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아침에 눈을 뜨면서 부터 다시 잠자리에 들 때 까지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무언가의 <소리>를 듣고 있으며, 그것을 매우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많은 물리적 현상 중의 하나인 소리는 그렇게 당연히 있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가 살고 있는 작은 별인 지구 안에서만 가능한 공기의 떨림 현상이다. 우리가 아는 한 지구 이외에 이 우주 어느 구석에도 소리는 없다. 청각장애인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가 소리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다는 건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만큼 우리가 생명의 세계에 참여할 기회가 많아졌다는 말이다.
소리는 단순히 물리학적이고 생물학적 관점만이 아니라 심리학적, 혹은 심미적 차원을 갖고 있다. 젖을 먹이는 어머니는 자기 친구들과 마루에 앉아서 떠들며 놀다가도 안방에서 잠자던 자기 아이가 배고파 우는 소리를 구분해 낼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듣지 못하는 순간에도 말이다. 이건 아마 젖을 먹이는 어머니들에게 주어진 본능적인 청취능력인 것 같다.
한편 인간의 음감은 약간 다르다. 경우에 따라서는 절대음감을 타고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후천적인 훈련을 통해서 구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예컨대 백 명 가까운 단원들이 모여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심포니를 지휘하려면 정명훈 씨처럼 각고의 노력을 통해 각 악기가 내는 세밀한 음의 차이와 조화를 구별하고 엮어낼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아이의 울음소리를 예민하게 알아듣는 어머니나 심포니의 지휘자들이 다른 이들보다 특별히 음의 분별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집중력에 있다. 소리에 대한 집중력은 우리에게 일상적인 세계 이외에 또 다른 세계를 알게 하고 참여하게 만들어 준다. 이청준 씨의 소설을 영화화한 <서편제>에서 자학적이었던 판소리꾼 아버지가 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득음을 하게 되면 밥보다도 떡보다도 좋은 거여!” 득음의 단계가 무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자유자재로 음을 다룰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차원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말하자면 진정한 소리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는 단계일 것이다. 아무나 그런 득음의 단계에 들어갈 수는 없다. 천성적으로 소리꾼의 자질을 갖고 태어나야 할 뿐만 아니라 흡사 도를 닦는 듯한 집중력을 갖고 음의 넓고 깊은 영역을 개척해 내야 한다.
오늘의 시대는 이런 소리의 깊이를 잡아낼 만큼 집중력을 갖지 못한 것 같다. 소리를 소리로 느끼지 못하고 어떤 목적, 대개는 자기중심적 의도와 관계된 목적으로 소리를 사용할 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의 생활이 너무 혼란하여 어떤 소리에 집중할 수 있을 만큼 여유를 제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소리의 존재론적 근거를 외면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소리의 존재론적 근거라 함은 소리를 그것 자체로 받아들이고 또한 그 세계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동네 뒷골목에서 떠들며 놀고 있는 개구쟁이들의 소리를 우리가 어떻게 듣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 소리가 우리에게 생명의 약동으로 들리게 된다면 그건 그 소리와 자기를 일체화 시키는 사건이다. 그 아이들의 소리가 바로 우리 존재의 근거가 된다는 말이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에게 생명을 일깨우는 소리들이 적지 않다. 어린 아이의 젖 먹는 소리나 쌔근쌔근 잠자는 소리가 그렇다. 새들의 노래 소리나 얼음장 밑을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빗소리는 우리의 영혼을 편안케 해준다. 천둥소리도 역시 생명력을 발산시키는 힘으로 다가온다. 이런 소리는 그 소리 자체로서 우리 존재의 근거가 된다. 반면에 자동차 경적 소리는 아무리 좋게 들으려 해도 그렇지 못하다. 시도 때도 없이 틀어대는 면사무소 확성기 소리는 어떤가? 공장에서 쇠 깎아 내는 소리, 혹은 철근 콘크리트 건물 허무는 소리를 듣기 좋다고 할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결국 자연의 소리는 아름답고 문화의 소리는 거칠며, 시골에서 나는 소리는 생명의 소리이고 도시에서 나는 소리는 죽음의 소리라고 해도 그렇게 잘못된 말은 아닐 것 같다.
인간이 소리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고 소리에 대한 집중력을 가지려면 우선 역설적인 말이지만 <소리 없음>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 오늘의 세계가 참된 소리에 대한 집중력을 상실한 이유는 너무 크고 많은 소리에 휩싸임으로써 <소리 없음>을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큰 소리를 내며 살아가는지, 그리고 말이 없음을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큰 소리 뿐이다. TV 극도 지나치게 말장난에 놀아나고, 국회 의사당에서도 목소리 큰 사람이 힘을 쓴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큰 목소리가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논리적인 설득 보다는 큰 소리로 밀어붙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설교도 너무 많은 말로 구성되고 너무 큰 소리로 외쳐지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언어와 높은 소리로 기도해야 열심으로 드린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런 기도는 이방인의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마6:7).
화보와 짧은 글로 구성된 르뽀 형식의 월간지 <GEO> 94년12월호에 보면 150년의 전통을 갖고 있는 프랑스의 <예수성심순교자 수녀원>에 대한 기사가 있다. 이곳에서의 생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한다. 일단 이곳에 들어오면 평생 동안 거울을 보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일체 제쳐두고 영적인 세계에 침잠하려는 노력이다. 기자가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얼굴 모습을 담아서 보여주자 그 수녀는 50년 만에 본 자기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또 한 가지는 침묵수행이다. 그들의 영적 수행에는 개인 상호간의 의사소통이 별로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경우라도 대개는 수화로 대신한다고 하는데, 그만큼 침묵을 통한 영적인 세계의 소중함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금욕적 묵언수행이 종교개혁적 신학의 관점에서는 논란의 소지가 없지 않겠지만 요즘처럼 쓸 데 없는 말과 소리가 높을 때 귀 기울여 봄직한 삶의 모습은 아닌가 생각된다.
<소리 없음>의 세계를 알 때 우리는 <소리>의 존재론적 깊이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럴 때만 우리는 파괴적이고 비생명적인 소리를 줄이고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아름다운 소리를 늘려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지구상에서 울려나는 생명의 소리를 들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는 건 너무도 큰 기쁨이 아닌가. <9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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