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며칠 전 대구 명보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는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관람했다. 지난여름에 개인적으로 이 영화 제작을 위해 작은 돈이지만 5만원을 후원한 바도 있고, 평소에 전태일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시간을 냈다.
작품성으로만 말한다면 그렇게 성공적인 영화는 아니었다. 그게 우리 방화의 한계라 할 수 있긴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만들어 세계 영화시장에 내놓는 작품들에 비해 왜소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일단 구성이 약간 어수선해서 어딘가 짜임새가 없어보였다. 이 영화는 1970년 평화시장에서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하라는 주장을 분신으로 내보였던 전태일(홍경인), 그리고 그 사건이 있은 지 5년 후, 한창 유신정권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 공안당국의 감시망을 피해가며 전태일 평전을 쓰기 위해 관련 자료를 모아가는 한 재야 지식인 김영수(문성근)가 -실제 인물은 고 조영래 변호사였다고 한다- 교차되어 등장한다. 5년이란 시간을 사이에 두고 전태일의 이야기는 흑백으로, 김영수의 이야기는 칼라로 처리되고 있는데, 너무 도식적인 냄새가 없지 않았다. 전태일이 비닐우산 장사를 했다는 걸 알게 된 김영수는 어느 비오는 날 파출소 앞을 지나면서 비닐우산을 파는 아이를 시켜 비를 맞고 서 있는 파출소 근무자에게 우산을 준다. 그게 전체 이야기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 비닐우산 파는 아이에게서 전태일을 느끼고 자신을 검거하려는 경찰에게 오히려 우산을 선물함으로써 악을 선으로 갚는다는 말인지 모르지만 현실의 치열성을 논하면서 약간 우스꽝스러운 감상주의에 빠져 버린 게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박광수 감독은 과거의 전태일을 현재의 재야 지식인을 통해 부각시켜 보려했던 것 같은데 그러다 보니 90분짜리 영화가 반쪽짜리 영화 두 편으로 나뉜 결과가 되었다. 아예 한쪽(물론 전태일)을 확대시켰어야 관객들의 가슴 속에 충분한 감동으로 전달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문제는 전태일이 가장 극단적인 투쟁으로 나서게 된 그 동기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평화시장 부근에서 비인간적 노동조건을 직접 체험했고, 나름대로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이런 저런 투쟁을 하다가 한계에 부닥쳤지만, 그것만으로 한 인간을 분신으로 내몬다는 건 인간생명의 진지성에 충분한 배려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더 이상 투쟁해 볼 수 있는 여력을 모두 빼앗겼을 때 전태일이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게 바로 분신이란 걸 보여주려고 했다는 걸 알 수는 있었지만 그게 충분치 않았다는 말이다. 전태일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가에 대한 부분들이 소홀하게 취급됐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전태일이 지나치게 충동적으로 행동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위에서 언급한 것 이외에도 몇 가지 사소한 문제점들이 지적되어야 한다. 우선 극장의 오디오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배우들의 발음이 정확하지 못해서 대사 전달력이 매우 떨어졌다. 음향효과도 역시 그랬다. 텔레비전에서 맛볼 수 없는 고감도, 고출력 사운드 트랙이 있어야만 영화의 감동이 배가될 수 있었을 텐데 못내 아쉬웠다. 이런 문제들은 방화가 안고 있는 전반적 문제이기 때문에 이 영화만을 나무랄 수만은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몇 가지 한계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메시지 차원에서 탁월했다. 확실한 메시지로 인해 그나마 이 영화가 한국의 부끄럽지 않은 영화로 남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 영화에서 과거와 현재로 오가며 그려지고 있는 전태일은 아주 평범한 영웅이었다. 그는 1960년 대 한국이 안고 있었던 구조적 불의에 화약을 지고 불에 뛰어들듯이 무모하게 도전했던 젊은이였다. 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13일 서울 평화시장 길거리에서 스물 둘의 젊은 나이로 온몸을 장작개비처럼 불살라 죽음의 길로 뛰어들었다. 그는 청계천 피복업체에서 재단사로 일하면서 자기 자신이 당하는 고통만이 아니라 주변의 참을 수 없는 비인간적 현실을 어떻게 해서라도 뒤집어 보려고 온몸으로 투쟁하다가 죽었다. 그가 살아가던 1960년대 후반은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해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그 중에는 앳된 소녀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이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흡사 기계처럼 일했다. 그 당시 청계천 피복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라는 게 말이 아니어서, 도저히 인간이 견뎌낼 수 없었다. 법정 공휴일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자하 작업장에 환풍기 하나 없었다. 다락방 같은 좁은 공간에서 쉬지 않고 재봉틀을 돌려댔다. 커피 한잔에 50원하던 그 당시 하루 열 네 시간씩 일하고 일당 50원 받는 시다들도 있었고, 3,4일 씩 한잠도 안자고, 잠이 올 땐 작업반장이 놓아주는 주사를 맞으면 일하는 여자 아이들도 많았지만 이 사회 누구 하나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주지 않았다. 전태일은 신문기자들도 만나고, 노동청 근로감독관을 찾아가기도 했으며, 사장과 면담을 하거나, 전단을 만들면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투쟁했다.
스물두 살의 전태일은 비록 악법인 근로기준법이었지만 그것만이라도 지켜보려고 치열하게 몸부림치다가 막다른 벽에 부딪쳤고, 자기 몸을 쳐서라도 캄캄한 노동현실을 열어보려고 했다. 그의 도전이 당장 어떤 결실을 일구어내진 못했지만 역사 속에서 날이 갈수록 확대되어왔다. 전태일이란 이름은 25년이 지난 오늘 한국의 재야 정치, 노동계에서 일종의 메시야니즘적 위치를 갖는다. 온몸에 석유 불을 뒤집어쓴 메시야로. <95.12.24.>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