 미군철수 문제, 세계평화 문제, 남녀평등 문제, 장애인 문제, 사회적 소수자 차별문제, 대기업 지배주주 문제, KTX 노동자 문제, 사교육문제...이런 문제 거리는 끝이 없겠군요.
이것이 억지 주장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실로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이 막중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과 설교의 주제를, 한 교회, 한 목사가 모두 다 감당하고자 한다면, 그야말로 죽도 밥도 안 되는 시늉거리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런 전문가들로 채워져야 하고, 장차 목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정치, 사회, 경제 경영, 법...각종 영역의 박사급이 아니고서는 신학교 입학조차 허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전문가도 아닌 목사들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결국 저는 위에서 말한 사역들은, 교회가 직접 나서서 해야 할 최우선적인 사역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보다는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이 시민의 자격으로, 정치인의 자격으로, 경제학자나 사회학자의 자격으로, 사회사업가의 자격으로, 의료인의 자격으로, 환경과학자의 자격으로 등등, 그들이 나서서 해야 할 사역이라고 봅니다. 신학자, 목회자들이 이를 위해 신학적, 성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는 곳이라는 조헌정 목사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런 일들을 직접 나서서 하려고 하는 것은 오버하는 것이 아닐까요?
결국은 세상 학교 못 믿으니 교회가 직접 학교를 하자. 세상 양로원 못 믿으니 교회가 직접 양로원하자, 세상 병원 못 믿으니 교회가 직접 병원하자, 세상 정당 못 믿으니 교회가 직접 정당하자, 세상 농산물 못 믿으니 교회가 직접 농사짓자, 세상 기업 못 믿으니 교회가 직접 기업하자...는 식으로 가는 게 차라리 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얼마나 끔직하게 될 것인지, 그로인해 교회가 얼마나 피폐하게 될지는 불을 보듯이 명확합니다. 이보다는 이런 일들을 그리스도인 시민들이 잘 할 수 있도록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마땅히 교회의 할 일이지, 교회가 아예 직접 나서서 하려고 한다면 교회가 오버하는 거라고 봅니다. 그래도 교회가 굳이 이와 관련된 일을 하고자 한다면, 특별 세미나를 열어서 하든지, 별도의 부설 기관을 두어서 하게 하든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왜 걸 굳이 설교를 통해 하려고 합니까? 그나마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면 100분 토론식 설교를 하시든지...
그렇지 않다면, 향린교회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교회들도, 향린교회가 추구하는 최우선적인 하나님 나라의 사역과 또 조 목사님의 설교를 따라가야 하겠지요. 그 좋은 하나님 나라 사역과 설교를 몇 몇 교회만 하게 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리고 이왕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조직적이고 전문적으로 하려면, 교회별로 전문화된 사역 및 설교자가 보다 세분화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의 각 이슈에 대해 전문화된 교회 및 전문화된 설교자가 필요할 것입니다. - 양극화문제, FTA, 환경문제, 식생활과 생명문제, 아프리카 기아문제, 북한 어린이문제, 남북통일 문제, 정신대 문제, 미군철수 문제, 세계평화 문제, 남녀평등 문제, 장애인 문제, 사회적 소수자 차별문제, 대기업 지배주주 문제, KTX 노동자 문제, 사교육문제...이런 문제 거리는 끝이 없겠군요.
이것이 억지 주장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실로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이 막중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과 설교의 주제를, 한 교회, 한 목사가 모두 다 감당하고자 한다면, 그야말로 죽도 밥도 안 되는 시늉거리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런 전문가들로 채워져야 하고, 장차 목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정치, 사회, 경제 경영, 법...각종 영역의 박사급이 아니고서는 신학교 입학조차 허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전문가도 아닌 목사들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결국 저는 위에서 말한 사역들은, 교회가 직접 나서서 해야 할 최우선적인 사역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보다는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이 시민의 자격으로, 정치인의 자격으로, 경제학자나 사회학자의 자격으로, 사회사업가의 자격으로, 의료인의 자격으로, 환경과학자의 자격으로 등등, 그들이 나서서 해야 할 사역이라고 봅니다. 신학자, 목회자들이 이를 위해 신학적, 성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는 곳이라는 조헌정 목사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런 일들을 직접 나서서 하려고 하는 것은 오버하는 것이 아닐까요?
결국은 세상 학교 못 믿으니 교회가 직접 학교를 하자. 세상 양로원 못 믿으니 교회가 직접 양로원하자, 세상 병원 못 믿으니 교회가 직접 병원하자, 세상 정당 못 믿으니 교회가 직접 정당하자, 세상 농산물 못 믿으니 교회가 직접 농사짓자, 세상 기업 못 믿으니 교회가 직접 기업하자...는 식으로 가는 게 차라리 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얼마나 끔직하게 될 것인지, 그로인해 교회가 얼마나 피폐하게 될지는 불을 보듯이 명확합니다. 이보다는 이런 일들을 그리스도인 시민들이 잘 할 수 있도록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마땅히 교회의 할 일이지, 교회가 아예 직접 나서서 하려고 한다면 교회가 오버하는 거라고 봅니다. 그래도 교회가 굳이 이와 관련된 일을 하고자 한다면, 특별 세미나를 열어서 하든지, 별도의 부설 기관을 두어서 하게 하든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왜 걸 굳이 설교를 통해 하려고 합니까? 그나마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면 100분 토론식 설교를 하시든지...
2007.06.02 21:16:55
.
정용섭 목사님의 재반론 가운데 좀 거시기 한 부분이 있어서 나의 소회를 밝힌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는 의미로.
"FTA 반대집회에 참가했던 어떤 택시 기사 분이 분신하신 적이 있습니다.
죽음을 선택한 그분의 심정을 저는 감히 평가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일에 생명을 바칠 수밖에 만든 어떤 악한 힘이
그에게 작용한 거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드는 건 분명합니다.
생명을 던질 만한 사안이 아닌 것에 생명을 걸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악한 힘의 작용일 테니까 말입니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직감적으로 “정말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허세욱’이라는 택시 기사에 대한 자료를 볼 수 있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로 허 씨는 53 년생으로 중학교도 졸업 못하고 시골에서 올라와 온갖 일을 하며 혼자 사는 월 120만원 수입의 택시기운전사였다.
철거되기 전 봉천동 달동네에 살다가 한국에서 바로 내가 하던 일, 지역의 빈민 활동가를 만나서 비로소 세상에 대한 눈이 떠져 자기를 벋어나 사회와 이웃을 볼 줄 알게 되었고 그 후부터 시민 단체, 민노당 등에 가입하여 회비를 꼬박 꼬박 내며 몸으로 하는 일을 열심히 하던 사람이었다.
즉 풀뿌리 같고 무지렁이 같은 민초가 깨어나는 전형적인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왜 분신을 했어야 했나?
우선 나는 한국의 현실과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자세한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은 모른다.
나는 내가 손가락 하나도 까딱 할 수 없는 한국의 현실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무책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세욱 씨의 분신에 대한 정 목사님의 언급은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살리게 해주었다.
91년으로 기억되는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시대였다.
명지대생 강경대 군이 백골단에 타살된 직후 계속되는 학생들의 분신자살이 이어졌다.
그 때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글을 썼고 그 글은 마치 심판의 게임종료를 알리는 호르라기소리처럼 모든 상황을 끝냈다.
게임의 결과는 한 마디로 민주진영이 대패하고 노태우 정권이 승기를 잡았었다.
김지하는 그동안 자신이 쓴 글과 행동에 의하여 일깨어진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갑자기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고 일갈을 해서 그들을 어리둥절 하게 만들었다.
싸워나가야 할 세상이 아무리 강고하고, 죽음이 그에 저항하는 강력한 수단이라고 해도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글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었다.
그래,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그 생명이 나이가 들고, 늙어가고 마지막 죽음을 맞을 때 자신의 삶에 대해서 혹 어떤 후회를 하게 되더라도.
혹은 젊어서 혈기에 왕성하던 그 생명이 세상사에 찌들어 가면서 눈에서 점점 생기게 잃어가게 되더라도.
살아볼 수 있다는 것, 기회를 가져볼 수 있다는 것은 소중한 것이다.
한번 뿐인 삶을 죽음에 던지게 만드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꽃 같은 목숨을 던져서 역사의 발전을, 자신이 사랑하고 기대하고 꿈꾸며 바라던 것을 위해 바친 것이다.
누가 그것을 강요하는가?
그토록 소중한 생명, 그 뜨거운 생명, 그들은 약자가 가진 마지막 무기를 내놓은 것이었다.
그들에게도 생명은 소중한 것이었을 것이다. 생명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생명을 빼앗는 것들에 대항하기 위해 그는 죽음을 선택했을 것이다. 슬픈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사는 항상 피를 요구했었다.
역사가 인간의 피 흘림으로 발전했던가? 성령의 역사로 발전했던가? 냉정하게 던져 보고 싶은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김지하의 일갈은 골방에서 신문을 보면서 얻어맞는 정신적 폭력이었다.
10 년 후에 김지하는 자신이 그 때 많이 아파서 정신과의의 상담을 받을 정도였다고 했지만 그가 준 상처는 너무나 크다.
그러나 당시 그의 글은 많은 이들에게 배반감과 모독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죽음의 굿판'을 벌인 군사독재와 재벌에게 시인이 면죄부를 준 까닭이며 모순에 저항함에 대한 모독이었기 때문이다.
김지하는 모든 생명이 다 같이 존귀하다는 것만 이야기 했지 그 순간 그 모든 생명을 다 같이 존귀하게 여기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회와 자연의 시스템이 있다는 상식적인 사실을 외면했다.
김지하는 자신의 생명사상의 근거들 가운데 하나로 최제우의 동학사상을 들었었다.
그렇다면 동학혁명이 일으킨 죽음의 굿판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김지하는 동학교도들의 폭력적인 투쟁의 근거인 동학사상을 근거로 생명사상을 외치고 있는 셈이었다.
허세욱 씨의 죽음에 대해 어떤 이들은 FTA 때문에 분신자살 까지 할 일이 무엇이 있나?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머릿속에는 내 생각으로 100% 동의 할 수 없는 생각들, 혹은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들로 가득 찼는지도 모른다.
아니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민노당식 사고방식에 세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이미 그는 충분히 현실에 절망해 있었고 FTA로 인해 앞으로 더욱 무섭게 변화될 세상에서 살아 나갈 힘을 잃었던 것이 아닐까?
정용섭 목사님의 재반론 가운데 좀 거시기 한 부분이 있어서 나의 소회를 밝힌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는 의미로.
"FTA 반대집회에 참가했던 어떤 택시 기사 분이 분신하신 적이 있습니다.
죽음을 선택한 그분의 심정을 저는 감히 평가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일에 생명을 바칠 수밖에 만든 어떤 악한 힘이
그에게 작용한 거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드는 건 분명합니다.
생명을 던질 만한 사안이 아닌 것에 생명을 걸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악한 힘의 작용일 테니까 말입니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직감적으로 “정말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허세욱’이라는 택시 기사에 대한 자료를 볼 수 있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로 허 씨는 53 년생으로 중학교도 졸업 못하고 시골에서 올라와 온갖 일을 하며 혼자 사는 월 120만원 수입의 택시기운전사였다.
철거되기 전 봉천동 달동네에 살다가 한국에서 바로 내가 하던 일, 지역의 빈민 활동가를 만나서 비로소 세상에 대한 눈이 떠져 자기를 벋어나 사회와 이웃을 볼 줄 알게 되었고 그 후부터 시민 단체, 민노당 등에 가입하여 회비를 꼬박 꼬박 내며 몸으로 하는 일을 열심히 하던 사람이었다.
즉 풀뿌리 같고 무지렁이 같은 민초가 깨어나는 전형적인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왜 분신을 했어야 했나?
우선 나는 한국의 현실과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자세한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은 모른다.
나는 내가 손가락 하나도 까딱 할 수 없는 한국의 현실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무책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세욱 씨의 분신에 대한 정 목사님의 언급은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살리게 해주었다.
91년으로 기억되는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시대였다.
명지대생 강경대 군이 백골단에 타살된 직후 계속되는 학생들의 분신자살이 이어졌다.
그 때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글을 썼고 그 글은 마치 심판의 게임종료를 알리는 호르라기소리처럼 모든 상황을 끝냈다.
게임의 결과는 한 마디로 민주진영이 대패하고 노태우 정권이 승기를 잡았었다.
김지하는 그동안 자신이 쓴 글과 행동에 의하여 일깨어진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갑자기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고 일갈을 해서 그들을 어리둥절 하게 만들었다.
싸워나가야 할 세상이 아무리 강고하고, 죽음이 그에 저항하는 강력한 수단이라고 해도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글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었다.
그래,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그 생명이 나이가 들고, 늙어가고 마지막 죽음을 맞을 때 자신의 삶에 대해서 혹 어떤 후회를 하게 되더라도.
혹은 젊어서 혈기에 왕성하던 그 생명이 세상사에 찌들어 가면서 눈에서 점점 생기게 잃어가게 되더라도.
살아볼 수 있다는 것, 기회를 가져볼 수 있다는 것은 소중한 것이다.
한번 뿐인 삶을 죽음에 던지게 만드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꽃 같은 목숨을 던져서 역사의 발전을, 자신이 사랑하고 기대하고 꿈꾸며 바라던 것을 위해 바친 것이다.
누가 그것을 강요하는가?
그토록 소중한 생명, 그 뜨거운 생명, 그들은 약자가 가진 마지막 무기를 내놓은 것이었다.
그들에게도 생명은 소중한 것이었을 것이다. 생명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생명을 빼앗는 것들에 대항하기 위해 그는 죽음을 선택했을 것이다. 슬픈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사는 항상 피를 요구했었다.
역사가 인간의 피 흘림으로 발전했던가? 성령의 역사로 발전했던가? 냉정하게 던져 보고 싶은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김지하의 일갈은 골방에서 신문을 보면서 얻어맞는 정신적 폭력이었다.
10 년 후에 김지하는 자신이 그 때 많이 아파서 정신과의의 상담을 받을 정도였다고 했지만 그가 준 상처는 너무나 크다.
그러나 당시 그의 글은 많은 이들에게 배반감과 모독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죽음의 굿판'을 벌인 군사독재와 재벌에게 시인이 면죄부를 준 까닭이며 모순에 저항함에 대한 모독이었기 때문이다.
김지하는 모든 생명이 다 같이 존귀하다는 것만 이야기 했지 그 순간 그 모든 생명을 다 같이 존귀하게 여기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회와 자연의 시스템이 있다는 상식적인 사실을 외면했다.
김지하는 자신의 생명사상의 근거들 가운데 하나로 최제우의 동학사상을 들었었다.
그렇다면 동학혁명이 일으킨 죽음의 굿판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김지하는 동학교도들의 폭력적인 투쟁의 근거인 동학사상을 근거로 생명사상을 외치고 있는 셈이었다.
허세욱 씨의 죽음에 대해 어떤 이들은 FTA 때문에 분신자살 까지 할 일이 무엇이 있나?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머릿속에는 내 생각으로 100% 동의 할 수 없는 생각들, 혹은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들로 가득 찼는지도 모른다.
아니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민노당식 사고방식에 세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이미 그는 충분히 현실에 절망해 있었고 FTA로 인해 앞으로 더욱 무섭게 변화될 세상에서 살아 나갈 힘을 잃었던 것이 아닐까?
2007.06.03 00:06:18
지성수 목사님이 정말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재미없게(?) 글을 쓰셨습니다.
저의 글이 지 목사님 특유의 해학을 잠시 잊게 만드신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저에게 직접 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그냥 한번 생각해볼 거리를 제공하신 거지만
뭔가 전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예, 잘 알았습니다, 하고 지나가려다가
구경꾼들을 위해서 한 마디 할까 합니다.
고 허세욱 씨의 절망감을 제가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지 목사님이 지적한 저의 글은
지 목사님이 이미 눈치 채고 있겠지만
허세욱 씨가 아니라 반에프티에이 집행부를 향한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 앞에서 너무 화가 나서 견디기 힘들었지요.
제가 과문한 탓인지
집행부가 고 허세욱 씨의 죽음에 큰 책임이 있다는 사과 성명 같은 걸
발표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제가 집행부의 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했을겁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집행부는 허세욱 씨의 장례식을 두고도
가족들과 싱갱이를 벌였더군요.
저는 목사들이 사회운동을 너무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게
좀 불안합니다.
반에프티에이 집행부에도 아마 목사들이 참여한 것으로 아는데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군사독재 이후에도 여전히 선악이원론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접근하는 게 말입니다.
위에서 지 목사님이 역사발전과 피, 또는 성령의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진보운동에 단지 이름만 걸어놓거나
떠밀려서 조금 활동했을 뿐이기 때문에
역사발전에 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할 게 별로 없습니다.
피의 역사가 무엇일까요?
혹시 분신 같은 행위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건 아니겠지요.
절망감의 극단적인 표현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냥 역사발전에 대한 현상적 분석이겠지요.
천성적으로 유약해빠진 저는 역사발전의 동기가 피라고 말하기가 겁납니다.
기독교 역사에도 결과적으로 순교의 피가 뿌려지기는 했지만
기독교인들이 교회역사의 발전을 위해서 순교를 수단으로 사용하지는 않았겠지요.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마음에 남는군요.
<이미 그는 충분히 현실에 절망해 있었고 FTA로 인해 앞으로 더욱 무섭게 변화될 세상에서 살아 나갈 힘을 잃었던 것이 아닐까?>
한 영혼을 깊이에서 들여다보시는 목사님의 영성이 느껴집니다.
다만 저는 FTA 체제가 그렇게 절망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집행부가 왜 그에게 알리지 않았는지가 궁금하네요.
나쁘게 말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운동사업을 위해서
사태를 침소봉대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저는 이렇게 남의 순수성을 의심하는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오늘 귀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좋은 주일을...
아니 처음으로 재미없게(?) 글을 쓰셨습니다.
저의 글이 지 목사님 특유의 해학을 잠시 잊게 만드신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저에게 직접 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그냥 한번 생각해볼 거리를 제공하신 거지만
뭔가 전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예, 잘 알았습니다, 하고 지나가려다가
구경꾼들을 위해서 한 마디 할까 합니다.
고 허세욱 씨의 절망감을 제가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지 목사님이 지적한 저의 글은
지 목사님이 이미 눈치 채고 있겠지만
허세욱 씨가 아니라 반에프티에이 집행부를 향한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 앞에서 너무 화가 나서 견디기 힘들었지요.
제가 과문한 탓인지
집행부가 고 허세욱 씨의 죽음에 큰 책임이 있다는 사과 성명 같은 걸
발표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제가 집행부의 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했을겁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집행부는 허세욱 씨의 장례식을 두고도
가족들과 싱갱이를 벌였더군요.
저는 목사들이 사회운동을 너무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게
좀 불안합니다.
반에프티에이 집행부에도 아마 목사들이 참여한 것으로 아는데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군사독재 이후에도 여전히 선악이원론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접근하는 게 말입니다.
위에서 지 목사님이 역사발전과 피, 또는 성령의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진보운동에 단지 이름만 걸어놓거나
떠밀려서 조금 활동했을 뿐이기 때문에
역사발전에 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할 게 별로 없습니다.
피의 역사가 무엇일까요?
혹시 분신 같은 행위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건 아니겠지요.
절망감의 극단적인 표현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냥 역사발전에 대한 현상적 분석이겠지요.
천성적으로 유약해빠진 저는 역사발전의 동기가 피라고 말하기가 겁납니다.
기독교 역사에도 결과적으로 순교의 피가 뿌려지기는 했지만
기독교인들이 교회역사의 발전을 위해서 순교를 수단으로 사용하지는 않았겠지요.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마음에 남는군요.
<이미 그는 충분히 현실에 절망해 있었고 FTA로 인해 앞으로 더욱 무섭게 변화될 세상에서 살아 나갈 힘을 잃었던 것이 아닐까?>
한 영혼을 깊이에서 들여다보시는 목사님의 영성이 느껴집니다.
다만 저는 FTA 체제가 그렇게 절망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집행부가 왜 그에게 알리지 않았는지가 궁금하네요.
나쁘게 말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운동사업을 위해서
사태를 침소봉대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저는 이렇게 남의 순수성을 의심하는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오늘 귀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좋은 주일을...
2007.06.03 02:14:57
좋은 의견 잘 들었습니다.
소피님 핵심을 정확히 집으셨군요.
설교자가 어떠한 접근방식(정치,경제,문화)을 통해서 결론지어진 말들을
설교시간에 청중들을 향해 설파한다는 것 자체가
어떠한 의미가 있을지 항상 의문이 듭니다.
교인들은 세상에서 듣지못하는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싶어서 교회에 온것이지
설교자의 의견을 듣고싶어서 온 것은 아니겠지요
늘오늘님
설교자의 세계관에 관해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목사님
저도 근래 목사님들이 사회적으로 접근을 하는데 무척이나 불안감을 느낍니다.
FTA 반대 사학법 반대 등의 표면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있자면
무에 중요하길래 그렇게까지 목숨을 걸어야하는가?라는 질문이 자꾸듭니다.
저도 비판적 성향이 강해서인지
사학법반대 운동같은걸 보고있자면
목회자 또한 기득권을 넘겨주지 않으려는 발버둥으로 보이는건 너무 비판적인 시각일까요?
소피님 핵심을 정확히 집으셨군요.
설교자가 어떠한 접근방식(정치,경제,문화)을 통해서 결론지어진 말들을
설교시간에 청중들을 향해 설파한다는 것 자체가
어떠한 의미가 있을지 항상 의문이 듭니다.
교인들은 세상에서 듣지못하는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싶어서 교회에 온것이지
설교자의 의견을 듣고싶어서 온 것은 아니겠지요
늘오늘님
설교자의 세계관에 관해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목사님
저도 근래 목사님들이 사회적으로 접근을 하는데 무척이나 불안감을 느낍니다.
FTA 반대 사학법 반대 등의 표면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있자면
무에 중요하길래 그렇게까지 목숨을 걸어야하는가?라는 질문이 자꾸듭니다.
저도 비판적 성향이 강해서인지
사학법반대 운동같은걸 보고있자면
목회자 또한 기득권을 넘겨주지 않으려는 발버둥으로 보이는건 너무 비판적인 시각일까요?
2007.06.03 05:30:35
정 목사님!
"그것은 분명히 악한 힘의 작용일 테니까 말입니다."
라는 말을 정 목사님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썼는데
저는 그것을 영적인 의미로 이해했군요,
역시 저도 목사긴 목사인가 봅니다.
사학법 반대나 FTA 반대나 정치적 운동은 항상 무리수를 동반 하기 마련이지요.
투쟁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정 목사님이 지적하신 전체적인 흐름을 위해서 개인이 희생되는 예는 흔히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자기희생일 때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결국 예수의 십자가 희생이 거대한 예수 운동을 만들어 냇듯이.
"그것은 분명히 악한 힘의 작용일 테니까 말입니다."
라는 말을 정 목사님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썼는데
저는 그것을 영적인 의미로 이해했군요,
역시 저도 목사긴 목사인가 봅니다.
사학법 반대나 FTA 반대나 정치적 운동은 항상 무리수를 동반 하기 마련이지요.
투쟁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정 목사님이 지적하신 전체적인 흐름을 위해서 개인이 희생되는 예는 흔히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자기희생일 때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결국 예수의 십자가 희생이 거대한 예수 운동을 만들어 냇듯이.
2007.06.03 15:21:06
비평은 참으로 어려운 작업입니다.
비평대상에 대한 전 이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설득력 있는 비평을 대하는 일이 흔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비평의 한계를 잘 인지하면서도
갈 수 밖에 없는 힘든 작업에 헌신하는
비평자의 속내를 숙고하는 일이야 말로
반론자에게 우선 필요한 태도입니다.
심지어 길 가에 흔히 구르는 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묵상해 본 다면 말이지요.
이번 재 반론이 좀 실망스럽 습니다.
이 소중한 기회에
그저 나와 우리교회를 몰라 주느냐의 관점에서 기록된 항변이라니…
과연 지성인이라 스스로 자부하는 님은 누구시고,
댁이 섬기는 교회는 어느 교회 이시길래?
자성의 기회를 이렇게 스스로 걷어차는,
님과 소속된 교회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진보라니…,
진보의 장점이 ‘열림’이 맞나요?
광화문 앞에서 기도회를 고집하는 ‘수구’와 무엇이 다른지?
날 몰라주고, 현장을 이해하지 못한 비평이라고 항변 할 여지는
그간 비평의 대상으로 스쳐간 모두가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렇듯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새삼 소중한 기회를 통해 강조하는
자칭 대표 진보라니…
건전한 ‘진보’를 독점하려는 과욕은
이쯤에서 절제 하심이...
비평대상에 대한 전 이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설득력 있는 비평을 대하는 일이 흔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비평의 한계를 잘 인지하면서도
갈 수 밖에 없는 힘든 작업에 헌신하는
비평자의 속내를 숙고하는 일이야 말로
반론자에게 우선 필요한 태도입니다.
심지어 길 가에 흔히 구르는 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묵상해 본 다면 말이지요.
이번 재 반론이 좀 실망스럽 습니다.
이 소중한 기회에
그저 나와 우리교회를 몰라 주느냐의 관점에서 기록된 항변이라니…
과연 지성인이라 스스로 자부하는 님은 누구시고,
댁이 섬기는 교회는 어느 교회 이시길래?
자성의 기회를 이렇게 스스로 걷어차는,
님과 소속된 교회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진보라니…,
진보의 장점이 ‘열림’이 맞나요?
광화문 앞에서 기도회를 고집하는 ‘수구’와 무엇이 다른지?
날 몰라주고, 현장을 이해하지 못한 비평이라고 항변 할 여지는
그간 비평의 대상으로 스쳐간 모두가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렇듯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새삼 소중한 기회를 통해 강조하는
자칭 대표 진보라니…
건전한 ‘진보’를 독점하려는 과욕은
이쯤에서 절제 하심이...
2007.06.03 22:16:17
군형 님의 지적이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전투에는 전투교범이 있지만
실제로 전투를 잘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실전경험이 있는냐 하는 것입니다.
향린의 현장은 전투 하는 현장이다보니
한 마디로 "너희들이 뭘알아?"하는 투로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전을 치루고 있는 입장에서는 온갖 교범이 필요없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동물적인 감각만이 필요 한 것처럼.
조 목사님의 현장이 사뭇 전투적인 반론을 편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수도 있을 겁니다.
보수와 진보, 양쪽을 다 헤아릴 수있는
정 용섭 목사님의 시각 마저도 너무 현실과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것같은.
그런데 전투에는 전투교범이 있지만
실제로 전투를 잘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실전경험이 있는냐 하는 것입니다.
향린의 현장은 전투 하는 현장이다보니
한 마디로 "너희들이 뭘알아?"하는 투로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전을 치루고 있는 입장에서는 온갖 교범이 필요없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동물적인 감각만이 필요 한 것처럼.
조 목사님의 현장이 사뭇 전투적인 반론을 편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수도 있을 겁니다.
보수와 진보, 양쪽을 다 헤아릴 수있는
정 용섭 목사님의 시각 마저도 너무 현실과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것같은.
2007.06.04 03:06:26
"이점에서 나이는 같지만 한국의 진보적인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배경을 갖고 미국의 진보적이고 실증적인 성서신학을 전공한 필자와 보수적인 성결교단의 배경을 갖고 독일의 보수적이고 관념적인 판넨베르크 조직신학을 전공한 정목사와는 사회정치적 현안 문제에 대한 인식과 참여 방식에 있어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하다."
조목사님의 글을 요약하자면 딱 이것 뿐이네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나마 그 판단의 기준 역시 지극히 주관적인 것 뿐이구요.
실증이란 말이 참으로 무색해 집니다 ㅡ.ㅡ;;
조목사님의 글을 요약하자면 딱 이것 뿐이네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나마 그 판단의 기준 역시 지극히 주관적인 것 뿐이구요.
실증이란 말이 참으로 무색해 집니다 ㅡ.ㅡ;;
2007.06.04 23:09:00
조헌정 목사님의 반론에 대한 해명 (3)
조헌정 목사님은 <현실인식의 차이>라는 대목의 앞부분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하셨다.
필자는 다만 오늘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그리고 24년의 미국에서의 소수자의 경험을 통해 민족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나라고 하는 한 개인의 삶은 결코 풀리지 않는다는 역사인식을 갖고 있다. 이 역사인식에서 오늘 한국 민족의 최대 과제는 평화통일이며 이를 위해서는 분단사고의 극복이 우선시 되어야 하고 이 극복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미군주둔이라고 하는 현실인식을 갖고 있다.
조 목사의 논리를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개인문제-민족문제-평화통일-분단사고극복-주한미군해결
이 도표를 내 방식으로 이해하면
한민족에 속한 우리 개개인의 삶이 해결되지 않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미군주둔이다.
나는 개인문제로부터 시작해서 분단사고의 극복까지는
조 목사의 견해에 대략적으로 조 목사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도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개인의 운명이 민족 공동체에 의해서 매우 심각하게 지배받기는 하지만
절대적으로 지배받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사회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철저하게 개인적이기도 하다.
이 두 차원을 함께 고려하지 않는 인간론은 추상으로 떨어질 염려가 크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여기서 말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복잡하니까 그만두자.
위의 도표로 돌아가서,
다른 무엇보다도 마지막 고리가 나에게는 와 닿지 않는다.
분단사고 극복의 가장 큰 장애가 미군주둔이라는 그의 주장은 조금 어색해 보인다.
이런 논리라면 지금이라도 미군이 철수하면 분단사고가 극복될 수 있는 말이 되는데,
과연 그럴지 나는 확신이 안 선다.
그리고 그의 이런 주장이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인지도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거꾸로 된 게 아닐는지.
우리의 분단사고로 인해서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게 아니냐 하는 말이다.
우리의 분단사고는 몇 관점으로 해명되지 않는 한민족의 트라우마다.
그 트라우마는 6.25 전쟁으로 인해 생겼으며,
50년 이상의 상호 불신 체제의 지속으로 인해 강화되었다.
어쩌면 조 목사는 분단과 불신이 바로 미국과 미군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모르겠다.
이런 논의는 내 능력을 벗어난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을 나는 감당할 수 없다.
지난 2차 세계대전 이후로 그들이 보여 온
제국주의적 행태를 나도 알만큼은 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문제를 그들에게 책임을 지운다는 것은
또 하나의 다른 사대주의가 아닌가 모르겠다.
그런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지
현재의 상황에서 볼 때 미군 문제가 분단체제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며,
그것의 해결이(미군철수?) 평화통일에 이르는 지름길이고,
그래서 결국 우리 개인들이 모두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인 것처럼
주장하는 조 목사의 입장을 나는 따르고 싶지 않다.
오해는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친미주의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반미주의자도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미국으로 볼 뿐이다.
그들에게는 엉클 톰과 같은 모습도 있고,
람보 같은 모습도 있다고 본다는 뜻이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미군이 가능한 하루빨리 남한에서 떠나주었으면 한다.
어엿한 독립국가에 50년 이상이나 외국군대가 주둔한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더구나 이제는 남한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 전쟁억지력을 확보하기도 했다.
주한미군을 내보내기 위해서라도
남북이 주도적으로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게 필요하다.
이게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남북한 양쪽 모두 서로를 향한 불신이 여전히 팽배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고위 정부 관계자들과 정치인들이 이를 위한 장단기의 로드맵을 세우고
특히 교회가 솔선해서 이런 분단사고를 줄여나간다면
그렇게 멀지 않은 시기에 남북이 평화체제로,
더 나아가 통일시대로 들어서지 않겠는가.
그런 분위기와 같은 속도로 주한미군 문제를
차근히 풀어나가야 하지 않을는지.
주한미군에게 책임을 미루지 말고
우리 스스로 해결해나가는 게 바른 자세라고 본다.
지금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군사, 정치 문제를 언급했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교회 강단에서는 가급적 말하지 않거나
어쩔 수 없이 말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방향만을 말할 뿐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설교자는 정치에 대해서 무조건 침묵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군사독재 시절에 우리가 외쳐야 할 것들이 있었다.
문익환 목사님은 이런 점에서 예언자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군사독재 시절이 아니며,
언론의 자유도 최대한 보장되어 있다.
우리가 침묵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외친다.
사람들이 마음대로 떠들 수 있는 시대에
오히려 교회만이라도 침묵을 지키는 게 예언자의 자세가 아닐는지.
조헌정 목사님은 <현실인식의 차이>라는 대목의 앞부분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하셨다.
필자는 다만 오늘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그리고 24년의 미국에서의 소수자의 경험을 통해 민족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나라고 하는 한 개인의 삶은 결코 풀리지 않는다는 역사인식을 갖고 있다. 이 역사인식에서 오늘 한국 민족의 최대 과제는 평화통일이며 이를 위해서는 분단사고의 극복이 우선시 되어야 하고 이 극복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미군주둔이라고 하는 현실인식을 갖고 있다.
조 목사의 논리를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개인문제-민족문제-평화통일-분단사고극복-주한미군해결
이 도표를 내 방식으로 이해하면
한민족에 속한 우리 개개인의 삶이 해결되지 않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미군주둔이다.
나는 개인문제로부터 시작해서 분단사고의 극복까지는
조 목사의 견해에 대략적으로 조 목사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도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개인의 운명이 민족 공동체에 의해서 매우 심각하게 지배받기는 하지만
절대적으로 지배받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사회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철저하게 개인적이기도 하다.
이 두 차원을 함께 고려하지 않는 인간론은 추상으로 떨어질 염려가 크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여기서 말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복잡하니까 그만두자.
위의 도표로 돌아가서,
다른 무엇보다도 마지막 고리가 나에게는 와 닿지 않는다.
분단사고 극복의 가장 큰 장애가 미군주둔이라는 그의 주장은 조금 어색해 보인다.
이런 논리라면 지금이라도 미군이 철수하면 분단사고가 극복될 수 있는 말이 되는데,
과연 그럴지 나는 확신이 안 선다.
그리고 그의 이런 주장이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인지도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거꾸로 된 게 아닐는지.
우리의 분단사고로 인해서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게 아니냐 하는 말이다.
우리의 분단사고는 몇 관점으로 해명되지 않는 한민족의 트라우마다.
그 트라우마는 6.25 전쟁으로 인해 생겼으며,
50년 이상의 상호 불신 체제의 지속으로 인해 강화되었다.
어쩌면 조 목사는 분단과 불신이 바로 미국과 미군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모르겠다.
이런 논의는 내 능력을 벗어난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을 나는 감당할 수 없다.
지난 2차 세계대전 이후로 그들이 보여 온
제국주의적 행태를 나도 알만큼은 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문제를 그들에게 책임을 지운다는 것은
또 하나의 다른 사대주의가 아닌가 모르겠다.
그런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지
현재의 상황에서 볼 때 미군 문제가 분단체제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며,
그것의 해결이(미군철수?) 평화통일에 이르는 지름길이고,
그래서 결국 우리 개인들이 모두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인 것처럼
주장하는 조 목사의 입장을 나는 따르고 싶지 않다.
오해는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친미주의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반미주의자도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미국으로 볼 뿐이다.
그들에게는 엉클 톰과 같은 모습도 있고,
람보 같은 모습도 있다고 본다는 뜻이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미군이 가능한 하루빨리 남한에서 떠나주었으면 한다.
어엿한 독립국가에 50년 이상이나 외국군대가 주둔한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더구나 이제는 남한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 전쟁억지력을 확보하기도 했다.
주한미군을 내보내기 위해서라도
남북이 주도적으로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게 필요하다.
이게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남북한 양쪽 모두 서로를 향한 불신이 여전히 팽배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고위 정부 관계자들과 정치인들이 이를 위한 장단기의 로드맵을 세우고
특히 교회가 솔선해서 이런 분단사고를 줄여나간다면
그렇게 멀지 않은 시기에 남북이 평화체제로,
더 나아가 통일시대로 들어서지 않겠는가.
그런 분위기와 같은 속도로 주한미군 문제를
차근히 풀어나가야 하지 않을는지.
주한미군에게 책임을 미루지 말고
우리 스스로 해결해나가는 게 바른 자세라고 본다.
지금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군사, 정치 문제를 언급했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교회 강단에서는 가급적 말하지 않거나
어쩔 수 없이 말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방향만을 말할 뿐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설교자는 정치에 대해서 무조건 침묵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군사독재 시절에 우리가 외쳐야 할 것들이 있었다.
문익환 목사님은 이런 점에서 예언자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군사독재 시절이 아니며,
언론의 자유도 최대한 보장되어 있다.
우리가 침묵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외친다.
사람들이 마음대로 떠들 수 있는 시대에
오히려 교회만이라도 침묵을 지키는 게 예언자의 자세가 아닐는지.
2007.06.05 09:33:52
'허세욱 분신 사건'에 대하여
정 목사님은 현실정치적인 해석으로 한 것인데
나는 영적으로 해석했더니 위의 조 목사님의 '미군철수' 문제는
조목사님은 영적으로 해석한 것인데
반대로 정 목사님은 정치적으로 보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정 목사님이 인용한 구절 뒤에 있는
"나는 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모두 다 이러한 역사 인식을 갖고 있다고 보고 있고 예수님도 그 폭은 다르지만 출발에서는 같다고 보고 있다.(“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마태 15장 24절) "로 보아서.
조 목사님이 정 목사님이 지적한 부분을 모르실 리는 없을 것 같고
구약에 이방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략한 것 주둔한 것에 대한 한탄들이 있듯이
오늘날 알 카에다가 성스러운 땅에 미군이 주둔한 것을 가장 큰 모독으로 들고 있듯이
우리의 자존을 억누르고 있는 외세에 대한 거부의 상징으로 '미군 주둔'의 문제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조 목사님의 견해를 직접 들어 봐야 알겠지만 .
정치적인 의미에서는 미군은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 주둔해 있는 것이고
자기들이 주둔할 필요 없다고 판단되면 팬티끈을 붙잡고 늘어져도 갈 겁니다만.
정 목사님은 현실정치적인 해석으로 한 것인데
나는 영적으로 해석했더니 위의 조 목사님의 '미군철수' 문제는
조목사님은 영적으로 해석한 것인데
반대로 정 목사님은 정치적으로 보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정 목사님이 인용한 구절 뒤에 있는
"나는 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모두 다 이러한 역사 인식을 갖고 있다고 보고 있고 예수님도 그 폭은 다르지만 출발에서는 같다고 보고 있다.(“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마태 15장 24절) "로 보아서.
조 목사님이 정 목사님이 지적한 부분을 모르실 리는 없을 것 같고
구약에 이방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략한 것 주둔한 것에 대한 한탄들이 있듯이
오늘날 알 카에다가 성스러운 땅에 미군이 주둔한 것을 가장 큰 모독으로 들고 있듯이
우리의 자존을 억누르고 있는 외세에 대한 거부의 상징으로 '미군 주둔'의 문제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조 목사님의 견해를 직접 들어 봐야 알겠지만 .
정치적인 의미에서는 미군은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 주둔해 있는 것이고
자기들이 주둔할 필요 없다고 판단되면 팬티끈을 붙잡고 늘어져도 갈 겁니다만.
2007.06.05 09:50:27
지 목사님, 그렇군요.
내가 영적인 해석과 정치적인 해석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했군요.
조 목사님과 직접 만나서 말하다 보면
크게 벌어졌던 차이점들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조금 오해했어도 위의 대글을 그냥 둘랍니다.
그런 오해를 통해서도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게 있을 테니까요.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그나저나 조 목사님의 글에 나를 직접 불러다가
향린교회에서 공개토론을 한번 하겠다는 구절이 나오던데,
언제 부르시려는지,
기다려보렵니다.
요즘 조 목사님은 민주항쟁 20주년 기념대회 건으로 아주 바쁘십니다.
저도 사실은 서울 모임에도 가야 하는데,
그건 사정 상 어렵고,
오는 8일(금요일) 저녁 7시에
성공회 대구성당에서 열리는 대구집회에만 참석합니다.
(혹시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서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그곳으로 오시면 됩니다.
성공회 성당은 대구시청 건너편에 있습니다.
내가 영적인 해석과 정치적인 해석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했군요.
조 목사님과 직접 만나서 말하다 보면
크게 벌어졌던 차이점들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조금 오해했어도 위의 대글을 그냥 둘랍니다.
그런 오해를 통해서도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게 있을 테니까요.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그나저나 조 목사님의 글에 나를 직접 불러다가
향린교회에서 공개토론을 한번 하겠다는 구절이 나오던데,
언제 부르시려는지,
기다려보렵니다.
요즘 조 목사님은 민주항쟁 20주년 기념대회 건으로 아주 바쁘십니다.
저도 사실은 서울 모임에도 가야 하는데,
그건 사정 상 어렵고,
오는 8일(금요일) 저녁 7시에
성공회 대구성당에서 열리는 대구집회에만 참석합니다.
(혹시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서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그곳으로 오시면 됩니다.
성공회 성당은 대구시청 건너편에 있습니다.
2007.06.05 18:08:56
현재 북한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자존(생존)의 여부입니다.
이미 20여년 전에 당시의 군사무기로도 북한은 남침능력을 갖지 못했으며, 혹시라도 있을지모를 북침에 대비하느라 힘겨워했습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왜 그렇게 개발하려고 애쓰는지 안다면 우리 민족에게 미군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즉, 북한은 핵무기로 자신의 위상을 높여서 군사대국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재래식무기로는 경쟁상대가 안됨을 알고 있었기때문에 비대칭전략무기인 핵무기에 목숨걸고 자위권을 만들어간 것입니다.
미국은 결코 자국의 군대를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곳에 파견하지 않습니다.
좀 더 거슬러올라가보면
조미상호방위조약을 헌신짝처럼 내팽기치고 자신들이 필리핀을 식민화하기 위해 조선을 일본에 넘겨주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언제 우리 조선의 독립을 위해 도와준게 있습니까?
그들의 국익에 따라 2차대전에 참전하였고, 그 결과 승전국으로서 자신들의 권리를 갖기 위한 방편으로 조선에 주둔하였고, 그에 따라 러시아도 주둔하게 되므로 우리 민족의 분단이 고착화 된 것이지요.
해방후에 미군이 군정하지 않고, 우리 광복군이 무장해지 당하지 않고 귀국했다면 왜 분단으로 인해 6.25를 겪었겠습니까?(이것은 가정에 불과하므로 아닐 수도 있겠지요.)
만약 그랬다면 친일세력이 친미정권과 야합하지도 않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을 통해 오늘날의 부정부패도 막을 수도 있었겠지요.(역시 가정이므로 아닐 수도 있겠지만...)
지난 날은 제쳐두고
오늘날의 미군주둔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걸까?
전쟁억지력으로 한국에 있는 것인가?
그들이 휴전선에서 남하하여 평택에 대규모기지를 가지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미 말했듯이 전쟁억지력으로서의 미군은 의미를 상실한지 오래입니다.
북한은 남침할 의사도 능력도 상실했슴은 세계가 다 알고 있는데 우리 국민들 대다수만 모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에 주둔하는 이유는 동북아에 있어서 중국에 대항할 수 있는 기지의 의미가 있고, 유사시 타 극동만이 아니라 중동에까지 파견할 수 있는 기지로서의 의미가 있겠지요.
즉 한국을 위해 주둔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위해서 주둔하는데 우리나라는 그 어마어마한 땅을 제공하고 군비를 지원해야하는 부담을 떠안은 것이지요.
이미 미군은 전체인원에서 감축하였고, 지금 남아있는 군인의 수는 전략적 의미이지 과거와 같은 전쟁억지력이라는 의미는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미군에 대해서 한 이야기는
미군과 미국이 우리민족의 자존을 얼마나 위협하는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미국이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 북한을 침공한다는 가정을 해 보세요.
분명 전쟁은 이라크와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울 나라는 폐허가 되겠지요.
그러나 미국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군수산업에 활기를 가져오고, 한국특수라고 하는 경제적 이익을 얻겠지요.
휴전이후 얼마나 많은 북침위협이 있으신 줄 아십니까?
현재 전시작전권이 미국에 있다는 얘기는
미국맘대로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우리는 울며겨자먹기로 따라야하구요.
단지 북한의 남침문제만이 아니라
미국의 북침이 오히려 더 큰 민족의 재난이란 말입니다.
그런 미국이 한국에 주둔하기에
울 민족분단의 책임은
과거에도 미국에
현재에도 미국에 가장 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를 적절히 잘 이용해먹는 우리나라의 보수층도 한 목 하고 있지만요.
넘 길어졌습니다.
주제에 벗어난 지는 모르지만 잠시 아는대로 설명해 봤습니다.
이미 20여년 전에 당시의 군사무기로도 북한은 남침능력을 갖지 못했으며, 혹시라도 있을지모를 북침에 대비하느라 힘겨워했습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왜 그렇게 개발하려고 애쓰는지 안다면 우리 민족에게 미군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즉, 북한은 핵무기로 자신의 위상을 높여서 군사대국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재래식무기로는 경쟁상대가 안됨을 알고 있었기때문에 비대칭전략무기인 핵무기에 목숨걸고 자위권을 만들어간 것입니다.
미국은 결코 자국의 군대를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곳에 파견하지 않습니다.
좀 더 거슬러올라가보면
조미상호방위조약을 헌신짝처럼 내팽기치고 자신들이 필리핀을 식민화하기 위해 조선을 일본에 넘겨주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언제 우리 조선의 독립을 위해 도와준게 있습니까?
그들의 국익에 따라 2차대전에 참전하였고, 그 결과 승전국으로서 자신들의 권리를 갖기 위한 방편으로 조선에 주둔하였고, 그에 따라 러시아도 주둔하게 되므로 우리 민족의 분단이 고착화 된 것이지요.
해방후에 미군이 군정하지 않고, 우리 광복군이 무장해지 당하지 않고 귀국했다면 왜 분단으로 인해 6.25를 겪었겠습니까?(이것은 가정에 불과하므로 아닐 수도 있겠지요.)
만약 그랬다면 친일세력이 친미정권과 야합하지도 않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을 통해 오늘날의 부정부패도 막을 수도 있었겠지요.(역시 가정이므로 아닐 수도 있겠지만...)
지난 날은 제쳐두고
오늘날의 미군주둔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걸까?
전쟁억지력으로 한국에 있는 것인가?
그들이 휴전선에서 남하하여 평택에 대규모기지를 가지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미 말했듯이 전쟁억지력으로서의 미군은 의미를 상실한지 오래입니다.
북한은 남침할 의사도 능력도 상실했슴은 세계가 다 알고 있는데 우리 국민들 대다수만 모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에 주둔하는 이유는 동북아에 있어서 중국에 대항할 수 있는 기지의 의미가 있고, 유사시 타 극동만이 아니라 중동에까지 파견할 수 있는 기지로서의 의미가 있겠지요.
즉 한국을 위해 주둔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위해서 주둔하는데 우리나라는 그 어마어마한 땅을 제공하고 군비를 지원해야하는 부담을 떠안은 것이지요.
이미 미군은 전체인원에서 감축하였고, 지금 남아있는 군인의 수는 전략적 의미이지 과거와 같은 전쟁억지력이라는 의미는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미군에 대해서 한 이야기는
미군과 미국이 우리민족의 자존을 얼마나 위협하는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미국이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 북한을 침공한다는 가정을 해 보세요.
분명 전쟁은 이라크와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울 나라는 폐허가 되겠지요.
그러나 미국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군수산업에 활기를 가져오고, 한국특수라고 하는 경제적 이익을 얻겠지요.
휴전이후 얼마나 많은 북침위협이 있으신 줄 아십니까?
현재 전시작전권이 미국에 있다는 얘기는
미국맘대로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우리는 울며겨자먹기로 따라야하구요.
단지 북한의 남침문제만이 아니라
미국의 북침이 오히려 더 큰 민족의 재난이란 말입니다.
그런 미국이 한국에 주둔하기에
울 민족분단의 책임은
과거에도 미국에
현재에도 미국에 가장 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를 적절히 잘 이용해먹는 우리나라의 보수층도 한 목 하고 있지만요.
넘 길어졌습니다.
주제에 벗어난 지는 모르지만 잠시 아는대로 설명해 봤습니다.
2007.06.05 20:01:02
올리브나무 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올리브나무 님과 같이 생각하는 기독교 신자들이 많아져야
기독교가 한민족 앞에서 작은 등불 노릇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요.
현실은 너무나 아득하지요?
그래도 카이로스는 온답니다.
힘을 냅시다.
아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올리브나무 님과 같이 생각하는 기독교 신자들이 많아져야
기독교가 한민족 앞에서 작은 등불 노릇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요.
현실은 너무나 아득하지요?
그래도 카이로스는 온답니다.
힘을 냅시다.
아자!!
2007.06.07 17:28:35
저는 갈수록 ‘하늘나라의 비밀은 신비 속에 있다’라는 정목사님의 진술(판넨베르크의 진술이기도 한가요?)에 경도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재판에 관여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더욱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떠한 사건의 사실관계는 분명 확고부동한 객관적 내용으로 존재할 텐데, 그걸 두고 설명하는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의 시각에서 얘기합니다. A라는 사실관계가 존재할 것임에도 당사자들의 주장에 따라 그 사실관계는 때로 B가 되기도 하고 C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영적인 세계에도 무언가 객관적 진리는 있겠지요(뭐 이런 주장에도 반론의 여지는 있어 보이는군요). 그러나 그 진리를 두고 설명하고자 하는 우리는 너무나 무얼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이라는 얘기가 딱 들어맞겠지요. 그래서 더더욱 설교자는 말을 아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진리가 무엇인가에 관하여 생각에 잠길 때마다, 해결해야 할 질문은 늘어납니다. 진리에 관한 담론은 필연적으로 복잡해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복잡한 사고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신학에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신학적으로 복잡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마찬가지로 정치경제에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이 정치적으로나 경제학적으로 복잡한 의미를 지닌 문제에 관해 정밀한 사고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조차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은 진리에 관한 질문에 ‘진리란 이것이다’라고 단순하게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을 좋아 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이 일응의 설득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대중은 열광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요. 자기가 그 문제에 관해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보다는 단순하게나마 ‘알고 있다’라고 자위하는 것이 자존감에는 도움이 되니까요(JMS 같은 이단이 오늘날 이같이 성황을 이루게 된 것도 대체적으로는 독특한 성경해석으로 신도들에게 자기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지적 만족감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라더군요.).
역사를 어떠한 방향으로 몰아가기를 원하는 지도자는 이러한 대중의 단순선호에 영합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기 십상일 것입니다. 정목사님이 지적하신 영적인 흑백논리라는 것 역시 그러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헌정 목사님은 정의와 평화, 더 구체적으로는 대추리에 미군부대가 들어서지 않도록 하고, FTA를 반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정의에 부합한다고 생각하고 그쪽으로 대중의 생각을 몰아가고자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일응은 그럴 것도 같고, 정치적 견해로는 저도 유사한 입장이지만, 이것이 정말로 설교자가 취할 자세인지는 좀 의문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치지도자나, 시민운동가의 역할이 아닌가요.
조헌정 목사님의 주장이 정치적인 당위성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를 떠나서, 목회자로서 그런 내용을 설교한다는 것은 좀 위험해 보이기도 합니다. 정치적 담론이라는 것은 쟁론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두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행위는 그 자체로 절대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구체적인 정치적, 경제적 이슈에까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선포해 버리는 것은, 역시 진리왜곡의 위험을 무릅쓰는 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적인 독단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한때 해방신학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한 논리였던, 예수님이 그와 같은 것을 원했기 때문에 그러한 결론에 이른 것이 아니라 운동가들이 원하는 것을 합리화 하기 위해 예수님을 끌어다 붙이는 모양이 될 지도 모르겠네요(물론 제가 해방신학에 비판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잘 모르기도 하구요.).
어쩌면 헨리 나웬이 얘기한 것처럼, 이런 현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기보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에 생기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설교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단언적으로 이야기함으로써 스스로 교주가 되기보다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찾아갈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역사운행을 신뢰하는 설교자라면 그 설교가 소극적으로 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오늘 배달된 다비안을 읽다 보니 이길용 박사님의 담무즈에 관한 글이 실려 있습니다. 조금 핀트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영적인 독단을 행하는 것 역시 야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주권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당장 이 땅에 우리가 원하는 무언가가 임하기를 기대하면서 영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어쩌면 담무즈를 위해 애곡하는 일에 다름 아닐지도 모르겠지요.
영적인 세계에도 무언가 객관적 진리는 있겠지요(뭐 이런 주장에도 반론의 여지는 있어 보이는군요). 그러나 그 진리를 두고 설명하고자 하는 우리는 너무나 무얼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이라는 얘기가 딱 들어맞겠지요. 그래서 더더욱 설교자는 말을 아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진리가 무엇인가에 관하여 생각에 잠길 때마다, 해결해야 할 질문은 늘어납니다. 진리에 관한 담론은 필연적으로 복잡해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복잡한 사고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신학에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신학적으로 복잡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마찬가지로 정치경제에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이 정치적으로나 경제학적으로 복잡한 의미를 지닌 문제에 관해 정밀한 사고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조차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은 진리에 관한 질문에 ‘진리란 이것이다’라고 단순하게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을 좋아 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이 일응의 설득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대중은 열광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요. 자기가 그 문제에 관해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보다는 단순하게나마 ‘알고 있다’라고 자위하는 것이 자존감에는 도움이 되니까요(JMS 같은 이단이 오늘날 이같이 성황을 이루게 된 것도 대체적으로는 독특한 성경해석으로 신도들에게 자기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지적 만족감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라더군요.).
역사를 어떠한 방향으로 몰아가기를 원하는 지도자는 이러한 대중의 단순선호에 영합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기 십상일 것입니다. 정목사님이 지적하신 영적인 흑백논리라는 것 역시 그러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헌정 목사님은 정의와 평화, 더 구체적으로는 대추리에 미군부대가 들어서지 않도록 하고, FTA를 반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정의에 부합한다고 생각하고 그쪽으로 대중의 생각을 몰아가고자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일응은 그럴 것도 같고, 정치적 견해로는 저도 유사한 입장이지만, 이것이 정말로 설교자가 취할 자세인지는 좀 의문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치지도자나, 시민운동가의 역할이 아닌가요.
조헌정 목사님의 주장이 정치적인 당위성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를 떠나서, 목회자로서 그런 내용을 설교한다는 것은 좀 위험해 보이기도 합니다. 정치적 담론이라는 것은 쟁론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두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행위는 그 자체로 절대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구체적인 정치적, 경제적 이슈에까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선포해 버리는 것은, 역시 진리왜곡의 위험을 무릅쓰는 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적인 독단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한때 해방신학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한 논리였던, 예수님이 그와 같은 것을 원했기 때문에 그러한 결론에 이른 것이 아니라 운동가들이 원하는 것을 합리화 하기 위해 예수님을 끌어다 붙이는 모양이 될 지도 모르겠네요(물론 제가 해방신학에 비판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잘 모르기도 하구요.).
어쩌면 헨리 나웬이 얘기한 것처럼, 이런 현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기보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에 생기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설교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단언적으로 이야기함으로써 스스로 교주가 되기보다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찾아갈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역사운행을 신뢰하는 설교자라면 그 설교가 소극적으로 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오늘 배달된 다비안을 읽다 보니 이길용 박사님의 담무즈에 관한 글이 실려 있습니다. 조금 핀트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영적인 독단을 행하는 것 역시 야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주권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당장 이 땅에 우리가 원하는 무언가가 임하기를 기대하면서 영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어쩌면 담무즈를 위해 애곡하는 일에 다름 아닐지도 모르겠지요.
2007.06.07 23:29:25
김동현 님,
안녕하세요?
시골에서 잘 지내시죠?
역시 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분이래서 그런지
논리정연한 글을 쓰시네요.
부럽네요.
내가 쓴 것보다 더 정확하게
내 생각을 정리해 주었네요.
감사하구요,
위의 글은 나에게도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요즘 , 아니 진작에 설교비평 글쓰기가 싫증이 났습니다.
기독교사상 쪽에 내년 3월호까지 쓰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밀고 나가는 중입니다.
사람이 맨날 재미난 일만 하고 사는 게 아니니까
버틸 때까지는 한번 버텨봐야지요.
아자!!!
안녕하세요?
시골에서 잘 지내시죠?
역시 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분이래서 그런지
논리정연한 글을 쓰시네요.
부럽네요.
내가 쓴 것보다 더 정확하게
내 생각을 정리해 주었네요.
감사하구요,
위의 글은 나에게도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요즘 , 아니 진작에 설교비평 글쓰기가 싫증이 났습니다.
기독교사상 쪽에 내년 3월호까지 쓰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밀고 나가는 중입니다.
사람이 맨날 재미난 일만 하고 사는 게 아니니까
버틸 때까지는 한번 버텨봐야지요.
아자!!!
2007.06.08 09:06:36
정목사님, 법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논리적인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설교자가 반드시 영적 통찰력을 지니는 것은 아닌 것과도 같습니다.
법원 내부게시판을 들여다 보면, 정말로 법을 공부한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심각한 아전인수가 넘쳐납니다.
글이 진정 논리적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이 옳은지 여부에 대해 끊임 없이 의심의 칼을 들이대고 검증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글이 객관성을 잃고 자기변호로 추락하고 말 것입니다.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을 꾸준히 읽고 있는 저로서는 교수님의 피로감도 한편 느껴집니다.
설교비평작업에 소요되는 에너지가 얼마나 큰 것일지를 가늠해 보면, 그런 피로감은 당연해 보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설교자들의 문제점들이 대개는 유사한 지점으로 수렴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반복작업에서 오는 지적 피로감도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결국은 홍정길 목사님의 설교마저도 성서텍스트의 해석부재라는 평가를 받아들고 말았군요.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현주소이겠지요. 어쩌면 최근까지도 다양성과 열린 사고를 경험하기 힘들었던 역사적 유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목사님의 설교비평글들은 때로는 칼날같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물론 애정을 갖고 하시는 작업이겠지만, 비평을 받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프게 다가올 것도 같습니다.
조헌정 목사님의 반론이 기독교사상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감정적인 톤으로 흐른 것도 그런 통증의 발현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작업은 마치 무심의 경지에 이른 사무라이같군요.
신학이란 근본적으로 우리가 서로 알지 못하고 있는 어떤 세계를 향한 질문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의 설교비평작업이 어떤 단언적 평가보다는 하늘나라와 구원에 대한 질문던짐의 형태로 전개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물론 저의 부족한 생각입니다.
암튼 3월호까지는 어떻게든 힘을 내셔야겠네요. 예전에 새벽기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이 자기의가 될까봐 일부러 중간에 하루 정도 빠지는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충분히 상찬받을 만한 공적 앞에서 피로감을 토로하시는 모습에 더 진심이 느껴집니다. 사실 이 시리즈가 천년만년 이어지게 된다면 저는 사실 안 볼 지도 모릅니다. 수십권씩 되는 시리즈는 왠지 부담스러워서 손이 잘 안 가더라구요. 그래도 또 다양한 글을 통해서 목사님의 통찰을 만나볼 수 있겠지요.
하늘나라에 이를 때까지는 누구나 다 힘을 내야겠습니다. 저도 재판의 부담과 피로가 만만치 않지만 더 힘을 내야겠군요. 이런, 비평보다 더 아프게 판결을 내리고 있는 사람이 목사님의 비평이 아프다고 평가해 버렸군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저의 과오에 관용과 용서를 바랍니다.
그것은 설교자가 반드시 영적 통찰력을 지니는 것은 아닌 것과도 같습니다.
법원 내부게시판을 들여다 보면, 정말로 법을 공부한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심각한 아전인수가 넘쳐납니다.
글이 진정 논리적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이 옳은지 여부에 대해 끊임 없이 의심의 칼을 들이대고 검증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글이 객관성을 잃고 자기변호로 추락하고 말 것입니다.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을 꾸준히 읽고 있는 저로서는 교수님의 피로감도 한편 느껴집니다.
설교비평작업에 소요되는 에너지가 얼마나 큰 것일지를 가늠해 보면, 그런 피로감은 당연해 보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설교자들의 문제점들이 대개는 유사한 지점으로 수렴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반복작업에서 오는 지적 피로감도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결국은 홍정길 목사님의 설교마저도 성서텍스트의 해석부재라는 평가를 받아들고 말았군요.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현주소이겠지요. 어쩌면 최근까지도 다양성과 열린 사고를 경험하기 힘들었던 역사적 유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목사님의 설교비평글들은 때로는 칼날같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물론 애정을 갖고 하시는 작업이겠지만, 비평을 받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프게 다가올 것도 같습니다.
조헌정 목사님의 반론이 기독교사상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감정적인 톤으로 흐른 것도 그런 통증의 발현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작업은 마치 무심의 경지에 이른 사무라이같군요.
신학이란 근본적으로 우리가 서로 알지 못하고 있는 어떤 세계를 향한 질문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의 설교비평작업이 어떤 단언적 평가보다는 하늘나라와 구원에 대한 질문던짐의 형태로 전개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물론 저의 부족한 생각입니다.
암튼 3월호까지는 어떻게든 힘을 내셔야겠네요. 예전에 새벽기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이 자기의가 될까봐 일부러 중간에 하루 정도 빠지는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충분히 상찬받을 만한 공적 앞에서 피로감을 토로하시는 모습에 더 진심이 느껴집니다. 사실 이 시리즈가 천년만년 이어지게 된다면 저는 사실 안 볼 지도 모릅니다. 수십권씩 되는 시리즈는 왠지 부담스러워서 손이 잘 안 가더라구요. 그래도 또 다양한 글을 통해서 목사님의 통찰을 만나볼 수 있겠지요.
하늘나라에 이를 때까지는 누구나 다 힘을 내야겠습니다. 저도 재판의 부담과 피로가 만만치 않지만 더 힘을 내야겠군요. 이런, 비평보다 더 아프게 판결을 내리고 있는 사람이 목사님의 비평이 아프다고 평가해 버렸군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저의 과오에 관용과 용서를 바랍니다.
2007.08.15 11:37:05
교회의 정치 참여에 대해 저도 한 마디 하지요!
이를 정당히 보는 교회와 목회자는 그 근거로 구약 선지자들의 활동을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해석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에 의해 부름 받은 종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주된 관심은
그들의 영적인 배도입니까 아니면 선민 사회의 부패한 윤리도덕입니까?
당연히 그들의 영적 배도입니다.
영적 배도의 증거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고
그 결과 선민 사회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부패해졌습니다.
이런 부패 현상을 보고 선지자들이 비평한 것은 그의 영적 배도를 지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결과를 말함으로 선민 이스라엘의 영적 배도가 그 원인임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구약 시대 보이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이 나라는 이방 나라와 모든 면에서 달아야 했고 앞서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와 같이 부패해진 것은
출애굽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구약 선지자들의 사회 비평이
오늘날 신약 시대 교회의 정치참여를 지지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가 사는 사회는 구약 성지자들의 조국인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창조주 하나님과 부활주 예수님을 부정하는 곳입니다.
이 점에서 구약의 이스라엘 사회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구약 선지자들은 영적인 배도를 회개하라고 선민의 윤리적인 부패성을 비판하며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신약 교회는 사회에 대해 정치적인 비판보다 먼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불신자가 구원을 얻어 창조주 하나님과 부활주 예수님을 믿고 산다면 그의 인격과 삶이 달라집니다.
이 변화가 교회 밖 삶에서도 서서히 나타납니다.
그 결과 불신 사회에도 이런 신자들에 의해 정의가 점점 더 많이 흐르게 됩니다.
이 점에서 복음의 도움으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존재론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교회의 최우선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로써 윤리적인 삶을 살도록 교회는 권면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성화는 정치 활동에서도 나타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신자들이 불신 사회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하게 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와 그 신앙의 이름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신앙인 정치인들이 정치 활동은 아주 곤란합니다.
이런 활동은 반드시 불신 사회에서 비판과 공격을 받게 되어 있고
그 결과 영혼 구원이라는 중차대한 교회의 사명을 망치는 비극과 불행을 교회는 만날 것입니다.
평신도로서 소신껏 야당이든지 여당이든지 들어가 활동하도록 교회는 놔두십시요!
그러나 교회나 기독교 이름으로 하진 마십시요!
하나님 나라와 복음이 해침을 당합니다.
박성수회장이 이 점에서 잘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신앙 삶의 열매를 위해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기업 활동에서 조용히 실천하면 되는데
그는 이에 대해 너무나 공개적으로 말햇습니다.
직장이 마치 선교지가 되는 것처럼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와 교회가 요즘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욕을 먹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이스라엘이 아니라 불신 사회라는 점을 잊으면 안됩니다.
비둘기의 순결성도 그리고 뱀의 지혜로움도 모두 필요합니다.
교회와 신자들은 순결성에서 나오는 열정만 주장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를 정당히 보는 교회와 목회자는 그 근거로 구약 선지자들의 활동을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해석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에 의해 부름 받은 종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주된 관심은
그들의 영적인 배도입니까 아니면 선민 사회의 부패한 윤리도덕입니까?
당연히 그들의 영적 배도입니다.
영적 배도의 증거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고
그 결과 선민 사회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부패해졌습니다.
이런 부패 현상을 보고 선지자들이 비평한 것은 그의 영적 배도를 지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결과를 말함으로 선민 이스라엘의 영적 배도가 그 원인임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구약 시대 보이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이 나라는 이방 나라와 모든 면에서 달아야 했고 앞서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와 같이 부패해진 것은
출애굽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구약 선지자들의 사회 비평이
오늘날 신약 시대 교회의 정치참여를 지지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가 사는 사회는 구약 성지자들의 조국인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창조주 하나님과 부활주 예수님을 부정하는 곳입니다.
이 점에서 구약의 이스라엘 사회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구약 선지자들은 영적인 배도를 회개하라고 선민의 윤리적인 부패성을 비판하며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신약 교회는 사회에 대해 정치적인 비판보다 먼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불신자가 구원을 얻어 창조주 하나님과 부활주 예수님을 믿고 산다면 그의 인격과 삶이 달라집니다.
이 변화가 교회 밖 삶에서도 서서히 나타납니다.
그 결과 불신 사회에도 이런 신자들에 의해 정의가 점점 더 많이 흐르게 됩니다.
이 점에서 복음의 도움으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존재론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교회의 최우선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로써 윤리적인 삶을 살도록 교회는 권면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성화는 정치 활동에서도 나타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신자들이 불신 사회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하게 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와 그 신앙의 이름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신앙인 정치인들이 정치 활동은 아주 곤란합니다.
이런 활동은 반드시 불신 사회에서 비판과 공격을 받게 되어 있고
그 결과 영혼 구원이라는 중차대한 교회의 사명을 망치는 비극과 불행을 교회는 만날 것입니다.
평신도로서 소신껏 야당이든지 여당이든지 들어가 활동하도록 교회는 놔두십시요!
그러나 교회나 기독교 이름으로 하진 마십시요!
하나님 나라와 복음이 해침을 당합니다.
박성수회장이 이 점에서 잘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신앙 삶의 열매를 위해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기업 활동에서 조용히 실천하면 되는데
그는 이에 대해 너무나 공개적으로 말햇습니다.
직장이 마치 선교지가 되는 것처럼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와 교회가 요즘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욕을 먹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이스라엘이 아니라 불신 사회라는 점을 잊으면 안됩니다.
비둘기의 순결성도 그리고 뱀의 지혜로움도 모두 필요합니다.
교회와 신자들은 순결성에서 나오는 열정만 주장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007.08.16 19:21:44
생동감 있게 진보에 대해 고민을 해서 좋아 보입니다. ^^!
개인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라며)
정확하게 잘 알지는 못하지만, 3.1절에 독립 선언문에 동참 하셨던 33명의 독립 선언자들 중 개신교 목사님들은 신앙앞에 쉽게 변절을 했습니다.
그것이 스스로의 족쇄를 씌어 결국은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라는 부끄러운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많은 생각을 해야 할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선과 악을 가르는 분명한 균형대에서 많은 고민과 좌절을 맛보았다고 합니다.
진보는 소유하기보다 반성과 발전 그리고 절제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침묵만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때론 투쟁과 논쟁 속에서 삶 속에서 반영되고 실천되어야 하겠지요.
처절한 몸부림이 우리를 가만 두지 않지만요.
정목사님을 통해 조목사님을 알게 되서 고맙습니다.
두분은 진보와 신학사이에 양측의 힘을 나누는 하나님 나라의의 균형대 속에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라며)
정확하게 잘 알지는 못하지만, 3.1절에 독립 선언문에 동참 하셨던 33명의 독립 선언자들 중 개신교 목사님들은 신앙앞에 쉽게 변절을 했습니다.
그것이 스스로의 족쇄를 씌어 결국은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라는 부끄러운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많은 생각을 해야 할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선과 악을 가르는 분명한 균형대에서 많은 고민과 좌절을 맛보았다고 합니다.
진보는 소유하기보다 반성과 발전 그리고 절제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침묵만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때론 투쟁과 논쟁 속에서 삶 속에서 반영되고 실천되어야 하겠지요.
처절한 몸부림이 우리를 가만 두지 않지만요.
정목사님을 통해 조목사님을 알게 되서 고맙습니다.
두분은 진보와 신학사이에 양측의 힘을 나누는 하나님 나라의의 균형대 속에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013.12.12 10:51:10
많은 말씀들이 오간지 언 6년이 지났네요.
그새 노대통령님은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셨고, 뒤를 이은 이대통령님은 그 진통을 끝내고 휴식하십니다만 과연 편하실지 앞날이 불투명해 보이고, 세 번째 바통을 이어 받은 여성 대통령님은 하루 속히 내려가라고 온통 나라가 뒤숭숭 합니다. 거기에 조목사님과 따르는 많은 분들은 이 엄동설한에 또 거리로 촛불을 들고 나가셨네요. ‘이명박구속, 박근혜 사퇴’라는 구호를 내걸고(가톨릭뉴스13.12.10일자 게재 사진, 어린아이의 모습도 눈에 띕니다) 조목사님은 여전히 거리로, 정목사님은 여전히 강단을~~,
언제쯤이나 조목사님과 함께하는 많은 분들이 원하는 정의와 평화는 도래하게 될까요? 과연 누가 정권을 잡아야 조목사님이 거리로 향하지 않고 강단에만 전무(?)하게 될까요? 조목사님은 그때 그 시절 이슈의 대상이 되셨던 민초들과 지금도 여전히 그 때의 아픔을 나누고 계시겠지요? 저는 감사하게도 6년 세월 속에서 이 대구성서 아카데미를 만나(2년밖엔 안 되는 초짜지만)한 뼘은 자란 듯 싶은데요. 왜냐면 지금 저와 우리 교우들이 즐거운 진~~~통을 겪고 있거든요.ㅎㅎ
암튼 어린아이의 키로 고개를 한껏 젖혀 어른들을 보고 있노라니 고개만 아프네요.....
기독교 사상 6월호에 실렸습니다.
여기 정식으로 올리오니
읽어보시고
생각들을 나눠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시간이 주어지는대로
다시 대글을 달아볼 생각입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