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5.18 민주화 운동

지난 1월 하순 경 우리 가족은 1박2일의 약간 바쁜 일정으로 남해안을 한 바퀴 돌았다. 현풍에서 88고속도로를 타고 광주를 거쳐 목포에서 하룻밤 자고, 이튿날 남해안을 끼고 광양, 삼천포를 거쳐 구마고속도를 타고 다시 현풍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첫 번째 방문지로 광주 망월동 공동묘지를 정했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광주에서 몇 번 길을 물어갔는데, 비교적 찾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날따라 바람이 몹시 세게 불어서 그렇지 않아도 을씨년스런 망월동 묘지가 더욱 스산해 보였다. 처음 예상에는 망월동 공동묘지에 광주민주화 항쟁 당시 죽은 열사들만 묻혀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그곳은 원래 광주 시립묘지였다. 5.18 묘역은 망월동 시립공동묘지의 초입에 따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금년부터 그곳이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놓고 아내와 함께 두 딸을 데리고 5.18 묘역으로 걸어 올라가는 내 마음은 그 공동묘지의 구릉을 타고 이리 저리 강하게 불어대는 겨울바람처럼 어수선 했다. 그곳에는 5.18 당시 죽은 이들과 그 후에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 죽은 이들이 묻혀 있었다. 현재 봉산성결교회에서 시무하시는 류연창 목사님의 큰 자제도 그날 도청에서 숨졌다. 그의 무덤 앞에서 우리 가족은 잠시 추모의 묵념을 드렸다. 김남주 시인의 묘 앞에서도 잠시 멈췄다. 그곳에 잠들어 있는 2백 여 열사들은 지난했던 우리의 현대사를 그날 불어대던 칼바람처럼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라 생각되었다.
금년은 5.18 광주민주화 항쟁이 발생한 지 15주년이 되는 해다. 1980년 봄, 소위 <서울의 봄>이 회자되던 그 해에 나는 군목 입대를 위하여 광주보병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다. 폐쇄된 군대의 피교육생으로서 교관들의 일방적인 선전 이외에는 그 어떤 정보도 접할 수 없었다. 그때 광주에 모인 이들은 폭도였으며, 고정 간첩에 의해 부화뇌동 당한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무기고를 탈취했으며 광주를 무법천지로 만들었다. 그들은 이렇게 매도당했다. 소위 신군부는 구국일념이라는 명목 하에 공식집계만으로도 2백여 명의 양민을 살해했다. 지난 연초에 서울방송에서 방영된 <모레시계>가 적나라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비교적 객관적으로 그때의 사태를 잘 그려준 것 같다.
5.18 광주민주화 항쟁은 매우 오랫동안 광주의 수치로 여겨져 왔다. 아주 일부의 성직자들과 지식인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광주의 5.18을 터부시 하여 아예 기억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5.18을 <민주항쟁>이라고 부르는 걸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는 조선일보 까지도 사설에서 5.18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해 주고 있는 걸 보면 시대가 변해도 참 많이 변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그 민주항쟁을 총과 칼로 억압해 버린 세력은 어떻게 판단되어야 하는가? 누가 민주항쟁을 벌인 양민들에게 발포명령을 내렸는가? 만약 5.18을 민주항쟁, 혹은 민주화 운동이라고 재평가 했다면 그걸 강압적으로 막으려 했던 이들의 범죄적 행위를 가려내야 할 텐데 15년이 지난 지금 까지 아무런 결과가 없다. 참 딱한 일이다. 죽은 자는 있는데 죽인 자가 없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이미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그리고 그 당시 신군부 세력이 아직도 이 사회의 한 모퉁이에 적지 않은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공연히 문제를 들쑤셔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고 있긴 하다. 우리가 처절하고 기가 막힌 과거의 역사를 마구 파헤쳐 국민들 사이에 더 깊은 상처를 만들게 된다면 결코 지혜로운 처사는 아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그 역사를 통해서 오늘 우리의 삶을 바르게 하자는 것일진대, 5.18이 이미 우리 민족에게 큰 교훈을 주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발포 명령자를 가려내어 책임자를 처벌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문명국가에서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사건, 자기 나라 군대가 자기 백성들을 2백여 명이나 살해한 사건을 단순히 어쩔 수 없었다는 정황론에 의해 미해결로 덮어버린다면 앞으로 우리는 역사로 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민족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책임자를 그에 상응하도록 처벌하자는 게 아니라 진상을 규명하자는 주장이 그렇게 과격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잘못한 이들이 그 잘못을 인정해야 용서도 하고 서로 인간의 한계를 아파하기도 할 것 아닌가? 살해당한 이를 의인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 의인을 죽인 이를 찾아내려 하지 않는다면 이건 역사 앞에서 무책임한 자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보통 남의 아픔에 대해 쉽게 말을 하긴 하지만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이진 못한다. 5.18 때 2백여 명의 생명이 죽었는데, 그들의 부모, 혹은 자식이나 형제들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았을는지 아주 어렴풋하게 느낄 뿐이다. 슬픈 영화 한편 보고 나서 눈물을 흘린 다음 순간적으로 자기의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듯이 우리는 5.18의 상처를 남의 이야기로만 느끼며 살아왔다. 특히 경상도에 사는 우리들이 전라도의 그 아픔을 실감하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건 우리의 무감각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이야기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5.18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우리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역사적 죄에 대해 얼마나 민감하고 단호했는지 배워야 하며, 동시에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배워야 한다. 이는 곧 정의와 사랑이다. 정의로운 사회와 사랑이 넘치는 사회가 되도록 힘써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은 5.18을 사회적 정의에 입각해서 판단하며 동시에 사랑의 윤리에 근거해서 화해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이 길이 정말 어렵기는 하지만. <95.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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