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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설교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어떻게 하면 신앙의 깊이를 담아내면서도 대중적인 설교를 할 수 있는가에 관심이 크다. 그런데 신앙적 깊이와 대중성은 흡사 두 마리 토끼와 같아서 동시에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신앙의 깊이가 있는 설교는 대중성이 떨어지고, 대중성이 강한 설교는 신앙의 깊이가 없다. 예외적인 경우가 없진 않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이 두 요소를 무조건 대립적으로만 볼 필요도 없다. 기독교의 복음이 진리라고 한다면 이 두 요소가 만날 수 있는 지점이 분명히 있지 않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그 지점은 기독교 영성이다. 설교자가 기독교 영성의 깊이로 들어간다면 그의 설교는 신앙의 깊이를 담는 것은 물론이고, 상당한 정도의 대중성까지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삶에서만 참된 만족을 얻는다는 데에 있다. 많은 설교자들은 자신의 설교가 당연히 영성에 토대한다고 주장하겠지만 과연 자신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에 들어갔으며, 또한 그것을 실제로 누리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질문해야 한다. 겉으로 기독교적인 형식을 따르고 성서 언어를 전달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설교자가 영성의 깊이에서 설교한다는 사실을 담보해주지는 않는다. 오늘 필자는 바로 이 문제, 즉 영성이 깊은 설교가 무엇인지, 거꾸로 영성이 없는 설교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영성이 별로 깊지 못한 필자에게 이 작업이 너무 과중할지 모르겠으나 힘닿는 데까지 가볼 생각이다. 이 작업을 위해서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이하 ‘김 목사’)의 설교보다 더 적합한 설교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 그 이유를 몇 가지로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기도의 사람
첫째, 김 목사는 오랫동안 기도에 천착한 사람이다. 기독교 영성을 언급할 때 기도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없는 것 아닌가. 김 목사가 펴낸 <사귐의 기도>(2002년,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이하 ‘사귐’)는 그의 기도 영성이 얼마나 진지하고 체험적이고 실질적인지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그는 모태신앙으로 살아왔다. 어릴 때부터 주일을 지키지 않은 적이 한 번밖에 없을 정도로 모범적인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결국 목사가 되어 설교하고, 신학자가 되어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을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채워지지 않는 ‘무엇’을 느꼈다고 한다. 그것은 곧 자신에게 부족한 영성생활이었으며, 그리고 영성생활의 핵심은 기도였다.
유학 시절부터 영성은 내 연구의 주요 주제로 자리 잡았다. 특히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위대한 영성가들의 글이나 전기를 읽으며 해답을 찾았다. 나는 영성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기도에 천착했다. 수십 년 동안 한다고 해 보았지만 나는 언제나 기도가 어려웠다. 그래서 기도의 대가들이 기록한 책을 읽으면서 길을 찾았다.(사귐 10)
목사의 삶이라는 게 원래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데, 김 목사의 기도생활만 그렇게 특별한 건 아니지 않는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 필자는 기도행위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영성을 말하는 중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기도생활과 영성의 깊이로 들어가려는 김 목사의 기도생활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말 그대로 기도행위라고 한다면 후자는 기도영성이다. 이러한 기도영성이 열매를 맺어 김 목사는 2004년에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직접 읽고 묵상할 수 있는 <사귐의 기도를 위한 기도선집>(한국기독학생출판부)을 묶어 냈다. 그 책은 동서고금을 망라한 여러 영성가들의 주옥같은 기도문을 무려 623쪽에 빼곡히 담고 있다. 필자는 위의 두 책을 읽으면서 기도를 향한 김 목사의 신앙적 진정성을 흠뻑 맛볼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영성의 진수가 아니고 무엇이리요.
둘째, 김 목사가 제시하는 기독교 영성은 신학적 통찰력에 근거한다. 이것이 영성과 설교의 관계를 설명해야 할 필자가 김 목사의 설교를 다루게 된 핵심 요소이다. 한국교회는 기독교 영성을 신학과는 별개의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는 큰 착각이다. 이런 착각은 목회자만이 아니라 신학자들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그들은 영성은 실천적이고 신비적인 반면에 신학은 이론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다. 영성은 기본적으로 영적 현실성(spiritual reality)과 일치하는 경험이나 능력이라는 점에서 설교와 신학의 동일한 토대이다. 영적 현실성을 경험하지 못한 신학자는 신학의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에 불과하며, 마찬가지로 영적 현실성을 경험하지 못한 목회자와 설교자는 신앙의 정보를 선전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김 목사는 한국교회의 이런 이원론적 시각과 그 한계를 넘어서 신학과 신앙의 일치를 견인하는 설교자이다. 아래와 같은 진술에 귀를 기울어보시라.
시간이 흐른 후, 교회 지도자들이 신학 이론을 정립하려고 했을 때, 그들은 이름을 알지 못할 보통 사람들의 일치된 고백을 자료로 삼아 정리했을 뿐입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신학이 먼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과 고백이 먼저 옵니다. 신학은 체험과 고백을 해석하고 정리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이 신앙의 현장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위험해지는 것입니다.(2006년 5월14일 설교 중에서. 이하 월일만 기재하며, 특별한 단서가 없으면 모두 2006년을 가리킨다.)
조직신학을 공부한 필자는 성서신학자인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기독교 교리와 신조로부터 기독교 신앙이 출현한 게 아니라 신앙 경험으로부터 교리가 나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예컨대 바울은 부활의 예수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론을 전개했지, 부활론으로부터 부활의 주님을 경험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리와 신조가 무의미하다는 게 결코 아니다. 그 교리와 신조가 신앙경험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며 진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제 다시 오늘의 신앙경험을 해석하는 준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신앙경험과 신학은 해석학적으로 순환한다. 이런 순환의 중심에는 바로 기독교 영성이 자리한다. 건강한 영성은 신학적 사유 안에 한정되지 않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신학적 조명을 받아야 한다.
셋째, 필자는 김 목사의 삶과 신앙에서 깊은 파토스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곧 그의 영성이 온 몸을 던지는 실존적 투쟁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따라가기 힘든 김 목사의 높은 영적 경지라고 생각한다. 그는 약관의 나이로 1992년부터 협성대학교 신약신학 교수로 10년 동안 재직했다. 누구나 부러워할 그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그는 2003년에 미국인들로 구성된 뉴저리 벨마 연합감리교회 담임 목사로 갔다. 지금은 2005년 7월부터 와싱톤한인교회 담임 목사로 있다. 그는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일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다.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 자신의 몸을 쳐 복종케 한 바울처럼(고전 9:27) 그는 끊임없이 자기 영혼을 다그치고 있다. 목사가 연봉에 연연해하지 말아야한다는 아래와 같은 그의 진술은 빈말이 아니리라.
선한 목자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가 연봉을 따라 직장을 전전하고, 그 돈값의 차이에 따라 일희일비하고, 오직 돈을 많이 버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우리는 삯꾼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사례비를 위해 일한다면 그리고 그 사례비를 따라 교회를 전전한다면, 우리는 삯꾼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혹은 교회에서 일하면서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정을 바라거나 혹은 권력이나 감투를 얻을 요량으로 일한다면, 우리는 삯꾼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3월26일)
위와 같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문제는 ‘누가’ 하는가에 따라서 그 무게가 달라진다. 필자는 김 목사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위의 말은 우주와 같은 무게를 담고 있다고 본다. 그는 이미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2003년,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에서 교회 안에 깊숙이 뿌리를 내린 천박한 자본주의와 일전을 치룬 적이 있다. 그는 ‘깨끗한 부자’를 어불성설로 보고, 청부론자들의 주장을 배격했다. 이런 대목에서 그는 래디컬하다. 겉으로 조용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그의 내면은 용암처럼 끓고 있다. 이런 파토스는 영적 설교의 동력이다.
영성목회
넷째, 위에서 필자가 열거한 세 가지 요소들은 이제 그의 목회에 그대로 녹아든다. 그는 자신의 목회를 ‘영성목회’라 이름을 붙였다. 전업 목회자로 나선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그는 지금 실험적인 목회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어떤 목회에선들 영성이 없으랴마는 김 목사는 좌고우면 없이 한 가지 길을 간다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가 생각하는 영성 목회가 무엇인지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2006년 12월31일 주일 설교에서 그는 2007년 목회 방향을 제시하면서 영성목회(contemplative ministry)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약간 길지만 김 목사의 목회와 설교의 영적 차원을 이해하는데 놓쳐서는 안 될 대목으로 보고, 여기 발췌 방식으로 인용한다.
‘영성 목회’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적 성장을 위해 계획 되고 추진되는 목회’(ministry planned and conducted to help the congregation grow spiritually)를 말합니다.
이런 까닭에 영성 목회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 일에 더 의식적으로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것입니다. 영성 목회의 성패는 우리 교회에 속한 교우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성장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왜 영적인 성장이 목회의 초점이 되어야 하느냐?’고 묻고 싶으십니까? 왜냐하면 인간 존재의 본질이 영성(spirituality)에 있기 때문이며, 한 개인의 전인적인 변화가 영적 성장(spiritual formation)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며, 개인의 영적 성장은 곧 사회의 변혁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영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자는 말은 다른 모든 차원을 외면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영성 목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의 변화와 그로 인한 사회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총체적 변화의 출발점이 바로 개인의 영성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성 목회의 비전은 이렇게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큰 것을 이루고, 내면에서부터 시작하여 외면에 이르며, 예배와 기도로부터 시작하여 일상의 모든 삶에 이르고, 개인에서부터 시작하여 사회 전체에 이르는 변화를 목표로 삼습니다. 그런 거대한 비전을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적 성장을 위해 힘을 쏟는 것이 영성 목회입니다.
필자가 위에서 설명한 네 가지 요소는 독립적인 게 아니다. 기도, 신학적 통찰력, 신앙과 삶의 파토스, 영성목회는 김 목사의 신앙 안에서 서로 맞물려 있다. 기도는 신학적 통찰력을 가능하게 하며, 거기서 삶의 파토스가 발생하고, 그 결과로 그는 영성목회를 지향하게 된다. 영성목회는 다른 세 가지 요소들을 그 안에 담고 있다.
이런 정도의 그림만으로도 우리는 그의 설교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리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는 교회성장이나 신자들의 계몽이 아니라 오직 영적인 세계로 인도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설교의 초점을 놓는다. 모든 설교자들이 그런 자세로 설교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옳은 것만도 아니다. 신자들의 영적 성장이 아니라 종교 기능인을 목표로 하는 설교도 많다. 이걸 구분하기는 쉽지 않지만, 전혀 구분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진짜 보석과 가짜 보석을 구분하는 능력을 키우려면 진짜 보석을 집중해서 보아야 한다는 말에 의지해서,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김 목사의 설교를 검토하겠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여, 잠시만이라도 필자에게 영분별의 은사를 허락해주소서.
성서의 말걸음
필자는 김 목사가 와싱턴한인교회에서 2006년 1월1일 주일부터 12월31일 주일까지 주일공동예배에서 행한 설교 47편을 꼼꼼히 읽었으며, 필요한 대목은 동영상으로 보고 들었다. 2007년 1월7일 주일부터 6월3일 주일까지의 설교는 필요한 곳만 선정해서 읽고 듣고 보았다. 앞에서 소개한 그의 세권의 저서도 참조했다. 이런 정도로 김 목사의 설교와 그의 삶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오늘 우리의 중심 주제는 영성과 설교이다. 모든 설교자들이 제각각으로 영성을 말하고 있는 마당에 한 설교자가 영성의 깊이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어려운 이유는 영성이 어떤 하나의 실증적인 형태나 사건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바람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성령과의 관계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데에 놓여 있다. 아무도 영성을 범주화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필자는 조심스럽게 어떤 관점을 가능한대로 정확하게 제시하려고 한다. 그것은 두 가지 관점인데, 하나는 영적인 통찰력이며, 다른 하나는 영적인 삶이다. 이를 다시 개념 용어로 정리한다면 전자는 영성의 존재론이며, 후자는 영성의 행위론이다. 이 두 가지는 구분되기는 하지만 나누일 수는 없다. 영성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한 사람은 당연히 영적인 삶을 살아갈 것이며, 영적인 삶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성에 존재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두 관점에서 볼 때 김 목사의 설교는 어떤가?
김 목사의 설교를 따라가면서 필자는 많은 영적 통찰력을 배웠다. 그것을 여기서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다. 다만 김 목사가 성서텍스트와 영적인 대화의 길에 들어섰다는 사실에서 그의 영적인 통찰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서가 영적 깊이에서 말하는 걸 듣는 것이 설교자에게는 가장 중요하기도 하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 유명한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눅 10:38-42)에 대한 김 목사의 설명에서도 이런 부분이 잘 드러난다. 우리는 예수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마리아를 칭찬하고, 부엌일로 분주한 마르다를 책망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 목사는 말씀을 듣는 일과 봉사하는 일의 차이를 두지 않는다. 예수의 책망은 마르다가 말씀을 듣지 않고 봉사했다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의 봉사를 내세우려는 데에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지 전심을 다해 그 일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경계하고, 그 마음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예배는 좋은 몫이고, 주차 봉사는 덜 좋은 몫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좋은 몫이고, 주방에서 음식 준비하는 것은 덜 좋은 몫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은 좋은 몫이고, 청소하는 것은 나쁜 몫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서 전심으로 섬기는 한, 모두가 다 ‘좋은 몫’이 됩니다.(9월3일)
독자들은 여기서 영적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설교자가 성서를 주관적으로 해석하거나 알레고리로 해석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영적인 해석은 신학적인 해석이다. 영적인 통찰력은 곧 신학적 통찰력이다. 이런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는 창조적인 해석의 단계로 들어갈 수 있으며, 동시에 그런 해석은 당연히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것은 곧 시인이 언어가 말거는 것을 경험하는 것처럼 설교자가 성서의 말걸음(Anrede)을 경험하는 사건이다. 이런 경험이 주어진 사람은 종교적 권위에 의존하거나 과도한 수사학에 기울어지지 않고, 세상을 창조한 ‘다바르’, 그리고 역사 이전의 태초로부터 존재한 ‘로고스’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잠시 오늘의 설교학에 관해 한마디 하는 걸 용서하시라. 오늘의 설교학은 설교자와 청중의 소통에만 너무 기울어진 게 아닐는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데만 마음을 두고 있는 게 아닌지. 내러티브, 스토리텔링, 청중중심, 소비자중심, 눈높이 등등, 이런 용어들은 모두 설교자와 청중의 소통만을 문제 삼는 것들이다. 필자의 생각에 그것보다 더 시급하고 본질적인 것은 설교자와 텍스트와의 소통이다. 성서텍스트와 대화할 줄 모르는 설교자에게 청중과의 대화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서, 텍스트와의 소통이 일어난다면 내러티브, 스토리텔링 같은 방법은 아예 필요조차 없다. 그래도 대중 전달방법을 잘 알면 좋지 않으냐 하고 주장할 분들이 있겠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설교자가 전달방법에 마음을 쓰기 시작하면 성서텍스트와의 소통에는 마음을 닫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몇 가지 대중전달 기술로 청중들의 영혼이 쉽게 움직이는 마당에 굳이 성서텍스트의 놀라운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고된 일에 나설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서텍스트를 해석하는 행위인 설교는 진리의 차원이지 방법의 차원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김 목사가 어느 특정한 성서본문을 나름의 영적 시각으로 독특하게 해석할 줄 안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청중들을 성서텍스트의 깊이로 끌어들일 줄 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건 대중전달의 수사학이 아니라 성서텍스트의 영적인 깊이로 들어간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존재론적 능력이다. 김 목사의 설교 한편을 선택해서 구체적으로 따라가 보자.
“대야와 수건”
8월27일에 행한 “대야와 수건”이라는 제목의 설교는 예수가 유월절 전날 저녁에 제자들의 발을 씻긴 다음에 주신 말씀인 요한복음 13:12-20절을 본문으로 한다. 김 목사는 설교 초입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받아들인 십자가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은 그 사형의 끔찍스러움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하는 질문으로 인해서 지적인 충격까지 주었다고 한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는 말은 일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요청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에서 그렇게 순교하지는 못한다. 십자가의 일상화는 ‘대야와 수건’이라는 상징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 식사를 나누던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기 위해 사용했던 대야와 수건은 십자가와 같은 의미를 전하는 상징이기는 하지만, 십자가보다 훨씬 일상적이고 사소하고 친근해 보입니다. 십자가는 한 번 지고 죽으면 끝나는 것이지만, 대야와 수건은 매일같이 필요한 물건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에, 대야와 수건은 안성맞춤입니다.
김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대야와 수건’이라는 메타포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흑백논리를 극복할 수 있게 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수도사가 되든가, 아니면 세속주의자가 되든가, 두 가지 대안밖에 모른다. 그들은 ‘시장 통의 수도자’로 사는 가능성을 내다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아가려면 매일, 매순간 고민하고 기도하고 반성하고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야와 수건’은 교묘한 자기합리화로 복음의 요청을 피하려는 이런 흑백논리를 무너뜨린다.
대야와 수건을 항상 준비해 두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단지,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요청하시는 것은 그 대야와 수건으로 서로의 발을 씻어주라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언제라도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하여 발을 씻어 주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면 별로 어렵지 않게, 영웅적인 용기가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일상에서 남을 섬기기 위한 대야와 수건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지식일 수 있고, 또는 권력이나 재능일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좋은 것이든지 나쁜 것이든 무엇이나 이웃을 위한 대야와 수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대야와 수건’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초석인 십자가 신앙을 일상 안으로 끌어들였다. 기독론이 현실에서 거리가 먼 도그마에 머무는 게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삶에서 그 구체성을 얻게 된 셈이다. 성서텍스트와의 영적인 교감이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설교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설교를 진행시키기 힘들다. 그들은 무조건적인 섬김과 봉사의 당위성만 강조할 뿐이지 성서와 신학의 깊이에서 해석해내지 못한다.
김 목사는 이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청중들의 결단을 요청한다. 믿음이 연약해서 섬김을 받을 수밖에 없거나 생활환경 때문에 봉사하기 힘들 분들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 믿음의 단계에 올라선 사람들은 대야와 수건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해야 한다. 그는 아래와 같이 강력한 메시지로 설교를 맺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마음을 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니까? 식탁에 앉아 받아먹기만 하지 말고,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고, 대야를 들고, 다른 사람의 발치에 무릎을 꿇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니까? 혹시 이 말씀이 오늘, 바로 여러분을 향해 주시는 말씀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대야와 수건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대야와 수건을 무엇에 쓰시렵니까?
“대야와 수건”이라는 설교의 신학적 착상도 착상이려니와 김 목사가 그 주제를 끌고나가는 힘이 필자에게 느껴졌다. 그는 청중들이 알아듣도록 설교할 줄 아는 사람이다. 기독교 신앙의 상식을 밋밋하게 읊조리거나, 또는 반대로 선정적으로 강요하는 게 아니라 청중들이 스스로에게 설득당할 수 있도록 설교한다는 말이다. 이런 힘은 단지 사람을 설득할 줄 아는 기술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영성의 문제이다. 김 목사는 영적인 현실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사람답게 성서텍스트와 창조적인 차원에서 대화할 줄 알고, 그런 대화를 청중들과 다시 나누고 있다. 이건 누구에게서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니, 한분에게서만 배울 수 있을 뿐이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바로 그분이다. 그분은 창조의 영이기에 우리에게 창조적인 설교의 능력까지 허락하신다. 이런 능력을 필자는 김 목사의 설교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영적 현실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앞에서 설교자가 영성의 깊이에 들어갔는지 판단할 수 있는 관점을 두 가지로 살펴보겠다고 했다. 첫째는 영적 통찰력이며, 둘째는 영적 삶이다. 이제 두 번째의 관점을 검토할 차례이다. 이는 김 목사의 설교가 영적인 삶과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김 목사는 영적인 현실을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 경험한, 그리고 그렇게 되려고 절치부심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그런 경험을 설교에 담아내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 더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에 희망을 두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결단까지 철저하게 부정하고 오직 예수의 영에 사로잡히는 삶을 추구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저를 좀 더 오래, 좀 더 깊이, 좀 더 넓게, 좀 더 철저하게 다스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그 환경 안에 머물러 있도록 하는 데 제 의지는 사용되어야” 한다고 고백한다. 그래야만 주의 영에 의해서 변화되고, 변화되는 만큼 세상이 새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롭게 보인다는 것은 “육안(bodily eyes)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보지 못하던 실체(reality)를 본다.”는 것이다. “마음의 눈(eyes of heart) 혹은 영안(spiritual eyes)으로 보아야만” 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고, 그럴 때 참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자신들도 김 목사가 설명하는 영적인 삶을 산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목회하고 설교하며, 그런 경험이 있다고 말이다. 그런 분들이 많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여기에도 조금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누구나 사과를 맛있게 먹을 수는 있지만, 그 맛을 깊이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맛을 음미할 뿐만 아니라 사과라는 사물의 우주론적 깊이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더더구나 많지 않다. 한 알의 나락에서 우주의 신비를 깨닫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기독교 영성에 관해서 누구나 말하지만 그것의 깊이로 치고 들어가서 실제 삶에서 경험하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김 목사가 영적 현실을 얼마나 심층적이고 실질적으로 인식하며 경험하고 있는지 전달하기 위해서 아무래도 김 목사가 전하는 경험을 예로 들어야겠다. 2005년 성탄절에 김 목사는 자신이 담임으로 있는 교회의 장로부터 다음과 같은 부탁을 받았다. 친구의 딸이 8년 이상 뇌사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이제 의료장치를 제거하려고 하는데 와서 기도해 줄 수 있느냐, 하는 부탁이었다. 그는 병원으로 가면서 그 아가씨가 비록 뇌사 상태에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영적 존재라면 육신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의사소통이 가능하리라 보고 그는 “뇌사 상태에 빠져있는 환자에게 단순한 의식(mere ritual)을 치르러” 가는 게 아니라 아직 “살아있는 영혼과 대화하러” 그곳에 간다고 다짐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저를 사용하시어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옵소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저를 도구로 사용하소서.” 병원에 도착한 김 목사는 눈을 감고 의료장치를 제거하기 직전의 환자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Heather, 나는 당신이 지금 제 말을 듣고 있음을 압니다. 당신은 너무 오래 고생했습니다. 이제 충분합니다. 이제 모든 것을 놓고 가십시오. 당신의 뒤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의지하십시오. 그분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당신을 하나님께 던지십시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믿고 맡기십시오.
김 목사는 아가씨의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성호를 세 번 긋고,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받아 주시기를 빌었다. 기도 후에 가족들은 환자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이 병실을 나가는 동안 김 목사가 다시 아가씨 곁으로 다가가서 보니, 그 아가씨의 오른쪽 눈이 약간 열리고 눈물이 가득 고여 밖으로 흘러나왔다고 한다. 그는 “보십시오, Heather가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고 외쳤다. 다른 사람은 그 장면을 못 보았지만 어느 권사 한분은 보았다. 그는 이 경험을 이렇게 맺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냉철하게,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려고 힘썼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저는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제가 세상과 인간을 육안으로만 보고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제게 참된 실재를 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뇌사 상태에 있는 사람의 영적 차원을 믿도록 은총을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만일 제가 육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고, 그곳에서 그냥 사무적으로(officially) 의식(ritual)을 집행하고 말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믿음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위의 체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김 목사는 우연하게 일어난 생리적인 현상을 영적인 현상으로 보는 극단적 신비주의자 아닐까, 하는 질문도 가능하다. 이러한 질문들은 여기서 무의미하다. 신비를 빼놓고는 기독교 영성을 말할 수 없다. 도대체 신비 아닌 생명현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창조 행위 중에서 신비 아닌 게 어디 있단 말인가. 필자는 김 목사가 삶의 표면에 머물지 않고 영적인 현실이라고 말하는 그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기 위해 용맹정진하고 있다고 본다. 위의 경험도 그중의 하나이다. 이에 반해서 우리는 생명을 깊은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영적 시각이 턱없이 부족하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예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니고데모처럼 표면적인 세계에만 갇힌 채 중층적인 영적 현실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거꾸로 어떤 이들은 영적 현실을 주술적으로만 받아들인다. 김 목사는 말짱한 정신으로 영적 현실의 존재론적 신비를 뚫어보며 실제의 삶에서 경험하면서, 그것을 청중들에게 전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명실상부하게 영성 설교자로 불릴 만하다. 한국어를 쓰는 설교자들 중에서 영성 설교자로 불릴 분들이 많지 않은데, 그런 이들 중에서도 그는 독보적이다.
이제 필자의 관심은 깊은 영적 통찰력과 체험을 함께 확보하고 있는 김 목사의 영성이 어떤 성격인가 하는 점이다. 영성이면 영성이지 거기에 성격을 부여할 수 있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런 구분이 이상하면 영성을 신앙이라는 단어로 바꿔서 생각하면 된다. 구원도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으로 구분해서 볼 수 있듯이 영성도 역시 여러 지평과 성격으로 구분될 수 있다. 아쉽지만 이 글은 김 목사의 영성 자체를 논하는 게 아니기도 하고, 이를 위해서는 또 하나의 다른 장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는 밑그림으로만 말하겠다.
필자는 그의 설교를 접하면서 그의 깊은 영성을 맛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어느 쪽으론가 약간 치우쳤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가 말하는 영성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현재적인 차원이 강하다. 전체적으로 실존적인 성격이 강하다. ‘일상의 영성’이라고 불러도 좋다. 창조, 칭의, 종말마저 거의 실존적 차원으로 떨어져버린다. 예컨대 종말도 현재적, 또는 실현된 종말의 시각만 강조될 뿐이지 우주론적이고 미래적인 종말은 약화된다. ‘지금 여기서’ 그것에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5월28일)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 사람답게 사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삶의 변화를 강력하게 요청한다. 물론 그 변화가 도덕적인 데 머무는 게 아니라 영적인 차원을 가리키겠지만 말이다. 나는 삶의 변화가 기독교 신앙에서 그렇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인지 약간 다르게 생각한다. 예수가 전한 ‘임박한 하나님 나라’는 변화된 삶으로의 요청이라기보다는 무조건적인 수용과 초청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실존적인 변화보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가 상위라고 생각하는 나는 가능한 신자들의 변화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만 설교하려고 노력한다.
영성의 성격에 관한 위의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트집잡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겠다. 여러 가지 여건상 충분하게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이 문제는 단순히 영성을 바라보는 신학적 차이에만 머물지 않고 설교구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하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영성의 신학적 성격과 연관해서 그의 설교형식에 드러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두 가지만 짚어야겠다.
요한복음 연속설교에 관해서
우선 필자는 김 목사가 주일공동예배에서 요한복음을 본문으로 연속설교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교회에 부임할 때(2005년 7월)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요한복음을 본문으로 설교한다. 그는 전임자가 이미 요한복음 연속설교를 시작했기 때문에 신앙의 연속성을 위해서 요한복음을 설교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의 신학에서 나온 선택이다.
김 목사는 전체적으로 요한복음 연속설교를 진행하면서 부분적으로 또 다른 방식의 연속설교를 병행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4월23일 주일부터 “다빈치코드 제대로 보기”라는 제목으로 4회에 걸쳐서 연속설교를 했다. 앞에서 인용한 설교 “대야와 수건”은 6회로 이어졌다. 1월22일부터 5회에 걸쳐 “새해에 받은 말씀”이라는 씨리즈 설교를 했다. 2007년에도 1월7일부터 5회에 걸쳐서 “새해에 받은 말씀”으로 설교했으며, 5월13일부터 4회에 걸쳐서 “가정을 생각하다”는 설교를 했다. 이런 연속설교 형태에서 교회력은 파괴된다. 몇몇 중요한 교회력이 설교에서 언급되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유명무실하다. 2005년 12월25일 성탄절에 김 목사는 요한복음 연속설교인 생명의 복음(40) “낮아져야 보인다.”는 제목으로 시각장애인 이야기(요 9:13-41)를 본문으로 설교했다. 물론 예수 탄생을 목격한 목자 이야기(눅 2:8-20)를 병행본문으로 삼고 있지만 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2007년 5월27일 성령강림절에도 그는 가정을 주제로 연속설교를 했다.
김 목사가 교회력을 허물면서까지,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반복적으로 연속설교에 기울어지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그는 지금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다. 청중들을 하루빨리 자신과 같은 영적 경지에 오르게 하고 싶은 심정으로 요한복음을 집중적으로 설교하는 것 같다. 물론 다른 성서를 본문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김 목사의 영성이 그대로 드러나겠지만 요한복음은 이런 작업에서 훨씬 효율적이다. 나는 설교자 개인의 영성보다는 기독교 2천년의 역사적 영성에 의존하고 싶다. 나에게 중요한 것을 전하는 게 아니라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중요하다고 본 것을 전하고 싶다는 말이다. 기독교 영성의 역사성은 교회력과 긴밀히 연결된다. 개인과 교회 공동체가 건강한 영성을 확보하는데 최선의 영적 양식이 골고루 차려진 밥상이 곧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 아닌가. 거기에 의존할 때 설교자 자신도 미처 포착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청중들의 영성을 이끌어가지 않겠는가.
둘째, 김 목사에게는 어떤 본문을 택하든지 기독교 영성의 근본에서 벗어나지 않고 설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본문을 통해서 영적인 현실을 청중들에게 내놓는다. 그건 그의 탁월한 능력이다. 다만 그것이 필자에게는 지나쳐 보인다. 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 영성의 깊이를 청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교회력에 의한 성서일과를 간과할 정도로 과도하다는 말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나도 마음만 먹는다면 요한복음 1장1절을 본문으로 기독교 영성의 근본에서 벗어나지 않은 설교를 52주 동안 계속할 수 있다. 필자가 주일공동예배에서 교회력에 따른 본문으로 설교하는 이유는 성서본문 자체가 내 설교보다 훨씬, 아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성서만을 수년에 걸쳐서 연속적으로 설교하는 것은 설교자가 아무리 중심을 잘 잡는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영적 편식이 아니겠는가.
예화사용에 관해서
또 하나의 다른 문제는 예화에 관한 것이다. 김 목사도 한국교회 강단에서 예화의 남용이 몰고 오는 폐해를 잘 알 고 있을 것이다. 진부성, 선정성, 일반화의 오류는 심각하다. 이에 반해서 김 목사의 예화는 이런 문제점들로부터 분명히 자유롭다. 그가 설교에서 사용한 예화들은 영적 가치가 풍부하다. 그런데,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예화가 그의 설교에서 위험 요소로 작용할 개연성이 있다. 그의 예화가 빛나면 빛날수록 그의 설교에서 성서텍스트가 가려진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하는 말이다. 아무리 깊은 영성을 담았다고 하더라도 예화가 성서텍스트를 압도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 아니겠는가.
3월12일 설교에서 그는 세 아이를 모두 선천성 불치병으로 잃은 매리 매나치(Mary Manachi)라는 여자 이야기를 무려 200자 원고지 20매 분량으로 소개했다. 4월2일 설교에서는 젊은 시절에 예수 믿던 아내를 반대하다가 결국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 와싱톤한인교회 정재성 장로 이야기가 상당히 자세하게 언급되었다. 6월4일에는 ‘사영리’로 직장상사를 전도한 이택수 집사의 간증을 7분짜리 동영상으로 보여주었다. 2007년 4월8일 부활절에 행한 34분짜리 설교에서 그는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존 에드워즈의 부인인 엘리사벳의 인터뷰를 5분 동안, 그 뒤로 이어지는 다른 예화까지 합해서 11분 동안 이야기 했으며, 설교 마지막까지 엘리사벳 이야기는 간간이 이어졌다. 그 다음 주일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신성인의 모범을 보인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 이야기를 비슷한 길이로 전했다.
필자의 생각에 설교에서 가능한 예화나 간증을 사용하지 않거나, 어쩔 수 없는 경우라 한다면 가급적 간단하게 처리해야 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한 대로 그런 감동적인 예화들이 청중들의 영혼에 강렬한 영향을 끼치면 끼칠수록 성서텍스트의 세계는 축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은 투르나이젠의 충고는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한다.
설교는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이 행해지는 사건이다. 따라서 강단 위에서 다른 사람의 것이거나 자신의 것이거나 불문하고 생활체험이나 신앙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 두자. 설교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인식, 하나님의 선포가 행해져야 한다.(Eduard Thurneysen, Die Aufgabe der Predigt, 102. 루돌프 보렌, 설교학실천론, 139에서 재인용, 필자가 문맥에 따라 조금 고쳐 적었음)
김 목사도 투르나이젠의 충고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리라 본다. 다만 자신이 소개하는 예화는 영성의 진수가 담겨 있기 때문에 성서텍스트의 주제를 훨씬 분명하게 드러내는 도구일 뿐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대목은 필자가 일방적으로 글을 쓰는 방식으로는 접점을 찾기 힘들 테니 이것으로 정리하는 게 낫겠다. 다른 한편으로 설교에 관한 김 목사의 아래와 같은 정확한 진술을 전제한다면 필자의 이런 지적은 사족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혜량을 바란다.
우리 한국 교회는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인양 설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설교자의 능력 부족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서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에 생깁니다. 설교자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 겁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성경 말씀에 엮어 설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는, 그분의 이름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형국입니다. 그로 인해 교회는 날로 타락해 가고, 하나님의 영광은 날로 더렵혀지고 있습니다.(1월22일)
필자는 김 목사의 설교에서 많은 걸 배우기도 했고, 도전받기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준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많았다. 정말 오랜만에 시간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으로 그의 설교를 접한 것 같다. 전업설교자로 나선지 채 4년이 안된 김 목사의 설교는 아직 완성된 게 아니긴 하지만 독자적인 영성설교의 길을 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일가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그의 설교는 젊은 설교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토마스 아 켐피스의 설교를 읽고 깊은 영성을 배우듯이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 김 목사의 설교를 그렇게 읽을 날이 오리라 기대한다. (기독교사상, 7월호)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설교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어떻게 하면 신앙의 깊이를 담아내면서도 대중적인 설교를 할 수 있는가에 관심이 크다. 그런데 신앙적 깊이와 대중성은 흡사 두 마리 토끼와 같아서 동시에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신앙의 깊이가 있는 설교는 대중성이 떨어지고, 대중성이 강한 설교는 신앙의 깊이가 없다. 예외적인 경우가 없진 않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이 두 요소를 무조건 대립적으로만 볼 필요도 없다. 기독교의 복음이 진리라고 한다면 이 두 요소가 만날 수 있는 지점이 분명히 있지 않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그 지점은 기독교 영성이다. 설교자가 기독교 영성의 깊이로 들어간다면 그의 설교는 신앙의 깊이를 담는 것은 물론이고, 상당한 정도의 대중성까지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삶에서만 참된 만족을 얻는다는 데에 있다. 많은 설교자들은 자신의 설교가 당연히 영성에 토대한다고 주장하겠지만 과연 자신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에 들어갔으며, 또한 그것을 실제로 누리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질문해야 한다. 겉으로 기독교적인 형식을 따르고 성서 언어를 전달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설교자가 영성의 깊이에서 설교한다는 사실을 담보해주지는 않는다. 오늘 필자는 바로 이 문제, 즉 영성이 깊은 설교가 무엇인지, 거꾸로 영성이 없는 설교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영성이 별로 깊지 못한 필자에게 이 작업이 너무 과중할지 모르겠으나 힘닿는 데까지 가볼 생각이다. 이 작업을 위해서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이하 ‘김 목사’)의 설교보다 더 적합한 설교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 그 이유를 몇 가지로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기도의 사람
첫째, 김 목사는 오랫동안 기도에 천착한 사람이다. 기독교 영성을 언급할 때 기도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없는 것 아닌가. 김 목사가 펴낸 <사귐의 기도>(2002년,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이하 ‘사귐’)는 그의 기도 영성이 얼마나 진지하고 체험적이고 실질적인지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그는 모태신앙으로 살아왔다. 어릴 때부터 주일을 지키지 않은 적이 한 번밖에 없을 정도로 모범적인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결국 목사가 되어 설교하고, 신학자가 되어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을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채워지지 않는 ‘무엇’을 느꼈다고 한다. 그것은 곧 자신에게 부족한 영성생활이었으며, 그리고 영성생활의 핵심은 기도였다.
유학 시절부터 영성은 내 연구의 주요 주제로 자리 잡았다. 특히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위대한 영성가들의 글이나 전기를 읽으며 해답을 찾았다. 나는 영성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기도에 천착했다. 수십 년 동안 한다고 해 보았지만 나는 언제나 기도가 어려웠다. 그래서 기도의 대가들이 기록한 책을 읽으면서 길을 찾았다.(사귐 10)
목사의 삶이라는 게 원래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데, 김 목사의 기도생활만 그렇게 특별한 건 아니지 않는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 필자는 기도행위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영성을 말하는 중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기도생활과 영성의 깊이로 들어가려는 김 목사의 기도생활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말 그대로 기도행위라고 한다면 후자는 기도영성이다. 이러한 기도영성이 열매를 맺어 김 목사는 2004년에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직접 읽고 묵상할 수 있는 <사귐의 기도를 위한 기도선집>(한국기독학생출판부)을 묶어 냈다. 그 책은 동서고금을 망라한 여러 영성가들의 주옥같은 기도문을 무려 623쪽에 빼곡히 담고 있다. 필자는 위의 두 책을 읽으면서 기도를 향한 김 목사의 신앙적 진정성을 흠뻑 맛볼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영성의 진수가 아니고 무엇이리요.
둘째, 김 목사가 제시하는 기독교 영성은 신학적 통찰력에 근거한다. 이것이 영성과 설교의 관계를 설명해야 할 필자가 김 목사의 설교를 다루게 된 핵심 요소이다. 한국교회는 기독교 영성을 신학과는 별개의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는 큰 착각이다. 이런 착각은 목회자만이 아니라 신학자들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그들은 영성은 실천적이고 신비적인 반면에 신학은 이론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다. 영성은 기본적으로 영적 현실성(spiritual reality)과 일치하는 경험이나 능력이라는 점에서 설교와 신학의 동일한 토대이다. 영적 현실성을 경험하지 못한 신학자는 신학의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에 불과하며, 마찬가지로 영적 현실성을 경험하지 못한 목회자와 설교자는 신앙의 정보를 선전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김 목사는 한국교회의 이런 이원론적 시각과 그 한계를 넘어서 신학과 신앙의 일치를 견인하는 설교자이다. 아래와 같은 진술에 귀를 기울어보시라.
시간이 흐른 후, 교회 지도자들이 신학 이론을 정립하려고 했을 때, 그들은 이름을 알지 못할 보통 사람들의 일치된 고백을 자료로 삼아 정리했을 뿐입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신학이 먼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과 고백이 먼저 옵니다. 신학은 체험과 고백을 해석하고 정리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이 신앙의 현장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위험해지는 것입니다.(2006년 5월14일 설교 중에서. 이하 월일만 기재하며, 특별한 단서가 없으면 모두 2006년을 가리킨다.)
조직신학을 공부한 필자는 성서신학자인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기독교 교리와 신조로부터 기독교 신앙이 출현한 게 아니라 신앙 경험으로부터 교리가 나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예컨대 바울은 부활의 예수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론을 전개했지, 부활론으로부터 부활의 주님을 경험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리와 신조가 무의미하다는 게 결코 아니다. 그 교리와 신조가 신앙경험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며 진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제 다시 오늘의 신앙경험을 해석하는 준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신앙경험과 신학은 해석학적으로 순환한다. 이런 순환의 중심에는 바로 기독교 영성이 자리한다. 건강한 영성은 신학적 사유 안에 한정되지 않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신학적 조명을 받아야 한다.
셋째, 필자는 김 목사의 삶과 신앙에서 깊은 파토스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곧 그의 영성이 온 몸을 던지는 실존적 투쟁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따라가기 힘든 김 목사의 높은 영적 경지라고 생각한다. 그는 약관의 나이로 1992년부터 협성대학교 신약신학 교수로 10년 동안 재직했다. 누구나 부러워할 그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그는 2003년에 미국인들로 구성된 뉴저리 벨마 연합감리교회 담임 목사로 갔다. 지금은 2005년 7월부터 와싱톤한인교회 담임 목사로 있다. 그는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일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다.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 자신의 몸을 쳐 복종케 한 바울처럼(고전 9:27) 그는 끊임없이 자기 영혼을 다그치고 있다. 목사가 연봉에 연연해하지 말아야한다는 아래와 같은 그의 진술은 빈말이 아니리라.
선한 목자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가 연봉을 따라 직장을 전전하고, 그 돈값의 차이에 따라 일희일비하고, 오직 돈을 많이 버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우리는 삯꾼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사례비를 위해 일한다면 그리고 그 사례비를 따라 교회를 전전한다면, 우리는 삯꾼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혹은 교회에서 일하면서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정을 바라거나 혹은 권력이나 감투를 얻을 요량으로 일한다면, 우리는 삯꾼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3월26일)
위와 같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문제는 ‘누가’ 하는가에 따라서 그 무게가 달라진다. 필자는 김 목사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위의 말은 우주와 같은 무게를 담고 있다고 본다. 그는 이미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2003년,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에서 교회 안에 깊숙이 뿌리를 내린 천박한 자본주의와 일전을 치룬 적이 있다. 그는 ‘깨끗한 부자’를 어불성설로 보고, 청부론자들의 주장을 배격했다. 이런 대목에서 그는 래디컬하다. 겉으로 조용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그의 내면은 용암처럼 끓고 있다. 이런 파토스는 영적 설교의 동력이다.
영성목회
넷째, 위에서 필자가 열거한 세 가지 요소들은 이제 그의 목회에 그대로 녹아든다. 그는 자신의 목회를 ‘영성목회’라 이름을 붙였다. 전업 목회자로 나선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그는 지금 실험적인 목회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어떤 목회에선들 영성이 없으랴마는 김 목사는 좌고우면 없이 한 가지 길을 간다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가 생각하는 영성 목회가 무엇인지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2006년 12월31일 주일 설교에서 그는 2007년 목회 방향을 제시하면서 영성목회(contemplative ministry)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약간 길지만 김 목사의 목회와 설교의 영적 차원을 이해하는데 놓쳐서는 안 될 대목으로 보고, 여기 발췌 방식으로 인용한다.
‘영성 목회’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적 성장을 위해 계획 되고 추진되는 목회’(ministry planned and conducted to help the congregation grow spiritually)를 말합니다.
이런 까닭에 영성 목회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 일에 더 의식적으로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것입니다. 영성 목회의 성패는 우리 교회에 속한 교우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성장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왜 영적인 성장이 목회의 초점이 되어야 하느냐?’고 묻고 싶으십니까? 왜냐하면 인간 존재의 본질이 영성(spirituality)에 있기 때문이며, 한 개인의 전인적인 변화가 영적 성장(spiritual formation)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며, 개인의 영적 성장은 곧 사회의 변혁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영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자는 말은 다른 모든 차원을 외면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영성 목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의 변화와 그로 인한 사회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총체적 변화의 출발점이 바로 개인의 영성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성 목회의 비전은 이렇게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큰 것을 이루고, 내면에서부터 시작하여 외면에 이르며, 예배와 기도로부터 시작하여 일상의 모든 삶에 이르고, 개인에서부터 시작하여 사회 전체에 이르는 변화를 목표로 삼습니다. 그런 거대한 비전을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적 성장을 위해 힘을 쏟는 것이 영성 목회입니다.
필자가 위에서 설명한 네 가지 요소는 독립적인 게 아니다. 기도, 신학적 통찰력, 신앙과 삶의 파토스, 영성목회는 김 목사의 신앙 안에서 서로 맞물려 있다. 기도는 신학적 통찰력을 가능하게 하며, 거기서 삶의 파토스가 발생하고, 그 결과로 그는 영성목회를 지향하게 된다. 영성목회는 다른 세 가지 요소들을 그 안에 담고 있다.
이런 정도의 그림만으로도 우리는 그의 설교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리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는 교회성장이나 신자들의 계몽이 아니라 오직 영적인 세계로 인도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설교의 초점을 놓는다. 모든 설교자들이 그런 자세로 설교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옳은 것만도 아니다. 신자들의 영적 성장이 아니라 종교 기능인을 목표로 하는 설교도 많다. 이걸 구분하기는 쉽지 않지만, 전혀 구분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진짜 보석과 가짜 보석을 구분하는 능력을 키우려면 진짜 보석을 집중해서 보아야 한다는 말에 의지해서,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김 목사의 설교를 검토하겠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여, 잠시만이라도 필자에게 영분별의 은사를 허락해주소서.
성서의 말걸음
필자는 김 목사가 와싱턴한인교회에서 2006년 1월1일 주일부터 12월31일 주일까지 주일공동예배에서 행한 설교 47편을 꼼꼼히 읽었으며, 필요한 대목은 동영상으로 보고 들었다. 2007년 1월7일 주일부터 6월3일 주일까지의 설교는 필요한 곳만 선정해서 읽고 듣고 보았다. 앞에서 소개한 그의 세권의 저서도 참조했다. 이런 정도로 김 목사의 설교와 그의 삶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오늘 우리의 중심 주제는 영성과 설교이다. 모든 설교자들이 제각각으로 영성을 말하고 있는 마당에 한 설교자가 영성의 깊이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어려운 이유는 영성이 어떤 하나의 실증적인 형태나 사건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바람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성령과의 관계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데에 놓여 있다. 아무도 영성을 범주화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필자는 조심스럽게 어떤 관점을 가능한대로 정확하게 제시하려고 한다. 그것은 두 가지 관점인데, 하나는 영적인 통찰력이며, 다른 하나는 영적인 삶이다. 이를 다시 개념 용어로 정리한다면 전자는 영성의 존재론이며, 후자는 영성의 행위론이다. 이 두 가지는 구분되기는 하지만 나누일 수는 없다. 영성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한 사람은 당연히 영적인 삶을 살아갈 것이며, 영적인 삶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성에 존재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두 관점에서 볼 때 김 목사의 설교는 어떤가?
김 목사의 설교를 따라가면서 필자는 많은 영적 통찰력을 배웠다. 그것을 여기서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다. 다만 김 목사가 성서텍스트와 영적인 대화의 길에 들어섰다는 사실에서 그의 영적인 통찰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서가 영적 깊이에서 말하는 걸 듣는 것이 설교자에게는 가장 중요하기도 하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 유명한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눅 10:38-42)에 대한 김 목사의 설명에서도 이런 부분이 잘 드러난다. 우리는 예수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마리아를 칭찬하고, 부엌일로 분주한 마르다를 책망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 목사는 말씀을 듣는 일과 봉사하는 일의 차이를 두지 않는다. 예수의 책망은 마르다가 말씀을 듣지 않고 봉사했다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의 봉사를 내세우려는 데에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지 전심을 다해 그 일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경계하고, 그 마음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예배는 좋은 몫이고, 주차 봉사는 덜 좋은 몫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좋은 몫이고, 주방에서 음식 준비하는 것은 덜 좋은 몫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은 좋은 몫이고, 청소하는 것은 나쁜 몫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서 전심으로 섬기는 한, 모두가 다 ‘좋은 몫’이 됩니다.(9월3일)
독자들은 여기서 영적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설교자가 성서를 주관적으로 해석하거나 알레고리로 해석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영적인 해석은 신학적인 해석이다. 영적인 통찰력은 곧 신학적 통찰력이다. 이런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는 창조적인 해석의 단계로 들어갈 수 있으며, 동시에 그런 해석은 당연히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것은 곧 시인이 언어가 말거는 것을 경험하는 것처럼 설교자가 성서의 말걸음(Anrede)을 경험하는 사건이다. 이런 경험이 주어진 사람은 종교적 권위에 의존하거나 과도한 수사학에 기울어지지 않고, 세상을 창조한 ‘다바르’, 그리고 역사 이전의 태초로부터 존재한 ‘로고스’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잠시 오늘의 설교학에 관해 한마디 하는 걸 용서하시라. 오늘의 설교학은 설교자와 청중의 소통에만 너무 기울어진 게 아닐는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데만 마음을 두고 있는 게 아닌지. 내러티브, 스토리텔링, 청중중심, 소비자중심, 눈높이 등등, 이런 용어들은 모두 설교자와 청중의 소통만을 문제 삼는 것들이다. 필자의 생각에 그것보다 더 시급하고 본질적인 것은 설교자와 텍스트와의 소통이다. 성서텍스트와 대화할 줄 모르는 설교자에게 청중과의 대화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서, 텍스트와의 소통이 일어난다면 내러티브, 스토리텔링 같은 방법은 아예 필요조차 없다. 그래도 대중 전달방법을 잘 알면 좋지 않으냐 하고 주장할 분들이 있겠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설교자가 전달방법에 마음을 쓰기 시작하면 성서텍스트와의 소통에는 마음을 닫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몇 가지 대중전달 기술로 청중들의 영혼이 쉽게 움직이는 마당에 굳이 성서텍스트의 놀라운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고된 일에 나설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서텍스트를 해석하는 행위인 설교는 진리의 차원이지 방법의 차원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김 목사가 어느 특정한 성서본문을 나름의 영적 시각으로 독특하게 해석할 줄 안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청중들을 성서텍스트의 깊이로 끌어들일 줄 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건 대중전달의 수사학이 아니라 성서텍스트의 영적인 깊이로 들어간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존재론적 능력이다. 김 목사의 설교 한편을 선택해서 구체적으로 따라가 보자.
“대야와 수건”
8월27일에 행한 “대야와 수건”이라는 제목의 설교는 예수가 유월절 전날 저녁에 제자들의 발을 씻긴 다음에 주신 말씀인 요한복음 13:12-20절을 본문으로 한다. 김 목사는 설교 초입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받아들인 십자가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은 그 사형의 끔찍스러움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하는 질문으로 인해서 지적인 충격까지 주었다고 한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는 말은 일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요청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에서 그렇게 순교하지는 못한다. 십자가의 일상화는 ‘대야와 수건’이라는 상징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 식사를 나누던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기 위해 사용했던 대야와 수건은 십자가와 같은 의미를 전하는 상징이기는 하지만, 십자가보다 훨씬 일상적이고 사소하고 친근해 보입니다. 십자가는 한 번 지고 죽으면 끝나는 것이지만, 대야와 수건은 매일같이 필요한 물건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에, 대야와 수건은 안성맞춤입니다.
김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대야와 수건’이라는 메타포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흑백논리를 극복할 수 있게 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수도사가 되든가, 아니면 세속주의자가 되든가, 두 가지 대안밖에 모른다. 그들은 ‘시장 통의 수도자’로 사는 가능성을 내다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아가려면 매일, 매순간 고민하고 기도하고 반성하고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야와 수건’은 교묘한 자기합리화로 복음의 요청을 피하려는 이런 흑백논리를 무너뜨린다.
대야와 수건을 항상 준비해 두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단지,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요청하시는 것은 그 대야와 수건으로 서로의 발을 씻어주라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언제라도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하여 발을 씻어 주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면 별로 어렵지 않게, 영웅적인 용기가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일상에서 남을 섬기기 위한 대야와 수건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지식일 수 있고, 또는 권력이나 재능일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좋은 것이든지 나쁜 것이든 무엇이나 이웃을 위한 대야와 수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대야와 수건’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초석인 십자가 신앙을 일상 안으로 끌어들였다. 기독론이 현실에서 거리가 먼 도그마에 머무는 게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삶에서 그 구체성을 얻게 된 셈이다. 성서텍스트와의 영적인 교감이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설교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설교를 진행시키기 힘들다. 그들은 무조건적인 섬김과 봉사의 당위성만 강조할 뿐이지 성서와 신학의 깊이에서 해석해내지 못한다.
김 목사는 이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청중들의 결단을 요청한다. 믿음이 연약해서 섬김을 받을 수밖에 없거나 생활환경 때문에 봉사하기 힘들 분들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 믿음의 단계에 올라선 사람들은 대야와 수건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해야 한다. 그는 아래와 같이 강력한 메시지로 설교를 맺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마음을 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니까? 식탁에 앉아 받아먹기만 하지 말고,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고, 대야를 들고, 다른 사람의 발치에 무릎을 꿇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니까? 혹시 이 말씀이 오늘, 바로 여러분을 향해 주시는 말씀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대야와 수건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대야와 수건을 무엇에 쓰시렵니까?
“대야와 수건”이라는 설교의 신학적 착상도 착상이려니와 김 목사가 그 주제를 끌고나가는 힘이 필자에게 느껴졌다. 그는 청중들이 알아듣도록 설교할 줄 아는 사람이다. 기독교 신앙의 상식을 밋밋하게 읊조리거나, 또는 반대로 선정적으로 강요하는 게 아니라 청중들이 스스로에게 설득당할 수 있도록 설교한다는 말이다. 이런 힘은 단지 사람을 설득할 줄 아는 기술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영성의 문제이다. 김 목사는 영적인 현실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사람답게 성서텍스트와 창조적인 차원에서 대화할 줄 알고, 그런 대화를 청중들과 다시 나누고 있다. 이건 누구에게서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니, 한분에게서만 배울 수 있을 뿐이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바로 그분이다. 그분은 창조의 영이기에 우리에게 창조적인 설교의 능력까지 허락하신다. 이런 능력을 필자는 김 목사의 설교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영적 현실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앞에서 설교자가 영성의 깊이에 들어갔는지 판단할 수 있는 관점을 두 가지로 살펴보겠다고 했다. 첫째는 영적 통찰력이며, 둘째는 영적 삶이다. 이제 두 번째의 관점을 검토할 차례이다. 이는 김 목사의 설교가 영적인 삶과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김 목사는 영적인 현실을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 경험한, 그리고 그렇게 되려고 절치부심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그런 경험을 설교에 담아내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 더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에 희망을 두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결단까지 철저하게 부정하고 오직 예수의 영에 사로잡히는 삶을 추구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저를 좀 더 오래, 좀 더 깊이, 좀 더 넓게, 좀 더 철저하게 다스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그 환경 안에 머물러 있도록 하는 데 제 의지는 사용되어야” 한다고 고백한다. 그래야만 주의 영에 의해서 변화되고, 변화되는 만큼 세상이 새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롭게 보인다는 것은 “육안(bodily eyes)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보지 못하던 실체(reality)를 본다.”는 것이다. “마음의 눈(eyes of heart) 혹은 영안(spiritual eyes)으로 보아야만” 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고, 그럴 때 참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자신들도 김 목사가 설명하는 영적인 삶을 산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목회하고 설교하며, 그런 경험이 있다고 말이다. 그런 분들이 많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여기에도 조금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누구나 사과를 맛있게 먹을 수는 있지만, 그 맛을 깊이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맛을 음미할 뿐만 아니라 사과라는 사물의 우주론적 깊이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더더구나 많지 않다. 한 알의 나락에서 우주의 신비를 깨닫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기독교 영성에 관해서 누구나 말하지만 그것의 깊이로 치고 들어가서 실제 삶에서 경험하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김 목사가 영적 현실을 얼마나 심층적이고 실질적으로 인식하며 경험하고 있는지 전달하기 위해서 아무래도 김 목사가 전하는 경험을 예로 들어야겠다. 2005년 성탄절에 김 목사는 자신이 담임으로 있는 교회의 장로부터 다음과 같은 부탁을 받았다. 친구의 딸이 8년 이상 뇌사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이제 의료장치를 제거하려고 하는데 와서 기도해 줄 수 있느냐, 하는 부탁이었다. 그는 병원으로 가면서 그 아가씨가 비록 뇌사 상태에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영적 존재라면 육신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의사소통이 가능하리라 보고 그는 “뇌사 상태에 빠져있는 환자에게 단순한 의식(mere ritual)을 치르러” 가는 게 아니라 아직 “살아있는 영혼과 대화하러” 그곳에 간다고 다짐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저를 사용하시어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옵소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저를 도구로 사용하소서.” 병원에 도착한 김 목사는 눈을 감고 의료장치를 제거하기 직전의 환자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Heather, 나는 당신이 지금 제 말을 듣고 있음을 압니다. 당신은 너무 오래 고생했습니다. 이제 충분합니다. 이제 모든 것을 놓고 가십시오. 당신의 뒤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의지하십시오. 그분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당신을 하나님께 던지십시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믿고 맡기십시오.
김 목사는 아가씨의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성호를 세 번 긋고,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받아 주시기를 빌었다. 기도 후에 가족들은 환자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이 병실을 나가는 동안 김 목사가 다시 아가씨 곁으로 다가가서 보니, 그 아가씨의 오른쪽 눈이 약간 열리고 눈물이 가득 고여 밖으로 흘러나왔다고 한다. 그는 “보십시오, Heather가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고 외쳤다. 다른 사람은 그 장면을 못 보았지만 어느 권사 한분은 보았다. 그는 이 경험을 이렇게 맺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냉철하게,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려고 힘썼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저는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제가 세상과 인간을 육안으로만 보고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제게 참된 실재를 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뇌사 상태에 있는 사람의 영적 차원을 믿도록 은총을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만일 제가 육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고, 그곳에서 그냥 사무적으로(officially) 의식(ritual)을 집행하고 말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믿음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위의 체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김 목사는 우연하게 일어난 생리적인 현상을 영적인 현상으로 보는 극단적 신비주의자 아닐까, 하는 질문도 가능하다. 이러한 질문들은 여기서 무의미하다. 신비를 빼놓고는 기독교 영성을 말할 수 없다. 도대체 신비 아닌 생명현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창조 행위 중에서 신비 아닌 게 어디 있단 말인가. 필자는 김 목사가 삶의 표면에 머물지 않고 영적인 현실이라고 말하는 그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기 위해 용맹정진하고 있다고 본다. 위의 경험도 그중의 하나이다. 이에 반해서 우리는 생명을 깊은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영적 시각이 턱없이 부족하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예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니고데모처럼 표면적인 세계에만 갇힌 채 중층적인 영적 현실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거꾸로 어떤 이들은 영적 현실을 주술적으로만 받아들인다. 김 목사는 말짱한 정신으로 영적 현실의 존재론적 신비를 뚫어보며 실제의 삶에서 경험하면서, 그것을 청중들에게 전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명실상부하게 영성 설교자로 불릴 만하다. 한국어를 쓰는 설교자들 중에서 영성 설교자로 불릴 분들이 많지 않은데, 그런 이들 중에서도 그는 독보적이다.
이제 필자의 관심은 깊은 영적 통찰력과 체험을 함께 확보하고 있는 김 목사의 영성이 어떤 성격인가 하는 점이다. 영성이면 영성이지 거기에 성격을 부여할 수 있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런 구분이 이상하면 영성을 신앙이라는 단어로 바꿔서 생각하면 된다. 구원도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으로 구분해서 볼 수 있듯이 영성도 역시 여러 지평과 성격으로 구분될 수 있다. 아쉽지만 이 글은 김 목사의 영성 자체를 논하는 게 아니기도 하고, 이를 위해서는 또 하나의 다른 장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는 밑그림으로만 말하겠다.
필자는 그의 설교를 접하면서 그의 깊은 영성을 맛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어느 쪽으론가 약간 치우쳤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가 말하는 영성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현재적인 차원이 강하다. 전체적으로 실존적인 성격이 강하다. ‘일상의 영성’이라고 불러도 좋다. 창조, 칭의, 종말마저 거의 실존적 차원으로 떨어져버린다. 예컨대 종말도 현재적, 또는 실현된 종말의 시각만 강조될 뿐이지 우주론적이고 미래적인 종말은 약화된다. ‘지금 여기서’ 그것에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5월28일)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 사람답게 사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삶의 변화를 강력하게 요청한다. 물론 그 변화가 도덕적인 데 머무는 게 아니라 영적인 차원을 가리키겠지만 말이다. 나는 삶의 변화가 기독교 신앙에서 그렇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인지 약간 다르게 생각한다. 예수가 전한 ‘임박한 하나님 나라’는 변화된 삶으로의 요청이라기보다는 무조건적인 수용과 초청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실존적인 변화보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가 상위라고 생각하는 나는 가능한 신자들의 변화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만 설교하려고 노력한다.
영성의 성격에 관한 위의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트집잡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겠다. 여러 가지 여건상 충분하게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이 문제는 단순히 영성을 바라보는 신학적 차이에만 머물지 않고 설교구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하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영성의 신학적 성격과 연관해서 그의 설교형식에 드러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두 가지만 짚어야겠다.
요한복음 연속설교에 관해서
우선 필자는 김 목사가 주일공동예배에서 요한복음을 본문으로 연속설교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교회에 부임할 때(2005년 7월)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요한복음을 본문으로 설교한다. 그는 전임자가 이미 요한복음 연속설교를 시작했기 때문에 신앙의 연속성을 위해서 요한복음을 설교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의 신학에서 나온 선택이다.
김 목사는 전체적으로 요한복음 연속설교를 진행하면서 부분적으로 또 다른 방식의 연속설교를 병행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4월23일 주일부터 “다빈치코드 제대로 보기”라는 제목으로 4회에 걸쳐서 연속설교를 했다. 앞에서 인용한 설교 “대야와 수건”은 6회로 이어졌다. 1월22일부터 5회에 걸쳐 “새해에 받은 말씀”이라는 씨리즈 설교를 했다. 2007년에도 1월7일부터 5회에 걸쳐서 “새해에 받은 말씀”으로 설교했으며, 5월13일부터 4회에 걸쳐서 “가정을 생각하다”는 설교를 했다. 이런 연속설교 형태에서 교회력은 파괴된다. 몇몇 중요한 교회력이 설교에서 언급되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유명무실하다. 2005년 12월25일 성탄절에 김 목사는 요한복음 연속설교인 생명의 복음(40) “낮아져야 보인다.”는 제목으로 시각장애인 이야기(요 9:13-41)를 본문으로 설교했다. 물론 예수 탄생을 목격한 목자 이야기(눅 2:8-20)를 병행본문으로 삼고 있지만 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2007년 5월27일 성령강림절에도 그는 가정을 주제로 연속설교를 했다.
김 목사가 교회력을 허물면서까지,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반복적으로 연속설교에 기울어지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그는 지금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다. 청중들을 하루빨리 자신과 같은 영적 경지에 오르게 하고 싶은 심정으로 요한복음을 집중적으로 설교하는 것 같다. 물론 다른 성서를 본문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김 목사의 영성이 그대로 드러나겠지만 요한복음은 이런 작업에서 훨씬 효율적이다. 나는 설교자 개인의 영성보다는 기독교 2천년의 역사적 영성에 의존하고 싶다. 나에게 중요한 것을 전하는 게 아니라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중요하다고 본 것을 전하고 싶다는 말이다. 기독교 영성의 역사성은 교회력과 긴밀히 연결된다. 개인과 교회 공동체가 건강한 영성을 확보하는데 최선의 영적 양식이 골고루 차려진 밥상이 곧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 아닌가. 거기에 의존할 때 설교자 자신도 미처 포착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청중들의 영성을 이끌어가지 않겠는가.
둘째, 김 목사에게는 어떤 본문을 택하든지 기독교 영성의 근본에서 벗어나지 않고 설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본문을 통해서 영적인 현실을 청중들에게 내놓는다. 그건 그의 탁월한 능력이다. 다만 그것이 필자에게는 지나쳐 보인다. 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 영성의 깊이를 청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교회력에 의한 성서일과를 간과할 정도로 과도하다는 말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나도 마음만 먹는다면 요한복음 1장1절을 본문으로 기독교 영성의 근본에서 벗어나지 않은 설교를 52주 동안 계속할 수 있다. 필자가 주일공동예배에서 교회력에 따른 본문으로 설교하는 이유는 성서본문 자체가 내 설교보다 훨씬, 아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성서만을 수년에 걸쳐서 연속적으로 설교하는 것은 설교자가 아무리 중심을 잘 잡는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영적 편식이 아니겠는가.
예화사용에 관해서
또 하나의 다른 문제는 예화에 관한 것이다. 김 목사도 한국교회 강단에서 예화의 남용이 몰고 오는 폐해를 잘 알 고 있을 것이다. 진부성, 선정성, 일반화의 오류는 심각하다. 이에 반해서 김 목사의 예화는 이런 문제점들로부터 분명히 자유롭다. 그가 설교에서 사용한 예화들은 영적 가치가 풍부하다. 그런데,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예화가 그의 설교에서 위험 요소로 작용할 개연성이 있다. 그의 예화가 빛나면 빛날수록 그의 설교에서 성서텍스트가 가려진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하는 말이다. 아무리 깊은 영성을 담았다고 하더라도 예화가 성서텍스트를 압도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 아니겠는가.
3월12일 설교에서 그는 세 아이를 모두 선천성 불치병으로 잃은 매리 매나치(Mary Manachi)라는 여자 이야기를 무려 200자 원고지 20매 분량으로 소개했다. 4월2일 설교에서는 젊은 시절에 예수 믿던 아내를 반대하다가 결국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 와싱톤한인교회 정재성 장로 이야기가 상당히 자세하게 언급되었다. 6월4일에는 ‘사영리’로 직장상사를 전도한 이택수 집사의 간증을 7분짜리 동영상으로 보여주었다. 2007년 4월8일 부활절에 행한 34분짜리 설교에서 그는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존 에드워즈의 부인인 엘리사벳의 인터뷰를 5분 동안, 그 뒤로 이어지는 다른 예화까지 합해서 11분 동안 이야기 했으며, 설교 마지막까지 엘리사벳 이야기는 간간이 이어졌다. 그 다음 주일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신성인의 모범을 보인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 이야기를 비슷한 길이로 전했다.
필자의 생각에 설교에서 가능한 예화나 간증을 사용하지 않거나, 어쩔 수 없는 경우라 한다면 가급적 간단하게 처리해야 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한 대로 그런 감동적인 예화들이 청중들의 영혼에 강렬한 영향을 끼치면 끼칠수록 성서텍스트의 세계는 축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은 투르나이젠의 충고는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한다.
설교는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이 행해지는 사건이다. 따라서 강단 위에서 다른 사람의 것이거나 자신의 것이거나 불문하고 생활체험이나 신앙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 두자. 설교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인식, 하나님의 선포가 행해져야 한다.(Eduard Thurneysen, Die Aufgabe der Predigt, 102. 루돌프 보렌, 설교학실천론, 139에서 재인용, 필자가 문맥에 따라 조금 고쳐 적었음)
김 목사도 투르나이젠의 충고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리라 본다. 다만 자신이 소개하는 예화는 영성의 진수가 담겨 있기 때문에 성서텍스트의 주제를 훨씬 분명하게 드러내는 도구일 뿐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대목은 필자가 일방적으로 글을 쓰는 방식으로는 접점을 찾기 힘들 테니 이것으로 정리하는 게 낫겠다. 다른 한편으로 설교에 관한 김 목사의 아래와 같은 정확한 진술을 전제한다면 필자의 이런 지적은 사족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혜량을 바란다.
우리 한국 교회는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인양 설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설교자의 능력 부족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서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에 생깁니다. 설교자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 겁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성경 말씀에 엮어 설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는, 그분의 이름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형국입니다. 그로 인해 교회는 날로 타락해 가고, 하나님의 영광은 날로 더렵혀지고 있습니다.(1월22일)
필자는 김 목사의 설교에서 많은 걸 배우기도 했고, 도전받기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준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많았다. 정말 오랜만에 시간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으로 그의 설교를 접한 것 같다. 전업설교자로 나선지 채 4년이 안된 김 목사의 설교는 아직 완성된 게 아니긴 하지만 독자적인 영성설교의 길을 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일가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그의 설교는 젊은 설교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토마스 아 켐피스의 설교를 읽고 깊은 영성을 배우듯이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 김 목사의 설교를 그렇게 읽을 날이 오리라 기대한다. (기독교사상, 7월호)
2007.06.30 00:16:59
외딴 님,
안녕하세요.
10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신
28세의 청년이시군요.
자신의 신앙을 솔직하게 밖으로 내놓는다는 건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길이 멀지요?
두 가지 질문이 있군요.
간단히 대답합니다.
"성경을 역사적 책이라고 믿는다."는 말도 많은 해석이 필요합니다.
나도 성서를 역사적인 책이라고 믿습니다.
그 역사가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하는 거지요.
아브라함은 역사적 실존 인물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설화를 창세기 전체 이야기로 끌어들여서
하나님 경험을 진술하고 있는
성서기자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피카소가 한국전쟁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지요?
그걸 2천년 후대의 사람들이 해석할 때
무얼 기준으로 해석해야 할까요?
피카소가 실존 인물인가 아닌가도 중요하기는 하겠지만
그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물론 아브라함과 피카소는 다른 이야기지만요.
삼위일체 하나님 경험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두번째이지요?
그런 신학개념을 어떤 사물처럼 생각하면 아무런 해답을 얻지 못합니다.
내가 다른 글에서도 자주 인용했지만
장자와 노자의 '도'를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어요.
그런나 매우 명백한 '현실'(리얼리티)랍니다.
그것을 이해한 사람들에게는 말이지요.
영, 하나님, 종말, 부활 같은 모든 신앙개념도 역시 마찬가지에요.
삼위일체는 성서와 철학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가장 정확하게 인식하려는 신학적 개념입니다.
이런 개념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손이 잡히지 않기 때문에
추상적으로 생각되겠지만
신학자들에게는 명백한 영적 세계입니다.
사실 '사랑'도 손에 잡히는 건 아니지요?
생일에 선물을 받으면 그게 사랑일까요?
거짓말로 선물을 줄 수도 있고,
선물을 주지 않아도 사랑할 수도 있지요.
그리고 그 사랑은 그 사랑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는 능력이고,
그것은 그 안에 들어간 만큼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에게 사랑이 아주 추상적이고,
그걸 왜곡하는 사람에게 사랑은 통속적으로 천박해집니다.
주의 은총이.
안녕하세요.
10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신
28세의 청년이시군요.
자신의 신앙을 솔직하게 밖으로 내놓는다는 건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길이 멀지요?
두 가지 질문이 있군요.
간단히 대답합니다.
"성경을 역사적 책이라고 믿는다."는 말도 많은 해석이 필요합니다.
나도 성서를 역사적인 책이라고 믿습니다.
그 역사가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하는 거지요.
아브라함은 역사적 실존 인물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설화를 창세기 전체 이야기로 끌어들여서
하나님 경험을 진술하고 있는
성서기자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피카소가 한국전쟁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지요?
그걸 2천년 후대의 사람들이 해석할 때
무얼 기준으로 해석해야 할까요?
피카소가 실존 인물인가 아닌가도 중요하기는 하겠지만
그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물론 아브라함과 피카소는 다른 이야기지만요.
삼위일체 하나님 경험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두번째이지요?
그런 신학개념을 어떤 사물처럼 생각하면 아무런 해답을 얻지 못합니다.
내가 다른 글에서도 자주 인용했지만
장자와 노자의 '도'를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어요.
그런나 매우 명백한 '현실'(리얼리티)랍니다.
그것을 이해한 사람들에게는 말이지요.
영, 하나님, 종말, 부활 같은 모든 신앙개념도 역시 마찬가지에요.
삼위일체는 성서와 철학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가장 정확하게 인식하려는 신학적 개념입니다.
이런 개념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손이 잡히지 않기 때문에
추상적으로 생각되겠지만
신학자들에게는 명백한 영적 세계입니다.
사실 '사랑'도 손에 잡히는 건 아니지요?
생일에 선물을 받으면 그게 사랑일까요?
거짓말로 선물을 줄 수도 있고,
선물을 주지 않아도 사랑할 수도 있지요.
그리고 그 사랑은 그 사랑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는 능력이고,
그것은 그 안에 들어간 만큼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에게 사랑이 아주 추상적이고,
그걸 왜곡하는 사람에게 사랑은 통속적으로 천박해집니다.
주의 은총이.
2007.06.30 01:53:32
목사님의 신속하고 애정어린 답변 참으로 감사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그러한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
사실 그것이 경험되는 것이라면,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저에게는 추상적일수 밖에 없었단 사실을 알겠습니다..
보수적인 교회에 있는, 제 주변 사람들은, 목사님과 표현은 다르지만 그러한 경험을 하는 것 같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회심같은것.. (이런 표현 안좋아 하시겠지만요^^;;)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이 목사님께서 경계하시는 영적 엘리트 주의로 귀결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잠시 해봅니다.. 참된 경험이 아니어서 그렇겠지만요..
꼬리에 꼬리를 물어, 드리고 싶은 질문이 너무 많지만.. 거저 먹는것 같아서.. 또 답변해주셔도 이해 못할께 뻔해서.. 물러갑니당^^;;
책좀 더보고.. 다음달 세미나서 뵙겠습니다.
동네 아저씨 같은 목사님이.. 일딴은 참 좋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그러한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
사실 그것이 경험되는 것이라면,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저에게는 추상적일수 밖에 없었단 사실을 알겠습니다..
보수적인 교회에 있는, 제 주변 사람들은, 목사님과 표현은 다르지만 그러한 경험을 하는 것 같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회심같은것.. (이런 표현 안좋아 하시겠지만요^^;;)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이 목사님께서 경계하시는 영적 엘리트 주의로 귀결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잠시 해봅니다.. 참된 경험이 아니어서 그렇겠지만요..
꼬리에 꼬리를 물어, 드리고 싶은 질문이 너무 많지만.. 거저 먹는것 같아서.. 또 답변해주셔도 이해 못할께 뻔해서.. 물러갑니당^^;;
책좀 더보고.. 다음달 세미나서 뵙겠습니다.
동네 아저씨 같은 목사님이.. 일딴은 참 좋습니다..
2007.06.30 16:26:46
정목사님 댓글을 읽던 도중 의문난점이 생겨서 질문을 드립니다.
목사님께선 성서 인물들의 존재유무(실존기록)보다는
성서 인물들의 생각과 기록에 더 초점을 두시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기독론을 놓고 보면 한가지 의문난점이 생깁니다..
바로 예수의 실존성에 관한 부분이지요
목사님과 비슷하게 바르트는 신앙고백에 의해 선포된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불트만은 고백의 그리스도가 나오기 이전의 나사렛예수(역사적예수)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알고있습니다.
비록 불트만이 역사비평의 방식을 취해 나사렛 예수를 발견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암묵적인 기독론(나사렛예수)이 있어야 명시적 기독론(고백의 예수)이 선포될 수 있다는
에벨링의 주장에 개인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저는 인물의 실존성과 인물이 행한 기록 둘다가
치우침없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제가 질문을 드리고싶은 점은 이것입니다.
만일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실존성이 기록보다 중요하지 않는다면
성서의 기록의 근거가 희미해지지 않을까요
배우는자의 입장에서 댓글을 추론하여 목사님께 질문을 드리는게 죄송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생각하고있는 부분과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부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싶은 마음에 질문을 드립니다.
목사님께선 성서 인물들의 존재유무(실존기록)보다는
성서 인물들의 생각과 기록에 더 초점을 두시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기독론을 놓고 보면 한가지 의문난점이 생깁니다..
바로 예수의 실존성에 관한 부분이지요
목사님과 비슷하게 바르트는 신앙고백에 의해 선포된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불트만은 고백의 그리스도가 나오기 이전의 나사렛예수(역사적예수)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알고있습니다.
비록 불트만이 역사비평의 방식을 취해 나사렛 예수를 발견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암묵적인 기독론(나사렛예수)이 있어야 명시적 기독론(고백의 예수)이 선포될 수 있다는
에벨링의 주장에 개인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저는 인물의 실존성과 인물이 행한 기록 둘다가
치우침없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제가 질문을 드리고싶은 점은 이것입니다.
만일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실존성이 기록보다 중요하지 않는다면
성서의 기록의 근거가 희미해지지 않을까요
배우는자의 입장에서 댓글을 추론하여 목사님께 질문을 드리는게 죄송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생각하고있는 부분과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부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싶은 마음에 질문을 드립니다.
2007.06.30 23:21:48
살군 님,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 등이 객관적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라 중요합니다.
다만 문제는 성서가 그것을 목표로 기록된 게 아니라는 데에 있지요.
예컨대 6.25 전쟁을 봅시다.
그 사건을 어느 시각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기록 방식이 달라집니다.
신문기자라고 한다면 모든 걸 가능한대로 객관적인 사실을 추적해보려고 하겠지요.
경제학자는 그것이 몰고 온 경제적 영향 같은 것에 진술의 무게를 두겠지요.
시인이라면 또 어떻게 그걸 바라볼까요?
신학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묻겠지요.
동일한 사건의 경험이지만 보기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참고적으로 황석영 선생은
<손님>에서 기독교와 마르크시즘을 타의에 의해 한민족에게 주어진 모더니티라고 하더군요.
성서는 고유한 역사해석이 있습니다.
오늘 성서를 읽는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냐, 신앙고백이냐 하는 것을 비평적으로 찾아내면서
결국은 성서기자의 관점을 찾는 게 핵심이겠지요.
성서기록의 근거가 희미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성서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뜻인가요?
그런 염려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익스피의 작품을 보고 기록의 근거가 희미해진다고 말할 사람은 없은 것처럼이요.
좋은 주일을!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 등이 객관적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라 중요합니다.
다만 문제는 성서가 그것을 목표로 기록된 게 아니라는 데에 있지요.
예컨대 6.25 전쟁을 봅시다.
그 사건을 어느 시각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기록 방식이 달라집니다.
신문기자라고 한다면 모든 걸 가능한대로 객관적인 사실을 추적해보려고 하겠지요.
경제학자는 그것이 몰고 온 경제적 영향 같은 것에 진술의 무게를 두겠지요.
시인이라면 또 어떻게 그걸 바라볼까요?
신학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묻겠지요.
동일한 사건의 경험이지만 보기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참고적으로 황석영 선생은
<손님>에서 기독교와 마르크시즘을 타의에 의해 한민족에게 주어진 모더니티라고 하더군요.
성서는 고유한 역사해석이 있습니다.
오늘 성서를 읽는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냐, 신앙고백이냐 하는 것을 비평적으로 찾아내면서
결국은 성서기자의 관점을 찾는 게 핵심이겠지요.
성서기록의 근거가 희미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성서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뜻인가요?
그런 염려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익스피의 작품을 보고 기록의 근거가 희미해진다고 말할 사람은 없은 것처럼이요.
좋은 주일을!
2007.07.01 00:46:24
충분한 이해가 되었습니다. 저 또한 성서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데에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초신자나 비기독교인을 상대하다 보면 그들은 성서가 무엇을 말하느냐 보다는
성서의 사건들이 실제일어났느냐는 객관성이나 역사성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빈번히 일어나더군요
합리적인 세계관의 여파가 지속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론 무조건 '믿어라'가 아니라
보고 듣고 만진것을 '믿어라' 가 필요할때도 있더라구요
그런데 정작 중요한건 목사님 말씀대로 성서가 무엇을 말하느냐겠지요
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목사님도 평안한 주일 보내세요!
그런데 초신자나 비기독교인을 상대하다 보면 그들은 성서가 무엇을 말하느냐 보다는
성서의 사건들이 실제일어났느냐는 객관성이나 역사성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빈번히 일어나더군요
합리적인 세계관의 여파가 지속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론 무조건 '믿어라'가 아니라
보고 듣고 만진것을 '믿어라' 가 필요할때도 있더라구요
그런데 정작 중요한건 목사님 말씀대로 성서가 무엇을 말하느냐겠지요
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목사님도 평안한 주일 보내세요!
2007.07.01 01:41:29
1. 영성 설교
2. 교회력 무시
3. 예화 사용
일전에 이재철 목사님의 설교비평에서 말씀하셨던 세가지 장단점이 김영봉 목사님에게도 거의 유사하게 드러나고 있네요.
좋아하는 저자의 설교를 꽉찬비평으로 다시 바라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2. 교회력 무시
3. 예화 사용
일전에 이재철 목사님의 설교비평에서 말씀하셨던 세가지 장단점이 김영봉 목사님에게도 거의 유사하게 드러나고 있네요.
좋아하는 저자의 설교를 꽉찬비평으로 다시 바라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07.07.01 18:02:49
미모 님,
안녕하세요?
처음이시지요?
반갑습니다.
미모 님이 끌어온 글의 출처가 갈보리교회 홈피인데,
혹시 미모 님이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신가요?
그 글에 제 비평의 칼날이 무뎌진 게 아닌가 운운하는 대목이 있군요.
사실은 무뎌진 게 아니라 원래 그랬습니다.
저는 한 분의 설교를 비평할 때 전체의 방향을 우선적으로 봅니다.
그게 괜찮으면 가능한대로 좋게 보려고 노력하고,
그게 아니다 싶으면 문제점을 더 드러내곤 합니다.
신학생들의 기말시험 논술을 평가할 때도 대개 그렇지요.
기본 방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쓸데 없이 말이 길어졌네요.
오래곤주 갈보리장로교회 홈피에 한번 들려보겠습니다.
주의 은총이.
안녕하세요?
처음이시지요?
반갑습니다.
미모 님이 끌어온 글의 출처가 갈보리교회 홈피인데,
혹시 미모 님이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신가요?
그 글에 제 비평의 칼날이 무뎌진 게 아닌가 운운하는 대목이 있군요.
사실은 무뎌진 게 아니라 원래 그랬습니다.
저는 한 분의 설교를 비평할 때 전체의 방향을 우선적으로 봅니다.
그게 괜찮으면 가능한대로 좋게 보려고 노력하고,
그게 아니다 싶으면 문제점을 더 드러내곤 합니다.
신학생들의 기말시험 논술을 평가할 때도 대개 그렇지요.
기본 방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쓸데 없이 말이 길어졌네요.
오래곤주 갈보리장로교회 홈피에 한번 들려보겠습니다.
주의 은총이.
2007.07.01 18:14:38
길벗 님은 무얼 하시는 분인지 몰라도
제가 힘들여 쓴 글을 단 몇줄로 정확하게 요약해주셨군요.
아, 글쓰기의 허무함이여!
설교비평 글쓰기를 끝내야 할 시간이
예상 외로 빨리 온다는 조짐인지.
길벗 님, 정확하게 짚어주어서
감사한 마음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재철 목사님과 김영봉 목사님의 설교 스타일이
비슷한다는 결론이 나오는군요.
과연 그런지 조금 확인해 보아야겠군요.
제가 힘들여 쓴 글을 단 몇줄로 정확하게 요약해주셨군요.
아, 글쓰기의 허무함이여!
설교비평 글쓰기를 끝내야 할 시간이
예상 외로 빨리 온다는 조짐인지.
길벗 님, 정확하게 짚어주어서
감사한 마음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재철 목사님과 김영봉 목사님의 설교 스타일이
비슷한다는 결론이 나오는군요.
과연 그런지 조금 확인해 보아야겠군요.
2007.07.12 15:19:50
여기 와서 목사님의 비평글은 학습하는 태도로 읽고, 댓글은 목사님의 성품과 인품에 빠저 읽습니다. 전 교회 집사이고 우리 교회가 이민 목회의 새로운 전형을 열어가는 일에 성심껏 담임목사님께 일조하려고 노력합니다. 언젠가 정목사님께선 부인하셨지만, 목사님의 카리스마, 그 온화한 '지배력'에 매료되어서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한 모범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스물 네시간이 한 두배쯤으로 늘어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목사님 개인의영성을 위해 이 많은 일들을 물리칠 수도 없는 일이고 보면 전 다만 목사님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오래오래 많은 일 하셔야 하니까요. 댓글과 관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2007.07.03 00:12:38
놀라움과 반가움...^^ 사실 김영봉 목사님은 개인적으로 신앙과 기독교 윤리(특별히 경제윤리), 영성같은 부분에서 존경하는 분이기에 비평의 대상이 되었음에 기쁜마음으로 단순에 읽었습니다.
사실 매사에 부정적이고 삐딱한 시각을 지닌 저를 단번에 매료시킨 사람이 김영봉 교수(전 협성대 신학생임^^) 님이었습니다. 아! 한번도 뵌적 없지만 정목사님도 짧은 순간 저를 매료시킨 분이네요^^
아무튼 평소 지인들에게 김영봉 목사님의 저서와 대구성서아카데미를 강력히 전도해온 저에게 더욱 힘이 된 비평이었네요.. 정목사님 감사합니다.
사실 매사에 부정적이고 삐딱한 시각을 지닌 저를 단번에 매료시킨 사람이 김영봉 교수(전 협성대 신학생임^^) 님이었습니다. 아! 한번도 뵌적 없지만 정목사님도 짧은 순간 저를 매료시킨 분이네요^^
아무튼 평소 지인들에게 김영봉 목사님의 저서와 대구성서아카데미를 강력히 전도해온 저에게 더욱 힘이 된 비평이었네요.. 정목사님 감사합니다.
2007.07.04 11:17:36
정용섭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정목사님의 위 설교 비평 글 중 '예화 사용에 관해서' 부분의 아래 글을 훔쳐 저희 교회 어느 성도의 글에 끼어 넣었음을 자백합니다.
그런데 그 훔쳐넣은 정목사님의 글에, 저희 교회 어느 목사로 짐작되는 '권고'자가 아래 처럼 댓글을 달았는데, 제가 무식한지라 변증을 감당 할 능력이 없습니다.
정목사님과 이길용박사 그리고 다비아 회원 여러분의 고견을 실어 주시면 저희 교회 성도들의 신앙 계몽에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미주 나성 소재 모 교회의 담임목사 요즘 설교에 쏟아지는 예화에 상당히 식상해 하던 중, 지난 6월 24일 주일 설교 서론 부분에 다행하게도 예의 예화가 별로 쏟아지지 않는 느낌을 받았던 성도가, 좀 좋아질려나 기대하는 글 중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서론 다음 부분이나 그 다음 주일 설교에서 그 기대는 일장 춘몽.
여러분의 고견이 올라오는데로 제가 퍼가서 저희들 홈피에 옮기겠습니다. 한 주님의 형제 교회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징발' 간망합니다. 샬롬. 소서절을 앞두고 나성 소재 김구봉 드림.
"그런데,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예화가 그의 설교에서 위험 요소로 작용할 개연성이 있다. 그의 예화가 빛나면 빛날수록 그의 설교에서 성서텍스트가 가려진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하는 말이다. 아무리 깊은 영성을 담았다고 하더라도 예화가 성서텍스트를 압도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 아니겠는가.
필자의 생각에 설교에서 가능한 예화나 간증을 사용하지 않거나, 어쩔 수 없는 경우라 한다면 가급적 간단하게 처리해야 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한 대로 그런 감동적인 예화들이 청중들의 영혼에 강렬한 영향을 끼치면 끼칠수록 성서텍스트의 세계는 축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은 투르나이젠의 충고는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한다.
설교는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이 행해지는 사건이다. 따라서 강단 위에서 다른 사람의 것이거나 자신의 것이거나 불문하고 생활체험이나 신앙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 두자. 설교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인식, 하나님의 선포가 행해져야 한다.(Eduard Thurneysen, Die Aufgabe der Predigt, 102. 루돌프 보렌, 설교학실천론, 139에서 재인용, 필자가 문맥에 따라 조금 고쳐 적었음) (기독교 사상 7월호 정용섭 박사의 설교 비평에서 선별 인용)"
1. 권고 2007-07-03 05:00:00
간증과 예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은혜와 사랑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을 후세들에게 전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화나 간증등은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쓰여지는 보조 역할이지 그 자체가 주역은 아닙니다. 듣는자들의 영성으로 인해 또는 신앙 수준으로 인해 그리 될 염려가 없지 않기는 합니다만 예화가 성서텍스트를 압도한다는 표현 자체가 문제 있습니다. 성서는 그 자체로서 능력의 말씀인데 어떻게 감히 다른 무엇이 그것을 압도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듣는자의 반응일 뿐이죠.
정목사님의 위 설교 비평 글 중 '예화 사용에 관해서' 부분의 아래 글을 훔쳐 저희 교회 어느 성도의 글에 끼어 넣었음을 자백합니다.
그런데 그 훔쳐넣은 정목사님의 글에, 저희 교회 어느 목사로 짐작되는 '권고'자가 아래 처럼 댓글을 달았는데, 제가 무식한지라 변증을 감당 할 능력이 없습니다.
정목사님과 이길용박사 그리고 다비아 회원 여러분의 고견을 실어 주시면 저희 교회 성도들의 신앙 계몽에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미주 나성 소재 모 교회의 담임목사 요즘 설교에 쏟아지는 예화에 상당히 식상해 하던 중, 지난 6월 24일 주일 설교 서론 부분에 다행하게도 예의 예화가 별로 쏟아지지 않는 느낌을 받았던 성도가, 좀 좋아질려나 기대하는 글 중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서론 다음 부분이나 그 다음 주일 설교에서 그 기대는 일장 춘몽.
여러분의 고견이 올라오는데로 제가 퍼가서 저희들 홈피에 옮기겠습니다. 한 주님의 형제 교회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징발' 간망합니다. 샬롬. 소서절을 앞두고 나성 소재 김구봉 드림.
"그런데,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예화가 그의 설교에서 위험 요소로 작용할 개연성이 있다. 그의 예화가 빛나면 빛날수록 그의 설교에서 성서텍스트가 가려진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하는 말이다. 아무리 깊은 영성을 담았다고 하더라도 예화가 성서텍스트를 압도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 아니겠는가.
필자의 생각에 설교에서 가능한 예화나 간증을 사용하지 않거나, 어쩔 수 없는 경우라 한다면 가급적 간단하게 처리해야 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한 대로 그런 감동적인 예화들이 청중들의 영혼에 강렬한 영향을 끼치면 끼칠수록 성서텍스트의 세계는 축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은 투르나이젠의 충고는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한다.
설교는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이 행해지는 사건이다. 따라서 강단 위에서 다른 사람의 것이거나 자신의 것이거나 불문하고 생활체험이나 신앙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 두자. 설교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인식, 하나님의 선포가 행해져야 한다.(Eduard Thurneysen, Die Aufgabe der Predigt, 102. 루돌프 보렌, 설교학실천론, 139에서 재인용, 필자가 문맥에 따라 조금 고쳐 적었음) (기독교 사상 7월호 정용섭 박사의 설교 비평에서 선별 인용)"
1. 권고 2007-07-03 05:00:00
간증과 예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은혜와 사랑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을 후세들에게 전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화나 간증등은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쓰여지는 보조 역할이지 그 자체가 주역은 아닙니다. 듣는자들의 영성으로 인해 또는 신앙 수준으로 인해 그리 될 염려가 없지 않기는 합니다만 예화가 성서텍스트를 압도한다는 표현 자체가 문제 있습니다. 성서는 그 자체로서 능력의 말씀인데 어떻게 감히 다른 무엇이 그것을 압도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듣는자의 반응일 뿐이죠.
2007.07.04 12:54:04
김구봉님의 대글(어느 목사님이 쓰신 글)을 읽고 몇 자 적어 봅니다.
"성서는 그 자체로서 능력의 말씀인데 어떻게 감히 다른 무엇이 그것을 압도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듣는자의 반응일 뿐이죠"
위에서 "성서는 그 자체로서 능력의 말씀"이라는 주장이 그럴듯해 보이긴 한데 저는 동의할 수 없군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자체로서 능력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면
똑같은 성서를 읽는데 한 쪽에서는 통일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이 된다는 건
무엇으로 설명하지요?
그러면 답은 나온거 아닐까요.
성서는 그 자체로서 오토메틱으로 능력의 말씀이 되는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 전제는, 정당하고 올바른 해석을 통해서만 능력의 말씀이 된다는 거죠.
따라서 위의 "성서는 그 자체로서 능력의 말씀"이란 표현은 사실이기보다는
설교자의 잘못된 확신 내지는 심리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는 그 자체로서 능력의 말씀"이라는 권위의 방어벽을 미리 설치해 놓아야만
설교자들은 보다 더 편안한 맘으로 설교시간에 예화나 간증을 늘어놓을 수 있거든요.
설령 그런 의도성이 없다하더라도 설교자가 간증이나 예화의 폐해성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면 그런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겠지요.
인식의 차이라고나 할까.
달콤한 과자를 늘 입에 달고 사는 사람에게
그건 건강에 해로운거야 하고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런 인식의 차이 아닐까요?
"성서는 그 자체로서 능력의 말씀인데 어떻게 감히 다른 무엇이 그것을 압도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듣는자의 반응일 뿐이죠"
위에서 "성서는 그 자체로서 능력의 말씀"이라는 주장이 그럴듯해 보이긴 한데 저는 동의할 수 없군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자체로서 능력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면
똑같은 성서를 읽는데 한 쪽에서는 통일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이 된다는 건
무엇으로 설명하지요?
그러면 답은 나온거 아닐까요.
성서는 그 자체로서 오토메틱으로 능력의 말씀이 되는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 전제는, 정당하고 올바른 해석을 통해서만 능력의 말씀이 된다는 거죠.
따라서 위의 "성서는 그 자체로서 능력의 말씀"이란 표현은 사실이기보다는
설교자의 잘못된 확신 내지는 심리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는 그 자체로서 능력의 말씀"이라는 권위의 방어벽을 미리 설치해 놓아야만
설교자들은 보다 더 편안한 맘으로 설교시간에 예화나 간증을 늘어놓을 수 있거든요.
설령 그런 의도성이 없다하더라도 설교자가 간증이나 예화의 폐해성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면 그런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겠지요.
인식의 차이라고나 할까.
달콤한 과자를 늘 입에 달고 사는 사람에게
그건 건강에 해로운거야 하고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런 인식의 차이 아닐까요?
2007.07.04 19:58:50
김구봉 선생님! 안녕하세요?
평소에도 그러시지만 이번 일로 더욱 마음 고생이 크시겠군요.
(이 부분은 삭제하고 퍼가세요^^*)
권고하신 분께선 성서 그 자체에 권위를 두고 계시는군요.
오늘날 많은 한국 교회들이(미국의 이민교회 역시)
이른바 정통주의 신학사조 안에서 본래의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은 망각한 채,
극단적인 축자영감설, 성서문자주의를 고수하고 있지요.
목회자들이 신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믿음생활 하며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니, 성서의 절대화를 놓고 문제삼기는 좀 그렇군요.
하지만 그렇게 '성서= 하나님의 능력'이란 등식 뒤에 숨어있는 신앙편의주의와
기독교 신앙의 자폐증적 위험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위에 분이 지적한대로 그토록 절대적인 '성서의 능력'이
특정 구절을 내세우는 이단의 발호 앞에서 속수무책이란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실지 묻고 싶군요.
그리고...
'간증'과 '예화'라는 보조역할을 의지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하심이
더욱 잘 드러나거니 강조되고 ,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는 주장에
설교자의 기독교적 영성을 의심하게 되는군요.
평소에도 그러시지만 이번 일로 더욱 마음 고생이 크시겠군요.
(이 부분은 삭제하고 퍼가세요^^*)
권고하신 분께선 성서 그 자체에 권위를 두고 계시는군요.
오늘날 많은 한국 교회들이(미국의 이민교회 역시)
이른바 정통주의 신학사조 안에서 본래의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은 망각한 채,
극단적인 축자영감설, 성서문자주의를 고수하고 있지요.
목회자들이 신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믿음생활 하며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니, 성서의 절대화를 놓고 문제삼기는 좀 그렇군요.
하지만 그렇게 '성서= 하나님의 능력'이란 등식 뒤에 숨어있는 신앙편의주의와
기독교 신앙의 자폐증적 위험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위에 분이 지적한대로 그토록 절대적인 '성서의 능력'이
특정 구절을 내세우는 이단의 발호 앞에서 속수무책이란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실지 묻고 싶군요.
그리고...
'간증'과 '예화'라는 보조역할을 의지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하심이
더욱 잘 드러나거니 강조되고 ,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는 주장에
설교자의 기독교적 영성을 의심하게 되는군요.
2007.07.04 23:23:59
김구봉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건강하신지요.
제가 보기에는 위의 주제로 대글 논쟁은 불필요한 것 같습니다.
김 선생님의 교회가 처한 형편을 잘 알지도 못하는 처지에서
대글 몇 조각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는 건 아무 의미도 없을 겁니다.
일단 한번 저의 글을 인용해서 올리셨다니
그것만으로도 알아들을 사람들은 알아들었을 것이고,
귀를 막고 있는 사람은 더 이상의 논리를 전개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예화 문제는 전체 설교와의 관계 안에서 말을 해야지
그것 자체로 옳다 그러다를 말하기 시작하면
논의가 이상한 데로 흘러갑니다.
더구나 권고 님이 과도한 예화로 인해서 성서말씀이 압도당하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 보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군요.
주의 은총이.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건강하신지요.
제가 보기에는 위의 주제로 대글 논쟁은 불필요한 것 같습니다.
김 선생님의 교회가 처한 형편을 잘 알지도 못하는 처지에서
대글 몇 조각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는 건 아무 의미도 없을 겁니다.
일단 한번 저의 글을 인용해서 올리셨다니
그것만으로도 알아들을 사람들은 알아들었을 것이고,
귀를 막고 있는 사람은 더 이상의 논리를 전개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예화 문제는 전체 설교와의 관계 안에서 말을 해야지
그것 자체로 옳다 그러다를 말하기 시작하면
논의가 이상한 데로 흘러갑니다.
더구나 권고 님이 과도한 예화로 인해서 성서말씀이 압도당하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 보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군요.
주의 은총이.
2007.07.06 04:22:52
놀란 마음에 회원가입했습니다.^^;
이 카페에 글 쓰시는 분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많이 망설여지지만..
다들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으려는 분들이라는 믿음으로 글을 쓰는 것이니,
혹시라도 카페 성격과 맞지 않더라도 널리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가 신학을 하신 분들인 듯 합니다. 그런데 설교 비평의
원래 취지가 나 같은 일반 성도를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하는 담대함에(크~)
감히 이 글을 올립니다.
이 카페에 오게 된 계기는 담임목사님의 말씀이 세상의 교양강좌나 성공학 강좌,
그리고 성도들은 오직 교회를 키우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듯이 느껴졌기 때문에
어디 참된 교회가 없을까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성서 마당의 글 중 설교비평을 읽었습니다.
처음 몇 분의 설교비평을 읽으면서 수긍이 가더군요.
하지만 비평글과 꼬리말들을 계속 읽으면서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순종과 사랑이 모든 것이라고 하신 것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비판의 잣대로 본다면 온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부모님을, 선생님을, 상사를, 위정자를, 목사님을 이성의 잣대로만 본다면
얼마나 무서운 세상이 될까요
결국은 그 원망과 미움이 하나님께까지 이르지 않을까 합니다.
이 글들을 읽고 잘못 된 한국교회와 목사님이 변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온전히 매이지 않은 회의적인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한번 더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오늘도 우리 아이에게 바쁘다는 핑계로 저녁으로 라면을 먹였습니다.
걱정되는 마음에 과일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경제적으로 힘이 들고 바쁘서 제대로 못 챙겨도 기특하게 아이는
잘 커 줍니다.(주께 감사!)^^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합니다.
( 이 카페가 교회와 목사님에 대한 걱정으로 찾게 되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에 이끌려 찾게 되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카페에 글 쓰시는 분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많이 망설여지지만..
다들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으려는 분들이라는 믿음으로 글을 쓰는 것이니,
혹시라도 카페 성격과 맞지 않더라도 널리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가 신학을 하신 분들인 듯 합니다. 그런데 설교 비평의
원래 취지가 나 같은 일반 성도를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하는 담대함에(크~)
감히 이 글을 올립니다.
이 카페에 오게 된 계기는 담임목사님의 말씀이 세상의 교양강좌나 성공학 강좌,
그리고 성도들은 오직 교회를 키우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듯이 느껴졌기 때문에
어디 참된 교회가 없을까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성서 마당의 글 중 설교비평을 읽었습니다.
처음 몇 분의 설교비평을 읽으면서 수긍이 가더군요.
하지만 비평글과 꼬리말들을 계속 읽으면서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순종과 사랑이 모든 것이라고 하신 것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비판의 잣대로 본다면 온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부모님을, 선생님을, 상사를, 위정자를, 목사님을 이성의 잣대로만 본다면
얼마나 무서운 세상이 될까요
결국은 그 원망과 미움이 하나님께까지 이르지 않을까 합니다.
이 글들을 읽고 잘못 된 한국교회와 목사님이 변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온전히 매이지 않은 회의적인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한번 더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오늘도 우리 아이에게 바쁘다는 핑계로 저녁으로 라면을 먹였습니다.
걱정되는 마음에 과일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경제적으로 힘이 들고 바쁘서 제대로 못 챙겨도 기특하게 아이는
잘 커 줍니다.(주께 감사!)^^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합니다.
( 이 카페가 교회와 목사님에 대한 걱정으로 찾게 되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에 이끌려 찾게 되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2007.07.06 10:02:24
안나 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다비아에 회원 가입해 주시고,
대글도 남겨주셨군요.
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다비아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향해서
영적 촉수를 예민하게 훈련해보자는 취지로 시작했답니다.
이를 위해서는 향기인지 악취인지를
조금씩 구별한 필요도 있긴 하지요.
다비아에 비평 글들이 제법 많아서
걱정이 되시지요?
천천히 읽다보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과격하게 표현하는 분들도 있어서
전이해가 없는 분들에게는 이상하게 읽히는 것뿐입니다.
주의 은총이.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다비아에 회원 가입해 주시고,
대글도 남겨주셨군요.
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다비아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향해서
영적 촉수를 예민하게 훈련해보자는 취지로 시작했답니다.
이를 위해서는 향기인지 악취인지를
조금씩 구별한 필요도 있긴 하지요.
다비아에 비평 글들이 제법 많아서
걱정이 되시지요?
천천히 읽다보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과격하게 표현하는 분들도 있어서
전이해가 없는 분들에게는 이상하게 읽히는 것뿐입니다.
주의 은총이.
2007.07.06 12:19:42
안나 님, 어서오세요!
놀란 마음으로 한 걸음에 달려오신 님의 글에서
하나님께 향한 사랑과, 교회 공동체를 아끼는
따스함이 느껴지는군요.
안나 님!
'사랑채'가 아닌 설교비평 꼭지로 직행하신 걸 보니
취미가 '설교듣기'라 하심이 이해가 되네요. ㅎㅎㅎ...
정말 귀한, 그리고 아주 좋은 취미를 가지셨네요.
이곳에도 정목사님의 '설교듣기'가 있답니다.
안나 님!
원래 이 꼭지의 성격상 꼬리글(댓글)을 따라 읽으시다보면
처음 오신분들은 좀 부담이 될 거예요.
우리 다비안 중에는 전.현직 목회자, 신학생, 박사, 교수....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물론 계시지만,
일반 성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는 다르나,
님의 표현처럼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으려' 애쓰는 분들이구요.
직장생활 하랴 자녀 돌보랴 바쁘시겠지만,
자주 오셔서 이곳 저곳 둘러 보시면 님의 오해가 풀릴겁니다.
우리 함께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주 먼 곳까지 풍기는
아름다운 만남 만들어 보시자구요~~^^*
놀란 마음으로 한 걸음에 달려오신 님의 글에서
하나님께 향한 사랑과, 교회 공동체를 아끼는
따스함이 느껴지는군요.
안나 님!
'사랑채'가 아닌 설교비평 꼭지로 직행하신 걸 보니
취미가 '설교듣기'라 하심이 이해가 되네요. ㅎㅎㅎ...
정말 귀한, 그리고 아주 좋은 취미를 가지셨네요.
이곳에도 정목사님의 '설교듣기'가 있답니다.
안나 님!
원래 이 꼭지의 성격상 꼬리글(댓글)을 따라 읽으시다보면
처음 오신분들은 좀 부담이 될 거예요.
우리 다비안 중에는 전.현직 목회자, 신학생, 박사, 교수....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물론 계시지만,
일반 성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는 다르나,
님의 표현처럼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으려' 애쓰는 분들이구요.
직장생활 하랴 자녀 돌보랴 바쁘시겠지만,
자주 오셔서 이곳 저곳 둘러 보시면 님의 오해가 풀릴겁니다.
우리 함께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주 먼 곳까지 풍기는
아름다운 만남 만들어 보시자구요~~^^*
2007.07.18 04:53:23
안나님, 한국교회와 우리 모두가 살기위해 생명이 넘치는 살리는 글들이 부담스럽기도 하실겁니다.
또 글자로만 보이고 표정과 소리가 없어서 자의적 해석과 감정이입이 되어 글 읽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저 암덩어리를 떼어내는 메스가 매우 날카롭지만 이롭듯이 모두가 살게되어 기쁨이 넘치는 한국교회가 된다면 인내함과 사랑으로 함께 기도하며 이 일들이 주님께 영광돌리는 일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 아닌가 싶습니다.
축복합니다.
또 글자로만 보이고 표정과 소리가 없어서 자의적 해석과 감정이입이 되어 글 읽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저 암덩어리를 떼어내는 메스가 매우 날카롭지만 이롭듯이 모두가 살게되어 기쁨이 넘치는 한국교회가 된다면 인내함과 사랑으로 함께 기도하며 이 일들이 주님께 영광돌리는 일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 아닌가 싶습니다.
축복합니다.
2007.07.27 00:07:01
Theology about Jesus must be thoroughly grounded in a historical reality or else Jesus can be used to support anything. - Ernst Kasemann.
The beginning of knowledge is knowing the right questions to ask.
지식의 시작은 올바른 질문들을 아는 것이다. 폴 틸리히
예수 신앙은 예수를 마음 속에서 만남으로 시작되며, 예수를 마음 속에서 만남으로 끝난다. -- 무명씨
진리보다 기독교를 사랑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보다 그들의 종파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아가서,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끝난다. -- 사무엘 코울리지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터져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 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이 마음이 완악하여 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런즉 씨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 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 예수, (마태복음13:1-23)
책들은 저자들과 독자들의 교환 행위이다. 독자들은 그들이 읽고 있는 저자들에 관한 약간의 필수적인 것들을 알 필요가 있으며, 저자들은 그들의 독자들을 알아야 한다. 독자와 저자의 이상적인 매치는 적절한 답변으로 연결되는 올바른 질문들로 구성된다. – 로버트 펑크
This book centers upon three figures: a more- or – less historical person, Yeshua of Nazareth: a theological God, Jesus Christ; and a human, all- too – human God, Yahweh. That opening sentence cannot avoid sounding polemical, and yet I hope only to clarify ( if I can ) and not to offence. - Harold Bloom.
언젠가 로이드 존스 박사는 설교자와 그의 사역에 대한 책을 쓰려면 최소한 그가 죽고 10년은 지나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 토니 사젼트
제가 신앙에 대해 철이 들자 저를 가장 절망케 한 인물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본토 친척을 떠나고, 이삭을 척 바치고…참으로 많은 날을 회의와 낙심 속에서 몸부림쳤습니다. 나는 왜 이런 믿음과 결심이 없는가고.
물론 여러번의 결심과 각오가 있었습니다. 아니 좋아한다기 보다 그의 편이었습니다. 그래야만 희망이 있으니까요…박영선
나는 어느 누구도 우리의 믿음을 심각하게 위협할 만큼 많은 지식을 갖지 못했으며 또한 그럴 수도 없음을 확신한다. 정직한 학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교회를 떠받치고 있는 견고한 기둥에 낀 이끼의 일부를 벗겨내는 일이다. – A. W. 토저
우리의 구세주인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누구든지 진실로 빛 속에서 살기를 원하고 마음의 모든 흑암으로 부터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가 걸으신 길을 본 받아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명상해 보기로 합시다. – 토마스 아 켐피스
주석학과 해석학의 대화는 한마디로 역사적, 문화적, 신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성서 본문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실천적인 해석학이다. 앙드레 라콕
In 1988, when my husband of twenty years died in a hiking accident, I became aware that, like many people who grieve, I was living in the presence of an invisible being – living, that is, with a vivid sense of someone who had died. – Elaine Pagels
My Korean students at the School of Theology at Claremont tell me that they know from recent experience what it means to convert Christianity and that the acrobatics required of the historical imagination are not difficulty difficulty to perform. They know they are Koreans and they know the history of their culture. They also know they are the true children of Abraham, or the children of God of Abraham, because they are Christians. They are, they say, Korean Christians. When I shake my head in bewilderment, they smile. – Burton Mack.
19세기 신학은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구획지어진 19세기 신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1799년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을 출판으로 부터 제 1차 세계 대전에 이르는 기간의 신학을 의미한다. – 목창균
Jesus saw himself as God’s last messenger before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E. P. Sanders.
Jesus was wrong, Schweitzer concluded – twice
-- Mark Allan Powell
Pannenberg begins his theological enterprise with the hemeneutical question, the question that defines all modern theology as modern. – Ted Peters
마태복음은 분명 유대교의 상황 안에 위치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보통 네개의 복음서 가운데 가장 유대적인 것으로 인정된다. 문제는 마태가 어떻게 유대적 환경에 관련되는가인가? 챨스 탤버트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출판인을 만나는 것이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 메리 글래즈너
신앙은 인간의 일이다. – 챨스 피니
성령과 우리의 목회직- 이 제목을 가지고는 별로 새로운 얘기를 할 수는 없지만, 그 주처럼 중요한 것이 없으므로 자주 생각하면 할 수록 더 좋다. – 챨스 스펄전
배우고 제때에 익히는 일 그것이야 말로 기쁘지 아니한가! -- 공자
The beginning of knowledge is knowing the right questions to ask.
지식의 시작은 올바른 질문들을 아는 것이다. 폴 틸리히
예수 신앙은 예수를 마음 속에서 만남으로 시작되며, 예수를 마음 속에서 만남으로 끝난다. -- 무명씨
진리보다 기독교를 사랑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보다 그들의 종파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아가서,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끝난다. -- 사무엘 코울리지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터져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 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이 마음이 완악하여 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런즉 씨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 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 예수, (마태복음13:1-23)
책들은 저자들과 독자들의 교환 행위이다. 독자들은 그들이 읽고 있는 저자들에 관한 약간의 필수적인 것들을 알 필요가 있으며, 저자들은 그들의 독자들을 알아야 한다. 독자와 저자의 이상적인 매치는 적절한 답변으로 연결되는 올바른 질문들로 구성된다. – 로버트 펑크
This book centers upon three figures: a more- or – less historical person, Yeshua of Nazareth: a theological God, Jesus Christ; and a human, all- too – human God, Yahweh. That opening sentence cannot avoid sounding polemical, and yet I hope only to clarify ( if I can ) and not to offence. - Harold Bloom.
언젠가 로이드 존스 박사는 설교자와 그의 사역에 대한 책을 쓰려면 최소한 그가 죽고 10년은 지나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 토니 사젼트
제가 신앙에 대해 철이 들자 저를 가장 절망케 한 인물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본토 친척을 떠나고, 이삭을 척 바치고…참으로 많은 날을 회의와 낙심 속에서 몸부림쳤습니다. 나는 왜 이런 믿음과 결심이 없는가고.
물론 여러번의 결심과 각오가 있었습니다. 아니 좋아한다기 보다 그의 편이었습니다. 그래야만 희망이 있으니까요…박영선
나는 어느 누구도 우리의 믿음을 심각하게 위협할 만큼 많은 지식을 갖지 못했으며 또한 그럴 수도 없음을 확신한다. 정직한 학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교회를 떠받치고 있는 견고한 기둥에 낀 이끼의 일부를 벗겨내는 일이다. – A. W. 토저
우리의 구세주인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누구든지 진실로 빛 속에서 살기를 원하고 마음의 모든 흑암으로 부터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가 걸으신 길을 본 받아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명상해 보기로 합시다. – 토마스 아 켐피스
주석학과 해석학의 대화는 한마디로 역사적, 문화적, 신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성서 본문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실천적인 해석학이다. 앙드레 라콕
In 1988, when my husband of twenty years died in a hiking accident, I became aware that, like many people who grieve, I was living in the presence of an invisible being – living, that is, with a vivid sense of someone who had died. – Elaine Pagels
My Korean students at the School of Theology at Claremont tell me that they know from recent experience what it means to convert Christianity and that the acrobatics required of the historical imagination are not difficulty difficulty to perform. They know they are Koreans and they know the history of their culture. They also know they are the true children of Abraham, or the children of God of Abraham, because they are Christians. They are, they say, Korean Christians. When I shake my head in bewilderment, they smile. – Burton Mack.
19세기 신학은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구획지어진 19세기 신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1799년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을 출판으로 부터 제 1차 세계 대전에 이르는 기간의 신학을 의미한다. – 목창균
Jesus saw himself as God’s last messenger before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E. P. Sanders.
Jesus was wrong, Schweitzer concluded – twice
-- Mark Allan Powell
Pannenberg begins his theological enterprise with the hemeneutical question, the question that defines all modern theology as modern. – Ted Peters
마태복음은 분명 유대교의 상황 안에 위치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보통 네개의 복음서 가운데 가장 유대적인 것으로 인정된다. 문제는 마태가 어떻게 유대적 환경에 관련되는가인가? 챨스 탤버트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출판인을 만나는 것이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 메리 글래즈너
신앙은 인간의 일이다. – 챨스 피니
성령과 우리의 목회직- 이 제목을 가지고는 별로 새로운 얘기를 할 수는 없지만, 그 주처럼 중요한 것이 없으므로 자주 생각하면 할 수록 더 좋다. – 챨스 스펄전
배우고 제때에 익히는 일 그것이야 말로 기쁘지 아니한가! -- 공자
어제 서울 다녀가시고 피곤하시지 않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비평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50여회의 설교비평을 하신걸로 아는데 그중 목사님께서 긍정적으로 평가하신 목사님 중에 장로교 목사님은 한분도 안계신다는 생각말입니다. (물론 장로교 목사님 뿐이겠습니까마는..^^;;)
그리고 나름대로 내려본 결론은 장로교 목사님들이 아무래도 성경을 '축자적 영감'으로 기록된 책으로 신앙하기에 그런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목사님..
성경을 역사적 책이라고 믿는한, (쉽게 말씀드려 아브라함이 실존인물이라고 믿는것) 타협의 여지는 전혀 없는건지요..
10여년을 그리 믿고 산 사람으로써 그 강을 건너기가 쉽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런 경험을 하셨겠지마는요..)
또 한가지는요..
어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지요?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영성,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경험.. 이러한 것들이 과연 가능한 건지요? (인간의 이성이 인식하고, 감정이 느낄 수 있는건지요?) 가능하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지요? 인문학적인 소양 위에서 이해한 성경이 과연 그 기준이 될 수 있는건지요?
다시 제가 쓴 글을 읽어보니.. 도통 목사님께서 이해하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듭니다^^;;
부끄러운 마음에 지우려 하다가 그냥 남겨봅니다..
답변을 강요드리는건 아니옵니다^^
지나가는 다비안님들도 한말씀씩 거들어 주시면 고맙겠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