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슬러 송성일의 죽음

94년 10월 일본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 100kg급 그레코로만형 레슬링시합에서 금메달을 딴 송성일 선수가 26세의 꽃다운 나이로 지난 1월29일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의 꿈을 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젊은이로서 감내하기 너무도 힘든 죽음과의 투쟁이 비록 네 달에 불과했지만 놀라웠다. 그의 투병생활과 장례식 등의 장면이 TV 영상을 통해 생생하게 보도되었는데,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했다.
알려진 대로 보면 그는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지 사흘 만에 위를 삼분의 이나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암 중에서 위암은 비교적 생존 가능성이 많은 병이고 더구나 환자가 철인과 같은 젊은 건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운동을 할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 회복하리라고 너나없이 기대했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암세포가 다시 활동하기 시작하여 재수술을 받았으며 그 이후 병세가 악화되었다. 고된 레슬링 훈련도 견뎌낸 그가 암세포로 인한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진통주사에 의지하게 되었고, 그것으로도 고통을 멈출 수 없어서 결국 신경차단 수술 까지 받았다고 한다. 위에서 시작한 암이 장기와 뼈에 까지 전이되어 온 몸이 암세포로 가득하게 된 셈이다. 현대 최고의 의료만이 아니라 좋다는 모든 민간요법을 다 받았지만 그는 모든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슬픔과 아쉬움만을 남겨 좋고 먼저 떠났다.
100kg의 건장한 청년을 완전히 파괴시키고 만 암이란 병도 사실 따지고 보면 별것이 아니다. 우리 몸의 정상적 세포를 암세포가 갉아먹기 때문에 결국 몸의 기능이 마비되어 죽게 되는 병이다. 일종의 비정상적인 세포 조직이 지나치게 활동한다는 말인데, 그것을 억제하기만 하면 암이란 병은 극복될 수 있다. 일단 이론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말한다면 암을 치료하는 방법은 외과적 수술로 암세포에 의해 점령당한 부분을 절단하여 암세포의 뿌리를 잘라내던지, 아니면 약물이나 방사선 등으로 암세포를 죽이거나 그것의 활동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간단할 것 같은 그런 치료방법이 오늘과 같은 첨단의 의학으로도 완전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정상세포와 암세포를 완전히 분리한다는 게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점과 암세포의 활동이 정상 세포 보다 훨씬 강하다는 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상한 말이 될지 모르지만 만약 인간의 장기를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만 있다면 암이 아니라 암 할아버지라 하더라도 별 문제가 아닐 것이다. 암에 걸린 위나 간을 몽땅 잘라내고 다른 걸로 바꿔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요사이도 암에 걸렸던 사람이 자연 치유되는 일이 없지 않은데, 그건 과학적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암세포 보다 정상세포가 강하기만 하다면 문제는 아주 간단하다. 그것을 우리는 면역(immunity)이라고 부른다. 평소에 건강한 사람은 감기에 걸려도 쉽게 치료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우리 몸의 세포를 암세포 보다 강하게 만들 수 있는가라는 게 관건인데, 이게 일반적으로는 쉽지 않기 때문에 암이 불치병으로 간주된다. 그렇게 강한 육체를 갖고 있던 송성일 선수의 세포가 맥없이 무너지는 걸 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번 송성일 선수의 죽음을 가장 마음 아파한 이는 아무래도 그의 모친인 것 같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이 화면에 비친 송성일 선수의 모친은 어느 시인의 싯구처럼 <절망의 끝>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녀도 삼년 전인가 위암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 큰 아들도 그런 수술을 받았고, 그 병으로 죽었으니 그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인간의 모든 불행, 모든 절망, 모든 한(恨)이 그녀의 울음 속에 담겨져 있었다.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그렇게 철저하고 처절하게 허물어질 수 있는가?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더구나 천수를 다한 죽음이 아니라 새파란 나이에 당하는 죽음이란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며, 또한 분노하게 만든다. 송성일 선수처럼 강한 체력을 가진 젊은이가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죽으리라고는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송성일 선수가 투병하며 살아가던 네 달 동안의 시간은 인간의 전체 인생과 같다. 처음에 입원할 당시만 하더라도 아시안 금메달리스트로서 건장한 대장부였는데, 날이 갈수록 여위어가더니 결국은 자기 몸도 주체하지 못하고 동생의 등에 업힐 수밖에 없었다. 죽음에 임박해서는 그 잘생긴 얼굴에 살이 다 빠지고 흡사 송장 같은 모습이 되었다. 이런 변화는 청년 시절부터 죽어 관에 들어갈 때까지의 인생을 영사기로 촬영하여 초고속으로 돌리는 것 같이 보였다.
송성일 선수의 투병이 우리에게 던져준 메시지는 분명하다. 생명을 향한 의지 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는 죽는 순간 바로 직전 까지도 삶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병문안 차 찾아오는 가족들과 펜들을 맞으면서, 혹은 어릴 때 레슬링을 배우던 체육관을 찾았을 때, 고향집 어머니를 만났을 때 그는 넉넉한 마음으로 죽음을 거부하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육체가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지만 그의 정신은 더욱 확고해져 갔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온 몸을 휩싸고 있을 때도 그는 삶의 희망을 잃지 않았다. 비록 죽음을 물리치지는 못했지만 그는 위대하게 투쟁했다. 끝 까지 최선을 다한 그의 그런 불굴의 의지를 비현실적이라거나 무모하다고 웃어넘길 자가 어디 있는가? 그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삶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그의 용기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진심으로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다. <95.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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