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요사이 <세계화>라는 말이 갑자기 성행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얼마 전 김 대통령이 세계화 구상을 발표한 이후에 그게 대단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새롭기나 한 것처럼 야단들이다. TV에서도 그런 대담을 내보내거나 심지어는 종일 특집 방송을 했다. 대통령이 말 한마디 하면 충분한 검토 없이 그저 홍보에만 열을 올리는 그런 매스컴의 작태야말로 우리의 참된 세계화를 막는 지름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12월8일, 목) 조간신문 제 1면에 보면 어제 오후에 발생한 서울의 도시가스 대폭발 기사가 머릿기사로 실렸고, 다섯 개의 자동차 회사가 정부의 삼성 승용차 진출 허가에 항의 총파업에 돌입한다는 기사가 그 옆에, 그리고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사 빌 게이츠 회장의 강연 기사가 나머지 칸을 채우고 있다. 이 세 가지 기사는 오늘 우리 한국의 현실을 상징처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도시가스 폭발은 우리 사회의 기반이 얼마나 허술한가 하는 점을 성수대교 붕괴에 연이어 다시 한 번 드러내 주었는데, 이런 일들은 우리의 구호인 세계화가 얼마나 요원한 일인가를 깨닫게 해준다. 삼성 승용차진출이 말하는 것은 이 나라 대기업의 윤리성이 얼마나 천박한가 하는 점이다. 자세한 내막이야 알 수 없지만 돈이 되는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드는 게 바로 우리 기업의 속성이다. 빌 게이츠의 이번 한국방문은 우리에게 꿈과 같은 미래사회에 대한 기대, 즉 2천 년대 초에 세계의 모든 개인이 어디서나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런 기대를 부풀리게 했다. 이런 기대가 바로 세계화로 가는 길목인지도 모르지만, 때로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이 아니라 환상의 세계에 머물러 살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계화는 무엇인가? 세계인이 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다른 나라들과 선린의 관계를 회복하자는 말인지, 아니면 그들과 경쟁해서 이겨보자는 말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말이긴 한 것 같은데 우리나라가 지금 까지 5천 년 역사를 통해 세계에 드러날 정도로 힘을 갖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앞으로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선의의 경쟁을 해보자는 것이 요점인 것 같다. 김 대통령이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몇 번 조깅을 하면서 <할 수 있다>는 마음을 다져먹었는지 모른다. 그게 다 국민들을 잘 살게 하고 편안하게 살게 하고, 그리고 미래 지향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자는 대통령의 깊은 뜻인데, 옆에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흠집을 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어떻게 세계화, 그리고 세계인이 되는가 하는 그 방법론의 선택에 있어서 좀더 멀리 내다보라고 충고하려는 것뿐이다.
지난 TV 특집 프로에서 교육의 세계화라는 제목으로 <영어 조기교육> 문제를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루는 걸 보았다.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람들이 쓰는 영어가 공용 국제어인 <에스페란토>를 대신해서 세계어가 되었고, 따라서 영어를 구사할 줄 모르면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모든 국민들에게 영어를 조기에 가르쳐야 한다는 발상은 도대체가 한국의 뿌리를 송두리 채 잘라버리겠다는 생각과 다르지 않다. 현재 중,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영어교육 시간도 엄청난 양인데 그게 모자라서 국민학생들에게까지 영어를 가르쳐서 무얼 어쩌자는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전화를 통한 여론 통계를 보니 영어조기 교육 반대가 60% 가까이 이르고 있다. 교육 전문가들의 견해도 역시 조기 교육 보다는 현재의 외국어 교육을 강화하면 충분하며, 오히려 한국어 서술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시급하다는 쪽이다. 지난봄에 필자가 영어교육에 대해서 언급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는 않겠지만, 다만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말을 거칠게 내뱉거나 아니면 영어와 같은 구문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염려스러울 뿐이다.
우리가 세계화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미국이다. 세계화를 이루자고 하면서 아프리카나 동유럽을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가 미국처럼 경제와 군사와 외교력에 있어서 막강한 나라가 되면 그것이 곧 세계의 주역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미 우리는 너무도 깊숙이 세계인이 되어 버려서 탈이다. 미국문화가 우리의 안방 까지 지배하는 마당에 세계화를 외친다는 것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세계인이 되는 길은 다른데 있지 않고 우리의 <우리됨>을 회복하는데 있다. 우리가 한민족의 얼을 담은 <조선인>이 되는 것이야말로 세계인이 되는 길이다. 남과 북을 통틀어, 고려인이라 해도 좋고, 조선인이라 해도 좋고, 한국인이라 해도 좋은데, 어쨌든 우리 민족의 동질성 내지 정체성을 유지하는 일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조선 사람으로서의 영혼을 몽땅 미국문화에 팔아치우고 얻은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의복, 노래, 말, 그리고 먹을거리에 이르기 까지 고유한 우리의 것을 모두 잃어버렸거나 잃어버리는 중이다. 우리가 미국 사람과 똑같은 문화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 목표가 된다면 참 슬픈 일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두 청학동 사람들처럼 살아가자는 말이 아니다. 쓸데없는 똥고집을 부려 미국 문화를 무조건 부정하거나 배척할 수야 없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 지금 우리는 얼굴 생김새만 조선 사람일 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칫 <세계화>가 또 하나의 왜곡된 <사대주의>가 아니길 바라며,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을 진정한 한민족의 얼을 가진 조선 사람으로 키워갈 때 우리 민족은 세계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94.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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