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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와 신학
- 정용섭 교수의 《설교비평》에 대한 신학적 단상-
정용섭 교수의 설교비평에는 한국 교회가 귀담아들어야 할 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요즘의 설교가 인간적 욕망을 부추기고 자극하며, 복음을 인간의 필요나 채워주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정 교수께서는 한국 교회에서 지금 복음이 설교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설교를 통해 기독교의 본질이 제대로 전달되며 설명되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문제 제기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바로 여기에서 정 교수의 설교비평과 관련하여 더 생각해 보아야할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설교를 통해 복음, 혹은 기독교의 본질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느냐 하는 물음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이 무엇이며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공통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 교수의 설교비평에 납득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신앙은 무엇이며 신학적 과제란 무엇인가에 대해 같은 입장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정 교수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만일 기독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면, 정 교수의 설교비평에 우리가 아무리 많이 공감하고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상 피상적인 수준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신학 전통
그간의 설교비평을 읽으면서 정 교수께서 갖고 계신 신앙과 신학에 대한 이해가 어떤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정 교수께서는 설교비평을 할 때 자주, 이런 설교자들이 있는 줄 여태까지 잘 몰랐으며, 그래서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그 설교자들을 대한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제게는 익숙한 설교자들을 정 교수께서는 처음 대하시는 걸 보면, 정 교수와 저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아마도 이런 형편은 그동안 한국 교회를 크게 양분(兩分)해온 신학적 전통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 교수의 설교비평을 통해서 신앙과 신학에 대한, 저와는 다른 입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 교수의 설교에 대한 비평에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도, 정 교수와 저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정 교수께서 기독교에 대한 바른 이해 ―많은 설교들에서 설명되는 것과는 대비되는― 라고 제시하는 입장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따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 발견한 것은 정 교수와 제가 어떤 설교를 대하여 거기에서 같은 문제점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같은 기준에 입각해 발견된 것은 아닐 수 있겠다는 점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정 교수와 저는 실상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차차 얘기되겠지만, 제게 있어서, 신학은 그 무게를 ‘신’(神)께 두고 신께서 의지적으로 보여주시는 계시만을 그 원리로 삼고 있다면, 정 교수께서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는 이른바 ‘학문’에 무게중심을 두고 신학을 해나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제가 인간의 근본적 특성을 죄인 됨에서 찾는다고 한다면, 정 교수께서는 인간에게 보다 적극적 의미에서의 가능성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대비점들은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라고 할 수 있는 복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정 교수와 저 사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빚어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신학적 차이가 설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차이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교비평 작업에서 정 교수께서는 기독교에 대한 다른 이해를 가진 설교자들을 정 교수의 신학이해에 따라 평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만일 실제로 정 교수의 설교비평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설교비평은 원래의 의도하던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관점과 기준을 가지고 다른 관점과 기준을 가진 사람의 행동을 평가한다면, 그 사람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의 평가는 단지 오해만을 불러올 뿐입니다. 먼저 기독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 공통된 기반이 마련되어야 비로소 설교의 목적과 내용에 대해서도 동의가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전제가 있어야 실질적으로 유익한 설교비평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복음에 대한 이해라든가 신학에 대한 이해에 있어 정 교수와 저 사이의 차이점을 검토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정 교수의 신학적 입장을 살펴보면서 크게 의문이 든 것은 두 가지 문제에서였습니다. 첫째는 신학적 인식론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고, 둘째는 여러 신학적 문제들과 직결되는 인간에 대한 이해에 관한 문제입니다.
판넨베르크 신학
정 교수의 신학을 살펴보기 위해 저는 먼저 판넨베르크 신학에 대해 살펴보아야 했습니다. 나중에 더 분명히 발견한 사실이지만, 정 교수께서 제시하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판넨베르크의 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판넨베르크의 계시론에 대해 책을 쓰시기도 했고(정용섭,《말씀신학과 역사신학― 판넨베르크의 계시론을 중심으로》), 《신학과 철학》, 《조직신학》과 설교집들을 비롯한, 판넨베르크의 여러 책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저는 판넨베르크 신학의 특징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그의 신학의 특징으로 크게 두 가지가 지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학의 두 가지 특징은 제가 정 교수와의 차이점으로 확인한 두 가지 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판넨베르크 신학의 독창적 개념은 ‘보편사’와 ‘미래성’이라고 합니다. 보편사 개념을 통해 신학은 역사와 연결되며, 미래성 개념을 통해 신학은 종말론적 특징을 지니게 됩니다.
첫째 특징은 역사 전체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보는 ‘보편사’ 개념입니다. 판넨베르크는 기독교 진리의 보편적 타당성을 합리적으로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신학이 보편사의 지평 안에서 통용되는 합리성이라는 기준에 합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강조는 신학을 계시에 매이지 않게 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판넨베르크는 “바르트가 강조하는 것처럼 신학이 계시라는 폐쇄되고 권위주의적인 개념에만 매달리게 될 때 신학은 보편성을 결여한 초라한 특수 학문이 되어 버리고 만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김영한, ‘볼파르트 판넨베르그’,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 196쪽). 그는 신학이 보편성을 띤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배타적인 계시와의 관련성을 끊어야 한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정 교수도 이런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말씀의 신학을 극복하여 전체 역사 가운데서 신학의 보편성을 찾고자 한다”(정용섭, 《말씀신학과 역사신학》, 148쪽).
둘째는 미래를 강조하는 종말론적 신학의 특성입니다. 판넨베르크는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과거와 현재를 결정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미래의 존재론적 우위성”입니다. 미래는 현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힘이라는 의미에서 창조적 성격을 띱니다. 결과적으로, 세계는 불변적으로 지속되는 질서가 아니라 열린 과정으로 파악됩니다. 현재를 결정하는 것은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열린 미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특징들은 정 교수께서 “인문학적 성서 읽기”를 강조하는 것과, 또 과거보다는 미래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하튼 판넨베르크 신학이 다음과 같이 요약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이성은 신앙의 적이 아니라 친구이며, 교회 전체의 삶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구속사 대신에 보편사, 맹목적 신앙보다는 이성적 통찰, 개인적 결단보다는 역사적 전승을 강조한다. 그는 기독교 진리의 합리성을 위하여 이성의 비판을 강조하는 이성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김영한, ‘볼파르트 판넨베르크’,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 217쪽)
이와 같은 특징은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제가 배워온 신학과 어떻게 다른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첫째, 제가 배운 바로는, 신학적 작업은 계시에 의존해서 이루어집니다. 신학의 계시 의존성이란, 신앙의 내용과 신학적 물음이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계시와, 인간 역사 속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초월적 하나님과 관계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철학이 신학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도 인정됩니다. 인식하는 이성의 유한성과 제한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패커의 다음과 같은 의문에 공감합니다. “나는 조직신학의 주제를 하나님에 관해 계시된 진리로 개념화 시키는 일이 적절한지 의문이 간다. … 이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과 진정한 하나님을 아는 것 사이를 이간시키는 것이다”(J. I. Packer,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Spirituality, pp. 2, 8.).
둘째, 역사, 더 구체적으로 ‘미래’에 대해서도 저는 다르게 이해합니다. 역사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셨으며, 미래, 곧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성취된다고 생각합니다. 판넨베르크가 역사를 “열린 과정”이라고 말한다면, 제가 배운 신학은 역사는 하나님의 뜻하심에 따라 정해져 있다고 여깁니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한 통치를 계속하시며 결국에는 당신께서 정하신 바대로 역사의 목적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즉 신(神)이라는 존재가 인격적이고 전능하다면 정당한 목표와 그것을 이룰 능력과 신실함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역사를 보며 신앙인이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선하신 분이시라는 점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분의 통치 아래에서 실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과 씨름을 벌이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사상들과의 씨름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과의 씨름 말이다”(알리스터 맥그래스,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 88쪽).
신학적 인식론
이제 정 교수의 신학에 대해 몇 가지 점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먼저 제가 정 교수의 신학적 이해에 관해 갖게 되는 의문은 계시와 관련된 것입니다. 계시에 대한 이해는 신학적 인식론의 문제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신학이 하나님에 대한 논의라고 하면, 대체 하나님에 대해 우리 인간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전통적인 답변은 인간은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일 것입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는 종교라는 점을 전제할 때, ‘계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은 이후 모든 신학적 논의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어떤 경로로 우리에게 도달하는지에 대해 정 교수께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계는 곧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에 접근하는 길이다. 이런 방식 말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도달하겠는가? 진리에 도달해 보려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사실 이런 인식론적 근거에서 이루어진다. (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192쪽)
앞서 살펴본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에 대한 강조와 맥을 같이하는 설명으로 보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하나님의 계시란 세계를 통해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의 창조자이시므로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며, 우리는 이에 주목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앎은 “하나님 스스로 자기의 본질을 노출하는 것에 대한 ‘자연적 앎’의 문제”라고 덧붙여 설명됩니다(정용섭, 《말씀신학과 역사신학》, 192쪽). 인간이 자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설명을 따라가면서, 정 교수의 계시 이해가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로 여기는 기독교의 전통적 이해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 교수의 이 같은 입장에는 이성적 판단에 따라 성경을 역사적 주관적 신앙고백 문서로만 받아들이려고 한 계몽주의 이후 학문의 결론이 그대로 전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저는 성경이야말로 계시의 외적 인식원리라는 전통적 입장을 따릅니다(Louis Berkhof,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 96.). 성경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 주신 특별한 계시라고 이해합니다. 성경에 담긴 내용이, 인간 쪽의 반응이 있기 전에, 인간에게 나타나시고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책이며, 인간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물론 저도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고 있으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이 그의 창조세계에 분명히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롬1:20).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중단하실 수 없으며, 그분이 지으신 세계를 그분의 역사로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계시만으로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큰 장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과 분리되었다고 천명합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져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눈이 멀어져, 해가 빛나고 있는데도 보지 못합니다. 따라서 세계만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기란 더더욱 어려워진 것입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둘 때, 하나님 편에서 온 보다 명확한 계시의 필요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왜 정 교수께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주신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근대성에 대한 요즘의 연구들이 보여주듯, 인간 이성을 최종적 판단자로 여긴 계몽주의적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경이 객관적 계시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합리적 인식론에 따른 결과입니다. 합리적 인식론이란 결국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판단되어 수용될 수 있는 것만 진리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성은 인간 고유의 인식 수단일 뿐, 진리의 원천이나 진리 판별의 절대적 기준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성에게 궁극적 판단 규범의 자리를 허락한 근대의 과학적 방법도 역시 진리를 찾아내는 유일하거나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서 레슬리 뉴비긴의 논평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성과 계시의 역할에 관한 논쟁에서의 문제점은 어떻게 경험된 자료를 이해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건들을 과연 전적으로 지금 세속적인 역사 기술에서 사용하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심리학적인 범주를 가지고 이해해야 하는가의 논쟁과, 이런 범주들의 유용성이나 적절함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이 이야기를 상술된 모든 사건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개인적인 의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인정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들이다. 이성은 사물의 진상에 관한 독자적인 정보의 출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 활동의 한 단면이다. 이성과 계시에 관한 오랜 논쟁에서 나타난 두 가지의 차이점은 각기 다른 정보의 출처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사회에서의 복음》, 29-30쪽)
인간이 이성적 판단을 근거로 성경을 계시로 인정하길 거부한 것은 이성의 역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성의 판단을 근거로 하여 계시의 진리성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신적 진리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정 교수께서는 초월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계시를 주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크게 생각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지적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요?
한편, 만일 하나님께서 의지를 갖고 우리에게 계시를 주신다면, 그 계시는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해 구속력을 띠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정 교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과학은 과학이다. 진화론은 과학적 현상적으로 진리일 뿐이고 기독교 신앙은 다른 지평에서 영적인 진리를 말한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지 독단론에 빠지지 말고 서로가 진리의 지평을 넓혀 가면 충분하다. (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215쪽)
정 교수께서는 신앙과 과학의 영역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과학과는 다른 지평의 영적 진리와만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칸트 이후의 계몽주의적 사고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고백이라는 생각 자체가 외부적인 객관적 기준틀인 진리에서 내적이며 주관적인 직관으로 바뀌어 버렸다. 또한 칸트 이후,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 할 내용을 정의하는 것은 어떤 외적인 권위가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가 되었다”(데이비드 웰즈, 《신학 실종》, 181쪽).
계몽주의의 영향 속에서 신학에서마저도 믿음은 배제되고 이성만이 절대적 판단기준으로 인정됩니다. 신학은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신앙에서 출발할 수 있는 것인데, 이제 계시 자체가, 주관적이라는 이유로, 신학의 논의에서 배척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성적 판단을 근거로 신학적 작업이 이루어지고, 성경에 기록된 초월자 하나님의 역사는 신화적 세계관에 근거한 진술일 뿐 현실성을 결여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성적 판단을 따라 신앙을 설명하려는 인간의 해석마저도 자의적 성격을 띠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적 판단에 대한 강조 역시 시대적 환경의 영향 속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터 버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각자 나름의 “타당성 구조”에 따라 판단합니다. 어떤 일이 타당한가에 대한 판단은 이미 전제되고 있는 어떤 사고 체계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이성적 판단을 최종적 기준으로 설정한 것부터가 근대 이후 계몽주의의 전제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합리적 인식론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전제 자체가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인식과 이해의 방법이 주로 합리성에 근거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성과 이성이 파악하는 자연의 질서가 모두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성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된 선물이라고 말해야 더 적절한 표현입니다. 이성이 하나님보다 앞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성을 절대적 기준이신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종교 개혁의 후예들은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 세계를 탐구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종교 개혁의 전통에서는 자연과 은혜 모두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영역이다. 종교 개혁 전통이 자연을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그 운동의 후예들에 의해서 근대 과학이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예들은 소위 ‘하나님의 두 번째 책’(자연)을 연구해서 자연의 저자와 그 분의 창조 세계를 더 잘 이해하려고 시도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과학이 ‘어떻게’라는 물음들에 대한 답변들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첫 번째 책인 성경은 ‘왜’라는 물음들에 대해서 대답을 제공해 주었다.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101쪽)
버스에 탄 사람이 버스를 밀 수 없듯이, 우리는 우리를 떠받치는 근거를 들여다보거나 조작할 수 없습니다. 욥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초월적 근거를 다 이해할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욥은 이 물음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정 교수께서 주장하시는 신학적 인식론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계시로서보다는, 주관적 수준의 ‘신앙고백’이라고 여겨집니다. 성경을 보편사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에 접근해간 사건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성경은 사실에 대한 증언으로서 갖는 객관성을 잃고, 인간의 주관적 산물로 격하되고 맙니다. 성경을 가변적인 ‘신앙고백’으로 취급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실재(實在)에 뿌리 내리지 못한, 주관적 의견만을 갖게 될 뿐입니다. 저는 이런 결론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이성적 판단에 따라 성경이 재단(裁斷)될 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과연 알 수 있겠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설교비평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정 교수께서는 왜 성경을 설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고 묻게 됩니다. 저는 성경이 하나님의 약속과 꾸짖음을 담고 있으며, 성육신으로 절정을 이루는 신적 계시라고 여깁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을 풀어주는 설교가 필요하며, 설교는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를 면밀히 이해하는 일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계몽주의자들이 변론하고자 했던 기독교라는 종교는 신과 자연과 인간에 관한 영원한 형이상학적 진리의 체계였다. 성경은 자연의 직접적인 관찰이나 내적인 인간의 관념들에 대한 성찰에 의해 발견될 수 없는 영원한 진리에 관한 정보의 출처다.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사회에서의 복음》, 32쪽)
인간 이해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성경관에 대한 해묵은 논쟁을 재연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계시에 대한 입장 차이는 신앙과 신학에 대한 이해에 있어 큰 차이를 빚어내는 두 번째 주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에 외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계시에 대한 이해는 무엇보다도 인간관(人間觀)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종교를 성립시키는 세 가지 요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가 성립하려면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는, 첫째, 그 종교의 주인이 되는 신(神)의 자기 설명, 둘째, 그 신과 인간과의 관계, 셋째, 세계와 역사의 목적에 대한 설명이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요건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샤머니즘이 되거나, 주술과 주문만이 있는 미신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세 가지 요건을 갖고 기독교 신앙을 다시 진술한다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구원주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믿는 신(神)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둘째, 그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구원자로 나타나십니다. 셋째, 모든 인간은, 그리고 이 세계와 역사는 종국에 가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구도를 통해 생각해보면, 정 교수와 제가 인간을 어떻게 다르게 이해하는지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정 교수께서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한다면, 저는 구속주 하나님을 강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서로 다른 인간관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죄(罪)에 대한 이해에 따라 하나님과 그분이 행하시는 일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로 귀결된다고 하겠습니다. 인간관에 있어서의 차이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전망에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 신앙고백의 핵심은 구원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구원주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속죄를 위해 성육신하셔서 인간으로서 생애를 보내신 후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사셨다는 것을 하나님 계시의 핵심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계시의 내용은 인간의 문제적 상태, 곧 죄(罪)를 심각하게 전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표현을 따르자면, 인간은 죄로 인해 야기된 죽음의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새로 태어나야 했고, 이를 위해 구원주 하나님인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할 때, 기독교 신앙의 필수적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고 그분의 살아나심과 연합하는 데에 있습니다(롬 6). 세례와 성찬이 보여주듯,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1). 이렇게 성경에서 발견하는 우리 신앙의 출발점은 인간이 구원주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형편에 처해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복음은 ‘죄’라고 불리는 심각한 현실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갖는 심각성을 염두에 둘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구원주로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사실에도 이미 내포되어 있지만, 인류가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데서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은 특별한 은총이며, 이 사건에 대한 계시는 특별한 계시라고 여겨져야 합니다. 예수의 사역을 통해, 인간은 눈을 뜨게 되며, 그에게 생명이 회복됩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으로 태어나기에, 구원의 은총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알지도 감지하지도 못합니다.
이 특별한 은총을 통해 주어지며 특별한 계시를 통해 알려지는 구원으로, 인간은 구원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인간이 세계를 통해 주신 계시와 창조 속에서 드러난 은총 속의 하나님, 곧 창조하시고 지금도 섭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만물을 자기 앞에 세우실 심판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한편, 정 교수께서 보여주는 인간 이해에 인간의 심각한 형편, 곧 죄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설교에 대한 비평에서도 그러했듯, 정 교수께서는 기독교적 삶에서 죄가 강조되는데 대해 우려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의식에 묶여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투쟁하고, 용서하고, 변혁해 나가도록 돕는다. 이 사실이 복음의 핵심이다”(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229쪽).
인간의 죄(罪)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을 때,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어떻게 이해될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 경우에는, 위에서 말한 세 요건으로 말해보자면, 강조점이 구원주 하나님보다는 창조주 하나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인간에게 죄라는 근본적 뒤틀림이 있다는 점을 그다지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펼치신 은혜, 곧 이른바 ‘일반 은총’의 측면만을 주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창조 때 주어진 은총과 그 창조로부터 알려진 하나님에 대한 계시에 주목할 때, 세계와 역사에 대한 이해 역시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통치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정 교수께서 취하시는 신학적 입장은 바로 이런 경향을 띠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 교수께서 인문학적 소양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저는 기독교의 복음을 판넨베르크처럼 인간 보편의 진리로서 이해하려는 의도를 읽게 됩니다. 물론, 복음은 인간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제시하는 새로운 삶이 인간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인 것일까요? 성경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열어놓는 새로운 인간상이 죄라는 근본적 문제 상황을 해결 받은 인간에게나 적용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과 그의 삶에 대해 탐구해온 그간의 인문학적 발견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신학적 작업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 백성의 특징을 이해하는데 있어, 성경이 진단하듯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이해는 피상적인 것에 그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며 하나님의 창조로 베풀어진 은총을 받은 존재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누구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와 연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별한 은총의 개입이 반드시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죄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인 이 특별한 은총은 인간 사이에 절대적 불연속을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는 그들 양자를 공통적으로 묶어낼 수 없는 근본적 차이가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굳이 인간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공통점을 찾자면, 그것은 죄가 주도권을 잡은 세상에 속한 죄인 된 본성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 이해의 차이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관점에 영향을 끼칩니다. 만일 죄에 대한 심각한 고려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행동이 만들어내는 역사와 사회도 창조라는 일반적 은총에 입각해 이해될 것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변증법적 과정에서 함께 일하는, 그분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때 인간의 죄인 됨이라는 특징이 중요한 변수로 고려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 정 교수께서는 미래의 종말의 향방은 인간의 역할에 따라 열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역사의 과정에 죄인인 인간이 과연 어떤 적극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정 교수의, 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사명에 대한 이해에 있어 이런 인간 이해가 그대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정 교수께서는, 한 설교비평문에서, 성서가 억울한 약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언급합니다. 그런데 저는 과연 성경의 핵심적 문제 제기가 그런 것인가 묻게 됩니다. 그것이 혹시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고백을 대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여성이나 소수 인종의 인권 문제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 혹 환경과 생태 문제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들이 각각 우리의 삶에 중요한 문제들이라는 점을 수긍하면서도,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강조가 기독교가 전하는 특별 은총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데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을 갖게 됩니다. 이런 이슈들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담아내는 근본적 주제라고 할 수 있을까요? 데이비드 웰스는 이런 요즘의 추세가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고백”이 사라진 데서 유래한다고 진단합니다.
현대라는 시기에, 하나님의 객관적인 진리와 시공간의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것에 대한 공적인 고백이라는 신앙고백은 학문 세계에서 매우 어색한 것이 되었다. … 이와 같이 일단 신앙고백이 사라져 버리자, 신학적 성찰이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신학적 성찰이 하나님 말씀의 연구라는 분야를 상실하게 되자, 동양적 영성에서 급진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스트 이데올로기에서 환경에 대한 관심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신학 성찰의 주제를 찾게 되었다. 더욱이 계급적인 관심사가 교회와 학문 세계에 끼어들어서 그 간격을 벌려 놓았다. (데이비드 웰스, 《신학 실종》, 156쪽)
죄에 대한 고려 없이 사회나 역사에 대해 논하는 것은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문제 제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죄에 대한 고려 없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는 방식도 성공적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역사와 실존은 모두 죄로 인한 왜곡, 오염, 부패를 증언할 뿐입니다. 기독교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으로, 죄로 인한 절망과 파멸의 현실을 깨고 재창조로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돌연한 은혜와 초월적 기적의 개입으로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되며, 새롭게 태어남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파멸의 운명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듯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식으로 세상과 역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죄에 사로잡힌 인간의 구원이 전제되어야만, 비로소 그 인간 개인이 이웃 곧 사회와 역사에 새롭게 관련되기 시작합니다. 죄인 됨으로부터의 해방이 개인에게 이루어질 때에야, 그에게 사회와 역사에서의 적극적 역할이 주어집니다. 저는 이런 역할을 ‘성화’라는 전통적 신학 개념 속에서 이해합니다. 성화의 과정을 통해 인간은 그 존재가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이와 같은 존재가 삶의 현장에서 이웃, 곧 사회와 역사 앞에 지는 책임이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로 비유되는 심판의 현장은 바로 이런 측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신앙적 실천적 책임은 구원에서 비롯된 불신자와의 다름, 곧 ‘죄’라는 측면에서의 다름인 ‘거룩’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거룩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죄인이란 하나님과 분리된 자이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그의 백성이요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었을 때, 산상설교가 가르치는 “빛과 소금”, “생명”, “진리”, “착한 행실”의 정의가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43 이하에서 설명하는,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이 보이는 신앙 인격적 정체성은 바로 이런 사람들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펼쳐진 삶은 이런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삶은 이 세상에서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도 완성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셨지만, 우리 인간은 아직 그분의 약속을 붙들고 그분의 성취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왜 이런 긴장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물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하나님의 전적인 예비하심에 맡겨져 있고, 때가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허락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기다림의 시간을 두시는 것은 그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 받는 성도들을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그 충만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람들을 부르시는 구원사역을 연장해나갈 시간이, 그리고 부름 받은 그분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되는 훈련과 완성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적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에베소서 2:22에서 “너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부부 사이의 관계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연합을 비교하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내용을 소유하기도 하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쓰임 받는 기관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 노릇 하시는 질서에 있어, 그리고 그분으로 말미암는 완성에 있어, 교회는 독특한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엡 4:13-16). 교회는 잘못 판단하고 세상에 타협하기도 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교회야말로 “진리를 함께 찾아가는 일을 인도함에 있어, 사고와 행위 모두에서 우리가 어디를 향해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를 안다”(뉴비긴, 263쪽)고 믿습니다.
신학의 근본 토대
사실 하나님께 무슨 일반적 은총과 특별한 은총이라는 구분이 있겠습니까? 어떻게 초월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시공의 세계에 갇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학적 성찰은 신앙을 그 대상으로 삼는 것인데, 신앙은 합리성을 넘어서는 대상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인간보다 크신, 초월적이신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성경에서 들으며, 그분을 신앙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께 얼마나 의존적 존재인가 하는 점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정 교수의 신학적 입장을 보면서 갖는 의문은, 정 교수께서 결국 하나님보다는 인간을 궁극적 기준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정 교수께서 기독교 신앙의 ‘신비’에 대해 여러 곳에서 재차 강조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신비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 구성된 신학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기독교 신앙이 인간으로는 넘볼 수 없는 차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우리의 차이가 빚어진 것일까요?
제 관찰로는 정 교수께서 전제하시는 신학은 사실보다는 의미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중대한 의미든 간에 그 의미가 발생한 터전인 사실이 견고할 때에만 비로소 그 사실에 의미가 담기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성적 판단에서 비롯되는 합리성이나 보편성의 이름으로, 사실을 재단하고 제한하며 배제하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신앙의 실제적 터전을 놓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 교수의 신학은 자신의 근거를 합리성을 근간으로 한 자기 확신에서 찾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합리성에 따라 판단되실 존재일까요? 오히려 우리의 합리성이 하나님의 주권을 근거로 판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신학이 어떤 것인지는 데이비드 웰스의 설명으로 더 분명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소 긴 인용이지만 함께 읽어보고 싶습니다. 데이비드 웰스에 따르면, 신학은 세 가지 필수적인 측면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들은 (1) 신앙고백적 요소(이 말은 성경을 ‘신앙고백’으로 여긴다고 말할 때처럼 ‘고백’으로서의 주관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2) 이 신앙고백에 대한 성찰, (3) 이 처음 두 요소에 기초한 영성입니다.
[첫째,] 신앙고백이란 교회가 믿는 내용이다. 신앙고백은 교리에 농축되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개신교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교회는 하나님이 영감 된 하나님 말씀을 통해 교회에 주신 진리를 고백한다. 어떤 주제라 해도 그 주제에 대해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느냐 또는 그 교훈을 어떤 식으로 엮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권위적인 진리가 기독교 생활과 실천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치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성경의 권위 아래 살아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수 세기 동안 교회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핵심적인 신앙고백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슬로건이다. 이 지식이 없으면,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하는 내용이 빠져 버리며, 믿음과 예배와 그 생명의 유지와 선포와 봉사의 수단을 잃게 된다. 신앙고백은 말 그대로 테올로기아(theologia), 즉 하나님 백성을 위해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서 모든 신학의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
신학의 두 번째 요소인 성찰에는 현대 세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지적인 싸움을 내포한다. 이런 성찰은 세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신학적 성찰에는 성경 안에 포함된 하나님의 계시 전체가 망라되어서 성경의 다양한 부분 사이의 연관성을 추구해 하나님의 성품과 행위와 의지를 계시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명료하게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그 성찰의 목표는 하나님이 주신 내용을 포괄적으로 이해해서 하나님의 생각이 교회의 생각 가운데 재현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있다. 둘째로, 신학적 성찰에는 과거에 대한 전체적인 연구가 포함되어야 한다. 신학적 성찰은 과거에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일하시고 역사하신 사실에서부터 현재의 폭풍우 가운데서 교회라는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해 주는 무게 중심을 찾아야 한다. 과거의 영적인 부요를 모으며, 현재를 절대화하지 않고 상대화해 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반성적인 성찰이다. 현재는 언제나 인간 정신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고양되어 있는 순간(혹은 어떤 은사주의자들이 생각하듯이,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고 착각하는 태도를 버릴 필요가 있다. 이런 태도는 교만과 어리석음을 향해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신학적 성찰은 신앙으로 고백되는 내용과 한 사회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작업은 매우 중요한데, 어느 한 시대의 사상과 가정이 교회의 마음과 생각 속으로 아주 강하게 침투하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현대성이 ‘정상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했다. 신학적 성찰이라는 특정한 맥락에서 말할 때, 교회는 현대성이 교회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지평에 교회의 생각을 맞추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현대성의 지평에 대해 하나님의 진리라는 강력한 해독제, 즉 교정 수단을 갖다 주어야 한다. 비신화화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현대성이다.
신학의 세 번째 요소에는 삶의 지혜, 즉 기독교적인 실천이 신앙고백의 기둥 위에 건설되고, 성찰의 발판에 둘러싸이도록 만드는 지혜를 구성하는 덕목을 계발하는 일이 포함된다. 이 말은 좀 단순하게 들린다. 내가 이 말을 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지금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종류의 영성이다. 이 영성은 그 성격에 있어서 도덕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존재상으로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 영성은 기독교적인 실천, 기독교적인 삶을 우선적으로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 진실의 문제로 보는 영성이며, 생각과 실천을 분리시키지 않는, 이런 분리를 거부하는 영성이다. 이런 영성이 존재할 때에만 어떤 주어진 상황 가운데서도 기독교적이 된다는 것,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난다. (데이비드 웰스, 《신학 실종》, 153-155쪽)
한편, 정 교수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역사 결정론에 머물러 있는 한,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감수성은 어느 정도 확보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섭리는 역동성을 상실한 일종의 프로그램으로 추락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역사의 우연이다. 그는 이미 예정된 부활을 확신하고 십자가를 선택한 게 아니라 자신의 모든 미래를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자기에게 다가온 십자가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예수의 완전한 순종이 바로 십자가 구원의 역동성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이미 예정되고 결정된 수순의 진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주술이고, 거꾸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절대적 순종과 신뢰의 결과로 생각하는 것은 역사이다. 그렇다. 기독교 신앙은 이미 결정된 길을 군말 없이 따라가는, 그래서 인간의 앙가주망이 근본적으로 차단된 숙명주의가 아니라 미래로 열린 길을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부단히 고뇌하고 결단하는 역사의식이다.
… <중략> …
신비라는 말은 어떤 궁극적인 실체가 은폐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생명은 그 리얼리티가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는 점에서 신비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앙의 신비는 역사의 신비에 자리하고 있다. 이에 반해 주술은 형식으로만 신비이지 실제로는 인간이 역사의 신비에서 감수해야 할 불안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와 생명의 신비를 파괴하는 인간의 자기 전략이고 자기 숭배이다. 주술은 결국 신앙의 신비를 파괴할 뿐이다. (정용섭, 《설교비평1 속 빈 설교 꽉찬 설교》, 29-30쪽)
정 교수와 저 모두가 신비를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설명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신비가 인간의 수준을 초월하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정 교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마저도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되실지 모른다는 차원에서 말하는 신비 같습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역사가 초월적이라는데 그 신비가 있고, ‘이미’와 ‘아직’ 사이의 종말적 현실에 그 은폐와 노출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비는 예수 안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 신비이며 그래서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성도들에게 신앙으로 확인되는 신비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보듯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하나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이것이 신비인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으나 우리의 눈에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들어와 있는 탓입니다.
기독교가 열어놓는 신비가 하나님 자신마저도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종말을 작정하셨다고 말하면, 그게 주술적인 말일까요? 정 교수께서는 인간이든 하나님이든 간에 누구도 미래를 확정해 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미래가 어떻게 완성될 것인지를 정하셨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역동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과연 모순일까요? 오히려 예수의 십자가가 결정된 수순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순종과 신뢰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 성경의 명시적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세례 요한에 의해 소개되었고, 예수 자신도 친히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러 오셨음을 공언했다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이것 역시 주술에 빠진 후대의 해석일 뿐일까요?
설교
정 교수의 지적대로 한국 교회 강단은 본문 해석이 부실합니다. 그것은 한국 교회 전체의 수준이 낮은 탓이기도 하고 설교자의 개인적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분명 속상하고 가슴 아픈, 우리 시대 한국 교회 설교자와 설교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설교자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고린도전서 1:26-31에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교자의 위상은 그가 갖고 있는 자질이나 능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쓰신다는 점에서 발견됩니다. 저는 설교자의 무능(無能)이 하나님을 분명히 드러내므로, 설교자는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쓰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설교자의 능력이나 열심은 이 무능함을 돕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설교자의 열심은 그 자신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항복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일 겁니다.
하나님께 설교자는 출애굽 사건의 모세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사용해 여러 기적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지팡이로부터 기적이 나오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팡이는 단지 들려서 쓰임 받을 뿐입니다. 모세의 역할이 이와 같습니다. 모세는 실은 하나님의 지팡이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 들려 기적을 일으키듯, 모세는 하나님께 들린 지팡이로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냅니다. 설교자 역시 모세처럼 하나님의 지팡이로 쓰임받습니다. 고린도전서 1:29에서 “자랑치 못한다”고 한 것은 설교자가 그를 통해 이루어진 일의 원인이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21절의 “전도의 미련한 것”에서도 확인됩니다. 전도가 왜 미련한 것이냐 하면,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로마서 10:9-15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이 어디에서 시작하는가를 역(逆)추적해보면 하나님이 그 시작이요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의 선한 결과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일 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설교가 철학, 소위 사람들의 판단에 부합하는 합리적 설명으로 이해될까봐 심히 두려워하고 떨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증거가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을 통해서만 효과를 낳게 된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고전 2:1-5).
기독교 신앙은 지식과 이해를 넘어서는 생명과 진리의 역동성, 곧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이시고 은혜로우신 개입에 정초되어 있습니다. 설교자가 그런 하나님께서 인간을 편들고 계신다는 점을 알고, 그 자신도 설교로써 그런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편들고 있다면, 그가 하는 설교는 기본은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의 설교를 비평하자면, 설교에서 신학이 실종된 현실을 먼저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설교는 신학에 튼튼히 뿌리내리고 있지 못합니다. 설교가 성경이 가르치는 계시의 내용을 제대로 담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계적이지 않으며, 이해관계에 매어있지 않으며, 인과율(因果律)을 넘어섭니다. 설교는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설교가 직면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는 ‘세속성’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걸어온 지난 모든 나날동안 끊임없이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해 온 것이 바로 세속성의 문제입니다. ‘세속성’이란 하나님이외의 것을 궁극적인 목적과 가치로 삼는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현대에 이 세속성은 절대를 부인하는 다원주의로, 개인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실용주의로, 값싼 보편성을 위한 대중성으로, 모양을 바꿔가며 우리를 시험하며 공격해 옵니다.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그분의 명령을 좇으며 그분만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교회 안에서도 성경을 펴서 가르치되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딤후 3:2) 성경이 전해주는 계시를 거스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는 말씀을 통해, 돈으로 되는 것, 곧 세상의 무가치한 것을 목적으로 삼는데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인간의 필요에 대해 말하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속주의가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 및 종교 개혁과 부흥, 선포와 회심에 고정시키는 대신에, 우리 자신과 우리 나라와 우리 세계와 우리의 시간과 공간과 우리의 순간에 고정시키고 있음이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각 지역의 크리스천 서점들과 강단들과 주일학교 커리큘럼과 방송과 종교적 담화에도 확연히 드러난다.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104쪽)
교회의 설교는 교회가 성경에서 배워 전통으로 물려받은 신앙고백에 근거하고 그 고백에 대한 신학적 통찰과 종합으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이로써 모든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제기하는 궁극적인 질문에 직면하여, 한 인간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게 될 때, 그의 곤고한 영혼은 비로소 평안과 위로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소위 닦달과 나열 등의 유치한 설교 행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에 제일 많이 하는 것이 닦달과 잔소리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수준 높고 훌륭한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이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우리가 늘 게으르고 무지하고 완악하다는 사실을 폭로합니다. 부모는 진정 자녀들을 사랑할 때 책망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설교는, 늘 죄와 싸우며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완성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 청중들에게 죄와의 싸움을,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주인 삼으려는 ‘자기 의(義)’와의 싸움을 싸우도록 애써 독려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시험 앞에 우리는 얼마나 자주 넘어집니까? 저는 다시금 마이클 호튼의 진단에 공감합니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간증들’을 생각해 보라. 개인적인 체험들을 ‘나누는 일’이 공동 기도와 공동 성경연구, 예배와 증거를 대신하고 있다. 개인의 영적인 자서전이 저 나사렛 사람의 생애와 시대를 대신해 버렸다”(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88쪽).
맺는말
토론이나 논쟁으로 정 교수나 저의 신학적 입장에 변화가 생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 교수의 설교비평을 읽으며 우리 각자의 견해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정 교수의 복음에 대한 열정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서로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참된 대화는 강요와 설득이라는 목적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기본 조건으로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 교수의 한국 교회 강단을 향한 비판이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애정에서부터 출발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저는 가슴깊이 그 충정에 공감합니다. 개인적으로 정 교수의 비평 속에서 범상치 않은 영적 통찰과 진정한 영성의 편린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 서로 다른 전통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진심과 목표는 같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영광과 자랑이 더 분명히 드러나고, 더 많은 영혼들에게 진리와 생명이 올바르게 증거 되며, 그럼으로써 한국 교회가 성숙해가는 데에 우리의 공통의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관점과 견해에 있어 많이 다르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 곧 ‘하나님과 복음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근본적 목적에서 일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다름과 같음 모두를 사용하셔서 한국 교회 앞에 우리의 사명이 합력하여 선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기독교사상, 2007년 5월호)
박영선 목사는 한양대학교 졸업, 총신대학교 신대원 졸업, 미국 리버티 벱티스트 세미나리 명박, 현재 남포교회 담임 목사이며, 합동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교수로 있다. 저서로 <구원의 완성 1,2>, <그제야 끝이 오리라>, <구원, 그 이후> 외 다수가 있다.
- 정용섭 교수의 《설교비평》에 대한 신학적 단상-
정용섭 교수의 설교비평에는 한국 교회가 귀담아들어야 할 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요즘의 설교가 인간적 욕망을 부추기고 자극하며, 복음을 인간의 필요나 채워주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정 교수께서는 한국 교회에서 지금 복음이 설교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설교를 통해 기독교의 본질이 제대로 전달되며 설명되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문제 제기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바로 여기에서 정 교수의 설교비평과 관련하여 더 생각해 보아야할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설교를 통해 복음, 혹은 기독교의 본질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느냐 하는 물음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이 무엇이며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공통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 교수의 설교비평에 납득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신앙은 무엇이며 신학적 과제란 무엇인가에 대해 같은 입장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정 교수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만일 기독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면, 정 교수의 설교비평에 우리가 아무리 많이 공감하고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상 피상적인 수준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신학 전통
그간의 설교비평을 읽으면서 정 교수께서 갖고 계신 신앙과 신학에 대한 이해가 어떤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정 교수께서는 설교비평을 할 때 자주, 이런 설교자들이 있는 줄 여태까지 잘 몰랐으며, 그래서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그 설교자들을 대한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제게는 익숙한 설교자들을 정 교수께서는 처음 대하시는 걸 보면, 정 교수와 저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아마도 이런 형편은 그동안 한국 교회를 크게 양분(兩分)해온 신학적 전통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 교수의 설교비평을 통해서 신앙과 신학에 대한, 저와는 다른 입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 교수의 설교에 대한 비평에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도, 정 교수와 저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정 교수께서 기독교에 대한 바른 이해 ―많은 설교들에서 설명되는 것과는 대비되는― 라고 제시하는 입장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따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 발견한 것은 정 교수와 제가 어떤 설교를 대하여 거기에서 같은 문제점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같은 기준에 입각해 발견된 것은 아닐 수 있겠다는 점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정 교수와 저는 실상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차차 얘기되겠지만, 제게 있어서, 신학은 그 무게를 ‘신’(神)께 두고 신께서 의지적으로 보여주시는 계시만을 그 원리로 삼고 있다면, 정 교수께서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는 이른바 ‘학문’에 무게중심을 두고 신학을 해나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제가 인간의 근본적 특성을 죄인 됨에서 찾는다고 한다면, 정 교수께서는 인간에게 보다 적극적 의미에서의 가능성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대비점들은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라고 할 수 있는 복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정 교수와 저 사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빚어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신학적 차이가 설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차이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교비평 작업에서 정 교수께서는 기독교에 대한 다른 이해를 가진 설교자들을 정 교수의 신학이해에 따라 평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만일 실제로 정 교수의 설교비평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설교비평은 원래의 의도하던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관점과 기준을 가지고 다른 관점과 기준을 가진 사람의 행동을 평가한다면, 그 사람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의 평가는 단지 오해만을 불러올 뿐입니다. 먼저 기독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 공통된 기반이 마련되어야 비로소 설교의 목적과 내용에 대해서도 동의가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전제가 있어야 실질적으로 유익한 설교비평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복음에 대한 이해라든가 신학에 대한 이해에 있어 정 교수와 저 사이의 차이점을 검토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정 교수의 신학적 입장을 살펴보면서 크게 의문이 든 것은 두 가지 문제에서였습니다. 첫째는 신학적 인식론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고, 둘째는 여러 신학적 문제들과 직결되는 인간에 대한 이해에 관한 문제입니다.
판넨베르크 신학
정 교수의 신학을 살펴보기 위해 저는 먼저 판넨베르크 신학에 대해 살펴보아야 했습니다. 나중에 더 분명히 발견한 사실이지만, 정 교수께서 제시하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판넨베르크의 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판넨베르크의 계시론에 대해 책을 쓰시기도 했고(정용섭,《말씀신학과 역사신학― 판넨베르크의 계시론을 중심으로》), 《신학과 철학》, 《조직신학》과 설교집들을 비롯한, 판넨베르크의 여러 책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저는 판넨베르크 신학의 특징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그의 신학의 특징으로 크게 두 가지가 지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학의 두 가지 특징은 제가 정 교수와의 차이점으로 확인한 두 가지 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판넨베르크 신학의 독창적 개념은 ‘보편사’와 ‘미래성’이라고 합니다. 보편사 개념을 통해 신학은 역사와 연결되며, 미래성 개념을 통해 신학은 종말론적 특징을 지니게 됩니다.
첫째 특징은 역사 전체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보는 ‘보편사’ 개념입니다. 판넨베르크는 기독교 진리의 보편적 타당성을 합리적으로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신학이 보편사의 지평 안에서 통용되는 합리성이라는 기준에 합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강조는 신학을 계시에 매이지 않게 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판넨베르크는 “바르트가 강조하는 것처럼 신학이 계시라는 폐쇄되고 권위주의적인 개념에만 매달리게 될 때 신학은 보편성을 결여한 초라한 특수 학문이 되어 버리고 만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김영한, ‘볼파르트 판넨베르그’,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 196쪽). 그는 신학이 보편성을 띤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배타적인 계시와의 관련성을 끊어야 한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정 교수도 이런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말씀의 신학을 극복하여 전체 역사 가운데서 신학의 보편성을 찾고자 한다”(정용섭, 《말씀신학과 역사신학》, 148쪽).
둘째는 미래를 강조하는 종말론적 신학의 특성입니다. 판넨베르크는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과거와 현재를 결정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미래의 존재론적 우위성”입니다. 미래는 현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힘이라는 의미에서 창조적 성격을 띱니다. 결과적으로, 세계는 불변적으로 지속되는 질서가 아니라 열린 과정으로 파악됩니다. 현재를 결정하는 것은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열린 미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특징들은 정 교수께서 “인문학적 성서 읽기”를 강조하는 것과, 또 과거보다는 미래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하튼 판넨베르크 신학이 다음과 같이 요약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이성은 신앙의 적이 아니라 친구이며, 교회 전체의 삶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구속사 대신에 보편사, 맹목적 신앙보다는 이성적 통찰, 개인적 결단보다는 역사적 전승을 강조한다. 그는 기독교 진리의 합리성을 위하여 이성의 비판을 강조하는 이성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김영한, ‘볼파르트 판넨베르크’,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 217쪽)
이와 같은 특징은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제가 배워온 신학과 어떻게 다른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첫째, 제가 배운 바로는, 신학적 작업은 계시에 의존해서 이루어집니다. 신학의 계시 의존성이란, 신앙의 내용과 신학적 물음이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계시와, 인간 역사 속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초월적 하나님과 관계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철학이 신학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도 인정됩니다. 인식하는 이성의 유한성과 제한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패커의 다음과 같은 의문에 공감합니다. “나는 조직신학의 주제를 하나님에 관해 계시된 진리로 개념화 시키는 일이 적절한지 의문이 간다. … 이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과 진정한 하나님을 아는 것 사이를 이간시키는 것이다”(J. I. Packer,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Spirituality, pp. 2, 8.).
둘째, 역사, 더 구체적으로 ‘미래’에 대해서도 저는 다르게 이해합니다. 역사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셨으며, 미래, 곧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성취된다고 생각합니다. 판넨베르크가 역사를 “열린 과정”이라고 말한다면, 제가 배운 신학은 역사는 하나님의 뜻하심에 따라 정해져 있다고 여깁니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한 통치를 계속하시며 결국에는 당신께서 정하신 바대로 역사의 목적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즉 신(神)이라는 존재가 인격적이고 전능하다면 정당한 목표와 그것을 이룰 능력과 신실함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역사를 보며 신앙인이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선하신 분이시라는 점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분의 통치 아래에서 실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과 씨름을 벌이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사상들과의 씨름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과의 씨름 말이다”(알리스터 맥그래스,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 88쪽).
신학적 인식론
이제 정 교수의 신학에 대해 몇 가지 점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먼저 제가 정 교수의 신학적 이해에 관해 갖게 되는 의문은 계시와 관련된 것입니다. 계시에 대한 이해는 신학적 인식론의 문제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신학이 하나님에 대한 논의라고 하면, 대체 하나님에 대해 우리 인간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전통적인 답변은 인간은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일 것입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는 종교라는 점을 전제할 때, ‘계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은 이후 모든 신학적 논의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어떤 경로로 우리에게 도달하는지에 대해 정 교수께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계는 곧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에 접근하는 길이다. 이런 방식 말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도달하겠는가? 진리에 도달해 보려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사실 이런 인식론적 근거에서 이루어진다. (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192쪽)
앞서 살펴본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에 대한 강조와 맥을 같이하는 설명으로 보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하나님의 계시란 세계를 통해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의 창조자이시므로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며, 우리는 이에 주목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앎은 “하나님 스스로 자기의 본질을 노출하는 것에 대한 ‘자연적 앎’의 문제”라고 덧붙여 설명됩니다(정용섭, 《말씀신학과 역사신학》, 192쪽). 인간이 자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설명을 따라가면서, 정 교수의 계시 이해가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로 여기는 기독교의 전통적 이해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 교수의 이 같은 입장에는 이성적 판단에 따라 성경을 역사적 주관적 신앙고백 문서로만 받아들이려고 한 계몽주의 이후 학문의 결론이 그대로 전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저는 성경이야말로 계시의 외적 인식원리라는 전통적 입장을 따릅니다(Louis Berkhof,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 96.). 성경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 주신 특별한 계시라고 이해합니다. 성경에 담긴 내용이, 인간 쪽의 반응이 있기 전에, 인간에게 나타나시고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책이며, 인간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물론 저도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고 있으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이 그의 창조세계에 분명히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롬1:20).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중단하실 수 없으며, 그분이 지으신 세계를 그분의 역사로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계시만으로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큰 장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과 분리되었다고 천명합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져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눈이 멀어져, 해가 빛나고 있는데도 보지 못합니다. 따라서 세계만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기란 더더욱 어려워진 것입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둘 때, 하나님 편에서 온 보다 명확한 계시의 필요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왜 정 교수께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주신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근대성에 대한 요즘의 연구들이 보여주듯, 인간 이성을 최종적 판단자로 여긴 계몽주의적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경이 객관적 계시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합리적 인식론에 따른 결과입니다. 합리적 인식론이란 결국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판단되어 수용될 수 있는 것만 진리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성은 인간 고유의 인식 수단일 뿐, 진리의 원천이나 진리 판별의 절대적 기준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성에게 궁극적 판단 규범의 자리를 허락한 근대의 과학적 방법도 역시 진리를 찾아내는 유일하거나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서 레슬리 뉴비긴의 논평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성과 계시의 역할에 관한 논쟁에서의 문제점은 어떻게 경험된 자료를 이해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건들을 과연 전적으로 지금 세속적인 역사 기술에서 사용하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심리학적인 범주를 가지고 이해해야 하는가의 논쟁과, 이런 범주들의 유용성이나 적절함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이 이야기를 상술된 모든 사건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개인적인 의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인정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들이다. 이성은 사물의 진상에 관한 독자적인 정보의 출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 활동의 한 단면이다. 이성과 계시에 관한 오랜 논쟁에서 나타난 두 가지의 차이점은 각기 다른 정보의 출처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사회에서의 복음》, 29-30쪽)
인간이 이성적 판단을 근거로 성경을 계시로 인정하길 거부한 것은 이성의 역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성의 판단을 근거로 하여 계시의 진리성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신적 진리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정 교수께서는 초월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계시를 주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크게 생각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지적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요?
한편, 만일 하나님께서 의지를 갖고 우리에게 계시를 주신다면, 그 계시는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해 구속력을 띠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정 교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과학은 과학이다. 진화론은 과학적 현상적으로 진리일 뿐이고 기독교 신앙은 다른 지평에서 영적인 진리를 말한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지 독단론에 빠지지 말고 서로가 진리의 지평을 넓혀 가면 충분하다. (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215쪽)
정 교수께서는 신앙과 과학의 영역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과학과는 다른 지평의 영적 진리와만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칸트 이후의 계몽주의적 사고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고백이라는 생각 자체가 외부적인 객관적 기준틀인 진리에서 내적이며 주관적인 직관으로 바뀌어 버렸다. 또한 칸트 이후,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 할 내용을 정의하는 것은 어떤 외적인 권위가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가 되었다”(데이비드 웰즈, 《신학 실종》, 181쪽).
계몽주의의 영향 속에서 신학에서마저도 믿음은 배제되고 이성만이 절대적 판단기준으로 인정됩니다. 신학은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신앙에서 출발할 수 있는 것인데, 이제 계시 자체가, 주관적이라는 이유로, 신학의 논의에서 배척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성적 판단을 근거로 신학적 작업이 이루어지고, 성경에 기록된 초월자 하나님의 역사는 신화적 세계관에 근거한 진술일 뿐 현실성을 결여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성적 판단을 따라 신앙을 설명하려는 인간의 해석마저도 자의적 성격을 띠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적 판단에 대한 강조 역시 시대적 환경의 영향 속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터 버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각자 나름의 “타당성 구조”에 따라 판단합니다. 어떤 일이 타당한가에 대한 판단은 이미 전제되고 있는 어떤 사고 체계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이성적 판단을 최종적 기준으로 설정한 것부터가 근대 이후 계몽주의의 전제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합리적 인식론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전제 자체가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인식과 이해의 방법이 주로 합리성에 근거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성과 이성이 파악하는 자연의 질서가 모두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성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된 선물이라고 말해야 더 적절한 표현입니다. 이성이 하나님보다 앞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성을 절대적 기준이신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종교 개혁의 후예들은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 세계를 탐구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종교 개혁의 전통에서는 자연과 은혜 모두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영역이다. 종교 개혁 전통이 자연을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그 운동의 후예들에 의해서 근대 과학이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예들은 소위 ‘하나님의 두 번째 책’(자연)을 연구해서 자연의 저자와 그 분의 창조 세계를 더 잘 이해하려고 시도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과학이 ‘어떻게’라는 물음들에 대한 답변들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첫 번째 책인 성경은 ‘왜’라는 물음들에 대해서 대답을 제공해 주었다.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101쪽)
버스에 탄 사람이 버스를 밀 수 없듯이, 우리는 우리를 떠받치는 근거를 들여다보거나 조작할 수 없습니다. 욥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초월적 근거를 다 이해할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욥은 이 물음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정 교수께서 주장하시는 신학적 인식론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계시로서보다는, 주관적 수준의 ‘신앙고백’이라고 여겨집니다. 성경을 보편사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에 접근해간 사건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성경은 사실에 대한 증언으로서 갖는 객관성을 잃고, 인간의 주관적 산물로 격하되고 맙니다. 성경을 가변적인 ‘신앙고백’으로 취급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실재(實在)에 뿌리 내리지 못한, 주관적 의견만을 갖게 될 뿐입니다. 저는 이런 결론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이성적 판단에 따라 성경이 재단(裁斷)될 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과연 알 수 있겠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설교비평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정 교수께서는 왜 성경을 설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고 묻게 됩니다. 저는 성경이 하나님의 약속과 꾸짖음을 담고 있으며, 성육신으로 절정을 이루는 신적 계시라고 여깁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을 풀어주는 설교가 필요하며, 설교는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를 면밀히 이해하는 일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계몽주의자들이 변론하고자 했던 기독교라는 종교는 신과 자연과 인간에 관한 영원한 형이상학적 진리의 체계였다. 성경은 자연의 직접적인 관찰이나 내적인 인간의 관념들에 대한 성찰에 의해 발견될 수 없는 영원한 진리에 관한 정보의 출처다.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사회에서의 복음》, 32쪽)
인간 이해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성경관에 대한 해묵은 논쟁을 재연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계시에 대한 입장 차이는 신앙과 신학에 대한 이해에 있어 큰 차이를 빚어내는 두 번째 주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에 외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계시에 대한 이해는 무엇보다도 인간관(人間觀)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종교를 성립시키는 세 가지 요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가 성립하려면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는, 첫째, 그 종교의 주인이 되는 신(神)의 자기 설명, 둘째, 그 신과 인간과의 관계, 셋째, 세계와 역사의 목적에 대한 설명이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요건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샤머니즘이 되거나, 주술과 주문만이 있는 미신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세 가지 요건을 갖고 기독교 신앙을 다시 진술한다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구원주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믿는 신(神)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둘째, 그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구원자로 나타나십니다. 셋째, 모든 인간은, 그리고 이 세계와 역사는 종국에 가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구도를 통해 생각해보면, 정 교수와 제가 인간을 어떻게 다르게 이해하는지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정 교수께서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한다면, 저는 구속주 하나님을 강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서로 다른 인간관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죄(罪)에 대한 이해에 따라 하나님과 그분이 행하시는 일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로 귀결된다고 하겠습니다. 인간관에 있어서의 차이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전망에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 신앙고백의 핵심은 구원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구원주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속죄를 위해 성육신하셔서 인간으로서 생애를 보내신 후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사셨다는 것을 하나님 계시의 핵심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계시의 내용은 인간의 문제적 상태, 곧 죄(罪)를 심각하게 전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표현을 따르자면, 인간은 죄로 인해 야기된 죽음의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새로 태어나야 했고, 이를 위해 구원주 하나님인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할 때, 기독교 신앙의 필수적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고 그분의 살아나심과 연합하는 데에 있습니다(롬 6). 세례와 성찬이 보여주듯,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1). 이렇게 성경에서 발견하는 우리 신앙의 출발점은 인간이 구원주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형편에 처해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복음은 ‘죄’라고 불리는 심각한 현실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갖는 심각성을 염두에 둘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구원주로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사실에도 이미 내포되어 있지만, 인류가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데서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은 특별한 은총이며, 이 사건에 대한 계시는 특별한 계시라고 여겨져야 합니다. 예수의 사역을 통해, 인간은 눈을 뜨게 되며, 그에게 생명이 회복됩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으로 태어나기에, 구원의 은총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알지도 감지하지도 못합니다.
이 특별한 은총을 통해 주어지며 특별한 계시를 통해 알려지는 구원으로, 인간은 구원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인간이 세계를 통해 주신 계시와 창조 속에서 드러난 은총 속의 하나님, 곧 창조하시고 지금도 섭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만물을 자기 앞에 세우실 심판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한편, 정 교수께서 보여주는 인간 이해에 인간의 심각한 형편, 곧 죄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설교에 대한 비평에서도 그러했듯, 정 교수께서는 기독교적 삶에서 죄가 강조되는데 대해 우려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의식에 묶여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투쟁하고, 용서하고, 변혁해 나가도록 돕는다. 이 사실이 복음의 핵심이다”(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229쪽).
인간의 죄(罪)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을 때,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어떻게 이해될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 경우에는, 위에서 말한 세 요건으로 말해보자면, 강조점이 구원주 하나님보다는 창조주 하나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인간에게 죄라는 근본적 뒤틀림이 있다는 점을 그다지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펼치신 은혜, 곧 이른바 ‘일반 은총’의 측면만을 주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창조 때 주어진 은총과 그 창조로부터 알려진 하나님에 대한 계시에 주목할 때, 세계와 역사에 대한 이해 역시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통치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정 교수께서 취하시는 신학적 입장은 바로 이런 경향을 띠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 교수께서 인문학적 소양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저는 기독교의 복음을 판넨베르크처럼 인간 보편의 진리로서 이해하려는 의도를 읽게 됩니다. 물론, 복음은 인간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제시하는 새로운 삶이 인간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인 것일까요? 성경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열어놓는 새로운 인간상이 죄라는 근본적 문제 상황을 해결 받은 인간에게나 적용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과 그의 삶에 대해 탐구해온 그간의 인문학적 발견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신학적 작업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 백성의 특징을 이해하는데 있어, 성경이 진단하듯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이해는 피상적인 것에 그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며 하나님의 창조로 베풀어진 은총을 받은 존재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누구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와 연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별한 은총의 개입이 반드시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죄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인 이 특별한 은총은 인간 사이에 절대적 불연속을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는 그들 양자를 공통적으로 묶어낼 수 없는 근본적 차이가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굳이 인간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공통점을 찾자면, 그것은 죄가 주도권을 잡은 세상에 속한 죄인 된 본성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 이해의 차이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관점에 영향을 끼칩니다. 만일 죄에 대한 심각한 고려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행동이 만들어내는 역사와 사회도 창조라는 일반적 은총에 입각해 이해될 것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변증법적 과정에서 함께 일하는, 그분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때 인간의 죄인 됨이라는 특징이 중요한 변수로 고려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 정 교수께서는 미래의 종말의 향방은 인간의 역할에 따라 열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역사의 과정에 죄인인 인간이 과연 어떤 적극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정 교수의, 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사명에 대한 이해에 있어 이런 인간 이해가 그대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정 교수께서는, 한 설교비평문에서, 성서가 억울한 약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언급합니다. 그런데 저는 과연 성경의 핵심적 문제 제기가 그런 것인가 묻게 됩니다. 그것이 혹시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고백을 대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여성이나 소수 인종의 인권 문제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 혹 환경과 생태 문제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들이 각각 우리의 삶에 중요한 문제들이라는 점을 수긍하면서도,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강조가 기독교가 전하는 특별 은총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데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을 갖게 됩니다. 이런 이슈들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담아내는 근본적 주제라고 할 수 있을까요? 데이비드 웰스는 이런 요즘의 추세가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고백”이 사라진 데서 유래한다고 진단합니다.
현대라는 시기에, 하나님의 객관적인 진리와 시공간의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것에 대한 공적인 고백이라는 신앙고백은 학문 세계에서 매우 어색한 것이 되었다. … 이와 같이 일단 신앙고백이 사라져 버리자, 신학적 성찰이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신학적 성찰이 하나님 말씀의 연구라는 분야를 상실하게 되자, 동양적 영성에서 급진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스트 이데올로기에서 환경에 대한 관심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신학 성찰의 주제를 찾게 되었다. 더욱이 계급적인 관심사가 교회와 학문 세계에 끼어들어서 그 간격을 벌려 놓았다. (데이비드 웰스, 《신학 실종》, 156쪽)
죄에 대한 고려 없이 사회나 역사에 대해 논하는 것은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문제 제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죄에 대한 고려 없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는 방식도 성공적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역사와 실존은 모두 죄로 인한 왜곡, 오염, 부패를 증언할 뿐입니다. 기독교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으로, 죄로 인한 절망과 파멸의 현실을 깨고 재창조로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돌연한 은혜와 초월적 기적의 개입으로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되며, 새롭게 태어남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파멸의 운명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듯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식으로 세상과 역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죄에 사로잡힌 인간의 구원이 전제되어야만, 비로소 그 인간 개인이 이웃 곧 사회와 역사에 새롭게 관련되기 시작합니다. 죄인 됨으로부터의 해방이 개인에게 이루어질 때에야, 그에게 사회와 역사에서의 적극적 역할이 주어집니다. 저는 이런 역할을 ‘성화’라는 전통적 신학 개념 속에서 이해합니다. 성화의 과정을 통해 인간은 그 존재가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이와 같은 존재가 삶의 현장에서 이웃, 곧 사회와 역사 앞에 지는 책임이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로 비유되는 심판의 현장은 바로 이런 측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신앙적 실천적 책임은 구원에서 비롯된 불신자와의 다름, 곧 ‘죄’라는 측면에서의 다름인 ‘거룩’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거룩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죄인이란 하나님과 분리된 자이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그의 백성이요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었을 때, 산상설교가 가르치는 “빛과 소금”, “생명”, “진리”, “착한 행실”의 정의가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43 이하에서 설명하는,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이 보이는 신앙 인격적 정체성은 바로 이런 사람들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펼쳐진 삶은 이런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삶은 이 세상에서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도 완성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셨지만, 우리 인간은 아직 그분의 약속을 붙들고 그분의 성취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왜 이런 긴장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물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하나님의 전적인 예비하심에 맡겨져 있고, 때가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허락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기다림의 시간을 두시는 것은 그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 받는 성도들을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그 충만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람들을 부르시는 구원사역을 연장해나갈 시간이, 그리고 부름 받은 그분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되는 훈련과 완성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적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에베소서 2:22에서 “너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부부 사이의 관계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연합을 비교하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내용을 소유하기도 하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쓰임 받는 기관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 노릇 하시는 질서에 있어, 그리고 그분으로 말미암는 완성에 있어, 교회는 독특한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엡 4:13-16). 교회는 잘못 판단하고 세상에 타협하기도 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교회야말로 “진리를 함께 찾아가는 일을 인도함에 있어, 사고와 행위 모두에서 우리가 어디를 향해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를 안다”(뉴비긴, 263쪽)고 믿습니다.
신학의 근본 토대
사실 하나님께 무슨 일반적 은총과 특별한 은총이라는 구분이 있겠습니까? 어떻게 초월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시공의 세계에 갇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학적 성찰은 신앙을 그 대상으로 삼는 것인데, 신앙은 합리성을 넘어서는 대상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인간보다 크신, 초월적이신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성경에서 들으며, 그분을 신앙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께 얼마나 의존적 존재인가 하는 점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정 교수의 신학적 입장을 보면서 갖는 의문은, 정 교수께서 결국 하나님보다는 인간을 궁극적 기준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정 교수께서 기독교 신앙의 ‘신비’에 대해 여러 곳에서 재차 강조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신비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 구성된 신학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기독교 신앙이 인간으로는 넘볼 수 없는 차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우리의 차이가 빚어진 것일까요?
제 관찰로는 정 교수께서 전제하시는 신학은 사실보다는 의미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중대한 의미든 간에 그 의미가 발생한 터전인 사실이 견고할 때에만 비로소 그 사실에 의미가 담기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성적 판단에서 비롯되는 합리성이나 보편성의 이름으로, 사실을 재단하고 제한하며 배제하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신앙의 실제적 터전을 놓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 교수의 신학은 자신의 근거를 합리성을 근간으로 한 자기 확신에서 찾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합리성에 따라 판단되실 존재일까요? 오히려 우리의 합리성이 하나님의 주권을 근거로 판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신학이 어떤 것인지는 데이비드 웰스의 설명으로 더 분명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소 긴 인용이지만 함께 읽어보고 싶습니다. 데이비드 웰스에 따르면, 신학은 세 가지 필수적인 측면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들은 (1) 신앙고백적 요소(이 말은 성경을 ‘신앙고백’으로 여긴다고 말할 때처럼 ‘고백’으로서의 주관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2) 이 신앙고백에 대한 성찰, (3) 이 처음 두 요소에 기초한 영성입니다.
[첫째,] 신앙고백이란 교회가 믿는 내용이다. 신앙고백은 교리에 농축되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개신교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교회는 하나님이 영감 된 하나님 말씀을 통해 교회에 주신 진리를 고백한다. 어떤 주제라 해도 그 주제에 대해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느냐 또는 그 교훈을 어떤 식으로 엮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권위적인 진리가 기독교 생활과 실천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치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성경의 권위 아래 살아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수 세기 동안 교회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핵심적인 신앙고백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슬로건이다. 이 지식이 없으면,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하는 내용이 빠져 버리며, 믿음과 예배와 그 생명의 유지와 선포와 봉사의 수단을 잃게 된다. 신앙고백은 말 그대로 테올로기아(theologia), 즉 하나님 백성을 위해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서 모든 신학의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
신학의 두 번째 요소인 성찰에는 현대 세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지적인 싸움을 내포한다. 이런 성찰은 세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신학적 성찰에는 성경 안에 포함된 하나님의 계시 전체가 망라되어서 성경의 다양한 부분 사이의 연관성을 추구해 하나님의 성품과 행위와 의지를 계시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명료하게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그 성찰의 목표는 하나님이 주신 내용을 포괄적으로 이해해서 하나님의 생각이 교회의 생각 가운데 재현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있다. 둘째로, 신학적 성찰에는 과거에 대한 전체적인 연구가 포함되어야 한다. 신학적 성찰은 과거에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일하시고 역사하신 사실에서부터 현재의 폭풍우 가운데서 교회라는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해 주는 무게 중심을 찾아야 한다. 과거의 영적인 부요를 모으며, 현재를 절대화하지 않고 상대화해 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반성적인 성찰이다. 현재는 언제나 인간 정신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고양되어 있는 순간(혹은 어떤 은사주의자들이 생각하듯이,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고 착각하는 태도를 버릴 필요가 있다. 이런 태도는 교만과 어리석음을 향해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신학적 성찰은 신앙으로 고백되는 내용과 한 사회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작업은 매우 중요한데, 어느 한 시대의 사상과 가정이 교회의 마음과 생각 속으로 아주 강하게 침투하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현대성이 ‘정상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했다. 신학적 성찰이라는 특정한 맥락에서 말할 때, 교회는 현대성이 교회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지평에 교회의 생각을 맞추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현대성의 지평에 대해 하나님의 진리라는 강력한 해독제, 즉 교정 수단을 갖다 주어야 한다. 비신화화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현대성이다.
신학의 세 번째 요소에는 삶의 지혜, 즉 기독교적인 실천이 신앙고백의 기둥 위에 건설되고, 성찰의 발판에 둘러싸이도록 만드는 지혜를 구성하는 덕목을 계발하는 일이 포함된다. 이 말은 좀 단순하게 들린다. 내가 이 말을 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지금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종류의 영성이다. 이 영성은 그 성격에 있어서 도덕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존재상으로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 영성은 기독교적인 실천, 기독교적인 삶을 우선적으로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 진실의 문제로 보는 영성이며, 생각과 실천을 분리시키지 않는, 이런 분리를 거부하는 영성이다. 이런 영성이 존재할 때에만 어떤 주어진 상황 가운데서도 기독교적이 된다는 것,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난다. (데이비드 웰스, 《신학 실종》, 153-155쪽)
한편, 정 교수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역사 결정론에 머물러 있는 한,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감수성은 어느 정도 확보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섭리는 역동성을 상실한 일종의 프로그램으로 추락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역사의 우연이다. 그는 이미 예정된 부활을 확신하고 십자가를 선택한 게 아니라 자신의 모든 미래를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자기에게 다가온 십자가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예수의 완전한 순종이 바로 십자가 구원의 역동성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이미 예정되고 결정된 수순의 진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주술이고, 거꾸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절대적 순종과 신뢰의 결과로 생각하는 것은 역사이다. 그렇다. 기독교 신앙은 이미 결정된 길을 군말 없이 따라가는, 그래서 인간의 앙가주망이 근본적으로 차단된 숙명주의가 아니라 미래로 열린 길을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부단히 고뇌하고 결단하는 역사의식이다.
… <중략> …
신비라는 말은 어떤 궁극적인 실체가 은폐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생명은 그 리얼리티가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는 점에서 신비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앙의 신비는 역사의 신비에 자리하고 있다. 이에 반해 주술은 형식으로만 신비이지 실제로는 인간이 역사의 신비에서 감수해야 할 불안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와 생명의 신비를 파괴하는 인간의 자기 전략이고 자기 숭배이다. 주술은 결국 신앙의 신비를 파괴할 뿐이다. (정용섭, 《설교비평1 속 빈 설교 꽉찬 설교》, 29-30쪽)
정 교수와 저 모두가 신비를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설명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신비가 인간의 수준을 초월하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정 교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마저도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되실지 모른다는 차원에서 말하는 신비 같습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역사가 초월적이라는데 그 신비가 있고, ‘이미’와 ‘아직’ 사이의 종말적 현실에 그 은폐와 노출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비는 예수 안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 신비이며 그래서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성도들에게 신앙으로 확인되는 신비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보듯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하나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이것이 신비인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으나 우리의 눈에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들어와 있는 탓입니다.
기독교가 열어놓는 신비가 하나님 자신마저도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종말을 작정하셨다고 말하면, 그게 주술적인 말일까요? 정 교수께서는 인간이든 하나님이든 간에 누구도 미래를 확정해 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미래가 어떻게 완성될 것인지를 정하셨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역동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과연 모순일까요? 오히려 예수의 십자가가 결정된 수순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순종과 신뢰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 성경의 명시적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세례 요한에 의해 소개되었고, 예수 자신도 친히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러 오셨음을 공언했다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이것 역시 주술에 빠진 후대의 해석일 뿐일까요?
설교
정 교수의 지적대로 한국 교회 강단은 본문 해석이 부실합니다. 그것은 한국 교회 전체의 수준이 낮은 탓이기도 하고 설교자의 개인적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분명 속상하고 가슴 아픈, 우리 시대 한국 교회 설교자와 설교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설교자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고린도전서 1:26-31에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교자의 위상은 그가 갖고 있는 자질이나 능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쓰신다는 점에서 발견됩니다. 저는 설교자의 무능(無能)이 하나님을 분명히 드러내므로, 설교자는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쓰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설교자의 능력이나 열심은 이 무능함을 돕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설교자의 열심은 그 자신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항복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일 겁니다.
하나님께 설교자는 출애굽 사건의 모세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사용해 여러 기적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지팡이로부터 기적이 나오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팡이는 단지 들려서 쓰임 받을 뿐입니다. 모세의 역할이 이와 같습니다. 모세는 실은 하나님의 지팡이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 들려 기적을 일으키듯, 모세는 하나님께 들린 지팡이로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냅니다. 설교자 역시 모세처럼 하나님의 지팡이로 쓰임받습니다. 고린도전서 1:29에서 “자랑치 못한다”고 한 것은 설교자가 그를 통해 이루어진 일의 원인이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21절의 “전도의 미련한 것”에서도 확인됩니다. 전도가 왜 미련한 것이냐 하면,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로마서 10:9-15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이 어디에서 시작하는가를 역(逆)추적해보면 하나님이 그 시작이요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의 선한 결과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일 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설교가 철학, 소위 사람들의 판단에 부합하는 합리적 설명으로 이해될까봐 심히 두려워하고 떨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증거가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을 통해서만 효과를 낳게 된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고전 2:1-5).
기독교 신앙은 지식과 이해를 넘어서는 생명과 진리의 역동성, 곧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이시고 은혜로우신 개입에 정초되어 있습니다. 설교자가 그런 하나님께서 인간을 편들고 계신다는 점을 알고, 그 자신도 설교로써 그런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편들고 있다면, 그가 하는 설교는 기본은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의 설교를 비평하자면, 설교에서 신학이 실종된 현실을 먼저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설교는 신학에 튼튼히 뿌리내리고 있지 못합니다. 설교가 성경이 가르치는 계시의 내용을 제대로 담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계적이지 않으며, 이해관계에 매어있지 않으며, 인과율(因果律)을 넘어섭니다. 설교는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설교가 직면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는 ‘세속성’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걸어온 지난 모든 나날동안 끊임없이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해 온 것이 바로 세속성의 문제입니다. ‘세속성’이란 하나님이외의 것을 궁극적인 목적과 가치로 삼는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현대에 이 세속성은 절대를 부인하는 다원주의로, 개인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실용주의로, 값싼 보편성을 위한 대중성으로, 모양을 바꿔가며 우리를 시험하며 공격해 옵니다.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그분의 명령을 좇으며 그분만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교회 안에서도 성경을 펴서 가르치되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딤후 3:2) 성경이 전해주는 계시를 거스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는 말씀을 통해, 돈으로 되는 것, 곧 세상의 무가치한 것을 목적으로 삼는데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인간의 필요에 대해 말하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속주의가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 및 종교 개혁과 부흥, 선포와 회심에 고정시키는 대신에, 우리 자신과 우리 나라와 우리 세계와 우리의 시간과 공간과 우리의 순간에 고정시키고 있음이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각 지역의 크리스천 서점들과 강단들과 주일학교 커리큘럼과 방송과 종교적 담화에도 확연히 드러난다.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104쪽)
교회의 설교는 교회가 성경에서 배워 전통으로 물려받은 신앙고백에 근거하고 그 고백에 대한 신학적 통찰과 종합으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이로써 모든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제기하는 궁극적인 질문에 직면하여, 한 인간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게 될 때, 그의 곤고한 영혼은 비로소 평안과 위로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소위 닦달과 나열 등의 유치한 설교 행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에 제일 많이 하는 것이 닦달과 잔소리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수준 높고 훌륭한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이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우리가 늘 게으르고 무지하고 완악하다는 사실을 폭로합니다. 부모는 진정 자녀들을 사랑할 때 책망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설교는, 늘 죄와 싸우며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완성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 청중들에게 죄와의 싸움을,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주인 삼으려는 ‘자기 의(義)’와의 싸움을 싸우도록 애써 독려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시험 앞에 우리는 얼마나 자주 넘어집니까? 저는 다시금 마이클 호튼의 진단에 공감합니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간증들’을 생각해 보라. 개인적인 체험들을 ‘나누는 일’이 공동 기도와 공동 성경연구, 예배와 증거를 대신하고 있다. 개인의 영적인 자서전이 저 나사렛 사람의 생애와 시대를 대신해 버렸다”(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88쪽).
맺는말
토론이나 논쟁으로 정 교수나 저의 신학적 입장에 변화가 생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 교수의 설교비평을 읽으며 우리 각자의 견해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정 교수의 복음에 대한 열정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서로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참된 대화는 강요와 설득이라는 목적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기본 조건으로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 교수의 한국 교회 강단을 향한 비판이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애정에서부터 출발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저는 가슴깊이 그 충정에 공감합니다. 개인적으로 정 교수의 비평 속에서 범상치 않은 영적 통찰과 진정한 영성의 편린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 서로 다른 전통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진심과 목표는 같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영광과 자랑이 더 분명히 드러나고, 더 많은 영혼들에게 진리와 생명이 올바르게 증거 되며, 그럼으로써 한국 교회가 성숙해가는 데에 우리의 공통의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관점과 견해에 있어 많이 다르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 곧 ‘하나님과 복음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근본적 목적에서 일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다름과 같음 모두를 사용하셔서 한국 교회 앞에 우리의 사명이 합력하여 선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기독교사상, 2007년 5월호)
박영선 목사는 한양대학교 졸업, 총신대학교 신대원 졸업, 미국 리버티 벱티스트 세미나리 명박, 현재 남포교회 담임 목사이며, 합동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교수로 있다. 저서로 <구원의 완성 1,2>, <그제야 끝이 오리라>, <구원, 그 이후> 외 다수가 있다.
2007.05.01 15:34:51
무명재 님께서는 정목사님의 신학을 왜곡하고 비약을 일삼았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러면 여기에서 허용하고 있는 반론권이라는 것은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그런식의 주장을 하신다면 정용섭 목사님께서 이때까지 비평의 대상으로 삼은 수 많은 목사님들은 나름대로 할말이 없겠습니까? "왜 나의 설교와 신학을 마음대로 비약하고 비판하냐고" 이런식의 주장이 가능해지지 않겠습니까? 당신과 같은 주장을 하면 정용섭 목사님의 신학적인 견해가 마치 진리로 여겨질수 있음을 명심해주십시오. 그리고 무명재 님의 눈에는 박목사님이 정용섭 목사님의 글을 왜곡하고 비약했다고 보일지 모르지만 여기에 회원으로 참가하는 많은 분들의 시각은 당신과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서로의 차이를 설명했고 그런 중에도 함께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자는 박 목사님의 진정어린 마음을 읽을수 있었다는 견해도 많이 있음을 기억해주십시오. 그러나 무명재 님께서 사용하신 언어 표현에는 누가 보더라도 예의가 아니며 함께 신앙의 여정을 걷는 사람을 향해서 사용해서는 안될 수준의 막말이 보인것이 사실 아닙니까? 어찌 글 한편을 보고 상대방의 인격을 운운 합니까? 순서 이야기는 거두시고 이 시점에서 사과하십시오. 그것이 성숙한 신앙인이 보여야 할 태도입니다.
2007.05.01 15:48:59
개인적 감정이 결코 아닙니다. 박영선 목사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제자도 아니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저는 이 홈피의 정식 회원이지요. 논지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도 무명재님께서 사과하셔야 하고 앞으로 그런식의 글쓰기를 자제하셔야 됩니다. 우리끼리 통하는 어떤 암묵적인 룰이라는게 있지 않습니까? 무명재 님과 같은 글쓰기를 허용하면서 논지로 가자고 자꾸 재촉하면은 앞으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을 향해서 온갖 비난의 말들을 공개된 자리에서 내 지르게 하는 것을 허용하게 됩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무명재 님께서 사과하셔야 됩니다. 그 좋은 학문적 통찰을 왜 막말 몇마디와 함께 해서 그 좋은 작품에 험짓을 낸다 말입니까?
2007.05.01 15:45:18
제가 거듭 충분히 설명드렸어도, 신앙이니, 중생하지 못했느니, 사과니, 들먹이시네요.
사과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왜 계속 요구하십니까?
대장 목사님, 그렇게 따지면,
정 목사님은 복음에 대한 열정의 발로가 아닌, 다른 목적에서 지금껏 사역하셨습니까?
그 사역에 대하여 충분히 고찰하지 않고, 탈선이라고 왜곡, 매도하는 것이, 잘 한 일입니까?
글 좀 제대로 읽으십시오. 저는 위에서 충분히 밝혔거니와, 타당성 있는 논의를 원하는 겁니다.
박 목사님의 비평은, 타당성을 결여했고, 심지어 왜곡과 매도의 수준이라고 보였기에,
왜 그렇게 보는지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논리적인 사안에다가, 자꾸 감성적인 것으로 덧대어 요구하지 마십시오.
다들 독해력이 떨어지십니까?
중등 교육만 제대로 받았다면, 이 정도 논리 전개와 독해는 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나 봅니다.
가당치도 않습니다. 신앙적 신실함이, 어디에나 다 갖다붙이면 약빨이 듣는 만능 부적이라도 된댑니까?
저는 그런 식의 신앙 태도는 '경멸'! 합니다.
사과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왜 계속 요구하십니까?
대장 목사님, 그렇게 따지면,
정 목사님은 복음에 대한 열정의 발로가 아닌, 다른 목적에서 지금껏 사역하셨습니까?
그 사역에 대하여 충분히 고찰하지 않고, 탈선이라고 왜곡, 매도하는 것이, 잘 한 일입니까?
글 좀 제대로 읽으십시오. 저는 위에서 충분히 밝혔거니와, 타당성 있는 논의를 원하는 겁니다.
박 목사님의 비평은, 타당성을 결여했고, 심지어 왜곡과 매도의 수준이라고 보였기에,
왜 그렇게 보는지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논리적인 사안에다가, 자꾸 감성적인 것으로 덧대어 요구하지 마십시오.
다들 독해력이 떨어지십니까?
중등 교육만 제대로 받았다면, 이 정도 논리 전개와 독해는 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나 봅니다.
가당치도 않습니다. 신앙적 신실함이, 어디에나 다 갖다붙이면 약빨이 듣는 만능 부적이라도 된댑니까?
저는 그런 식의 신앙 태도는 '경멸'! 합니다.
2007.05.01 15:55:19
무명재님 저는 사과는 운운했지만 중생을 못했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박목사님의 글을 비평하시더라도 인격을 의심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것도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말입니다. 저는 영어 독해력도 있고 한글 독해력도 나름대로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인격 도독에 가까운 말은 자제해주십시오. 중등교육 이상 받았는데도 이 모양이니 어떻합니까? 참 말을 격하게 사용하시네요. 오히려 저쪽에서 그렇게 묻고 싶습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뜻을 모르겠습니까? 왜 글을 적어서 자신의 논지를 펴는데 동시에 못난 성질머리까지 용납해달라고 하십니까? 얼마든지 엄중한 자신의 뜻을 전달할수 있는 좋은 표현들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테이재학님 웃음이 나옵니다. 그러면 예의는 중시하지 말아야 됩니까? 예의를 중시하다고 망하는것이 예의를 중시하지 않다가 망하는 길 보다 백배는 옳고 나은 길입니다.
2007.05.01 16:00:01
테이재학님 억울하다니요? 누가 억울하다는 말입니까? 저는 무명재님의 탁월한 학문적 비판에 감탄을 하면서도 왜 막말에 가까운 표현을 저렇게 동원할까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무명재 님은 억울해 하실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그분을 억울하게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무명재 님은 공개된 자리에서 막말에 가까운 표현을 계속해서 하고 있음과 그것에 대해서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의 주장에 대해서 다시 인신 공격에 가까운 표현을 동원해서 자신의 주장을 계속하시는 것에 대해서 사과를 하셔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2007.05.01 16:08:28
무명재님!
잠시 숨 좀 고르시면서...
맨 위에 정목사님의 댓글을 다시 한번만 읽어 보심이 어떨까요?
특히,
'박영선 목사님은 소위 말이 통하는 몇 안 되는 어른 중의
한 분이시라는 것 만큼은 분명하시다'고 하셨네요.
그리고, 프리실라님의 얘기처럼 '논쟁에 이기고 사람은 떨어져 나가고..'
이런 사태를 원하는건 아니잖아요?
무명재님의 논지나 그안타까운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지만,
제가 지켜보기에도...조마조마 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님의 감정이 격해짐을 느끼게 되는군요.
잠시 숨 좀 고르시면서...
맨 위에 정목사님의 댓글을 다시 한번만 읽어 보심이 어떨까요?
특히,
'박영선 목사님은 소위 말이 통하는 몇 안 되는 어른 중의
한 분이시라는 것 만큼은 분명하시다'고 하셨네요.
그리고, 프리실라님의 얘기처럼 '논쟁에 이기고 사람은 떨어져 나가고..'
이런 사태를 원하는건 아니잖아요?
무명재님의 논지나 그안타까운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지만,
제가 지켜보기에도...조마조마 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님의 감정이 격해짐을 느끼게 되는군요.
2007.05.01 16:10:23
테이재학님 우리 함께 생명의 진리를 중시하십시다. 저도 그 길로 가기위해 힘쓰겠습니다. 그러면 생명의 길로 가기 힘쓰는 사람들은 반론권이 보장되어진 공간에 올린 글을 읽고 평가하면서 "독해력이 떨어진다" "중등교육 이상만 받아도 이해할텐데" "인격과 학문성에 의심이 간다"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이 옳습니까? 위에서 적어주신 내용들은 다 옳고 동의가 가는 내용이지만 지금 이 사안과는 맞지 않는 비유같아 보입니다. 지금 이곳의 상황은 말 그대로 중등교육이상만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수 있는 진짜 예의에 관한 부분에서 무명재님께서 실수 한 것입니다.
2007.05.01 16:09:46
다비안님들께!
박목사님의 반론에 대하여
중간적 입장에서 평가해달라는 정목사님의 요청이
뜻하지 않게 쓸모없는 글싸움으로 번졌군요.
의도는 분명 이게 아니었을텐데
결과적으로 정목사님이 싸움을 붙인 꼴이 되고 말았네요.
정목사님은 이 사태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사실은 저도 대글을 달려고 생각했지만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이유는 아무래도 제 글이 한 쪽 편에 설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논쟁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서로의 생각을 확인했으니 논쟁을 그만 그치는게 어떨까요?
이런 모습은 회원 서로에게 상처가 될 뿐이고,
보기에도 좋지 않을 뿐더러
각자의 영성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논선이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소중한 지체이니까요.
이런 상태로 접전하다가
훗날 오프라인에서 만나면 좀 서먹하고 어색하지 않을까요?
다들 맘을 가라앉히시고
아자 아자!
박목사님의 반론에 대하여
중간적 입장에서 평가해달라는 정목사님의 요청이
뜻하지 않게 쓸모없는 글싸움으로 번졌군요.
의도는 분명 이게 아니었을텐데
결과적으로 정목사님이 싸움을 붙인 꼴이 되고 말았네요.
정목사님은 이 사태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사실은 저도 대글을 달려고 생각했지만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이유는 아무래도 제 글이 한 쪽 편에 설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논쟁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서로의 생각을 확인했으니 논쟁을 그만 그치는게 어떨까요?
이런 모습은 회원 서로에게 상처가 될 뿐이고,
보기에도 좋지 않을 뿐더러
각자의 영성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논선이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소중한 지체이니까요.
이런 상태로 접전하다가
훗날 오프라인에서 만나면 좀 서먹하고 어색하지 않을까요?
다들 맘을 가라앉히시고
아자 아자!
2007.05.01 16:10:03
무명재님, 적절한 지적을 하신것 같습니다.
박영선 목사님께선
여러 인용은 많이 하셨습니다만
판넨베르크나 정용섭 목사님의 책을 보시기에는 시간이
많이 부족하셨던거 같네요.
이정도의 비약이라니...;;
여러가지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박영선 목사님께선
여러 인용은 많이 하셨습니다만
판넨베르크나 정용섭 목사님의 책을 보시기에는 시간이
많이 부족하셨던거 같네요.
이정도의 비약이라니...;;
여러가지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2007.05.01 16:12:54
테이재학 님 사실관계를 정리하는 분이 왜 중등교육이상의 내용을 운운하고 독해력을 운운한다 말입니까? 얼마든지 그러한 내용을 자제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전개할 수 있는 것이지요.
2007.05.01 16:17:09
태이재학님 비약이 굉장하시군요 얼마든지 담임목사님과 상반된 의견을 제시할수 있습니다. 그것이 왜 교만한것입니까? 지금 제가 그 이야기를 하는것이 아니잖아요. 왜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멀리 오십니까? 저의 글을 읽고 그렇게 느끼셨다면 전혀 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담임목사는 얼마든지 성도들로 부터 충고와 지적을 받을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사안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공개된 자리에서 누가 보더라도 격해봉이는 표현을 사용한것에 대한 지적과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너무 멀리 가지 마십시오.
2007.05.01 16:38:03
대장목사님!
그리고 태이재학님!
평소에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에 관심들 가져주심에
다비안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드립니다.
소중한 님들께서 뜻하지 않게 감정이 부딪치셨는데..
이런 저런 과정은 거쳤지만,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지체들 아닌가요?
상한 마음들 거두시고, 다른 꼭지에서 다시 만나기를
희망합니다.
혹 저의 댓글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면
사과드릴께요.^^*
그리고 태이재학님!
평소에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에 관심들 가져주심에
다비안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드립니다.
소중한 님들께서 뜻하지 않게 감정이 부딪치셨는데..
이런 저런 과정은 거쳤지만,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지체들 아닌가요?
상한 마음들 거두시고, 다른 꼭지에서 다시 만나기를
희망합니다.
혹 저의 댓글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면
사과드릴께요.^^*
2007.05.01 16:39:17
감사합니다. 저도 동의를 합니다. 박영선 목사님의 글을 보고 그분의 의도까지 우리가 파악하는것은 조금 무리가 아닐까요? 댓글 1번을 다신 정목사님께서도 박목사님의 글 내용과 전개에 대해서 불순한 의도를 가진것으로 판단하지시 않는것 같아 보입니다. 저는 한편으론 무명재 님의 탁월한 식견과 통찰에 대해서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댓글 논쟁에서 보여주신 그분의 태도에 대해서는 그 의도가 아무리 순수했다고 해도 동의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2007.05.01 19:36:39
오늘 오전에 저는 박영선 목사님에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늘 그렇듯이 아주 반갑게 받으시네요.
앞으로 좀 자주 연락하자십니다.
워낙 달변, 다변이시라 짧은 통화였지만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 말씀이,
우리가 20년만 더 젊어서 만났다면 크게,
아주 피 터지게 싸웠을 거라고 하십니다.
한국사람들은 토론이 서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네요.
젊은 혈기가 다 지나고 만났기 때문에
쓸데 없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시네요.
당신은 보병이고 나는 공군이랍니다.
당신은 큰 틀을 못보지만 나는 본다는 뜻입니다.
<기상>에 쓰신 글에서 열정과 애정을 느꼈습니다, 했더니
저에 대해서 애정이 많다고 하시네요.
그분 말씀으로는 자신이 그쪽 진영에서 가장 처음으로
저를 발견했다고 하십니다.
작년 말이라고 합니다.
하여튼 저를 좋게 말씀해 주시느라 애를 쓰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즐겁게 통화했습니다.
5월 중에 경주에 가실 일이 있다면서
이번에 그 교회 부목사들을 대동해서 내려올 테니
테니스 한수 하자고 하시네요.
테니스 하면, 자다가도 벌똑 일어나는 제가 마다할 리가 있나요.
저도 5월에 좀 일이 많은데,
다른 곳에 나가는 일과 겹치지만 않으면
하양에서 박영선 목사님 이하 그쪽 부목사님들과 함께
테니스 축제가 벌어질 겁니다.
이 꼭지에서 논쟁이 과열되었군요.
내가 일일이 중간에 나서서 말릴 사안도 아니고,
그럴 타이밍도 놓쳤습니다.
이런 쪽으로 진행되리라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래도 마지노 선은 지킨 셈이군요.
"당신 몇 살이야?"까지 나가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어쨌든지 결과적으로 잘 됐습니다.
다비아의 성격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었잖아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숨은 것보다는 드러나는 게 차라리 낫습니다.
그리고 개인도 그렇지만 이런 공동체도 역시
가끔은 미친척 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것도 좋겠지요.
아, 미친 사람이 없는 세상은 끔찍하겠군요.
그래서 저는 다비아의 부끄러운 부분이 드러나는 걸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나도 가끔은 그럴 때가 있으니까요.
이 논쟁에 깊숙이, 또는 살짝 참가한 분들은 모두 다비아 식구들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다비아의 정체성이 형성되어 가겠지요.
거꾸로 어쩔 수 없이 해체의 길을 가도 큰 문제는 아니구요.
서로가 배운 게 많을 겁니다.
밖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이미 본인들 스스로가 어느 정도 그것을 감지하고 있을 겁니다.
위에서 어떤 분이 말씀했는데,
프리실라 님인지,
이 꼭지보다는 아래의 향린교회 조헌정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글이
더 논쟁거리인데,
별로 말들이 없군요.
그 글이 바로 다비아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건데요.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한다면,
다비아는 보수와 진보 논쟁보다는,
또는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논쟁보다는
성서텍스트와 기독교 역사를 인문학적으로 해석하는 복음운동입니다.
따라서 다비아는 위의 여러 요소들이
즉 보수, 진보, 복음주의, 에큐메니칼이 모두 포함됩니다.
자,
오늘은 메이데이였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은
언제, 어떻게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혹은 어떻게 노동을 통해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요?
늘 그렇듯이 아주 반갑게 받으시네요.
앞으로 좀 자주 연락하자십니다.
워낙 달변, 다변이시라 짧은 통화였지만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 말씀이,
우리가 20년만 더 젊어서 만났다면 크게,
아주 피 터지게 싸웠을 거라고 하십니다.
한국사람들은 토론이 서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네요.
젊은 혈기가 다 지나고 만났기 때문에
쓸데 없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시네요.
당신은 보병이고 나는 공군이랍니다.
당신은 큰 틀을 못보지만 나는 본다는 뜻입니다.
<기상>에 쓰신 글에서 열정과 애정을 느꼈습니다, 했더니
저에 대해서 애정이 많다고 하시네요.
그분 말씀으로는 자신이 그쪽 진영에서 가장 처음으로
저를 발견했다고 하십니다.
작년 말이라고 합니다.
하여튼 저를 좋게 말씀해 주시느라 애를 쓰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즐겁게 통화했습니다.
5월 중에 경주에 가실 일이 있다면서
이번에 그 교회 부목사들을 대동해서 내려올 테니
테니스 한수 하자고 하시네요.
테니스 하면, 자다가도 벌똑 일어나는 제가 마다할 리가 있나요.
저도 5월에 좀 일이 많은데,
다른 곳에 나가는 일과 겹치지만 않으면
하양에서 박영선 목사님 이하 그쪽 부목사님들과 함께
테니스 축제가 벌어질 겁니다.
이 꼭지에서 논쟁이 과열되었군요.
내가 일일이 중간에 나서서 말릴 사안도 아니고,
그럴 타이밍도 놓쳤습니다.
이런 쪽으로 진행되리라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래도 마지노 선은 지킨 셈이군요.
"당신 몇 살이야?"까지 나가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어쨌든지 결과적으로 잘 됐습니다.
다비아의 성격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었잖아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숨은 것보다는 드러나는 게 차라리 낫습니다.
그리고 개인도 그렇지만 이런 공동체도 역시
가끔은 미친척 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것도 좋겠지요.
아, 미친 사람이 없는 세상은 끔찍하겠군요.
그래서 저는 다비아의 부끄러운 부분이 드러나는 걸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나도 가끔은 그럴 때가 있으니까요.
이 논쟁에 깊숙이, 또는 살짝 참가한 분들은 모두 다비아 식구들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다비아의 정체성이 형성되어 가겠지요.
거꾸로 어쩔 수 없이 해체의 길을 가도 큰 문제는 아니구요.
서로가 배운 게 많을 겁니다.
밖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이미 본인들 스스로가 어느 정도 그것을 감지하고 있을 겁니다.
위에서 어떤 분이 말씀했는데,
프리실라 님인지,
이 꼭지보다는 아래의 향린교회 조헌정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글이
더 논쟁거리인데,
별로 말들이 없군요.
그 글이 바로 다비아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건데요.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한다면,
다비아는 보수와 진보 논쟁보다는,
또는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논쟁보다는
성서텍스트와 기독교 역사를 인문학적으로 해석하는 복음운동입니다.
따라서 다비아는 위의 여러 요소들이
즉 보수, 진보, 복음주의, 에큐메니칼이 모두 포함됩니다.
자,
오늘은 메이데이였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은
언제, 어떻게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혹은 어떻게 노동을 통해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요?
2007.05.01 19:36:56
아직들 젊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큰 은혜임을 깨달은 적이 있는데
누구나 먹는 나이고 가는 세월이지만
그것이 은혜가 되고 복됨의 연장임을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된거죠.
그런 은혜가 임하시기를 기도하렵니다.
아니 기도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임하겠죠.
그래서 오래 참고 견디는 거겠죠.
언젠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큰 은혜임을 깨달은 적이 있는데
누구나 먹는 나이고 가는 세월이지만
그것이 은혜가 되고 복됨의 연장임을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된거죠.
그런 은혜가 임하시기를 기도하렵니다.
아니 기도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임하겠죠.
그래서 오래 참고 견디는 거겠죠.
2007.05.01 19:47:56
조용해 진 걸 보니
모두 시퍼른 칼을 칼집에 꽂은듯 하네요.
다비아의 검객들
온종일 모두 애 쓰셨습니다.
특히 무명재님요.
이렇게 한 마디 외치고 물러가렵니다.
이제 모두 퇴각하라.!
(이건 본래 대장목사님께서 나서서 해야 하는 건 아닌가!)
모두 시퍼른 칼을 칼집에 꽂은듯 하네요.
다비아의 검객들
온종일 모두 애 쓰셨습니다.
특히 무명재님요.
이렇게 한 마디 외치고 물러가렵니다.
이제 모두 퇴각하라.!
(이건 본래 대장목사님께서 나서서 해야 하는 건 아닌가!)
2007.05.01 21:33:23
정말 정 목사님께서 박 목사님과 테니스를 칠 가능성이 있다시니
사전에 알려 드려야 될 것이 있는데
제가 전해 듣기로는 박 목사님의 테니스 실력이 보통은 넘는답니다.
카드 실력과 고스톱 실력도, 아마 당구도 천대를 넘는다던데
하긴 이제는 나이가 좀 드신 편이니까 테니스는 좀 그렇겠죠.
하여간 좀 알고 계시는 것이 좋을 듯 해서 전해 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친분은 없지만 잘 아시는 분께 들었습니다.
사전에 알려 드려야 될 것이 있는데
제가 전해 듣기로는 박 목사님의 테니스 실력이 보통은 넘는답니다.
카드 실력과 고스톱 실력도, 아마 당구도 천대를 넘는다던데
하긴 이제는 나이가 좀 드신 편이니까 테니스는 좀 그렇겠죠.
하여간 좀 알고 계시는 것이 좋을 듯 해서 전해 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친분은 없지만 잘 아시는 분께 들었습니다.
2007.05.02 00:06:32
다비안을 알게 된 이후 최악의 댓글들을 봅니다. 마치 예비역들이 해병대가 강하냐? 특전사가 강하냐?는 논리들입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은 식상한 자화상입니다. 동네목사가 침례교 목사라고 한다면 돌에 맞아 죽을 것 같습니다. 축자영감을 고수하고 아직도 여성목사 안수 불허를 고수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모습은 다비안에 게시된 훌륭한 목사님들의 신학적 글들이 아무 열매없이 종이 태우는 냄새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2007.05.02 02:42:42
동네목사님 그렇지 않습니다. 이곳은 침례교 목사라도 보수적인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더라도 얼마든지 환영 받을수 있는 곳이고 자신의 주장을 펼칠수 있는 곳입니다. 저부터 커밍아웃 할까요? ㅋㅋㅋ 사실 저 침례교 목사입니다. 그래도 여기서 아주 치열하게 나름대로의 생각을 전개 할수 있었습니다. 침례교라는 일반적인 성향들이 있긴하지만 신학적 배경을 보면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 침례교입니다.
2007.05.02 03:55:54
반론과 댓글들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인 느낌은 정목사님 설교 비평 작업 일반에 대한 반론으로는 조금 핀트가 맞지 않는 - 혹은 아웃복싱 스타일인 - 게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제가 정목사님 비평 중에서 눈을 크게 뜨고 읽은 부분은 주로 "기독교적 영성"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성서 해석 작업으로써의 설교였거든요. 그런데 계시론, 죄에 대한 입장 차이로 반론을 쓰신다면 초점이 어긋나지 않나, 단순히 차이를 드러내는 것일 뿐 생산적인 토론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반론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두 분 목사님 글을 잘못 이해한 건가요?
2007.05.02 04:56:19
아이 몇일 바빠서 둘러보지 못했더니 엄청나게 바쁘셨네요.
사건현장에 와 보니 현장에 범인들은 도망가고 없는데 목격자들끼리 맞짱을...
이제 평정을 찾은듯하여서 다시 불을 한번 휘발유를 뿌리면 솔나무 홀랑 타버릴텐데...
암튼 우리는 이런일에 매우 민감합니다.
경기를 하려고 하면 먼저 편부터 짜야하는데, 먼저 선택한 사람이 같은편이 됩니다.
그리고 일단 무조건 썬방을 날립니다. 그러면 자동으로 싸움판에 뛰어든 상황이 되지요.
구경하다가 싸움에 합류하기도 하곤 합니다.
모든일이 수습된 다음에도 감정을 가지고 돌아갔다가 아무런 일도 아닌데 또 으르렁댑니다.ㅎㅎㅎ
이런세계에는 절대 화평을 없습니다. 무림의 세계와 같은...
다비안의 같은 동지들끼리 역시 전체는 하나이지만 금방 방향을 잃어서 각계전투중입니다.
미리 저도 글을 올렸다면 격한 언어가 나왔을것같습니다.
그러나 불이 다 타고 꺼져서리...
이런일이 일어날 것을 어느정도 정목사님도 아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들은 남의 이야기는 쉽게 하지만 결국 나 중심을 건드는 일에는 못견디지요.
상대의 중심을 건드는 일에는 무명제님이 이긴듯하고요.
그런대로 여러 위로를 받은 상대인 대장목사님도 팽팽하시던데요.
서로에게 조금 그럴 수 있는 것이겠지요.
수긍하고 들어주는 일들에 길들여진다면 서로의 발전에 저해를 주는것도 인정하는 것은 어떨지...
무명재님,
뭔가 대변하고 큰 소리 치는 분이 있어서 통쾌하고, 내가 좀 배움이 있었더라면 확 휘발유...
그리고 명재님과 논쟁의 표창을 계속 던지던 많은 다비아의 형제, 자매님들...
우리모두가 다 같은 다비아 회원임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누굴 가르친다거나 사과하라거나 지시하는 언어를 사용하시면 더 건조해진다는 것을 명심!
그 다음은 바로 감정상한 말이 나가는것은 우리 알만한 사람은 다 알면서...
큰 어른들이 전화 한 통화로 핫라인이 연결되니 큰 전쟁은 끝났는데...
뒤만 허전합니다. 큰일 보러 어딘가 들어갔는데 휴지없어 황당함...
에이 그래도 모르겠다.
정목사님이 테니스에서 이기는데 한표던집니다. 잘 하십시요.
박목사님이 부교역자들과 같이 오시겠다니...정목사님은 부교역자가 없는것으로 아는데...
빨리 부교역자들을 임명하심은 어떨지요. ㅎㅎㅎ
나도 이러면 아니되는데...내가 지금 편을 들고 있는것인가?
저도 잘 모르것습니다.
저는 꼭지글에 대한 다른 의견을 올리지는 아니하겠습니다. 실제로는 뭔가 잘 몰라서요...
사건현장에 와 보니 현장에 범인들은 도망가고 없는데 목격자들끼리 맞짱을...
이제 평정을 찾은듯하여서 다시 불을 한번 휘발유를 뿌리면 솔나무 홀랑 타버릴텐데...
암튼 우리는 이런일에 매우 민감합니다.
경기를 하려고 하면 먼저 편부터 짜야하는데, 먼저 선택한 사람이 같은편이 됩니다.
그리고 일단 무조건 썬방을 날립니다. 그러면 자동으로 싸움판에 뛰어든 상황이 되지요.
구경하다가 싸움에 합류하기도 하곤 합니다.
모든일이 수습된 다음에도 감정을 가지고 돌아갔다가 아무런 일도 아닌데 또 으르렁댑니다.ㅎㅎㅎ
이런세계에는 절대 화평을 없습니다. 무림의 세계와 같은...
다비안의 같은 동지들끼리 역시 전체는 하나이지만 금방 방향을 잃어서 각계전투중입니다.
미리 저도 글을 올렸다면 격한 언어가 나왔을것같습니다.
그러나 불이 다 타고 꺼져서리...
이런일이 일어날 것을 어느정도 정목사님도 아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들은 남의 이야기는 쉽게 하지만 결국 나 중심을 건드는 일에는 못견디지요.
상대의 중심을 건드는 일에는 무명제님이 이긴듯하고요.
그런대로 여러 위로를 받은 상대인 대장목사님도 팽팽하시던데요.
서로에게 조금 그럴 수 있는 것이겠지요.
수긍하고 들어주는 일들에 길들여진다면 서로의 발전에 저해를 주는것도 인정하는 것은 어떨지...
무명재님,
뭔가 대변하고 큰 소리 치는 분이 있어서 통쾌하고, 내가 좀 배움이 있었더라면 확 휘발유...
그리고 명재님과 논쟁의 표창을 계속 던지던 많은 다비아의 형제, 자매님들...
우리모두가 다 같은 다비아 회원임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누굴 가르친다거나 사과하라거나 지시하는 언어를 사용하시면 더 건조해진다는 것을 명심!
그 다음은 바로 감정상한 말이 나가는것은 우리 알만한 사람은 다 알면서...
큰 어른들이 전화 한 통화로 핫라인이 연결되니 큰 전쟁은 끝났는데...
뒤만 허전합니다. 큰일 보러 어딘가 들어갔는데 휴지없어 황당함...
에이 그래도 모르겠다.
정목사님이 테니스에서 이기는데 한표던집니다. 잘 하십시요.
박목사님이 부교역자들과 같이 오시겠다니...정목사님은 부교역자가 없는것으로 아는데...
빨리 부교역자들을 임명하심은 어떨지요. ㅎㅎㅎ
나도 이러면 아니되는데...내가 지금 편을 들고 있는것인가?
저도 잘 모르것습니다.
저는 꼭지글에 대한 다른 의견을 올리지는 아니하겠습니다. 실제로는 뭔가 잘 몰라서요...
2007.05.02 07:03:15
정목사님과 박목사님 테니스 시합이 한 판 벌어지면
<기상>기자들, 뉴조기자, 씨비에스 기자들이 잽싸게 달려올래나.
이 사실이 알려지면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요.
정목사님께서 큰소리치시는 걸 보니
실력이 보통이 아닌갑네요. 암튼 기다려집니다.
화이팅.
<기상>기자들, 뉴조기자, 씨비에스 기자들이 잽싸게 달려올래나.
이 사실이 알려지면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요.
정목사님께서 큰소리치시는 걸 보니
실력이 보통이 아닌갑네요. 암튼 기다려집니다.
화이팅.
2007.05.02 11:08:57
결국 답은 수용성과 포용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요즘은 다른 사람을 탓하기 보다 나 자신의 속좁음이 한심스럽게 느껴지니깐요. 진정한 존중은 상대방의 것을 더 잘 알고 이해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무명재님의 말에 동의합니다. 그 사람의 모습에 집중해야지 입은 옷으로 말 할것은 아니니깐요.
겸허함으로 공부를 또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저에게는 낮설은 사람이니깐요. 훈수를 저에게 좀 주시면 좋구요 미개척지를 향할 때는 길잡이가 필요하니깐요
편견없이 더 깊이 들어가볼려구요. 그래야 대화가 될 것니깐.
참 솔나무님 저는 박영선 목사님의 승리에 한편를 보냅니다. 테니스 말입니다.
온갖 잡기에 능하신 분이라 히히
겸허함으로 공부를 또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저에게는 낮설은 사람이니깐요. 훈수를 저에게 좀 주시면 좋구요 미개척지를 향할 때는 길잡이가 필요하니깐요
편견없이 더 깊이 들어가볼려구요. 그래야 대화가 될 것니깐.
참 솔나무님 저는 박영선 목사님의 승리에 한편를 보냅니다. 테니스 말입니다.
온갖 잡기에 능하신 분이라 히히
2007.05.02 13:19:05
다시 돌아보면 다른 목사님들은 아예 자신의 설교 비평에 대해서 모르쇠로 일관하시는데 반해, 박영선 목사님은 어찌되었든 글을 보내주시고, 관심을 보이셨다는 것은 대화의 의지가 있으시다는 표현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보수신학에 몸담고 계시는 분들 중에서 어쩌면 통큰 어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저의 개인적인 신앙적 한(恨)풀이를 위해 신학적 차이를, 인격적인 면으로까지 은연중에 비약했던 저 자신 한 번 반성의 계기를 가져봅니다... 제대로 신학과 신앙도 모르면서 그냥 앞뒤 없이 막 휘갈긴 철없는 모습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계기가 불필요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들 이 번 계기를 통해서 이 것 저 것 챙긴 것(?)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서로 서로 더 많이 깨어졌으면 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신앙적 한(恨)풀이를 위해 신학적 차이를, 인격적인 면으로까지 은연중에 비약했던 저 자신 한 번 반성의 계기를 가져봅니다... 제대로 신학과 신앙도 모르면서 그냥 앞뒤 없이 막 휘갈긴 철없는 모습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계기가 불필요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들 이 번 계기를 통해서 이 것 저 것 챙긴 것(?)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서로 서로 더 많이 깨어졌으면 합니다...
2007.05.02 15:23:21
박영선 목사님의 글과 그에 대한 댓글 토론이 있다는 소식에 이 사이트를 처음 찾았습니다.
댓글들을 죽~ 읽어보니 암튼 흥미있네요. 이 사이트를 자주 찾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사실 정용섭 목사님에 대해서 알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 어느 목사님 설교에 대한 비평을 본 것이 처음입니다.
첫인상은 이런 글을 쓰시는 분이 있구나 싶은 상큼함이랄까 뭐 그런 것이었습니다.
우선 정목사님의 글은 매력적인 면이 있습니다. 생각의 지평을 열어주실 것 같았고...
그런 반면 무장해제하고 전부를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고나 할까.
암튼 복잡한 느낌이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성장한 배경, 읽은 책들, 영향을 받은 사람들,
또 그로 말미암아 전개된 생각들의 굴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진실에 대한 열망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이성의 역할에 대해서 또 자유에 대해서 늘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보수교단에서 신앙 생활을 하면서 늘 그 문제가 갈증처럼 남아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정목사님의 설교 비평, 또 그에 대한 박목사님의 반론, 또 이곳에서의 댓글 토론...
결국은 이 문제와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박영선 목사님은 전도사님 시절부터 제가 알던 분으로
저는 그 분의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 사람입니다.
여기에 실린 그분의 글도 [기독교사상]에 게재되기 전에 그 교회 부목사님을 통해 먼저 원고를 읽어본 터라 어떤 형태든 토론 가능성에 대해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암튼 두 진영(?)의 첨예한 대립이 여간 관심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정 목사님과 박 목사님 두 분은 서로 다른 입장에 서 계시지만
상대방을 인정하고 배려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습니다.
여기 댓글 토론도 두 분이 모범을 보이시는 정도의 격을 갖추면 너무 멋질 것 같습니다.
댓글에서 정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때로는 격렬한 토론이 우리의 문제를 첨예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토론의 장점입니다.
다만 토론은 어떤 일이 있어도 예의를 잃거나 감정적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인격적인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는 지혜와 상대방 생각에 대한 똘레랑스를 가져야 합니다.
가능하면 댓글에서 드러난 주제를 잘 다듬어 토론으로 승화시켰으면 합니다.
해프닝 즉 '우리 진영 대 상대 진영의 설전'으로 사라지게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느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
베뢰아 사람들(행17:11)처럼 진지하게 생각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으면 좋지 않을까요?
댓글들을 죽~ 읽어보니 암튼 흥미있네요. 이 사이트를 자주 찾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사실 정용섭 목사님에 대해서 알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 어느 목사님 설교에 대한 비평을 본 것이 처음입니다.
첫인상은 이런 글을 쓰시는 분이 있구나 싶은 상큼함이랄까 뭐 그런 것이었습니다.
우선 정목사님의 글은 매력적인 면이 있습니다. 생각의 지평을 열어주실 것 같았고...
그런 반면 무장해제하고 전부를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고나 할까.
암튼 복잡한 느낌이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성장한 배경, 읽은 책들, 영향을 받은 사람들,
또 그로 말미암아 전개된 생각들의 굴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진실에 대한 열망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이성의 역할에 대해서 또 자유에 대해서 늘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보수교단에서 신앙 생활을 하면서 늘 그 문제가 갈증처럼 남아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정목사님의 설교 비평, 또 그에 대한 박목사님의 반론, 또 이곳에서의 댓글 토론...
결국은 이 문제와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박영선 목사님은 전도사님 시절부터 제가 알던 분으로
저는 그 분의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 사람입니다.
여기에 실린 그분의 글도 [기독교사상]에 게재되기 전에 그 교회 부목사님을 통해 먼저 원고를 읽어본 터라 어떤 형태든 토론 가능성에 대해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암튼 두 진영(?)의 첨예한 대립이 여간 관심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정 목사님과 박 목사님 두 분은 서로 다른 입장에 서 계시지만
상대방을 인정하고 배려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습니다.
여기 댓글 토론도 두 분이 모범을 보이시는 정도의 격을 갖추면 너무 멋질 것 같습니다.
댓글에서 정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때로는 격렬한 토론이 우리의 문제를 첨예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토론의 장점입니다.
다만 토론은 어떤 일이 있어도 예의를 잃거나 감정적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인격적인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는 지혜와 상대방 생각에 대한 똘레랑스를 가져야 합니다.
가능하면 댓글에서 드러난 주제를 잘 다듬어 토론으로 승화시켰으면 합니다.
해프닝 즉 '우리 진영 대 상대 진영의 설전'으로 사라지게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느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
베뢰아 사람들(행17:11)처럼 진지하게 생각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으면 좋지 않을까요?
2007.05.02 16:19:24
그런 의미에서...
무명재 님의 댓글 중에 있던 내용을 하나 집어 보겠습니다.
문제가 되고 있는 두 기반은 신앙인에게 있어 이성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걸려있는 듯합니다.
무명재님이 정용섭 목사님도 판넨베르크도 '그리스도 계시의 빛 아래서 온당한 이성에 의한 사유를 지향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두 진영이 모두 그 말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한쪽에서는 다른 쪽을 보면서 '온당한 이성에 의한 사유'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상대편이 이성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그 범주를 벗어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결국
'온당한 이성에 의한 사유'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느 쪽의 직감이 진실에 가까울 지가 관권이 되겠네요...
무명제 님은 판넨베르크가 자연과학의 사유 영역을 넘어서는 초월자를 상정하는 것이 자연과학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고 말씀하셨는데 박 목사님의 글 중에 인용된 책에 의하면 '그는 기독교 진리의 합리성을 위하여 이성의 비판을 강조하는 이성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성(理性)은 합리성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자연과학의 사유 영역을 넘어서는 것은 합리성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연과학의 사유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 자연과학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연과학이 비합리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렇다면 판넨베르크가 사유를 이야기할 때 그 합리성을 포기할 수 있는지, 아니면 포기할 수 없는지에 초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박영선 목사님이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 비평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그 합리성에 대한 모종의 태도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무명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이라는 책에서 인용된 '그는 기독교 진리의 합리성을 위하여 이성의 비판을 강조하는 이성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는 말에 수긍하시는지요?
여기서 '그'는 판넨베르크이며, 정용섭 목사님이며, 무명재 님입니다.
무명재 님의 댓글 중에 있던 내용을 하나 집어 보겠습니다.
문제가 되고 있는 두 기반은 신앙인에게 있어 이성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걸려있는 듯합니다.
무명재님이 정용섭 목사님도 판넨베르크도 '그리스도 계시의 빛 아래서 온당한 이성에 의한 사유를 지향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두 진영이 모두 그 말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한쪽에서는 다른 쪽을 보면서 '온당한 이성에 의한 사유'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상대편이 이성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그 범주를 벗어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결국
'온당한 이성에 의한 사유'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느 쪽의 직감이 진실에 가까울 지가 관권이 되겠네요...
무명제 님은 판넨베르크가 자연과학의 사유 영역을 넘어서는 초월자를 상정하는 것이 자연과학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고 말씀하셨는데 박 목사님의 글 중에 인용된 책에 의하면 '그는 기독교 진리의 합리성을 위하여 이성의 비판을 강조하는 이성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성(理性)은 합리성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자연과학의 사유 영역을 넘어서는 것은 합리성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연과학의 사유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 자연과학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연과학이 비합리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렇다면 판넨베르크가 사유를 이야기할 때 그 합리성을 포기할 수 있는지, 아니면 포기할 수 없는지에 초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박영선 목사님이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 비평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그 합리성에 대한 모종의 태도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무명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이라는 책에서 인용된 '그는 기독교 진리의 합리성을 위하여 이성의 비판을 강조하는 이성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는 말에 수긍하시는지요?
여기서 '그'는 판넨베르크이며, 정용섭 목사님이며, 무명재 님입니다.
2007.05.02 16:24:19
말씀 잘 들었습니다. 관심 감사합니다.
(1) 사랑채 게시판에 첫날처럼님께서 쓰신,
[축자영감설에 대하여]라는 글에 제가 단 댓글에서와 같이,
결국은, 언어와 해석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봅니다.
제가 위의 댓글에서도 말씀드렸거니와,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언어, 즉, 인간의 도구인 언어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언어적 존재죠.
언어란, 나와 너 사이를 잇는 도구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약속이라는 측면에서는, 언어는 일정 부분 객관성을 담지합니다.
(그러나, 이 객관성도, 어디까지나, 인간 세상 속에서의 객관성이죠)
그러나, 언어는 인간 사유의 도구이자, 사유의 결과물이며,
이 사유는 곧 해석입니다.
즉, 언어는 주관적인 측면이 대단히 강하다는 것입니다.
박 목사님 및, 박 목사님을 위시한 보수주의 측은,
성서의 기표(記表, signifier. 액면)적 객관성에서 신앙의 확실성을 찾으려 하기에,
이같은 언어의 심층적 속성에 무관심해 보입니다.
아예, 별 문제 의식이 없어 보입니다.
성서가 축자적으로 영감된, 전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만 여기는 이같은 시각에서는,
성서가, 인간의 사유, 즉, 언어를 초월한 하느님의 말씀임과 동시에,
자기지향성이라는 한계를 지닌(이같은 한계상황은 결국 원죄일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된 텍스트라는 이중성 사이의 긴장에서 해석학적 딜레마를 발견하고,
이것과 씨름하는, 비평적 시각이,
'불신앙'으로 보일 것입니다.
언어의 액면적 객관성에 집착한다고 말씀드렸거니와,
또, 제가 위의 댓글에서, 정태적 역사관이라는 지적도 했거니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성서의 권위를 텍스트의 액면의 객관성에서 찾는 축자주의는,
해석학적 씨름에서 당연히 도출되는 이성적 사유를, 불신앙으로 몰아붙이게 되는 것이죠.
개신교 보수주의가, 반신학자적, 반인문학적 적대감을 보인다는 관측은,
종교학계에서는 상식적 정설로 되어 있는줄 압니다.
이같은 언어의 주관성, 즉, 자기지향적 속성을 간과하고,
언어가 객관적이라고 순진하게,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보수주의는,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담지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 교권주의 등으로 함몰될 위험이 있습니다.
인간의 사유, 즉, 이성 또한, 언어 활동이긴 하죠.
그러나, 이같은 언어의 속성과 해석학적 문제를 인식하고,
자기비판적 긴장을 잃지 않고, 늘 깨어서 '계시'의 빛 아래에서 사유하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에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자기비판의 긴장이, 회개의 자세일 것이고,
하느님 앞에 서 있다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견지하는 삶의 태도겠지요.
그리고, 언어, 즉, 사유, 즉 이성이란,
'자유', 자율성과 같은 개념일 것입니다.
자유, 즉 주체성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형상입니다.
이성을 유폐, 마비시키고 글자 그대로에서 객관성을 담지하려 드는 것에서,
하느님과 인간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이러한 모델에서는, '구원'이 아닌, '억압'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박 목사님의 글은 물론이고,
이 다비아에서, 보수주의를 통렬하게 공박하는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인본주의이고, 하느님에 대한 왜곡이며,
구원이 없다고 보는 것이죠.
(2) 여기에서, 자연과학과 그리스도교 신앙/신학과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자연과학이, 그 자신의 연구 대상인 현상계를 넘어서는 범위에 대하여,
'비이성'이라 몰아붙였던 유물론적 경향은 지금도 맹위를 떨치고 있긴 합니다만,
인간이 오감으로 인지할 수 있는 현상계를 넘어서는 범위를 상정한다 해서,
즉, '초이성'이 '비이성'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현상계가 전부가 아니고, 인간의 인지 능력 또한 전지(全知)하지 않을진대,
유물론적 사유에 함몰된 상당수의 자연과학자들이,
이 범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언설(종교 등)에 대하여,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는 이유로,
'비이성'이라 치부하는 것이, 과연 이성적인 태도인가?
- 라고, 그리스도교는 자연과학 내지 유물론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저는, (1)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에 있어 이성은 필수적이며 온당하다고 논했고,
(2)에서는, 근대 이후 이성 지상주의에 빠진 자연과학 및 유물론에 대하여,
초이성의 영역에 대한 언설이 비이성은 아니며,
초이성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비이성적 태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같이, 신앙과 이성, 종교와 과학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이 '근원적인 데'를 향하여 겸허히 나아갈 수 있게끔 해 주는,
(그렇더라도, 인간이 '근원'을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같은 인간의 한계적 실존 때문에,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거구요)
서로 돕는 이웃 영역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성과 신앙, 과학과 종교 간의, 근대 이후의 상호 대립과 무시에서 벗어나 보자는 것이,
판넨베르크와 정 목사님, 그리고 저를 비롯한 많은 분들의 바램일 것입니다.
(1) 사랑채 게시판에 첫날처럼님께서 쓰신,
[축자영감설에 대하여]라는 글에 제가 단 댓글에서와 같이,
결국은, 언어와 해석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봅니다.
제가 위의 댓글에서도 말씀드렸거니와,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언어, 즉, 인간의 도구인 언어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언어적 존재죠.
언어란, 나와 너 사이를 잇는 도구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약속이라는 측면에서는, 언어는 일정 부분 객관성을 담지합니다.
(그러나, 이 객관성도, 어디까지나, 인간 세상 속에서의 객관성이죠)
그러나, 언어는 인간 사유의 도구이자, 사유의 결과물이며,
이 사유는 곧 해석입니다.
즉, 언어는 주관적인 측면이 대단히 강하다는 것입니다.
박 목사님 및, 박 목사님을 위시한 보수주의 측은,
성서의 기표(記表, signifier. 액면)적 객관성에서 신앙의 확실성을 찾으려 하기에,
이같은 언어의 심층적 속성에 무관심해 보입니다.
아예, 별 문제 의식이 없어 보입니다.
성서가 축자적으로 영감된, 전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만 여기는 이같은 시각에서는,
성서가, 인간의 사유, 즉, 언어를 초월한 하느님의 말씀임과 동시에,
자기지향성이라는 한계를 지닌(이같은 한계상황은 결국 원죄일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된 텍스트라는 이중성 사이의 긴장에서 해석학적 딜레마를 발견하고,
이것과 씨름하는, 비평적 시각이,
'불신앙'으로 보일 것입니다.
언어의 액면적 객관성에 집착한다고 말씀드렸거니와,
또, 제가 위의 댓글에서, 정태적 역사관이라는 지적도 했거니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성서의 권위를 텍스트의 액면의 객관성에서 찾는 축자주의는,
해석학적 씨름에서 당연히 도출되는 이성적 사유를, 불신앙으로 몰아붙이게 되는 것이죠.
개신교 보수주의가, 반신학자적, 반인문학적 적대감을 보인다는 관측은,
종교학계에서는 상식적 정설로 되어 있는줄 압니다.
이같은 언어의 주관성, 즉, 자기지향적 속성을 간과하고,
언어가 객관적이라고 순진하게,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보수주의는,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담지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 교권주의 등으로 함몰될 위험이 있습니다.
인간의 사유, 즉, 이성 또한, 언어 활동이긴 하죠.
그러나, 이같은 언어의 속성과 해석학적 문제를 인식하고,
자기비판적 긴장을 잃지 않고, 늘 깨어서 '계시'의 빛 아래에서 사유하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에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자기비판의 긴장이, 회개의 자세일 것이고,
하느님 앞에 서 있다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견지하는 삶의 태도겠지요.
그리고, 언어, 즉, 사유, 즉 이성이란,
'자유', 자율성과 같은 개념일 것입니다.
자유, 즉 주체성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형상입니다.
이성을 유폐, 마비시키고 글자 그대로에서 객관성을 담지하려 드는 것에서,
하느님과 인간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이러한 모델에서는, '구원'이 아닌, '억압'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박 목사님의 글은 물론이고,
이 다비아에서, 보수주의를 통렬하게 공박하는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인본주의이고, 하느님에 대한 왜곡이며,
구원이 없다고 보는 것이죠.
(2) 여기에서, 자연과학과 그리스도교 신앙/신학과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자연과학이, 그 자신의 연구 대상인 현상계를 넘어서는 범위에 대하여,
'비이성'이라 몰아붙였던 유물론적 경향은 지금도 맹위를 떨치고 있긴 합니다만,
인간이 오감으로 인지할 수 있는 현상계를 넘어서는 범위를 상정한다 해서,
즉, '초이성'이 '비이성'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현상계가 전부가 아니고, 인간의 인지 능력 또한 전지(全知)하지 않을진대,
유물론적 사유에 함몰된 상당수의 자연과학자들이,
이 범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언설(종교 등)에 대하여,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는 이유로,
'비이성'이라 치부하는 것이, 과연 이성적인 태도인가?
- 라고, 그리스도교는 자연과학 내지 유물론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저는, (1)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에 있어 이성은 필수적이며 온당하다고 논했고,
(2)에서는, 근대 이후 이성 지상주의에 빠진 자연과학 및 유물론에 대하여,
초이성의 영역에 대한 언설이 비이성은 아니며,
초이성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비이성적 태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같이, 신앙과 이성, 종교와 과학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이 '근원적인 데'를 향하여 겸허히 나아갈 수 있게끔 해 주는,
(그렇더라도, 인간이 '근원'을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같은 인간의 한계적 실존 때문에,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거구요)
서로 돕는 이웃 영역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성과 신앙, 과학과 종교 간의, 근대 이후의 상호 대립과 무시에서 벗어나 보자는 것이,
판넨베르크와 정 목사님, 그리고 저를 비롯한 많은 분들의 바램일 것입니다.
2007.05.02 20:25:06
무명재님의 논리 정연한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무명재 님이 동의하시면 이 문제를 조금 더 끌고 가고 싶습니다.
다른 모든 주제가 이 문제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겠기에 말입니다.
언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말씀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창세기에서도 창조는 '빛이 있으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것을 보면 창조와 언어의 관계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비밀스러우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언어는 무명재 님의 말씀처럼 주관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것 또한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게시판에서의 논란은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요?
저는 성서의 기표적 객관성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떠신지요?
성서는 인간의 언어로 쓰여져 있고 언어는 자기지향성이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한계를 넘어선 객관성은 당연히 계시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명재 님의 댓글을 자세히 몇 번 읽으면서도
제가 방금 말한 것을 동의하시는지 그렇지 않으신지 언뜻 분간이 가지 않습니다.
해석학적 씨름에서 당연히 도출되는 이성적 사유는 객관성을 인정하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이 언저리 어딘가가 바로 논란이 발생하는 진원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과학은 현상계를 넘어서는 범위에 대해서 지금도 '비이성적'이라고 몰아붙입니다.
무명재 님은 그것이야말로 비이성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이성과 신앙, 종교와 과학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신앙과 종교에서 비이성적인 면을 제거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됩니다.
아마도 박영선 목사님이 비판하려는 요지는 바로 이 점일 것입니다.
무영재 님,
이성과 신앙, 종교와 과학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다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복잡한 개념보다는 의미를 추출해 단순화시키려는 제 태도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무명재 님이 동의하시면 이 문제를 조금 더 끌고 가고 싶습니다.
다른 모든 주제가 이 문제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겠기에 말입니다.
언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말씀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창세기에서도 창조는 '빛이 있으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것을 보면 창조와 언어의 관계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비밀스러우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언어는 무명재 님의 말씀처럼 주관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것 또한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게시판에서의 논란은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요?
저는 성서의 기표적 객관성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떠신지요?
성서는 인간의 언어로 쓰여져 있고 언어는 자기지향성이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한계를 넘어선 객관성은 당연히 계시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명재 님의 댓글을 자세히 몇 번 읽으면서도
제가 방금 말한 것을 동의하시는지 그렇지 않으신지 언뜻 분간이 가지 않습니다.
해석학적 씨름에서 당연히 도출되는 이성적 사유는 객관성을 인정하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이 언저리 어딘가가 바로 논란이 발생하는 진원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과학은 현상계를 넘어서는 범위에 대해서 지금도 '비이성적'이라고 몰아붙입니다.
무명재 님은 그것이야말로 비이성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이성과 신앙, 종교와 과학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신앙과 종교에서 비이성적인 면을 제거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됩니다.
아마도 박영선 목사님이 비판하려는 요지는 바로 이 점일 것입니다.
무영재 님,
이성과 신앙, 종교와 과학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다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복잡한 개념보다는 의미를 추출해 단순화시키려는 제 태도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07.05.02 20:26:16
데미님 댓글의 마지막 문장을 읽다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습니다.^^
다비아 게시판에서 이성과 신앙, 그리고 종교와 과학의 문제로 쓰여진 그 엄청난 글들을, 다시 써내라는 것은 아니겠죠^*
왼편의 '이병권의 과학산책'에 들어가셔서 산책을 해보심이 어떨지요...
다비아 게시판에서 이성과 신앙, 그리고 종교와 과학의 문제로 쓰여진 그 엄청난 글들을, 다시 써내라는 것은 아니겠죠^*
왼편의 '이병권의 과학산책'에 들어가셔서 산책을 해보심이 어떨지요...
2007.05.02 20:35:00
막간을 이용해서,, 잠시 끼어들겠습니다. ^^
인간은 죄인이라는 언술을 싫어하면서도,
어느 날 그 언술을 입에 올리는 저를 발견합니다.
체험 운운하는 말에 질색을 하면서도,
역시 체험 운운하는 저를 또 발견하구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특별계시로 간주되는 성서는,
우리들의 인식이 확대될수록, 그 깊이를 드러낸다고 봅니다.
결국, 시간이 가면, 같은 고백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서를, 그 텍스트를 다루는 방식,
이미 확립되고 고정된 그 무엇인양 다루는, 성서의 우상화,
솔직한 질문이 봉쇄되는 배타성, 이것이 큰 문제라고 봅니다.
그 해결의 실마리는, 그 보편성의 획득은, 분명,
계시의 빛을 따르면서, 동시에 거듭 이성에 의한 되새김질을 수행하는 것...
이성과 신앙은, 겸허히 주를 찬송하는, 양쪽 날개라는 생각을 합니다. ^^
한 쪽을 부정하는 것은, 우상, 미신, 사기,,,, ㅋㅋ^^
데미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한껏 품게 됩니다.
님을 뵙게 되어 참 기쁩니다. ^^
인간은 죄인이라는 언술을 싫어하면서도,
어느 날 그 언술을 입에 올리는 저를 발견합니다.
체험 운운하는 말에 질색을 하면서도,
역시 체험 운운하는 저를 또 발견하구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특별계시로 간주되는 성서는,
우리들의 인식이 확대될수록, 그 깊이를 드러낸다고 봅니다.
결국, 시간이 가면, 같은 고백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서를, 그 텍스트를 다루는 방식,
이미 확립되고 고정된 그 무엇인양 다루는, 성서의 우상화,
솔직한 질문이 봉쇄되는 배타성, 이것이 큰 문제라고 봅니다.
그 해결의 실마리는, 그 보편성의 획득은, 분명,
계시의 빛을 따르면서, 동시에 거듭 이성에 의한 되새김질을 수행하는 것...
이성과 신앙은, 겸허히 주를 찬송하는, 양쪽 날개라는 생각을 합니다. ^^
한 쪽을 부정하는 것은, 우상, 미신, 사기,,,, ㅋㅋ^^
데미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한껏 품게 됩니다.
님을 뵙게 되어 참 기쁩니다. ^^
2007.05.02 21:17:10
돌구름 님,
제 글을 읽고는 비명을 지르셨다는 말씀... 재미 있습니다.^^
이미 쓰여진 엄청난 글들을 정리해 달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어느 자리에 10명이 모이면 10명 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불편함 없이 그 다양성 속에서 다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이 된다면 우리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제가 이성과 신앙, 종교와 과학이 서로 배타적이 아니라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다시 설명해 주십사
한 것은 많은 이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돌구름 님이 말씀하신 많은 자료는 텍스트에 해당하는 것이고
제가 원하는 것은 그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시는지를 간단히 설명해 주실 수 있는가, 입니다.
토론이 그렇게 진행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군가 내가 이미 쓴 2권의 책을 읽어 보시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토론을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저 4~5줄로 정리할 수가 있다고 생각해서 말씀드린 것이구요...
늘오름 님,
불청객처럼 끼어든 것을 반겨 주시기 그저 감사합니다.
제 글을 읽고는 비명을 지르셨다는 말씀... 재미 있습니다.^^
이미 쓰여진 엄청난 글들을 정리해 달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어느 자리에 10명이 모이면 10명 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불편함 없이 그 다양성 속에서 다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이 된다면 우리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제가 이성과 신앙, 종교와 과학이 서로 배타적이 아니라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다시 설명해 주십사
한 것은 많은 이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돌구름 님이 말씀하신 많은 자료는 텍스트에 해당하는 것이고
제가 원하는 것은 그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시는지를 간단히 설명해 주실 수 있는가, 입니다.
토론이 그렇게 진행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군가 내가 이미 쓴 2권의 책을 읽어 보시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토론을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저 4~5줄로 정리할 수가 있다고 생각해서 말씀드린 것이구요...
늘오름 님,
불청객처럼 끼어든 것을 반겨 주시기 그저 감사합니다.
2007.05.02 21:51:27
돌구름 님이 언급하셔서 <이병권의 과학산책>에 들러 몇 편의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정용섭 목사님이 신학적인 창조와 생물학적인 진화가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보았는데 이 말씀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결국 이성과 신앙, 종교와 과학이 서로 배타적이 아니라는 말씀이신데...
돌구름 님, 이제 비명을 지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질문이 좁혀지지 않았나요?
정용섭 목사님이 신학적인 창조와 생물학적인 진화가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보았는데 이 말씀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결국 이성과 신앙, 종교와 과학이 서로 배타적이 아니라는 말씀이신데...
돌구름 님, 이제 비명을 지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질문이 좁혀지지 않았나요?
2007.05.02 22:43:09
데미님!
어제 끝난 줄 알았는데 오늘 다시 시작이군요.
글을 읽어보니 어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서
좋아 보입니다.
다비아에 새로운 논객이 등장하셨군요.
환영합니다. 진심으로.
그리고 품위있고 격조높은 논쟁이 기대됩니다.
이성과 신앙의 관계라...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시대로 되돌아간 기분이군요
질문은 단 두 줄인데 반해
이제 대답은 수십줄로 해야 하니
무명재님 제대로 임자 만났군요.
제가 논쟁에 불을 지피겠다는 뜻이 아니라
무명재님이 진짜 실력을 보여줄 때가 왔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두 분의 논쟁을 관전하면서
오늘 밤, 한 수 배워보겠습니다.
어제 끝난 줄 알았는데 오늘 다시 시작이군요.
글을 읽어보니 어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서
좋아 보입니다.
다비아에 새로운 논객이 등장하셨군요.
환영합니다. 진심으로.
그리고 품위있고 격조높은 논쟁이 기대됩니다.
이성과 신앙의 관계라...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시대로 되돌아간 기분이군요
질문은 단 두 줄인데 반해
이제 대답은 수십줄로 해야 하니
무명재님 제대로 임자 만났군요.
제가 논쟁에 불을 지피겠다는 뜻이 아니라
무명재님이 진짜 실력을 보여줄 때가 왔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두 분의 논쟁을 관전하면서
오늘 밤, 한 수 배워보겠습니다.
2007.05.03 00:40:34
똑소리님, 말씀 감사하오나,
저는 '실력'도 없고, 실력을 발휘하지도 않겠습니다.
저는 지금껏 다비아에 많은 글을 써 왔고,
데미님의 질문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해 답을 드렸으며,
더 이상 되풀이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으며,
그럴 실력도 없습니다)
저 말고도 다비아에는 저보다 훨씬 나으신 신앙과 신학의 선배들이 포진해 계시고,
도서관과 서점, 인터넷에는, 신학과 해석학, 철학, 언어, 영성에 관한
수많은 글들이 있습니다.
데미님께서는 그것들을 통해 스스로 공부하시면 될 줄 압니다.
제가 주제넘게 데미님을 가르칠 생각은 없습니다.
어차피, 신앙이란, 하느님 앞에 서서 깨닫고 배워가는,
'나'의 문제이니까요.
저도 신학과 해석학, 언어학에 대하여 배우는 입장입니다.
제 의견도 아니고, 그 분야들의 단초가 되는 문제의식까지,
제가 설명을 드려야 할까요?
학교에서 배우려면, 돈 내고 배웁니다.
그 분야를 전공한 실력 있는 학자들에게서요.
저는 돈 받고 가르칠 자격도 안 되고,
설령, 자격과 실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일장 강의를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가르쳐 주는 데는 많고, 자기가 알아서 배울 길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만 설명드리자면,
제 글을 읽어도, 모호하다 지적하셨는데,
확실하게 안다면, 그게 인간이겠습니까?
하느님이지.
사도 바오로가 종말론전 비젼을 제시했듯이(코린토 1서 13장),
그 날이 되면, 얼굴을 맞대고 보듯 알게 될 테니,
좀 더 기다려 보십시오.
저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하느님이 아니니, 데미님 질문에 답을 못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기다리'ㄴ다는 것은, 신뢰하기에 가능한 행위이므로,
인간의 언어로 기술된 성서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기에,
다시 말해, 인간 및 언어의 한계성인 자기지향성, 즉, 주관성을 뛰어넘는,
객관성이 있으리라는 것을 믿고, 자신을 '기투'하는 것이지요.
그것 안 믿으면, 구태여 신학을 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제가 왜 데미님의 진지한 질문에 까칠하게 답하는지 굳이 설명드리자면,
보수주의자들이, 비보수 측에 상투적으로 걸어왔던,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켸켸묵고 근거 없는 혐의를,
또 다시 제게 걸려 하시는 것 같아서입니다.
(색깔론 공세에 비견할 수 있을까요)
언어의 기표, 액면에서 그 객관성, 다시 말해,
인간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월성을 담지하려는,
그런 쉽고 편한 방법으로 신학하고 신앙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믿음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토론을 요청하시니, 주제넘게, 토론에 대하여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복잡한 것을 단순화해서 정리하는 건,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지,
제가 데미님이 아닌데, 어찌 그게 가능합니까?
토론을 하시겠다면서, 그 정도 성의는 있으셔야죠?
이미 '구체적'으로 말씀드렸는데, 말로 한 것도 아니고, 글로 써 드렸는데,
다시 설명 바란다니,
이것이 토론의 태도입니까? 서비스를 요청하는 고객의 태도입니까?
그러니, 제가, 이미 나와 있는 글들을 읽고,
알아서 판단하시라 한 겁니다.
(데미님 말씀대로, 토론 거절합니다)
제가 비겁하게 논쟁을 회피한다고 생각하시려면, 그렇게 단정하셔도 좋습니다.
데미님 및 독자 여러분들의 판단이야 자유니까요.
평안하십시오.
저는 '실력'도 없고, 실력을 발휘하지도 않겠습니다.
저는 지금껏 다비아에 많은 글을 써 왔고,
데미님의 질문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해 답을 드렸으며,
더 이상 되풀이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으며,
그럴 실력도 없습니다)
저 말고도 다비아에는 저보다 훨씬 나으신 신앙과 신학의 선배들이 포진해 계시고,
도서관과 서점, 인터넷에는, 신학과 해석학, 철학, 언어, 영성에 관한
수많은 글들이 있습니다.
데미님께서는 그것들을 통해 스스로 공부하시면 될 줄 압니다.
제가 주제넘게 데미님을 가르칠 생각은 없습니다.
어차피, 신앙이란, 하느님 앞에 서서 깨닫고 배워가는,
'나'의 문제이니까요.
저도 신학과 해석학, 언어학에 대하여 배우는 입장입니다.
제 의견도 아니고, 그 분야들의 단초가 되는 문제의식까지,
제가 설명을 드려야 할까요?
학교에서 배우려면, 돈 내고 배웁니다.
그 분야를 전공한 실력 있는 학자들에게서요.
저는 돈 받고 가르칠 자격도 안 되고,
설령, 자격과 실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일장 강의를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가르쳐 주는 데는 많고, 자기가 알아서 배울 길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만 설명드리자면,
제 글을 읽어도, 모호하다 지적하셨는데,
확실하게 안다면, 그게 인간이겠습니까?
하느님이지.
사도 바오로가 종말론전 비젼을 제시했듯이(코린토 1서 13장),
그 날이 되면, 얼굴을 맞대고 보듯 알게 될 테니,
좀 더 기다려 보십시오.
저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하느님이 아니니, 데미님 질문에 답을 못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기다리'ㄴ다는 것은, 신뢰하기에 가능한 행위이므로,
인간의 언어로 기술된 성서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기에,
다시 말해, 인간 및 언어의 한계성인 자기지향성, 즉, 주관성을 뛰어넘는,
객관성이 있으리라는 것을 믿고, 자신을 '기투'하는 것이지요.
그것 안 믿으면, 구태여 신학을 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제가 왜 데미님의 진지한 질문에 까칠하게 답하는지 굳이 설명드리자면,
보수주의자들이, 비보수 측에 상투적으로 걸어왔던,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켸켸묵고 근거 없는 혐의를,
또 다시 제게 걸려 하시는 것 같아서입니다.
(색깔론 공세에 비견할 수 있을까요)
언어의 기표, 액면에서 그 객관성, 다시 말해,
인간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월성을 담지하려는,
그런 쉽고 편한 방법으로 신학하고 신앙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믿음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토론을 요청하시니, 주제넘게, 토론에 대하여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복잡한 것을 단순화해서 정리하는 건,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지,
제가 데미님이 아닌데, 어찌 그게 가능합니까?
토론을 하시겠다면서, 그 정도 성의는 있으셔야죠?
이미 '구체적'으로 말씀드렸는데, 말로 한 것도 아니고, 글로 써 드렸는데,
다시 설명 바란다니,
이것이 토론의 태도입니까? 서비스를 요청하는 고객의 태도입니까?
그러니, 제가, 이미 나와 있는 글들을 읽고,
알아서 판단하시라 한 겁니다.
(데미님 말씀대로, 토론 거절합니다)
제가 비겁하게 논쟁을 회피한다고 생각하시려면, 그렇게 단정하셔도 좋습니다.
데미님 및 독자 여러분들의 판단이야 자유니까요.
평안하십시오.
2007.05.03 01:22:58
저 위의 댓글들을 보다가 방금 위에 쓰신 무명재 님의 반응을 생각하면 의외입니다.
무명재 님은 자신의 태도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태도'라고 말씀하시며
'저를 비난하시는 분들 가운데 제가 단 댓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잘못이라고 납득할 수 없다고 제시한 분이 한 분도 안 계십니다.'
라고 말씀하셔서 조금 구미가 땡겨 무명재 님이 '조목조목' 거론 하신 것 중에 첫 번째 것을 우선 이야기해 볼 요량이었는데 정말 의외입니다.
혹 오해가 있으신지 모르겠는데 저는 무명재 님에게 뭔가를 배울 요량으로 운을 뗀 것이 아닙니다.
말귀를 못알아 듣는 사람을 가르치는 것만큼 맥빠지고 허기지는 일을 없습니다.
토론은 우선 상대방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무명재 님이 박목사님의 글을 난도질하며 왜 사리에 닿지 않는지 본문의 대목까지 뽑아가며 조목조목 제시했다면서 이렇게 금새 꼬리를 내리면 공정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제가 관련 주제를 조목조목 물어보니까 아무 것도 몰라 그러는 줄 오해하신 모양인데 무명재 님의 생각이 어디까지가 자신의 생각으로 곰삭여진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물어 본 것입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책에 있는 생각들을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자신의 생각으로 차용합니다.
저는 무명재 님에게서 우선 그것을 확인해 보려던 것입니다.
저를 가르치려는 부담은 갖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저는 미리 말씀드리지만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니 부담없이 홀가분하게 무명재 님이 조목조목 끄집어낸 주제 중에서 첫 번째 것을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말이나 글은 엄밀하게 하지 않으면 그 의도가 왜곡되기 쉽습니다. 토론에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신앙과 이성, 종교와 과학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이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명재 님에게 아주 단순한 질문을 다시 하나 드리겠습니다.
자신의 소신을 굳이 감출 필요야 없지 않습니까?
신앙과 이성, 종교와 과학이 상호 배타적이 아니라고 말할 때
그런 생각의 근저에 합리성에 자리잡고 있습니까?
즉, 모든 사유의 출발에 합리성이 자리잡고 있는가 알고 싶습니다.
앞서 하늘을 무너뜨릴 듯한 기세를 생각하면 굳이 답변을 피할 필요야 없지 않습니까?
무명재 님은 자신의 태도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태도'라고 말씀하시며
'저를 비난하시는 분들 가운데 제가 단 댓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잘못이라고 납득할 수 없다고 제시한 분이 한 분도 안 계십니다.'
라고 말씀하셔서 조금 구미가 땡겨 무명재 님이 '조목조목' 거론 하신 것 중에 첫 번째 것을 우선 이야기해 볼 요량이었는데 정말 의외입니다.
혹 오해가 있으신지 모르겠는데 저는 무명재 님에게 뭔가를 배울 요량으로 운을 뗀 것이 아닙니다.
말귀를 못알아 듣는 사람을 가르치는 것만큼 맥빠지고 허기지는 일을 없습니다.
토론은 우선 상대방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무명재 님이 박목사님의 글을 난도질하며 왜 사리에 닿지 않는지 본문의 대목까지 뽑아가며 조목조목 제시했다면서 이렇게 금새 꼬리를 내리면 공정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제가 관련 주제를 조목조목 물어보니까 아무 것도 몰라 그러는 줄 오해하신 모양인데 무명재 님의 생각이 어디까지가 자신의 생각으로 곰삭여진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물어 본 것입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책에 있는 생각들을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자신의 생각으로 차용합니다.
저는 무명재 님에게서 우선 그것을 확인해 보려던 것입니다.
저를 가르치려는 부담은 갖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저는 미리 말씀드리지만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니 부담없이 홀가분하게 무명재 님이 조목조목 끄집어낸 주제 중에서 첫 번째 것을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말이나 글은 엄밀하게 하지 않으면 그 의도가 왜곡되기 쉽습니다. 토론에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신앙과 이성, 종교와 과학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이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명재 님에게 아주 단순한 질문을 다시 하나 드리겠습니다.
자신의 소신을 굳이 감출 필요야 없지 않습니까?
신앙과 이성, 종교와 과학이 상호 배타적이 아니라고 말할 때
그런 생각의 근저에 합리성에 자리잡고 있습니까?
즉, 모든 사유의 출발에 합리성이 자리잡고 있는가 알고 싶습니다.
앞서 하늘을 무너뜨릴 듯한 기세를 생각하면 굳이 답변을 피할 필요야 없지 않습니까?
2007.05.03 00:44:31
감추든지(저는 이미 다 말했는데, 그렇게 받아들이신다니, 편의상 표현을 따라 보지요) 말든지,
제 자유입니다.
제가 데미님께 빚진 것도, 의무 사항도 없잖아요?
알아서 공부하시면 될 일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도 너무 많이 했고,
제 말 때문에 여러 분들께서 언짢아하셨고,
더 할 말도 없고, 밑천도 딸리고, 지치기도 했기에,
이제 좀 쉴랍니다.
수고하시길.
제 자유입니다.
제가 데미님께 빚진 것도, 의무 사항도 없잖아요?
알아서 공부하시면 될 일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도 너무 많이 했고,
제 말 때문에 여러 분들께서 언짢아하셨고,
더 할 말도 없고, 밑천도 딸리고, 지치기도 했기에,
이제 좀 쉴랍니다.
수고하시길.
2007.05.03 00:54:54
결국 토론은 불발이 되겠군요. 좋은 기회가 될 뻔 했는데 말이지요...
그런데 무명재 님이 앞서 말씀하시던 자유란 겨우 그 정도입니까? '제 자유입니다' 하는 정도?
그건 자유가 아니라 방종입니다.
앞으로 어디서든 글 쓰실 때 두려움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적어도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토론할 의사가 없으면 제 글에 가타부타 답글을 달지 마시기 바랍니다.
답글을 달면 제가 정식으로 토론장에 강제로 끌어들이겠습니다.
늘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무명재 님이 앞서 말씀하시던 자유란 겨우 그 정도입니까? '제 자유입니다' 하는 정도?
그건 자유가 아니라 방종입니다.
앞으로 어디서든 글 쓰실 때 두려움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적어도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토론할 의사가 없으면 제 글에 가타부타 답글을 달지 마시기 바랍니다.
답글을 달면 제가 정식으로 토론장에 강제로 끌어들이겠습니다.
늘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2007.05.03 10:10:20
무슨 말을 하든 걸고 넘어지려고 작정(?)한 듯 다가오는 사람에게
굳이 답변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미 원하는 답변은 도처에 깔려있으므로 필요하신 분이 스스로 취합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온라인에서도 좋은 토론이 불가능한 것은 아지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최대한 좋게 보아야, 단지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는 수준을 넘어서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모든 학문 중에서도 가장 합의에 이르기 어려운 학문이 소위 진리를 담보하고 있다는 신학인 듯 싶습니다.
그러나 신학은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담아내는 그릇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신학이 다 똑같은 그릇일 수는 없겠지요.
각 신학의 한계는 훗날의 역사가 가르쳐 줄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자기의 신학에만 매몰되어 있는 한,
그는 자기 신학의 한계점을 깨닫지도 못하고, 또 인정하려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제 소견에는 소위 보수주의 신학을 하시는 분들이나 소위 진보주의 신학을 하시는 분들이나
사실 거기서 거기이겠지만, 분명 유연성이 떨어지는 쪽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진보 쪽에서 볼때에는 한없이 보수적이고,
한편 보수쪽에서 볼 때애는 한없이 진보적으로 여겨지는
정용섭 목사님의 유연성 있는 신학이,
이 시대에는 비록 수많은 오해와 억측을 불러일으킨다고 해도,
장차 진주처럼 빛나게 될 날이 올 것을 기대합니다.
굳이 답변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미 원하는 답변은 도처에 깔려있으므로 필요하신 분이 스스로 취합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온라인에서도 좋은 토론이 불가능한 것은 아지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최대한 좋게 보아야, 단지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는 수준을 넘어서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모든 학문 중에서도 가장 합의에 이르기 어려운 학문이 소위 진리를 담보하고 있다는 신학인 듯 싶습니다.
그러나 신학은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담아내는 그릇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신학이 다 똑같은 그릇일 수는 없겠지요.
각 신학의 한계는 훗날의 역사가 가르쳐 줄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자기의 신학에만 매몰되어 있는 한,
그는 자기 신학의 한계점을 깨닫지도 못하고, 또 인정하려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제 소견에는 소위 보수주의 신학을 하시는 분들이나 소위 진보주의 신학을 하시는 분들이나
사실 거기서 거기이겠지만, 분명 유연성이 떨어지는 쪽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진보 쪽에서 볼때에는 한없이 보수적이고,
한편 보수쪽에서 볼 때애는 한없이 진보적으로 여겨지는
정용섭 목사님의 유연성 있는 신학이,
이 시대에는 비록 수많은 오해와 억측을 불러일으킨다고 해도,
장차 진주처럼 빛나게 될 날이 올 것을 기대합니다.
2007.05.03 13:23:42
제게 쪽지를 주신 분이 있고 토론(?)이 무산된 데 아쉬움을 나타내시기에
몇 마디 더 하려고 합니다.
이택환 님의 말씀도 잘 읽었구요... 저는 걸고 넘어지려고 작정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한 제 생각은 누군가 걸고 넘어지려고 하면 진지하게 끝까지 상대하는 편입니다.
그것은 제 생각에 자신감에 넘쳐서가 아니고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저는 제 생각이 옳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부닥쳐서 제 생각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저는 너무나 기쁩니다.
그건 진리를 향해 걸어가는 제 삶에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게 되니까요...
여기 댓글을 통한 토론은 사실은 몇몇 분들이 지나치게 자신의 생각을 도그마로 만들어
남의 생각에 무참히 칼질을 하는 상황에서 제가 끼어든 것입니다.
그분들이 서 있는 지평이 어디냐고 그걸 확인하는 예상 문제에 없던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자신의 생각보다는 운전면허 시험을 치르듯 예상 문제에 매달린 듯합니다.
그저 문제와 답을 달달 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예상 문제와 답에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태도 때문에 저도 주변의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찍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냥 서로의 견해가 불꽃 튀기는 치열한 토론은 서로의 발전을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동안 서로 배운 바를 확인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그 문제에 대해서 치열하게 생각해 보았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서로 나누어 보자는 뜻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공부해 보라, 원하는 것을 스스로 취합하라는 말씀은 '나는 다 아는데 모르면 스스로 공부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렇다면 저는 외람되지만 이렇게 답을 하고 싶습니다.
'사방 널려 있는 그 정도는 나도 다 안다' 고.
배울 수 있는 것이 하나라면 그런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반되는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 있고, 서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저 위에 정용섭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럴 때는 서로의 견해가 부닥쳐야 합니다. 인내를 가지고 똘레랑스(관용)을 가지고...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 비평도 결국 그런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정 목사님이 설교 비평을 계속 해도 아무 반응이 없다면 맥빠지는 일입니다.
누군가 이번 박영선 목사님처럼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그것이 토론을 촉발하고...
이렇게 해서 서로 뭔가 발전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자...
정 목사님이 설교 비평를 하고, 박 목사님이 반대되는 견해를 피력하고, 그리고 무명재 님이 서슬 퍼렇게 들이대고... 그리고 제가 나서 무명재 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인내와 관용을 가지고 이것이 계속 진행되어야 합니다.
판넨베르크를 중심으로 또는 성서 읽기에 인문학적 전통을 소중히 여긴다는 자세가 바로 그런 자세가 아닐까요? 저는 그 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토론, 그것도 넓은 의미의 토론이 없이는 누구나 우물안 개구리가 되고 맙니다.
우물안 개구리가 '개골개골'하고 우는데 그 뜻이 '내 생각이 옳다, 내 생각이 옳다' 랍니다.
제가 던진 질문이 너무나 간단한 질문인데 예상 문제에 없는 질문인가요?
아니면 너무 기초적인 질문 같은가요?
저는 이 질문이 너무 기초적인 질문인 것 같아 흐지부지 덮는데서 모든 문제가 비롯된다고
생각해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 문제를 흐지부지 지나가면 나중에 가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가서는 다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골개골개골...
무슨 의미인지는 아시죠?
몇 마디 더 하려고 합니다.
이택환 님의 말씀도 잘 읽었구요... 저는 걸고 넘어지려고 작정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한 제 생각은 누군가 걸고 넘어지려고 하면 진지하게 끝까지 상대하는 편입니다.
그것은 제 생각에 자신감에 넘쳐서가 아니고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저는 제 생각이 옳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부닥쳐서 제 생각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저는 너무나 기쁩니다.
그건 진리를 향해 걸어가는 제 삶에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게 되니까요...
여기 댓글을 통한 토론은 사실은 몇몇 분들이 지나치게 자신의 생각을 도그마로 만들어
남의 생각에 무참히 칼질을 하는 상황에서 제가 끼어든 것입니다.
그분들이 서 있는 지평이 어디냐고 그걸 확인하는 예상 문제에 없던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자신의 생각보다는 운전면허 시험을 치르듯 예상 문제에 매달린 듯합니다.
그저 문제와 답을 달달 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예상 문제와 답에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태도 때문에 저도 주변의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찍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냥 서로의 견해가 불꽃 튀기는 치열한 토론은 서로의 발전을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동안 서로 배운 바를 확인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그 문제에 대해서 치열하게 생각해 보았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서로 나누어 보자는 뜻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공부해 보라, 원하는 것을 스스로 취합하라는 말씀은 '나는 다 아는데 모르면 스스로 공부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렇다면 저는 외람되지만 이렇게 답을 하고 싶습니다.
'사방 널려 있는 그 정도는 나도 다 안다' 고.
배울 수 있는 것이 하나라면 그런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반되는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 있고, 서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저 위에 정용섭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럴 때는 서로의 견해가 부닥쳐야 합니다. 인내를 가지고 똘레랑스(관용)을 가지고...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 비평도 결국 그런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정 목사님이 설교 비평을 계속 해도 아무 반응이 없다면 맥빠지는 일입니다.
누군가 이번 박영선 목사님처럼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그것이 토론을 촉발하고...
이렇게 해서 서로 뭔가 발전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자...
정 목사님이 설교 비평를 하고, 박 목사님이 반대되는 견해를 피력하고, 그리고 무명재 님이 서슬 퍼렇게 들이대고... 그리고 제가 나서 무명재 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인내와 관용을 가지고 이것이 계속 진행되어야 합니다.
판넨베르크를 중심으로 또는 성서 읽기에 인문학적 전통을 소중히 여긴다는 자세가 바로 그런 자세가 아닐까요? 저는 그 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토론, 그것도 넓은 의미의 토론이 없이는 누구나 우물안 개구리가 되고 맙니다.
우물안 개구리가 '개골개골'하고 우는데 그 뜻이 '내 생각이 옳다, 내 생각이 옳다' 랍니다.
제가 던진 질문이 너무나 간단한 질문인데 예상 문제에 없는 질문인가요?
아니면 너무 기초적인 질문 같은가요?
저는 이 질문이 너무 기초적인 질문인 것 같아 흐지부지 덮는데서 모든 문제가 비롯된다고
생각해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 문제를 흐지부지 지나가면 나중에 가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가서는 다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골개골개골...
무슨 의미인지는 아시죠?
2007.05.03 14:25:35
데미님!
로그인을 해보니, 저에게도 제법 쪽지들이 와 있더군요.
님의 진지하신 의도와, 거기에 따른 유익도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발 이 꼭지에서의 토론은 그만 하시는게 어떨까요?
원성들이 자자합니다.
이렇게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꾸벅~
로그인을 해보니, 저에게도 제법 쪽지들이 와 있더군요.
님의 진지하신 의도와, 거기에 따른 유익도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발 이 꼭지에서의 토론은 그만 하시는게 어떨까요?
원성들이 자자합니다.
이렇게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꾸벅~
2007.05.03 21:48:26
박 목사님의 반론은 논지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이 듭니다.
저는 반론이라기에 '속 빈 설교, 꽉 찬 설교'에 나온 박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특히 '칭의/성화'신학을 자기의 신학으로 반론 하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글을 보니 정 목사님이 '판넨베르크'에 대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판넨베르크 신학만 이야기 하시더군요.
제가 정 목사님의 책을 읽어 본 바로는 판넨베르크의 신학도 물론 있지만 바르트 신학(말씀의 신학, 하나님의 행동) , 몰트만 신학, 또 약간의 운동권 성향도 보이는 데 말이죠. 특히 박 목사님 설교 비평에는 많은 부분을 칼 바르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설교비평에 대한 반론이라기 보단 '너와 내가 다르다'라는 이야기만 나오다 끝난 것 같아 아쉽습니다. 박 목사님의 설교비평에 대한 반론이 아니라 두 분 신학을 비교하는 것으로 끝난 것 같아 아쉽습니다. 대화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이랄까요? 제가 잘 못 본것이라면 알려주십시오.
저는 반론이라기에 '속 빈 설교, 꽉 찬 설교'에 나온 박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특히 '칭의/성화'신학을 자기의 신학으로 반론 하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글을 보니 정 목사님이 '판넨베르크'에 대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판넨베르크 신학만 이야기 하시더군요.
제가 정 목사님의 책을 읽어 본 바로는 판넨베르크의 신학도 물론 있지만 바르트 신학(말씀의 신학, 하나님의 행동) , 몰트만 신학, 또 약간의 운동권 성향도 보이는 데 말이죠. 특히 박 목사님 설교 비평에는 많은 부분을 칼 바르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설교비평에 대한 반론이라기 보단 '너와 내가 다르다'라는 이야기만 나오다 끝난 것 같아 아쉽습니다. 박 목사님의 설교비평에 대한 반론이 아니라 두 분 신학을 비교하는 것으로 끝난 것 같아 아쉽습니다. 대화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이랄까요? 제가 잘 못 본것이라면 알려주십시오.
박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정말 자유함을 얻고, 신앙의 기쁨을 누리는 많은 사람들의 당신이 보이게 박목사님의 사기에 놀아난거 같아 보이겠지요... 당신이 그렇게 혐오스러워 하는 보수신학속에서도 신앙의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많은 사람들을 논리적으로 판단해 보시죠... 마아 세뇌당한 것이겠지요...
이 싸이트를 제가 아는 많은 전도사들에게 가르쳐 줬습니다... 정말 정목사님께 배울께 많다고요...
정말 제 친구들이 계속해서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