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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소설가
목사는 매 주일 설교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두 세편 씩, 많으면 대 여섯편 씩 설교를 한다. 목사는 설교를 그 생명으로 여긴다고 해야 좋을 정도로 설교에 의존적이다. 그 설교 때문에 목사는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고 엄청난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일종의 권위주의에 사로잡혀 설교의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일방적으로 외치기만 하면 신자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미숙한 이들을 대상으로 할 때는 이런 자세가 어느 정도 통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게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옳지도 않다. 목사의 설교가 이런 위험성에서 벗어나는 길은 새로움에 있다. 교리문답식의 규격화된 내용과 형식으로 부터,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새로움을 줄 수 있는 그것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목사는 매번 새로운 설교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현실 사이에서 노심초사 하고 있는 자다. 그렇다면 어떻게 새로운 설교를 할 수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새로움이란 단순히 기술상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본질에 관계되는 문제다. 새로운 예화, 새로운 구성, 새로운 몸짓이 아니라 삶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말한다. 어릴 때 느끼던 삶과 성장한 다음에 느끼는 삶이 다르듯이, 나이가 들고 생각이 깊어지면서 성서본문에 대한 이해나 인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예컨대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란 책을 20살에 읽는 것과 40살에 읽은 것이 엄청나게 다르듯이 삶에 대한 이해도 그 성숙도에 따라 엄청나게 다르다. 이처럼 설교의 새로움이란 그 설교자가 들어가는 삶의 깊이만큼만 드러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이런 달라짐, 이런 새로움으로의 돌입은 어느 단계에서 머물거나 완성되는 게 아니라 죽을 때 까지 진행되는 작업이다. 말하자면 아무리 뜨거운 성령 충만을 경험했다고 해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시기에 도달됐을 때, 즉 죽게 되었을 때 멈추게 된다. 따라서 목사는 설교를 계속 하기 원한다면 끊임없이 삶에 대한 통찰력과 직관력과 해석학적 기초들을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
한편 소설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소설가는 매번 소설을 쓸 때 마다 새로운 내용을 창조해 내야 한다. 소설가들의 새로움이란 것도 목사들의 경우와 같이 단순한 기술적인 차원이 아니라 삶의 깊이에 관련되는 문제다. 소설 쓰는 기술은 관련된 대학의 전공공부를 통해서 억지로라도 배울 수 있지만 삶의 깊이는 그렇지 못하다. 소설은 그것을 쓴 사람이 경험한 삶의 깊이만큼만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약간 엉뚱한 질문인지 모르지만, 목사의 설교하기가 어려운가, 아니면 소설가의 소설쓰기가 어려운가? 이에 대한 정답을 물론 있을 수 없다. 목사의 설교를 중심으로 몇 가지 특징들만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목사는 청중의 입장에서 설교하지만 작가는 오직 자기의 생각에 집중해서 글을 써도 좋다. 설교의 청중은 거의 일정하고 층이 다양하지만, 소설의 독자는 매번 바뀔 수 있으며 어느 정도 같은 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어떤 작업이 훨씬 어렵다고 단정 지을 수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목사는 잘하든 못하든, 컨디션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강요받고 있기 때문에 영적 감동이 있을 때만 소설을 써도 되는 소설가의 작업이 그래도 융통성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목사와 소설가, 그리고 이들의 작업이 갖고 있는 차이점 보다는 동일성이 더욱 중요하다. 우선 이들에게 공히 절실하게 필요한 부분은 (예언자적)상상력이다. 목사에게는 성경본문이 명시적으로 지적해 주는 것 이상의 것을 읽어낼 수 있는 상상력이, 작가에게는 그 사회 안에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 너머에 있는, 혹은 심층에 있는 실체나 의미들을 읽어낼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만약 목사가 성경본문을 줄줄 읽어 내거나, 아니면 모범적인 설교를 스테레오 타입으로 재방송한다면 아무리 기가 막힌 예화나 화술이 사용됐다 하더라도 죽은 설교나 잔소리가 되며, 또한 작가가 그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을 합리화 하거나 부추기는 쪽으로만 나간다면 아무리 언어감각이나 수사학적 기질이 풍부하게 그려져 있다 하더라도 그건 죽은 소설이 된다. 목사나 자가는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작업을 유지시켜 나갈 수 있다.
또한 목사는 성경을 풀어주는 사람이며, 소설가는 이야기를 꾸미는 사람이지만 결국은 인간의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같은 길에 서 있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목사는 성경을 통해 오늘의 인간을 말하며, 소설가는 자기의 꾸민 이야기를 통해 오늘의 인간을 말하고자 한다. 이 오늘의 인간이 설교를 듣고, 혹은 소설을 읽고 얼마나 새로운 삶의 깊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설교나 소설을 판단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즉 인간의 자유, 해방, 기쁨을 추구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설교자나 작가는 모두 구원론적 작업을 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설교나 소설은 인간구원을 지향하는 작업으로의 사명감과 품위를 가져야 한다. 누가 인정해 주거나, 혹은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구원론적 행위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특히 스스로 상품적 가치에 매어 달리게 된다면 구원론적 지평으로 부터 멀어지게 될 뿐이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자본제적 구조 가운데서, 그리고 상품미학만이 우대를 받는 사회체제 가운데서 설교가나 작가는 인간구원에 더욱 집중해야만 한다.(96.3.10)
목사는 매 주일 설교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두 세편 씩, 많으면 대 여섯편 씩 설교를 한다. 목사는 설교를 그 생명으로 여긴다고 해야 좋을 정도로 설교에 의존적이다. 그 설교 때문에 목사는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고 엄청난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일종의 권위주의에 사로잡혀 설교의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일방적으로 외치기만 하면 신자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미숙한 이들을 대상으로 할 때는 이런 자세가 어느 정도 통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게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옳지도 않다. 목사의 설교가 이런 위험성에서 벗어나는 길은 새로움에 있다. 교리문답식의 규격화된 내용과 형식으로 부터,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새로움을 줄 수 있는 그것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목사는 매번 새로운 설교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현실 사이에서 노심초사 하고 있는 자다. 그렇다면 어떻게 새로운 설교를 할 수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새로움이란 단순히 기술상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본질에 관계되는 문제다. 새로운 예화, 새로운 구성, 새로운 몸짓이 아니라 삶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말한다. 어릴 때 느끼던 삶과 성장한 다음에 느끼는 삶이 다르듯이, 나이가 들고 생각이 깊어지면서 성서본문에 대한 이해나 인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예컨대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란 책을 20살에 읽는 것과 40살에 읽은 것이 엄청나게 다르듯이 삶에 대한 이해도 그 성숙도에 따라 엄청나게 다르다. 이처럼 설교의 새로움이란 그 설교자가 들어가는 삶의 깊이만큼만 드러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이런 달라짐, 이런 새로움으로의 돌입은 어느 단계에서 머물거나 완성되는 게 아니라 죽을 때 까지 진행되는 작업이다. 말하자면 아무리 뜨거운 성령 충만을 경험했다고 해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시기에 도달됐을 때, 즉 죽게 되었을 때 멈추게 된다. 따라서 목사는 설교를 계속 하기 원한다면 끊임없이 삶에 대한 통찰력과 직관력과 해석학적 기초들을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
한편 소설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소설가는 매번 소설을 쓸 때 마다 새로운 내용을 창조해 내야 한다. 소설가들의 새로움이란 것도 목사들의 경우와 같이 단순한 기술적인 차원이 아니라 삶의 깊이에 관련되는 문제다. 소설 쓰는 기술은 관련된 대학의 전공공부를 통해서 억지로라도 배울 수 있지만 삶의 깊이는 그렇지 못하다. 소설은 그것을 쓴 사람이 경험한 삶의 깊이만큼만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약간 엉뚱한 질문인지 모르지만, 목사의 설교하기가 어려운가, 아니면 소설가의 소설쓰기가 어려운가? 이에 대한 정답을 물론 있을 수 없다. 목사의 설교를 중심으로 몇 가지 특징들만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목사는 청중의 입장에서 설교하지만 작가는 오직 자기의 생각에 집중해서 글을 써도 좋다. 설교의 청중은 거의 일정하고 층이 다양하지만, 소설의 독자는 매번 바뀔 수 있으며 어느 정도 같은 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어떤 작업이 훨씬 어렵다고 단정 지을 수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목사는 잘하든 못하든, 컨디션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강요받고 있기 때문에 영적 감동이 있을 때만 소설을 써도 되는 소설가의 작업이 그래도 융통성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목사와 소설가, 그리고 이들의 작업이 갖고 있는 차이점 보다는 동일성이 더욱 중요하다. 우선 이들에게 공히 절실하게 필요한 부분은 (예언자적)상상력이다. 목사에게는 성경본문이 명시적으로 지적해 주는 것 이상의 것을 읽어낼 수 있는 상상력이, 작가에게는 그 사회 안에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 너머에 있는, 혹은 심층에 있는 실체나 의미들을 읽어낼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만약 목사가 성경본문을 줄줄 읽어 내거나, 아니면 모범적인 설교를 스테레오 타입으로 재방송한다면 아무리 기가 막힌 예화나 화술이 사용됐다 하더라도 죽은 설교나 잔소리가 되며, 또한 작가가 그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을 합리화 하거나 부추기는 쪽으로만 나간다면 아무리 언어감각이나 수사학적 기질이 풍부하게 그려져 있다 하더라도 그건 죽은 소설이 된다. 목사나 자가는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작업을 유지시켜 나갈 수 있다.
또한 목사는 성경을 풀어주는 사람이며, 소설가는 이야기를 꾸미는 사람이지만 결국은 인간의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같은 길에 서 있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목사는 성경을 통해 오늘의 인간을 말하며, 소설가는 자기의 꾸민 이야기를 통해 오늘의 인간을 말하고자 한다. 이 오늘의 인간이 설교를 듣고, 혹은 소설을 읽고 얼마나 새로운 삶의 깊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설교나 소설을 판단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즉 인간의 자유, 해방, 기쁨을 추구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설교자나 작가는 모두 구원론적 작업을 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설교나 소설은 인간구원을 지향하는 작업으로의 사명감과 품위를 가져야 한다. 누가 인정해 주거나, 혹은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구원론적 행위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특히 스스로 상품적 가치에 매어 달리게 된다면 구원론적 지평으로 부터 멀어지게 될 뿐이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자본제적 구조 가운데서, 그리고 상품미학만이 우대를 받는 사회체제 가운데서 설교가나 작가는 인간구원에 더욱 집중해야만 한다.(96.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