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12
종말론적으로 사는 것
서양사상사는 기본적으로 히브리인들의 종교적(성서적) 관점과 헬라인들의 철학적 관점이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해서 발전해왔다. 히브리인들은 세상을 시간적으로 이해한 반면에 헬라인들은 공간적으로 이해했다. 시간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은 세상이 어떤 시점에서 시작했으며 또한 어떤 시점에 이르면 끝난다는 뜻이다. 공간적이라는 말은 이 세상을 어떤 시작과 끝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무한한 우주의 반복으로, 즉 일종의 순환으로 본다는 것인데, 시간적인 의미로 세상을 가리키는 단어는 <에온>이며, 공간적인 의미로는 <코스모스>다. 이런 면에서 히브리인들의 역사는 처음과 끝이 있는 직선과 같아서 어떤 목적을 향해 진행하고 변화하지만, 헬라인들의 역사는 돌고 도는 나사 형과 같아서 불변의 구조를 갖는다 하겠다.
성서적 역사이해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개념이 <종말론>이다. 이 세계는 스스로 자신 안에 완전성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언젠가 해체될 날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 날이 바로 종말이다. 요한계시록은 그날에 벌어질 일에 대해 묵시문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예컨대 하늘이 두루마리 종잇장처럼 말리게 된다고도 한다. 이 지구와 우주의 파국을 뜻한다. 많은 기독교인들과 비 기독교인들이 이런 우주의 대 파국을 두고 서로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있다. 종말은 이런 초자연적 재앙이라느니, 혹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하지 말라느니 하면서 서로 자기 입장을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기만 한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종말의 여러 현상들은 일종의 묵시문학의 표현방식이었기 때문에 그걸 사실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면 성서의 메시지를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 반면에 성서가 말하는 이런 종말론적 서술을 미숙한 우주과학의 소산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도 성서의 기초에서 벗어나 있다.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한 몇몇 묵시적 종말이해는 어떤 초자연적 재앙이라는 현상 보다는 일종의 종말론적 역사이해라는 점에서 접근되어야만 한다. 앞서 성서가 세계를 에온이라고 칭하면서 시간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했는데, 종말론은 세상을 포함한 인간과 우주역사를 종말의 관점에서 보고자한 역사해석이다. 즉 기독교의 종말론은 역사이해며 역사관이다.
종말론적으로 역사를 이해하며 종말론적으로 살아간다는 건 아주 빠른 시간 안에 세상이 망하게 될 테니까 이 세상(此岸)의 일을 포기하고 저 세상(彼岸)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몇 년 전 ‘다미선교회’에서는 1992년 10월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주장하면서 직장이나 학교 까지 포기하고 자신들 집회 장소에서 열광적인 종교행위만을 위주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대표적인 몰역사적, 탈세상적, 피안적 종말론자들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종말론은 그런 무시간적이고 탈속적 역사이해가 아니라 다분히 역사적이다. 역사가 구원받는 그런 세상을 향한 강력한 희망이다. 종말론을 다르게 표현하면 희망론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세상을 기다리는 희망이다. 말하자면 세상에 대한 절망이나 도피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희망과 그것을 위한 참여다.
종말론적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이런 점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어떤 어려움이 놓인다고 하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유지하는 삶의 자세를 가리킨다. 이렇게 희망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삶은 단순히 자신의 인격이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시간을 섭리하시며 인간과 세계의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질 종말을 관리하신다는 굳은 믿음을 가질 때만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질문해야 할 바는 무엇을 과연 희망이라고 하는가, 하는 점이다. 자신의 사업이 잘되거나 가족이 건강하거나 심지어는 주택복권이 당첨되는 그런 기대심리를 희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땅 위에서 우리가 남보다 행복한 조건을 많이 갖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는 건 인지상정이라서 아주 자연스런 일이라 할 수 있지만 신앙적인 면에서 그런 삶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도 괜찮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걸 종말론적 희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참된 희망은 결국 구원과 연결된다. 우리가 구원상태에 돌입하는 것이야말로 희망이다. 그것만이 궁극적 희망, 즉 종말론적 희망이다. 이런 희망을 안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기독교인들은 종말론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며칠 만 있으면 금년 한해가 끝난다. 금년 한해의 종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지난 일 년 동안의 시간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짧았을 것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나 지겹도록 길었을지 모르지만 재미난다고 해서 늘려 살거나 지루하다고 해서 줄여 살 수도 없다.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금년 한해는 이제 끝나가고 있다. 12월31일이 아주 빨리 우리에게 닥쳐온다는 사실을 평소에 생각하고 살았다면 조금 더 넉넉한 마음을 가졌을 텐데 무언가 쫓기듯 살았기 때문에 이런 마지막 날을 맞으며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더 절실한 문제는 우리의 인생도 이처럼 마지막 시간을 향해 줄달음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인생의 종말을 미처 준비하지도 못한 순간에 마지막이 우리를 엄습하게 될 것이다. 종말론적으로 살아가야 할 기독교인들은 인생의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인생의 종말이 곧 하나님 안에서의 시작이라는 희망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다. 금년 한해가 시작했나 싶더니 벌써 끝이다. 우리 인생도 시작했나 싶더니 곧 끝이라고 확인하게 될 날이 다가올 것이다. (96.12.29)
서양사상사는 기본적으로 히브리인들의 종교적(성서적) 관점과 헬라인들의 철학적 관점이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해서 발전해왔다. 히브리인들은 세상을 시간적으로 이해한 반면에 헬라인들은 공간적으로 이해했다. 시간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은 세상이 어떤 시점에서 시작했으며 또한 어떤 시점에 이르면 끝난다는 뜻이다. 공간적이라는 말은 이 세상을 어떤 시작과 끝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무한한 우주의 반복으로, 즉 일종의 순환으로 본다는 것인데, 시간적인 의미로 세상을 가리키는 단어는 <에온>이며, 공간적인 의미로는 <코스모스>다. 이런 면에서 히브리인들의 역사는 처음과 끝이 있는 직선과 같아서 어떤 목적을 향해 진행하고 변화하지만, 헬라인들의 역사는 돌고 도는 나사 형과 같아서 불변의 구조를 갖는다 하겠다.
성서적 역사이해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개념이 <종말론>이다. 이 세계는 스스로 자신 안에 완전성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언젠가 해체될 날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 날이 바로 종말이다. 요한계시록은 그날에 벌어질 일에 대해 묵시문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예컨대 하늘이 두루마리 종잇장처럼 말리게 된다고도 한다. 이 지구와 우주의 파국을 뜻한다. 많은 기독교인들과 비 기독교인들이 이런 우주의 대 파국을 두고 서로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있다. 종말은 이런 초자연적 재앙이라느니, 혹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하지 말라느니 하면서 서로 자기 입장을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기만 한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종말의 여러 현상들은 일종의 묵시문학의 표현방식이었기 때문에 그걸 사실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면 성서의 메시지를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 반면에 성서가 말하는 이런 종말론적 서술을 미숙한 우주과학의 소산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도 성서의 기초에서 벗어나 있다.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한 몇몇 묵시적 종말이해는 어떤 초자연적 재앙이라는 현상 보다는 일종의 종말론적 역사이해라는 점에서 접근되어야만 한다. 앞서 성서가 세계를 에온이라고 칭하면서 시간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했는데, 종말론은 세상을 포함한 인간과 우주역사를 종말의 관점에서 보고자한 역사해석이다. 즉 기독교의 종말론은 역사이해며 역사관이다.
종말론적으로 역사를 이해하며 종말론적으로 살아간다는 건 아주 빠른 시간 안에 세상이 망하게 될 테니까 이 세상(此岸)의 일을 포기하고 저 세상(彼岸)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몇 년 전 ‘다미선교회’에서는 1992년 10월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주장하면서 직장이나 학교 까지 포기하고 자신들 집회 장소에서 열광적인 종교행위만을 위주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대표적인 몰역사적, 탈세상적, 피안적 종말론자들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종말론은 그런 무시간적이고 탈속적 역사이해가 아니라 다분히 역사적이다. 역사가 구원받는 그런 세상을 향한 강력한 희망이다. 종말론을 다르게 표현하면 희망론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세상을 기다리는 희망이다. 말하자면 세상에 대한 절망이나 도피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희망과 그것을 위한 참여다.
종말론적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이런 점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어떤 어려움이 놓인다고 하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유지하는 삶의 자세를 가리킨다. 이렇게 희망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삶은 단순히 자신의 인격이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시간을 섭리하시며 인간과 세계의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질 종말을 관리하신다는 굳은 믿음을 가질 때만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질문해야 할 바는 무엇을 과연 희망이라고 하는가, 하는 점이다. 자신의 사업이 잘되거나 가족이 건강하거나 심지어는 주택복권이 당첨되는 그런 기대심리를 희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땅 위에서 우리가 남보다 행복한 조건을 많이 갖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는 건 인지상정이라서 아주 자연스런 일이라 할 수 있지만 신앙적인 면에서 그런 삶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도 괜찮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걸 종말론적 희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참된 희망은 결국 구원과 연결된다. 우리가 구원상태에 돌입하는 것이야말로 희망이다. 그것만이 궁극적 희망, 즉 종말론적 희망이다. 이런 희망을 안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기독교인들은 종말론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며칠 만 있으면 금년 한해가 끝난다. 금년 한해의 종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지난 일 년 동안의 시간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짧았을 것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나 지겹도록 길었을지 모르지만 재미난다고 해서 늘려 살거나 지루하다고 해서 줄여 살 수도 없다.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금년 한해는 이제 끝나가고 있다. 12월31일이 아주 빨리 우리에게 닥쳐온다는 사실을 평소에 생각하고 살았다면 조금 더 넉넉한 마음을 가졌을 텐데 무언가 쫓기듯 살았기 때문에 이런 마지막 날을 맞으며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더 절실한 문제는 우리의 인생도 이처럼 마지막 시간을 향해 줄달음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인생의 종말을 미처 준비하지도 못한 순간에 마지막이 우리를 엄습하게 될 것이다. 종말론적으로 살아가야 할 기독교인들은 인생의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인생의 종말이 곧 하나님 안에서의 시작이라는 희망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다. 금년 한해가 시작했나 싶더니 벌써 끝이다. 우리 인생도 시작했나 싶더니 곧 끝이라고 확인하게 될 날이 다가올 것이다. (96.12.29)
Glad to see you again.
온 순서는 우리가 알고 볼 수 있지만
갈 순서는 알 수 없는 우리네 인생이 주는 불안,
한 주를 시작했다 싶으면 금방 주말을 맞는
주체할 수 없는 빠른 속도감이 주는 허망함속에서
이 종말의 완성을 이루실 하나님 믿는 신앙이 없으면
정말 어쩔 뻔 했는지 아찔합니다.
아직은 대부분 팔팔한 20대로 구성된 우리 작은 모임이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보이지 않으나 생생하게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를
지금 현재 풍성히 누리는 삶을 살기를 기도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