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가을에 햇살을 생각함

겨울 햇살은 아무리 활짝 갠 날이라 하더라도 아주 가늘게 느껴진다. 봄날 우리의 어깨 위에 와 닿는 햇살은 어느 시인의 싯구처럼 고양이의 졸음 같기도 하고 수증기를 머금은 것 같기도 하다. 여름 날 태양으로 부터 쏟아지는 햇살은 난폭 운전자의 질주 같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칠다. 그런데 요즘 같은 가을의 햇살은 겨울처럼 희미하게도, 봄처럼 어설프게도, 그렇다고 여름처럼 거칠게 다가오지 않는다. 가을 햇살은 잘 익은 감처럼 우리를 편안케 해준다. 단순히 태양의 기울기에 의해 달라지는 여러 종류의 햇살이 나름대로 정취가 있긴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깊은 가을에 우리를 찾아오는 햇살이야말로 가을 곡식을 여물게 한다는 면에서만이 아니라 <존재>를 더욱 절실하게 생각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하나님의 은총이다.
햇살은 에너지로서 생명의 원천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태양으로 부터 너무나 다행스럽게 적당한 거리에 놓여 있으므로 해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데, 그 생명은 오직 태양으로 부터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햇살에 의해서만 그 유지가 가능하다. 국민학교 고학년만 되면 알만한 사실이지만, 태양계 안에 있는 십여 개의 떠돌이별들 중에 오직 지구만이 생명체를 갖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체란 인간과 같이 문명을 가진 존재나, 혹은 포유동물이나 활엽수 같은 식물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단세포 생물체 까지를 가리키는데, 그 어느 혹성에도 지렁이 한 마리, 벌 한 마리, 하루살이 한 마리, 토끼풀 하나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혹성들이 태양으로 부터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까워서 생물체가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너무 가깝게 되면 태양의 햇살이 지나치게 강해서 모든 물기를 빼앗아가게 되어 모든 땅이 사막화되어 버리며, 반면에 너무 멀면 햇살의 힘이 너무 약해서 전부 얼음으로 변해 버리기 때문에 도대체가 생물이 출현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유지되기도 힘들다. 지구는 신기할 정도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을 만큼 적당한 거리에 놓여 있으며 동시에 대기권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적당한 태양광선이, 그것도 주로 유익한 광선만 대지에 와 닿게 된다. 인간은 결국 이러한 햇살에 의해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태양계의 중심인 태양은 모든 생명체 안에 생명을 불어넣는 생명의 원천이다. 고대인들이 태양을 신으로 섬겼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요한복음 기자도 역시 빛과 어두움을 대조시키면서 하나님과 예수와 그리스도인을 빛이라고 일컫고 있다. 우주의 생성 초기부터 지금 까지 수백 억년 동안 한결같이 빛을 발산하는 태양은 이런 면에서 태양계의 모든 혹성에게 있어서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그 빛은 생명의 시초로 부터 아메바나 공룡이나 원시인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와 우리의 먼 후손에게도 역시 생명의 에너지가 될 것이다. 앞으로 언젠가 인간이 과학적으로 태양광선과 같은 에너지를 발명하게 될지 모르지만 그런 날이 온다 하더라도 수억 키로 미터 거리에서 지구를 비추고 있는 그런 태양을 흉내 내기는 힘들 것이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우리 삶의 습관대로 태양을 값으로 매긴다면 그 가격이 얼마나 될까? 핵발전소 하나 건설하는데도 수천억 원이 소요되는데, 하물며 태양이라면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어떤 사람이 태양의 소유권을 주장하여 햇빛을 일일이 판매하려 든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은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렇게 조치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너무도 오랜 옛날부터, 그리고 최소한 앞으로도 수만 년 후 까지는 태양이 태양계 곳곳에 빛을 보낼 것이므로 아무도 햇빛으로 인하여 걱정하지도 않고 소유하려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좀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모두가 인간의 경제적 산술 범위에서 넘쳐나는 부자들이다.
헬라의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는 고목나무 둥치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그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그에게 찾아와 <당신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 줄게 없소?>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은 지금 옆으로 비켜 달라는 거요. 당신의 그림자 때문에 내가 햇볕을 받을 수 없소.> 이 일화가 뜻하는 것은 디오게네스가 당대의 최고 권력자에게 냉소적이었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누가 와서 무슨 말을 했던지 그는 자기를 비추고 있는 햇살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었기 때문에 알렉산더에게 했던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는 절대적인 것에 자기 존재의 근거를 의존시키며 살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지금 너무도 아름답고 깨끗하고 충만한 가을 햇살을 온 몸에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태양계 안에 존재하는 인간으로서 더 이상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존재론을 새롭게 설정하고 인식해 나가야 한다. 재산증식 만을 최고의 가치 있는 삶의 양식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불쌍한 인간이 될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인간이 결코 돈으로 환산해 낼 수 없는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생명의 원천인 태양과 그 태양으로 부터 쏟아져 나오는 햇살이야말로 가장 큰 보물 중의 보물이다. 그래서 구라파 사람들은 맑게 갠 날 너나 할 것 없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깊은 가을 날, 창문을 통해 밀려들어오는 햇살을 눈부시게 바라보며 녹차라도 한 잔 마실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무한한 하나님의 은총을 듬뿍 받은 거나 진배없다. 가을 햇살이 주는 의미는 온갖 구차한 이해타산을 묵은 떼 벗겨내듯이 벗겨내 줄 것이며, 아울러 우리가 함께 이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따뜻한 마음을 품게 해줄 것이다. <9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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