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교회 전병욱 목사-
선전과 선포
2006년 7월2일 주일에 “좋은 사람 만나야 회복된다.”는(이하 “좋은 사람”) 제목으로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가(이하 ‘전 목사’) 설교한 본문은 사도행전 17:10-15절이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로 바울의 2차 선교여행에 관한 보도의 한 토막이다. 데살로니가에서 큰 소동을 겪은 바울 일행은 서쪽으로 96km 떨어진 베뢰아로 야반도주했다. 본문에 따르면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말씀을 잘 받아들였다고 한다. 헬라 귀부인들과 남자들 중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생겼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찾아와 말썽을 일으켰기 때문에 바울은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둔 채 쫓기듯 그곳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본문의 내용이다. 대략 30분 가까이 진행된 전 목사의 설교를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지엽적인 건 버려두고 중심 내용만 따라가겠다.
하나님은 데살로니가에서 역경에 처했던 바울에게 베뢰아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여 위로하셨다. 오늘의 시대정신은 주변 사람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에게 실망한 사람들은 나중에 다른 사람들도 존경하지 않는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곧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예수님도 피곤하실 때 베다니의 나사로 집에 가서 편히 쉬곤 하셨다. 본문에 등장하는 베뢰아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이유는 그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었다는 데에 있다. 칼빈에 따르면 ‘noble character’로 영역된 ‘신사적’이라는 단어는 혈통적으로 그렇게 타고났다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이 단어를 조금 더 큰 의미로 보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킨다. 비록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신사적인 사람이라는 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첫째, 좋은 것을 앞세우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는데, 그 중에서 좋은 것에만 반응하는 것이 바로 신사적인 것이다. 따라서 좋은 것에 대해서 침묵하지 말고 말해야 하며, 반면에 나쁜 것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말고 침묵하는 게 좋다. 둘째, 바른 경향성이 곧 신사적인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향해서 방향을 잡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처지와 도덕성을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만 보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이 아니라 다윗을 택했으며,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택하셨다.
전 목사는 이 날 크게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말만 하고 살아야 하며, 신앙적인 경향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옳은 말이 곧 옳은 설교는 아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설교는 지당한 말의 선전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의 선포이어야 한다. 둘째, 설교는 부분적으로는 옳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잘못될 수 있다. 두 번째 부분은 이 글 전체를 통해서 해명될 테니까, 여기서는 첫 번째 부분만 해명하고 넘어가겠다.
“좋은 사람”이 왜 선포가 아니라 선전일까? 전 목사의 설교 전반에 깔려 있는 문제이지만 “좋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통치를 해명하고 선포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태도와 처세만을 전한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좋은 사람 만나야 회복된다.”는 제목은 청소년을 위한 교양강좌로서는 ‘딱’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로서는 ‘꽝’이다. 실제로 좋은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우리 삶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이 설교에서 훨씬 근본적인 문제는 전 목사가 본문의 중심과 별로 상관이 없는 주제를 설교했다는 사실이다. 이 본문에서 베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었다는 말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사도행전 기자는 지금 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유대인에게 박해받았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설명하는 중이다. 이 본문에서 ‘신사적’이라는 단어를 설교의 주제로 삼는 것은 흡사 호랑이를 설명해야 할 사람이 호랑이 등에 떨어진 새똥을 주목하는 격이다. 만약 이런 방식이 허용된다면 우리는 위의 본문에서 수십 개의 설교 주제를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본문 10절은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이다. 우리는 ‘밤’이라는 첫 단어에 초점을 맞추어 “밤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할 수 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경구로부터 시작해서 세속사회와 성서에 나오는 밤과 연관된 이야기를, 그리고 개인의 경험을 재치 있게 엮어내면 멋진 한편의 설교가 될 것이다. “보내는 신앙”이나 “들어가자.”는 제목으로도 역시 설교가 가능하다. “‘곧’의 의미”라는 제목은 어떤가? 끝이 없다. 약간의 상상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이런 설교는 하나님의 나라가 계시되는 구원사건의 선포가 아니라 인간의 호기심이 충족되는 선전, 선동이다. 그런 선전, 선동도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감동을 줄 수 있다. 아니, 우리 한국교회의 풍토에서는 선전, 선동과 감동은 정비례하는 것 같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전 목사의 설교에서 성서 텍스트가 심하게 우롱 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들리는 설교
물론 평자는 전 목사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롱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에 그의 설교집과 설교 동영상을 통해서 복음에 대한 그의 열정과 인간적인 진정성에 상당한 감화를 받았다. 이건 그냥 덕담으로만 하는 말이 아니다. 세련되게 일하자가 아니라 “촌티 나게 일하자.”는 외침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는 자기가 허물어지는 걸 전혀 개의치 않을 정도로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다. 예컨대 다른 집회에 갔을 때도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목하는 분위기를 감지하면, 즉시 헛소리를 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하나님에게로 돌린다.(2006년 6월4일) 이렇듯 자기를 철저하게 비우는 삶과 신앙의 태도는 그가 고도의 영적 내공을 확보했다는 증거이다.
신앙과 인격에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그의 태도도 역시 평자가 그를 근본적으로 불신하지 않는 중요한 요소이다. 전 목사의 신앙과 설교는 본질주의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기복신앙의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으며(히스기야의 기도, 26,56,150 쪽. 이하 ‘히스기야’; 상식이 기적이 되는 교회, 138 쪽. 이하 ‘기적’), 세습 문제, 적극적인 사고방식, 열린 예배, 초월적 신비주의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교회의 구제와 설교 행위까지 그는 교회의 본질 자체가 아니라 그 본질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앙의 결과로 이해한다. 평소에 평자가 주장하던 대목을 그에게서 그대로 발견한다는 게 흥미롭다. 전 목사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교회의 본질이다.
교회가 맨 처음 할 일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일이다. 교회의 본질은 세상을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치는 것이다. 성도들의 기도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래서 영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어둠 가운데 빛을 비춰주어야 한다. 그 본질을 제대로 회복하고 나서 비로소 거기에서부터 능력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지금 미래를 결정하라, 235 쪽. 이하 ‘미래’)
평자는 전 목사의 본질주의적 신앙과 목회와 그런 설교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일반적으로 이런 본질주의는 대중성을 얻기 힘들지만, 놀랍게도 전 목사의 목회와 설교는 한국 교회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막강한 대중성을 얻었다. 전 목사가 부임 예배를 드릴 때의 삼일교회 예배 참석자는 80명이었는데, 지금은 주일 공동예배 참석자가 1만 명을 넘는다. 삼일교회 홈페이지에 올린 그의 설교에 수만 명이 접속하며, 그가 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예컨대 2004년 6월에 초판 발행한 <지금 미래를 결정하라>는 같은 해 12월에 이미 11쇄를 찍었다. 초판 판매도 절절매는 그리스도교 출판 시장에서 그의 책이 늘 이런 수준을 견지한다는 건 그의 설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는 의미이다. 만약 현재와 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머지않아 삼일교회는 한국의 십대 교회 안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의 본질주의를 추구하는 전 목사의 설교가 이런 대중성을 확보한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평자의 생각에 그가 진작부터 “들리는 설교”를 지향했다는 사실이 가장 우선적인 요소이다. 그는 화려한 수사와 순발력 넘치는 멘트로 청중들의 귀를 활짝 열어놓았다. 칼 바르트가 스위스의 작은 도시 자펜빌에서 강해한 <로마서 강해>가 그를 세계적인 신학자 반열에 올려놓았다면, 전 목사가 삼일교회에서 본격적으로 강해설교를 시작한 <파워 로마서>는 그를 한국에서 대표적인 청년 사역자로 자리매김했다. 이 책에서 그는 들리는 설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설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들리는 설교와 안 들리는 설교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설교를 할 때 일부러 유식한 말, 철학적인 말 그런 말을 늘어놓아야만 잘하는 설교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도가 아무리 들으려고 해도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저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말은 한국말 같은데, 전혀 가슴에 와 닿지가 않습니다. 이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파워 로마서, 209 쪽. 이하 ‘로마서’; 비전 무릎, 14쪽 참조. 이하 ‘비전’)
전 목사에 따르면 청중의 귀에 들리지 않는 설교는 설교자가 텍스트에 갇혀서 콘텍스트를 간과하기 때문에 벌어진다. 그는 그런 설교가 답답하다.(비전 5) 답답한 설교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 목사는 텍스트가 아니라 콘텍스트를 설교의 중심으로 삼는다. 콘텍스트 중심의 설교는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성서 텍스트의 단순화이며, 다른 하나는 적용의 강조이다. 이 두 가지 특징을 보이는 전 목사의 설교는 오늘날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다.
설교가 청중들에게 들리게 하기 위해서 성서 텍스트와 그리스도교 신앙을 단순화하고, 청중의 삶에 적용하는 것을 중점적으로 다루어야한다는 그의 주장은 크게 틀린 게 아니다. 그러나 평자가 보기에 전 목사의 이러한 설교관은 일방통행으로만 선포되던 기존의 설교를 극복한다는 차원에서는 상대적으로, 부분적으로 옳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교 설교는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의 차원에서는 문제가 많다. “들리는 설교”로 인해서 청중과의 소통은 원활해진 반면에 하나님과의 불통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전 목사의 강점이 곧 그리스도교 설교의 치명적인 약점이 된 셈이다. 오늘 평자에게 주어진 숙제는 바로 이것, 들리는 설교의 정체를 풀어내는 일이다. 우선 단순화의 함정이다.
단순화의 함정
전 목사에게 성서는 아주 단순한 문서이기 때문에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거짓말 하지 말라,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규범을 그대로 지키기만 하면 충분할 정도로 단순하고 명백한 문서가 바로 성서라는 말이다.
성경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로마서가 학자들이 보라고 쓴 논문입니까, 성도들이 보라고 쓴 편지입니까? 물론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러면 편지같이 읽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내가 로마에 있는 교인이라고 가정하고, ‘바울이 나한테 보낸 편지구나.’ 이런 생각으로 쉽게, 평이하게 읽어야 합니다. 기도하라면 기도하고,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하면 ‘참말로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걸 분석해서 어원이 어떻고 시제가 어떻고 하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됩니다. 설교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파워 전도서, 200 쪽. 이하 ‘전도서’)
아무리 축자영감설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성서의 어원과 시제를 참고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주장하는 사람은 한국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전 목사는 지금 성서와 우리 사이에 2천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아주 초보적인 사실마저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청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 수사적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 잘 분간이 안 간다.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은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보도를(막 16:18) 단순한 사실로 믿으며, 신자들에게 그대로 전하겠는가?
또한 그는 주석을 즐겨 읽지 않는다고 한다. “주석을 봐야 할 정도로 본문 해석이 안 되는 곳은 별로 없기”(기적이 상식이 되는 교회, 300 쪽. 이하 ‘기적’) 때문이다. 성서 메시지의 단순성을 주장하는 그의 말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평자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다. 글을 쓰다가 자기도 모르게 ‘오버’ 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감을 잡기 힘들다. 어쨌든지 본인이 그렇다고 주장하니까 평자로서는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가 주석을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성서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해석하고 있는지 한번 진단해야겠다.
2006년 6월4일 “하나님보다 한발 뒤로 걸으라.”는 설교는 행 16:16-18절을 본문으로 한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귀신 들린 여종을 고친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여기서 두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 루디아를 통해서 어느 정도 교회 체계를 갖추었는데도 불구하고 바울이 기도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보다 한발 뒤로 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의 일상적인 기도 습관을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는 게 과연 올바른 해석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둘째, 바울이 자기를 따라오면서 큰 소리로 외치던 여종을 빨리 고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전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 장면에서 바울이 괴로워한 이유는 귀신을 쫓아내고 싶은 유혹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 전 목사는 성서 텍스트로 말장난하고 있다. 청중들은 이런 말장난에 쉽게 열광하는 법이다.
“예배자는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체험한다.”는 설교에서 전 목사는 왕상 3:3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에 근거해서 “솔로몬의 기도는 지속적인 기도였다.”고 주장했다.(하늘을 감동시킨 일천번제 예배자, 56 쪽. 이하 ‘번제’) 이 본문은 굳이 주석을 펼쳐들지 않고 텍스트만 충실히 읽는다 하더라도 솔로몬에 대한 이중적 평가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성서 기자는 솔로몬을 치켜세우는 것만이 아니라 ‘산당’에서 제사했다는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그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한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지내던 장소가 바로 산당이다. 더구나 성서 기자는 이미 1절에서 솔로몬이 애굽의 파라오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어 그의 딸을 맞이하고 다윗 성에 데려다놓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성서기자는 솔로몬에게 이미 우상 숭배적 기질이 엿보인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는 게 분명하다. 전 목사가 이런 점을 완전히 무시하고 솔로몬의 기도를 일방적으로 지지하면서 청중들에게 지속적인 기도의 중요성을 강요한다는 것은 그가 성서 텍스트의 중심을 전혀 읽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런 일들은 그의 설교에서 흔하게 일어난다. 엘리야와 7천명의 남은 자에 대한 그의 해명을 들어보자.
엘리야 시대에 7천 명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엘리야가 낙심했지만, 그래도 7천 명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뒤집어 놓고 한번 생각해봅시다. 도대체 숨어 있는 7천 명의 바퀴벌레 같은 자들이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기껏 앉아서 기도밖에 더 했겠습니까? 그들이 역사에 무슨 기여를 했습니까?(비전 101)
야훼 하나님이 엘리야를 향해서 “너, 너무 까불지 마! 구원은 내 소관이야!” 하는 뜻으로 새길 수 있는 7천 명이 졸지에 바퀴벌레가 된 형국이라니, 유구무언이다. 물론 전 목사가 여기서 주장하려는 핵심은 그리스도인들이 은둔하지 말고 역사변혁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그런 신앙적 동기가 아무리 진지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거꾸로 해석한다는 것은 자신의 신앙 경험이 성서보다 우월하다는 자만심의 발로다. 그가 ‘남은 자’ 사상을 몰라서 이런 주장을 하는 건 아니다. 그는 이미 “택한 자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금도 7천 명을 남겨두었고,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나의 도구들을 여전히 준비해 놓았다.”고(로마서 217) 설명한 적이 있다. 그가 이렇게 앞과 뒤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성서 텍스트의 중심 메시지는 가능한 대로 단순하게 만들고 대신 자신의 신앙적 방향에 따라서 청중들을 닦달하는데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서 텍스트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청중들의 요구에만 기울어진 그의 설교는 좋게 말하면 “들리는 설교”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막가는 설교”다.
이제야 비로소 평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보’라는 전 목사의 솔직한 주장을(비전 192)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정보는 한두 번 읽으면 해결되는 거니까 복잡하게 생각할 게 전혀 없다. 설교를 위한 독서 역시 “독서라기보다는 정보취득에 가깝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인터넷이나 잡지 등등에서 “정보를 긁어모아” 본문말씀을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이런 준비가 끝난 다음에 그는 설교집을 많이 읽는다고 한다. 반면에 경건서적은 많이 읽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건서적은 너무 부드럽고 소극적인 해결만을 시도하기 때문이란다.(기적 301) 여성적인 교회가 아니라 남성적인 교회로 키우기 위해서 그는 경제경영 서적을 가까이 하며, 심지어 중국 병법서를 삼사십 권이나 수집할 정도이다. 전 목사에게 성서와 그리스도교 신앙은 철저하게 정보다. 결국 설교는 정보를 전하는 전략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 평자가 보기에 성서가 정보라는 그의 생각은 근본적인 오류이다.
정보인가, 사건인가!
여기 컴퓨터 매뉴얼이 있다고 하자. 그것은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정보다. 그 지시사항대로 우리가 따라 하기만 될 뿐이지 그 텍스트를 여러 방식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전 목사의 설교는 바로 이런 식이다. 그는 매뉴얼이 제공하는 정보를 수강생들에게 전달하는 컴퓨터 학원의 강사처럼 간단명료한 신앙의 지침을 청중들에게 열정적으로 전달하고 동기부여에 충실할 뿐이다. 전 목사의 이런 능력은 그야말로 발군(拔群)이다.
설교를 정보 전달로 생각하는 이들이 어디 전 목사뿐이겠는가. 한국의 설교학이 거의 전달 방법론에 치우쳐 있다는 사실도 이에 대한 반증이다. 물론 기도, 전도, 예배, 헌금, 봉사 등등, 신앙적 정보들을 신자들에게 전달하는 업무를 무시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와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신앙적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줌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구체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정보는 단지 정보일 뿐이다. 아무리 좋은 정보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 정보가 근거하고 있는 어떤 세계를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은 잡동사니에 불과하다. 설교는 사람들에게 신앙 정보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신앙의 세계로 이끌어 들이는 행위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 신앙정보를 아는 게 곧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신앙정보와 신앙세계는 전혀 다르다. 신앙정보는 신앙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혹은 아닐 수도 있는 방법론이라고 한다면, 신앙세계는 신앙정보 너머에서 존재론적으로 발생하는 신앙 사건이다. 정확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전자는 손가락이고, 후자는 달이다. 달을 본 사람은 손가락이 필요 없지만, 손가락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결코 달을 볼 수 없다.
언어가 단지 어떤 사실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물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근거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언어사건(Wortgeschehen)이라고 본 에벨링의 주장은 옳다. 그는 쮜리히 대학교 전교생을 대상으로 행한 “신앙의 본질”이라는 강연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해석학적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했다. 특히 교회의 설교에서 남발되는 단어나 문장은 너무 진부해서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게 만들고, 감격이나 놀라움을 생산해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바른 신앙 행태로 오해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최신 유행어 같은 언어를 구사한다고 해서 좋은 설교라는 말은 아니다.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처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체 낱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언어 자체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고, 새 어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화제에 오르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에벨링, 신앙의 본질, 15쪽)
에벨링의 표현을 빌려서 말한다면, 설교는 성서의 정보를 신세대의 언어로 포장하는 일이 아니라 성서의 언어를 사건이 되게 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곧 성서의 신앙적 주제들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 실제적인 리얼리티로 자리를 잡아야한다는 말이다. 성서를 정보로 생각하는 전 목사의 설교는 이와 반대의 길을 간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강단언어의 갱신은 기껏해야 청년들의 용어를, 심지어는 개그맨들의 언어적 순발력을 따라가는 것에 불과하다. 베스트셀러를 읽고, 인터넷의 대화방이나 게시판에 들어가서 젊은이들의 언어를 연구하고 있는 그의 설교는 성서언어를 사건으로 끌어올리지 않고 단지 감각적인 언어 기교로 끌어내리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기교는 성서언어를 죽이는 첩경이다. 평자는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는가?
전 목사의 설교집 <지금 미래를 결정하라>(이하 ‘미래’)는 사회정의를 중심주제로 다루고 있는 아모스서를 연속적으로 강해한 내용이다. 2004년에 출판되었다면 2003년 말이나 2004년 초에 설교한 것으로 보이는 이 아모스 강해에서 전 목사는 한국사회의 정치 경제적인 불의와 사회의 구조악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었다. 설교의 중심이 콘텍스트에 놓여야한다는 평소 전 목사의 지론에 따르면 아모스서 강해에서는 당연히 경제의 양극화 같은 구조적 문제들을 짚어야했었는데, 묵묵부답이었다는 게 놀랍다.
그는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5장24절)는 말씀이 아모스서 전체의 주제라고 지적한 후에 “한 마디로 진리가 물 흐르듯 하게 하라는 말씀이다.” 하고 초점을 흐렸다. 공법과 정의를 왜 진리로 바꿔치기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는 공의와 정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본문을 인용해야할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형식적으로 한 마디 할 뿐이다. 오히려 그는 ‘와디’로 불리는 홍수 같은 물살을 강조하면서, 어려운 상황을 뚫고 나가야 한다고 언죽번죽 설명해나갔다. “결국 한 시대를 움직이는 사람은 제도권 안에 머물러 있기보다 장벽을 깨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충분히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도는 반드시 어디에서 해야 한다거나, 몇 분까지 기도해야 한다는 등 이런저런 틀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미래 213) 이런 주장이 오늘 본문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평자는 알 수 없다. 그는 계속해서 공의와 정의 자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채 “장벽이 있다면 그것을 뻥 뚫어버리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변죽만 울리다가 결국 삼일교회가 화장실에서 줄 서는 일도, 바닥에 휴지 한 장 버리지 않는 일도 잘 해내고 있다고 자찬했다. 그는 이 시대에 물꼬를 트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한 사람만 나오면 세상은 변화될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 단락을 정리했다. 평자가 보기에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라는 아모스 예언자의 말씀이 그의 설교를 통해서 찌라시(!)가 된 격이다.
전 목사의 이런 설교는 그의 설교집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초기의 로마서 강해보다 뒤로 갈수록 심해지고, 최근에는 극에 달하고 있는 실정이다. 요즘 행하는 사도행전 연속설교의 제목을 보면 그가 성서를 얼마나 허투루 대하는지 알 수 있다. 5월14일 “‘Go’보다 힘든 것이 ‘Stop’이다.”, 28일 “딱딱하면 죽고 유연하면 산다.”, 6월4일 “하나님보다 한발 뒤로 걸으라.”, 11일 “고난 중에는 자책감의 쓰나미가 몰려온다.”, 18일 “잘하는 사람은 이런 점이 다르다.”, 25일 “빠른 변화, 강력한 변화를 일으키는 법”, 7월2일 “좋은 사람 만나야 회복된다.” 여러분은 이런 설교제목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이건 설교가 아니라 처세술, 또는 인간관계 강좌에 불과하다. 평자가 여기서 단순히 설교 제목만 두고 시비를 거는 게 아니다. 그 설교의 내용도 역시 여기에서 한 발자국도 다른 게 아니기에 하는 말이다.
안타깝지만, 성서는 정보가 아니라 사건이라는 말을 전 목사는 새겨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의 방식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큰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그리스도교 이해가 매우 충실하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는 추호도 머뭇거림이 없으며, 넘치는 자심감에 차 있다. 그는 실제로 그리스도교를 알고 설교하는 걸까? 이런 질문은 전 목사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설교자들을 향한 것이다. 물론 평자 자신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평자는 아직 하나님과 그의 창조와 그의 심판을 잘 모른다. 기껏해야 어렴풋이만 알 뿐이지 실증적으로 알지 못한다. 부끄럽게도 나는 생명을 모르고, 나 자신을 모를 때도 많다. 다만 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을 확연하게 알기 때문이 아니라 확연하게 될 날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설교하고 있다. 그래서 설교가 두렵다. 잘못 전함으로써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소극적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다. 다시 묻자. 전 목사는 하나님이 이끌어가는 이 세계와 역사의 신비 앞에서 놀라움을 느끼고 있을까? 그래서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설교자의 완전한 무력감을 경험하고 있을까? 평자는 그게 궁금하다.
그리스도교 원리주의자
전 목사의 설교를 따라가면서 고개를 흔들게 되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그의 그리스도교 이해가 어딘가 왜곡되었다는 생각을 지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루터가 주장한 종교개혁의 세 가지 신학개념을 전 목사는 이렇게 인용했다.
한 시대를 개혁한다는 것은 목적의 재발견입니다. 왜 종교개혁이 영적인 혁명입니까? 개혁자들은 당시 쓰레기 같은 사회에서 ‘위하여 살아야 할’ 목적을 회복했습니다.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은혜로’(sola gratia)라는 삶의 핵심을 발견해낸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믿는 사람들이 위하여 생명을 걸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믿음을 위해서 생명을 걸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 역시 생명을 바칠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16세기를 영광스러운 세기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죽기는 죽되 개죽음이 아니라 영광의 죽음이 되도록 했습니다.(전도서 164)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런 설교는 청중들이 눈치 챌 수 없는 사이비 전문가의 은밀한 음모다. 전 목사가 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 신학개념은 그것 자체로 완결되는 규범이 아니라 다른 개념과의 대립적인 관계 안에 자리하고 있다. 즉 ‘오직 성경’은 로마 가톨릭이 강조하는 교회의 권위와 대립적으로 신앙과 삶의 기준이 성서라는 사실을 가리키며, ‘오직 믿음’은 행위와 대립적인 차원에서 칭의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며, ‘오직 은혜’는 업적과 대립적으로 구원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신학개념에 생명을 걸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절대적인 도그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는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와 같다고 언급한 데서 잘 알 수 있듯이 성경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언급했듯이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절대적인 게 아니며, 본훼퍼가 말했듯이 은혜는 자칫 값싼 은혜로 빠질 수도 있다. 매우 복합적인 상황에서 해석되어야 할 이런 신학개념을 절대화하는 전 목사의 설교는 우리의 신앙을 독선이나 광신에 빠지게 할 개연성이 높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툭하면 생명을 걸고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기적 193)
기도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기도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라는 주장은 그가 기도 도구주의에 빠져 있다는 증거이다. 야구선수 피아자의 홈런이 아버지의 기도 덕분이며(히스기야 174), 2차 세계대전 당시 낙하산 투하되던 미군이 지상에서 기관총 발사하는 독일군을 보고 “기관총아, 망가져라!”하는 기도를 드렸더니 그대로 되었다고 한다.(로마서 157)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청년들을 데리고 제주도에 단기 선교 갔을 때 드린 기도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나 유대교 근본주의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1994년 7월4일부터 8일까지 삼일교회에서 제주 선교를 떠났다. 마지막 날 저녁 모든 선교 일정을 마치고, 한라산 기도원 정산에서 민족 통일과 복음화를 위한 철야 산기도가 있었다. 그때 우리의 기도는 김일성이 죽어야 한다면 죽여서라도 민족의 장벽이 열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우리는 놀랐다. 그 철야기도가 있은 날 김일성이 죽은 것이다. 우리 교회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기도하면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고 확신한다. 자신의 기도가 세계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도구라는 것을 확신하다.(낙타무릎, 182 쪽)
위의 간증이 2006년 7월2일 주일 설교에서도 그대로 인용된 걸 보면 이 경험이 전 목사에게 깊이 각인된 것 같다. 본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평자는 이 대목에서 전 목사에게 깊은 연민을 느낀다. 아무리 통일을 염원하는 기도였다 하더라도 한 사람의 죽음을 바라는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 앞에서 가슴이 답답하다. 주일 예배 빼먹고 놀러간 사람들이 ‘직통 심판’을 받는다는 주장도(로마서 44) 역시 이런 기도행태와 다를 게 없다. 그는 무슨 근거로, 무슨 양심으로, 무슨 배짱으로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들에게 이런 설교를 한단 말인가?
전 목사의 원리주의적 신앙을 조금 더 따라가자. 십자가와 부활만 붙드는 설교를 한다고 주장하며,(미래 72) 비판하지 말고 관용하라고 가르치는(로마서 313) 전 목사도 남을 비판하는 일은 종종 있다. 정당한 비판은 당연히 필요하다. 문제는 그에게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보편적 인식론이 준비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예컨대 자유주의 신학이 무엇인지 그가 정확하게 아는지 모르겠지만, 김 아무개 교수의 노자 강의가 H 신학대학교의 자유주의 신학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책임을 묻는다.(비전 91, 244; 로마서 284) 프랑스는 인본주의로 망했으며, 영국과 미국은 많은 모순에도 불구하고 청교도 설교자들의 부흥운동 덕분에 건강하게 살아남았다고 주장한다.(미래 275) 다윈, 프로이드, 마르크스를 가리켜 20세기를 망친 사람이라고 호언하고 있으니(비전 223) 평자로서는 유구무언이다. 세계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중에서 전 목사의 이런 주장에 동의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역사를 왜곡하는 일들은 전 목사에게 자주 일어난다. 그에 의하면 루터는 활동가인 반면에 <기독교 강요>를 집필한 칼빈은 학자다.(번제 256) 다독가인 전 목사가 루터 전집을 애써 외면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성철 스님의 법어를 까 내리고(로마서 77), 비구니를 냉소적으로 바라본다.(미래 360)
헌금에 관해서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헌금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적인 의무이며, 권리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규범적으로 가르친다면 결코 복음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전 목사는 기복적인 신앙을 가장 나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헌금을 그런 방식으로 가르친다.
물질적으로 풍성한 삶, 그러면서 시험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십일조를 철저히 할 뿐 아니라 넘치도록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원리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풍성이 부어주셨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며 풍성히 돌려드릴 때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이다.(번제 159)
한 걸음 더 나가서 전 목사는 청중들을 이렇게 위협한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매순간 보호해주시기 때문에 잘 살아간다. 그러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보호막이 떠나버리면 그 순간부터 묘하게 어디론가 돈이 새어나가게 된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의 몇 배가 되는 돈을 병원비로 지출하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말썽 부리는 자녀들의 합의금 명목으로 목돈을 지출하기도 한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미래 248. 전도서 145,154 참조)
이게 도대체 뭔가? 설교가 아니라 협박에 가깝다. 전 목사의 주장은 거짓말이거나 아니면 자기 착각이다. 십일조를 내지 않더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이 사라지는 법은 없다. 이 말을 십일조가 무의미하다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헌금 문제는 여기서 자세하게 다룰 수 없으니까 이것으로 접자.
그의 설교를 전반적으로 검토한 평자는 전 목사가 조직신학에 대한 공부가 많았다고 자처하고 있긴 하지만(기적 300)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을 잘못 짚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한종호 목사도 전 목사의 설교에 ‘결정적인 신학적 오류’가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짚은 적이 있다.(전병욱 비판적 읽기, 52 쪽) 어쨌든지 앞에서 말했듯이 전 목사가 의도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과 설교의 본질을 훼손하는 건 아닐 것이다. 자신의 “들리는 설교”가 청중들에게 먹히고 있다는 확신과 그런 실증이 신학적인 반성의 기회를 놓치게 함으로써 이런 결과를 빚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들리는 설교”는 모래 위에 세운 집인 셈이다.
들리지 않는 설교
한국의 많은 젊은 설교자들은 전무후무할 정도의 교회 성장을 이룬 전 목사의 “들리는 설교”에 상당한 매력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평자에게는 그의 설교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청중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뚫어보고 그들의 종교적 요구에 정확하게 부응할 뿐이지 하나님과 그의 통치가 열리지 않는 설교에 내 영성이 어찌 반응할 수 있단 말인가. 흡사 홈쇼핑의 호스트처럼 소비자의 구매욕을 강렬하게 충동하는 그런 설교 앞에서 내 영혼은 피곤할 뿐이다. 소비 지향적 신앙형태에 관한 유진 피터슨의 아래와 같은 경고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북미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소비자 중심의 신앙이다. 미국인들은 하나님을 하나의 생산품 정도로 여긴다. 자신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더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그런 존재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미국인들은 마치 소비자처럼 가장 좋은 제품을 찾기 위해 쇼핑을 한다.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거의 인식하지도 못한 채, 거래를 시작하고, 최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끌 수 있는 외관으로 하나님이란 상품을 포장한다. (Eugene H. Peterson, 차성구 역, 성공주의 목회신화를 포기하라, 56쪽)
역설적이지만 소비자의 기호에 맞추거나 소비자를 현혹하는 오늘의 설교로부터 우리는 오히려 “들리지 않는 설교”의 역설을 발견해야 한다. 물론 설교는 성서 텍스트와 청중 사이의 “다리 놓기”이니까 당연히 설교자는 청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하지만 더 우선적이고 본질적인 작업은 성서 텍스트의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할 줄 아는 일이다. 이럴 때 우리는 들리지 않는 설교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도 경우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는 설교”였음을 잊지 말자.
“들리지 않은 설교”는 무책임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 구원과 한국의 복음화는 요원하다고 말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들리지 않는 설교는 말씀선포의 부담감으로 벗어나려는 설교 요령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의 실천이다. 설교자들은 자기 자신이 청중을 설득할 생각을 하지 말고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보시고 활동하시는 진리의 영인 성령이 활동하도록 자리를 비켜야 한다. 이 말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설교는 전 목사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강조한 적용문제를(기적 290) 축소하고 성서 텍스트의 신비로운 생명세계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만을 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음악가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두 부류의 피아니스트들이 있다고 한다. 한 부류의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음악적 재질을 청중들에게 과시하는 이들이고, 다른 부류는 음악 자체만 드러내는 이들이다. 물론 여기서 자기를 죽이고 음악만 드러낼 때 참된 연주가 가능하다. 피아니스트와 마찬가지로 설교자도 성서 텍스트의 세계가 청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최대한 축소해야만 한다. 자신의 의도를 최소화한다면 말씀의 존재론적 주도권이 살아날 것이다.
설교자가 축소되고 말씀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말을 오늘의 목회 현장에서 실제로 느끼고 그것과 일치하기는 현실적으로 쉬운 건 아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오늘 우리 설교자들이 교회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을 온 몸으로 받고 있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성서 텍스트의 세계가 실제로 우리의 전체 실존을 감싸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구조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이 해결되려면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설교자 각자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신학과 영성의 대가들에게 배우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 대가 중의 한 사람인 헨리 나우엔의 다음과 같은 아포리즘은 교회부흥과 성과주의에 매몰된 채 “들리는 설교”라는 늪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들리지 않는 설교”의 영적 깊이에 천착하고 싶은 설교자가 곰씹어야 할 화두이다.
doing nothing, being useless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쓸데없이 존재하기- (기상 2004년 8월호에서 재인용)
<기독교 사상, 8월호>
기독신문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글쓰기입니다.
아니면 글을 쓴 기자가 난독증이 있는 모양입니다.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을 완벽하게 전목사를 칭찬하는 글로 탈바꿈하여 놓았군요.
타이틀부터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전목사의 강점은 .... 교회 본질을 회복하는 설교.....라니요?
전병욱 목사 설교의 강점은 ‘들리는 설교’
기독교사상 8월호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설교” 평가
전병욱 목사(44)가 부임예배를 드릴 때, 삼일교회 예배 참석자는 80여명이었다. 지금은 주일 공동예배 참석자만 1만여명이 넘는다. 삼일교회 홈페이지에 있는 그의 설교에는 수만명이 접속하며, 그가 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2004년 6월에 초판 발행한 ‘지금 미래를 결정하라’는 같은 해 12월에 이미 11쇄를 인쇄했다. 초판 판매도 쩔쩔매는 기독교 출판시장에서 그의 책은 늘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이는 곧 그의 설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전병욱 목사의 설교를 분석하는 글이 기독교사상 8월호에 게재돼 눈길을 끌고 있다. 전병욱 목사의 설교분석은 대구 성서아카데미 정용섭 원장이 맡았다.
정용섭 원장은 전병욱 목사의 설교가 대중성을 확보한 가장 우선적인 이유로 ‘들리는 설교’를 꼽았다. 정 원장은 “전 목사의 언어 구사와 순발력 넘치는 멘트가 교인들의 귀를 활짝 열게 했다”고 평가했다.
평소 전병욱 목사는 ‘들리는 설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설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들리는 설교와 안 들리는 설교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설교를 할 때 일부러 유식한 말, 철학적인 말, 그런 말을 늘어놓아야만 잘하는 설교라고 착각합니다. 성도가 아무리 들으려고 해도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저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말은 한국말 같은데, 전혀 가슴에 와 닿지가 않습니다. 이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낙타무릎, 전병욱 저서 中)
또한 전 목사는 설교에 있어서, 언어 구사뿐 아니라 무엇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려 애쓴다. 전 목사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교회의 본질이다. 정 원장은 전 목사에 대해 “전 목사의 신앙과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란 본질주의에 자리하고 있다”며 “또한 그는 기복신앙, 세습, 열린 예배, 초월적 신비주의 등에 관한 문제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고 평가했다.
“교회가 맨 처음 할 일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일이다. 교회의 본질은 세상을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치는 것이다. 성도들의 기도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래서 영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어둠 가운데 빛을 비춰주어야 한다. 그 본질을 제대로 회복하고 나서 비로소 거기에서부터 능력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지금 미래를 결정하라, 전병욱 저서 中)
그렇다고 전병욱 목사의 설교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들리는 설교’는 교인들을 너무 배려한 나머지, 자칫하면 성서(text)보다 상황(context)에 치우칠 위험이 있다. ‘들리는 설교’는 교인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소통에서는 불가(不可)에 빠질 수 있다는 게 정 원장의 비판이다.
마지막으로 정 원장은 “설교자가 축소되고 말씀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말은 오늘의 목회 현장에서 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설교자의 생각을 뛰어넘어 활동하시는 성령께 설교자의 자리를 내어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2006-07-28 06:19 크리스찬 투데이 김근혜 기자 khkim@chtoday.co.kr
저렇게 평범한 칭찬의 글(기사)로 둔갑 할 수 있는지...ㅡ.ㅡ;;
어쨋든, 시원~한 비평의 글 감사합니다. ^-^
정목사님께서 미사여구를 과용하신다고 생각했는데
김근혜 기자가 그것을 놓치지 않았네요.. ㅎㅎ
아무튼
성경을 왜곡하는 전병욱 목사나,
정목사님 비평을 왜곡하는 김근혜 기자나
참으로 혐오스럽습니다..
그리고 전병욱 목사가 베스트셀러 제조기로 통하는 기독교 출판계,
기독교 고전은 멀리한채 전병욱이나 조엘 오스틴 류의 책을 열독하는 신학대생들과 교회 청년부 리더들
그들로부터 성경을 배우는 아무것도 모르는 성도들 ..
아무튼 악순환은 계속될 듯 합니다.
참고로 다음은 뉴조 게시판에서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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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2003-08-20]
저는 작은 교회의 청년부를 지도하고 있는 목사입니다. 본래 한 사람을 평가하고, 특히 비판한다는 것은 매우 심적인 부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래전부터 전병욱 목사에 대해 가졌던 생각을 여러분에게 꺼낼 시점이 된듯해서 이 글을 씁니다.
전병욱 목사는 이미 한종호 목사에 의해 많은 평가가 이루어졌지만, 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들을 중심으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실명을 쓸까 했으나, 글의 파문이 커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덕을 세우기 위해 가명을 사용하니 양해바랍니다.
한가지, 제 글이 혹시 여러분이 제가 전병욱 목사에 대한 시기심이나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고 오해할까하는 두려움 생깁니다. 그러나 저는 최근에 수많은 청년들과 목회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전병욱식 선동과 신앙 운동에 함몰되어 가는 것에 어느 정도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에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전병욱 목사는 정말 훌륭한 점이 많은 목사인 것은 분명합니다. 저도 그의 저서와 설교를 통해 본받을 것이 많다는 점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을 통해 여러분들이 전 목사의 좋은 점만 취하고, 너무나 위험한 요소들에 대해서는 분명한 비판적 시각을 갖고 그를 대하게 되길 빌 뿐입니다. 저로서는 청년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일종의 사명감으로 이 글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전병욱 목사는 이미 뉴스앤조이(newsnjoy.or.kr)에서 한종호 목사에게 난도질을 당한바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종호 목사가 전 목사를 본격적으로 비평하기 전부터 이미 그의 초기의 저작들(마른뼈도 살아날 수 있다, 식어진 가슴에 불을 붙여라)을 읽고 이미 그에 대해 스스로 긍정, 부정적 평가를 스스로 내린바 있습니다.
결론은 그의 신앙관과 목회관은 너무나 위험하고 자본주의적이며, 심지어 여러분은 놀랄지 모르나 인본주의적 경향까지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종호 목사의 글을 뉴스앤조이 사이트에서 단지 드문 드문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란 것은 저의 비판적 지적과 한종호 목사의 그것이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과거 전병욱 목사가 신반포 교회에 있을 적에 대단히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와 직접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저는 자주 신반포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고, 그 교회의 교역자들과 깊은 교분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에 대해 나름대로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있다고 자평합니다.
우선 전병욱 목사는 여타의 목회에서 성공을 거둔 훌륭한 목사님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의 교회의 옥한흠 목사, 안산 동산 교회의 김인중 목사님 같은 경우, 철저히 바닥에서 시작해서 한 영혼 한 영혼을 훈련시켜 지금과 같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전 목사의 경우는 철저한 의 성공입니다. 제가 이렇게 함부로 결론적 혹평을 내리는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그가 소위 뜬 것은 삼일 교회에 부임하자 마자 쓴 는 책 한권 때문이었습니다. 그 책은 일대 선풍을 일으켜 갑작스레 전병욱 목사를 기독교계의 주목할 인물로 떠오르게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처음부터 그 책이 정직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그 책의 표지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거친 표현을 사용하자면, 이것은 완전히 개뻥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신반포 교회의 대학부는 150명 정도의 숫자에서 부흥한 것은 사실이지만, 평균 출석이 500명이 아니라, 평균 250-300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사제를 비롯한 여러 놀라운 부흥 전략의 결실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부흥은 많은 고등부 3학년의 졸업후의 편입과 대학부 졸업 대상자들의 많은 사람을 대학부 리더로 세우고 청년부로 승계하지 않음으로 인한 자연 증가의 측면도 아주 컸습니다.
아무튼 신반포 교회의 대학부가 부흥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300명 부흥과 500명 부흥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150명의 대학부를 300명 수준으로 올린 경우는 주변에 많습니다. 그러나 500명의 경우는 조금 드뭅니다. 그런데 전병욱 목사는 자신이 그렇게 했다고 속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속임수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고,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풀린 숫자는 철저히 상업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장사꾼들이 흔히 뻥튀기를 하듯이, 그렇게 숫자를 늘려, 그것도 엄청나게 늘려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포장했다는 사실입니다. 상업적 용어를 빌자면, 명백한 공정거래 위반입니다.
화가난 일부 신반포 교회의 교역자들과 청년들이 공개, 비공개적으로 그 뻥튀기 된 숫자의 잘못을 지적했을 때, 전병욱 목사는 이렇게 답변했다고 합니다.
" 재적이 500명이란 것이지, 출석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500명이라해도 틀린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 재적인원은 언제든지 교회에 나올 수 있는 숫자이니까."
과연 이것이 정당한 답변인지에 대해서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깁니다. 아무튼 문제는 이 부풀려진 숫자가 선전된 이 책으로 인해 전병욱 목사가 세상에 두각을 나타냈고, 바로 그 네임밸류(명성)으로 인해 그가 맡은 삼일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이것은 분명히 철저한 숫자 부풀리기에 의한 상업주의의 승리입니다.
한편, 이런 방식으로 삼일 교회의 부흥이 가능케 된 것도 문제지만, 동시에 그것이 여러 교회에서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빠져나간 수평 이동의 결과라면, 과연 한국 교회를 위해 그 부흥이 바람직한 부흥이었는지 역시 심각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후 전병욱 목사는 와 손을 잡고, 계속적으로 책을 내게 되는데, 이미 주목받은 책을 쓴 베스트 셀러 작가요, 사실 또한 책의 내용도 사실 도전적 내용이 많이 담겨져 있어서 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히 의 마케팅 전략의 성공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결국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 자본주의적 상업술의 승리입니다. 그렇게 해서 전병욱 목사의 삼일교회는 급속도로 가속이 붙으면서 엄청난 숫적인 부흥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지금은 얼마나 모이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나, 그는 삼일 교회가 2천명 정도로 부흥했을 때에도 출석 교인의 수를 3천명으로 선전하는 행태를 지속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점을 전병욱 목사의 첫번째 문제점으로 꼽는 것입니다. 즉, 그는 정직하지 못한 결과를 선전하여, 상업주의적 발상으로 교회를 부흥시킨 측면이 강하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Unfair하고, 게임의 룰을 지키지않은 성공입니다.
두번째는 전병욱 목사는 사람 중심;의 목회가 아닌, 일 중심의 목회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 역시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님의 복음의 정신과 완전히 상치하기 때문입니다. 전병욱 목사는 일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필요한 사람을 세우기 위해 있던 사람을 버립니다.
그 단적인 예는 이것입니다. 를 읽으면, 전도축제인 예사제의 성공 사례가 나옵니다. 그런데 예사제를 총지휘하던 당시 신반포 교회의 형제 하나가 게으름을 피면서 일을 잘못하자 즉시 잘라버리고, 새로운 인물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결국 예사제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형제의 이름이 실명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말을 드리자면, 그 책이 나온 후에, 그 형제가 그 책을 읽고 정말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당시 전병욱 목사의 후임으로 지금은 아프라카 선교사로 나가 계신 안XX 목사가 후임자로 일했는데, 그 형제가 눈물을 흘리면서 그 목사님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안 목사님에게 직접 전해들은 말임을 밝힙니다.
"흑흑,목사님! 정말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저는 그 때 정말 제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전병욱 목사님에게는 맘에 안드셨나봅니다. 저는 게으름을 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를 많은 사람들이 다 읽는 책에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이렇게 매도할 수 있습니까? "
바로 이것이 전병욱 목사의 목회 스타일입니다. 지금도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전 목사는 맘에 든 사람이 있으면 점찍어서 전폭적 지원을 해가며 키워주다가 자신의 양에 차지 않으면, 쓰는 말로 "버린다"고 합니다. 최근까지도 그렇게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해 주변에서 여러번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삼일 교회가 초기의 사람들이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계속 인적 물갈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려했습니다.
세번째는 전 목사가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쉽게 단죄를 가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모조리 쪼다요 비엉신으로 전락시키고 맙니다. 다른 사람도 자신처럼 빨리 목회를 해야하고, 그리고 목회를 하되 자신처럼 부흥을 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쪼다 비엉신이 됩니다. 그는 신대원을 졸업한 후에도 도서관에 남아 Th.M.에 진학해서 공부하고 있거나 유학을 준비한 사람들을 "학충이"라고 비판하며 다녔습니다. 참으로 그의 그런 행동은 어처구니 없는 황당한 짓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그의 비판은 스스로 이율배반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원래 전 목사는 신반포 교회에서 대학부를 부흥시킨 후, 청년들을 몰래 끌고 나가 개척을 하려는 야심을 가졌습니다. 실제로 그는 상가 건물을 교회로 임대 계약을 마치고, 청년들을 대거 포섭해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야비한 비밀스런 거사는 담임 목사이신 홍XX 목사님께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홍 목사님은 그런 비겁한 행위를 발견한 후, 전 목사를 불러다 이렇게 물었다합니다. 이것 역시 홍 목사님과 식사를 함께하면서 대화를 나눈 어떤 목사님의 입을 통해 직접 전해들은 것입니다. " 우리 교단에서 목사 생활 그만할렵니까, 아니면 개척을 포기할렵니까? " 이 때, 전 목사는 눈물을 처절히 흘리며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홍 목사님은 제가 볼 때, 참으로 신실하시고 경건한 목사님이십니다.
이후에 전 목사는 교회에서 사임을 당한 후. 자신이 책에서 밝혔듯이 진로를 놓고 기도하게 됩니다. 유학이냐, 다시 밑바닥 개척이냐? 그런 와중에 삼일 교회의 부름을 받고 가게 된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들을 학충이라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매도한 자신이 학충이 되려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개척한 후에는 다른 공부하는 사람이나 유학생을 학충으로 매도하고 다닙니다. 저도 그 학충에 분류되고 있는 사람이라 더 민감하더군요. 그런 논리라면, 석사와 박사과정을 지도하고, 좋은 제자를 유학을 보내는 교수님들은 선생 학충이 되는 셈이지요.
한마디로 기가 막히고 황당할 뿐입니다. 전병욱 목사의 달란트와 다른 사람의 달란트는 다른 법입니다. 공부에 부름받은 사람도 있고, 일찍부터 목회에 부름받은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가관인 것은 그런 비판을 가하는 전병욱 목사 자신이 한국의 유학간 신학생이 대거 포함된 미국 유학생 모임인 kosta에 자주 가서 설교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이 규정지은 학충들을 떼거리로 모아놓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훈계하니 이런 사람의 설교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한번은 신대원에서 열린 예배에 대한 포럼이 있었습니다. 전 목사는 열린 예배를 모조리 인본주의 예배로 매도하고, 거친 말투로 그런 예배를 드리는 목사들을 열린 예배 따위를 하는 것들이라고 비하하며 비판했습니다. 자신의 예배 방식만이 옳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과 같은 설교 중심의 목회만이 옳다고 말하면서, 옥한흠 목사까지도 도매금으로 비판하기를 서슴치 않았습니다(지금은 철없던 시절에 함부로 옥 목사님을 비판했다는 자성을 한다는 말이 들리더군요).
이러한 면모는 그가 얼마나 협소한 사고를 가졌는지 충분히 엿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의 이런 시비조의 설교와 주장은 결국 그런 교육을 받는 청년들 역시 전투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전병욱 목사가 성추행 의혹이 있다는 글(어떤 자매가 구체적 정황을 들어가며 자신이 당한 일을 글로 올린 바 있었으나 전 목사가 강력히 부인하고, 그 자매 역시 파문이 너무 커지자 스스로 글을 지우고 침묵해 버림)이 뉴스앤조이 사이트에 실린 적이 있는데, 추정컨대 특정 교회 전사들이 사이버 테러를 가해 서버가 다운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런 행태는 전투적 성향이 강한 이단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그런데 특정 교회가 집단으로 저렇게 한 것입니다. 그 교회가 어떤 교회를 지칭하는지는 다들 짐작할 수 있으라 봅니다. 저는 이런 사태를 지켜보면서, 전병욱 목사가 말하는 세상을 정복하는 그리스도인이 저런 방식의 전투적인 모습만 이어야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했습니다. 도대체 사랑과 이해와 관용과 눈물은 어디로 가버리고 진리를 향해 돌격 앞으로!만 있단 말입니까?
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직접 삼일교회 사이트에서 읽고 확인한 것이기도 한데요, 전 목사가 이성교제 지침이라고 게시판에 올려놓은 글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믿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틀림없이 전 목사의 주장이었습니다.
" 5살 이상 차이나는 커플은 죄다 변태다. 변태로 보면 틀림없다! "
정말 어처구니없고,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를 않더군요. 그렇다면 사라와 10살 차이가 나는 아브라함은 왕변태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아내와 저는 14살 차이가 나니 변태 중의 괴수가 되고 마는군요. 그래서 누가 그 문제를 또 따졌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답변했다는군요.
" 그 지침은 우리 삼일교회 청년들에게 적용될 뿐이지, 모든 교회의 청년들이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니다. "
한마디로 제멋대로입니다. 저는 한편으로 변태로 분류될 그 교회의 성도들이 우려되었습니다. 만일 그 교회에 결혼하신 부부나 교제를 하는 커플 중에 5살 이상 차이가 난 사람들은 분명 상처받았을 거란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얼마나 전 목사가 경솔한 말을 쉽게 내 던지는지 알 수 있고, 그의 규범적 잣대가 얼마나 독단적이고 안하무인격인지를 엿볼 수 있는 주장입니다.
네번째로 그는 성공병에 걸린 목회자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자신의 방식대로 부흥이 되지 않으면, 모두 실패자입니다. 역시 신대원에 있었던 어떤 목회 포럼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큰 교회 목사님들 뿐만 아니라, 시골에서 조용히 목회를 하시는 분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시골의 작은 목회를 하시는 분들도 나름대로 예수님 앞에서 부끄럽지는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전 목사는 부흥시키지 못한 목회자는 모두 실패자라고 단죄하면서 토론에 임했습니다. 참석하신 목사님들과 세미나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어처구니없어 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가 성공병에 걸렸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모두 실패자라는 이원법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그는 철저히 엘리트주의가 몸에 배어 있습니다. 성공한 엘리트가 되어야 하고, 엘리트가 아니면 키워주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이지 성경의 정신은 아닌 것입니다.
때로 그는 성공을 위해서 인본주의적 발상까지고 마다하지 않습니다. 단적인 예로, 그는 예사제를 비롯한 전도 축제를 할 때, 소위 얼굴 이쁜 쭉쭉빵빵한 미인형 자매들에게 안내를 맡깁니다. 그는 당당히 이렇게 주장합니다.
"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지만, 사람은 외모를 본다. 그러므로 초청되어 온 사람들 눈에 먼저 이쁜 여자들이 드는 법 아닌가? "
그의 상업주의와 인본주의적 경영학적 마인드를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외에도 그의 성공주의적 경향을 수도 없이 짚어볼 수 있지만, 지면상 생략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역사에 대한 몰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역사 의식이 크게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자주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의 문제를 잘못 진단합니다. 최근에 그는 이렇게 설교했다고 합니다.
" 한국에는 정의로운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은혜받은 사람이 없어서 이 모양이다. "
참으로 이 주장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여러분들은 잘 아셔야 합니다. 정말 한국 교회에 은혜받은 사람이 없어서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입니까? 웃기는 주장입니다. 저는 그 주장을 이렇게 바로 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 한국에는 은혜받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은혜받은 정의로운 사람이 없어서 이 모양이다."
한국 교회에는 은혜받은 사람이 차고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받았단 사람들이 역사의식도 없고, 정의에 대한 의식도 없습니다. 정말 이것은 너무나 심각한 문제입니다. 단적인 예로, 옷로비 사건의 주역들은 모두 할렐루야 교회 집사, 권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매 주일 성경공부 모임을 갖고 항상 소위 은혜로 충만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권력의 차양막 속에서 국민들을 속이고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를 하면서 서로를 비난하는 작태를 보여준 것입니다.
전두환의 몸종 장세동 씨는 교도소에 있을 때, 교도관이 감동할 정도로 신앙에 엄격했습니다. 매일 성경을 묵상하고, 의연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수백명이 학살당한 광주 사태의 주범이었고, 자신의 책임인 수지김 사건에 대해 말하길, 그 가족에게는 미안하다. 그러나 공소시효가 지났기에, 책임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수지김의 가족이 도대체 얼마나 억울했을지 한번만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수지 김은 살해당한 후 빨갱이로 전락했고, 가족들은 하루 아침에 빨갱이 가족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후 가족들은 자살, 해고, 이혼, 정신적 고통 등으로 완전히 파산되고 말았습니다. 장세동씨가 진정으로 은혜받은 사람이라면, 그 가족들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해야 마땅합니다.
도대체 전 목사가 말하는 은혜란 것이 무엇입니까? 정의로운 사람들이 나라의 정의를 바로 잡고자 목숨바치고 있을 때, 소위 은혜받았다던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밤낮 부흥회나 하며 은혜로 충만해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도대체 뭐가 은혜받은 사람이 없단 말입니까? 그러니 전병욱의 주장은 뒤집어서 바로 잡아야 합니다. 은혜받은 정의로운 사람이 없어서 교회와 나라가 이 꼴이다라고 말입니다.
전 목사의 역사 몰이해의 또 한가지 예로, 그는 용맹했던 미국의 인디언들이 보호구역에 갇힌 뒤에는 그 용맹성을 모두 잃어버렸다면서, 그리스도인들도 보호구역에 갇혀있으면 비엉신이 된다고 적용했습니다. 이에 대한 비평은 뉴스앤조이에서 한종호 목사의 을 통해 더 자세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을 뿐입니다. 인디언들이 그런 비극을 당한 이유는, 바로 총과 대포로 무장한 미국인들의 인디언 말살 정책때문이었습니다. 인디언들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은 무력으로 자신의 땅을 빼앗긴 것이지 용맹성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이외에도 전병욱 목사의 오류와 위험성에 대한 지적은 뉴스앤조이에서 한종호 목사의 글을 읽어볼 것을 권합니다.
이상에서 저는 전병욱 목사의 문제점들들 몇 가지 짚어보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성공만 거두면, 잘못이 면죄되어버리는 이상한 풍토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공이 어떤 성공이냐는 별로 따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병욱 목사가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서, 무조건 추종하는 위험을 피해야합니다. 도대체 그 성공의 실체가 무엇이고, 성경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곰곰히 따져보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전병욱 목사의 긍정적인 점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가 젊은이들에게 신앙의 불을 지펴놓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언급했듯이, 그가 주는 도전, 그가 외치는 은혜가 도대체 어떤 실체를 가졌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기존 교회에서는 수많은 청년들이 그런 대교회로 빠져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 교회 전체로 볼 때, 이런 것이 과연 바람직한 현상인지 곰곰히 생각해볼 시점입니다. 만일 어느 순간 만족하지 못하게 되면, 그런 벌떼 신자들은 다시 한없이 꿀을 찾아 헤매기만 할 것입니다. 그러니 각 교회에서 그런 벌떼 신자를 만들지 않도록 교역자들이 잘 먹이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정말 우려되는 것은 젊은이들이 전병욱 목사류의 책들에 너무나 미쳐있다는 사실입니다. 부흥!, 파워, 감동! 이런 선동적 문구들로 가득찬 책들이 서점에 널려있습니다. 그리고 인스턴트 식의 잡지 책 수준의 책들이 베스트 셀러에 버젓이 올라가 있습니다. 최근의 신학교의 신학생들의 독서 경향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작 젊음의 시절에 읽어야 할 소중한 책들, 어려운 책들, 두고 두고 읽음으로써 깊은 사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두꺼운 책들은 아무도 읽지 않고 있습니다.
영화 중에는 액션 영화도 있고, 감동을 주는 대작도 있습니다. 액션 영화를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저도 그런 영화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액션 영화를 두번 이상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가장 감동적인 영화로 액션 영화를 꼽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대작은 다릅니다. 그런 영화는 깊은 사상과 감동을 전해줍니다. 몇번을 봐도 나의 전 삶에 영향을 줍니다.
저는 적어도 현재 가지는 전병욱식 목회가 이런 액션 영화 방식이 아닌지 자평해봅니다. 그의 책들도 분명 흥분과 도전을 던져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조폭 마누라나 두사부일체가 주는 흥분과 감동의 수준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말 그대로 그런 영화는 대박을 터트린 영화입니다. 흥행에 크게 성공한 영화입니다. 왜 저는 그런 영화에서 전병욱 목사를 연상하게 되는지요....
저는 이런 점에서 최근에 기독신문사에서 책을 내신 대학부의 홍명유 목사를 전병욱 목사보다 훨씬 더 큰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이 분의 책에는 개뻥이 없고, 거짓이 없습니다. 읽으면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한 영혼, 한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행간에서 진실하게 느껴져, 정말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 분은 정말 더디가더라도 '사람 중심'의 목회를 하는 분이었습다. 물론 이 분도 자신의 책에서 전병욱 목사의 에서 큰 도전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전병욱 목사에게서 받은 도전과 그의 오류는 명백히 구분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만약에 홍병유 목사님도 전병욱 목사의 책이 과장된 측면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된다면, 실망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전병욱 목사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청년 사역자들과 청년들이 도전을 받았다는 사실을 긍정적 측면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는 지금껏 말씀드린대로, 전병욱 목사의 부정적인 측면들은 그러한 긍정적 측면들을 완전히 가리고 맙니다. 또한 제 글이 자칫 부흥 반대주의로 비쳐질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저도 부흥을 위해 오늘도 애쓴다는 사실로 답을 대신하겠습니다. 대신 참된 부흥을 위해 노력하려 합니다.
이런 비판적 글을 올린 저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현재 우리가 혹시 놓치고 있는 중요한 점들은 없는지 한번 재고해보자는 의미에서 이 글을 올렸습니다. 부디 전병욱 목사가 앞으로는 더디가더라도 마지막 한 사람까지 껴안고 가고, 사람을 중심으로 삼는 목회를 하게 되고, 과장이나 부풀리기를 하지 않고,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다고 사람을 쉽게 단죄하는 미성숙함에서 벗어나 한국 교회의 존경받는 목사의 한 사람이 되길 빌 뿐입니다.
정 목사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저 묵묵히 무릎 꿇고 가는거겠지요.
근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쓸데없이 존재하기'
이 말의 분명한 의미가 뭔지 궁금하군여.
그냥 글자 그대로인지....
좀 무식해서.
말 그대로 니우엔의 이 경구는 화두입니다.
화두는 어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대답이 주어진 게 아니라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단초일 뿐입니다.
그러나 제 글의 맥락과 연관해서 간단하게 설명할 수는 있겠지요.
하나님의 계시가 존재론적인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는 가능한대로 입 다물고 있는 게 좋다는 뜻입니다.
설교자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설교자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상태가
가장 바람직한 설교행위라는 말입니다.
그거 말장난 아닌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군요.
아무리 설교자가 입을 다문다고하더라도 무언가를 말을 해야하니까요.
가능한대로 적절하게 말하는 건 필요하니까요.
여기에는 미묘하지만 아주 큰,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설교자가 앞에 드러나면서 청중들을 닦달하는 설교가 있고,
설교자가 말씀 뒤에 숨어서 오직 말씀과 그의 세계만이 전체가 되는 설교가 있습니다.
후자가 곧 "아무 것도 ...."의 의미이지요.
이런 경지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앞에서 설치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공부와 자기 수련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도대체 자기 말과 성서의 가르침을 구별하지 못하니까요.
성서가 말하려는 실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채
자기의 말을 강요하기 위해서 성서를 이용할 뿐이니까요.
제 말이 또 많았군요.
감사.
너무 그리고 아주 중요한 의미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설교자로서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하는 내용이네요.
그런데 정말 그런 경지가 가능할까요?
물론 쉽게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신다면!' 이란 답을 할 수야 있겠지만
지금 저 자신을 들여다 볼 때
그건 불가능한 모습이란 생각입니다.
근데 왜 불가능할까를 생각해 보니까
답이 나왔습니다.
내가 나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에 의해 불려진 설교자란 생각을 놓쳤습니다.
물론 나는 절대 그런 수준에 갈 수 없는 존재가 맞습니다만
나를 부르신 분이 나를 그런 수준에 올리신다면 너무나 분명히 가능하겠군요.
물론 어느날 아침에 그렇게 올려 놓으실 것은 아니란 걸 압니다.
목사님 말대로 믿음을 가지고 많은 공부와 자기 수련을 해야겠군요.
어느날 내가 설교하는데 나는 없고 그 세계가 열려질 날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가장 강력한 그 세계가 풍겨지는 존재로
쓸데없이 있는 것 같은데
가장 편안하며 온유의 풍성함이 넘쳐나는 그런 존재로의
그 걸음을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묵묵히 걸아가야 하겠습니다.
물론 그 분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면서 말입니다.
아니 이 걸음이 그 분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과정이겠지요.
문득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보낸 편지 첫 부분이 기억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엡1:4)"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쓸데없이 존재하기'
허허..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네요..
예전에 서울에서 공부할 때 소위 유명교회를 탐방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병욱 목사님이 워낙 유명해서 한동안 삼일교회를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참석하면 할 수록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 이상한 건 어처구니 없는 말씀에도 청년들은 깊이 감격하며
열심히 경청을 하더군요..
참으로 한동안 망연자실했습니다. 이 정도가 한국을 대표하는 청년교회의
모습이라니..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한국의 목회자들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그리고 쓸데없이 하나님께
다가가려는 사람들에게 훼방이나
하지말고 그냥 그렇게 존재했으면..'하구요.
저번 Rick Warren에 대한 님의 비평은 수긍이 되지 않았는데, ( 조엘 오스틴에 한해 수긍이 갔음 )
전병욱 목사와 삼일교회에 대한 이번 평은 아주 수긍이 되네요 ㅎㅎ
특히 이단들이나 광적 선교단체 에게서 볼 수 있는 성향 - 전투적이라고나 할까 - 을 전병욱 매니아들에게서 많이 느끼는 저로서는, 그런 느낌을 가진 사람이 저만이 아님을 알게 되어 반갑네요 ㅎㅎ
그리고 김영완님은 그런 느낌을 통해 UBF가 연상된다고 하셨는데,
전병욱 목사는 Navigator ( 영적 학대 측면에서 UBF 못지 않는 ^^;; ) 출신이라고 합니다.
to 김인범님
doing nothing, being useless 가 언급된 책의 본문 내용을 소개합니다.
( 제가 부족한 관계로 번역이나 해석은 하지 않겠습니다. ^^;; )
“What do we do in our solitude? The first answer is nothing. Just be present to the One who wants your attention and listen. It is precisely in this useless presence to God that we can gradually die to our illusions of power and control and give ear to the voice of love hidden in the center of our being. But doing nothing, being useless is not as passive as it sounds. In fact it requires effort and great attentiveness. It calls us to an active listening in which we make ourselves available to God's healing presence and can be made new.”
—Henri Nouwen, The Road to Peace 中 -
네비게이토는 세련된(미국식)느낌이 들지만 캠퍼스(대학)와 선교라는 그들만의 리그에 헌신된 사람을 최고로 인정하는 것 안에는 인간의 도구화 또 성경의 도구화를 숨기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스텝을 밟고 어느 단계에 올라서고 또 일정기간의 단체생활을 가지면 그들만의 먹잇감을 찾습니다. 사람일수도 있고 대학 캠퍼스 일수도 있고 한 국가 일수도 있습니다. UBF의 경우에는 결혼까지 그들의 선교에 맞춘 짝짓기가 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가거나 또 윗선에서의 일방적인 통보 같은 형식의 깜짝 이벤트가 벌어진다고 들었습니다. 선교를 위한 도구가 되어버립니다.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는 것은 그동안 쇄뇌된 영향 때문 이겠죠. 두 단체 모두 기존 교회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어려운 이유가 무었일까요? 네비게이토 사람들을 김장환목사님이 수용했다는 그런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일부가 아닌가 싶습니다. 전목사가 네비게이토 출신이라면 우선 들을 귀를 상실했다고 봅니다. 애석하지만 어쩔수 없는 일임니다. 어떤 국가를 복음으로 정복하고 만약 딸이 태어나면 열국의 어미(UBF식 사고)로 키우겠다 말하고 또 그렇게 부르기도 하고 기도를 하더군요.
어느 출신이 중요한 것은 아닐 테지만 말입니다. 지금 한국에 전병욱이라는 엽기적인 목사가 있는 시대 정신일 것이고 또 실상을 모른체 전국에서는 그 목사와 부교역자 설교까지 인터넷으로 감사히 듣는 청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탓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불리던 기복신앙이 젊게 회춘을? 하는 시점이 상당히 한국교회에는 빨리 찾아온듯 합니다. 젊은이들이 십일조로 세상과 승부를 보려하고 새벽기도로 전투적 자세로 다른 사람을 짓누르는 것이 신앙의 승리라고 믿는 다면 또 그런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문제는 심각해지겠지만 그 기간중에 또 새로운 유행을 탈것이 분명함니다. 어차피 복음없는 교회와 설교는 놀이이며 장난감이듯이 말입니다. 내가 가지고 놀수 있는 목사 그리고 들어줄만한 설교 그리고 다닐 만한 교회를 찾는 것 말입니다. 전병욱식 복음과 설교를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로 청년들 간의 신앙의 소통이 달라지는 분위기인것 같기도 합니다. 전목사의 엽기적인 설교는그 사람 설교를 듣는 사람의 체질을 바꿀수 있기에 폐쇄성을 유발할 수 있다고 봄니다. 전목사한테서 들은 설교와 신앙의 방정식을 대입하려 할것입니다. 좀더 강하게 십자가를 붙들고 말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지는 않지만 만난다면 또 이야기할 분위기가 된다면, 정신차리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당신 정체가 뭐요?"
기분 나쁘게 듣지 마세요.
헨리 나우엔의 그 경우가 실린 원문을 찾아내다니...
놀랍소이다.
이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네요.
머리 속에 나우엔과 루이스의 모든 글들이 입력되어 있다는 건지,
아니면 그런 정도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인터넷 실력이 있다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영발(?)이 그렇게 쎄다는 건지...
몇번의 대글에서 느낀 거지만
그런 정확한 글들을 어떻게 끌어오시는지 궁금하군요.
어쨌든지 오리지널 텍스트를 대하게 되어서 고맙습니다.
전 그저 호기심 많은 대한민국 청년일 뿐입니다 ^^;;
정목사님께서 궁금하게 여기신 것은 아마도 저와 정 목사님의 관심사 ( 특히 문제의식 .. 반면 문제해결엔 동의하지 못하는 것들이 상당수 있음 )가 비슷해서 나타난 일시적 현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
두어편 들었습니다. 실로 정교수님의 전병욱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그 잘못된 부분을 합리적이고 적절한 언어로 표현하신 본문의 글은 많은 설교자들이
반드시 읽어 보아야 할 것같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견해로는 일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정목사님의 언어의 사용이
좀더 성서저자들의 언어 사용방식과 유사하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선전과 선포]
본 단락에서 정교수님께서는
설교의 본질을 벗어난 전목사님의 설교의 잘못된 점을 적절히 지적하고 정목사님의 현대적 언어로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셨습니다..
성경은 항상 잘못된 교훈을 대적하기위해 사용해야할 성도들의 무기를 "말씀의 검" 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용섭교수님의 설교 비평이 좀더 예리하고 잘못된 교훈의 근본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인 언어와 용어 보다는 좀더 성경저자들이 사용한 언어 사용 방식과 좀더 동질성을 유지 하였으면 더 좋을 것 같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예를들어 본 단락에서 정교수님이 전목사님의 설교를 "교양강좌와 같은 교훈"이라고 표현 하셨는데 이사야는 이를 "사람의 계명(사 29:13)"이라는 언어로 표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좀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의 상태를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마음은 떠난" 신약적인 용어로는 주인의 받에 자라난 가라지 신앙인 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비평은 이러한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는 전병욱목사의 설교는 교회안에 행함은 없는 입술의 믿음뿐인 가라지 신자를 만드는 주인의 원수가 되고 있는 것임을 말씀의 검으로 좀더 명백히 지적 할 수 있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입니다.
사 29: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들리는 설교]
저는 본 단락을 읽으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과연 들리는 설교를 하셨을까? 주님의 설교의 핵심은 모두 들리지 않았던 설교에 있었지 않았나 하고 말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포함한 사복음서 여러곳에서 주님이 귀에들리지 않는 하늘의 비밀을 고의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을 여러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본질은 원래 알아듣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전병욱 목사가 들리는 설교를 한다는 것은 이미 말씀의 본질에서 떠나가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이라 봅니다.
[단순화의 함정]
성경은 복잡하지 않다고 말하는 전병욱 목사의 말은 실로 단순한 유아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고 봅니다. 성경을 단순 무식하게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 신학교를 졸업하고 상당히 실력이있다는 목사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현실이 참으로 암담하기만 한 것 입니다.
특히서신서를 언급하며 그런말을 한다는 것은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이야기라 생각 합니다. 서신서란 그 시대 같은 생각과 같은 교육 아래서 완전히 교육 받은 자들에게는 공통된 사상과 의식이 있어서 이해하기 쉽지만 지금의 우리에게 그 서신서라는 것은 매우 어려운 내용인것 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구약을 거의 외우다시피 많이 공부하고 이를 바탕으로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신을 적은 바울의 언어의 의미를 비교적 쉽고 정확히 받아 들일 수 있지만 요즘같이 구약 재대로 공부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에게 신약은 암호같은 언어인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지난번 리플에서 정용섭 교수님께서 스스로 "구약은 좀 약하다"(?)라고 말씀하신 리플을 대하고 적잖이 놀랐습니다. 물론 겸손의 표현이시라 확신하지만^^
구약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없이 신약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 아닐까요?. 왜냐면 신약을 적은 저자들의 지식과 언어 사용 방식 자체가 모두 구약에 그 근본을 두고 있기때문 이라 생각 합니다. 구약을 거의 왜우다 시피 이해하지 않고 신약성경을 이해한다는건 공자의 제자가 소크라테스의 저서를 해석하는 것과 다름 없는 것 이라는게 제 생각 입니다.
서신즉 편지란 그 편지를 쓴자와 받는자 사이에 언어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 있으며 사용되고 선택된 언어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환경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목사님들이 너무도 자주 언급하는 로마서 8장 35절을 예를 들어보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편지를 수신하던 수신자의 형편은 어떠했을까요? 로마서 8장 36절은 수신자의 처지를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라고 시편 기자의 언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끓으리요"라는 말씀은 목숨을 걸고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으며 신앙의 정절을 지키고 있던 편지의 수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사용한 사도 바울의 표현 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주님과 세상을 같이 사랑하고 자신의 문제해결을 위해서 비젼을 가지고 인생의 잘되고 형통함만을 꿈꾸는 배도의 길을 가는 요즘같이 편안한 신앙인들에게 그따위로 대충신앙 해도 결단코 천국간다는 보증수표로 선포하는 목자들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저도 성경공부 꽤나 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말씀은 배우면 배울 수록 어렵고 단순히 육적이고 현대적인 언어로 이해하도록 가르치고 배워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정보인가 사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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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벨링의 표현을 빌려서 말한다면, 설교는 성서의 정보를 신세대의 언어로 포장하는 일이 아니라 성서의 언어를 사건이 되게 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곧 성서의 신앙적 주제들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 실제적인 리얼리티로 자리를 잡아야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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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벨링의 표현을 빌려서 말씀 하신 것 처럼 성서의 신앙적 주제들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 실제적인 리얼리티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정용섭 목사님의 말씀에 공감 합니다. 그러나 위의 에멜링의 표현은 자칫 극과 극의 전혀 다른 의미로 전달될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지금 현재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고 , 둘째는 "성경말씀을 현재 우리 생활에 적용하여야 한다"는 의미라 생각 합니다 위의 양자는 흡사 비슷한 내용 같아 보이지만 전혀 다른 길을 가는 명제가 됩다고 봅니다.
전병욱 목사의 설교는 후자의 길을 잘 따라 갑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을 지혜롭게 잘사는 도구로 우리의 생활에 접목시키고 있는 것 입니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사람의 계명"이 되는 것 이라 봅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본 단락에서 아모서 서와 관련된 정용섭 교수님의 언급 또한 잘못을 지적받고 있는 전병욱 목사의 가르침과 하등 다를것입 없습니다.
도대체 "아모스"서와 "한국 사회의 경제적인 불의와 사회 구조악이"무슨 상관이 있는지 되묻고 십습니다. 만약 정용섭 목사님이 "교회내의 경제적인 불의와 교회내의 사랑의 식어진 구조악"에 대해서 언급 하셨다면 아모스서의 본문 택스트와 연관이 있을 것 이라봅니다.
정용섭 교수님은 교수님자신의 정치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기위해 아모스서의 본문을 이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방식의 성경 해석은 또다른 형태의 "사람의 계명"일 뿐이라는 것이 본인의 생각 입니다.
교수님은 아모스의 큰 주제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로 보고 "공법"과 "정의"의 개념에서 한국 사회의 사회구조악 경제불의를 언급하고 계신데 아모스가 외쳤던 "공법"과 "정의"의 기준은 하나님의 율법이지 다른 이방 나라의 법규범이 아니었던 것 처럼 교회에내서 흘러야할 "공법"과 "정의"는 정치 경제적 민주사회의 법 윤리가 아닌 새계명 하나님과 사랑과 이웃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의 계명이 그 기초란 생각 입니다. 따라서 구약교회 즉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을 외쳤던 아모스선지자의 외침은 지금 이시대 성도들을 향한 것이지 한국사회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아모서서에 나타난 하나님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아모서 암 3:2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따라서 이러한 아모스에 나타난 성경적 세계관은 신약시대에서도 유효하여 하나님은 이세상을 "교회"를 통해서 보시고 계시는것 입니다.
제 생각에 아모스의 말씀이 지금 우리 교회에게 생명을 주시는 말씀이 되기위해서는 그 핵심 주제가 "한국 사회의 사회구조악 경제불의"가 아니라 .."주님이 다시오실때 심판받을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는 것 이며 핵심구절은 암 5:18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가 되는 것이 어떨까? 생각 합니다.
물론 "공법"과 "정의"가 없어서 여호와의 날에 구약교회 이스라엘은 멸망을 받습니다. 문제는 이 "공법"과 "정의"라는 말을 "한국사회의 구조악"과 "경제 불의"로 엉뚱하게 해석하는 정용섭교수님의 다소 비약적인 해석에 있다는 생각 입니다.
정용섭 교수님의 말씀 적용방식과 아모스 선지서를 종합하여 결론을 내려보면 신약의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 구조악을 개혁하기 위해서 애쓰고 경제정의 실천을 위해 노략해야 심판을 면할 수 있다는 엉뚱한 논리가 나오게 되는 것 입니다. 저는 초대 교회때 사도들과 바울과 교회가 로마사회의 불평등 해소와 노예해방을 위해 노력했다는 기록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이 심판을 면하려면 하여야 했던 "공법"과 "정의"는 과연 신약 교회시대는 어떠한 의미로 요약하면 좋을까 계시록 2,3장을 읽으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내어 잘못된 교훈을 배척하여야 합니다.
-성도들은 참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여야 합니다.
-환난과 궁핍 가운데서도 주님안에서 참된 부요를 가지고 나누어 줄수 있어야 합니다.
-발람의 교훈과 같은 기족주의와 신부주의적인 잘못된 교훈을 교회안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날마다 자라나야 합니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아야 합니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과 같은 잘못된 영을 분별해야 합니다.
-행위의 온전한 것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 말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여야 합니다.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한 자리에서 일어나 신앙의뜨거움을 회복 하여야 합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여야 하여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교회에게 무려 7번에 걸쳐 명령하신 명령이 지켜지고 회복되어야 교회안에 "공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아모서의 주제를 정용섭교수님과 같이 "한국사외의 구조악과 경제 정의의 실현"이란 명제에 포커스를
두고 해석한다면 이것은 교수님이 앞서 언급하신것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계시되는 구원사건의 선포가 아니라 인간의 호기심이 충족되는 선전, 선동"이 되지나 않을까? 염려되는 것 입니다.
[들리지않는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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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지 않는 설교는 말씀선포의 부담감으로 벗어나려는 설교 요령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의 실천이다. 설교자도 성서 텍스트의 세계가 청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최대한 축소해야만 한다. 자신의 의도를 최소화한다면 말씀의 존재론적 주도권이
살아날 것이다. 설교자가 축소되고 말씀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말을 오늘의 목회 현장에서 실제로 느끼고
그것과 일치하기는 현실적으로 쉬운 건 아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오늘 우리 설교자들이
교회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을 온 몸으로 받고 있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성서 텍스트의
세계가 실제로 우리의 전체 실존을 감싸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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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옳으신 말씀이라 생각 합니다.
이시대는 거짓된 목사들의 복음이 복음으로 가장하여 난무하므로서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를 가르치는 설교는 도대체 귀에 들려지지가 않는 세대 같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못하는 영적 기갈의 시대를 아모스 선지자는 참으로 잘 예언 하셨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8:11~13]
사도 요한또한 주님이 복음의 생수에 강에 쑥이 떨어져 먹어도 죽는 물이되어버린 영적 기갈의 시대를 계시록에서 경계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실로 이땅의 목자들이 말씀이 없어 비틀거리는 성도를 바라볼 수 있길 기도해 봅니다.
2000년전 주님께서는 요한의 환상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자는 들을 지어다" 말씀은 귀있는자가 듣는 것 아닐까요?
허나 아이디가 안 맞아 여러 번 반복 하여 결국 성공했다.
정 목사님의 설교 비평을 숨도 고르지 않고 읽었다.
구구 절절히 옳은 말씀 이다. 라고 생각하며 나 자신을 돌아보며
내 소리를 들어 본다. 너는 정 목사님의 설교 비평을 옳다고
정의 할 수 있는 판별력이 있는가라는 반문에는 그렇다고 확신 할 수
있는 신학적 변별력은 솔직히 없다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다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요즈음 주님에 대한 본질은 뒷전이고 저속한 언어와 한번 도 생각해 보지 않고
내뱉은 상식이하에 막말을 함부로 홍수처럼 쏟아내는 뜨는 목사님들에 저속이란
눈 뜨고는 볼수 없는 지경 까지 이른 현 시점에서 정 목사님의 용기 있는 비평이야 말로
예레미야 을 들어 거짓선지자들에게 경고한 하나님의 말씀처럼 이시대의 선지자의 소명을
감당하는 정 목사님에게
경려와 감사를 드리며 다 시 한번 곱씹어 보는 의미 로 단락별 귀한 말씀을 올려놓습니다.
(1)선전과 선포
전 목사의 설교에서 성서 텍스트가 심하게 우롱 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2)들리는 설교
오늘 평자에게 주어진 숙제는 바로 이것, 들리는 설교의 정체를 풀어내는 일이다.
우선 단순화의 함정이다.
(3)단순화의 함정
이처럼 성서 텍스트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청중들의 요구에만 기울어진 그의 설교는 좋게 말하면 “들리는 설교”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막가는 설교”다.
(4)정보인가, 사건인가!
특히 교회의 설교에서 남발되는 단어나 문장은 너무 진부해서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게 만들고, 감격이나 놀라움을 생산해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바른 신앙 행태로 오해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여러분은 이런 설교제목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이건 설교가 아니라 처세술, 또는 인간관계 강좌에 불과하다. 평자가 여기서 단순히 설교 제목만 두고 시비를 거는 게 아니다. 그 설교의 내용도 역시 여기에서 한 발자국도 다른 게 아니기에 하는 말이다.
(5)그리스도교 원리주의자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런 설교는 청중들이 눈치 챌 수 없는 사이비 전문가의 은밀한 음모다.
전 목사가 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 신학개념은 그것 자체로 완결되는 규범이 아니라 다른 개념과의 대립적인 관계 안에 자리하고 있다. 즉 ‘오직 성경’은 로마 가톨릭이 강조하는 교회의 권위와 대립적으로 신앙과 삶의 기준이 성서라는 사실을 가리키며, ‘오직 믿음’은 행위와 대립적인 차원에서 칭의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며, ‘오직 은혜’는 업적과 대립적으로 구원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신학개념에 생명을 걸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절대적인 도그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는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와 같다고 언급한 데서 잘 알 수 있듯이 성경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언급했듯이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절대적인 게 아니며, 본훼퍼가 말했듯이 은혜는 자칫 값싼 은혜로 빠질 수도 있다. 매우 복합적인 상황에서 해석되어야 할 이런 신학개념을 절대화하는 전 목사의 설교는 우리의 신앙을 독선이나 광신에 빠지게 할 개연성이 높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툭하면 생명을 걸고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기적 193)
(6)들리지 않는 설교
자신의 “들리는 설교”가 청중들에게 먹히고 있다는 확신과 그런 실증이 신학적인 반성의 기회를 놓치게 함으로써 이런 결과를 빚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들리는 설교”는 모래 위에 세운 집인 셈이다.
그러나 후자는 설교자 각자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신학과 영성의 대가들에게 배우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 대가 중의 한 사람인 헨리 나우엔의 다음과 같은 아포리즘은 교회부흥과 성과주의에 매몰된 채 “들리는 설교”라는 늪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들리지 않는 설교”의 영적 깊이에 천착하고 싶은 설교자가 곰씹어야 할 화두이다.
평신도들에 눈과 귀를 열려주는 목사님의 노고에 거듭감사합니다. 샬롬"
이스라엘은 종교와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분리되지 않고 서로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공법과 정의 준수 명령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포괄적 윤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의 정치 경제적 불의와 관계없이 자신들의 정치, 경제적 불의에만 관심을 쏟으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법과 정의를 실천하는데 집중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세상과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지도 않을뿐더러 세상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그대로 오늘날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로 환원하게 되면 교회와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서로 무관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실제의 삶에서는 절대 분리될 수 없는 영역들인데도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과 '정치 경제적 불의에 대한 비판'도 서로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분리될 수 없는 실제 삶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의'란 곧 '사랑의 부재'가 아니겠습니까? 예수께서도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시며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하는 실천을 몸소 보여주셨고, 초대교회 사도들 또한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는 경제적 평등을 실천하였으며, 바울 역시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간구하는 노예해방을 위한 노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법과 정의'는 '한국사회의 정치 경제적인 불의와 사회의 구조악'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구약의 이스라엘에서 이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표상이라고 할 때, 교회 안에서 더욱 크게 한국사회의 정치 경제적 불의와 사회의 구조악이 폭로되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거기에 동참했던 삶의 행태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코람데오 님의 의견과 권요안 님의 의견이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말씀의 적용이 교회 안이냐 아니면 우리 사회까지의 확대냐의 문제로
아마 모르긴해도 여기가 보수와 진보가 나뉘는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너무 극단으로 가지 말고 공통분모를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저는 일단 적용은 교회로 국한해야 한다는데서 코람데오님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 교회의 성도들이 모두가 사회인들이기에
자연스러운 확대 적용은 필연적이고 그러기에 이 사회가 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어떤 정치적 행동이나 모습들은 교회의 이름으로는 불가하다고 보고
그 교회의 교인들인 신자들이 개별적으로 사회활동을 하는 중에 나타나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말씀에의 적용이고 성도의 세상에서 빛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보수지향적 목사들의 행태속에 들어나는 교회를 정치집단화하는 현상의 문제점을
실은 진보적 입장에 교회와 목사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모습들은 결국 원리적인 면에서는 같은 것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목사의 역활이 참으로 중요한데 말씀에의 적용이 어떤 종교적 행위들로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이 사회의 정당한 일원들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의식과 양식을 가진
진정 성도다운 모습을 교회만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삶으로 보여야 함을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로만이 아니라 기도한 자로서의 모습으로
찬양하는 자로만이 아니라 찬양한 자로서의 행동도
하나님을 아는 자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늘 함께 하는 자로서의 삶이 나타나져야겠죠.
빌레몬서 1장의 바울의 글이 노예해방을 위해 애썻다는 근거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노예 문제에 대한 고린도 전서 7장에 나타난 바울의 사상과 간격이 있다고 생각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또 구약교회와 신약 교회의 문제에 있어서도 한 걸음 물러나 권요한님의 말씀대로 구약교회와 신약교회의 처한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 하다고 할찌라도 현재 교회환경과 동일한 신약의 초대교회시대의 가르침에 "각 성도(교회)는 자신이 속한 속한 국가의 정치 경제적 불의와 사회의 구조악을 폭로하라"는 의미를 합리적이고 적절한 유의성을 가지고 유추 할만한 신약성경의 말씀을 저는 읽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교회의 급격한 타락은 역사적으로 교회가 정치와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이 세상의 사회 구조를 개선하기위해 행동하기 시작하면서 발생하였다는 생각 입니다.
그리고 김인범 님께서 말씀하신 "성도의 세상에서 빛된 삶" 이란 말씀에서 권요한님과 저의 공통분모를 찾으면 될것이라 생각 합니다.
저는 우리교인들이 어떤 조직적 사회 활동보다는 우리의 삶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주님을 닮아가는 삶 자체가 사회활동하고 사회개혁을 위해 애쓰는 삶보다 훨씬더 성도에게 희생과 십자가를 요구 하는 삶 일것 입니다.
주님게서도 하셨으니 우리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분을 닮아 갈 수 있으리라 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형제를 위해 목숨 바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아 가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삶 전체가 사회사업이요 삶 전체가 나누어주고 배푸는 삶으로 자라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 때문 입니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문득,이전에 어디선가 읽었던 우화 하나가 생각이 나네요.
옛날 큰 강둑을 따라 한 도시가 형성되었는데 하루는 어린아이들이 강가에서 놀다가
세 사람의 몸뚱아리가 떠내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들은 곧바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고 주민들은 재빠르게 그 세 사람을 건져냈다.
한 사람은 죽었기에 그들은 곧 시체를 화장했고, 한 사람은 살아있기는 했지만
심하게 병들어 있어서 곧바로 병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아이였는데 다행히도 건강하게 살아 있어서
곧바로 그를 돌봐줄 가족에게 보냈다.
새 가족은 그 아이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 매일 강에는 수많은 사람이 떠내려왔다.
선량한 도시의 주민들은 그들을 강에서 구조해 아픈 사람들은 병원으로 보내고,
살아 있는 아이들은 새로운 가족을 만나게 해주었고, 시체들은 화장하는 일을 계속했다.
이 일은 일년 동안이나 지속됐다.
매일 떠내려오는 사람들의 몫도 할당이 되어서 주민들은 그 사람들의 수를 예측할 뿐 아니라
그들을 강가에서 끄집어내고 관리하기 위해 효과적인 방법을 개발했다.
예외가 있어서 몇몇 사람은 포기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친절함에
건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친절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체가 떠내려오는 일년 동안 누구 하나
강 위로 올라가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 매일 이토록 많은 시체가 떠내려오고 있는지, 자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는 저위를 보았습니다.
왜 이토록 많은 시체가 떠내려 오고 있는지 말씀의 거울을 통하여 보았습니다.
시체가 더내려오는 이유는 "사회적 구조악이나, 평등의 문제"가 있는것이라..
나 자신 즉 인간의 철저한 죄성이 그곳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그것이 시체를 생산하는 원동력 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요..
성경은 무어라 말합니까?
주님은 다시오신다^^..
그래서 바울은 그토록 주님이 다시오셔서 우리가 완전히 영화되는 날을
그토록 바라고 바랬던 것입니다.
두분다 예외없이 위를 보고 계시는 것이 분명하군요.
좀 더, 그리고 더 멀리 보고의 차이만 있지
좀 더 먼 위를 바라보며 오늘에 내가 할 것을 찾는 모습이면 어떨까요?
영화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 만이 아니라 함께하는 주님의 동역자로의 삶은요?
그건 그렇고 이러다가 정작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계속 갈 것 같은데요.
여긴 아시다시피 전병욱 목사 설교비평에 대한 의견을 나누던 곳인데.
하긴 넓은 의미로는 다 포함되겠지만
그래도 왠지 노파심에서.....
사회정의가 아닌 신앙 공동체 속에서 나타나야할
가장 큰 계명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모스서의 메시지는
'사회 정의'에도 적용이 될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보십시오.
주님의 뜻이 어디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바로 "땅"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지 "신앙공동체"만을 사랑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바로 선 사람이
"노예 제도"에 대해 무관심 할 수 있습니까?
성경이 왜 구구절절이 당대의 사회악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코람데오님의 지적처럼 인간의 죄성이 모든 악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것을 집중공략(?)하면 당연히 자신이 속한 시대와 현실속에서
사회정의에 대한 부분에도 영향을 발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노예제도"같은 시대의 사회악들을 전부 나열하다가는
성경이 1000권이 되도 모자랄듯합니다.
따라서 아모스서의 공법과 정의는 최고의 계명을 지켜야 이뤄지는 것이고
이것은 개인 경건과 교회 공동체의 정화 그리고 사회 각 영역으로
확대됨이 마땅합니다.
다만 그 순서에 있어서 처음부터 사회정의에서 출발하는 것은
성경의 정신은 아니라고 봅니다.
지금 미국과 영국 같은 나라의 패권주의를
완전히 막을수 있을것이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사회적인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그리스도인들 중
어떤이는 성공했고, 어떤이는 실패했습니다.
혹은 성공도 실패도 아닌 진행형도 있겠지요.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나라 즉 주님의 통치가 임하게 해달라는 표현은
아시겠지만 수동형입니다. 그의 능력으로 나라가 임하기를 구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런데 그 간구의 주체는 인간입니다. 천사도 아니고 예수님도 아니고..
주님이 오시기전에 이땅에 완벽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고 못이루고는 중요치 않습니다.
인간의 한계성과 하나님의 전능성 사이에 끼인 자들이 우리 아닙니까?
주님의 통치를 임하게 하고자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자세와
주님의 통치를 그저 겸손하게 참으며 기다리는 자세.
모순같은 표현이지만 이 둘을 모두 추구해야 하는것 아닐까요?
전도서에 나타나는 히브리적 사유나 예수님의 존재 모두가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위에 사용한 흔한 표현으로 '모순'이지만
성경은 신적인것과 인간적인것의 통합을 줄기차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상세계를 만들라고 명령하신 적 없으시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안에 있고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가지 자세를 모두 견지하고
진력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서
그 존재가 완성되는것은 아닐까요
너무나 신비스러운 일이지만
성령을 모신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미
그 신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도
그러한 신비로운 균형자(者)를
많이 보고 싶습니다...
정의와 공법 참으로 곱씹어보며 되 새겨보아야 할 귀한 말씀입니다.
박진님의 가정 설정 예화 속에 사건만으로 사회 정의냐?
교회안의
공의 이냐 란? 이분 논 법적 논제는 좀 무리가 있다고 저는 생각이듭니다.
왜야하면 위에 상황을 그대로 방치 한다면 선한 마을에 선행을 계속 담보 할 수 없다는
사람의 한계성을 우리는 잘 알기 때문 이지요 이런측면에선 사회 정의가 우선인것갇고
그렇다고 끝까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아예 처음부터 못 본체 한다면 교회는 존재 가치가 없기 때문 인 것입니다.
윗마을 사건은 사람이 존재 하는 한 계속 일어날 것이요 건강한 교회는 구원에 손길을
항상 준비 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나라는 확장하리라 확신합니다.
다만 염려 되는 것은 교계지도자들에 부도덕과 폐륜에 길이 하루속히 정화 되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교회법 작동이 정치화 대였고 전문성 결여로 올바르게
적용 되지 않아 신뢰는 잃었고 이를 악용하여 내부적 부끄러움은 얼굴을 들 수가 없는
현실이 데었습니다. 이를 바로 잡기위해 서라도 교회 법을 다룬 분들은 법정신이 투철하고
전문성이 확보된 분들로 구성하여 공정하게 법이 집행 데여야 하겠고 그 권위가 확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적 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음을 자각하고 목사님은 목사 편
장로는 장로 편 이런 구도로는 교회 안에 정의 와 공의는 남에 일일 것이며 하나님
나라는 힘을 잃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하여 말을 해야 때 말을 할 수 있는 정 목사님 같은 용기가
필 료 할 때입니다 말을 해야 할 때 하지 않은 것은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처세와 비굴사이를 잘 살펴야 함에도 비굴을 인생 삶에 처세로 자위하는 자기 본위
이기주위가 팽배하고 관계성때문에 용서라는 미명 아래 파렴치를 덮고가는 현상들이 문제 인 것입니다.
살후 1:7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살후 1: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살후 1:9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쩨 대는 계명이요,
둘쩨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니라. (마22:37-40)
여기서 '하나님을 알고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는 것'은 '환난'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로부터 왜 환난을 받았겠습니까? 그들이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위협이 되지 않았다면 환난을 받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로서는 어떤 명목이든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도록 그대로 놔두면 안되겠기에 더이상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환난을 준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실제적이고 현실적으로 느꼈던 위협은 무엇일까요? 예컨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위협적이었을까요? 그들이 사랑을 전혀 몰랐다거나 서로 사랑하는 것을 완전히 금지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위협이 되었던 것은 막연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아닌 자들까지 사랑하라는 예수의 복음에 복종한다는 구체적인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이것은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혼란에 빠뜨리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였을 것입니다.
이렇듯 어느 한 시대의 지배적인 가치관, 질서, 사회구조가 당대의 사람에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해도 하나님의 기준에는 불의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의 복음의 기준에 의해 당대의 지배적 가치관을 거부하게 되면 당연히 지배적 가치관에 숨겨진 불의와 악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숨겨진 불의와 악이 폭로되면 지배적인 가치관을 옹호하는 자들로부터 환난이 오고, 그 환난을 참고 이겨내는 것으로써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자들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에 대한 표, 증거가 됩니다.(살후 1:3-5)
하나님의 공의는 무엇입니까? 환난 받게 하는 자들과 환난 받는 자들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시는 것입니다. 환난은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을 알고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함으로써 지배적인 가치관과 질서, 사회구조에 숨겨진 불의와 악이 폭로되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그곳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굳게 믿기에 환난 중에도 인내하는 자들의 공동체, 교회가 아닐까요?
기독인의 마땅한 삶의 태도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공의의 문제를 교회 안의 무엇, 혹은 개인의 무엇으로
제한하는 주장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됨을 망각/억압하는
천박하고 음흉한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가치관, 질서, 사회구조를 선과 악의 잣대로 재단하기가
어렵다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그러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여 어떤 선택을 해야겠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 강변하는 것에는 조심스럽습니다.
다만 우리의 현실 삶을 끌어안고 함께 아파하며 기도하는 것,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웃과 함께 최선을 찾아 행동하는 것,
교회의 교회다움을 잃지 않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아마 늘오늘님께서도 그렇게 기도하시기에 "공의의 문제를 교회 안의 무엇, 혹은 개인의 무엇으로 제한하는 주장"에 숨겨진 "음흉한 이데올로기"를 포착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는 늘오늘님의 말씀처럼 현실 삶을 끌어안고 함께 아파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할 수도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선과 악의 잣대로 재단하기의 어려움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리고 교회가 현실 삶의 아픔을 느끼고 있는가하는 물음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 때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대사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잣대같은 것은 필요없지 않을까요? 너와 나의, 우.리.의 아픔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찾아가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분명히 드러날테니까요. 그 때 비로소 우리는 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너무 아픕니다..."
공법 [公法] 국가의 조직이나 국가 간 또는 국가와 개인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법률.
[헌법·형법..
(正意)[ 올바른 마음. 또는 바른 뜻. 1. 올바른 도리.
공의 [公義] 선악의 제재를 공평하게 하는 하느님의 적극 품성의 한 가지
모든분들이 다 옳은 말씀을 해주셔서 많은 도움을 받은것 갔습니다.
그러나 정목사님이 쓰신 단어적 의미와 말씀 하시고자 한 의미와 의도를 잘보시고
도운말을 주신다면 더 좋은 다비야가 되지않을 까? 생각해 봅니다.
시간에 구걸을 위해 예배당의 문을 두드렸지요.. 뒷쪽에 있는 저는 빠르게 나가 점심 식사하시라고 10,000
원을 주었습니다. 그 뒤로 매주 구걸하러 오셨습니다. 한달에 4~5만원 가량 지출되었습니다.
아들놈 학원비가 나가더군요.. 그러길 몇개월 뒤에 예배 참석하시길 권했습니다만
예배 참석은 결코 하지않으시더군요. 근 1년이 지나서 저는 그분들이 제가 드린돈으로 막걸리
파티를 하신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음 깊이 느꼇습니다. 그 돈으로 저희목사님 쌀이나
팔아드릴걸 아니면 주위에 있는 작은 교회 목사님 식사나 대접 할 걸 하고 후회 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후로 저는 혹 조금이라도 물질의 여유가 생긴다면. 교회 밖의 가난한자를 돌보는 일 보다는
하나님의 바른 복음을 전하는 목사님들을 지원하고 같이 형제된 개척교회를 지원하는데 쓰거나,
복음전파를 위해 애쓰시는 오지선교사님들과 교회내의 가난한 형제가 물질로 시험에 들지않도록
그들을 구재하는 일에 사용할 것입니다.
가난한 불교도를 위해 사용하거나, 궁핍한 이슬람교도와 곤란중에 있는 무신론자를 위해서
주어진 물질과 시간을 헌신하고 사용할 마음은 추호도 없으며, 또한 이러한 사회 봉사가
주님이 명하신 형재 사랑을 실천 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며 이러한 듣기좋은 사회정의와
구조악 제거라는 말은 어떤면에서 도덕적인 허영심을 자극하는 언어일 수도 있다는 것이 제
생각이며 이러한 언어드로 형재 사랑의 본질이 흐려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얼마전 뤽워렌 목사님이 한국에 와서 말씀 전하시면서 자기번돈의 상당부분을 에이즈환자 돕는 제단에
지출한다고 말씀 하시더군요.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럴돈 있으면 목숨걸고 오지 선교하는
배고픈 목사님들이나 도우시고 하나님의말씀 바로 전할려는 바른 목사님들이나 지원하시지^^
하고 씁슬한 웃음을 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곳은 전병욱 설교비평코너이니 전목사에 대한 어떤 이야기는 있어야 할듯 함니다.전병욱 목사라면 어떨까요? 막걸리병을 뻇어 머리를 쥐어 박아 정신차리게 하던지 있던거도 뻇어서 신용불량자로 만들어 버려라? 그렇게 하지 않을까요? 얼마전 들은 전병욱의 설교에서 사치스런 대학생이 돈을 많이 쓰면 신용불량자로 만들어 버려라는 것을 듣고 생각한 것입니다.
코람데오님과 권요안 님의 토론이 제게는 참 유익했습니다.
이곳에 방문한지 얼마 안되고, 또 신학은 커녕 인문학 쪽으로도 전혀 문회한인 평신도이기에
이곳의 글들을 읽으면서 소위 말하는 자유주의(?)가 이런건가 하기도 하구요.(제 느낌입니다. ^^)
그래서인지 제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도 있구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주로 눈팅만 하다가 가겠지만
이곳의 댓글 분위기가 너무 좋아 용기내어 흔적을 남깁니다.
두손 두발 다 들어야겠습니다. 여기에 들어오시는 분들의 열정들에... 와~~~
특히 설교로 '건전한 이성교재'를 주제로 삼고 "여자는 남자보다 몇 배 더 자극해야 한다."라는 말
을 남자들에게 따라해보라고 하는 얘기에 아연실색 했었습니다. 그 이후론 다시는 삼일교회 예배
장소인 숙대강당에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습니다.
전목사는 좀 병적입니다. 심리검사를 해야할 일이지 설교 분석을 해야할 차원이 아닙니다.
앞으로 무언가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특징인 젊은 층들이 주로 모인 환경, 자꾸 격려하다 보면 번영신학으로 비출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측면으로 이해해주실만한 면도 있을 것이고....글쎄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많이 다르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요?
제가 예전에 전병욱 목사님의 '파워 로마서'를 제 친구중 한 명에게 빌려주어 읽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좀 막(?)사는 친구였는데 제가 달래고 달래서 한번 읽어보라고 권유했던 것입니다. 별달리 어려운 내용이 없어 불신자가 읽기에 좀 편하리라 생각해서 빌려주었는데 중간에 무서워서 못읽겠다고 돌려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다시 뒤져가며 보았지만 무서워할만한 구석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오랜만에 교수님의 글을 대했는데,
참 금쪽같이 귀한 글이요 적절한 지적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사실, 전 목사님의 저런 유형이,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의외로 한국 교회 설교자에게 적지 않게 나타난다고 봅니다.
텍스트에 천착하기 보다, 자기의 메시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exegesis의 고민과 고찰없이, 무분별한 짜집기 식의 설교는
많은 경우, 자주 보여지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설교의 용도가 성도들이 하나님께 침잠하기까지 기다려주고
그 room을 만들어 주기 보다 성급하고 다소 천박하게 성도들을 소몰이하는 경우 역시
많은 목회자들의 특징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러한 설교의 특징은 청중들의 반응이 즉시로 보여진다는 유혹이 있습니다만
롱텀으로 봤을 때에는 성도들이 근본적인 하나님의 도전을 받는다고 보기엔 힘들 것입니다.
오직 말씀의 본질만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니까요.
작금의 자정 능력이 거의 상실된 한국 교인들의 삶의 부재 현상은 그 결과라 볼 수 있지 않을런지요.
오랫만에 다시 읽었지만 간담이 서늘하군요..
저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냥, 개인적인 소견으로
설교 비평이 간헐적이지만 계속 이어졌으면 합니다만..^^
교단과 구조 속에 윗 사람 눈치보고 해야 되는 이야기들이 논의가 안 되기에
자체 분석과 비판 능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졌고, 그로인해 무분별한 근거없는 설교가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거의 대세를 이루게 된거라 믿는 까닭입니다..
도저히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아주 강력한 진 그 자체이지요..
목회적 방향 역시 그렇지요. 설교와 그것은 일맥상통한 부분이니까요.
이러한 첩첩산중 가운데서 마음을 시원케하는 교수님의 글을 계속 지지해 봅니다..
저역시 청년시절 전목사님의 첫 저작 '마른뼈도 살아날 수 있다'에서 감동 먹고 그분의 광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학을 공부하면 할 수록 정목사님이 지적하신 문제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거의 안티수준으로 변했습니다.
정목사님께서 이번에도 저를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전목사님의 문제점들을 거의 정확하게 지적하셨는데 사족을 덧붙이자면 '표절'이 많다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남의 간증, 남의 경험을 은근슬쩍 자신의 경험으로 끼워놓는데.... 평소 정직을 목청 높여 외치는 분이 설교는 왜그리 표절을 많이 하는지.... 자신의 힘으로 반드시 성도들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중압감에 고쳐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쨋든 예전에 한종호 목사님의 비판도 다 자기와 삼일교회가 잘 되서 배아파서 시기하는 것이라고 외치던 분이시니 이번역시 동일한 반응을 보일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판과 비난에 귀를 기울인다면 정말 훌륭한 목회자가 되실 수 있을터인데 너무 일찍 너무 큰 성공으로 인해 칭찬소리가 너무커 이젠 작은 비판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