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윤이상

현존하는 한국인 중에서 윤이상 씨만큼 한국의 얼을 온 세계에 떨친 사람이 또 있을까? 아직 노벨상을 수상한 한국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인물이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 중에서도 체육계 안에 세계적인 선수가 많이 배출되었고, 특히 동양이라는 테두리 안이라 할지라도 바둑에 있어서 한국이 명실 공히 세계적인 수준이라 할 만 하다. 얼마 전 조훈현 씨가 일본의 국제기전 후지쓰배에서 우승하여 바둑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고 야단들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현대 작곡가 윤이상 씨 보다 한민족의 우수성과 그 예술성, 그리고 그 위대성을 세계에 드러낸 인물은 없다.
시사저널은 창간 5주년 특별기획으로 <38년간의 오디세이>라는 제목 하에 윤이상에 대해 전해 주고 있다. 그 자료에 따르면 윤이상은 1917년 경남 통영(충무)에서 출생했으며, 59년에 베를린 음대를 졸업하고, 67년 소위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1심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았고 69년에 10년 형으로 감형된 후 한 달 후 석방되어 다시 독일로 가서 70년에 독일 국적을 취득하였다. 72년에 서베를린 대학 교수로 취임하였고, 같은 해 뮌헨 올림픽 개막 축하 오페라 <심청>을 초연하였으며, 77-87년 사이에 베를린 예술대학 정교수로 재직하였다. 87년에 서독 대통령 바이체커로 부터 독일연방 공화국 대공로훈장을 받았고, 90년에 범민족통일음악회를 개최하였으며(평양), 91-93년 사이에 조국통일범민족연합 해외 본부의장을 맡았다. 오는 94년 9월에 드디어 남한에서 <윤이상 음악축제>가 개최될 예정으로 있고, 북한에는 <윤이상 연구소>가 설립되어 그의 음악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주마간산 격으로 윤이상의 발자취를 살펴보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의 작품이다. 그는 5편의 정식 교향곡을 발표했으며, 그 이외에 수많은 실내악과 오페라와 독주곡을 작곡했다. 우리나라 음악가들 중에 탁월한 연주가들은 제법 배출되었다. 소프라노 조수미, 바리톤 최현수, 바이올린 정경화, 지휘 정명훈, 피아노 백건우 같은 이들은 세계적인 연주가다. 그러나 작곡가는 아직 없다. 몇 몇 이름이 알려진 이들이 있지만 연주가들의 명성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 오직 한 사람, 38년 동안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윤이상만이 세계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고 있다. 그는 앞서 열거된 연주가들을 다 합친 것 보다 훨씬 큰 무게를 느끼게 한다. 그는 이미 1960년대 초에 스트라빈스키, 칼 하스, 야니스 크세나키스 같은 저명한 현대 작곡가들과 교분을 쌓을 정도였다. 그가 이룬 업적은 88 서울 올림픽에 못지않은 것이며, 대기업들이 수억 달러어치의 상품을 수출한 것 보다 훨씬 아름답게 한민족의 이름을 빛냈다.
윤이상의 음악제가 금년 가을에 남한에서 개최된다고 하는 마당에 그는 왜 지난 38년 동안 고국에 들어오지 못했으며, 이번 가을에도 들어올 가능성이 확실하지 않은가? 한 마디로 예술을 예술로 이해하지 못하고 정치적 잣대로 평가하는 권력의 횡포 때문이다. 그 첫 번 시련이 1967년에 터진 동베를린 사건이었다. 권력유지에 불안감을 느끼던 박정희 군사정권은 국민들을 반공이념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으로 생각하던 차에, 독일에서 한국 광부들과 간호원의 권익을 위해 한인회를 조직하였고, 이 모임을 통해 한국군사정권을 비난하던 윤이상을 잡아넣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독일 교포들은 동베를린을 통해 어렵지 않게 북한을 방문하곤 하였다. 예술가로서만이 아니라 교포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던 윤이상도 역시 그렇게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 문제를 빌미로 하여 중앙정보부는 윤이상이 낀 베를린 간첩단을 적발하였다고 터트렸다. 윤이상은 베를린에서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강제 납치되어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을 받았으며-우리나라 경찰의 고문은 일본순사들에게 배운 것으로 수년전 박종철 군이 물고문 때문에 죽기도 하였다.- 일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아내 이수자씨 까지 잡혀온 것을 알고 자살을 기도했었다. 이것이 악한 정권의 실상이다. 독일이라는 사회의 분위기에서 별로 대수롭지 않은 북한 방문을 두고 윤이상을 간첩으로 몰아 종신형을 때리던 시대였다. 그들은 없는 일도 있다고, 있었던 일도 없다고 꾸며대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인데, 어쨌거나 지금도 그런 일이 없는지 우리는 세심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독일을 중심으로 세계여론이 들끓었다. 서독 정부는 한국 정보요원들을 추방했으며, 세기의 지휘자 카라얀을 비롯한 세계 유명 음악가들은 윤이상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을 펼쳤다.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한국 연주여행을 보이콧하기도 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치게 할 간첩(?) 윤이상을 2년 만에 독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윤이상은 친북적 경향을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그의 말대로라면 남한에서 받아주지 않으니 다른 반쪽의 민족에게로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음악은 오랫동안 우리나라에서 금지곡으로 묶였었는데, 이제는 해금되었다. 이번 가을 윤이상 음악제에 참석해서 그는 삼대독자로서 지난 40년 가까이 성묘조차 못했기 때문에 우선 선산을 둘러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정부 측에서는 여전히 윤이상에게 사상적 정리를 요청하는 것 같다.
아, 불행한 시대여! 한민족의 빼어난 정서를 세계적 음악언어로 승화시킨 윤이상, 그를 배척한 우리의 가슴 무딘 형제여! 윤이상의 다음과 같은 말을 우리 모든 예술가들, 정치가들, 지성인들에게 주고 싶다. “모든 예술가는 히틀러의 폭정을 규탄한 위대한 시인 넬리 작스 처럼 대중에게 한 발짝 내려앉음으로써 진정성을 획득합니다.” <94.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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