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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훈련은 가능한가?
-사랑의교회 옥한흠 원로목사-
하나님 나라의 운동권
사랑의교회 원로 옥한흠 목사님(이하 ‘옥 목사’)은 총회 신학교 3학년 재학 중에 김희보 목사님이 담임이었던 성도교회의 어린이 주일학교에서 6개월간 전도사로 활동하다가 졸지에 대학부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대학부는 달랑 회장 한 사람뿐이었다. 그가 맡은 뒤로 그 대학부는 3,4년 만에 재적 350명, 출석 200명의 덩치로 컸다. 유명무실했던 대학부가 일약 전국에서 가장 큰 대학부가 되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처럼, 옥 목사는 아직 전문적인 사역자로 발을 딛기 전부터 한국교회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셈이다. 1975년부터 3년간 유학을 다녀온 옥 목사는 1978년 7월23일 강남은평교회(사랑의교회 전신)를 창립했다. 창립멤버는 열두 명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중학생과 옥 목사 내외를 제외하면 장년신자는 일곱 명이었다.(제자훈련 열정 30년, 1998년, 51쪽. 이하 ‘제자’) 사랑의 교회는 창립 후 6년 반 만에 교회당을 건축하고 입당예배를 드렸다. 그때 이미 출석 교인 1,250명으로 불어났으며, 그 뒤로도 교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현재 재적교인 5만 수천에다가, 출석 4만5천여 명의 초대형교회가 되었다.
성도교회의 대학부와 사랑의교회가 이렇게 급성장하게 된 그 배경에는 옥 목사의 목회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제자훈련’이다. 그는 기성교회의 대학부와 달리 파라처치의 대학부가 활성화되는 이유에 눈을 돌리고, 네비게이토에서 사용하는 모든 성경공부 자료들을 탐독했다. 옥 목사의 회상에 따르면 거기에는 “복음이, 훈련이, 비전이 있었다.”(이것이 목회의 본질이다, 2004년, 21쪽. 이하 ‘목회’) 이에 반해 기성교회의 대학부에는 “복음은 없고 교리만 있었다. 훈련은 없고 회의만 많았다. 비전은 없고 행사만 있을 뿐이었다.” 이 사실을 확인한 뒤로 그는 제자훈련에 ‘올인’했다. 물론 사랑의교회도 이런 목회철학으로 이끌어갔다. 오늘의 사랑의교회는 곧 제자훈련의 살아있는 역사라 할 수 있다.
제자훈련은 기독교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은 아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교회 공동체 생활에 참여했다면 이미 제자로 살아야 할 ‘훈련’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제자와 훈련 개념이 담겨 있는 셈이다. 문제는 기성교회가 교회의 형식적인 권위주의에 매몰되어 이런 제자와 훈련의 역동성을 상실했다는 데에 있다. 옥 목사는 제자훈련의 신학적 체계를 세웠고, 교회 현장에 철저하게 적용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가 말하는 제자훈련은 도대체 무엇인가?
옥 목사는 제자훈련에 대한 오해가 세 가지라고 한다. 첫째, 제자 훈련은 성경공부다. 이런 오해는 제자훈련의 근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 그에 따르면 “제자훈련은 성경공부가 아니다.” 오히려 “성경공부는 제자 훈련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둘째, 제자훈련은 전도를 잘 하고, 잘 가르치는 평신도 기능인을 배출하는 코스이다. 이런 생각도 제자훈련의 오해에서 나왔다. 제자훈련은 신앙의 개인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사회책임까지를 포괄한다. 셋째, 제자훈련은 중산층 이상의 평신도에게만 가능하다. 옥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제자훈련이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게 된 사랑의교회 신자들이 서울 강남의 중산층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그런 오해를 받을 수 있지만 원래 제자훈련은 목회자의 목회 철학에 속하지 훈련을 받아야 할 평신도의 사회적 수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게 아니다. 이런 오해를 넘어서는 제자훈련의 목적을 옥 목사는 이렇게 밝혔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신자의 자아상을 확립하는 것이다. 예수처럼 되고 예수처럼 살기를 원하는 신앙인으로 만드는 데 있다. 이것이 가장 정확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평신도를 깨운다, 개정판 1999년, 194쪽, 이하 ‘평신도’)
제자훈련의 목적을 다시 세분화하면 인격적인 면과 사역적인 면으로 구분된다. 인격적인 면에서 제자훈련은 평신도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도록 하는 것이다. 옥 목사의 표현에 따르면 제자훈련은 교역자와 평신도가 동참하는 ‘영적 몸부림’이다. 사역적인 면에서 제자훈련은 평신도로 하여금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게 만드는 것이다. 평신도들이 실제 삶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신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이끌어내야 한다.
자기의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자기가 사는 환경이 어떠하든 간에 자기가 머무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는 소명자로 만드는 것이 제자훈련이다.(평신도 195)
위에서 필자가 옥 목사의 제자훈련이 전적으로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이 아니라고 지적했듯이, 옥 목사가 제시하고 있는 제자훈련의 두 가지 목적도 사실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인격적인 면은 기독교인의 존재론적 변화를 말하며, 사역적인 면은 행위의 변화를 말한다. 전자는 칭의이며, 후자는 성화에 해당된다. 목사 치고 칭의와 성화를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목사들이 제자훈련의 두 차원을 염두에 두고 목회도 하고 설교도 한다. 옥 목사가 이들과 구별되는 이유는 칭의와 성화 문제를 훈련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데에 놓여 있다. 다른 말로, 신앙의 의식화(意識化)라고 할 수 있다. 이념 도서를 읽거나 자체 토론의 방식으로 역사의식을 고취하여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선 지난날의 운동권의 행태와 같다. 옥 목사의 국제제자훈련원은 하나님 나라 운동권의 아지트가 아닐는지.
그리스도인 실존
제자훈련의 목적에 인격적인 차원과 사역적인 차원이 있듯이 옥 목사의 설교에서도 이 두 차원이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다. 필자가 검토한 바에 따르면 그의 설교는 시기적으로 그 강조점이 조금씩 변했다. 사랑의교회를 개척할 때부터 1990년 초 로마서 연속설교를 할 때까지는 주로 그리스도인 인격이, 그 뒤로 IMF 시대인 1990년대 말까지는 주로 사역이, 그리고 2000년대에는 양자의 일치가 그 특징으로 나타난다. 시간의 제약으로 필자가 옥 목사의 설교를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없었으며, 일정한 특징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칼로 무를 자르듯이 선명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시기적 구분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자신이 없다. 이 문제는 훗날 옥한흠 목사 평전을 쓸 젊은 학자의 몫으로 넘겨주고, 오늘 필자는 제자훈련의 두 기둥인 인격과 사역이 그의 설교에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옥 목사의 설교는 우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가장 큰 무게를 둔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 인격이다. 그의 교회론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한스 큉의 표현으로 바꾼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 실존(Christsein)이다. 그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바탕에 두고 설교한다. 이 질문은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교회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도 연결된다. 이런 질문은 세례교육으로 끝나거나 아니면 한두 번 설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설교자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중심 주제이다. 이런 중심 주제에 관심을 잃게 되면 설교자들은 결국 본질적이지 않는 것들, 즉 헌금, 주일성수, 목사에게 순종, 총동원주일 등등, 일종의 교회활동에 관한 것들에만 사로잡히게 된다. 옥 목사는 기성교회에서 이런 문제들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신앙의 근본문제를 들추어내는 방식으로 제자훈련을 했고, 그런 방식으로 설교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곧 구원 문제이다.
옥 목사는 1989년부터 15개월간 투병생활을 거친 뒤 다시 선 강단에서 로마서를 본문으로 연속 강해설교를 했다. 그것을 세권의 설교집으로 묶어냈는데, 1권은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1992년, 이하 ‘구원’), 2권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1993년, 이하 ‘나의 구원’), 3권은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1994년, 이하 ‘구원받은 자’)이다. 각각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로마서의 중심 주제를 구원으로 보았다. 구원은 그에게 황홀한 경험이며, 그 구원은 그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따라서 그런 구원에 참여한 사람의 삶은 변화될 수밖에 없다. 황홀한 구원은 기독교 신앙의 초월적 차원을 가리키며,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인격적인 의지와 결단이 요청된다는 의미이고, 변화된 삶은 신앙과 삶의 일치를 가리킨다. 다시 정리하면, 옥 목사의 설교는 구원의 초월적 신비에 참여한 그리스도인이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변화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제1권에 실린 “새로 열린 구원의 길”(롬 3:19-26)이라는 설교를 보자. 옥 목사는 우선 본문 앞에 나오는 내용을 짚었다. 거기서 바울은 예수가 없는 삶의 절망적인 상황을 지적했다는 것이다. 이제 옥 목사는 앞 구절과 오늘 설교의 본문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고민’이라는 작은 주제를 설명하는 것으로 설교의 문을 연다. 하나님의 고민은 두 가지이다.
첫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을까 하는 문제이다. 지금까지는 사람이 율법을 행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었는데, 하나님이 얻은 결론은 사람이 율법을 도무지 지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율법은 선을 행하게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습니다.”(구원 142)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폐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거룩을 포기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해도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찾으셔야만 했다.
둘째,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논리는 아주 분명하다. 인간은 모두 죄로 타락했는데, 이런 죄인을 무조건 의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남아있는 길은 죄를 죄대로 벌하고 의를 의대로 보상해야 하는 것이다. 옥 목사는 이런 성서텍스트의 맥락을 청중들이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나간다.
하나님 자신의 의로움도 증명하고 죄인인 우리도 의로운 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 길이 없을까, 하고 고심한 하나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분의 입장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므로 우리를 쉽게 구원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지 마세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다 동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구원 145)
위의 진술은 다른 목사들의 설교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표면적으로 그런 걸 말하는 설교자가 있고, 실제로 그런 사태 안으로 들어가서 말하는 설교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런 차이를 확인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설교의 전체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그 설교자가 기독교 신앙의 깊이에 들어가서 진술하고 있는지 아니면 단지 풍월만 읊고 있는지 구분이 된다. 옥 목사의 전체 설교에서 위의 진술은 큰 무게를 지닌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가서 자기가 체험하는 신앙의 세계를 흡사 눈으로 보듯이 설명하는 설교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무게이다.
설교자에게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의 정보를 얼마나 아는가, 또는 그것을 수사학적으로 어떻게 잘 표현하는가가 아니라 신앙의 중심에 영적인 발을 딛는 것이다. 수영을 배우려면 실제로 물에 몸을 담가야 하듯이 설교자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물에 몸 전체를 담가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누가 영의 세계에서 수영하고 있는가? 목사 후보생들이 이를 위해서 소정의 신학과정을 거치지만 그것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공부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여기에 왕도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시인이 되려면 언어의 존재론적 세계와 이 세상의 깊이를 이해하고, 또한 수없는 습작의 과정이 필요하듯이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더구나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훈련이 필수불가결이다. 아마 옥 목사의 제자훈련도 그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리라.
다시 옥 목사의 설교로 돌아가자. 그는 하나님이 이 두 가지 난제에 저촉 받지 않는 새로운 구원의 길을 내놓으셨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21절)에서 ‘이제는’이 중요하다. 이것은 일종의 ‘전환점’이다. “이전에는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 길이 열려 있었는데, 이제는 새 길이 열렸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폐기한다는 게 아니다. 율법과 관계없이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찾거나 생각해낸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참으로 복된 길입니다. 드디어 이 길이 나타났습니다. 구약의 시대가 종결되고 신약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옛 언약은 폐하고 새 언약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행하면 구원받는 율법시대에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복음의 시대로 넘어온 것입니다.(구원 146)
이제 옥 목사는 이렇게 질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새로운 구원의 길인가? 그는 강해설교자답게 본문의 내용을 차례대로 따라가면서 설명한다. 이게 강해설교의 힘이라면 힘이다. 공연히 자기의 종교상식에 의지하지 않고 성서텍스트에 의존할 때 주어지는 말씀의 힘이다. 여기서 한눈팔지 않고 본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게 쉬운 건 아니다. 그 이유는 말씀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또는 성서텍스트를 풀어낼 내공이 쉽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내공이 없는 설교자들은 성서텍스트에 관해서 한두 마디 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선정적인 예화에 기울어지거나 청중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한다. 그런 설교는 삶의 내용이 없는 부모들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늘어놓은 잔소리와 같다. 이런 설교에 은혜를 받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좀 심하게 말해서 임상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옥 목사는 이런 일 없이 본문을 그대로 밀고나갈 줄 안다. 그는 25절 말씀을 인용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거룩함과 공의를 손상시키지 않고 죄인인 사람을 의인으로 받으실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이며 “말로 다할 수 없이 큰 은혜”이다. 이제 설교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옥 목사는 이 은혜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가 있다.(24절) 둘째,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는 은혜가 있다.(25절) 셋째,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우리의 의가 되신 은혜가 들어있다.(26절) 옥 목사는 이 대목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다. 예수님을 통한 은혜의 깊이와 감격을 청중들에게 전하려는 것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설교구성은 강해설교의 한계이다. 성경구절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설교를 산만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그가 세 가지로 구분한 내용은 사실 한 가지이다. 구속, 화목제물, 의는 구원에 관한 세 가지 관점일 뿐이다. 설교가 아니라 성경공부 시간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자잘하게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의 주제로 집중해야 할 주일공동예배의 설교에서는 별로 적합하지 않다. 어쨌든지 옥 목사는 이 설교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절 다른 말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길을 올곧게 전했다. 많은 설교자들은 이런 내용만으로 40-50분에 이르는 설교 시간을 채우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옥 목사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과 깊이를 정확하게 뚫어보는 사람이며,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 온 영혼을 기울이는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외치는 것으로 이 설교를 끝냈다.
얼마나 기막힌 주님의 은혜입니까?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려고 하나님은 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는 값없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은혜를 생각하면 할수록 터져 나오는 감사와 감격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이 놀라운 기쁨을 맛본 사람이 어떻게 그 은혜에 보답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을 찬양합시다. 우리 주님께 영광 돌립시다. 우리 주님을 위해 헌신합시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과제요, 목적인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합시다.(구원 154)
옥 목사의 설교가 청중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로 다가가는 이유는 위의 설교에서 보았듯이 복음의 근본인 케리그마를 확실하게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청중들이 아무리 계몽되었다고 하더라도 성서의 케리그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문제는 설교자가 이 케리그마를 앵무새처럼 달달 외우고 만다는 데에 있다. 다행히 옥 목사는 젊은 시절부터 광맥을 좇는 광부처럼 이 케리그마의 복음에 초지일관이다.
오늘의 젊은 목사들도 이 케리그마에 천착하기를 바란다. 만약 그런 설교를 전할 마음이 생기지 않거나 그것에 관해서 할 말이 별로 없다면 자신이 기독교 설교자인지 아닌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웃으면 복이 와요.” 식이나 “친절한 사람이 됩시다.”는 식의 설교를 하고 만다면 그는 복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거나 복음을 외면하는 사람이다. 오늘의 신자들이 감성적인 드라마나 말장난에 불과한 개그 프로그램에 길들여져서 케리그마를 따분하게 여긴다고 생각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는 아직 케리그마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설교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우주론적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일어났던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다.
거룩한 분노
옥 목사의 설교는 제자훈련의 두 번째 목적인 사역적인 면에서도 분명한 특징을 보인다. 훌륭한 무용수를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선생처럼 그는 청중들을 그리스도인다운 삶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불철주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런 관점은 오늘날 신자와 불신자가 구별되지 않는 이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나왔다. 오늘의 교회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하다.
근간에 들어 기독교가 무력하다고 하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성경적인 표현을 빌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점점 짠 맛을 잃어가고 있다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가슴을 찢는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무엇이 교회를 무력하게 만듭니까? 무엇이 성도의 생활에서 짠 맛을 앗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말씀을 알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나의 구원 26)
그의 설교는 2천 년 전 세례 요한의 설교처럼 청중들의 양심을 큰 망치로 두드린다. 교양의 차원에서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들으면 상당히 불편할 정도로 그의 설교는 고도의 도덕성과 책임감을 요구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도덕성이 약한 정권과 ‘잘살아 보세’라는 장밋빛 구호 아래서 살아온 우리 국민들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될 중요한 가치들을 포기하는 데 길이 들어 버렸습니다. 좀더 편안하게 살 수 있다면, 돈만 많이 벌 수 있다면 도덕과 양심 따위는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이 점에서 대해서는 기독교인들조차 떳떳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 기독교의 문제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 스스로가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도덕과 양심을 저버리고 산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고도 나라꼴이 엉망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라 할 것입니다.(우리가 바로 살면 세상은 바뀝니다, 1998년, 36쪽. 이하 ‘세상’)
도덕적인 삶을 요구한다고 해서 모든 설교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런 방식으로 청중들의 영성을 파괴하는 설교가 있고, 오히려 살려내는 설교가 있다. 옥 목사는 어느 한 순간도 기독교 신앙을 도구로 삼아 청중들을 닦달하지 않는다.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그의 요구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당연한 사명이요 사역이라는 신앙고백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신앙적 진정성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도덕적 설교는 설득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청중들이 듣기 언짢아하더라도 그것에 구애받지 않는 힘을 확보하고 있다. 이는 곧 그의 설교가 목회의 기능에 속한 게 아니라 영적 본질에 속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영성에 근거해서 그는 부도덕한 개인과 사회 앞에서 분노하고 있다. 이것은 거룩한 분노 아니겠는가.
목사는 분노보다는 모든 부도덕성까지 품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이 풍부해야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사람의 잘못을 일일이 따지고 든다면 도대체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직면한 사람은 분노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있는 법이다. 루이스는 분노가 없다는 것, 특히 우리가 의분이라고 부르는 분노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심상치 않은 증상일 수 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이교도들보다 더 지독한 저주의 말을 내뱉은 이유는 그들이 “선과 악의 문제를 좀더 심각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시편기자들) 폭언을 가만히 살펴보면 대부분 단순히 자신들이 어떤 일을 당했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노를 일으킨 그 일 자체가 명백히 잘못된 일이요, 그것은 희생자인 그들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미워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C.S. 루이스, 시편사색, 50쪽, 괄호 안은 필자 주)
사회적 책임
필자가 거룩한 분노라고 이름붙인 옥 목사의 윤리 도덕적 설교는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이 강하기는 하지만 사회적인 차원도 그에 못지않게 강하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제자는 사회의 공적인 책임으로 면제되지 않는다. 공적인 책임은 무엇인가?
정의를 외치고 약한 자와 억눌린 자 편에 서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데 앞장 서는 것을 말합니다. 사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면 교회가 그 타락의 환부를 끌어안고 치유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감당해야 할 공적인 책임입니다.(세상 14)
이런 공적인 책임을 도외시한 채 자기만을 위한 종교에 몰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그는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기독교 비판은 아주 날카롭다. 오늘날 기독교가 개인의 전용물이 되고 말았다. 예수가 ‘만유의’ 주, ‘온 세상’의 주가 아니라 단지 ‘나’의 주로 축소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소위 복음주의 설교자들 중에서 그리스도인의 사회 윤리적 책임을 옥 목사만큼 강조하는 설교자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사회윤리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 중의 하나인 노사분규에 관한 옥 목사의 입장을 조금 더 따라가 보자.
설교 “빈자처럼, 부자처럼”(잠 13:7,8)에서 옥 목사는 부자들을 향해서 위선을 버리라고 따끔하게 경고한다. 그들의 부는 단지 자신의 능력이나 행운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결실이기 때문에 이에 합당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 구로공단의 모 전자회사에서 노사분규가 일어났다. 사주가 교회의 중직을 맡은 사람이어서 그 여파가 심각했다. 그는 어느 한편을 일방적으로 두둔하지 않겠다고 전제한 채, 관련 자료를 검토해보면 사주가 그동안 근로자들의 인권을 유린해왔다는 사실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사주는 법이 정한 최저생활비를 근로자들에게 주지 않았고, 납 연기로 자욱한 공장에서 하루 평균 13-15시간이나 일을 시켰고, 화장실에도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또한 매일 아침예배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근로자들을 40분이나 일찍 출근하게 한 채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열심히 일하라.”는 똑같은 설교를 되풀이 했다고 한다. 파업에 동참한 근로자들이 사랑의교회 대학부에 보낸 문건을 읽은 옥 목사는 그 문제를 이렇게 정리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노사간의 갈등은 대부분 가진 자가 가진 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한국경제가 성장해온 과정을 되돌아볼 때 가진 자의 횡포가 그 도를 넘어섰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많은 사주들이 마치 자기는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것처럼, 그래서 근로자의 처지를 외면해도 괜찮은 것처럼 행동했던 것입니다.(세상 207)
만약 필자가 위의 설교를 누가 했는지 모른 채 접했다면 노동운동에 투신한 소위 운동권 목사의 설교로 착각했을지 모른다. 흡사 아모스의 예언처럼 들리는 그의 진술을 조금 더 들어보자.
가진 자는 무엇보다 솔직해야 합니다. 불경기라고 엄살 부리지 마십시오. 이제는 없는 체하는 것으로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시대가 끝났습니다. 자기의 몫을 조금 줄이는 한이 있어도 근로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일에 성실히 임해야 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남보다 가진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에 주어진 가진 자로서의 의무를 인정해야 합니다.(세상 208)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요즘(7월11일) 한국사회와 한국교계는 이랜드 노조의 파업문제로 시끄럽다. 9년 전 행했던 옥 목사의 이 설교는 오늘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기독교 기업인인 이랜드 사주에게도 해당되는 게 아닐는지. 마침 파업 기간 중 월드컵 경기장에서 개최된 “2007 한국교회 대부흥기념 100주년 기념대회”에서(7월8일) 옥 목사가 설교자로 나섰다. “주여, 살려주옵소서.”(계3:1-3)라는 설교의 제목은 한국교회를 살려달라는 호소가 아니겠는가. 그는 “거룩하신 주여! 이놈이 죄인입니다. 이놈이 한국교회, 입만 살았다고 떠들고 행위가 죽어버린 한국교회를 만든 장본인입니다.” 하고 기도를 드렸다. 믿음과 행위의 일치만이 한국교회가 살아나는 길이라고 설교한 옥 목사의 눈에 비정규직의 절규로 시작된 이랜드 사태가 어떻게 보였을지 궁금하다.
교회의 공적 책임에 관한 옥 목사의 설교는 북한 문제에서도 상당히 전향적이다. 물론 그는 기본적으로 북한을 불신한다. 그에게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저주스러운 극성을 피우며 “거짓된 주체사상에 속아 발광하고 있는 민족”이다.(나의 구원 207. 구원받은 자 73, 세상 69, 130 참조)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억압할 뿐만 아니라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일종의 대체종교의 우상처럼 받아들여지는 북한 체제가 옥 목사의 눈에 해괴하게 보인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 눈에도 북한은 그 이유가 어디 있든지 불량해 보인다. 그러나 창조의 하나님을 실제로 믿고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과 역사를 표면적 현상으로만 볼 게 아니라 훨씬 심층적 시각으로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쨌든지 북한에 대한 옥 목사의 불신은 여느 반공주의 설교자들과 다를 게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영성이 있다. 그 영성은 곧 하나님 말씀에 고지식하게 사로잡힌 사람에게서 나오는 원초적 능력이다. 그는 성서텍스트를 가능한 문자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축자영감설의 입장을 고수하는데, 그런 입장이 역설적으로 역사 진보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는 말이다. 직접 그의 설교를 따라가 보자.
옥 목사는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라.”(롬 12:19-21)는 제목의 설교에서 인류가 당면한 굶주림의 문제를 제기했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먹고 마시는 것은 창조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장 기본적인 삶의 권리”이다.(세상 230) 여기에는 어느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 심지어 “악인이라 해도 먹고 살 권리를 보장” 받는다. 어린이, 노인들, 장애인들을 먹고 살 수 있도록 건강한 사람이 앞장 서야 한다. “열심히 일하고 세금을 제대로 내어 그들에게도 복지 혜택이 돌아가도록 도와야” 한다. “많이 가진 자는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들의 먹고 살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성서본문에 의지해서 옥 목사는 원수까지 먹고 마시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원수에는 물론 북한이 포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가 주리면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 때문에 먹고 마실 권리마저 보호받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상적으로는 그들이 우리의 원수일지 모르지만 핏줄로는 형제자매들입니다.(세상 224)
그는 북한 주민들에게 “양식을 제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따지지 말고 그들을 도와주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정치적인 계산이나 경제적인 조건을 따지지 말자고 한다. “그 모든 이유들을 다 내려놓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옥 목사는 이 설교의 대부분을 북한 돕기에 할애했다. 사랑의교회가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북한 동포를 돕는 일에 성의를 모아야 한다고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제시했다. 이런 일들이 그 뒤로 계속되었는지, 아니면 단발성으로 끝났는지, 더 나가서 옥 목사의 이런 생각이 지금까지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미 10년 전에 남북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는 기독교의 ‘햇볕정책’이라고 불릴만한 그날의 설교를 이렇게 맺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한다면 작은 것이라도 아끼고 절약해서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들의 먹고 마실 권리를 보호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책임을 잘 감당할 때 공산주의 사상으로 얼어붙었던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질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복음에 대해서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악인의 권리까지도 보장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세상 232)
앞에서도 짚었지만 옥 목사는 복음주의, 또는 보수적인 계열에 속한 설교자이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면의 한계로 자세하게 다룰 수 없지만 그에게는 생태적 마인드도 명확해 보인다. “지금 우리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조금 못사는 쪽을 택하고 자연을 살릴 것인지 아니면 조금 더 잘살기 위해서 자연을 계속 훼손시킬 것인지 갈림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세상 237) 이의 실천을 위해서 그는 오래 전부터 샴푸를 사용하지 않고 비누로 머리를 감고, 이면지를 활용하며, ‘기독교 환경연대’ 이사로 참여했다고 한다. 이런 생태 마인드는 신학적 사유가 아니라 제자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깊은 열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생태계를 훼손하는 행위를 보면 분노가 치민다고 한다. “화를 내고 욕을 해서 그들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면, 환경 파괴가 줄어들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한다.(세상 253) 이런 대목에서도 우리는 옥 목사의 거룩한 분노를 읽을 수 있다.
제자의 삶
필자는 옥 목사의 설교를 접하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도저히 따라가기 힘든 복음에 대한 열정, 말씀에 대한 확신, 성직주의와 권위주의를 넘어서는 원초적 신앙, 겸손한 지도력, 열린 보수주의, 제자훈련을 중심으로 한 목회철학, 높은 도덕성 등등이 부끄러움의 요인들이다. 그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울기도 하고(구원 233), 가슴 벅차할 때가 많으며(자존심 73), 말씀이 얼마나 따뜻하고 감미로운가 하고 감동할 때가 많다.(구원 198) 그뿐만 아니라 말씀 앞에서 그는 겸손하다. 아는 것만큼만 전하고 나머지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찬양할 뿐이라고 한다.(나의 구원 271) 이렇게 그의 영혼은 복음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이런 열정으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안고 있던 화두는 다음과 같다. “왜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게 없는가?” 그가 찾은 대답은 그리스도인들이 인격적으로 참된 제자가 되지 못했고, 제자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 길은 제자훈련이다. 그는 여기에 평생을 투신했다. 옥 목사 부인의 말처럼 그는 그 일에 미쳤다.(제자 121) 그뿐만 아니라 그는 세계 교회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목회의 성과도 올렸다. 이 성과는 단순히 물량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명예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게 바로 제자훈련 한 가지로 집중된다.
이제 필자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묻는다. 한국교회가 달라졌나? 조금 더 직접적으로 묻자. 평생 몸 바친 사랑의교회와 그 지체들은 제자훈련을 통해서 달라졌나? 대답하기 힘들다면, 조금 돌려서 이렇게 묻자. 사랑의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사회는 변화되었을까? 서울 강남에 살고 있는 분들은 사랑의교회 신자들에게 감동을 받아서 새롭게 변화되었을까? “우리가 바로 살면 세상은 바뀝니다.”는 옥 목사의 주장이 옳다면 사랑의교회 신자들이 제자로 변화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은 그 지역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강남이 변한 게 없다면 사랑의교회도 역시 제자로 살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 자리에서 제자훈련을 통해 사랑의교회가 크게 부흥한 걸 보라고 말하는 분이 있다면 그는 옥 목사의 제자훈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 글을 쓰면서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옥 목사와 제자훈련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교회성장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를 지울 수 없었다. 옥 목사의 제자훈련은 교회성장 프로그램이 결코 아니다. 어떤 목사가 교회성장을 위해서 옥 목사를 따라서 제자훈련을 시도한다면 성공할 확률이 별로 높지 않을 것이다. 제자훈련은 교회 성장론이 아니라 교회론 자체이다. 교회 성장은 바른 교회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일 뿐이다. 거꾸로 제자훈련이 바르게 되면 경우에 따라서 교회성장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필자가 보기에 제자훈련은 80,90년대 서울의 강남이라는 특별한 장소와 특별한 시기에 필요했던, 그리고 특별한 카리스마를 지난 지도자에 의해서 수행된 목회 패러다임이었다. 이것이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효력을 나타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필자는 지금 옥 목사의 제자훈련을 용도폐기하려는 게 아니다. 훈련 없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없다는 가장 초보적인 신앙의 차원에서라도 제자훈련은 여전히 필요하다. 필자는 훨씬 근원적 문제를 제기하는 중이다.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훈련의 차원인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앞에서 필자는 국제제자훈련원을 하나님 나라의 운동권을 배출하는 아지트라고 별명을 붙였다. 지난날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운동권 출신들 중에 상당한 사람들이 지금 우파적이고 보수적인 자리로 돌아서고 말았다. 인간의 의식(意識)이라는 것은 순식간에 극에서 극으로 뒤바뀔 정도로 그 토대가 허약하다. 일종의 의식화 작업인 옥 목사의 제자훈련도 역시 여기에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그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사람들을 훈련시켰다. 위에서 인용한 100주년 기념대회의 설교에서도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과 행위가 일치해야 한다고 외쳤다. 모르긴 해도 사랑의교회도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을 것이다. 덩치는 커졌겠지만, 그리고 세련미는 많아졌겠지만 실제적인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모습이 바로 사랑의교회에 투영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필자는 지금 어느 한 교회를 꼬집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변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와 만났기 때문이다. 그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는 곧 하나님,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이다. 변화도 우리의 노력이나 훈련이 아니라 은혜와 통치의 차원이라는 말이다.
이 기회를 빌려 젊은 설교자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설교자는 신자들을 변화시킬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게 낫다. 신자들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옥 목사는 왜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을까 하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그 시대의 아들과 딸들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믿음은 좋았는지 모르지만 흑인 노예를 부렸고, 오늘 한국의 강남 교인들은 설령 한국 경제가 거덜 나거나 양극화가 심화한다고 해도 강남 부동산이 오르기를 은근히 기대할 것이다. 물론 이건 강남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그래서 구원은 은총일 뿐이다. 이런 마당에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어찌 청중들을 변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궁극적인 차원에서, 믿음과 삶의 변화는 직접적으로 상관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를 믿으며 설교하는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교회의 존재의미가 무엇이냐 하고 묻지 마시라. 그걸 모른다면 아예 처음부터 기초신학(fundamental theology)을 다시 공부해야 한다. 믿음은 우리의 모든 설계와 비전을 넘어서 배타적으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이다. 그 나라는 인간이 만든 모든 경계와 범주와 의도를 허문다.
아마 필자의 이런 설명을 관념적이라고 언짢아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믿음이 중요하다고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본회퍼가 말하듯이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뒤따라 살아가는 것(Nachfolge Christi)이라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옥 목사께서도 분명히 비슷한 주장을 하실 것 같다. 이런 문제에 관해서 더 이상 논할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짧게 위의 언급을 다시 정리만 하겠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것처럼 제자가 된다는 것은 훈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믿음의 차원에 속한다. 훈련은 기독교 신앙에서 교육학이나 심리학처럼 보조적인 것이지 신-학(theos-logos)처럼 그 중심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행위 없는 믿음을 강조한 것이라기보다는 믿음이 무엇인지, 그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해석할 줄 모른다는 데에 있다.
필자의 생각에 옥 목사는 지금 제자훈련의 한계에 도달했을 것 같다. 그것만이 한국교회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 채 푯대를 향해서 달음질하듯이 30년을 달려왔는데, 한국교회가 변한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 앞에서 당혹스러워하실 것이다. 필자는 이렇게 말씀드리겠다. “목사님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필요한 시기에 꼭 필요한 일을 하셨으니 마음 편하게 가지셔도 됩니다.” 다음세대가 옥 목사의 일을 새롭게 이어가면 된다. 그들은 ‘훈련’보다는 ‘제자’의 존재론적 깊이에 집중해야할 것이다.
(기독교 사상, 2007년 8월호)
-사랑의교회 옥한흠 원로목사-
하나님 나라의 운동권
사랑의교회 원로 옥한흠 목사님(이하 ‘옥 목사’)은 총회 신학교 3학년 재학 중에 김희보 목사님이 담임이었던 성도교회의 어린이 주일학교에서 6개월간 전도사로 활동하다가 졸지에 대학부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대학부는 달랑 회장 한 사람뿐이었다. 그가 맡은 뒤로 그 대학부는 3,4년 만에 재적 350명, 출석 200명의 덩치로 컸다. 유명무실했던 대학부가 일약 전국에서 가장 큰 대학부가 되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처럼, 옥 목사는 아직 전문적인 사역자로 발을 딛기 전부터 한국교회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셈이다. 1975년부터 3년간 유학을 다녀온 옥 목사는 1978년 7월23일 강남은평교회(사랑의교회 전신)를 창립했다. 창립멤버는 열두 명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중학생과 옥 목사 내외를 제외하면 장년신자는 일곱 명이었다.(제자훈련 열정 30년, 1998년, 51쪽. 이하 ‘제자’) 사랑의 교회는 창립 후 6년 반 만에 교회당을 건축하고 입당예배를 드렸다. 그때 이미 출석 교인 1,250명으로 불어났으며, 그 뒤로도 교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현재 재적교인 5만 수천에다가, 출석 4만5천여 명의 초대형교회가 되었다.
성도교회의 대학부와 사랑의교회가 이렇게 급성장하게 된 그 배경에는 옥 목사의 목회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제자훈련’이다. 그는 기성교회의 대학부와 달리 파라처치의 대학부가 활성화되는 이유에 눈을 돌리고, 네비게이토에서 사용하는 모든 성경공부 자료들을 탐독했다. 옥 목사의 회상에 따르면 거기에는 “복음이, 훈련이, 비전이 있었다.”(이것이 목회의 본질이다, 2004년, 21쪽. 이하 ‘목회’) 이에 반해 기성교회의 대학부에는 “복음은 없고 교리만 있었다. 훈련은 없고 회의만 많았다. 비전은 없고 행사만 있을 뿐이었다.” 이 사실을 확인한 뒤로 그는 제자훈련에 ‘올인’했다. 물론 사랑의교회도 이런 목회철학으로 이끌어갔다. 오늘의 사랑의교회는 곧 제자훈련의 살아있는 역사라 할 수 있다.
제자훈련은 기독교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은 아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교회 공동체 생활에 참여했다면 이미 제자로 살아야 할 ‘훈련’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제자와 훈련 개념이 담겨 있는 셈이다. 문제는 기성교회가 교회의 형식적인 권위주의에 매몰되어 이런 제자와 훈련의 역동성을 상실했다는 데에 있다. 옥 목사는 제자훈련의 신학적 체계를 세웠고, 교회 현장에 철저하게 적용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가 말하는 제자훈련은 도대체 무엇인가?
옥 목사는 제자훈련에 대한 오해가 세 가지라고 한다. 첫째, 제자 훈련은 성경공부다. 이런 오해는 제자훈련의 근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 그에 따르면 “제자훈련은 성경공부가 아니다.” 오히려 “성경공부는 제자 훈련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둘째, 제자훈련은 전도를 잘 하고, 잘 가르치는 평신도 기능인을 배출하는 코스이다. 이런 생각도 제자훈련의 오해에서 나왔다. 제자훈련은 신앙의 개인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사회책임까지를 포괄한다. 셋째, 제자훈련은 중산층 이상의 평신도에게만 가능하다. 옥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제자훈련이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게 된 사랑의교회 신자들이 서울 강남의 중산층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그런 오해를 받을 수 있지만 원래 제자훈련은 목회자의 목회 철학에 속하지 훈련을 받아야 할 평신도의 사회적 수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게 아니다. 이런 오해를 넘어서는 제자훈련의 목적을 옥 목사는 이렇게 밝혔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신자의 자아상을 확립하는 것이다. 예수처럼 되고 예수처럼 살기를 원하는 신앙인으로 만드는 데 있다. 이것이 가장 정확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평신도를 깨운다, 개정판 1999년, 194쪽, 이하 ‘평신도’)
제자훈련의 목적을 다시 세분화하면 인격적인 면과 사역적인 면으로 구분된다. 인격적인 면에서 제자훈련은 평신도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도록 하는 것이다. 옥 목사의 표현에 따르면 제자훈련은 교역자와 평신도가 동참하는 ‘영적 몸부림’이다. 사역적인 면에서 제자훈련은 평신도로 하여금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게 만드는 것이다. 평신도들이 실제 삶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신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이끌어내야 한다.
자기의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자기가 사는 환경이 어떠하든 간에 자기가 머무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는 소명자로 만드는 것이 제자훈련이다.(평신도 195)
위에서 필자가 옥 목사의 제자훈련이 전적으로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이 아니라고 지적했듯이, 옥 목사가 제시하고 있는 제자훈련의 두 가지 목적도 사실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인격적인 면은 기독교인의 존재론적 변화를 말하며, 사역적인 면은 행위의 변화를 말한다. 전자는 칭의이며, 후자는 성화에 해당된다. 목사 치고 칭의와 성화를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목사들이 제자훈련의 두 차원을 염두에 두고 목회도 하고 설교도 한다. 옥 목사가 이들과 구별되는 이유는 칭의와 성화 문제를 훈련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데에 놓여 있다. 다른 말로, 신앙의 의식화(意識化)라고 할 수 있다. 이념 도서를 읽거나 자체 토론의 방식으로 역사의식을 고취하여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선 지난날의 운동권의 행태와 같다. 옥 목사의 국제제자훈련원은 하나님 나라 운동권의 아지트가 아닐는지.
그리스도인 실존
제자훈련의 목적에 인격적인 차원과 사역적인 차원이 있듯이 옥 목사의 설교에서도 이 두 차원이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다. 필자가 검토한 바에 따르면 그의 설교는 시기적으로 그 강조점이 조금씩 변했다. 사랑의교회를 개척할 때부터 1990년 초 로마서 연속설교를 할 때까지는 주로 그리스도인 인격이, 그 뒤로 IMF 시대인 1990년대 말까지는 주로 사역이, 그리고 2000년대에는 양자의 일치가 그 특징으로 나타난다. 시간의 제약으로 필자가 옥 목사의 설교를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없었으며, 일정한 특징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칼로 무를 자르듯이 선명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시기적 구분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자신이 없다. 이 문제는 훗날 옥한흠 목사 평전을 쓸 젊은 학자의 몫으로 넘겨주고, 오늘 필자는 제자훈련의 두 기둥인 인격과 사역이 그의 설교에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옥 목사의 설교는 우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가장 큰 무게를 둔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 인격이다. 그의 교회론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한스 큉의 표현으로 바꾼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 실존(Christsein)이다. 그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바탕에 두고 설교한다. 이 질문은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교회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도 연결된다. 이런 질문은 세례교육으로 끝나거나 아니면 한두 번 설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설교자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중심 주제이다. 이런 중심 주제에 관심을 잃게 되면 설교자들은 결국 본질적이지 않는 것들, 즉 헌금, 주일성수, 목사에게 순종, 총동원주일 등등, 일종의 교회활동에 관한 것들에만 사로잡히게 된다. 옥 목사는 기성교회에서 이런 문제들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신앙의 근본문제를 들추어내는 방식으로 제자훈련을 했고, 그런 방식으로 설교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곧 구원 문제이다.
옥 목사는 1989년부터 15개월간 투병생활을 거친 뒤 다시 선 강단에서 로마서를 본문으로 연속 강해설교를 했다. 그것을 세권의 설교집으로 묶어냈는데, 1권은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1992년, 이하 ‘구원’), 2권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1993년, 이하 ‘나의 구원’), 3권은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1994년, 이하 ‘구원받은 자’)이다. 각각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로마서의 중심 주제를 구원으로 보았다. 구원은 그에게 황홀한 경험이며, 그 구원은 그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따라서 그런 구원에 참여한 사람의 삶은 변화될 수밖에 없다. 황홀한 구원은 기독교 신앙의 초월적 차원을 가리키며,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인격적인 의지와 결단이 요청된다는 의미이고, 변화된 삶은 신앙과 삶의 일치를 가리킨다. 다시 정리하면, 옥 목사의 설교는 구원의 초월적 신비에 참여한 그리스도인이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변화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제1권에 실린 “새로 열린 구원의 길”(롬 3:19-26)이라는 설교를 보자. 옥 목사는 우선 본문 앞에 나오는 내용을 짚었다. 거기서 바울은 예수가 없는 삶의 절망적인 상황을 지적했다는 것이다. 이제 옥 목사는 앞 구절과 오늘 설교의 본문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고민’이라는 작은 주제를 설명하는 것으로 설교의 문을 연다. 하나님의 고민은 두 가지이다.
첫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을까 하는 문제이다. 지금까지는 사람이 율법을 행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었는데, 하나님이 얻은 결론은 사람이 율법을 도무지 지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율법은 선을 행하게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습니다.”(구원 142)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폐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거룩을 포기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해도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찾으셔야만 했다.
둘째,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논리는 아주 분명하다. 인간은 모두 죄로 타락했는데, 이런 죄인을 무조건 의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남아있는 길은 죄를 죄대로 벌하고 의를 의대로 보상해야 하는 것이다. 옥 목사는 이런 성서텍스트의 맥락을 청중들이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나간다.
하나님 자신의 의로움도 증명하고 죄인인 우리도 의로운 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 길이 없을까, 하고 고심한 하나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분의 입장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므로 우리를 쉽게 구원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지 마세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다 동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구원 145)
위의 진술은 다른 목사들의 설교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표면적으로 그런 걸 말하는 설교자가 있고, 실제로 그런 사태 안으로 들어가서 말하는 설교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런 차이를 확인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설교의 전체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그 설교자가 기독교 신앙의 깊이에 들어가서 진술하고 있는지 아니면 단지 풍월만 읊고 있는지 구분이 된다. 옥 목사의 전체 설교에서 위의 진술은 큰 무게를 지닌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가서 자기가 체험하는 신앙의 세계를 흡사 눈으로 보듯이 설명하는 설교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무게이다.
설교자에게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의 정보를 얼마나 아는가, 또는 그것을 수사학적으로 어떻게 잘 표현하는가가 아니라 신앙의 중심에 영적인 발을 딛는 것이다. 수영을 배우려면 실제로 물에 몸을 담가야 하듯이 설교자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물에 몸 전체를 담가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누가 영의 세계에서 수영하고 있는가? 목사 후보생들이 이를 위해서 소정의 신학과정을 거치지만 그것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공부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여기에 왕도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시인이 되려면 언어의 존재론적 세계와 이 세상의 깊이를 이해하고, 또한 수없는 습작의 과정이 필요하듯이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더구나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훈련이 필수불가결이다. 아마 옥 목사의 제자훈련도 그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리라.
다시 옥 목사의 설교로 돌아가자. 그는 하나님이 이 두 가지 난제에 저촉 받지 않는 새로운 구원의 길을 내놓으셨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21절)에서 ‘이제는’이 중요하다. 이것은 일종의 ‘전환점’이다. “이전에는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 길이 열려 있었는데, 이제는 새 길이 열렸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폐기한다는 게 아니다. 율법과 관계없이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찾거나 생각해낸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참으로 복된 길입니다. 드디어 이 길이 나타났습니다. 구약의 시대가 종결되고 신약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옛 언약은 폐하고 새 언약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행하면 구원받는 율법시대에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복음의 시대로 넘어온 것입니다.(구원 146)
이제 옥 목사는 이렇게 질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새로운 구원의 길인가? 그는 강해설교자답게 본문의 내용을 차례대로 따라가면서 설명한다. 이게 강해설교의 힘이라면 힘이다. 공연히 자기의 종교상식에 의지하지 않고 성서텍스트에 의존할 때 주어지는 말씀의 힘이다. 여기서 한눈팔지 않고 본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게 쉬운 건 아니다. 그 이유는 말씀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또는 성서텍스트를 풀어낼 내공이 쉽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내공이 없는 설교자들은 성서텍스트에 관해서 한두 마디 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선정적인 예화에 기울어지거나 청중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한다. 그런 설교는 삶의 내용이 없는 부모들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늘어놓은 잔소리와 같다. 이런 설교에 은혜를 받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좀 심하게 말해서 임상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옥 목사는 이런 일 없이 본문을 그대로 밀고나갈 줄 안다. 그는 25절 말씀을 인용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거룩함과 공의를 손상시키지 않고 죄인인 사람을 의인으로 받으실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이며 “말로 다할 수 없이 큰 은혜”이다. 이제 설교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옥 목사는 이 은혜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가 있다.(24절) 둘째,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는 은혜가 있다.(25절) 셋째,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우리의 의가 되신 은혜가 들어있다.(26절) 옥 목사는 이 대목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다. 예수님을 통한 은혜의 깊이와 감격을 청중들에게 전하려는 것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설교구성은 강해설교의 한계이다. 성경구절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설교를 산만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그가 세 가지로 구분한 내용은 사실 한 가지이다. 구속, 화목제물, 의는 구원에 관한 세 가지 관점일 뿐이다. 설교가 아니라 성경공부 시간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자잘하게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의 주제로 집중해야 할 주일공동예배의 설교에서는 별로 적합하지 않다. 어쨌든지 옥 목사는 이 설교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절 다른 말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길을 올곧게 전했다. 많은 설교자들은 이런 내용만으로 40-50분에 이르는 설교 시간을 채우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옥 목사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과 깊이를 정확하게 뚫어보는 사람이며,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 온 영혼을 기울이는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외치는 것으로 이 설교를 끝냈다.
얼마나 기막힌 주님의 은혜입니까?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려고 하나님은 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는 값없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은혜를 생각하면 할수록 터져 나오는 감사와 감격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이 놀라운 기쁨을 맛본 사람이 어떻게 그 은혜에 보답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을 찬양합시다. 우리 주님께 영광 돌립시다. 우리 주님을 위해 헌신합시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과제요, 목적인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합시다.(구원 154)
옥 목사의 설교가 청중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로 다가가는 이유는 위의 설교에서 보았듯이 복음의 근본인 케리그마를 확실하게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청중들이 아무리 계몽되었다고 하더라도 성서의 케리그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문제는 설교자가 이 케리그마를 앵무새처럼 달달 외우고 만다는 데에 있다. 다행히 옥 목사는 젊은 시절부터 광맥을 좇는 광부처럼 이 케리그마의 복음에 초지일관이다.
오늘의 젊은 목사들도 이 케리그마에 천착하기를 바란다. 만약 그런 설교를 전할 마음이 생기지 않거나 그것에 관해서 할 말이 별로 없다면 자신이 기독교 설교자인지 아닌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웃으면 복이 와요.” 식이나 “친절한 사람이 됩시다.”는 식의 설교를 하고 만다면 그는 복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거나 복음을 외면하는 사람이다. 오늘의 신자들이 감성적인 드라마나 말장난에 불과한 개그 프로그램에 길들여져서 케리그마를 따분하게 여긴다고 생각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는 아직 케리그마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설교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우주론적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일어났던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다.
거룩한 분노
옥 목사의 설교는 제자훈련의 두 번째 목적인 사역적인 면에서도 분명한 특징을 보인다. 훌륭한 무용수를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선생처럼 그는 청중들을 그리스도인다운 삶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불철주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런 관점은 오늘날 신자와 불신자가 구별되지 않는 이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나왔다. 오늘의 교회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하다.
근간에 들어 기독교가 무력하다고 하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성경적인 표현을 빌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점점 짠 맛을 잃어가고 있다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가슴을 찢는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무엇이 교회를 무력하게 만듭니까? 무엇이 성도의 생활에서 짠 맛을 앗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말씀을 알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나의 구원 26)
그의 설교는 2천 년 전 세례 요한의 설교처럼 청중들의 양심을 큰 망치로 두드린다. 교양의 차원에서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들으면 상당히 불편할 정도로 그의 설교는 고도의 도덕성과 책임감을 요구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도덕성이 약한 정권과 ‘잘살아 보세’라는 장밋빛 구호 아래서 살아온 우리 국민들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될 중요한 가치들을 포기하는 데 길이 들어 버렸습니다. 좀더 편안하게 살 수 있다면, 돈만 많이 벌 수 있다면 도덕과 양심 따위는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이 점에서 대해서는 기독교인들조차 떳떳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 기독교의 문제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 스스로가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도덕과 양심을 저버리고 산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고도 나라꼴이 엉망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라 할 것입니다.(우리가 바로 살면 세상은 바뀝니다, 1998년, 36쪽. 이하 ‘세상’)
도덕적인 삶을 요구한다고 해서 모든 설교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런 방식으로 청중들의 영성을 파괴하는 설교가 있고, 오히려 살려내는 설교가 있다. 옥 목사는 어느 한 순간도 기독교 신앙을 도구로 삼아 청중들을 닦달하지 않는다.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그의 요구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당연한 사명이요 사역이라는 신앙고백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신앙적 진정성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도덕적 설교는 설득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청중들이 듣기 언짢아하더라도 그것에 구애받지 않는 힘을 확보하고 있다. 이는 곧 그의 설교가 목회의 기능에 속한 게 아니라 영적 본질에 속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영성에 근거해서 그는 부도덕한 개인과 사회 앞에서 분노하고 있다. 이것은 거룩한 분노 아니겠는가.
목사는 분노보다는 모든 부도덕성까지 품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이 풍부해야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사람의 잘못을 일일이 따지고 든다면 도대체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직면한 사람은 분노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있는 법이다. 루이스는 분노가 없다는 것, 특히 우리가 의분이라고 부르는 분노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심상치 않은 증상일 수 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이교도들보다 더 지독한 저주의 말을 내뱉은 이유는 그들이 “선과 악의 문제를 좀더 심각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시편기자들) 폭언을 가만히 살펴보면 대부분 단순히 자신들이 어떤 일을 당했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노를 일으킨 그 일 자체가 명백히 잘못된 일이요, 그것은 희생자인 그들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미워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C.S. 루이스, 시편사색, 50쪽, 괄호 안은 필자 주)
사회적 책임
필자가 거룩한 분노라고 이름붙인 옥 목사의 윤리 도덕적 설교는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이 강하기는 하지만 사회적인 차원도 그에 못지않게 강하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제자는 사회의 공적인 책임으로 면제되지 않는다. 공적인 책임은 무엇인가?
정의를 외치고 약한 자와 억눌린 자 편에 서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데 앞장 서는 것을 말합니다. 사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면 교회가 그 타락의 환부를 끌어안고 치유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감당해야 할 공적인 책임입니다.(세상 14)
이런 공적인 책임을 도외시한 채 자기만을 위한 종교에 몰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그는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기독교 비판은 아주 날카롭다. 오늘날 기독교가 개인의 전용물이 되고 말았다. 예수가 ‘만유의’ 주, ‘온 세상’의 주가 아니라 단지 ‘나’의 주로 축소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소위 복음주의 설교자들 중에서 그리스도인의 사회 윤리적 책임을 옥 목사만큼 강조하는 설교자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사회윤리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 중의 하나인 노사분규에 관한 옥 목사의 입장을 조금 더 따라가 보자.
설교 “빈자처럼, 부자처럼”(잠 13:7,8)에서 옥 목사는 부자들을 향해서 위선을 버리라고 따끔하게 경고한다. 그들의 부는 단지 자신의 능력이나 행운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결실이기 때문에 이에 합당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 구로공단의 모 전자회사에서 노사분규가 일어났다. 사주가 교회의 중직을 맡은 사람이어서 그 여파가 심각했다. 그는 어느 한편을 일방적으로 두둔하지 않겠다고 전제한 채, 관련 자료를 검토해보면 사주가 그동안 근로자들의 인권을 유린해왔다는 사실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사주는 법이 정한 최저생활비를 근로자들에게 주지 않았고, 납 연기로 자욱한 공장에서 하루 평균 13-15시간이나 일을 시켰고, 화장실에도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또한 매일 아침예배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근로자들을 40분이나 일찍 출근하게 한 채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열심히 일하라.”는 똑같은 설교를 되풀이 했다고 한다. 파업에 동참한 근로자들이 사랑의교회 대학부에 보낸 문건을 읽은 옥 목사는 그 문제를 이렇게 정리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노사간의 갈등은 대부분 가진 자가 가진 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한국경제가 성장해온 과정을 되돌아볼 때 가진 자의 횡포가 그 도를 넘어섰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많은 사주들이 마치 자기는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것처럼, 그래서 근로자의 처지를 외면해도 괜찮은 것처럼 행동했던 것입니다.(세상 207)
만약 필자가 위의 설교를 누가 했는지 모른 채 접했다면 노동운동에 투신한 소위 운동권 목사의 설교로 착각했을지 모른다. 흡사 아모스의 예언처럼 들리는 그의 진술을 조금 더 들어보자.
가진 자는 무엇보다 솔직해야 합니다. 불경기라고 엄살 부리지 마십시오. 이제는 없는 체하는 것으로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시대가 끝났습니다. 자기의 몫을 조금 줄이는 한이 있어도 근로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일에 성실히 임해야 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남보다 가진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에 주어진 가진 자로서의 의무를 인정해야 합니다.(세상 208)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요즘(7월11일) 한국사회와 한국교계는 이랜드 노조의 파업문제로 시끄럽다. 9년 전 행했던 옥 목사의 이 설교는 오늘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기독교 기업인인 이랜드 사주에게도 해당되는 게 아닐는지. 마침 파업 기간 중 월드컵 경기장에서 개최된 “2007 한국교회 대부흥기념 100주년 기념대회”에서(7월8일) 옥 목사가 설교자로 나섰다. “주여, 살려주옵소서.”(계3:1-3)라는 설교의 제목은 한국교회를 살려달라는 호소가 아니겠는가. 그는 “거룩하신 주여! 이놈이 죄인입니다. 이놈이 한국교회, 입만 살았다고 떠들고 행위가 죽어버린 한국교회를 만든 장본인입니다.” 하고 기도를 드렸다. 믿음과 행위의 일치만이 한국교회가 살아나는 길이라고 설교한 옥 목사의 눈에 비정규직의 절규로 시작된 이랜드 사태가 어떻게 보였을지 궁금하다.
교회의 공적 책임에 관한 옥 목사의 설교는 북한 문제에서도 상당히 전향적이다. 물론 그는 기본적으로 북한을 불신한다. 그에게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저주스러운 극성을 피우며 “거짓된 주체사상에 속아 발광하고 있는 민족”이다.(나의 구원 207. 구원받은 자 73, 세상 69, 130 참조)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억압할 뿐만 아니라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일종의 대체종교의 우상처럼 받아들여지는 북한 체제가 옥 목사의 눈에 해괴하게 보인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 눈에도 북한은 그 이유가 어디 있든지 불량해 보인다. 그러나 창조의 하나님을 실제로 믿고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과 역사를 표면적 현상으로만 볼 게 아니라 훨씬 심층적 시각으로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쨌든지 북한에 대한 옥 목사의 불신은 여느 반공주의 설교자들과 다를 게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영성이 있다. 그 영성은 곧 하나님 말씀에 고지식하게 사로잡힌 사람에게서 나오는 원초적 능력이다. 그는 성서텍스트를 가능한 문자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축자영감설의 입장을 고수하는데, 그런 입장이 역설적으로 역사 진보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는 말이다. 직접 그의 설교를 따라가 보자.
옥 목사는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라.”(롬 12:19-21)는 제목의 설교에서 인류가 당면한 굶주림의 문제를 제기했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먹고 마시는 것은 창조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장 기본적인 삶의 권리”이다.(세상 230) 여기에는 어느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 심지어 “악인이라 해도 먹고 살 권리를 보장” 받는다. 어린이, 노인들, 장애인들을 먹고 살 수 있도록 건강한 사람이 앞장 서야 한다. “열심히 일하고 세금을 제대로 내어 그들에게도 복지 혜택이 돌아가도록 도와야” 한다. “많이 가진 자는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들의 먹고 살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성서본문에 의지해서 옥 목사는 원수까지 먹고 마시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원수에는 물론 북한이 포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가 주리면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 때문에 먹고 마실 권리마저 보호받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상적으로는 그들이 우리의 원수일지 모르지만 핏줄로는 형제자매들입니다.(세상 224)
그는 북한 주민들에게 “양식을 제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따지지 말고 그들을 도와주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정치적인 계산이나 경제적인 조건을 따지지 말자고 한다. “그 모든 이유들을 다 내려놓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옥 목사는 이 설교의 대부분을 북한 돕기에 할애했다. 사랑의교회가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북한 동포를 돕는 일에 성의를 모아야 한다고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제시했다. 이런 일들이 그 뒤로 계속되었는지, 아니면 단발성으로 끝났는지, 더 나가서 옥 목사의 이런 생각이 지금까지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미 10년 전에 남북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는 기독교의 ‘햇볕정책’이라고 불릴만한 그날의 설교를 이렇게 맺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한다면 작은 것이라도 아끼고 절약해서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들의 먹고 마실 권리를 보호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책임을 잘 감당할 때 공산주의 사상으로 얼어붙었던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질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복음에 대해서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악인의 권리까지도 보장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세상 232)
앞에서도 짚었지만 옥 목사는 복음주의, 또는 보수적인 계열에 속한 설교자이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면의 한계로 자세하게 다룰 수 없지만 그에게는 생태적 마인드도 명확해 보인다. “지금 우리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조금 못사는 쪽을 택하고 자연을 살릴 것인지 아니면 조금 더 잘살기 위해서 자연을 계속 훼손시킬 것인지 갈림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세상 237) 이의 실천을 위해서 그는 오래 전부터 샴푸를 사용하지 않고 비누로 머리를 감고, 이면지를 활용하며, ‘기독교 환경연대’ 이사로 참여했다고 한다. 이런 생태 마인드는 신학적 사유가 아니라 제자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깊은 열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생태계를 훼손하는 행위를 보면 분노가 치민다고 한다. “화를 내고 욕을 해서 그들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면, 환경 파괴가 줄어들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한다.(세상 253) 이런 대목에서도 우리는 옥 목사의 거룩한 분노를 읽을 수 있다.
제자의 삶
필자는 옥 목사의 설교를 접하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도저히 따라가기 힘든 복음에 대한 열정, 말씀에 대한 확신, 성직주의와 권위주의를 넘어서는 원초적 신앙, 겸손한 지도력, 열린 보수주의, 제자훈련을 중심으로 한 목회철학, 높은 도덕성 등등이 부끄러움의 요인들이다. 그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울기도 하고(구원 233), 가슴 벅차할 때가 많으며(자존심 73), 말씀이 얼마나 따뜻하고 감미로운가 하고 감동할 때가 많다.(구원 198) 그뿐만 아니라 말씀 앞에서 그는 겸손하다. 아는 것만큼만 전하고 나머지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찬양할 뿐이라고 한다.(나의 구원 271) 이렇게 그의 영혼은 복음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이런 열정으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안고 있던 화두는 다음과 같다. “왜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게 없는가?” 그가 찾은 대답은 그리스도인들이 인격적으로 참된 제자가 되지 못했고, 제자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 길은 제자훈련이다. 그는 여기에 평생을 투신했다. 옥 목사 부인의 말처럼 그는 그 일에 미쳤다.(제자 121) 그뿐만 아니라 그는 세계 교회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목회의 성과도 올렸다. 이 성과는 단순히 물량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명예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게 바로 제자훈련 한 가지로 집중된다.
이제 필자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묻는다. 한국교회가 달라졌나? 조금 더 직접적으로 묻자. 평생 몸 바친 사랑의교회와 그 지체들은 제자훈련을 통해서 달라졌나? 대답하기 힘들다면, 조금 돌려서 이렇게 묻자. 사랑의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사회는 변화되었을까? 서울 강남에 살고 있는 분들은 사랑의교회 신자들에게 감동을 받아서 새롭게 변화되었을까? “우리가 바로 살면 세상은 바뀝니다.”는 옥 목사의 주장이 옳다면 사랑의교회 신자들이 제자로 변화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은 그 지역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강남이 변한 게 없다면 사랑의교회도 역시 제자로 살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 자리에서 제자훈련을 통해 사랑의교회가 크게 부흥한 걸 보라고 말하는 분이 있다면 그는 옥 목사의 제자훈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 글을 쓰면서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옥 목사와 제자훈련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교회성장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를 지울 수 없었다. 옥 목사의 제자훈련은 교회성장 프로그램이 결코 아니다. 어떤 목사가 교회성장을 위해서 옥 목사를 따라서 제자훈련을 시도한다면 성공할 확률이 별로 높지 않을 것이다. 제자훈련은 교회 성장론이 아니라 교회론 자체이다. 교회 성장은 바른 교회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일 뿐이다. 거꾸로 제자훈련이 바르게 되면 경우에 따라서 교회성장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필자가 보기에 제자훈련은 80,90년대 서울의 강남이라는 특별한 장소와 특별한 시기에 필요했던, 그리고 특별한 카리스마를 지난 지도자에 의해서 수행된 목회 패러다임이었다. 이것이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효력을 나타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필자는 지금 옥 목사의 제자훈련을 용도폐기하려는 게 아니다. 훈련 없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없다는 가장 초보적인 신앙의 차원에서라도 제자훈련은 여전히 필요하다. 필자는 훨씬 근원적 문제를 제기하는 중이다.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훈련의 차원인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앞에서 필자는 국제제자훈련원을 하나님 나라의 운동권을 배출하는 아지트라고 별명을 붙였다. 지난날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운동권 출신들 중에 상당한 사람들이 지금 우파적이고 보수적인 자리로 돌아서고 말았다. 인간의 의식(意識)이라는 것은 순식간에 극에서 극으로 뒤바뀔 정도로 그 토대가 허약하다. 일종의 의식화 작업인 옥 목사의 제자훈련도 역시 여기에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그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사람들을 훈련시켰다. 위에서 인용한 100주년 기념대회의 설교에서도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과 행위가 일치해야 한다고 외쳤다. 모르긴 해도 사랑의교회도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을 것이다. 덩치는 커졌겠지만, 그리고 세련미는 많아졌겠지만 실제적인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모습이 바로 사랑의교회에 투영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필자는 지금 어느 한 교회를 꼬집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변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와 만났기 때문이다. 그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는 곧 하나님,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이다. 변화도 우리의 노력이나 훈련이 아니라 은혜와 통치의 차원이라는 말이다.
이 기회를 빌려 젊은 설교자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설교자는 신자들을 변화시킬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게 낫다. 신자들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옥 목사는 왜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을까 하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그 시대의 아들과 딸들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믿음은 좋았는지 모르지만 흑인 노예를 부렸고, 오늘 한국의 강남 교인들은 설령 한국 경제가 거덜 나거나 양극화가 심화한다고 해도 강남 부동산이 오르기를 은근히 기대할 것이다. 물론 이건 강남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그래서 구원은 은총일 뿐이다. 이런 마당에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어찌 청중들을 변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궁극적인 차원에서, 믿음과 삶의 변화는 직접적으로 상관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를 믿으며 설교하는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교회의 존재의미가 무엇이냐 하고 묻지 마시라. 그걸 모른다면 아예 처음부터 기초신학(fundamental theology)을 다시 공부해야 한다. 믿음은 우리의 모든 설계와 비전을 넘어서 배타적으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이다. 그 나라는 인간이 만든 모든 경계와 범주와 의도를 허문다.
아마 필자의 이런 설명을 관념적이라고 언짢아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믿음이 중요하다고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본회퍼가 말하듯이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뒤따라 살아가는 것(Nachfolge Christi)이라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옥 목사께서도 분명히 비슷한 주장을 하실 것 같다. 이런 문제에 관해서 더 이상 논할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짧게 위의 언급을 다시 정리만 하겠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것처럼 제자가 된다는 것은 훈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믿음의 차원에 속한다. 훈련은 기독교 신앙에서 교육학이나 심리학처럼 보조적인 것이지 신-학(theos-logos)처럼 그 중심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행위 없는 믿음을 강조한 것이라기보다는 믿음이 무엇인지, 그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해석할 줄 모른다는 데에 있다.
필자의 생각에 옥 목사는 지금 제자훈련의 한계에 도달했을 것 같다. 그것만이 한국교회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 채 푯대를 향해서 달음질하듯이 30년을 달려왔는데, 한국교회가 변한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 앞에서 당혹스러워하실 것이다. 필자는 이렇게 말씀드리겠다. “목사님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필요한 시기에 꼭 필요한 일을 하셨으니 마음 편하게 가지셔도 됩니다.” 다음세대가 옥 목사의 일을 새롭게 이어가면 된다. 그들은 ‘훈련’보다는 ‘제자’의 존재론적 깊이에 집중해야할 것이다.
(기독교 사상, 2007년 8월호)
2007.07.28 23:16:25
최근 이 사이트를 통해서 좋은 글들을 접하게 되어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설교비평과는 다소 상관이 없어보이기도 하지만, 시각 차이에 대해서 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구원론에 있어서 의견 차이가 사역의 방향과 내용에도 어떤 차이를 가져온는 것 같습니다.
보수적 복음주의에서는 종말(개인의 죽음/역사적 종말)에 있을 천국과 지옥에 대한 믿음과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 그 종말을 판가름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는 한 시라도 빨리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중압감/조급함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빨리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사용하게 되고, 질보다 양을 중요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영리 입니다.
그러나 진보적이지 않는 복음주의는 대부분 만인 구원론을 따르기 때문에 종말과 구원에 대하여 위의 보수적 기독교와 분명 다릅니다. 그 결과 사역의 방향과 내용도 분명히 다르고요. 그리고 깊이를 더욱 추구하게 됩니다. 그 반면, 전파가 쉽지 않고 다소 문턱이 높다고 할 수 있지요. 다소 지적(인문학적)이고 정적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전하는 복음에도 보수적 복음주의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한 문제는 양보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기독교 사역과 삶을 결정 짓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에서 진보와 보수의 사역이 차이가 생긴다고 볼 수 있는 것같습니다.
진보와 보수가 사역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들로 인해서 논쟁을 많이 하는데, 사실 이 구원에 관한 문제에 답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는 만날 수 없는 강에서 공허한 논쟁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문제를 속시원하게 지적하는 사람도 없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눈가리고 아웅, 어쩌면 비겁함이 아닐까요? 사람이 이성이 있는 한 다른 구원론으로는 다른 사역이 나오고 그것은 항상 극명한 인식의 차이를 가져오고 다툼은 벗어날 수 없을 듯합니다.
제 생각에 대한 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설교비평과는 다소 상관이 없어보이기도 하지만, 시각 차이에 대해서 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구원론에 있어서 의견 차이가 사역의 방향과 내용에도 어떤 차이를 가져온는 것 같습니다.
보수적 복음주의에서는 종말(개인의 죽음/역사적 종말)에 있을 천국과 지옥에 대한 믿음과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 그 종말을 판가름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는 한 시라도 빨리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중압감/조급함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빨리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사용하게 되고, 질보다 양을 중요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영리 입니다.
그러나 진보적이지 않는 복음주의는 대부분 만인 구원론을 따르기 때문에 종말과 구원에 대하여 위의 보수적 기독교와 분명 다릅니다. 그 결과 사역의 방향과 내용도 분명히 다르고요. 그리고 깊이를 더욱 추구하게 됩니다. 그 반면, 전파가 쉽지 않고 다소 문턱이 높다고 할 수 있지요. 다소 지적(인문학적)이고 정적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전하는 복음에도 보수적 복음주의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한 문제는 양보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기독교 사역과 삶을 결정 짓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에서 진보와 보수의 사역이 차이가 생긴다고 볼 수 있는 것같습니다.
진보와 보수가 사역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들로 인해서 논쟁을 많이 하는데, 사실 이 구원에 관한 문제에 답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는 만날 수 없는 강에서 공허한 논쟁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문제를 속시원하게 지적하는 사람도 없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눈가리고 아웅, 어쩌면 비겁함이 아닐까요? 사람이 이성이 있는 한 다른 구원론으로는 다른 사역이 나오고 그것은 항상 극명한 인식의 차이를 가져오고 다툼은 벗어날 수 없을 듯합니다.
제 생각에 대한 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2007.07.28 23:12:46
오늘도 설교준비때문에 고민하다가 설교비평을 보고 많은것을 배워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알아야 잘 믿을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강조하여 주시니 힘이 되네요
참 많은것을 배우며 다른 사람한테 소개도 못하는 형편이니
안타깝네요
중국에서는 한번도 들어볼수 없는것이여서 잘 설명이 되지않으면 이단이라고도
오해할수 있으니까요
중국은 아직 신앙이 아주 보수적이니까요
더 많이 잘 배우고 소개를 해야겠네요
정말 감사하고 더욱 많은 질문 드릴수 있는 그날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알아야 잘 믿을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강조하여 주시니 힘이 되네요
참 많은것을 배우며 다른 사람한테 소개도 못하는 형편이니
안타깝네요
중국에서는 한번도 들어볼수 없는것이여서 잘 설명이 되지않으면 이단이라고도
오해할수 있으니까요
중국은 아직 신앙이 아주 보수적이니까요
더 많이 잘 배우고 소개를 해야겠네요
정말 감사하고 더욱 많은 질문 드릴수 있는 그날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2007.07.29 04:02:27
정목사님,
서울 오프 모임이 있은 후에 이렇게 많은 분량의 글을 올려 주시니 그저 감사합니다.
그저 옥목사님이 상암동에서 설교하셨다고 하는 자신을 돌아본 이야기에 대한 고민이 있습니다.
열심히 걸어왔지만 잘 못된 길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인생들의 한계를 봅니다.
30여년 목회의 결과에 자연스럽게 물러남에도 보다더 건강한 교회의 모습으로 살아있기를 바라는
후배(진정한 주님의 제자)들을 키워 놓지 못한 결과인듯합니다.
자연의 모든 만물은 소리없이 왔다가 갈 때 역시 흔적없이 갑니다.
그런데 오직 인간만 시끄럽게 왔다가 많은 일을 벌려놓고 떠들다가 죽는 다는 것이겠지요.
강남역에 자리하고 있는 교회의 뒷일은 누가 감당을 할지요.
그 뒷일을 감당케하기위해서 후계자로 모신 옥한흠목사님의 후임에 오목사님의 행보...
오정현목사님 역시 옥목사님의 후광을 입어서 높은 자리라는 자리에는 벌써 다 올라서 이제 더 높은...
예수 팔아서 미화시키는 종교백화점의 성황에 헛웃음이 절로 납니다.
우리들의 종교성만을 강화시키는 그런 번지름한 기름칠에 길들여진 존재들의 모임으로...
지난번 서울 모임에서도 이랜드의 사태에 대한 짧은 언급이 있으셨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기독실업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경제의 힘을 소유하기 위한 욕심에 사로잡힌 결과로 기업을 키우는 일에 엉뚱한 열매들만이...
결국 선한것 없이 하나님을 욕먹이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군요.
이랜드 박사장님 역시도 타당한 논리로는 가능한 변명이겠지만 어찌 주님 앞에서 입을 뻥긋하겠습니까?
물러날 때를 잘 알아서 자연스럽게 물러 날 줄 아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뒷일은 뒷 사람에게 양도하는 겸손이 좋습니다.
주님 역시 당신의 일과 남은 사역을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던 그의 겸손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무튼 옥한음목사님 같은 이 시대의 교회의 어른이 이제와서 어찌 할 수 없는 길을 걷는 교회를
안타깝게 회상하는 남은 여정에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하길 바랄 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 어쩔 수 없이 사람과 더불어 걸어가지만
주님 잃어버려도 걸어가는 일에는 전혀 문제 되지 아니한 오늘 현실 교회를 걱정하며...
날마다 교회의 개혁과 성도들의 자유한 영성의 열림을 걱정하시는 정목사님께 감사를...
주님의 거룩함이 임하는 모임으로 함께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 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오래라도 기다리며 인내하는 저희가 되도록 도우소서...
귀한 글 잘 읽고 갑니다.
서울 오프 모임이 있은 후에 이렇게 많은 분량의 글을 올려 주시니 그저 감사합니다.
그저 옥목사님이 상암동에서 설교하셨다고 하는 자신을 돌아본 이야기에 대한 고민이 있습니다.
열심히 걸어왔지만 잘 못된 길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인생들의 한계를 봅니다.
30여년 목회의 결과에 자연스럽게 물러남에도 보다더 건강한 교회의 모습으로 살아있기를 바라는
후배(진정한 주님의 제자)들을 키워 놓지 못한 결과인듯합니다.
자연의 모든 만물은 소리없이 왔다가 갈 때 역시 흔적없이 갑니다.
그런데 오직 인간만 시끄럽게 왔다가 많은 일을 벌려놓고 떠들다가 죽는 다는 것이겠지요.
강남역에 자리하고 있는 교회의 뒷일은 누가 감당을 할지요.
그 뒷일을 감당케하기위해서 후계자로 모신 옥한흠목사님의 후임에 오목사님의 행보...
오정현목사님 역시 옥목사님의 후광을 입어서 높은 자리라는 자리에는 벌써 다 올라서 이제 더 높은...
예수 팔아서 미화시키는 종교백화점의 성황에 헛웃음이 절로 납니다.
우리들의 종교성만을 강화시키는 그런 번지름한 기름칠에 길들여진 존재들의 모임으로...
지난번 서울 모임에서도 이랜드의 사태에 대한 짧은 언급이 있으셨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기독실업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경제의 힘을 소유하기 위한 욕심에 사로잡힌 결과로 기업을 키우는 일에 엉뚱한 열매들만이...
결국 선한것 없이 하나님을 욕먹이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군요.
이랜드 박사장님 역시도 타당한 논리로는 가능한 변명이겠지만 어찌 주님 앞에서 입을 뻥긋하겠습니까?
물러날 때를 잘 알아서 자연스럽게 물러 날 줄 아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뒷일은 뒷 사람에게 양도하는 겸손이 좋습니다.
주님 역시 당신의 일과 남은 사역을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던 그의 겸손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무튼 옥한음목사님 같은 이 시대의 교회의 어른이 이제와서 어찌 할 수 없는 길을 걷는 교회를
안타깝게 회상하는 남은 여정에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하길 바랄 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 어쩔 수 없이 사람과 더불어 걸어가지만
주님 잃어버려도 걸어가는 일에는 전혀 문제 되지 아니한 오늘 현실 교회를 걱정하며...
날마다 교회의 개혁과 성도들의 자유한 영성의 열림을 걱정하시는 정목사님께 감사를...
주님의 거룩함이 임하는 모임으로 함께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 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오래라도 기다리며 인내하는 저희가 되도록 도우소서...
귀한 글 잘 읽고 갑니다.
2007.07.29 16:17:36
각 님,
구원론에 따라서 설교와 사역의 방법이 달라진다고 하셨군요.
옳은 말입니다.
보수적인 입장은 선택적 구원을,
진보적 입장은 만인 구원을 지지한다고 보시는군요.
그것도 옳습니다.
이러한 각 님의 생각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나, 하는 질문인가요?
이미 위에서 옳다고 말했으니까 다른 더 긴 설명은 필요 없겠군요.
다만 이런 문제를 속시원하게 제시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별로 정확한 게 아닙니다.
이 구원 문제가 내세냐 현세냐, 이중이냐 보편이냐, 하는 차원에만 속한 게 아니에요.
앞으로 신대원과 Th.M.에서 더 공부하면 알게 되겠지만,
구원은 창조론, 칭의론, 성화론, 종말론 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답니다.
창조의 완성이 구원이구요,
그게 곧 종말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오늘 우리는 잠정적인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실증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불확실하다는 게 아니라
다른 것에 기대서 설명해갈 뿐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죽어서 천당간다고 할 때,
우리는 아직 그 천당, 또는 하늘나라 개념을 정확하게 모르고 있답니다.
그래서 그것을 더 해석해야지요.
물론 해석이라는 말은 우리가 그것의 모든 실체를 분석하고 인식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부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가게 될 하늘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그런 것을 한 두 마디로 끊어서 정답을 줄 수눈 없습니다.
교리적인 답은 있지만 그것은 더 해석되어야지요.
말이 길어졌군요.
앞으로 신학을 공부하신다 하니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드리지요.
신학은 실용학문이 아니랍니다.
그것은 기독교 영성의 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 길을 천천히, 희망을 안고 가 보세요.
구원론에 따라서 설교와 사역의 방법이 달라진다고 하셨군요.
옳은 말입니다.
보수적인 입장은 선택적 구원을,
진보적 입장은 만인 구원을 지지한다고 보시는군요.
그것도 옳습니다.
이러한 각 님의 생각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나, 하는 질문인가요?
이미 위에서 옳다고 말했으니까 다른 더 긴 설명은 필요 없겠군요.
다만 이런 문제를 속시원하게 제시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별로 정확한 게 아닙니다.
이 구원 문제가 내세냐 현세냐, 이중이냐 보편이냐, 하는 차원에만 속한 게 아니에요.
앞으로 신대원과 Th.M.에서 더 공부하면 알게 되겠지만,
구원은 창조론, 칭의론, 성화론, 종말론 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답니다.
창조의 완성이 구원이구요,
그게 곧 종말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오늘 우리는 잠정적인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실증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불확실하다는 게 아니라
다른 것에 기대서 설명해갈 뿐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죽어서 천당간다고 할 때,
우리는 아직 그 천당, 또는 하늘나라 개념을 정확하게 모르고 있답니다.
그래서 그것을 더 해석해야지요.
물론 해석이라는 말은 우리가 그것의 모든 실체를 분석하고 인식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부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가게 될 하늘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그런 것을 한 두 마디로 끊어서 정답을 줄 수눈 없습니다.
교리적인 답은 있지만 그것은 더 해석되어야지요.
말이 길어졌군요.
앞으로 신학을 공부하신다 하니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드리지요.
신학은 실용학문이 아니랍니다.
그것은 기독교 영성의 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 길을 천천히, 희망을 안고 가 보세요.
2007.07.30 00:27:16
정 목사님 귀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주일 하루 평안하셨는지요^^
제가 좀 두서 없이 질문을 드려서 조금 오해가 있었네요. 저는 구원론에 대한 질문을 드리려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최근에도 논쟁하고 있는 선교/사역방법에 대한 대립들이 사실 다른 구원론 때문에 발생했다는 저의 의견에 대한 어떤 의견을 듣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구원에 대한 가르침은 유익했습니다.
"이 문제를 속시원하게 지적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는 저의 말은 구원론에 대한 연구가 적다라는 말이 아니라, 그 다른 사역/선교의 방법과 방향들이 사실은 서로 다른 구원론에 의한 것이므로 겉으로 나타난 사역의 방법과 방향만 갖고 서로 다투지 말고, 그 근본 뿌리인 구원론에 대한 논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요즘 아프카니스탄 피랍문제로 선교의 방법에 대하여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이게 옳다 저게 옳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선교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그 구원론이 다른 것이 진짜 문제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본 뿌리를 다루는 사람은 없고 오직 잎사귀가 다르다는 것만 보고 논쟁하는 것 같아서 그 논쟁들이 공허하게 느껴졌습니다.
목사님 말씀 처럼 조급함을 버리고 천천히 희망을 갖고 가보겠습니다.
항상 성실한 답변을 주시는 것 같아서 감사하네요.평안하세요.
주일 하루 평안하셨는지요^^
제가 좀 두서 없이 질문을 드려서 조금 오해가 있었네요. 저는 구원론에 대한 질문을 드리려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최근에도 논쟁하고 있는 선교/사역방법에 대한 대립들이 사실 다른 구원론 때문에 발생했다는 저의 의견에 대한 어떤 의견을 듣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구원에 대한 가르침은 유익했습니다.
"이 문제를 속시원하게 지적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는 저의 말은 구원론에 대한 연구가 적다라는 말이 아니라, 그 다른 사역/선교의 방법과 방향들이 사실은 서로 다른 구원론에 의한 것이므로 겉으로 나타난 사역의 방법과 방향만 갖고 서로 다투지 말고, 그 근본 뿌리인 구원론에 대한 논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요즘 아프카니스탄 피랍문제로 선교의 방법에 대하여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이게 옳다 저게 옳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선교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그 구원론이 다른 것이 진짜 문제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본 뿌리를 다루는 사람은 없고 오직 잎사귀가 다르다는 것만 보고 논쟁하는 것 같아서 그 논쟁들이 공허하게 느껴졌습니다.
목사님 말씀 처럼 조급함을 버리고 천천히 희망을 갖고 가보겠습니다.
항상 성실한 답변을 주시는 것 같아서 감사하네요.평안하세요.
2007.07.30 10:35:12
몇개월간 곁눈질만 하다가 오랜동안 기대해왔던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비평을 보고 동참해보고 싶어서 회원가입했습니다.
신앙관 정립에 많은 도움을 받고있습니다. 정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얼마전 사랑의 교회에서 이곳 블라디보스톡에 파송나오셨던 전문인 선교사 부부(평신도 선교사)가 7년의 사역을 마치고 안식년 지내시러 한국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분들은 사랑의 교회에서 장로와 권사로 섬기시던 분들이었고 장로님께서는 선교사역 이전에는 국내 모 은행에서 계시던 엘리트였습니다.
그 선교사 부부께서는 이곳에 계시는 동안 향기가 나는 섬김의 본을 몸으로 보이셨습니다.
환갑 넘으신 어른들이신데도 불구하고 모였다가 헤어질 때면 다른 사람들 각자 자기 목적지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다 지켜보고 난 뒤에서 자신들은 발길을 돌리셨지요.
같이 성경공부한 분들중 몇몇 분들은 큰 변화를 받고 좋은 직장을 버리고 자신의 삶을 선교사로 헌신하겠다는 분도 있었습니다.(직장을 버리고 선교사로 헌신한다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 일을 한다는 것과 일치하는지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저도 그 선교사님의 다락방 성경공부(사랑의 교회 성경공부 모임이름)에 1년여간 참여하였고 그분 떠나시기 전에 단기간이었지만 제자훈련도 받았습니다.
제자훈련이 신앙의 훈련인것만은 분명하지만 자신의 논리만을 옳다고 주장하는 운동권 수준은 넘어서는 신앙의 심화와 훈련을 통한 그리스도인으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옥에 티라면, 옥한흠 목사님께 훈련받은 분들은 다 마찬가지겠지만, 약간은 기독교 근본주의적인 색채를 보인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정목사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제자의 존재론적 깊이'에 집중하는 것도 제자훈련원에서 반드시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신앙관 정립에 많은 도움을 받고있습니다. 정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얼마전 사랑의 교회에서 이곳 블라디보스톡에 파송나오셨던 전문인 선교사 부부(평신도 선교사)가 7년의 사역을 마치고 안식년 지내시러 한국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분들은 사랑의 교회에서 장로와 권사로 섬기시던 분들이었고 장로님께서는 선교사역 이전에는 국내 모 은행에서 계시던 엘리트였습니다.
그 선교사 부부께서는 이곳에 계시는 동안 향기가 나는 섬김의 본을 몸으로 보이셨습니다.
환갑 넘으신 어른들이신데도 불구하고 모였다가 헤어질 때면 다른 사람들 각자 자기 목적지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다 지켜보고 난 뒤에서 자신들은 발길을 돌리셨지요.
같이 성경공부한 분들중 몇몇 분들은 큰 변화를 받고 좋은 직장을 버리고 자신의 삶을 선교사로 헌신하겠다는 분도 있었습니다.(직장을 버리고 선교사로 헌신한다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 일을 한다는 것과 일치하는지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저도 그 선교사님의 다락방 성경공부(사랑의 교회 성경공부 모임이름)에 1년여간 참여하였고 그분 떠나시기 전에 단기간이었지만 제자훈련도 받았습니다.
제자훈련이 신앙의 훈련인것만은 분명하지만 자신의 논리만을 옳다고 주장하는 운동권 수준은 넘어서는 신앙의 심화와 훈련을 통한 그리스도인으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옥에 티라면, 옥한흠 목사님께 훈련받은 분들은 다 마찬가지겠지만, 약간은 기독교 근본주의적인 색채를 보인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정목사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제자의 존재론적 깊이'에 집중하는 것도 제자훈련원에서 반드시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2007.07.31 14:16:00
목사님께서도 지적하셨듯이 옥목사님의 설교주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실존'입니다. 그리고 실존이나 존재론적 깊이를 '설교'한다면 결국은 훈련을 말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자각을 통해 행동이 나오기도 하지만 행동을 통해 자각의 깊이가 더 하기도 한다고 생각됩니다.
2007.08.01 18:40:35
박영선 목사님 관련 글 때문에 다비아를 알게 되어 댓글 토론에 참여했었는데
이제 옥한흠 목사님과 제자 훈련이 주제가 되고 있네요.
저는 옥한흠 목사님이 맡으셨을 당시의 성도교회 대학부 출신입니다. 정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네비게이토 선교회 교재를 사용했었고 처음에는 1기 2기 리더들의 영향으로 네비게이토 선교회 색채가
강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몇 년 후 옥 목사님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셨고 귀국 후에 강남에서
강남은평교회란 이름으로 개척하셨을 때도 저는 초기 얼마간 그 교회에 적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2층 한켠엔 중국집이 있었던 개척교회가 부흥하여 지금의 사랑의교회로 성장했던 것이구요...
옥한흠 목사님이 발행인으로 되어 있는 [월간 다시이플]에 '옥한흠목사의 제자행전'이란 코너가 있어
십 수 회에 걸쳐 한 달에 한 명씩 각지에 흩어져 있는 당시의 제자들을 탐방 인터뷰하는 기사가 실렸는데
방선기 목사, 이랜드 박성수 회장으로 이어지다가 급기야는 저도 한 회에 소개되었습니다.^^
옥목사님이 초지일관 관심을 기울였던 '제자훈련'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조심스럽게 평가하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우리 시대를 지나 열풍처럼 전국 교회로 퍼져나갔던 [제자훈련]은 조금 다른 양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부 시절의 제자훈련은 개인의 영적 성장과 관련이 있었다면 그 이후의 제자훈련은 교회의 성장과
관련이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자 훈련이 그렇게 변했다기보다 개 교회들이 그렇게 적용했고
그 변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제자훈련은 옥목사님이 추구하셨던 것에서 조금 벗어났다고 느껴집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순수하게 시작되었던 것이 틀이 갖쳐지기 시작하면 조금씩 변해가는 그런 거 말입니다.
저는 제자훈련이 가능한가? 라는 정 목사님의 의문에 한편으론 동의합니다.
제자훈련이 태동하던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우리들이 무엇을 얻었을까 생각해 보니 그렇습니다.
'옥한흠목사의 제자행전'에 소개된 우리들의 그 동안의 삶은 제자훈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젊은 목사님의 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한 열정,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절실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지금 되돌아보여지는 그 당시의 성도교회 대학부에 대한 가감없는 느낌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란 말이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이해된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적 기반의 차이에 의해 다르게 보여질 수도 있지만 저 위에 어느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그때 얻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구요...
이제 옥한흠 목사님과 제자 훈련이 주제가 되고 있네요.
저는 옥한흠 목사님이 맡으셨을 당시의 성도교회 대학부 출신입니다. 정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네비게이토 선교회 교재를 사용했었고 처음에는 1기 2기 리더들의 영향으로 네비게이토 선교회 색채가
강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몇 년 후 옥 목사님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셨고 귀국 후에 강남에서
강남은평교회란 이름으로 개척하셨을 때도 저는 초기 얼마간 그 교회에 적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2층 한켠엔 중국집이 있었던 개척교회가 부흥하여 지금의 사랑의교회로 성장했던 것이구요...
옥한흠 목사님이 발행인으로 되어 있는 [월간 다시이플]에 '옥한흠목사의 제자행전'이란 코너가 있어
십 수 회에 걸쳐 한 달에 한 명씩 각지에 흩어져 있는 당시의 제자들을 탐방 인터뷰하는 기사가 실렸는데
방선기 목사, 이랜드 박성수 회장으로 이어지다가 급기야는 저도 한 회에 소개되었습니다.^^
옥목사님이 초지일관 관심을 기울였던 '제자훈련'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조심스럽게 평가하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우리 시대를 지나 열풍처럼 전국 교회로 퍼져나갔던 [제자훈련]은 조금 다른 양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부 시절의 제자훈련은 개인의 영적 성장과 관련이 있었다면 그 이후의 제자훈련은 교회의 성장과
관련이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자 훈련이 그렇게 변했다기보다 개 교회들이 그렇게 적용했고
그 변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제자훈련은 옥목사님이 추구하셨던 것에서 조금 벗어났다고 느껴집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순수하게 시작되었던 것이 틀이 갖쳐지기 시작하면 조금씩 변해가는 그런 거 말입니다.
저는 제자훈련이 가능한가? 라는 정 목사님의 의문에 한편으론 동의합니다.
제자훈련이 태동하던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우리들이 무엇을 얻었을까 생각해 보니 그렇습니다.
'옥한흠목사의 제자행전'에 소개된 우리들의 그 동안의 삶은 제자훈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젊은 목사님의 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한 열정,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절실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지금 되돌아보여지는 그 당시의 성도교회 대학부에 대한 가감없는 느낌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란 말이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이해된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적 기반의 차이에 의해 다르게 보여질 수도 있지만 저 위에 어느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그때 얻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구요...
2007.07.31 22:48:47
제가 위의 설교비평 글을 쓰기 전에
데미 님에게 조언을 구할 걸 그랬군요.
옥 목사님의 초기 사역에 참여하신 분이시군요.
그건 그렇고,
춘천에 계시면서
춘천 오프를 모른 척 하셨습니다.
섭섭하게 말이죠. ㅎㅎ
이제 다른 춘천 다비안들이
다음 모임이 있으면 연락을 취할지 모르겠군요.
지난 번 박영선 목사님과 테니스 시합이 있던 날
목사님에게서 데미 님에 대해서 한 말씀 들었습니다.
주의 은총이.
데미 님에게 조언을 구할 걸 그랬군요.
옥 목사님의 초기 사역에 참여하신 분이시군요.
그건 그렇고,
춘천에 계시면서
춘천 오프를 모른 척 하셨습니다.
섭섭하게 말이죠. ㅎㅎ
이제 다른 춘천 다비안들이
다음 모임이 있으면 연락을 취할지 모르겠군요.
지난 번 박영선 목사님과 테니스 시합이 있던 날
목사님에게서 데미 님에 대해서 한 말씀 들었습니다.
주의 은총이.
2007.07.31 23:58:21
아이쿠, 정목사님. 죄송해서 슬그머니 지나가려다가 그만 들켜버렸습니다.
이런 인연을 끈으로 가능하면 정목사님을 뵙고 싶었는데 그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옥 목사님은 제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분입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처음 성경을 배운 것이 옥 목사님에게서 였습니다. 그분의 순수함과 열정...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리고 뜨끔~.
박영선 목사님이 제게 대해 부디 좋은 말씀만 하셨었기를 기대합니다. ㅎㅎ
이런 인연을 끈으로 가능하면 정목사님을 뵙고 싶었는데 그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옥 목사님은 제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분입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처음 성경을 배운 것이 옥 목사님에게서 였습니다. 그분의 순수함과 열정...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리고 뜨끔~.
박영선 목사님이 제게 대해 부디 좋은 말씀만 하셨었기를 기대합니다. ㅎㅎ
2007.08.01 21:10:16
저는 예고 없이 중국에 자주 가는 편입니다.
일때문이지만 하루 하루를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고 이를 해결 하기 위하여 중국과 관련하여 자주 가는 편입니다.
엊그제 내몽고를 돌아 북경 공항에 도착하여 청도로 가는 항공편을 이용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둥번개가 심하여 항공편이 모두 이륙을 못하는 바람에 하루밤을 북경에서 보내고 새벽에 겨우 자리를 하나 어렵게 예약하게 되에 아침 첫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발권을 하고 잠시 시간이 있어 다비안 사이트에서 본 설교비평을 읽고 또 읽다가 비행기 타는 시간을 잊었는 가 봅니다.
발권을 한 뒤에는 한사람이라도 탑승을 하지 아니하면 비행기는 출발할 수가 없습니다.
승무원들이 한 사람을 찾으려고 안내 방송도 하고 구서 구석 다 뒤진 모양인데 저는 다비안 싸이트에서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약 한시간 가까이 비행기가 늦게 출발하게 되었고 만석이었던 수백명의 사람들로 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답니다.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 비평은 중국민항 까지도 욱직이는 힘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제 다비안 식구들이 세계 각처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항공기를 이착륙 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확실한 간증을 합니다.
다비안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이착륙을 하고 있슴을 확실히 하는 증거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다비안 싸이트에 중독 되신분들에 좋은 경종이 되길 바라며 다비안 발전이 하나님의 섭리의 일부분임을 믿습니다.
일때문이지만 하루 하루를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고 이를 해결 하기 위하여 중국과 관련하여 자주 가는 편입니다.
엊그제 내몽고를 돌아 북경 공항에 도착하여 청도로 가는 항공편을 이용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둥번개가 심하여 항공편이 모두 이륙을 못하는 바람에 하루밤을 북경에서 보내고 새벽에 겨우 자리를 하나 어렵게 예약하게 되에 아침 첫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발권을 하고 잠시 시간이 있어 다비안 사이트에서 본 설교비평을 읽고 또 읽다가 비행기 타는 시간을 잊었는 가 봅니다.
발권을 한 뒤에는 한사람이라도 탑승을 하지 아니하면 비행기는 출발할 수가 없습니다.
승무원들이 한 사람을 찾으려고 안내 방송도 하고 구서 구석 다 뒤진 모양인데 저는 다비안 싸이트에서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약 한시간 가까이 비행기가 늦게 출발하게 되었고 만석이었던 수백명의 사람들로 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답니다.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 비평은 중국민항 까지도 욱직이는 힘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제 다비안 식구들이 세계 각처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항공기를 이착륙 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확실한 간증을 합니다.
다비안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이착륙을 하고 있슴을 확실히 하는 증거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다비안 싸이트에 중독 되신분들에 좋은 경종이 되길 바라며 다비안 발전이 하나님의 섭리의 일부분임을 믿습니다.
2007.08.01 22:12:35
우하하하...
디딤돌 님,
위의 사건이 정말입니까?
듬직하시고 여유가 있으신 분이
공항에서 다비아 접속하셨다가
탑승 시간을 깜빡하시다니...
정말 믿거나 말거나군요.
이런 일은 디딤돌 한 분으로 끝나야됩니다.
그래도 비행기를 타셨다니 천만다행이군요.
눈총을 받으며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래도 안내원들은 미소를 짓던가요?
디딤돌 님,
위의 사건이 정말입니까?
듬직하시고 여유가 있으신 분이
공항에서 다비아 접속하셨다가
탑승 시간을 깜빡하시다니...
정말 믿거나 말거나군요.
이런 일은 디딤돌 한 분으로 끝나야됩니다.
그래도 비행기를 타셨다니 천만다행이군요.
눈총을 받으며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래도 안내원들은 미소를 짓던가요?
2007.08.01 23:46:38
정목사님의 탁월한 통찰력 속으로 쏙 빨려들어 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젊은 신학도로써 배울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많은 부분 공감하며, 특히 사람의 훈련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었다면 새로운 세계, 또는 새로운 존재를 만났기 때문에 변화되었다는 말씀 정말 명언입니다. 이런 것을 저는 거의 매주 실제로 접하고 있는데 정말 존재론적 변화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 바울의 삶을 산 것 처럼, 예수님을 전혀 모르고 믿지 않고 살다가 예수님 만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초신자들의 모습이 그리고 그들의 간증이 정말 그렇더군요.. 저희 교회는 초신자가(초신자라하면 신앙생활 2-3년 미만정도) 80%되는 전국에서 몇 안되는 교회일겁니다. 아무튼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07.08.02 09:14:02
순둥이님 다락방에서 특히 순장님에게 영적인 뭔가를 원하시는 만큼 받지 못하셨나보군요.
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 정목사님도 지적하셨듯이, 훈련으로 다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니시는 교회에서 다락방과 순장의 역할을 무엇으로 정의하고 운영되는지 모르나, 제가 보긴엔 다락방을 교재로 순원끼리 공부하는 곳이라 여기신다면 원래 취지와 거리가 있지 않나 생각듭니다. 더욱이 순장에게서 그 교재내용을 배우시려고 하시면 더욱더 거리가 먼 생각입니다.
순장은 모임을 인도하는 좌장일 뿐 입니다. 교재 내용을 중심으로 말씀에서 깨닫고 세상에 적용하는 스스로의 삶을 이끌어가는 것과 이에 대한 나눔이 다락방이란 곳이 아닐까요?
(여기 정목사님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지적하시는 한국교회의 과잉 적용문제에 대한 폐단(?)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번 댓글이나 쪽지로 말씀드리고자 했는데, 귀 교회에서 설교하셨다는 김명호목사님는 나름대로 꽤 괜찮으신 분입니다. 그날 어떤 설교를 하셨는지 모르나 제가 아는 김목사님의 그간 설교이력으로 보면 다시 들으셔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아마 순둥이님의 취향(?)은 아닐수도 있겠지요.
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 정목사님도 지적하셨듯이, 훈련으로 다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니시는 교회에서 다락방과 순장의 역할을 무엇으로 정의하고 운영되는지 모르나, 제가 보긴엔 다락방을 교재로 순원끼리 공부하는 곳이라 여기신다면 원래 취지와 거리가 있지 않나 생각듭니다. 더욱이 순장에게서 그 교재내용을 배우시려고 하시면 더욱더 거리가 먼 생각입니다.
순장은 모임을 인도하는 좌장일 뿐 입니다. 교재 내용을 중심으로 말씀에서 깨닫고 세상에 적용하는 스스로의 삶을 이끌어가는 것과 이에 대한 나눔이 다락방이란 곳이 아닐까요?
(여기 정목사님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지적하시는 한국교회의 과잉 적용문제에 대한 폐단(?)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번 댓글이나 쪽지로 말씀드리고자 했는데, 귀 교회에서 설교하셨다는 김명호목사님는 나름대로 꽤 괜찮으신 분입니다. 그날 어떤 설교를 하셨는지 모르나 제가 아는 김목사님의 그간 설교이력으로 보면 다시 들으셔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아마 순둥이님의 취향(?)은 아닐수도 있겠지요.
2007.08.02 13:25:55
오늘도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한편으로는 이곳에 글쓰기 왠지모르게 조심스럽니다. (내공 수준이 너무 낮아서리)
그러나 주의 이름으로 하나됨을 사모합니다.
청년부 시절에 개인적으로 사랑의 교회를 불경스럽게 본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2명정도가 그곳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근본적인 신앙위에 감성만 자극하는 언어에 싫증을 냈습니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훨씬 지나서, 다시 보니 제가 편협적인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오해했던 부분들이 설교 비평을 보고서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영성의 자유함을 갈망하며...
한편으로는 이곳에 글쓰기 왠지모르게 조심스럽니다. (내공 수준이 너무 낮아서리)
그러나 주의 이름으로 하나됨을 사모합니다.
청년부 시절에 개인적으로 사랑의 교회를 불경스럽게 본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2명정도가 그곳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근본적인 신앙위에 감성만 자극하는 언어에 싫증을 냈습니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훨씬 지나서, 다시 보니 제가 편협적인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오해했던 부분들이 설교 비평을 보고서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영성의 자유함을 갈망하며...
2007.08.03 19:45:40
정목사님의 제자훈련에 관한 설교 비평을 읽으며 제자가 되기위한
기준을 제시한 누가복음 14장 26절이하의 언급이 없음에 대해서
다소 아쉬움을 느꼇습니다.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을 읽으면서 간혹 느끼는 것 입니다만, 설교 비평 즉
잘못되고 왜곡된 가르침을 지적하는 작업에 있어서 성경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을 날카롭게 사용하고 적용하는 방식을 가진다면 성도들에게 좀더 설득
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군요..
옥목사님의 제자훈련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사랑채에 몇자 적었습니다..
=============================================
마태복음 19:21~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누가복음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가복음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기준을 제시한 누가복음 14장 26절이하의 언급이 없음에 대해서
다소 아쉬움을 느꼇습니다.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을 읽으면서 간혹 느끼는 것 입니다만, 설교 비평 즉
잘못되고 왜곡된 가르침을 지적하는 작업에 있어서 성경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을 날카롭게 사용하고 적용하는 방식을 가진다면 성도들에게 좀더 설득
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군요..
옥목사님의 제자훈련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사랑채에 몇자 적었습니다..
=============================================
마태복음 19:21~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누가복음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가복음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007.08.03 21:09:51
옥한흠목사의 아들 옥성호집사가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란 책을 썼군요. 심리학과 마켓팅과 엔터테인먼트에 오염된 기독교에 회의를 느껴왔다가 미국에 와서야 참된 기독교의 진수를 맛보게 되었다고 서문에 나와있습니다. 20여차례의 수련회와 홀리댄싱, 방언 울고불고 하는 것들을 다 했지만 기독교가 코메디같아서 교회를 다니지 않으려했지만 교회에 분란을 일으킬 것 같아서 형식적으로 출석을 하다가 미국 아무개 목사의 서적을 통해 비로소 신앙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이 말은 옥집사가 한국에 있을 때, 아버지가 목사로 있는 사랑의 교회를 다녔을 것이고 그 교회 가운데서 신앙의 회의를 느꼈다는 말 같습니다. 아버지의 설교가 아들에게 별로 감화를 주지 못했던 것 같네요.
이 말은 옥집사가 한국에 있을 때, 아버지가 목사로 있는 사랑의 교회를 다녔을 것이고 그 교회 가운데서 신앙의 회의를 느꼈다는 말 같습니다. 아버지의 설교가 아들에게 별로 감화를 주지 못했던 것 같네요.
2007.08.04 03:54:12
정용?목사님께 -꽉찬 설교 텅빈 설교를 읽고-
예수님이 돌아가시기는 그 날까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동거동락했던
제자들은 설교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제자훈련을 잘 못받아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했던 예수님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였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랬던 것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수많은 설교를 듣고, 능력도 행하고,
삶을 함께 했으면서도요.
정용섭 목사님은 제자들의 반응을 보고,
첫째, 예수님이 잘못 가르쳤기 때문에 도망갔다.
둘째, 십자가를 지기위해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이 굳어졌다. 라고 비평을 하실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의 삶까지도 버리면서 제자들을 품으신 그 마음이 전달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단지 설교가 완벽하다고해서 제자들의 삶이 바뀐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목회자로써 설교를 게을리하거나, 잘못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설교자들은 반성하고 비판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완벽하지 못하고, 최대한 노력을 하였는데도 부족한 점은 성령님께서 채워주리라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마다 강점이 있습니다. 설교자 또한 나름대로의 스타일이 있구요. 본인이 잘할 수 있는 설교방향으로 가면서
노력하면서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는 이상은 교인들이 알아서 옆에서 다 채찍질 하리라 생각합니다.
비판과 노력을 통해 어느정도 극복될 수있는것이 설교라고 할지라도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쉬운일이 아니기 때문에 게을러지라는 말이아니? 설교가 단지 로고스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레마로 전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설교가 이해가 안되고, 은혜를 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목사님은 교인들을 삶으로 품으며 모범을
보이셔서 잘된 설교보다도 더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전해줍니다.
"꽉찬 설교"에서 정 목사님이 비판하신 목사님들 가운데는 부족한 가운데서도 훌륭하신 분들이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본인의 Desire 가 없이 비젼을 이뤄나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나도 모르게 나오는 "내가 이루고푼 목회관과 교회관" 이 없는
사역자가 어디있겠습니까?
정 목사님의 글 가운데서도 목사님이 드러내고 싶어하는 자신의 지성과 능력이 한껏 베어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단지, 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비판의 글"을 쓰셨다고는 말하지 못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전하는 방법은 여러가지 있습니다. 단지 지적인 면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최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을 중시하는 인본주의 사상과 자유주의 사상이 매마른 지식과 논린적 견해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교속에 하나님이 없다고 쓰신 정 목사님의 책에서 정말 찾을 수 없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였습니다.
"십자가"라는 타이틀도 있었고, 다른 목사님의 설교에서 "십자가"가 없다고 비평을 하셨지만...
결국 정 목사님의 글에서 저는 비판 당하는 목사님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정용섭 목사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비평을 위한 비평이된 느낌이 였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아예 목사님을 비평하는 부목사를 월급 줘가면서 고용한다고 합니다.
자기 발전을 위한 비평이 필요한거 이해합니다. 저도 저를 매주일 한번씩 평가하시고 하나하나 지적해 말씀해주시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그 비평이 나를 위한 비평인지. 목사님 자신이 제자를 훈련시키겠다는 욕망에서 나온 비평인지를...
그것이 목사님 자신을 욕구충족을 위해서 했다고 하더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려니하고 받아들이수 있지만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욕먹으면서 인격적으로 무시당하면서 까지 훈련이라는 이유의 비평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나에게 다 좋게 된다는거 알지만 그것을 따라갈 능력이 없습니다. 제 한계에 부딪혀 결국은 튕겨 나오고 말것입니다.
정용섭 목사님의 비평이 저에겐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랜드 사건을 통해 기독교를 비난하는 일반인들의
마음이 정용섭 목사님에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너무 이기적이고 나를위한 신앙생활을 해왔으니까요.
그러니까 목사님! 돌 지세요. 돌에 맞아도 싸죠!! 다른 비기독교인들처럼 부족하고 연약하고, 무식하고, 사랑이 없고,
교만하고, 이기적인 우리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돌 던지세요.
스데반을 죽이고, 예수님 앞에 창녀를 데리고 왔던 바리세인들 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말씀도 안하셨습니다. 스데반은 그냥 돌 맞고 죽었습니다. 바보라서 가만히 있었던게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돌을 던지라고 할 때 불쌍한 창녀를 데리고 왔던 사람들은 단 한명도 돌을 던지지 못했습니다.
저도 목사님께 도전합니다. 돌 던지세요. 저에게도 돌 던지세요...
정 목사님이 비평하신 목사님들이야 거의 평생을 하나님앞에 나름대로 순종하며 사신 분들이지만(그게 본인의 욕구충족적인 부분이 더 많았을 지라도)
저는 아직 그 분들의 나이 반 밖에 되지 않으면서 벌써 교만해지고 있으니까 아니 벌써 교만하니까 저에게도 돌 던지세요.
그렇게 한명 한명 돌 맞을 사람을 계속 찾으시고, 찾으실 때마다 친절히 돌 던져주세요...
저는 그 돌만 맞으면 못살고 죽겠지만... 돌 맞는 만큼 하나님께서 더 크신 은혜로 채워주실줄 믿습니다.
제 삶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은혜로 채워주실거라 확신합니다.
그러니 목사님께서 저에게 돌 던지셔도 됩니다. 수고하세요.
예수님이 돌아가시기는 그 날까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동거동락했던
제자들은 설교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제자훈련을 잘 못받아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했던 예수님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였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랬던 것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수많은 설교를 듣고, 능력도 행하고,
삶을 함께 했으면서도요.
정용섭 목사님은 제자들의 반응을 보고,
첫째, 예수님이 잘못 가르쳤기 때문에 도망갔다.
둘째, 십자가를 지기위해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이 굳어졌다. 라고 비평을 하실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의 삶까지도 버리면서 제자들을 품으신 그 마음이 전달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단지 설교가 완벽하다고해서 제자들의 삶이 바뀐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목회자로써 설교를 게을리하거나, 잘못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설교자들은 반성하고 비판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완벽하지 못하고, 최대한 노력을 하였는데도 부족한 점은 성령님께서 채워주리라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마다 강점이 있습니다. 설교자 또한 나름대로의 스타일이 있구요. 본인이 잘할 수 있는 설교방향으로 가면서
노력하면서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는 이상은 교인들이 알아서 옆에서 다 채찍질 하리라 생각합니다.
비판과 노력을 통해 어느정도 극복될 수있는것이 설교라고 할지라도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쉬운일이 아니기 때문에 게을러지라는 말이아니? 설교가 단지 로고스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레마로 전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설교가 이해가 안되고, 은혜를 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목사님은 교인들을 삶으로 품으며 모범을
보이셔서 잘된 설교보다도 더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전해줍니다.
"꽉찬 설교"에서 정 목사님이 비판하신 목사님들 가운데는 부족한 가운데서도 훌륭하신 분들이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본인의 Desire 가 없이 비젼을 이뤄나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나도 모르게 나오는 "내가 이루고푼 목회관과 교회관" 이 없는
사역자가 어디있겠습니까?
정 목사님의 글 가운데서도 목사님이 드러내고 싶어하는 자신의 지성과 능력이 한껏 베어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단지, 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비판의 글"을 쓰셨다고는 말하지 못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전하는 방법은 여러가지 있습니다. 단지 지적인 면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최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을 중시하는 인본주의 사상과 자유주의 사상이 매마른 지식과 논린적 견해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교속에 하나님이 없다고 쓰신 정 목사님의 책에서 정말 찾을 수 없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였습니다.
"십자가"라는 타이틀도 있었고, 다른 목사님의 설교에서 "십자가"가 없다고 비평을 하셨지만...
결국 정 목사님의 글에서 저는 비판 당하는 목사님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정용섭 목사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비평을 위한 비평이된 느낌이 였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아예 목사님을 비평하는 부목사를 월급 줘가면서 고용한다고 합니다.
자기 발전을 위한 비평이 필요한거 이해합니다. 저도 저를 매주일 한번씩 평가하시고 하나하나 지적해 말씀해주시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그 비평이 나를 위한 비평인지. 목사님 자신이 제자를 훈련시키겠다는 욕망에서 나온 비평인지를...
그것이 목사님 자신을 욕구충족을 위해서 했다고 하더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려니하고 받아들이수 있지만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욕먹으면서 인격적으로 무시당하면서 까지 훈련이라는 이유의 비평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나에게 다 좋게 된다는거 알지만 그것을 따라갈 능력이 없습니다. 제 한계에 부딪혀 결국은 튕겨 나오고 말것입니다.
정용섭 목사님의 비평이 저에겐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랜드 사건을 통해 기독교를 비난하는 일반인들의
마음이 정용섭 목사님에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너무 이기적이고 나를위한 신앙생활을 해왔으니까요.
그러니까 목사님! 돌 지세요. 돌에 맞아도 싸죠!! 다른 비기독교인들처럼 부족하고 연약하고, 무식하고, 사랑이 없고,
교만하고, 이기적인 우리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돌 던지세요.
스데반을 죽이고, 예수님 앞에 창녀를 데리고 왔던 바리세인들 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말씀도 안하셨습니다. 스데반은 그냥 돌 맞고 죽었습니다. 바보라서 가만히 있었던게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돌을 던지라고 할 때 불쌍한 창녀를 데리고 왔던 사람들은 단 한명도 돌을 던지지 못했습니다.
저도 목사님께 도전합니다. 돌 던지세요. 저에게도 돌 던지세요...
정 목사님이 비평하신 목사님들이야 거의 평생을 하나님앞에 나름대로 순종하며 사신 분들이지만(그게 본인의 욕구충족적인 부분이 더 많았을 지라도)
저는 아직 그 분들의 나이 반 밖에 되지 않으면서 벌써 교만해지고 있으니까 아니 벌써 교만하니까 저에게도 돌 던지세요.
그렇게 한명 한명 돌 맞을 사람을 계속 찾으시고, 찾으실 때마다 친절히 돌 던져주세요...
저는 그 돌만 맞으면 못살고 죽겠지만... 돌 맞는 만큼 하나님께서 더 크신 은혜로 채워주실줄 믿습니다.
제 삶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은혜로 채워주실거라 확신합니다.
그러니 목사님께서 저에게 돌 던지셔도 됩니다. 수고하세요.
2007.08.04 08:08:26
친절하게 던지는 돌은 각성효과가 별로 없을 거예요.
돌을 던지는 사람의 마음이 먼저 아프고 절실해야 그 돌이 정확하게 상대방의 마음에 박힐 수 있겠지요.
돌던지는 사람이나 돌 맞는 사람이나 교만하면 돌은 빗나가기 마련입니다.
저는 정목사님이 비평을 위한 비평을 했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주마가편의 심정, 진리에 대한 열정, 교회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평을 받을 때 그러는 너는 어떠냐고 되묻거나
항변거리만 늘어놓으면 돌맞는 기쁨과 복(?)을 제대로 누릴 수 있겠습니까?
겸손히 비평, 충고, 조언, 권면에 귀기울이면
돌던지는 자와 돌맞는 모두에게 유익이 되며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겠지요.
돌을 던지는 사람의 마음이 먼저 아프고 절실해야 그 돌이 정확하게 상대방의 마음에 박힐 수 있겠지요.
돌던지는 사람이나 돌 맞는 사람이나 교만하면 돌은 빗나가기 마련입니다.
저는 정목사님이 비평을 위한 비평을 했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주마가편의 심정, 진리에 대한 열정, 교회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평을 받을 때 그러는 너는 어떠냐고 되묻거나
항변거리만 늘어놓으면 돌맞는 기쁨과 복(?)을 제대로 누릴 수 있겠습니까?
겸손히 비평, 충고, 조언, 권면에 귀기울이면
돌던지는 자와 돌맞는 모두에게 유익이 되며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겠지요.
2007.08.04 10:05:45
seung0825 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 설교비평을 돌던지기로 보셨군요.
그렇게 보였다면 할 수 없구요.
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대목이 그런 건지를 지적하셨다면
주신 대글의 설득력이 훨씬 높았을 텐데요.
어쨌든지 제 책에서 받은 전체적인 느낌이니까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주의 은총이.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 설교비평을 돌던지기로 보셨군요.
그렇게 보였다면 할 수 없구요.
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대목이 그런 건지를 지적하셨다면
주신 대글의 설득력이 훨씬 높았을 텐데요.
어쨌든지 제 책에서 받은 전체적인 느낌이니까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주의 은총이.
2007.08.04 10:11:23
도루박 님,
위에서 소개한 <심리학...>을 집필한 옥성호 님이
옥한흠 목사님의 자제가 맞나요?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 책이 있다는 것도 모랐고,
옥 목사님의 아들이 교회에 관련한 글을 썼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미리 알았다면 옥 목사님의 설교비평을 쓰기 전에 읽어보았을 텐데요.
옥 목사님은 '제자훈련'에 올인하셔서
자녀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한 인간이 모든 부분에서 완벽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는 없겠지요.
위에서 소개한 <심리학...>을 집필한 옥성호 님이
옥한흠 목사님의 자제가 맞나요?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 책이 있다는 것도 모랐고,
옥 목사님의 아들이 교회에 관련한 글을 썼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미리 알았다면 옥 목사님의 설교비평을 쓰기 전에 읽어보았을 텐데요.
옥 목사님은 '제자훈련'에 올인하셔서
자녀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한 인간이 모든 부분에서 완벽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는 없겠지요.
2007.08.04 11:45:42
‘저도 목사님께 도전합니다.’
seung0825님,
많이 혼란스러우신 듯합니다.
어떻게 돌을 던지느냐고 돌을 던져놓고는
돌을 던져달라고 아예 통사정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
그런데 말입니다.
비평을 하시는 분이나, 비평의 대상이 되신 분이나,
하나님나라와 한국교회를 향한 뜨거운 동역자들이십니다.
그리고 이분들 서로를 알아봅니다.
돌 던지고 돌 맞는 그런 유치한 그림이 아니었어요. ㅋㅋ
‘하나님께서 분명히 은혜로 채워주실거라 확신합니다.’
저도 이 믿음에 동의합니다. ^^
seung0825님,
많이 혼란스러우신 듯합니다.
어떻게 돌을 던지느냐고 돌을 던져놓고는
돌을 던져달라고 아예 통사정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
그런데 말입니다.
비평을 하시는 분이나, 비평의 대상이 되신 분이나,
하나님나라와 한국교회를 향한 뜨거운 동역자들이십니다.
그리고 이분들 서로를 알아봅니다.
돌 던지고 돌 맞는 그런 유치한 그림이 아니었어요. ㅋㅋ
‘하나님께서 분명히 은혜로 채워주실거라 확신합니다.’
저도 이 믿음에 동의합니다. ^^
2007.08.07 06:12:18
늘오늘님 "하나님 나라와 한국 교회의 동역자" 라는 말씀에 저는 동의가 되질 않습니다.
제가 느낀것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라하는 요한"을 놓고 서로가 옳다며 다투는 모습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바울이 다시 마가와 화해하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의견이 맞지않아 대립하는 그 모습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동역자"의 모습으로 보기는 어렵군요.
물론 믿음은 들음으로 말미암아 납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설교를 잘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설교가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초신자들이나 불신자들에게는 설교에 대한 중요도가 더 높아지겠지만, 궁극적으로 예배의 중심을 설교인것 처럼 그리고 목회자의 역할중에 설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용섭 목사님이 지적하신 영웅주의나 신비주의, 선동적인 등등의 설교방식이 내용면에서는 그다지 영양가가 없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분명히 기복주의적인 신앙을 만들어 나갑니다. 저는 그런 부분들이 괜찮다는 식으로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듯이, 정 목사님의 글을 통해서도 믿지않는 영혼들이나 초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생기기보다는 리더쉽에대한 부정적인 생기고, 그로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한 생명이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날 때, 부모님에 대한 신상명세와 살아온 배경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해서 부모님을 더 사랑하고, 믿게 되는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라날 때에는 사랑과 이해시킴으로 신뢰를주고 믿음을 쌓아나가야 합니다. 제가 걱정하는 부분이 바로 이렇게 어느정도의 보호가 필요한 영혼들에게 미칠 악 영향입니다. 논리와 정의로 아무리 목회자들에게 비판을 가할 때 공개적으로 아직 판단이 모호한 자들에게 영향을 줄 수있는 발언을 하는 것은 그리 좋지 않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전화를 걸어서 말 할 수도 있고, 이 메일을 보낼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한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서로를 존중하면서 조언을 할 수는 있지만, 부족하고, 더러운 부분을 내가 씻겨내겠다고 공개적으로 치부를 들춰내는 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이 아니라고 봅니다.
물질만능주의와 인본주의에 의한 정의감에 사로잡혀 사랑과 은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바리새인들과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에게는 화를 내셨지만, 하나님안에서 너무나도 부족하지만 아주 조금씩이라도 성화되어가고 있는 백성에게는 예수님께서 단 한번도 "화있을찐저" 하신 적이 없습니다.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더 품으셔서... 결국엔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자들조차 그 사랑에 감사해 제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물론 이 땅에서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준 인물 중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들이 목회자이며 그것도 유명하신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더 큰 악영향을 준것이지요.
이 땅의 황무함을 보고... 수많은 목회자들과 리더들의 욕심과 욕망을 향한 노력에 성령님이 애통해하며 기도하고있음을 모르십니까? 결국 그것에 대한 해답이 공개화형입니까? 다윗이 잘못하나없이 사울왕에게 쫓길 때 공개적으로 사울왕을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잘못된 지도를 받도있었고, 자신의 생명은 위험했지만, 다윗은 사울 왕도 하나님이 세운 사람이라는 이유로 하나님이 내려치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무엇이 정의 입니까? 무엇이 옮음입니까? 하나님이 바라봐시는 시선으로 주님이 판단하실 때까지 주님이 하라고 시키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주님안에 "의"가 아닙니까?
정 목사님께서 "니가 이제 저들의 무지함과 교만함을 이 땅에 선포하라!!"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셨다면,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시려는 계획이라고 받아들여야겠죠. 그렇게 바벨론은 하나님의 계획하심안에 이스라엘을 침략했기 때문에 좋은거야. 주님의 뜻이니 정당한거야 라고 하는 것이 정당한 반응이겠죠...
아니요... 전 그렇게 반응하지 않을겁니다. 바벨론을 들어쓰시고 이스라엘을 치시면서 너무나 가슴아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예례미야의 눈물을 기억할 것입니다. 바벨론을 옹호하지 않고, 우리의 타락함과 아버지의 십자가를 묵상하겠습니다.
전 비판받는 목사님들을 옹호하는 것이아니라, 아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면서 정 목사님의 글을 읽고 동의하고, 감동하며 온갖 정의감과 지성으로 똘똘 뭉친 영혼들이 불쌍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단 한가지 방법,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십자가 밖에는 영혼들을 살리실 방법이 없으셨습니다.
책을 쓰고, 방송을 하고, 설교를 잘하고, 선교를 하고, 찬양집회를 하고....
이 모든 것들이 구원의 십자가를 소개하기 위해... 참 기쁨과 평안을 소개하기 위한 방법 아닙니까?
단지 방법중에 하나이지, 본질은 아니지 않습니까?
최소한 내 십자가를 내가지고 간다면 최소한 내 주변 사람들은 내가 설명하지않고, 집회하지 않고, 책을 쓰지않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닳으리라 생각합니다.
너무 순진하다고요. 뱀 처럼 지혜로와야지 바보처럼 비둘기처럼 순전하기만 하다고요?
맞습니다. 수많은 신학자들과 교수들이 자유주의 신학과 인본주의 신학으로 심리학으로 본 기독교 원리와 신학적 배경과 역사학적 관점으로 하나님의 신상명세를 하나, 하나씩 파해쳐 가는 것 보다야.
어머니, 어버지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어디서 출생하셨고, 나이가 몇살이시고, 생신이 언젠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날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고 그 안에서 평안하고 나도 그들을 사랑하는 것... 바보같지만 차라리 그걸 원하실거 같습니다.
제가 잘은 모르지만, 최소한 정용섭 목사님이 설교비판하신 몇몇 목사님들안에는 진심이 있습니다. 복음이 있습니다. 기술적인 면에서 좀 부족할진 모르지만... 그들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아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분명히 그들의 삶 속에 간증과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있음을 전 압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헌신이 "다빈치 코드" 정도로 가려지라고 생각하지 않듯이, "꽉찬 설교, 속 빈 설교"로도 존경하는 목사님들의 희생이 가려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접해보지도 못하고, 교회안에서도 겉도는 영혼들이 이러한 책을 통해 하나님과의 거리는 더 멀어지고, 사상과 문학을 더 사모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됩니다.
도울 선생같은 분이 그러면 대꾸도 안합니다. 웃깁니다. 하지만 신학자이자 목회자 아니십니까?
정말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이 되시면 되지 않습니가? 조은령 감독같은 분이 되시면 안되겠습니까?
계시록 22:15절에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정말로 그들이 거짓말하며, 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 말씀을 지어내는 자들이라면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겁니다.
Positive reenforcement라고 심리학 용어 아실겁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글도 읽으셨겠지요?
선으로 악을 이겨라... 라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 그 합력함이 쉽지않지만, 내가 희생하지않으면 합력이 되지않음을 함께 묵상하길 원합니다.
무엇이 진정한 이땅의 천국과 하나님의 의를 위하는 것인지...
마 5:3~1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기복주의 신앙격으로 이렇게해서 복받으시라고 젂은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의 모습이라서 젂어봤습니다.
"꽉찬 설교" 읽으시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궁휼히 여기는자, 화평케하는자, 의를 위해서 핍박받는자, 가난한자, 온유한자... 등등은 싫으시구요?
내가 아는 옳음을 내가 옳지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치는 것이 의에 주린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욺음을 내가 생각했을 때 옳지 않더라도 행하는 것이
"의를 행하는 자임" 또한 말씀드립니다.
이 책이 누구를 위한 책이며, 내가 스스로 나를 속이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오겠지? 라고 생각하시고
있지는 않은지 벌써 여러번 고민하셨겠지만, 한번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을 바벨론이나 사울왕으로 비유한 것이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리고 원래 제가 쓰는 글은 정 목사님 이 메일로 개인적인 견해를 드릴 생각이였으나
이 메일 주소를 찾지 못해서 공개적으로 남기는 것이니 제 글로 인해 성도이나 학생들에게
피해를 입으신 분들께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느낀것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라하는 요한"을 놓고 서로가 옳다며 다투는 모습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바울이 다시 마가와 화해하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의견이 맞지않아 대립하는 그 모습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동역자"의 모습으로 보기는 어렵군요.
물론 믿음은 들음으로 말미암아 납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설교를 잘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설교가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초신자들이나 불신자들에게는 설교에 대한 중요도가 더 높아지겠지만, 궁극적으로 예배의 중심을 설교인것 처럼 그리고 목회자의 역할중에 설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용섭 목사님이 지적하신 영웅주의나 신비주의, 선동적인 등등의 설교방식이 내용면에서는 그다지 영양가가 없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분명히 기복주의적인 신앙을 만들어 나갑니다. 저는 그런 부분들이 괜찮다는 식으로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듯이, 정 목사님의 글을 통해서도 믿지않는 영혼들이나 초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생기기보다는 리더쉽에대한 부정적인 생기고, 그로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한 생명이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날 때, 부모님에 대한 신상명세와 살아온 배경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해서 부모님을 더 사랑하고, 믿게 되는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라날 때에는 사랑과 이해시킴으로 신뢰를주고 믿음을 쌓아나가야 합니다. 제가 걱정하는 부분이 바로 이렇게 어느정도의 보호가 필요한 영혼들에게 미칠 악 영향입니다. 논리와 정의로 아무리 목회자들에게 비판을 가할 때 공개적으로 아직 판단이 모호한 자들에게 영향을 줄 수있는 발언을 하는 것은 그리 좋지 않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전화를 걸어서 말 할 수도 있고, 이 메일을 보낼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한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서로를 존중하면서 조언을 할 수는 있지만, 부족하고, 더러운 부분을 내가 씻겨내겠다고 공개적으로 치부를 들춰내는 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이 아니라고 봅니다.
물질만능주의와 인본주의에 의한 정의감에 사로잡혀 사랑과 은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바리새인들과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에게는 화를 내셨지만, 하나님안에서 너무나도 부족하지만 아주 조금씩이라도 성화되어가고 있는 백성에게는 예수님께서 단 한번도 "화있을찐저" 하신 적이 없습니다.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더 품으셔서... 결국엔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자들조차 그 사랑에 감사해 제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물론 이 땅에서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준 인물 중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들이 목회자이며 그것도 유명하신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더 큰 악영향을 준것이지요.
이 땅의 황무함을 보고... 수많은 목회자들과 리더들의 욕심과 욕망을 향한 노력에 성령님이 애통해하며 기도하고있음을 모르십니까? 결국 그것에 대한 해답이 공개화형입니까? 다윗이 잘못하나없이 사울왕에게 쫓길 때 공개적으로 사울왕을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잘못된 지도를 받도있었고, 자신의 생명은 위험했지만, 다윗은 사울 왕도 하나님이 세운 사람이라는 이유로 하나님이 내려치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무엇이 정의 입니까? 무엇이 옮음입니까? 하나님이 바라봐시는 시선으로 주님이 판단하실 때까지 주님이 하라고 시키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주님안에 "의"가 아닙니까?
정 목사님께서 "니가 이제 저들의 무지함과 교만함을 이 땅에 선포하라!!"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셨다면,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시려는 계획이라고 받아들여야겠죠. 그렇게 바벨론은 하나님의 계획하심안에 이스라엘을 침략했기 때문에 좋은거야. 주님의 뜻이니 정당한거야 라고 하는 것이 정당한 반응이겠죠...
아니요... 전 그렇게 반응하지 않을겁니다. 바벨론을 들어쓰시고 이스라엘을 치시면서 너무나 가슴아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예례미야의 눈물을 기억할 것입니다. 바벨론을 옹호하지 않고, 우리의 타락함과 아버지의 십자가를 묵상하겠습니다.
전 비판받는 목사님들을 옹호하는 것이아니라, 아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면서 정 목사님의 글을 읽고 동의하고, 감동하며 온갖 정의감과 지성으로 똘똘 뭉친 영혼들이 불쌍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단 한가지 방법,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십자가 밖에는 영혼들을 살리실 방법이 없으셨습니다.
책을 쓰고, 방송을 하고, 설교를 잘하고, 선교를 하고, 찬양집회를 하고....
이 모든 것들이 구원의 십자가를 소개하기 위해... 참 기쁨과 평안을 소개하기 위한 방법 아닙니까?
단지 방법중에 하나이지, 본질은 아니지 않습니까?
최소한 내 십자가를 내가지고 간다면 최소한 내 주변 사람들은 내가 설명하지않고, 집회하지 않고, 책을 쓰지않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닳으리라 생각합니다.
너무 순진하다고요. 뱀 처럼 지혜로와야지 바보처럼 비둘기처럼 순전하기만 하다고요?
맞습니다. 수많은 신학자들과 교수들이 자유주의 신학과 인본주의 신학으로 심리학으로 본 기독교 원리와 신학적 배경과 역사학적 관점으로 하나님의 신상명세를 하나, 하나씩 파해쳐 가는 것 보다야.
어머니, 어버지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어디서 출생하셨고, 나이가 몇살이시고, 생신이 언젠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날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고 그 안에서 평안하고 나도 그들을 사랑하는 것... 바보같지만 차라리 그걸 원하실거 같습니다.
제가 잘은 모르지만, 최소한 정용섭 목사님이 설교비판하신 몇몇 목사님들안에는 진심이 있습니다. 복음이 있습니다. 기술적인 면에서 좀 부족할진 모르지만... 그들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아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분명히 그들의 삶 속에 간증과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있음을 전 압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헌신이 "다빈치 코드" 정도로 가려지라고 생각하지 않듯이, "꽉찬 설교, 속 빈 설교"로도 존경하는 목사님들의 희생이 가려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접해보지도 못하고, 교회안에서도 겉도는 영혼들이 이러한 책을 통해 하나님과의 거리는 더 멀어지고, 사상과 문학을 더 사모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됩니다.
도울 선생같은 분이 그러면 대꾸도 안합니다. 웃깁니다. 하지만 신학자이자 목회자 아니십니까?
정말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이 되시면 되지 않습니가? 조은령 감독같은 분이 되시면 안되겠습니까?
계시록 22:15절에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정말로 그들이 거짓말하며, 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 말씀을 지어내는 자들이라면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겁니다.
Positive reenforcement라고 심리학 용어 아실겁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글도 읽으셨겠지요?
선으로 악을 이겨라... 라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 그 합력함이 쉽지않지만, 내가 희생하지않으면 합력이 되지않음을 함께 묵상하길 원합니다.
무엇이 진정한 이땅의 천국과 하나님의 의를 위하는 것인지...
마 5:3~1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기복주의 신앙격으로 이렇게해서 복받으시라고 젂은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의 모습이라서 젂어봤습니다.
"꽉찬 설교" 읽으시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궁휼히 여기는자, 화평케하는자, 의를 위해서 핍박받는자, 가난한자, 온유한자... 등등은 싫으시구요?
내가 아는 옳음을 내가 옳지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치는 것이 의에 주린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욺음을 내가 생각했을 때 옳지 않더라도 행하는 것이
"의를 행하는 자임" 또한 말씀드립니다.
이 책이 누구를 위한 책이며, 내가 스스로 나를 속이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오겠지? 라고 생각하시고
있지는 않은지 벌써 여러번 고민하셨겠지만, 한번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을 바벨론이나 사울왕으로 비유한 것이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리고 원래 제가 쓰는 글은 정 목사님 이 메일로 개인적인 견해를 드릴 생각이였으나
이 메일 주소를 찾지 못해서 공개적으로 남기는 것이니 제 글로 인해 성도이나 학생들에게
피해를 입으신 분들께 정말로 죄송합니다.
2007.08.07 08:43:58
‘어머니, 어버지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들이 날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고
그 안에서 평안하고 나도 그들을 사랑하는 것...
바보같지만 차라리 그걸 원하실거 같습니다.’
님의 생각이 이러하다면,
위의 문장을 제외한, 님의 나머지 말들은,
님 자신에게까지도 쓸데없는 횡설수설되겠습니다.
늘오늘은 님의 말에 토를 달 필요를 못 느낍니다. ㅋㅋ
다만, 한가지,
늘오늘도 님 못지않게,
바보같이,
어머니, 아버지, 하나님, 목회자를 사랑(?)합니다. ^^
그들이 날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고
그 안에서 평안하고 나도 그들을 사랑하는 것...
바보같지만 차라리 그걸 원하실거 같습니다.’
님의 생각이 이러하다면,
위의 문장을 제외한, 님의 나머지 말들은,
님 자신에게까지도 쓸데없는 횡설수설되겠습니다.
늘오늘은 님의 말에 토를 달 필요를 못 느낍니다. ㅋㅋ
다만, 한가지,
늘오늘도 님 못지않게,
바보같이,
어머니, 아버지, 하나님, 목회자를 사랑(?)합니다. ^^
2007.08.08 09:30:59
처음 인사드립니다.
정 목사님의 귀한 사역 위에 주님의 사랑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계속 글을 올리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기상에 있는 설교비평을 읽고 한말씀 드리고 싶어서 글을 올립니다.
싸이트에 들어와보니, 제 친구들이 이길용 목사와 신완식 목사의 글들이
올라와 있어서 반가웠고..가끔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ㅎㅎ
또한 한종호 목사님과는 한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정말 인간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느냐?'는 문제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거 아닌가요? (고후 5:17)
저는 교육학도입니다. 저는 인간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기독교교육을 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치를 발견하고 은사와 달란트를 개발하여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도록 돕는 모든 활동'으로 정의합니다.
그래서 교육을 하는 분명한 이유는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골 1:28)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울 수 있다는 말이죠.
물론 이를 이루기위해서는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골 1:29)해야함은 당연한 본분이구요.
인간은 변합니다.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와 만날 수 있도록
돕는다면 그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은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도록
격려하고 돌보며 교육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면 온전한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엡 4:13). 여기에 교육, 혹은 훈련의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육과 훈련이 개념을 설명할 시간은 없겠네요. 저는 이것을 일단 같은 개념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실상은 교육은 훈련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훈련은 학습자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교육은 학습자의 수준에 맞게 교육내용이 선정되고 방법이 시행되어야 합니다.
훈련은 교육의 대상보다는 내용을 더 중요시 여기는 것이고, 교육은 교육의 대상에 맞게
교육을 시행하는 것이죠. ㅎㅎ )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고
명령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훈련과 교육으로 될 수 있습니다.
스승이 예수님의 명령대로 제자를 삼으면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제자가 믿음을
갖게 되고 신앙이 성숙하여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책임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제자훈련(제자교육)의 가치를 너무 쉽게 평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책을 읽을 때, 설교비평의 제목이 왜 "제자훈련은 가능한가?"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옥목사님의 설교를 중심으로 평가했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옥목사님의 설교를 제자훈련의 틀로 분석하여 오히려 설교비평의 폭이 좁아진 것은 아닌지요?
더우기 목사님께서 사랑의 교회가 달라진게 하나도 없다고 한마디고 평가하시면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으니, 젊은 설교자들이여, 신자들을 변화시킬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강남교인이 부동산이 오를 것을 기대하고, 미국교인이 노예를 부리기도 했지만,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곳곳에서 변화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고...
50-60년전 피폐한 이 땅에 온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를 돕고 희생해서
오늘의 한국과 한국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이 아닌가요?
지금 아프카니스탄의 젊은이들의 아픔과 희생이 궁극적으로는 선한열매로
맺어지게 될 것이라 믿고 기도하고 있는데, 그것 역시 훈련과 교육의 결과가 아닐런지요..
물론 그것이 더 본질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어야 함은 분명한 것이구요..
저는 목사님께서 제자훈련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시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저는 제자훈련이 한계에 도달했다기 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제자화 교육이 이루어지고..
신앙화, 회중화, 역사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소그룹과 회중이 역동적으로 변화되어지고..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개인과 교회를 세우기 위해 더욱 매진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기회가 되면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혹시 본부에 들르실 일이 있으시면 잘 대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 목사님의 귀한 사역 위에 주님의 사랑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계속 글을 올리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기상에 있는 설교비평을 읽고 한말씀 드리고 싶어서 글을 올립니다.
싸이트에 들어와보니, 제 친구들이 이길용 목사와 신완식 목사의 글들이
올라와 있어서 반가웠고..가끔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ㅎㅎ
또한 한종호 목사님과는 한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정말 인간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느냐?'는 문제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거 아닌가요? (고후 5:17)
저는 교육학도입니다. 저는 인간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기독교교육을 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치를 발견하고 은사와 달란트를 개발하여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도록 돕는 모든 활동'으로 정의합니다.
그래서 교육을 하는 분명한 이유는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골 1:28)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울 수 있다는 말이죠.
물론 이를 이루기위해서는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골 1:29)해야함은 당연한 본분이구요.
인간은 변합니다.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와 만날 수 있도록
돕는다면 그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은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도록
격려하고 돌보며 교육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면 온전한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엡 4:13). 여기에 교육, 혹은 훈련의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육과 훈련이 개념을 설명할 시간은 없겠네요. 저는 이것을 일단 같은 개념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실상은 교육은 훈련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훈련은 학습자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교육은 학습자의 수준에 맞게 교육내용이 선정되고 방법이 시행되어야 합니다.
훈련은 교육의 대상보다는 내용을 더 중요시 여기는 것이고, 교육은 교육의 대상에 맞게
교육을 시행하는 것이죠. ㅎㅎ )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고
명령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훈련과 교육으로 될 수 있습니다.
스승이 예수님의 명령대로 제자를 삼으면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제자가 믿음을
갖게 되고 신앙이 성숙하여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책임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제자훈련(제자교육)의 가치를 너무 쉽게 평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책을 읽을 때, 설교비평의 제목이 왜 "제자훈련은 가능한가?"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옥목사님의 설교를 중심으로 평가했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옥목사님의 설교를 제자훈련의 틀로 분석하여 오히려 설교비평의 폭이 좁아진 것은 아닌지요?
더우기 목사님께서 사랑의 교회가 달라진게 하나도 없다고 한마디고 평가하시면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으니, 젊은 설교자들이여, 신자들을 변화시킬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강남교인이 부동산이 오를 것을 기대하고, 미국교인이 노예를 부리기도 했지만,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곳곳에서 변화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고...
50-60년전 피폐한 이 땅에 온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를 돕고 희생해서
오늘의 한국과 한국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이 아닌가요?
지금 아프카니스탄의 젊은이들의 아픔과 희생이 궁극적으로는 선한열매로
맺어지게 될 것이라 믿고 기도하고 있는데, 그것 역시 훈련과 교육의 결과가 아닐런지요..
물론 그것이 더 본질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어야 함은 분명한 것이구요..
저는 목사님께서 제자훈련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시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저는 제자훈련이 한계에 도달했다기 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제자화 교육이 이루어지고..
신앙화, 회중화, 역사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소그룹과 회중이 역동적으로 변화되어지고..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개인과 교회를 세우기 위해 더욱 매진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기회가 되면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혹시 본부에 들르실 일이 있으시면 잘 대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7.08.07 18:23:34
유윤종 목사님,
목사님의 주변에 나와 친한 분들이 많군요.
그럼 결국 유 목사님도 저와 친한 분이십니다.
목사님이 좋은 점을 짚어주셨네요.
인간 변화가 가능하다는 말씀도 옳다고 봅니다.
내 설교비평도 나름으로 그런 가능성에 기대고 있지요.
우리의 논의가 조금 더 정확하게 접점을 찾으려면
변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먼저 있어야겠군요.
종교적인 교양이 풍부해지는 것을 변화라고 한다면, 그건 훈련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위에서 인용한 바울의 진술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걸 변화라고 한다면, 그건 훈련으로 불가능한 게 아닐는지요.
새로운 피조물로의 변화는 존재론적 변화입니다.
그건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사건이지요.
어둠 속에서 빛이 들어와야만 밝아지듯이 말이지요.
그게 그거 아니냐, 하고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이 양자의 차이는 결정적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우리가 그렇게 되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sola Gratia입니다.
이건 그 사람이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세련되게 변화되었느냐와
아무런 상관없이,
그가 제자로서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느냐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하는 것이며,
그렇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결국 칭의론과 은총론이 핵심이라는 거지요.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핵심이라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extra nos in christo!(우리 밖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제자 훈련과 기독교 교육이 무의미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만약 제 글이 그렇게 읽혔다면
내 글이 서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어떤 커리큘럼으로 실행하는 훈련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론적 구원 사건에 천착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다보니
그렇게 과장된 표현이 된 것 같습니다.
훈련과 교육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영적인 마음의 문을 여는 데 중심을 두어야 하지 않을는지요.
함께 대화를 하다보면
목사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아시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총회본부에 들리면 잘 대접해 주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겠습니다.
주의 은총이.
목사님의 주변에 나와 친한 분들이 많군요.
그럼 결국 유 목사님도 저와 친한 분이십니다.
목사님이 좋은 점을 짚어주셨네요.
인간 변화가 가능하다는 말씀도 옳다고 봅니다.
내 설교비평도 나름으로 그런 가능성에 기대고 있지요.
우리의 논의가 조금 더 정확하게 접점을 찾으려면
변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먼저 있어야겠군요.
종교적인 교양이 풍부해지는 것을 변화라고 한다면, 그건 훈련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위에서 인용한 바울의 진술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걸 변화라고 한다면, 그건 훈련으로 불가능한 게 아닐는지요.
새로운 피조물로의 변화는 존재론적 변화입니다.
그건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사건이지요.
어둠 속에서 빛이 들어와야만 밝아지듯이 말이지요.
그게 그거 아니냐, 하고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이 양자의 차이는 결정적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우리가 그렇게 되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sola Gratia입니다.
이건 그 사람이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세련되게 변화되었느냐와
아무런 상관없이,
그가 제자로서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느냐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하는 것이며,
그렇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결국 칭의론과 은총론이 핵심이라는 거지요.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핵심이라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extra nos in christo!(우리 밖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제자 훈련과 기독교 교육이 무의미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만약 제 글이 그렇게 읽혔다면
내 글이 서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어떤 커리큘럼으로 실행하는 훈련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론적 구원 사건에 천착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다보니
그렇게 과장된 표현이 된 것 같습니다.
훈련과 교육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영적인 마음의 문을 여는 데 중심을 두어야 하지 않을는지요.
함께 대화를 하다보면
목사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아시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총회본부에 들리면 잘 대접해 주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겠습니다.
주의 은총이.
2007.08.07 22:49:08
제자’의 존재론적 깊이에 집중해야한다는 목사님의 말씀에 공감하면서도
그 존재론적 깊이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어려운 숙제인것 같습니다.
제 개인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때, 인간은 잘 변화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습관과 훈련으로 삶의 테두리를 제한하는 것 정도로 제 삶을 절제할 수는 있었지만,
생명이나 변화의 내용은 전적으로 주님으로 부터만 가능함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변화지 않은 죄된 속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화를 위한 노력은
어떤 형태로든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존재론적인 깊이에 발을 내디뎠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현실 생활에서 부딪히는 사건들 앞에 두려움, 긴장,분노,
사랑없음, 좁은 마음으로 반응하는 자신을 확인하는 것은 참 고통스럽습니다.
내게 주신 삶을 부여잡고, 한걸음 한걸음 그분이 이끄시는대로 가다보면,
보다 넓고 깊어진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고민을 풀어낼 수 있는 다비아의 공간이 있어서 좋습니다.
그 존재론적 깊이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어려운 숙제인것 같습니다.
제 개인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때, 인간은 잘 변화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습관과 훈련으로 삶의 테두리를 제한하는 것 정도로 제 삶을 절제할 수는 있었지만,
생명이나 변화의 내용은 전적으로 주님으로 부터만 가능함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변화지 않은 죄된 속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화를 위한 노력은
어떤 형태로든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존재론적인 깊이에 발을 내디뎠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현실 생활에서 부딪히는 사건들 앞에 두려움, 긴장,분노,
사랑없음, 좁은 마음으로 반응하는 자신을 확인하는 것은 참 고통스럽습니다.
내게 주신 삶을 부여잡고, 한걸음 한걸음 그분이 이끄시는대로 가다보면,
보다 넓고 깊어진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고민을 풀어낼 수 있는 다비아의 공간이 있어서 좋습니다.
2007.08.07 23:44:39
angelica 님,
인간변화에 대한 입장을 저와 비슷하시군요.
습관과 훈련을 통한 변화의 한계 말입니다.
존재의 깊이에 도달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씀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의 팔은 지구를 안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반면에
우리는 한 사람을 겨우 안을 정도로 짧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경우에 따라서 아주 멀리, 또는 가깝습니다.
우리가 팔을 아무리 내밀어도 그분에게 닿을 수는 없겠지요.
그분이 팔을 내밀어 우리를 안아 주시는 것,
그때 우리의 존재론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변화를 자꾸만 어떤 실제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안아주시면 우리의 한계들이 덮어집니다.
여전히 냄새가 나지만 하나님 안에 있으면 냄새나지 않는 것으로 인정받을 뿐이랍니다.
자신의 한계를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긴장, 분노 같은 것들은 웬만해서 사라지지 않으며,
설령 줄어들었다고 하더라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자기 성찰 없이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지는 않겠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깨달아진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더라도
평화롭고 정의로운 삶을 살도록 노록하게 될 겁니다.
우리 안에서 그런 삶의 에너지가 흘러나오겠지요.
아자!!!
인간변화에 대한 입장을 저와 비슷하시군요.
습관과 훈련을 통한 변화의 한계 말입니다.
존재의 깊이에 도달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씀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의 팔은 지구를 안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반면에
우리는 한 사람을 겨우 안을 정도로 짧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경우에 따라서 아주 멀리, 또는 가깝습니다.
우리가 팔을 아무리 내밀어도 그분에게 닿을 수는 없겠지요.
그분이 팔을 내밀어 우리를 안아 주시는 것,
그때 우리의 존재론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변화를 자꾸만 어떤 실제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안아주시면 우리의 한계들이 덮어집니다.
여전히 냄새가 나지만 하나님 안에 있으면 냄새나지 않는 것으로 인정받을 뿐이랍니다.
자신의 한계를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긴장, 분노 같은 것들은 웬만해서 사라지지 않으며,
설령 줄어들었다고 하더라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자기 성찰 없이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지는 않겠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깨달아진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더라도
평화롭고 정의로운 삶을 살도록 노록하게 될 겁니다.
우리 안에서 그런 삶의 에너지가 흘러나오겠지요.
아자!!!
2007.08.10 12:06:27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산상수훈 중 이 말씀은 우리들을 절망케 하면서도 소망을 줍니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 앞에 온전해 지려면 먼저 우리 자신에 좌절감을 느껴야 합니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려는 자세를 보입니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은 성령의 도움으로 말씀을 더 알도록 도와주고 그리고 성령을 보내 말씀대로 살려는 성도의 의지적인 노력을 도울 것입니다.
이렇게 조금씩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이런 과정을 성화라하고 그리고 그 결과 영화에 달합니다.
칭의처럼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성화도 그리고 영화도 가능합니다.
우리의 변화는 제일 먼저 영적 분야에서 그 다음 서서히 인격과 삶의 분야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영적 변화는 금방 인격과 삶의 변화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직도 성도는 연약함, 나타함과 불완전함에 둘어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의 영향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으로 나타난 결과가 미약하다고 절망할 필요 없습니다.
완전주의자처럼 자신이나 남을 보고 서둘러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밀한 개입을 믿고 기다리고 사랑으로 품어줍시다.
지적대로 인간 목회자의 가르침은 무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유용해집니다.
인간의 노력만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을 믿고 인내로 가르치기에 노력하면 목회자는 그 사명을 다 한 것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로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나중 하나님 앞에서 선 우리의 영화로운 모습은
우리의 판단과는 전혀 다른 결과이기 때문에
우린 또 다시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읽은 성구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는 저희에게 응답하셨고 저희 행한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저희를 사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시99:8절)
믿음으로 행한 것들이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은 사하시고 갚아주시며
아니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불완전한 행함이라도 갚음을 받을 것입니다.
옥목사의 제자훈련이 무용한가 여부보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를 이용하여 역사하실지 좀 더 기다리며 봅시다!
나도 옥목사님의 제자훈련이 교회성장을 위한 것으로 전락되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 대신 어떻게 우리가 물을 잘 줄 수 있는지에 관한 방법론에 좀 더 관심을 기울입시다!!!
이것이 정목사님의 비평 목적이라고 저는 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산상수훈 중 이 말씀은 우리들을 절망케 하면서도 소망을 줍니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 앞에 온전해 지려면 먼저 우리 자신에 좌절감을 느껴야 합니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려는 자세를 보입니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은 성령의 도움으로 말씀을 더 알도록 도와주고 그리고 성령을 보내 말씀대로 살려는 성도의 의지적인 노력을 도울 것입니다.
이렇게 조금씩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이런 과정을 성화라하고 그리고 그 결과 영화에 달합니다.
칭의처럼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성화도 그리고 영화도 가능합니다.
우리의 변화는 제일 먼저 영적 분야에서 그 다음 서서히 인격과 삶의 분야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영적 변화는 금방 인격과 삶의 변화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직도 성도는 연약함, 나타함과 불완전함에 둘어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의 영향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으로 나타난 결과가 미약하다고 절망할 필요 없습니다.
완전주의자처럼 자신이나 남을 보고 서둘러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밀한 개입을 믿고 기다리고 사랑으로 품어줍시다.
지적대로 인간 목회자의 가르침은 무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유용해집니다.
인간의 노력만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을 믿고 인내로 가르치기에 노력하면 목회자는 그 사명을 다 한 것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로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나중 하나님 앞에서 선 우리의 영화로운 모습은
우리의 판단과는 전혀 다른 결과이기 때문에
우린 또 다시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읽은 성구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는 저희에게 응답하셨고 저희 행한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저희를 사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시99:8절)
믿음으로 행한 것들이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은 사하시고 갚아주시며
아니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불완전한 행함이라도 갚음을 받을 것입니다.
옥목사의 제자훈련이 무용한가 여부보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를 이용하여 역사하실지 좀 더 기다리며 봅시다!
나도 옥목사님의 제자훈련이 교회성장을 위한 것으로 전락되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 대신 어떻게 우리가 물을 잘 줄 수 있는지에 관한 방법론에 좀 더 관심을 기울입시다!!!
이것이 정목사님의 비평 목적이라고 저는 봅니다.
2007.08.11 09:56:42
위의 한 말씀 한 말씀들이 모두 진정과 진심어린 아름다운 말 들임이 느껴집니다.
인간의 변화가 훈련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씀에 대해 한 말씀 올릴까 합니다.
저는 54살, 모태신앙으로 저의 어머니는 평생 기도로 사신 분입니다.
특히 자녀 중 한 명을 주님께 드리겠다고, 그 일을 위해 또한 밤, 낮으로 기도하신 분이시죠.
지금도 저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돌아가신 저의 어머님을 말합니다.
밤, 낮으로 기도만 하신 것이 아니고, 손과 발이 닳도록 일을 하신 분이었습니다.
자녀 한 사람을 위해서도 애간장을 졸이시며,
마음을 다하여 권면하셨고,
하나님 사랑을 가르쳐 주셨으며,
연세가 드셔서도 손주들의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푸성귀를 기르시고, 채집하시던,
정말로 아름다운 삶이었습니다.
임종하실 때도, 항문암이라는 고통이 당연한 병이었지만,
하나님이 잡아 주셔서 조금도 육체적인 고통을 느끼지 못하셨고,
별세 직전 며칠 간은 주님께 간다는 확증을 얻고,
힘이 다하도록 찬송을 하면서 춤을 추시고 (누워서 팔, 다리로...나중에는 손목 만으로...)
자녀들에게 입술이나 음악이 아닌 마음으로 찬송하라고 일러 주시고,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알맞은 유언을 해 주셨지요.
이런 제자 훈련을 받은 제가,
어머니의 뜻 받들어 목사후보생 공부를 하는 제가,
형제들 중에서 가장 게으르고,
쓰레기 재활용 하나도 철저하게 못하고, (귀찮아서 그냥 버린 쓰레기가 많았지요.)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면서 차를 몰고 다니고,
지금도 더위를 참지 못하고 선풍기를 돌리면서,
공부와 생활에 최선을 다하지도 못하고, (삶의 변화는 정말로 어렵습니다.)
기도와 말씀에 천착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나름 고민하고, 주님의 뜻을 추구하려고 하지만,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남을 쉽게 판단하고,
맡은 일 (교육 전도사)에도 최선을 다하지 못합니다.
제자훈련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마 이런 의미일 것 같습니다.
54년이 되어도 완성되지 못하는, 아니, 그럴듯하게 바뀌지도 못하는 이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제자훈련의 모양이 겨우 지금의 제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한 저에게도 주님은 은총을 주셔서,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힘을 주십니다.
어쩌다가 정말로 한 순간은 주님의 말씀으로 인한 기쁨도 허락하십니다.
아주 가끔은 기도하는 시간에 손을 잡아 주시고, 한없는 기쁨으로 채워주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고, 자신의 삶의 변화도 없는 이런 현실에 대하여
절망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이런 제가 만약 목사가 된다면,
그래서 매일, 매 주, 하나님의 말씀을 제 속에서 토해내야 한다면,
누에처럼 저축해 놓지도 못한 제 못난 삶 밖에 더 나올 것이 없겠지요.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매 일, 매 순간, 주님으로 차 있지도 못한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신학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
주님께 약속을 드렸습니다.
"절대로, 거짓말 하는 목사가 되지 않겠습니다."
"진실로 주님께 받는 말씀만 전하겠습니다."
교회 개척을 꿈꾸기도 하지만,
그 날은 가깝게 다가 오지만,
아이들을 기르겠다는 작정도 하지만,
그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몸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날씨를 핑계로,
처절한 몸부림 없이 빈둥거리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자화상......
저는 어떻게 하나요?
제 병을 어떻게 고칠 수 있나요?
54년 제자 훈련이 이 모양입니다.
가장 훌륭한 스승님이었던 어머님과 주님께 가르침을 받고서도 말입니다.
ㅠㅠㅠㅠㅠ
그러나 저는 정목사님에게서 희망을 봅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에도 연연하지 않고,
사람들의 칭찬이나 욕에도 상관하지 않고,
더구나 생활에도 별 염려 않고, (ㅋㅋ~~~ 제가 잘 못 보았나요?)
누가 뭐라도 해도 거침없이 제 길을 가는......
큰 교회 목사님도 되고 싶지 않고,
부자가 되고 싶지도 않고,
세계적인 (? ㅎㅎㅎㅎㅎ) 인기에도 무덤덤한,
그저 '내 일이다'싶은 일만 하고 사시는......
남의 설교도 따끔하게, 자상하게, 섬세하게 비판을 하시지만,
자기의 설교도 말씀의 깊이에 들어가려고 애쓰면서 그것을 거침없이 공개하시는......
정목사님의 삶에서 약간의 희망을 보지만,
도저히 제게는 그런 내공이 요원하고 불가능하게 보이니......
휴~~~~~ 한숨만 나옵니다.
'그러면 목사 안하면 될 것 아니냐?' 하시겠지만,
억지로 라도 주님곁에 많이 머무르는 삶만이 살 길이다 싶어......
그리고 안하려고 하다가 죽을 뻔 하였기에 두려움으로......
주님 품 안에 있는 것이 너무 좋아서 다른 삶은 선택하고 싶지 않기에......
이러면서 제자를 기르겠다고 또 작심하고 있는......
모순과 모순에 얽힌 제 삶의 고백이 되어버렸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다비안들에게 주님의 빛을......
인간의 변화가 훈련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씀에 대해 한 말씀 올릴까 합니다.
저는 54살, 모태신앙으로 저의 어머니는 평생 기도로 사신 분입니다.
특히 자녀 중 한 명을 주님께 드리겠다고, 그 일을 위해 또한 밤, 낮으로 기도하신 분이시죠.
지금도 저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돌아가신 저의 어머님을 말합니다.
밤, 낮으로 기도만 하신 것이 아니고, 손과 발이 닳도록 일을 하신 분이었습니다.
자녀 한 사람을 위해서도 애간장을 졸이시며,
마음을 다하여 권면하셨고,
하나님 사랑을 가르쳐 주셨으며,
연세가 드셔서도 손주들의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푸성귀를 기르시고, 채집하시던,
정말로 아름다운 삶이었습니다.
임종하실 때도, 항문암이라는 고통이 당연한 병이었지만,
하나님이 잡아 주셔서 조금도 육체적인 고통을 느끼지 못하셨고,
별세 직전 며칠 간은 주님께 간다는 확증을 얻고,
힘이 다하도록 찬송을 하면서 춤을 추시고 (누워서 팔, 다리로...나중에는 손목 만으로...)
자녀들에게 입술이나 음악이 아닌 마음으로 찬송하라고 일러 주시고,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알맞은 유언을 해 주셨지요.
이런 제자 훈련을 받은 제가,
어머니의 뜻 받들어 목사후보생 공부를 하는 제가,
형제들 중에서 가장 게으르고,
쓰레기 재활용 하나도 철저하게 못하고, (귀찮아서 그냥 버린 쓰레기가 많았지요.)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면서 차를 몰고 다니고,
지금도 더위를 참지 못하고 선풍기를 돌리면서,
공부와 생활에 최선을 다하지도 못하고, (삶의 변화는 정말로 어렵습니다.)
기도와 말씀에 천착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나름 고민하고, 주님의 뜻을 추구하려고 하지만,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남을 쉽게 판단하고,
맡은 일 (교육 전도사)에도 최선을 다하지 못합니다.
제자훈련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마 이런 의미일 것 같습니다.
54년이 되어도 완성되지 못하는, 아니, 그럴듯하게 바뀌지도 못하는 이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제자훈련의 모양이 겨우 지금의 제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한 저에게도 주님은 은총을 주셔서,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힘을 주십니다.
어쩌다가 정말로 한 순간은 주님의 말씀으로 인한 기쁨도 허락하십니다.
아주 가끔은 기도하는 시간에 손을 잡아 주시고, 한없는 기쁨으로 채워주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고, 자신의 삶의 변화도 없는 이런 현실에 대하여
절망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이런 제가 만약 목사가 된다면,
그래서 매일, 매 주, 하나님의 말씀을 제 속에서 토해내야 한다면,
누에처럼 저축해 놓지도 못한 제 못난 삶 밖에 더 나올 것이 없겠지요.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매 일, 매 순간, 주님으로 차 있지도 못한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신학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
주님께 약속을 드렸습니다.
"절대로, 거짓말 하는 목사가 되지 않겠습니다."
"진실로 주님께 받는 말씀만 전하겠습니다."
교회 개척을 꿈꾸기도 하지만,
그 날은 가깝게 다가 오지만,
아이들을 기르겠다는 작정도 하지만,
그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몸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날씨를 핑계로,
처절한 몸부림 없이 빈둥거리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자화상......
저는 어떻게 하나요?
제 병을 어떻게 고칠 수 있나요?
54년 제자 훈련이 이 모양입니다.
가장 훌륭한 스승님이었던 어머님과 주님께 가르침을 받고서도 말입니다.
ㅠㅠㅠㅠㅠ
그러나 저는 정목사님에게서 희망을 봅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에도 연연하지 않고,
사람들의 칭찬이나 욕에도 상관하지 않고,
더구나 생활에도 별 염려 않고, (ㅋㅋ~~~ 제가 잘 못 보았나요?)
누가 뭐라도 해도 거침없이 제 길을 가는......
큰 교회 목사님도 되고 싶지 않고,
부자가 되고 싶지도 않고,
세계적인 (? ㅎㅎㅎㅎㅎ) 인기에도 무덤덤한,
그저 '내 일이다'싶은 일만 하고 사시는......
남의 설교도 따끔하게, 자상하게, 섬세하게 비판을 하시지만,
자기의 설교도 말씀의 깊이에 들어가려고 애쓰면서 그것을 거침없이 공개하시는......
정목사님의 삶에서 약간의 희망을 보지만,
도저히 제게는 그런 내공이 요원하고 불가능하게 보이니......
휴~~~~~ 한숨만 나옵니다.
'그러면 목사 안하면 될 것 아니냐?' 하시겠지만,
억지로 라도 주님곁에 많이 머무르는 삶만이 살 길이다 싶어......
그리고 안하려고 하다가 죽을 뻔 하였기에 두려움으로......
주님 품 안에 있는 것이 너무 좋아서 다른 삶은 선택하고 싶지 않기에......
이러면서 제자를 기르겠다고 또 작심하고 있는......
모순과 모순에 얽힌 제 삶의 고백이 되어버렸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다비안들에게 주님의 빛을......
2007.08.11 09:50:42
오영숙 님이 벌써 54세에요?
나는 40대로 알았는데요.
가르침을 무슨 가르침이에요.
그런 건 상담학 선생님들 전공과목이지요.
자기를 고치려고 너무 애를 쓰지 않는 게 최선이 아닐는지요.
좀 빈둥거리며 살아도 좋을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큼
기독교 신앙이 보일 거고,
그렇게 보이는 것만큼 평화를 누리겠지요.
좋은 주말, 주일!
나는 40대로 알았는데요.
가르침을 무슨 가르침이에요.
그런 건 상담학 선생님들 전공과목이지요.
자기를 고치려고 너무 애를 쓰지 않는 게 최선이 아닐는지요.
좀 빈둥거리며 살아도 좋을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큼
기독교 신앙이 보일 거고,
그렇게 보이는 것만큼 평화를 누리겠지요.
좋은 주말, 주일!
2007.08.11 23:19:58
옴마야, 목사님이 댓글을 빨리도 달으셨네요? ㅎㅎ
ㅎㅎㅎ
제 글보다 댓글이 더 빠르지요??
(사실은 글 올리고 바로 수정을 좀 했답니다.)
목사님, 사실은 여기만 들어오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되도록 덜 들어오려고 했는데
기독교 영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더 자주 들어와야 겠어요.
당분간은 그 길이 내공을 닦는 길로 보이거든요......
그리고, 저, 빈둥거리는 게 마음 편하지 않아요.
목사님의 말씀을 알아들으면서도 말이죠.
여튼, 좋은 주일 보내세요~~~~~~~~~~```
ㅎㅎㅎ
제 글보다 댓글이 더 빠르지요??
(사실은 글 올리고 바로 수정을 좀 했답니다.)
목사님, 사실은 여기만 들어오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되도록 덜 들어오려고 했는데
기독교 영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더 자주 들어와야 겠어요.
당분간은 그 길이 내공을 닦는 길로 보이거든요......
그리고, 저, 빈둥거리는 게 마음 편하지 않아요.
목사님의 말씀을 알아들으면서도 말이죠.
여튼, 좋은 주일 보내세요~~~~~~~~~~```
2007.08.15 11:27:28
1. 훈련으로 사람이 변하지 않고 다른세계와의 만남을 통해 바뀔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사람은 변화가 가능하다는 말씀이지요?
2. 사람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 설교를 통해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인지 정목사님의 입장을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이렇게 하시는 말씀이신지요. - 때로는 가능하고 불가능하다(그래야 신비라 말할 수 있겠죠?). 이것을 말씀하는 건지....
그렇다면 사람은 변화가 가능하다는 말씀이지요?
2. 사람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 설교를 통해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인지 정목사님의 입장을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이렇게 하시는 말씀이신지요. - 때로는 가능하고 불가능하다(그래야 신비라 말할 수 있겠죠?). 이것을 말씀하는 건지....
2007.08.15 12:55:59
정 교수님 안녕하세요.
부담되실 수도 있는 대상을 이번에 선정하셨더군요.
옥 목사님은 합동측의 대표적인 목회자 이십니다. 개신교의 한 분파라기 보다는 보수/개혁신학에 그래도 충실하고자 하는 목회자로서 대표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흔히 ‘그래도 옥 목사님 정도만 되도…’ 라고 인정 받는 몇 안되는 분이시지요. 보는 관점에 따라 이번 비평은 옥 목사님 개인의 설교를 넘어서 보수/개혁신학에 대한 정교수님 특유의 대화요청으로 보이는 군요.
덧 붙이자면 이미 은퇴한 목회자의 지난 설교를 평가의 대상으로 선정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비평의 주제가 제자훈련 자체인가 아니면, 제자훈련이라는 프로그램이 낳은 현상인가? 인지 모호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잇습니다. 본래의 의도가 후자시라면 오히려 후임자인 오정현 목사가 그 대상이 되었으면 하지 않겟는지요? 구약과 신약의 설교, 초대교회와 중세, 종교개혁시대의 설교와 지금의 설교가 다르듯이, 어느 설교든 시대의 정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훈련은 가능한가?
주된 질문과 비평의 소재는, 과연 제자 되는 것이 훈련으로 가능한가 입니다. 사실 이 질문은 80년대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었지요. 위에서 소개하신 제자훈련에 대한 오해 중에 한 가지가 빠져 보입니다.
‘제자훈련’은 ‘제자’와 ‘훈련’의 합성어입니다. 여기서 ‘제자’가 목표라면 ‘훈련’은 방식입니다. 이점에서 제자훈련의 무게 중심은 ‘제자’에 있지 ‘훈련’이라는 수단에 있지 않다는 것이 저의 이해 입니다. 그런데도 비평가들은 유독 ‘훈련’에 집중 왔었지요. 마치 하나님은 주무시는데 자칭 제자들이 또 다른 제자를 생산해 낸다는 식의 이해 말입니다. 이번 비평도 이 범주와는 다르다는 근거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 저의 솔직한 소감입니다.
적어도 이 훈련에 동의하고 참여 하시는 분들은, 제자가 훈련으로 된다고 생각하지 않다고 봅니다. 아니 제자훈련 교제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자훈련의 기초는 성경묵상과 기도입니다. 목회자로부터 훈련받아 성경을 묵상하는 방식을 배우고 기도 훈련을 받은 순장(리더)가 이를 다시 전달하자는 것이지요. 사실 순장이 하는 일은 거창하게 제자를 만든다기 보다는 순원(구역원)을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정기적으로 묵상하고 실천 할것을 독려하는 역할입니다. 그래서 실천하는 기독교인이 되는 일을 돕겠다는 취지입니다. 그 일을 하는데 있어, 하다 안되면 말고 식이 아니라, 마치 주님이 12제자를 길러내셨듯이 진지하고 성실하게 임하자는 각오를 ‘제자훈련’이라는 이름으로 표현 한 것이 아닐가요?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어느 현상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다각적인 접근과 분석이 필요합니다. 물론 기독교를 해명하는 과정에 기초로 사용되는 조직신학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만, 이에만 의존 한다면 좀 차갑지 않을가요? 아시는 대로 70-80년대 한국교회는 부흥이라는 명목으로 기복과 신비주의가 공개적으로 강조되던 시대였습니다. 제자훈련은 이러한 흐름에 대한 신선한 도전이었습니다. 이는 제자훈련의 등장과 함께 이제까지 주입된 내용에 대한 ‘심화’의 한 방편으로 평가 될수 있겠지요.
20-30년전의 운동과 방식이 여전히 강조되고 있다는 현실이 아직 한국 기독교가 이기적 신비와 기복주의로부터 벗어 나지 못햇다는 반증인듯 합니다. 그렇습니다. 한층 심화된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 속히 왔으면 합니다. 그 대안은 과연 무엇일가요? 존재론 vs 실천, 혹은 존재론=실천론... 결국 좀더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대안 모색에 자발적인 책임감을 가지시는 정교수님의 헌신이 인상적 입니다. 무엇보다 비평자의 훈훈한 숨결을 느끼면서 읽을수 있었습니다. 정제된 어휘선택과 진지하고 성실한 접근이 귀감이 됩니다.
감사 합니다.
부담되실 수도 있는 대상을 이번에 선정하셨더군요.
옥 목사님은 합동측의 대표적인 목회자 이십니다. 개신교의 한 분파라기 보다는 보수/개혁신학에 그래도 충실하고자 하는 목회자로서 대표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흔히 ‘그래도 옥 목사님 정도만 되도…’ 라고 인정 받는 몇 안되는 분이시지요. 보는 관점에 따라 이번 비평은 옥 목사님 개인의 설교를 넘어서 보수/개혁신학에 대한 정교수님 특유의 대화요청으로 보이는 군요.
덧 붙이자면 이미 은퇴한 목회자의 지난 설교를 평가의 대상으로 선정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비평의 주제가 제자훈련 자체인가 아니면, 제자훈련이라는 프로그램이 낳은 현상인가? 인지 모호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잇습니다. 본래의 의도가 후자시라면 오히려 후임자인 오정현 목사가 그 대상이 되었으면 하지 않겟는지요? 구약과 신약의 설교, 초대교회와 중세, 종교개혁시대의 설교와 지금의 설교가 다르듯이, 어느 설교든 시대의 정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훈련은 가능한가?
주된 질문과 비평의 소재는, 과연 제자 되는 것이 훈련으로 가능한가 입니다. 사실 이 질문은 80년대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었지요. 위에서 소개하신 제자훈련에 대한 오해 중에 한 가지가 빠져 보입니다.
‘제자훈련’은 ‘제자’와 ‘훈련’의 합성어입니다. 여기서 ‘제자’가 목표라면 ‘훈련’은 방식입니다. 이점에서 제자훈련의 무게 중심은 ‘제자’에 있지 ‘훈련’이라는 수단에 있지 않다는 것이 저의 이해 입니다. 그런데도 비평가들은 유독 ‘훈련’에 집중 왔었지요. 마치 하나님은 주무시는데 자칭 제자들이 또 다른 제자를 생산해 낸다는 식의 이해 말입니다. 이번 비평도 이 범주와는 다르다는 근거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 저의 솔직한 소감입니다.
적어도 이 훈련에 동의하고 참여 하시는 분들은, 제자가 훈련으로 된다고 생각하지 않다고 봅니다. 아니 제자훈련 교제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자훈련의 기초는 성경묵상과 기도입니다. 목회자로부터 훈련받아 성경을 묵상하는 방식을 배우고 기도 훈련을 받은 순장(리더)가 이를 다시 전달하자는 것이지요. 사실 순장이 하는 일은 거창하게 제자를 만든다기 보다는 순원(구역원)을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정기적으로 묵상하고 실천 할것을 독려하는 역할입니다. 그래서 실천하는 기독교인이 되는 일을 돕겠다는 취지입니다. 그 일을 하는데 있어, 하다 안되면 말고 식이 아니라, 마치 주님이 12제자를 길러내셨듯이 진지하고 성실하게 임하자는 각오를 ‘제자훈련’이라는 이름으로 표현 한 것이 아닐가요?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어느 현상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다각적인 접근과 분석이 필요합니다. 물론 기독교를 해명하는 과정에 기초로 사용되는 조직신학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만, 이에만 의존 한다면 좀 차갑지 않을가요? 아시는 대로 70-80년대 한국교회는 부흥이라는 명목으로 기복과 신비주의가 공개적으로 강조되던 시대였습니다. 제자훈련은 이러한 흐름에 대한 신선한 도전이었습니다. 이는 제자훈련의 등장과 함께 이제까지 주입된 내용에 대한 ‘심화’의 한 방편으로 평가 될수 있겠지요.
20-30년전의 운동과 방식이 여전히 강조되고 있다는 현실이 아직 한국 기독교가 이기적 신비와 기복주의로부터 벗어 나지 못햇다는 반증인듯 합니다. 그렇습니다. 한층 심화된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 속히 왔으면 합니다. 그 대안은 과연 무엇일가요? 존재론 vs 실천, 혹은 존재론=실천론... 결국 좀더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대안 모색에 자발적인 책임감을 가지시는 정교수님의 헌신이 인상적 입니다. 무엇보다 비평자의 훈훈한 숨결을 느끼면서 읽을수 있었습니다. 정제된 어휘선택과 진지하고 성실한 접근이 귀감이 됩니다.
감사 합니다.
2007.08.18 14:28:17
목사님이 하신 말씀에 많은 공감을 갖습니다.
예수님의 지식으로 따지면 오늘날 권사나 장로만 되도,, 초대교회에 사도로 활동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많은 성경적 지식을 갖고 있는 평신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삶의
질이나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습니다. 내 자신만 봐도 알 수 있죠. 훌륭한 신학책을
읽고, 배우고 가르쳐도 저의 삶도 그리 능력있어 보이는 삶은 아닙니다.
만약 사람이 훈련과 연습을 통해 변하고 성장시킬 수 있다면 학교만큼 좋은곳도 없을거라
생각됩니다. 연습과 훈련을 통해 큰 교회는 세울 수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진리는 단순하고 촌스런듯....
전도사로서 사람을 가르치려거나, 변화 시키려는 것보다 내가 먼저 하나님의 살아계신
은혜를 경험하고 믿는 것이 우선순위구나라는 가르침을 받고 갑니다.
예수님의 지식으로 따지면 오늘날 권사나 장로만 되도,, 초대교회에 사도로 활동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많은 성경적 지식을 갖고 있는 평신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삶의
질이나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습니다. 내 자신만 봐도 알 수 있죠. 훌륭한 신학책을
읽고, 배우고 가르쳐도 저의 삶도 그리 능력있어 보이는 삶은 아닙니다.
만약 사람이 훈련과 연습을 통해 변하고 성장시킬 수 있다면 학교만큼 좋은곳도 없을거라
생각됩니다. 연습과 훈련을 통해 큰 교회는 세울 수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진리는 단순하고 촌스런듯....
전도사로서 사람을 가르치려거나, 변화 시키려는 것보다 내가 먼저 하나님의 살아계신
은혜를 경험하고 믿는 것이 우선순위구나라는 가르침을 받고 갑니다.
2007.08.18 22:14:24
김경태 님,
잘 말씀하셨군요.
변화는 가능하기도 하고,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이 변화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존재론적인 변화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사건입니다.
바리새인처럼 변화되는 걸 참된 변화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우리가 최선으로 변화될 수 있는 지경은 바리새적인 것입니다.
잘 말씀하셨군요.
변화는 가능하기도 하고,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이 변화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존재론적인 변화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사건입니다.
바리새인처럼 변화되는 걸 참된 변화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우리가 최선으로 변화될 수 있는 지경은 바리새적인 것입니다.
2007.08.18 22:25:15
균형 님,
오랜 만이군요.
옥한흠 목사님은 최선을 다 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다만 저는 옥 목사님이 너무 많은 것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인상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설교자로서 충분합니다.
물론 목회자라고 한다면 삶의 변화까지 요구해야할지 모르겠지요.
그러나 목회자라고 하더라도 개인의 삶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게
저의 입장입니다.
신자들을 좀 내버려 두자는 것이지요.
어떻게 살든지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아시겠지요?
한국의 목사들은 신자들을 어린아이 취급을 합니다.
일일이 모든 걸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계몽적인 성향이 아주 강합니다.
나쁜 쪽으로 계몽하는 건 문제지만 좋은 쯕으로 계묭하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것마저 그만 두자는 거지요.
신자들은 성숙한 사람들로 대하자는 겁니다.
책임을 스스로 지게 하는 거지요.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을 바르게 해석해서 전달하면 됩니다.
물론 이게 간단한 건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는 해석학 공부도 하고,
교회력과 교회예전도 공부합니다.
신자들의 삶까지 우리가 책임을 질 수는 없는데도 불구하고
목사들이 너무 많은 욕심을 내는 것 같군요.
개인윤리와 사회윤리 같은 문제들은 교회정책에서 다루면 충분합니다.
노회나 총회 차원에서 신조를 발표할 수도 있구요,
생태학이나 여성문제, 노동문제에 관한 신학선언도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우리가 바르게 복음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행하고
건강한 교회를 인도하게 되면
신자들은 변하지 말라고 해도 무언가 조금씩 달라지지 않을까요?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좀 신자들을 내버려 두는 게 바른 설교와 목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의 깊은 곳을 아시는 성령만이 참된 변화를 가능하게 하실 겁니다.
아자!!
오랜 만이군요.
옥한흠 목사님은 최선을 다 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다만 저는 옥 목사님이 너무 많은 것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인상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설교자로서 충분합니다.
물론 목회자라고 한다면 삶의 변화까지 요구해야할지 모르겠지요.
그러나 목회자라고 하더라도 개인의 삶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게
저의 입장입니다.
신자들을 좀 내버려 두자는 것이지요.
어떻게 살든지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아시겠지요?
한국의 목사들은 신자들을 어린아이 취급을 합니다.
일일이 모든 걸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계몽적인 성향이 아주 강합니다.
나쁜 쪽으로 계몽하는 건 문제지만 좋은 쯕으로 계묭하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것마저 그만 두자는 거지요.
신자들은 성숙한 사람들로 대하자는 겁니다.
책임을 스스로 지게 하는 거지요.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을 바르게 해석해서 전달하면 됩니다.
물론 이게 간단한 건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는 해석학 공부도 하고,
교회력과 교회예전도 공부합니다.
신자들의 삶까지 우리가 책임을 질 수는 없는데도 불구하고
목사들이 너무 많은 욕심을 내는 것 같군요.
개인윤리와 사회윤리 같은 문제들은 교회정책에서 다루면 충분합니다.
노회나 총회 차원에서 신조를 발표할 수도 있구요,
생태학이나 여성문제, 노동문제에 관한 신학선언도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우리가 바르게 복음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행하고
건강한 교회를 인도하게 되면
신자들은 변하지 말라고 해도 무언가 조금씩 달라지지 않을까요?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좀 신자들을 내버려 두는 게 바른 설교와 목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의 깊은 곳을 아시는 성령만이 참된 변화를 가능하게 하실 겁니다.
아자!!
2007.08.18 22:29:21
바게트 님,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은혜 경험이 우선이라는 말씀은 옳습니다.
그게 영성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영적인 상태말입니다.
이건 자기가 완전히 낮아질 때만 가능하겠지요.
억지로 낮아지는 게 아니라 실제로 자기를 무화시키는 단계로 갈 때만 가능하겠지요.
이런 일만해도 목사들에게는 벅차서 다른 일을 할 시간을 찾기 힘듭니다.
주의 은총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은혜 경험이 우선이라는 말씀은 옳습니다.
그게 영성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영적인 상태말입니다.
이건 자기가 완전히 낮아질 때만 가능하겠지요.
억지로 낮아지는 게 아니라 실제로 자기를 무화시키는 단계로 갈 때만 가능하겠지요.
이런 일만해도 목사들에게는 벅차서 다른 일을 할 시간을 찾기 힘듭니다.
주의 은총이.
2007.08.27 10:25:26
제자 훈련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변화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정용섭 목사님의 글은 불가능하다는 쪽의 설명을 충분히 잘 해 주시고 계시다고 봅니다. 저 또한 목사님의 결론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적어도 지금의 제자 훈련이라는 방식을 통해서는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는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잘 아시다시피 분명히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는 의를 요구하셨지요.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지금의 한국 기독교가 쭉 해온 제자 훈련을 통해 양산된 제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이라기 보다는, 바리새파 제자들에 훨씬 더 가깝다고 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가졌던 의를 가지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모습이 지배적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경건을 참 경건인양 생각하는 모습이 제가 보기에 너무나 많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성경이 바리새인을 외식하는 자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단지 형식주의적 신앙인들이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을 이 정도로 인식한다는 것은 그만큼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그들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지금 교회는 열심을 다해 제자훈련을 비롯한 여러 훈련을 통해 성도들을 훈련시키지만, 그런 훈련들이 바로 바리새파 사람들이 추구했던 훈련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열심은 있지만, 지식이 없기에 예수의 제자가 아닌 바리새파 제자들을 양산하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본인들은 자신들이 바리새파 제자들인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바리새파 사람들 신앙의 뿌리는 ‘분리”에 두고 있습니다. ‘바리새’라는 말이 분리주의자를 뜻한다고 하던데요 (기억이 오래되어서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뜻이 보여주는 것처럼, 바리새파 사람들은 철저한 분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속의 분리, 깨끗함/더러움의 분리, 의/불의의 분리 등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자신들도 거룩해야 하는 그 당위적 말씀을 부단히 실천하고 애셨던 무리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형식주의자라는 오명 때문에, 분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을 이루고자 애쓴 이들의 열심어린 신앙이 형식적인 것에 치우쳐 있다는 인식들을 기독교인들은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안식일 준수, 십일조 준수, 음식의 정결법 준수 같은 것들에 보인 이들의 열심을 거론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없는 것이, 로마서 7장에서 보인 사도 바울의 모습, 자신이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율법에 종살이 하며 신앙생활을 했을 때의 모습을 보면, 이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런 형식적인 것들에만 집착하며 거룩의 모양을 이루려고 애썼던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을 엿보게 합니다.
다시 말해 이들도 또한 근본적으로 겉모습 못지 않게 내면의 거룩함도 함께 추구했던 신앙인들이라고 보아야 할 겁니다. 물론 안식일, 십일조, 음식의 정결법을 강조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형식에 치우친 신앙으로 단순화시켜서 평가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스라엘을 이방인과 특별히 구별짓고자 하는, 즉 이스라엘과 이방인간의 분리를 이루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 때문에 일어난 강조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분리에 기초한 훈련은 제 아무리 열심이 가득하고 헌신이 가득하다 하더라도 절대로 바리새인의 의를 뛰어넘은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쪽의 열심과 훈련은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탄식하며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영적인 상태, 즉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으로 인한 지극한 고통 속에 거하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분리에 기초한 훈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죄, 악, 더러움이라고 불리는 것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하지만, 결코 이 싸움에서 승리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치열한 영적 싸움을 벌이는 모습이, 겉으로는 경건하고 아름답게 치장되어 나타날 수 밖에 없을지 모르지만, 속은 썩을 때로 썩은 상태로 더더욱 떨어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참 훈련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자비에 토대를 둔 훈련이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이 롬8장 서두에서 언급한 생명의 성령의 법을 체득해 가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무엇인지를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만 덧붙인다면,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로 들어가게 되면, 결코 정죄가 없는, 그래서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대 자유의 토대를 가지게 되지 않나 싶습니다. 경건에 이르는 참 훈련은 바로 이 대 자유의 토대를 충분히 갖게 된 토양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현재의 모든 제자훈련은 이 토양에 뿌리를 내리게 하는 훈련이 아니라, 오히려 이 토양을 철저하게 황폐하게 만들어, 그 어떤 생명도 살 수 없는 땅으로 만드는 그런 훈련으로 제게는 보이네요. 그러니 이런 훈련을 통해 참 존재의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 아닐런지요.
예수님은 잘 아시다시피 분명히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는 의를 요구하셨지요.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지금의 한국 기독교가 쭉 해온 제자 훈련을 통해 양산된 제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이라기 보다는, 바리새파 제자들에 훨씬 더 가깝다고 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가졌던 의를 가지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모습이 지배적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경건을 참 경건인양 생각하는 모습이 제가 보기에 너무나 많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성경이 바리새인을 외식하는 자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단지 형식주의적 신앙인들이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을 이 정도로 인식한다는 것은 그만큼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그들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지금 교회는 열심을 다해 제자훈련을 비롯한 여러 훈련을 통해 성도들을 훈련시키지만, 그런 훈련들이 바로 바리새파 사람들이 추구했던 훈련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열심은 있지만, 지식이 없기에 예수의 제자가 아닌 바리새파 제자들을 양산하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본인들은 자신들이 바리새파 제자들인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바리새파 사람들 신앙의 뿌리는 ‘분리”에 두고 있습니다. ‘바리새’라는 말이 분리주의자를 뜻한다고 하던데요 (기억이 오래되어서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뜻이 보여주는 것처럼, 바리새파 사람들은 철저한 분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속의 분리, 깨끗함/더러움의 분리, 의/불의의 분리 등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자신들도 거룩해야 하는 그 당위적 말씀을 부단히 실천하고 애셨던 무리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형식주의자라는 오명 때문에, 분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을 이루고자 애쓴 이들의 열심어린 신앙이 형식적인 것에 치우쳐 있다는 인식들을 기독교인들은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안식일 준수, 십일조 준수, 음식의 정결법 준수 같은 것들에 보인 이들의 열심을 거론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없는 것이, 로마서 7장에서 보인 사도 바울의 모습, 자신이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율법에 종살이 하며 신앙생활을 했을 때의 모습을 보면, 이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런 형식적인 것들에만 집착하며 거룩의 모양을 이루려고 애썼던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을 엿보게 합니다.
다시 말해 이들도 또한 근본적으로 겉모습 못지 않게 내면의 거룩함도 함께 추구했던 신앙인들이라고 보아야 할 겁니다. 물론 안식일, 십일조, 음식의 정결법을 강조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형식에 치우친 신앙으로 단순화시켜서 평가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스라엘을 이방인과 특별히 구별짓고자 하는, 즉 이스라엘과 이방인간의 분리를 이루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 때문에 일어난 강조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분리에 기초한 훈련은 제 아무리 열심이 가득하고 헌신이 가득하다 하더라도 절대로 바리새인의 의를 뛰어넘은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쪽의 열심과 훈련은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탄식하며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영적인 상태, 즉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으로 인한 지극한 고통 속에 거하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분리에 기초한 훈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죄, 악, 더러움이라고 불리는 것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하지만, 결코 이 싸움에서 승리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치열한 영적 싸움을 벌이는 모습이, 겉으로는 경건하고 아름답게 치장되어 나타날 수 밖에 없을지 모르지만, 속은 썩을 때로 썩은 상태로 더더욱 떨어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참 훈련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자비에 토대를 둔 훈련이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이 롬8장 서두에서 언급한 생명의 성령의 법을 체득해 가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무엇인지를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만 덧붙인다면,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로 들어가게 되면, 결코 정죄가 없는, 그래서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대 자유의 토대를 가지게 되지 않나 싶습니다. 경건에 이르는 참 훈련은 바로 이 대 자유의 토대를 충분히 갖게 된 토양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현재의 모든 제자훈련은 이 토양에 뿌리를 내리게 하는 훈련이 아니라, 오히려 이 토양을 철저하게 황폐하게 만들어, 그 어떤 생명도 살 수 없는 땅으로 만드는 그런 훈련으로 제게는 보이네요. 그러니 이런 훈련을 통해 참 존재의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 아닐런지요.
2007.08.27 11:05:16
윈드스피릿 님의 대글을 잘 읽었습니다.
모두 동의하구요,
한 마디만 덧붙인다면
존재론적 변화가 바로 하나님의 자비, 또는 하나님 나라에 철저하게 의존한다는 점에서
어떤 한 사람의 변화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고 봐야 할 겁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며, 행위이듯이
변화도 역시 하나님만 판단할 수 있는 사건이겠지요.
주의 은총이.
모두 동의하구요,
한 마디만 덧붙인다면
존재론적 변화가 바로 하나님의 자비, 또는 하나님 나라에 철저하게 의존한다는 점에서
어떤 한 사람의 변화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고 봐야 할 겁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며, 행위이듯이
변화도 역시 하나님만 판단할 수 있는 사건이겠지요.
주의 은총이.
2007.08.27 12:13:45
바리새인들의 "상대적 의"를 뛰어 넘는 참된 "절대적 의" 라고 이야기 해도 될는지요... 윈드스피릿님의 글이 정말 많이 공감이 됩니다... 앞으로 많은 교류 바랍니다...
2007.08.30 23:19:28
옥목사님의 설교오디오를 한때 갈급한 마음으로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뭔가 맞지 않는 옷을 입은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지더군요. 그 이유는 그분 설교스타일이 부분적으로 강요와 선동적인 면에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었습니다. 훌륭한 설교내용을 가진 분이 선택할 방법은 아닌것 같았습니다. 때론 교인들에게 어린아이 야단치는것 같이 하기도 하셨지요.
물론 설교의 본질은 아닌 부분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목사님께서 설교비평에 어떻게 다루실까 궁금했는데 결론부분이 제자훈련에 대한 내용으로 흐른 것은 목회에 관련된 것이어서 약간 김이 빠진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이런 비판을 할 자격이 있나'라는 생각으로 펜뚜껑 덮어놓고 있다가 저의 잣대를 늘려보고 싶어 열었습니다.
정목사님.. 제 판단에 잘못이 있으면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고 한수 지도 부탁드립니다.
물론 설교의 본질은 아닌 부분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목사님께서 설교비평에 어떻게 다루실까 궁금했는데 결론부분이 제자훈련에 대한 내용으로 흐른 것은 목회에 관련된 것이어서 약간 김이 빠진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이런 비판을 할 자격이 있나'라는 생각으로 펜뚜껑 덮어놓고 있다가 저의 잣대를 늘려보고 싶어 열었습니다.
정목사님.. 제 판단에 잘못이 있으면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고 한수 지도 부탁드립니다.
2007.08.31 11:49:35
윈드스피릿 님... 글 잘 읽었습니다.
마치 제가 쓴 글(?)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네요.
아니, 저는 이런 글을 쓸 재주가 없으니까.. .
제 안에서 하고 싶은 말을 글로 보는 느낌이라는 것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글 부탁드립니다.
마치 제가 쓴 글(?)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네요.
아니, 저는 이런 글을 쓸 재주가 없으니까.. .
제 안에서 하고 싶은 말을 글로 보는 느낌이라는 것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글 부탁드립니다.
2007.09.21 06:22:36
제가 우연히 사랑교회 목사님 바뀔때 Web Site에 갔었는데요,
정말 놀랬읍니다.
요지는, 옥목사께서 자녀 상속이 아닌
평화적 정권교체를 몸소 실천 하심에
교인들이 온통 울음과 기도회,,
사랑교회 Web Page 어딜가나
'옥목사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
새로 오시는 오목사, 가시는 옥목사 온통 난리굿에..
어딜 봐도 오목사, 옥목사 자랑천지 - 친자 상속 깨버리다...
(그당시 친자상속 교회 몇군데 있었고, 사회문제 issued)
분명했던건, 하나님은 잘안뵈더라고요..
옥목사 자신은 원치 않았는지 모르지만요.
더 역겨웠던건,
제자훈련에 미쳤다고 하신분이
사랑교회에 수십명의 기라성같은 목사님덜이 계셨을텐데
어찌된 이유로 미국에서 잘하시고계신 오목사를
후임으로 낙점하시었는지. (옥목사 자신이 추천하고
교회가 수락했으니, period이긴 한데.)
사랑교회 제자훈련 실패한거 아닌지요.
아니면, 공교롭게도, 같은 숭전대 후배라서......
(이건 제가 직접읽은 사랑교회 WEB Site 내용입니다
아니라고 주장하신는분 고쳐주세요)
그래서 교회를 맡기기에 믿을수 있어서 ?
단지 친자상속이 아니니까 평화적 정권교체라 말할수있나요 ?
필부인 제생각엔,
제자훈련 실패 OR 사랑교회 부목사들 부적격판단
아름다운 예는 아니지만, 전두환장군이 노장군 찍은거하구
별 다른게 업서보이던데......
한국교회 부목사들의 태생적한계는 옥목사도 어쩔수 없었는지.
허긴 조목사도 나이70넘도록 제자 안만들어져서 계속하겠다고
하셨으니.
정목사님 후한(?) 비평에 약간 실망.
정말 놀랬읍니다.
요지는, 옥목사께서 자녀 상속이 아닌
평화적 정권교체를 몸소 실천 하심에
교인들이 온통 울음과 기도회,,
사랑교회 Web Page 어딜가나
'옥목사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
새로 오시는 오목사, 가시는 옥목사 온통 난리굿에..
어딜 봐도 오목사, 옥목사 자랑천지 - 친자 상속 깨버리다...
(그당시 친자상속 교회 몇군데 있었고, 사회문제 issued)
분명했던건, 하나님은 잘안뵈더라고요..
옥목사 자신은 원치 않았는지 모르지만요.
더 역겨웠던건,
제자훈련에 미쳤다고 하신분이
사랑교회에 수십명의 기라성같은 목사님덜이 계셨을텐데
어찌된 이유로 미국에서 잘하시고계신 오목사를
후임으로 낙점하시었는지. (옥목사 자신이 추천하고
교회가 수락했으니, period이긴 한데.)
사랑교회 제자훈련 실패한거 아닌지요.
아니면, 공교롭게도, 같은 숭전대 후배라서......
(이건 제가 직접읽은 사랑교회 WEB Site 내용입니다
아니라고 주장하신는분 고쳐주세요)
그래서 교회를 맡기기에 믿을수 있어서 ?
단지 친자상속이 아니니까 평화적 정권교체라 말할수있나요 ?
필부인 제생각엔,
제자훈련 실패 OR 사랑교회 부목사들 부적격판단
아름다운 예는 아니지만, 전두환장군이 노장군 찍은거하구
별 다른게 업서보이던데......
한국교회 부목사들의 태생적한계는 옥목사도 어쩔수 없었는지.
허긴 조목사도 나이70넘도록 제자 안만들어져서 계속하겠다고
하셨으니.
정목사님 후한(?) 비평에 약간 실망.
2007.09.21 08:50:35
후흐흐흐,
이렇게 웃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잘 보셨어요.
그게 문제이긴 한데,
그것이 옥 목사님의 책임인지
아닌지는 말하기 힘들 거에요.
옥 목사님에게서는 지나친 비장감이랄까,
아니면 엄숙주의 같은 게 느껴지지요?
후임자 선정에서도 지혜롭지 못했다는 건
아마 알만한 사람들을 알겁니다.
그 내막을 내가 잘 모르니까 할말은 없습니다.
제 글을 옥 목사님의 목회 전반이 아니라
설교에 한정된 겁니다.
그렇게 말씀에 순전하게 빠지는 분도 한국에서는 드물기 때문에
당연히 후한 점수를 드려야지요.
이런 게 제 설교비평의 한계이기도 하구요.
앞으로 한국의 대형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갈는지 기다려봅시다.
감사.
이렇게 웃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잘 보셨어요.
그게 문제이긴 한데,
그것이 옥 목사님의 책임인지
아닌지는 말하기 힘들 거에요.
옥 목사님에게서는 지나친 비장감이랄까,
아니면 엄숙주의 같은 게 느껴지지요?
후임자 선정에서도 지혜롭지 못했다는 건
아마 알만한 사람들을 알겁니다.
그 내막을 내가 잘 모르니까 할말은 없습니다.
제 글을 옥 목사님의 목회 전반이 아니라
설교에 한정된 겁니다.
그렇게 말씀에 순전하게 빠지는 분도 한국에서는 드물기 때문에
당연히 후한 점수를 드려야지요.
이런 게 제 설교비평의 한계이기도 하구요.
앞으로 한국의 대형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갈는지 기다려봅시다.
감사.
2007.09.21 10:25:22
제가 알기로 대한예수교장로회법에는 부목사를 담임으로 청빙하는 것은 불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오래 전에는 확실히 그랬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다녔던 교회에서도 좋은 부목사님들이 계셨는데 담임이 안되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하더군요.
사역하는 교회의 부목이 담임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여러 가지의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설명들었습니다.
제가 다녔던 교회에서도 좋은 부목사님들이 계셨는데 담임이 안되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하더군요.
사역하는 교회의 부목이 담임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여러 가지의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설명들었습니다.
2007.09.22 09:29:16
-- 모든것을 건다는 건 외로운거야 -- (저작권: 조용필 '킬리만자로 표범' 중 발췌. )
이글은 주로 목사님덜 보시라고 쓰고요, 다음엔 평신도의 삶의자세에(넘 거창?) 대해서 써보겠읍니다.
다시한번 옥목사 비평글 읽으면서 더더욱 안타까음에.... 운동장에서 "이놈이...한국교회.." 하셨다는 말에.
요한복음 어딘가에, 예수가 말하길,
그들은 남들 눈에 잘띄는 저자거리에 열심히, 소리내어 기도 하는 자들이라... 외식하는자..
옥목사님,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시고 계시다면, 다 버리시요. 이미 다 버리셨더라면 운동장에
안오셨을텐데.. 아직도 하나님 일이 남아서(국제제.. 머 이런거),, 이런 변명하시지말고,
그냥 다버리셔. 예수님 말씀에 뒤통수 긁적이며 근심어려,, 간 그부자 청년처럼 고민말고요.
나 아녀도 하나님 나라 국방부 시계는 잘가고 있어요. 혹시 나때메, 다른선수가 ?
다 버리셔. (단 목숨은 말고요) 그럼 그 기도 먹힐(?)거 가타요.
여기오시는 분들중, 목사님덜이 많으신거 가타서 제가(학력자랑ㅎㅎ - 70년대후반 대입학) 충고,
증말 충고 하겠읍니다. 건방지다고 생각하셔도 할수없어요.
버리세요. 다 버리세요. 다버리시지 못하겠으면 제발좀 가난해지십시요. 형이상/하 이런거 따지지
말고 무조건 가난해지세요. 물리적으로 가난해지세요. 당신이 섬기는/개척한 whatever교회에
재산소유 하위 10%아래에 무조건 위치하세요. (아 - ! 강남은 10%도 넘 많나요 ?)
우리교회 목사님도 나처럼 가난한데, 하고 내가 위안삼을 수 있도록여.
목사님 돈벌기 얼마나 어려운지 모루고하시는말이지, 이런생각 안들게요.
내가 믿음 없다고요 ? 누가 감히 나의 믿음을 크다작다 있다없다 말할수있나 ?
제말이 건방지다고 생각되시는 분덜, 지난세기 저 위대한 소설가 톨스토이의 평전좀 꼭 읽으세요.
그가 왜 부활을 썼으며, 그의 최후는 어떠했는지. 예수의 8복은 그에게 무엇이었는지.
그가 왜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지.
Henry Nouwen은 또 어떻고요 ?
예수가 제자발닦는 설교는 무자게덜 하시는데,,, 목사님덜, 발만 마니 닦으시는거가타서 안타까움.
그럼 목사가 가난하면 다되었나여 ? 아니지요. 공부를 무자게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설교가 되고
우리덜은 그설교 듣고 또 한주를 그말씀 곱씹으면서...
조 위에 어느분, 설교는 시원치않아도 다른 면에서 모범되어 교인들을 품고 머 그러고하셨는데
그정도는 이제 갓 장로님이나 집사님/권사님들도 충분하실듯.
목사는 Paid Job이예요. 일주일내내 다음주 설교 한편을 위해 모든걸 거세요. 교회일 그거
집사장로덜이 하는거예요. 최선을 다한, 목숨 걸고 준비한 설교, 한편의 논문으로 손색없는
설교(자기얘기는 빼고, but totally text oriented), 이게 준비 안되면 월급 토해내야되요.
일반 사회 가트면 3-4개월 두고봅니다. 원하는 output이 제때 안나오면 바로 해고된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교회에 그렇게 job잃은 분덜 계실거예요. 일반 사회가 이럴진대, 왜교회는 철밥통인지.
암튼요, 가난, 공부, 목숨건 다음 주 설교 준비.
-- 모든것을 건다는 건 외로운거야 --
이글은 주로 목사님덜 보시라고 쓰고요, 다음엔 평신도의 삶의자세에(넘 거창?) 대해서 써보겠읍니다.
다시한번 옥목사 비평글 읽으면서 더더욱 안타까음에.... 운동장에서 "이놈이...한국교회.." 하셨다는 말에.
요한복음 어딘가에, 예수가 말하길,
그들은 남들 눈에 잘띄는 저자거리에 열심히, 소리내어 기도 하는 자들이라... 외식하는자..
옥목사님,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시고 계시다면, 다 버리시요. 이미 다 버리셨더라면 운동장에
안오셨을텐데.. 아직도 하나님 일이 남아서(국제제.. 머 이런거),, 이런 변명하시지말고,
그냥 다버리셔. 예수님 말씀에 뒤통수 긁적이며 근심어려,, 간 그부자 청년처럼 고민말고요.
나 아녀도 하나님 나라 국방부 시계는 잘가고 있어요. 혹시 나때메, 다른선수가 ?
다 버리셔. (단 목숨은 말고요) 그럼 그 기도 먹힐(?)거 가타요.
여기오시는 분들중, 목사님덜이 많으신거 가타서 제가(학력자랑ㅎㅎ - 70년대후반 대입학) 충고,
증말 충고 하겠읍니다. 건방지다고 생각하셔도 할수없어요.
버리세요. 다 버리세요. 다버리시지 못하겠으면 제발좀 가난해지십시요. 형이상/하 이런거 따지지
말고 무조건 가난해지세요. 물리적으로 가난해지세요. 당신이 섬기는/개척한 whatever교회에
재산소유 하위 10%아래에 무조건 위치하세요. (아 - ! 강남은 10%도 넘 많나요 ?)
우리교회 목사님도 나처럼 가난한데, 하고 내가 위안삼을 수 있도록여.
목사님 돈벌기 얼마나 어려운지 모루고하시는말이지, 이런생각 안들게요.
내가 믿음 없다고요 ? 누가 감히 나의 믿음을 크다작다 있다없다 말할수있나 ?
제말이 건방지다고 생각되시는 분덜, 지난세기 저 위대한 소설가 톨스토이의 평전좀 꼭 읽으세요.
그가 왜 부활을 썼으며, 그의 최후는 어떠했는지. 예수의 8복은 그에게 무엇이었는지.
그가 왜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지.
Henry Nouwen은 또 어떻고요 ?
예수가 제자발닦는 설교는 무자게덜 하시는데,,, 목사님덜, 발만 마니 닦으시는거가타서 안타까움.
그럼 목사가 가난하면 다되었나여 ? 아니지요. 공부를 무자게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설교가 되고
우리덜은 그설교 듣고 또 한주를 그말씀 곱씹으면서...
조 위에 어느분, 설교는 시원치않아도 다른 면에서 모범되어 교인들을 품고 머 그러고하셨는데
그정도는 이제 갓 장로님이나 집사님/권사님들도 충분하실듯.
목사는 Paid Job이예요. 일주일내내 다음주 설교 한편을 위해 모든걸 거세요. 교회일 그거
집사장로덜이 하는거예요. 최선을 다한, 목숨 걸고 준비한 설교, 한편의 논문으로 손색없는
설교(자기얘기는 빼고, but totally text oriented), 이게 준비 안되면 월급 토해내야되요.
일반 사회 가트면 3-4개월 두고봅니다. 원하는 output이 제때 안나오면 바로 해고된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교회에 그렇게 job잃은 분덜 계실거예요. 일반 사회가 이럴진대, 왜교회는 철밥통인지.
암튼요, 가난, 공부, 목숨건 다음 주 설교 준비.
-- 모든것을 건다는 건 외로운거야 --
2년 가까이 월말이 되면 기독교사상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또 정목사님의 설교비평란을 제일 먼저 들여다 보고...
이번달에는 어떤 분의 설교비평을 하실지 궁금하고 설렌답니다...
아직 기독교사상이 집으로 배달이 않되었는데, 다비아에서 먼저읽어보내요~
`제자의 존재론적 깊이에 집중하라`는 말씀 잘 되새김질하겠습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