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진정성에 관해서!
-정인교의 한국설교학회 학술대회 발제안을 읽고-

2007년 11월2,3일에 한일장신대에서 열린 제6차 한국설교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발제된 설교학 교수 정인교 박사(이하 ‘정인교’)의 글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이하 ‘비평’)가 같은 해 12월호 <기독교사상>에 게재되었다. 정기학술대회에서 설교비평 문제를 의제로 다뤄준 한국설교학회 회원들에게 설교비평 작업에 깊이 관여했던 필자는, 좀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지난 수년간 설교비평 작업을 수행하면서 한편으로 설교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사람이 너무 나대는 게 아닌지, 다른 한편으로 이러다가 언젠가는 크게 한번 혼나지 하는 염려가 없지 않았는데 이번에 그런 염려가 현실이 된 것 같다.
정인교는 ‘비평’에서 한국교회에서 일어난 설교비평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설명한 뒤에, 주로 필자의 설교비평 작업을 다루었다. 그는 직접 “논자는 이 글에서 찬반의 중심에 선 정용섭의 설교비평에 초점을 모으려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정인교는 필자가 시도한 설교비평의 항목과 기준을 다섯으로 분석한 뒤에, 이어서 설교비평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문제를 다섯 항목으로 나누어 다루었으며, 끝으로 한국교회의 설교비평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전문가의 관점에서 일곱 가지 항목으로 제시했다.
정인교의 ‘비평’을 읽고 필자는 역시 설교학 전문가의 시야는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필자의 설교비평 작업은 조직신학과 인문학이라는 한정된 시각에서 진행되다보니 설교학이 포괄하고 있는 모든 문제를 전반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이를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정인교는 설교비평의 기준을 일곱 항목으로 제시했지만 필자는 그중에서 두 가지에만 초점을 맞추었을 뿐이다. 그 두 가지는 성서의 중심 주제를 찾는 것과 조직신학적 배경을 검토하는 것이다. 정인교에 따르면 그 이외에도 설교의 전달 방식도 설교비평의 중요한 항목이다. 그래서 그는 “설교자의 억양 인토네이션 클라이맥스의 처리 휴지 기법, 제스처, 원고의 장악 등”을 구체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뿐만 아니라 설교의 결과도 물어야 하며, 설교가 형성하는 공동체의 성격도 물어야 한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필자는 설교 행위의 일부만을 침소봉대의 방식으로 비판한 게 되어, 지금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필자에게 해당되는 게 아닐는지. 정인교도 그런 염려를 ‘비평’ 마지막 문단에서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

특히 영화나 미술, 문학 등 다른 분야의 비평이 전문성을 요구하는데 반해 설교비평은 누구나 건드릴 수 있는 분야처럼 인식되는 것도 곤혹스런 과제이다. 적어도 설교에 대한 전반적이고 깊이 있는 이해와 학습은 설교비평의 전제로 자리 잡아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우려는 설교비평이 설교의 존엄성을 깎아 내리고 하나님 말씀의 지평을 폐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의 손에 들어간 것 치고 이런 훼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있었던가? 설교비평이 피할 수 없는 당위라면 이제는 적극적으로 즐겨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당위를 이야기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설교비평이 그리 만만치 않은 난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설교의 존엄성’이 훼손될지 모른다는 설교학자의 고뇌가 그대로 묻어난다. 이 마지막 문단만이 아니라 무려 200자 원고지 160매에 이르는 그의 글 구석구석에 한국교회 강단을 향한 충정과 한탄과 아쉬움, 그리고 무분별한 설교비평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가 배어 있다. 그의 글은 그동안 조자룡 헌칼 쓰듯 설교비평 글을 겁 없이 쏟아낸 필자에게 일종의 죽비였다. 이런 글이 좀더 일찍 나왔다면 필자가 자중할 수 있었을 텐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다. 부디 성령께서 모든 것을 합하여 선으로 인도하시기를.
다시 강조하거니와 필자의 설교비평이 설교학의 전체 구도에서 볼 때 반드시 다뤄야 할 대목을 다루지 못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유구무언이다. 그래도 마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능사가 아니라고 여겨 이렇게 반론 성격의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정인교가 필자의 설교비평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근본 문제까지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이것의 사실성 여부와 정당성 여부는 이 글이 진행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밝혀지겠지만, 이것이 필자로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었다. 되돌아보니, 필자가 설교비평의 대상으로 삼은 많은 설교자들이 바로 현재의 필자와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어쨌든지 이 글은 설교학 전문가의 비판 중에서 일부에 대한 비전문가의 자기 방어에 불과하다.
정인교의 ‘비평’을 읽으면서 필자에게 다가온 강한 인상은 글쓰기의 진정성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필자의 설교비평 글에 대한 이해가 일단 정확하지 않고, 자신이 제기한 비판에 대한 논거가 거의 없거나 아주 부실하다는 뜻이다. 예컨대 그가 “전반적으로 정용섭에 의해 제기된 설교비평의 당위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큰 이의가 없어 보인다.”고 한 마디 했지만, 내 어떤 생각에 이의가 없다는 것인지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가 말하는 당위는 설교비평이 필요한 시기가 왔다는 것에 대한 일반적 지적일 뿐이지 정작 설교비평의 내용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방식이었다. 이와 달리 한국설교학회의 정기학술대회에서 공동 발제자로 참여한 류응렬 교수는 한국교회 강단의 가장 큰 문제가 성서텍스트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것이라는 필자의 문제 제기를 정확하고 소상하게 짚었다. 글쓰기에서는 분석의 대상이 되는 글을 정확하게 읽고 이해하는 게 중요한데, 설교학 전문가인 정인교의 ‘비평’에서는 그걸 찾아보기 어려웠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정용섭의 인격 모독형 발언
필자가 보기에 정인교의 글쓰기에 진정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학문적인 접근이 아니라 정서적인 접근에 기울어진 탓이 크다. 그는 무엇보다도 필자의 글투를 몹시 불편해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어투가 거친 사람의 말은 무슨 말을 하든지 귀에 들어오지 않고, 따라서 상대하기 싫은 것처럼 말이다. 그는 필자의 발언이 “공격적이고 곤혹스런 인격 모독형”이라고 평했다. 심지어 설교비평의 제목이 ‘섬뜩하다’고 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아주 평범한 제목인데, 그에게 왜 그렇게 비쳤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김서택의 설교는 “종교적 모범생 콤플렉스에 의한 복음의 훼손”이고, 이동원의 설교는 “규범설교의 역사허무주의”, 장경동의 설교는 “허무주의 영성”, 정필도의 설교는 “기독교 신앙의 은폐된 폭력성”, 릭 워렌의 설교는 “기독교 신앙의 도구화”, 박옥수의 설교는 “구원을 향한 과도한 욕망의 끝자락” 등이 정인교가 섬뜩한 제목이라고 인용한 것들이다.
이런 충격적인 표현이 결국 “설교비평의 본질을 훼손하고 오도할 수 있는 지극히 위험한 요소”라는 사실을 그는 과민할 정도로 걱정하는 것 같다. 한국교회 강단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것이니, 그럴 만도 하다. 이전에 시도된 다른 설교학 교수들의 비평은 “잘못을 지적하는 경우에도 최대한 예의를 갖춘 정중한 것”이었데, 필자는 그런 균형감각을 완전히 놓쳤다. “이러한 표현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가 손댄 모든 설교자들에 대한 비평에서 예외 없이 발견된다.” 좀 속된 표현으로, 당신의 말투는 싸가지가 없어, 하고 나무라는 게 아닐는지.
정인교에 따르면 이렇게 예의범절이 없는 필자의 설교비평은, 즉 “비평을 넘어 비난의 선을 넘나드는 이러한 비평”은 두 가지를 목표로 의도된 것이다. 하나는 이런 방식으로라도 한국교회의 설교 문제를 공론화하려는 충정이며, 다른 하나는 <기독교사상>을 중심으로 한 진보주의자들의 권력담론이라는 것이다. 필자의 설교비평이 정인교에게 그렇게 비쳤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권력담론 운운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필자는 설교비평에서 누누이 밝혔지만 설교비평의 대상이 되는 분들보다는 앞으로 한국교회를 짊어질 젊은 설교자들에게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전하는 것을 목표로 글을 썼다. 이것을 푸코의 개념인 권력담론의 관점으로 분석한다는 것은 쥐를 잡기 위해서 도끼를 드는 형국과 비슷하다.  
필자가 보기에 정인교는 사실 관계를 정확하게 짚지 않는다. 인격 모독형 발언이 “김기석, 박종화, 민영진 등 몇몇 설교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설교자들에게 해당된다는 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이 문제는 아무래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야겠다.  
한국설교학회의 정기학술대회가 열린 2007년 11월은 졸저 <속빈설교 꽉찬설교>,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가 출간되었고, 2008년 5월에 출간된 <설교의 절망과 희망>에 실린 원고 중에서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와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의 설교비평만 나오지 않은 때였다. 그렇다면 그는 필자가 쓴 37편의 설교비평을 읽었을 것이다. 그 많은 졸고를 읽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린다. 필자는 정인교가 지적한 몇 사람 이외에도 옥한흠, 김영봉, 이민재, 홍정길, 판넨베르크, 로이드 존스, 박영선, 이재철, 임영수 등에 대해서는 약간 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필자가 부정적으로 평가한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아주 극단적인 경우는 제외하고 그분들의 좋은 점들을 정확하게 밝히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는 필자가 대다수의 설교자들을 무조건 공격적으로 대한 것처럼 주장한다.  
물론 정인교가 없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발언이 ‘인격 모독적’이라는 그의 느낌도 역시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필자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표현이 그에게는 왜 모독적으로 들리는가? 그걸 필자가 정확하게 해명할 자신은 없다. 다만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서 정인교의 생각과 필자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른 게 아닌가, 하고 유추해볼 뿐이다. 예컨대 그가 섬뜩한 제목이라고 열거한 것 중에 하나는 “예언과 선동의 갈림길에서”이다. 이미 우리는 구약의 예언자 전승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언과 선동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누가 예언자이며, 누가 선동가인지 구별도 안 되었으며, 역사가 그걸 판단했다. 그 역사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필자는 그 제목에 해당되는 설교가 왜 선동인지를 가능한대로 정확한 논거로 확증하면서, 오늘 우리는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명실상부한 신탁의 담지자로서 예언을 선포해야 한다는 뜻으로 위의 제목을 달았는데, 정인교는 그것이 해당 설교자에게 ‘당혹과 충격’을 준다고 마뜩찮게 생각한다. 정인교와 필자가 각자 자신의 생각에 정직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결국 발을 담고 있는 영적인 세계가 제각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독자들의 인내심을 구하면서, 인격모독 운운에 대해서 보충 발언을 해야겠다. 이 대목에서 시간을 끄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필자의 글쓰기에 대한 정인교의 모든 생각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접어두고,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 공동체와 바울의 이방-기독교 공동체가 얼마나 치열하게 치고받았는지를 짚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바울은 신학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서 “저주를 받으라.”는 말을 반복할 정도로 과격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현했다.(갈 1:8,9절) 복음의 확실성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막말도 마다하지 않은 셈이다. 바울이 저주를 내린 사람들은 이단들이니 그의 거친 표현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야고보에게서 파송 받은 사람들이었다. 또한 루터는 당대에 동일한 종교개혁 운동의 한 파라고 할 수 있는 재세례파를 열광적 분파주의자들로 칭하면서 모욕적인 언사를 피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짓말하는 자들이요, 사기꾼들이다. 선한 영이 아니라 악한 영에 이끌려 다니기 때문이다.”(갈라디아서 강해, 상, 루터신학대학교출판부, 2003년, 38쪽) 바울과 루터에 비해서 필자의 표현은 양반이다. 그래도 정인교에게는 필자의 글이 치사량을 넘은 ‘독’과 같다고 하니, 할 말이 없다.    

설교비평의 문제
정인교는 내 글쓰기의 방식만 문제로 삼는 건 아니다. 비록 자신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거친 표현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내용이 수용할만했다면 필자의 글을 ‘비평’에서 볼 수 있듯이 곤혹스러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그가 제기한 모든 문제들을 일일이 반복하지는 않겠다. 그것을 따라가기도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비슷한 내용을 독자들이 혼란을 느낄 정도로 반복하는 방식으로 글을 쓸 뿐만 아니라 글쓰기의 흐름에서 별로 적합하지 않은 설교학 대가들의 이론을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필자는 그의 글 중에서 필자에게 해당되는 대목만 간추려서 정리하겠다.
정인교에 따르면 필자가 설교를 비평하는 항목과 기준은 설교관, 설교 취향, 신학적 경향, 성서관, 교회력, 이렇게 다섯 가지이다. 그가 말하려는 핵심은 필자가 설교학의 객관적 기준이 아니라 주관적 기준에 따라서 비평한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는 이미 글머리에서 인정했듯이 설교학을 전공하지 않은 필자의 한계이다. 설교학 전반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 어쩌겠는가. 다만 필자가 다룬 주제만은 일단 정확하게 이해하고 분석하는 게 한국설교학회 정기학술대회에 발제자로 나선 학자가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 아니었을는지. 그가 제기한 다섯 가지 문제도 그의 글에서 서로 중첩되는데, 그가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대목이니까 그대로 따라가겠다.
첫째, 필자의 기본적인 시각과 태도가 ‘부정적 비판일변도’라고 한다. 그는 필자의 진술을 두 군데 인용했다. 그중의 하나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설교의 근본이 약화되고 대신 감성적이거나 도덕적 가치와 심지어는 주술적인 욕망이 끝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으며, 따라서 “오늘 우리의 예배와 설교는 하나님 망각현상”에 빠져 있다. 그는 필자의 이런 진술이 옳은지 아닌지를 신학적으로 논쟁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조건 부정적 시각이라고 재단해버린다. 필자는 정인교의 글에서 치열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학인의 풍모가 아니라 툭 하면 “저 친구들은 좌파야.” 하고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매도하는 일종의 매카시즘적 모습을 본다. 표현은 모호하지만 그 내면에는 독단이 숨어 있다. 그가 필자의 글을 인용한 뒤에 붙인 해명을 보라.

이러한 태도는 비평이 문제의식에서 비롯된다는 일반론에서 보면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기독교의 근본은 율법의 시시비비를 넘어선 하나님의 은혜이다. 기독교인 됨이 ‘근본’에 대한 인식과 참여를 포괄하는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근본이 결여된 비평은 비난으로 달리는 지름길일 수밖에 없다.

독자들은 위의 글이 무슨 뜻인지 이해되시는가? 필자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지만, 확 와 닿지가 않았다. 힘들여 곰씹어보면 기독교의 근본인 은혜가 필자의 글에 결여되었다는 말인 것 같은데, 필자의 설교비평이 정확한지 아닌지를 학문적으로 논해야 할 장면에서 은혜가 왜 등장하는지 그걸 모르겠다. 시시비비를 따지는 게 은혜가 아니라면 그는 왜 정용섭의 설교비평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따지고 있는 것인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설교비평 문제를 다루면서 ‘은혜’ 운운이라니, 참으로 뜬금없는 발언이다. “은혜로 합시다.” 하는 말이 교회 현장에서 진리의 영을 억압한다는 사실을 그는 모르는가?
둘째, 정인교에 따르면 필자의 설교비평은 지나치게 설교의 내용에 치중함으로 설교를 전체적으로 조명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설교의 실천적 차원을 등한히 했다는 것이다. 실천적 차원이 설교 전달 방법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청중들의 변화를 가리키는 건지 잘 모르겠으나, 어느 쪽이든지 이것은 옳은 지적이다. 필자는 전반적으로 설교의 내용에만 천착함으로써 결국 설교학자들이 바라보는 설교비평의 통전적 관점을 놓친 게 분명하다.
셋째, 필자가 설교비평의 기준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설교비평이 다뤄야 할 기준이지만, 선택의 문제는 그렇지 않은데, 필자는 바로 그 선택의 문제를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예컨대 보수와 진보의 문제나 친북과 친미의 문제 같은 것들이다. 정인교에 따르면 필자가 “신학적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에 서서 반대 입장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는 것이다.” 그는 필자의 글을 꼼꼼하게 읽지 않은 게 분명하다. 이런 흔적은 곳곳에 나타난다. 필자의 설교비평이 주관적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가 거론한 조헌정 목사는 필자를 가리켜 “보수적인 성결교단의 배경을 갖고 독일의 보수적이고 관념적인 판넨베르크 조직신학을 전공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필자는 보수냐, 진보냐 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설교자의 진술이 진실인가 하는 점을 조직신학과 인문학적 토대에서 지적한 것뿐이다. 일종의 진리논쟁이지 이념논쟁이 결코 아니었는데도, 그게 정인교에게는 진보의 시각으로 보수를 매도한 것처럼 전달된 모양이다.
넷째, 필자가 선택의 문제를 당위의 문제로 몰고 가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위에서 제기된 것과 비슷한 항목인데 단지 차이가 있다면 성서해석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비평자가 신학의 한 극단에 서서 다른 쪽을 매도하는 것이라든지, 충분치 않은 성서의 지식을 가지고 개연성에 근거한 성서해석을 마치 진리인양 밀어 붙이는 것은 건전한 비평의 자리매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말은 한국교회 강단에서 성서 텍스트가 도구화되고 있다는 필자의 주장을 대신 해준 것 같다. 그는 이 대목을 중요하게 생각한 탓인지 필자가 충분하지 않은 성서 지식으로 다른 설교자를 재단한 다섯 가지 예를 자세하게 들고 있다. 이중에 첫 번째와 두 번째만 간단히 검토하겠다.
1)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 20:1-16)를 인용하면서 필자가 설명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열 시간 일한 사람이나 차이를 두지 않고 똑같이 하루 일당을 주는 게 바로 과수원 주인의 뜻이라는 예수의 비유를 굳이 들이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경쟁력보다는 생존권에 기초한 평등한 사회가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 정인교는 이렇게 평가했다. 이런 견해는 “마태복음 20장의 기본적인 성격을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 뒤로 그는 아무 말이 없다. 필자의 진술이 왜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한 것인지, 그렇다면 마태복음 20장의 기본적인 성격이 무엇인지 설명을 해야만 알아들을 게 아닌가. 그는 근거 없이 판단만 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글은 논술이 아니라 설교에 가깝다.  
2) 필자는 경동교회 박종화의 설교를 다루는 자리에서 성서 텍스트가 해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모리아 산 전승을 예로 들었다. 외아들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믿음을 배워야 한다는 정답을 무조건 답습하는 데만 머물지 말고, 다른 시각의 텍스트 읽기가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거기서 필자는 그 본문이 바로 고대인들의 인신 제사에 대한 경고의 말씀일지 모른다는 말을 했다. 정인교는 그 설명을 이렇게 평가했다. “객관적인 진실을 일개 학문적 가설로 대치하는 것이다.” 정인교의 글읽기와 글쓰기가 최소한의 진정성도 확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래서 학문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 대목에서 필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인신 제사라는 가설이 전혀 아니었다. “지금 필자는 이런 해석의 신학적 정당성 여부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인간 삶과 역사와 존재의 신비를 안고 성서 텍스트를 해석하지 않으면 성서 텍스트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결과적으로 우리의 설교가 죽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그는 같은 문단에 들어 있는 필자의 이런 진술을 애써 외면했다. 이런 글쓰기는 곡학아세의 한 전형이다.
다섯째, 정인교는 필자의 “독선적 무례함”이 문제라고 한다. 이런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탓인지 그는 반복해서 지적하고 있다. 앞에서는 ‘인격 모독형’이라고 했고, 여기서는 ‘독선적 무례함’이라고 한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내적 소명과 신학을 공부하고 공회 앞에서 안수 받은 목회자”이며, “명예와 긍지 자존감을 먹고 사는 존재들”인 설교자들에게 왜 불손하게 대하느냐는 것이다. 이런 독선적이고 무례한 설교비평이 일반 성도들로 하여금 담임 목회자의 설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는 점을 크게 염려했다. 결국 필자의 태도는 “그 근본 선한 동기마저 의심받기에 충분할 정도의 무례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필자의 글쓰기에 나타나는 예를 아홉 군데나 들었다. 그가 인용한 진술만 놓고 본다면 어떤 독자들에게는 필자의 글이 냉소가 가득한 독설처럼 들릴 수 있지만, 문제는 그런 표현이 나올 수밖에 없는 맥락을 그가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 제일 처음으로 인용한 한 대목만 짚자. 김진홍 목사의 설교에 대한 비평 “영웅 이야기에 밀려난 하나님 이야기”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진술이 그것이다. “성서텍스트 안으로 들어간 경험이 없는 사람은 스데반에 관한 본문을 놓고도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공과지도를 하듯 엘리야의 일대기를 되풀이 하는 것으로 귀중한 설교시간을 허비하기 마련이다.” 필자는 김진홍 목사의 설교행위에 드러난 어떤 사실을, 즉 성서 텍스트가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한 근거로 분석해서 전했을 뿐인데, 정인교의 눈에는 그것이 독선으로 비쳤다. 정인교가 학자라면 필자의 진단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신학적으로 검토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는 그런 문제를 전혀 다루지도 않았고, 아니 다룰 생각마저 없다는 듯이 무례함 운운하고 말았다. 실체는 없이 주관적 느낌만 가득한 글을 어찌 학인의 것이라고 하겠는가.  

설교학의 미래
필자는 이 글에서 두 가지 사실을 말하려고 했다. 하나는 전통적 설교학의 기준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정인교의 지적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이외의 지적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로 두 번째 사실을 여기서 다뤘다. 물론 두 번째의 사실도 좋은 게 좋다는 식이라면 동의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오늘 한국교회 강단이 비평받을 때가 됐지만 너무 과격하게 몰아붙이지 말라거나, 교회의 덕을 살리는 쪽으로 작업하라는 일반적인 충고로 말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학술대회의 발제로서는 정인교의 글에 논리적 근거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을 짚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옳고 그름 이전에 글쓰기의 진정성이 달린 문제였다. 필자를 날카롭게 비판한 류응렬의 발제에는 그것이 살아 있었다. 그는 필자와 본인 사이에 놓인 성서론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짚었다. 정인교가 그런 근거들을 충실하게 제시하지 않은 이유가, 또는 제시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게 궁금하다. 이제라도 그의 설명을 듣고 싶다.  
마지막으로, 정인교는 앞으로 설교학자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건전하고 균형 잡힌 설교비평의 틀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했다. 옳은 말이다. 덕담이나 주례사 차원이 아니라 종말론적 진리의 지평에서 수행될 수 있는 설교비평의 학문적인 틀과 기준을 구축해주시고, 더 나아가 설교학자들께서 먼저 예언자적 영성으로 비평의 모범을 보여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거기에 바로 한국교회 강단과 한국교회 자체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설교비평이 반드시 설교학자들에 의해서 제시된 틀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고집할 필요는 없는 게 아닐는지. 조직신학을 전공한 필자 스스로 절감하고 있는 문제이지만, 전문가 집단이 일정한 부분에서는 전문적일 수 있지만, 근본과 보편에서는 오히려 취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오래 전부터 간학문적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철학자와 자연과학자가 공동의 주제로 담론을 형성해나가듯이 설교학자와 조직신학자가, 성서신학자와 윤리신학자가 공동의 신학 작업을 펼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특히 신학의 꽃이라 할 설교 문제는 단지 설교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 이외에 모든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더불어서 풀어가야 할 공동 분과에 가깝다. 어느 때일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설교학회에서 설교학자와 조직신학자, 그리고 성서학자가 더불어 발제하고 토론할 수 있는 ‘그날이 오면’ 좋겠다.  <기독교사상, 2008년 10월호>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