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교육부는 <95학년도 사용 2종 도서집필상 유의점>에 따라 집필된 영어검정교과서 심사본 심의를 완료하면서 95학년도부터 사용되는 중학교 영어교과서의 내용이 회화 위주로 바뀌게 된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중학 영어교과서는 6차 과정 개편방침에 따라 단원마다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 등 4개 유형으로 구성돼 생활회화위주의 실용영어로 짜이며, 책 뒷부분에 듣기자료 대본을 부록으로 첨부하되 새로 관련 테이프를 배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것이다.

이에 부응하는 것일까? 내 딸이 다니는 현풍 국민학교에서도 아침 수업이 시작되기 전 일정시간에 3학년부터 6학년 까지 일괄적으로 비디오테이프를 통한 영어회화를 4월19일 부터 학습시키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영어회화’에 목을 거는 것 같아 안타깝던 차에 학교 책임자들을 찾아가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 그분들의 생각을 들었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영어회화는 이미 오래 전 부터 교육청의 권고사항이었기 때문에 현풍국민학교 선생님들도 이러한 회화교육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아이들의 언어능력을 조기에 계발시켜 주는 차원에서, 그리고 <국제화>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인간교육의 일환이라는 말이다.

솔직히 나는 실망스럽다. 국민 학생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라고 지시한 교육청의 처사가 너무 졸속하게 보이며, 그 지시를 받은 교육현장의 선생님들이 충분한 검토 없이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어린 아이들에게 일괄적으로 영어회화를 학습시킨다는 것이 ‘눈치 보기’처럼 보인다. 언어는 인간의 혼이 담긴 문화인데 한국 아이들에게 미국, 영국의 혼을 주입시키자는 이야기인가? 3학년부터 6학년 까지 일괄적으로 통합교재로 가르친다는 것이 별로 교육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시간에 아이들에게 우리나라의 역사를 더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이 절실한 교육과정이 아닐까 생각된다.

도시에 사는 적지 않은 수의 국민학생들이 영어학원에 다니며, 심지어는 유치원 아이들도 외국인이 직접 가르치는 영어 학원에 다니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것도 거의 젊은 어머니들의 허황된 과잉교육열에 근거한 것이지만 현실이 그렇다. 그 어린 아이들에게 영어회화를 시켜서 어쩌자는 것인가? 국제화 한다는 것이 모든 국민을 영어로 말할 줄 아는 사람들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럴 바에야 영어를 우리의 공식언어로 채택하는 것이 훨씬 실제적이지 않을까?

영어회화 중심 교육의 문제점을 몇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회화위주의 교육이 얼마나 효율적이겠는가? 언어가 한 인간에게 모국어가 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유아기 때 엄마의 육성을 통해 학습되는 것이어야 한다. 아무리 중학교부터 회화를 가르친다고 해도 그것은 참된 언어로서 현실성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더구나 영어권 사회구조가 아닌 철저한 한국어 문화구조 안에서 그 교육의 효과가 얼마나 드러나겠는가?

둘째,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 그 목적에 관한 질문이다. 왜 한국 사람이 모두 외국어, 그것도 회화를 중심으로 한 영어를 학습해야하는가? 영어회화는 일부의 전문가들에게만 필요할 뿐이고 대부분의 국민들에겐 아무 소용이 없다. 대학공부를 할 이들이 영어로 된 원서를 읽고 해석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외국어 훈련은 충분한 것이지 반드시 회화를 잘해야 할 필요는 없다. 외교관이나 무역회사 직원들처럼 외국들과 직접 접촉해야만 하는 이들만이 회화를 필요로 한다. 좀더 확대하여 본다면 외국인 관광 사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영어회화를 학습해야 할 것이다. 간혹 대학교를 나와도 외국사람 앞에서 말 한마디 못한다고 한탄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외국사람 앞에서 영어 말 한마디 못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며,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것도 없다. 그것 보다는 한국말조차 분명하게 진술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영어회화를 필요로 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전문적으로 훈련시키면 될 것을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면 정작 필요한 교육의 집중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한국 사람이 반드시 미국 사람이나 영국 사람을 만나 영어로 대화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한국 언어교육의 목적이어야만 하겠는가?

셋째, 언어교육은 언어 자체의 습득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문화를 공부하고 언어의 구조를 통한 사고력을 증진시키는데 그 부차적 목적이 있다. 이런 점에서 영어교육 보다는 한국어교육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한국어의 구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한국어로 자신의 의견을 논리정연하게 쓰거나 피력하지도 못하는 학생들에게 영어회화를 중심으로 외국어 훈련을 시킨다는 것은 본말을 뒤집어 놓는 격이다. 언어라는 것은 한 인간의 사고구조를 변화시킨다. 영어나 독일어 문장의 구문과 한국어의 구문이 얼마나 다른지 분명하다. 한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 나름의 사고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구조가 뒤바꾸지 않는 한 외국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럴 필요도 없다.

하루 속히 영어컴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쭙잖은 영어회화 몇 마디 가르치는 것으로 대단히 현대적인, 국제적인 인물을 키우고 있다는 착각을 거두어 들여야 한다. 한국 사람을 한민족의 얼을 가진 사람으로 교육시키는 것이 바로 국제적 경쟁력을 키우는 첩경임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94.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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