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모든 생물은 나름대로 정치적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원숭이, 사슴, 혹은 개미나 벌들도 자기들 사회가 어떤 질서에 따라 움직여야 되는지 알고 있다. 간단히 말해 이게 정치다. 여러 개체들을 질서 있게 조화시키는 기술이 바로 정치다. 인간은 다른 생물에 비해 특히 정치를 매우 많이 발전시켰다. 다른 생물은 생존을 위해서, 자손증식을 위해서 위계질서를 유지시키고 있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속성에 묶여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인간은 정치를 즐긴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동물인 인간은 역사 이래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소위 민주주의를 가장 탁월한 정치제도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民主主義는 말 그대로 백성(民)이 주인(主)이 되는 정치제도다. 헬라어 demokratia도 역시 백성을 뜻하는 demo와 지배를 뜻하는 kratos의 합성어로서 ‘백성의 지배’를 의미한다. 왕이나 귀족을 비롯한 특권층이 아니라 일반 민중이 주인이란 말이다. 이런 생각이 실제 정치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그렇게 오래지 않은 최근의 일이다. 아주 오랫동안 백성은 단순히 왕에 종속될 뿐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나라의 군주들은 ‘짐(朕)이 곧 국가다!’라는 말을 했고, 그게 먹혀들어 갔다.
2천5백 년 전에 이미 헬라인들은 부분적이나마 그래도 민주주의를 시행하고 있었지만 로마에 의해 정복당함으로써 민주주의는 그 후 2천년 동안 인간역사에서 사라졌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자유, 평등, 박애정신을 기초로 하여 주권재민 사상을 펼쳤다. 그 후로 여러 나라에서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점진적으로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되어, 결국 오늘의 문명국가는 모두 민주제도를 택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만이 아니라 공산국가도 이념적으로는 민주제도를 신봉한다.
민주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생각되는데, 우선 백성들이 지도자를 선택한다는 게 그 하나다. 모든 백성이 직접 국가의 문제를 토의하고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아서 그 일을 위탁하게 된다. 이를 대의제도라고 한다. 두 번째는 입법, 행정, 사법의 분립이다. 행정의 수반인 대통령에게 권력이 독점되는 걸 막기 위한 권력의 분산제도다. 세 번째는 지방자치제도다. 각 지방이 중앙정부로 부터 독립되어 지방의 발전을 도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 전체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 제도다. 이런 점에서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어야 명실상부한 민주국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 6월27일 기초단체장과 의원, 광역단체장과 의원을 뽑는 네 종류의 지방선거를 실시했다. 1960년 4.19 이후 민주당 정권 시절 잠시 실시했다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실종되었던 지방선거였다. 대한민국이 문민정부에 이어 지방단체장 까지 직선제로 뽑게 되는 민주주의의 완성이었다.
선거결과는 예상을 약간 벗어나, 우려하던 현상이 극대화 된 상태로 드러났다.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민자당은 인천, 경기도, 경북, 경남, 부산을, 그리고 민주당은 서울, 전북, 전남, 광주를, 자민련은 강원, 충북, 충남, 대전을, 무소속은 대구, 제주도를 장악했다. 광역의회도 비슷한데, 다만 민주당이 호남지역에서 거의 100%를 장악했다는 점과 자민련이 강원도와 충북에서 별로 의석수를 얻지 못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놓고 볼 때 민자당은 영남에서, 민주당은 호남에서, 자민련은 충청도에서 집권당이 되었으며, 경인지역은 민자당과 민주당이 나눠먹은 겪이다.
이번 선거결과의 특징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국민들이 정당에 대해 갖는 불신이 확연히 드러났다. 어느 정당도 국민들의 신뢰를 골고루 얻지 못했다. 민자당은 전라도와 대구와 서울에서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민주당은 전라도와 경인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 약세를 면치 못했고, 자민련은 거의 충청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느 당도 국가를 전체적으로 운영할만한 지지를 받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또 하나의 불안스런 특징은 국민들은 인물 중심이라기보다는 지역정서에 따라 후보자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영남, 호남, 충청의 지역정서가 이번 선거를 압도했다. 지방자치제도가 지역적 특성을 가질 수밖에 없긴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너무 지나치다는데 문제가 심각하다. 민주당이 광주와 전남에서 싹쓸이 한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결과는 어느 정도 예견되었었다. 김대중 씨가 민주당 지원연설을 하면서 어느 한 지역이 나라 전체를 지배하는 시대가 끝나고 각 지역이 동등하게 권력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소위 ‘지역등권론’를 주창했다. 좋게 말해서 등권론이지, 이건 지역할거주의에 불과할 뿐이었다. 김종필 씨도 충청도 유세를 하면서 다른 지역 사람들이 충청도 사람들을 ‘핫바지’라고 조롱한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지역주의를 부추겼다. 앞으로 김대중 씨는 틀림없이 정계에 복귀할 것이며 대통령 선거 4수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들 한다. 김종필 씨는 34년 전 군사 쿠데타의 주역으로서 오늘 까지 한국 정치를 주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선거 결과를 보고 사람들은 다시 신 삼국시대로 돌아갔다느니, 3김 시대의 복귀라느니 하면서 안타까워한다. 정치인들이야 누가 뭐라 하든, 국가의 미래가 어떻든 아무 상관없이 자기의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이전투구를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걸 가능케 해주는 우리 백성들은 도대체 뭘 하는 사람들인가? 우리가 그들을 판단한 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이용했을 뿐이다. 이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민(愚民) 정치에 불과하다. 이런 선거라면 아니 한 만도 못한 것 같이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이런 과정을 통해 진정한 민주주의가 발전할 거라는 기대를 잃어버리지 말아야겠다는 간절한 심정이다. <9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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