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희년의 해를 맞으며

구약성경 레위기 25장8-12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너는 안식년을 계수할찌니 이는 칠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을 크게 불찌며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찌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
구약성서가 말하는 희년은 오십년 동안 불균형을 이루었던 인간의 모든 질서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해다. 유대인들은 고대 사회가 그러하듯이 부와 권력이 편중되는 인간사회 속에서 가능한대로 그러한 악한 질서를 교정하려고 부심하였다. 그들의 노력은 안식일에 근거한 안식년과 희년 제도를 통해 실현되었다. 예컨대 어느 집안에 사고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땅을 팔았다고 하자. 그 땅을 산 사람은 그때로 부터 50년 후에 그 주인에게 땅을 돌려주어야만 했다. 어떤 사람을 종으로 사왔다고 하더라도 역시 50년째에 돌려주어야 했다. 아무리 가난하여 부동산을 매각하고 자식들을 종으로 보내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상황이 세습되는 길을 막고자 한 것이다. 한번 종으로 팔려왔으면 대를 이어 그 집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과거 우리의 처지와 비교하면 유대인들이 사회정의를 얼마나 중요한 윤리적 기준으로 간주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희년제도가 여러 형편상 오늘날에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는 실정이지만, 부의 재분배라는 차원에서 여러 형태로 희년 정신이 이어져 내려온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상속세가 그렇다. 서구라파는 상속세가 상당히 엄격하게 적용되어서 부의 세습을 가능한대로 축소시키고 있다. 즉 부모의 재산을 자식이 그대로 물려받을 수 없도록 상속세를 많이 물린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상속세는 너무 무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저런 방법으로 세금을 내지 않고도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는다는 건 사회정의라는 각도에서 분명히 문제가 있다.
희년 정신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남한과 북한의 통일 문제를 이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1995년을 <평화와 통일의 희년>으로 정했다. 이는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 남북으로 갈린 지 50년이 되었다는 뜻이다. 50년 동안 가로 막힌 담을 이제 허물어 가는 본격적인 작업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말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거기에는 그리스도인들도 포함되는데, 지금 당장 먹고 사는 문제와 출세하는 문제가 시급하지 통일이 뭐 그리 대수인가 라고 생각한다. 통일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불편한 게 하나도 없는 마당에 <통일, 통일> 해봐야 쌀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아무 소용없는 일이 아니냐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아니 의외라기보다는 아주 당연하게 많은 것 같다. 소위 식자들도 역시 이런 사고방식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있는데, 90년도를 전후해서 전개된 재야의 통일운동에 대해 비아냥거림 내지는 냉소적인 눈길로 바란 본 정치가, 교수, 유명 소설가들이 있었다. 아마 그런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 1995년을 통일희년의 해로 정했으며, 왜 그 일을 위해 투쟁하려고 하는가?
우리가 통일의 희년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구약성서에 희년이 명령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해서 살아가야 하는 삶의 자세를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이념은 바로 하나님 나라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와 평화가 지배하는 하나님의 통치이며 그분의 질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처리해 나가는 일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 사회전체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우리의 힘을 쏟으려고 하는 것이다. 남북이 갈린지 50년째를 맞는 우리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일은 무엇보다도 <남북통일>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기도해 왔다. 갈라진 것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할 희년인 95년이 바로 이제 시작되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얼 해야만 할까? 우리는 우선 <회개>로 부터 금년 한해를 출발해야겠다. 별로 마음에도 없이 감상적인 차원에서 눈물, 콧물 흘리는 자기연민이 아니라 헬라어 <메타노이아>가 뜻하는대로 전적인 삶의 방향전환을 결단해야 한다. 50년 동안이나 형제들과 헤어져 살아왔으면서도 아무런 불편도 느끼지 않고, 심지어 상호간 불신만 키워온 것에 대해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한국의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존재양식을 통일지향적으로 전향해야 한다. 그것이 곧 회개다.
다음에 우리는 구체적으로 남북평화를 위한 프락시스를 모색해야만 한다. 남한의 자본주의와 북한의 사회주의가 어떻게 상극(相剋)관계가 아니라 상생(相生)관계로 돌입할 수 있는지 서로의 자리를 뒤돌아보고 대안을 찾아나서야 한다. 김영삼 대통령의 대통령 취임사에서 피력되었듯이 정치, 경제적 이념은 민족 보다 하위개념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의 후손은, 특히 우리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남북분열 50년째를 맞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판단하게 될 것이다. <9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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