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가 1960년대 초반으로 기억된다. 아침과 저녁 끼니 때 마다 우리 동네(서울 돈암동) 골목골목, 집집마다 돌며 “밥 한술 줘요, 네 에!”라고 소리치던 이들이 있었다. 끝 부분이 구성지게 높은 음으로 올라가는 그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처량하다 못해 애절하게 느껴졌다. 그 시절 우리나라 형편이란 게 말이 아니어서 구걸해서 <겨우 생존>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다. 그들의 <밥> 달라는 소리는 그렇게 구걸행각에 내몰린 이들만이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 전체 백성들의 절규이기도 했다. 육이오 전쟁이 끝난 지 겨우 십년, 아직도 보릿고개에 찌들려 살면서, 미국을 그저 마음 좋은 엉클 톰 정도로 생각하고 기회가 닿는 대로 원조나 받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미군들이나 선교단체가 가져다 준 강냉이 가루, 식용유, 오래된 분유 같은 먹을거리를 많이 얻어다 허기진 배를 채웠다.
우리 집 대문간에서 밥 달라고 소리치던 그이들의 깡통 속에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찬밥 몇 덩이 넣어준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왜 저래야만 하는지, 내가 어린 탓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저들은 뭔가 나와 다르게 살아가는구나, 하는 생각만 했다. 이제 인간에게 <밥>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면서, 옛날 그들의 외침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시인 김지하는 1984년에 이야기 모음집 ‘밥’을 펴냈다(1995년에 재발행). 거기서 우리는 <밥>의 생명성에 대한 그의 풍부한 성서적-동양사상적 직관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밥(떡)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요6장) 근거하여 보다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기독(구원)론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가 매일 밥상에 앉아 먹고 있는 밥은 분명히 생명, 그것도 우주론적인 생명이다.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한 톨의 쌀 속에는 태양과 흙과 물과 공기에서 나오는 생명의 원소들이 결합되어 있다. 밥을 먹는다는 말은 곧 태양과 흙과 물을 먹는다는 것이며, 이는 바로 생명을 먹는 것과 진배없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많은 행위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밥 먹는 것이다. 이건 모든 인간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고귀한 권리이자 책임이다. 인간이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지만, 먹지 않고는 그 어떤 삶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밥>먹는 일은 인간존재의 근거를 이루는 거룩한 행위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이유에서 먹는 예절을 매우 엄격하게 가르치신 것 같다. 밥알 하나라도 흘리지 말아야 하고, 지나치게 떠들지 말아야 하고, 어른에 앞서 수저를 들지 않아야 했다. 이건 단순히 유교적,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외경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은 예수님도 먹는 데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식사자리가 드물지 않게 나온다. 제자들이 이런 먹는 문제 때문에 바리새인들에게 시비를 많이 당하기도 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변호하셨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그 당시 정통 종교인들에게는 정말 못마땅했던 것 같다.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마11:19)이라고 까지 했겠는가? 물론 이 말에는 의도적인 악의가 끼어있긴 하지만, 먹는 문제에 있어서 금욕적이었던 세례요한에 비해 예수님은 좀 너그러우셨음이 사실이다. 그만큼 예수님은 인간을 <추상적>인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이해하셨다는 말이 된다.
밥 먹는 일이 중요하다면 그 밥을 짓는 일 또한 중요한 것 아닐까? 안타깝게도 주로 여자들이 많이 담당하고 있지만, 식구들을 위해 밥을 짓는 일이 자동차나 텔레비전을 만들어 달러를 벌어들이는 일보다 덜 중요하지 않다. 설거지가 국회의사당에서 국사를 의논하는 일 보다 열등한 게 아니다. 오히려 본질적인 면에서 보면 식사준비가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인간은 자동차 없이, 컴퓨터 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밥을 먹지 않고는 얼마를 버텨내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밥 짓는 일을 하찮은 걸로, 반면에 국가 내지 세계경영만을 굉장한 걸로 간주하려고 한다. 이게 문제다.
마찬가지로 농사도 그 어떤 노동 보다 우선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보아야 한다. 농사는 국가 경제적 차원에 머무는 게 아니라 국가 생명에 관계된다.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명제는 쌀이 생명임을 안 우리 조상들의 혜안이다. 진정한 농사꾼은 돈이 안 되도 농사를 짓는다. 그게 생명을 일구는 일이니까 말이다(전우익 지음,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현암사).
지금 WTO 시대를 맞아 농사위기 운운 하고 있지만, 만약 이 문제를 경제논리적 관점에서만 생각한다면 가능한대로 농산물 수입을 늘리고 대신에 우리의 노동력을 정보산업으로 돌리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그게 돈벌이에 낫다. 그러나 우리가 최대한 쌀 수입을 억제하려는 이유는 삼천리 반도에서 생산된 쌀이 바로 우리 생명의 본질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한국 쌀이면 어떻고 캘리포니아 쌀이면 어떤가, 하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身土不二>라는 말이 국수주의적인, 혹은 감상주의적인 발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좀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소중한 <밥>을 우리는 누구나 똑같이 하루에 세 번이나 먹고 산다.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탐욕스럽게 너무 많이 먹으려고 하고, 어떤 이들은 너무 먹을 게 없어서 굶는다면, 나라 안과 밖을 막론하고, 이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생명질서를 허무는 일이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 결식노인들이 적지 않다는 뼈아픈 소식을, 또한 동시에 다행스럽게도 그런 이들에게 정기적으로 밥을 제공하는 이들이 있다는 따뜻한 소식을 듣곤 한다. 고마운 일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른 건 아니더라도 일용할 <밥>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루치의 밥을 구하고, 그것으로 충분히 감사하고, 또한 이런 마음으로 서로 밥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우리는 진정 <성만찬>의 의미를 이 세계에 육화(肉化)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95.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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