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820일 저녁에 영천에 있는 롯데시네마에 갔. 직접 영화관에 간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랜만에 최신 시설이 잘 갖춰진 영화관에 간 셈이다. 영화 제목은 요즘 뜨거운 ‘오펜하이머. 그 영화에 관한 정보는 알만한 분들은 다 알겠기에 여기서는 줄인다. 내 눈에 들어온 몇 대목만 주관적인 인상평 정도로 짚겠다.

 

1) 영화에 내가 진작 알고 있던 여러 물리학자 이름이 나온다. 주인공 오펜하이머가 물리학자다. 독일 괴팅엔 대학교에서 막스 보른(?) 밑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인슈타인도 조연으로 나온다. 하이젠베르크, 닐스 보어 등이 나에게 익숙한 학자들이다. 오펜하이머가 아내인지, 연인인지 모를 어떤 사람에게 원자와 현실 세계의 관계에 관해서 설명하는 장면이 오래전 내가 신학대학교 강의 나갈 때 신학생들에게 설명하던 내용과 똑같았다. 원자는 대부분이 텅 비어있는 공간이다. 그 말은 곧 우리 몸도 공간이라는 말이다. 원리만으로 본다면 손뼉을 치면 서로 통과해야 한다. 통과하지 않는 이유는 원자가 강력한 에너지로 뭉쳐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은 이 강력한 에너지를 연쇄 폭발시켜서 천문학적인 에너지를 분출하는 원리다. 그 기초의 원리는 아인슈타인이 찾아냈다. 양자 컴퓨터라는 말이 있듯이 앞으로 언젠가 양자 폭탄이 나온다면 지구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거의 상상을 초월한다.

 

2) 오펜하이머는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원자폭탄 제작 맨해튼 프로젝트총 책임자로 선정되는 순간부터 받았다. 그의 주변에 있던 여자들이 공산당원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오펜하이머 자신이 일종의 자생적 공산주의자처럼 그런 사상에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그 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매카시즘(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의 광풍 속에서 호펜하이머가 빨갱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여기에는 정치 사회적인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 세계가 냉전 시대로 접어들었기에 이런 마녀사냥이 통했다. 현재 미국이 공산주의를 불법으로 간주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본도 그렇고, 유럽은 반사회적인 행태를 보이지만 않는다면 공산주의 사상에 동조하거나 활동한다고 해서 처벌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이런 점에서는 가장 후진적이다. 툭하면 좌파 빨갱이라는 말도 한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을 그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다. 남북분단이라는 멍에가 우리를 후진적 사회로 묶어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사상의 자유가 없는 셈이다.

 

3) 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앞당기는 데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해서 미국의 영웅이 되었던 오펜하이머가 졸지에 공산주의 누명을 쓰게 되자 미국 국회에서 청문회가 열렸다. 이 영화 <오펜하이머>의 서사는 청문회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 영화에 비친 청문회는 의회제도의 장점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실체적 진실을 찾아가려는 의원들과 증인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배우들의 (표정) 연기가 탁월해서 그런지, 원래 미국 청문회의 품격이 그런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위원회는 호펜하이머를 향한 의심이 근거가 없다고 하면서도 핵무기와 관련된 비밀 정보에 접근할 권한을 박탈했다. 대한민국 국회의 청문회가 떠올랐다. 방통위원장 후보자 청문회와 해병대 채 일병 죽음을 둘러싼 국방위 청문회는 일단 내용이 부실했다. 이미 뉴스로 보도된 내용의 재탕, 삼탕이었다. 새로운 정보가 없다면 이미 나온 정보만으로도 증인들의 잘못과 모순과 자가당착과 비열함을 날카롭게 짚어낼 수 있어야 했는데, 크게 부족했다. 증인들의 뻔뻔한 거짓말을 윽박지를 뿐이다. 그런 장소에서도 꼰대 스타일을 버리지 못하는 의원들이 제법 많다. 국회 청문회만으로 흥미진진한 영화가 가능한 미국이 부럽다. 2022년이 되어서야 호펜하이머의 공산주의자 혐의가 완전히 벗겨졌다고 한다.

 

4)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 사이에 나온 대화로 기억한다. (아인슈타인이 아닐 수도 있다.) 아인슈타인이 그에게 말한다. 정치인들은 물리학자들을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서 칭찬하고 돈도 주고 하지만 의견이 다른 순간이 오면 물리학자들을 내칠 것이라고 말이다. 일종의 토사구팽이 그 세계의 메커니즘이는 것이다. 원자폭탄이 얼마나 끔찍한 무기인지를 잘 아는 오펜하이머는 그보다 더 강한 무기인 수소폭탄 제작 요구를 거절했다. 소련과의 경쟁 시대에 이런 주장은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다.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이는 과학의 실체를 아는 학자들이 아니라 세상을 정치적인 눈으로 보는 정치인들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어떤 물리학자는 이 영화를 물리학자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영화라고 평했다 한다.

 

5) 이 영화에는 기억할만한 수많은 아포리즘이 나온다. 모든 영화에 그런 경구가 나오기는 하나 이 영화는 유독 그렇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각본을 쓰고 감독한 크리스토퍼 놀란이 직접 쓴 내용인지, 아니면 그 영화의 원작 호펜하이머 전기물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작가, 카이 버드, 마틴 J. 셔윈)에서 발췌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원작 제목에 프로메테우스라는 이름이 달렸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주었다 하여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파먹히는 징벌을 제우스에게서 받은 신이다. 인간에게 불은 복이면서 화다. 자연의 불을 이용해서 인간은 문명을 발전시켰다. 이제 인간이 스스로 불을 창조해낸 것이다. 얼마 있으면 인간 복제 방식으로 인간을 창조하려고 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본래의 창조는 아니다. 어쨌든지 인간에게는 선한 의지와 악한 의지가 동시에 작용하기에 불을 평화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파멸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파멸적으로 사용하는 순간이 오면 지구에서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는 인류도 멸종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가 보유한 핵무기만으로도 지구는 끝장날 수 있는데, 이제는 북한처럼 종잡기 힘든 나라도 핵무기를 손에 넣었으니, 인류의 미래는 점점 더 불확실성으로 빠져든 셈이다.

 

6) 오펜하이머가 총책을 맡아서 제작에 성공한 원자폭탄은 일본 히로시마(1945.8.6.)와 나가사키(1945.8.9.)에 떨어졌다. 815일 정오에 일본 천황은 항복 선언을 했다. 우리는 식민 지배에서 해방을 맞았다. 만약 오펜하이머의 원자폭탄 연구가 실패하거나 1년 이상 늦춰졌다면 우리의 상황은 어떻게 변했을까? 역사에서 만약은 별로 의미가 없다. 너무 많은 개연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언젠가 읽은 책에서 그런 의견을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의 패전이 조금 늦춰졌다면 우리가 해방 이후에 우리의 역사를 준비할 시간이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해방 정국에서 그 어떤 주도적 역할도 못 했다. 그냥 선진국들의 전략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분단 체제가 되어서 지금까지 78년을 보냈다. 당시 한반도를 분단해서 신탁통치를 하겠다고 결정한 국제회의에 우리의 임시정부 대표가 참석할 수 있었다면 결과는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모든 게 결국에는 사람이 결정하는 거 아닌가. 패전국인 독일이 분단되었으나 똑같은 패전국인 일본은 분단되지 않고 오히려 중간이 낀 한반도 조선이 분단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힘이 없는 백성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하고 지나가기에는 너무 가혹하다.

 

7) 이외에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적지 않다. 영화 음악이 잘 만들어진 느낌이 들었다. 15세 이상 관람가 영화에, 짧은 장면이기는 하나, 여성의 상반신 전면 노출 섹스 장면이 왜 들어갔는지 이해는 안 된다. 감독의 예술적 감수성이 오버한 거 같다. 이슬람권에서는 모자이크 처리했다는 말도 있긴 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장면이 직접 묘사되지는 않았다. 뉴스 보도 형식으로 원폭의 파괴력이 엄청났다는 사실만 알도록 처리했다. 원폭 문제가 민족적인 트라우마로 새겨진 탓인지 일본에는 이 영화가 개봉되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영화 상영 시간이 3시간 가까이 된다. 진행 템포가 빨라서 시간이 길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여러 분야에 걸쳐서 너무 많은 사람 이름이 나온다. 세 번 정도는 반복해서 봐야 감독이 영화 안에 감춰둔 메시지를 빠뜨리지 않을 거 같다. 아마추어인 내 눈에 영화 제작에 돈은 많이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유명 배우가 나오니까 어느 정도는 돈이 들어갔겠으나 전쟁 영화처럼 많은 사람이 나오지도 않고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는 세트장도 없으니까 말이다. CG를 이용하지 않아서 장면에서 현실감이 더 분명했다. 담배 광이었던 오펜하이머는 후두암에 걸려서 60대 초반에 죽었다. 몇 해 뒤에 비슷한 나이에 그의 아내도 죽었고, 그의 딸은 33세에 죽었다. 개인의 인생살이로는 불행한 게 아니었을지. 한마디로 거장 놀란 감독의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영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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