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스승은 없는가?

박홍 서강대 총장이 지난 7월18일 청와대 오찬석상에서 한총련(한국 대학생 총연맹)이 북한의 김정일에게 사주를 받는다고 발언했다. 그는 한총련을 움직이는 핵심세력이 주사파(김일성의 정치이데올로기였던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대학생 그룹)이며, 이 주사파 학생들 뒤에는 사노맹(사회주의 노동자 연맹)있고, 사노맹 뒤에는 사로청, 사로청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며, 학생들이 팩스를 통해 북한의 지시를 직접 받고 있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북쪽의 지령을 받아 이적활동 내지 간첩활동을 했다는 뜻이다. 박홍 총장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우루과이라운드 비준 반대운동 까지 이북의 지령에 의한 것으로 매도하고 있다. 박 총장의 발언은 지금 까지 안기부 같은 공안당국에서도 주장하지 않았던 엄청난 내용이기 때문에 지난 두 주일 여 동안 국민들을 혼란 가운데 빠지게 했다. 일단 그의 발언을 사실이라고 전제한다면 한총련을 이끌어 가는 주사파 학생들은 어마어마한 반국가적 범죄를 저지른 셈이다.
그의 발언은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한 쪽에서는 <용기 있는 지성인>이라고 치켜세우며, 다른 한 쪽에서는 <무지의 폭력>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박수를 보내는 이들은 청와대에서 함께 대화 자리를 가졌던 20 여개 대학의 총장들,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 매스컴, 서강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일동 등이다. 비판하는 이들은 우선 재야 단체들, 정의구현사제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민주교수협의회, 전국국공립대 교수협의회 등이다. 그 이외에 일반 국민들은 일반적으로 지지하는 이들이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한국 국민의 정서가 항상 보수적이고, 더구나 red complex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대학 교수들이 박홍 총장의 행위에 대해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일부의 교수들 이외에는 아직 박홍 총장에 대해 지지하는 움직임이 없는 걸 보아도 미루어 추정할 수 있다. 지식인들의 판단은 설령 주사파 학생들에게 그런 문제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박홍 총장과 같은 방법으로 일을 터뜨린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박 총장의 행동은 신중하지고 않았고 교육적이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박홍 총장은 이번에 매우 경솔했던 것 같다. 사실은 이 번 만이 아니라 아주 중요한 시기마다 구체적인 증거 없이 심증, 그것도 아주 개인적인 심증만 갖고 충격적인 발언을 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럴만한 분이다’ 생각되지만, 이번에는 너무도 엉뚱한, 너무도 정치적인, 너무도 무책임한 발언을 한 것 같다. 내 생각으로는 박 총장 스스로 이렇게 발언파문이 커지리라고 예상하지 못하고 몇 군데서 주어들은 이야기를 터뜨린 것으로 보인다. 그 발언 이후에 며칠 지나면 사과를 하던지, 아니면 말이 와전되었다고 변명을 할 것으로 기대를 했는데, 부추기는 세력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더 과격하게 자신의 말을 확대하였다. 공안당국에서는 그를 지원하기 위해서 몇 가지 자료를 매스컴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이런 정치적인 이야기를 길게 늘여서 전개할 필요는 없으며, 또한 그럴만한 가치도 없다. 그러나 오늘의 이 슬픈 현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하여 우리는 박홍 총장의 언행을 그 사람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오늘의 스승상이라는 관점에서 검토해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번에 박홍 총장의 사건에서 가장 잔인하고 허무하게 느껴진 대목은 스승이 자기 제자를 김정일의 하수인으로 몰아붙이면서도 아무런 부끄러움도, 자책감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박 총장의 발언이 완전한 사실이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행위는 정당하지 못했다. 그가 정치인이거나 아니면 공안관계 공무원이었다면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학 선생이기 때문에 그렇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자기자식을 간첩으로 몰아붙이는 부모가 어디 있는가? 확실한 증거도 없이 말이다. 우리는 대학 사회에 과격한 일부분의 집단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들이 대학에 들어오기 전 부터 주사파였는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일 차적으로 우리 사회구조요, 또한 대학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대학 선생들 아닌가? 그런 학생들이 극소수라면 대학사회가 흔들릴 염려도 없는 것이며, 그들의 힘이 대학의 위기를 불러올 정도라면 대학사회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안정국의 분위기 속에서 그 선생이 학생을 간첩으로 몰아붙이는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만약 진정한 스승이라면 그 문제의 학생들에게 애정을 갖고 가르치고, 설득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학교 안에서 해결하려는 자세를 견지했어야 했다. 아마 많은 일반 교수들이 그런 과격한 학생들의 문제를 두고 매우 오래 동안 고민하고 있었을 텐데, 그런 노력이 박홍 총장의 발언으로 물거품처럼 되어 버렸다. 앞으로 학생들이 어떻게 선생을 존경하고 따르겠는가 말이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정말 불쌍하다. 진정한 스승을 갖지 못한 세대는 불쌍할 수밖에 없다. 끽 소리 말고 공부나 잘하면 된다는 그런 어른들의 틈바구니에서 무슨 환상과 꿈을 그리며 성장하겠는가? 그들은 이 사회를 비판할 줄 알아야 하고, 그 사회의 금기에도 도전할 줄 알아야만 한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강압적 권위로 누르게 되면 그들은 반사회적으로 행동하던지 아니면 철저하게 이기적인 인간으로 성장할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와 좀 다른 사고를 하면 어떤가? 좀더 민족적이고, 좀더 진보적인 생각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 는 없겠는가? 다양한 사고가 모여야만 그 사회는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른들, 선생들, 스스로 철이 났다고 생각하는 이들, 그들이 먼저 자신감을 회복해야 한다. 웬만하면 젊은이들이 마음껏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는 그런 자신감을 회복해야 한다. 오늘, 이런 스승은 없는가? <9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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