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문익환 목사님 죽음에 부쳐!

속마음으로 부터 존경하는 대상이 있다는 건 진정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내가 한번도 직접 만나 뵌 적은 없지만 고 문익환 목사님이 바로 나에게 있어서 그러한 분이셨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지했고 따랐을 뿐만 아니라, 매우 많은 사람들이 그를 적대시했고 불온시 했고 비판했고 심지어는 미워했다. 다행히 나에게 비친 그분은 분명히 예언자셨다. 누구나 할 것 없이 현실에 안주하고, 혹은 냉소적이거나 폭력적일 때 그분은 악에 대해 항거했고, 끊임없이 희망을 불살랐으며, 그리고 내가 보건데 비폭력적이었다. 문 목사님이 지난 1월18일 76세를 일기로, 아직도 이 땅에서 할 일이 많건만, 더구나 통일의 등불을 널리 널리 지피려한 이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문익환 목사님은 만주 북간도에서 1918년 문재린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 시인 윤동주와 함께 보낸 후 일본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43년에 귀국했다. 47년에 조선신학교를 졸업한 후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귀국하여 한빛 교회 담임목사와 한신대학 교수를 역임하셨다. 그는 대한 성서공회에서 구약성서번역 책임을 맡아 공동번역 출간에 지대한 신학적 업적을 남겼다. 그는 일반인들에게 비쳐진 과격한 운동가라기보다는 시인이며, 목사며, 구약적 의미에서 예언자였다.

많은 지식인들 중에 문익환 목사님의 정의와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그의 통일론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1989년 3월20일, 그가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통일논의를 나누었을 때 <소영웅주의자>라느니, <정치목사>라느니 하면서 몰아세우면서, 감상적 통일지상주의자라고 매도하는 세력이 많았다. 김일성 주석과 포옹하는 장면과 목에 빨간 스카프를 두르게 된 장면이, 사실 그런 것들은 일종의 의식에 불과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전국적으로 방영되자 많은 국민들이 당황하였고, 또한 정부에 대해 비판적이던 사람들마저 이러한 돌발적 행위에 대해-그들이 볼 때 돌발적이었지만-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들의 논리는, 통일이란 점진적으로 분위기를 바꿔 나가야 하는 건데, 실정법을 범하면서 까지 통일운동을 전개하려는 것은 오히려 강경론자들의 입지만 공고하게 만들어서 결국 통일을 지연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예언을 예언으로, 꿈을 꿈으로, 신화를 신화로, 환상을 환상으로, 메타포를 메타포로 볼 줄 모르는 이들에게 문익환 목사님의 행위는 해괴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익환 목사님은 구속될 것을 알았지만 황석영처럼,- 그를 무조건 비판하자는 뜻이 아니다- 외국으로 피신하지 않고 당당히 입국하였다. 당연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9년여에 이르는 전체 투옥 생활의 한 부분을 채우게 되었다. 감옥에 가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신 분이었다.

작년에 세상을 뜬 성철 승려와 문익환 목사님은 진리의 깨달음과 그것의 실천이라는 면에서 정말 대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성철 승려는 삶에 대해 깨침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것도 단번에 깨침(돈오)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한 반면에, 문익환 목사님은 행함과 참여함에서 그것을 찾았다. 이것이 아마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인지 모른다. 석가는 평화로운 가운데 열반에 도달했다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처형당했다.

문익환 목사님의 장례가 수유리 한신대학교에서 거행되던 지난 22일은 몹시도 추운 날이었는데 일 만 여명의 추모인파가 모였다. 문 목사님은 자신의 안구와 장기를 기증하므로 써 마지막 까지 모든 것을 나누어 주는 삶을 실천하셨다. (의술적인 문제로 실제로는 안구만 적출되었다고 한다.) 한 목사의 죽음에 대해 이만큼 사회 각계각층이, 고위 정치인들로 부터 노동운동가와 예술가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게 애도의 정을 보여준 일이 우리나라 현대사에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목사 중에서만이 아니라 그 외의 그 어떤 사람도 그렇지 못했다. 성철승려의 죽음이 전국가적으로 그렇게 대단했지만, 노동운동가들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의 관심을 크게 끌지는 못했다. 장례식 날 첼리스트 정명화 씨는 바하의 조곡(곡명이 확실치는 않음)을 연주했고, 어느 무용가는 통일을 담은 춤판을 벌이는 등 일종의 통일 한마당 축제였다. 같은 날 일본군관학교 출신이며, 참모총장 출신으로서 국무총리와 국회의장 까지 역임한, 그리고 공교롭게도 문익환 목사님과 같이 어릴 때 공부했던 고 정일권 씨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 장례식에는 고위 정부관료, 국회의원, 사업가 등 3백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조포 까지 터뜨리며 제법 거창하게 치러졌지만, 문 목사님의 장례축제에 비해 어쩐지 쓸쓸했다.

지난 1월20일 자 한국일보는 장명수 칼럼에서 문익환 목사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는 왕조시대에 불의 앞에서 ‘아니오’라고 소리치던 큰 선비였다. 우리는 그의 일거일동이 뉴스가 되고, 희망의 등불이 되던 암울하던 시절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그를 보내며 어떤 벼슬의 무게와도 견줄 수 없는 떳떳한 삶의 무게, 한 운동가의 꿈과 詩的 투시력이 잡아낸 진실의 무게를 보고 있다.” <94.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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