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는 생명이다!

위에서 제목으로 삼은 명제를 세계화의 구호가 흡사 구원론 처럼 외쳐지는 이 시점에서 다시 언급한다는 것은 별로 적절한 것 같지는 않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한 뻔한 답을 너무도 많이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그런 답변들이 현실적인 흥미를 유발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그래, 농사가 생명이라는 걸 그런대로 인정해 줄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게 도대체 어떻다는 말이냐. 밥벌이도 되지 않는 걸 갖고 입으로만 생명 운운하며 살아가란 말이냐.” 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옳다. 지금 농사는 돈이 안 된다. 돈이 되게 하려면 기업화 하여 대량생산 체제에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나라 실정상 그런 조건을 채우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열, 혹은 스무 마지기 땅을 갖고 허리띠 졸라매며 자식들 뒷바라지 하던 우리의 농사꾼들이 어떻게 대구시만 한 땅에 농사를 짓는 호주나 캐나다, 미국 농사꾼들과 경쟁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의 농사꾼들이 농사를 계속 짓는 이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땅값이 오르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농사일 자체에 마음을 두고 있는 이들은 아주, 정말 아주 적다. 안타까운 현상이지만.
조금이라도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좁은 땅덩이 위에 살아가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자동차나 컴퓨터 같은 최첨단 전자, 정보 산업을 발전시키는 게 경제 원리에서 볼 때 훨씬 바람직한 일이라는 말이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다. 경쟁할 수 없는 부분은 아예 거둬 치우고 가능하고 능률적인 부분에 집중투자 하는 게 바람직 할지 모른다. 어처구니없게도 미국 영화 <주라기 공원> 한편이 벌어들인 돈이 우리가 일 년 동안 땀 흘리며 만들어 내다 판 자동차 수입 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도 역시 사람이란 자로고 적은 투자로 많은 소득을 올리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물론 미국의 영화산업이 하루 이틀에 그런 힘을 갖게 된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농사일은 별로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걸 하면서 살아가겠다는 생각은 개인의 경우에는 특별히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국가적으로도 역시 그렇게 된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옛날에는 옹기장수나 짚신 장수나 서당 선생이나 모두가 자기의 특정 직업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농사일에 관심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직접 농사를 짓던 않던 간에 그 해의 농사에 대해 거의 절대적인 관심을 갖고 살았다. 그 당시의 절기란 오직 농사와 관련될 뿐이었다. 그들은 하늘을 보고, 그 별과 구름을 보고, 비와 시냇물을 친구 삼아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저 자기 일만 생각한다. 요새처럼 심한 가뭄이 들어도 수도꼭지만 틀면 수돗물이 흘러넘치는 마당에, 세계 곳곳에서 값싼 농산물이 무진장으로 수입되는 마당에 직접 농사를 짓지도 않는 어느 누가 농사걱정하며 살아가겠는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농사를 주변적인 일로 제쳐놓고 돈벌이 잘 되는 서비스나 정보산업에 치우치게 된다면 이런 삶의 양식은 더 심화될 것이다. 물론 그렇게 살아 갈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더 잘 살게 될지도 모른다. 값 싸게 농산물을 사다 먹으면 아주 간단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그렇게 해서 인간일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하늘과 땅과 시냇물과 나무, 그리고 생명과 썩음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어떻게 인간일 수 있겠는가 말이다. 미래학자들은 인간이 앞으로 <사이버스페이스>(가상공간) 개념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혹은 염려스럽게 진단하고 있다. 인간은 컴퓨터 화면을 통해서만 모든 세상의 정보를 교환하면서 살아가게 될 텐데 그건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삶이 될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인간의 사물화 과정에 불과할 것이다.
이처럼 앞으로 우리는 점점 자연이나 우주와 상관없이 계획된 프로그람에 순종하면서 살아갈 것이며,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 까지 모든 삶의 과정을 컴퓨터가 프로그래밍 하게 될지 모른다. 인간이 만든 컴퓨터가 인간을 지배하는 그런 사회를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미래의 컴퓨터는 조지 오웰이 <1984년>이라는 책에서 피력코자 했던 <빅 브라더>에 상응한 절대자가 될 것이다. 이런 사회는 인간성의 참담한 파괴를 그 특성으로 갖는다.
우리가 농사를 우리 삶의 핵심 축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거기서만 급격한 사물화의 과정을 극복하고 인간다움의 근거를 상실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농사를 직접 지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농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최소한의 직관에 의지해서라도 농사의 생명 지향성을 이해할 수는 있다고 본다. 농사는 근본적으로 죽음과 삶의 순환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봄에 뿌린 씨앗이 땅 속에 묻혀 썩음으로써 더 많은 생명을 만들어 낸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러한 생명의 순환을 생각하게 되며, 인간도 역시 그런 생명의 순환 고리 가운데 놓여 있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자연과 우주 가운데서 자기를 인식하고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 보다 더 인간다워지는 길이 어디 있겠는가.
현암사 출판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를 쓴 전우익 노인을 보면 그가 비록 평생 농사만 지으며 살아왔지만 농사를 통해 인생의 깊이를 발견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농사짓는 일이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겠지만 언젠가 필자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서슴지 않고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9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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