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의 광주

내가 군목으로 입대키 위해 광주의 보병학교에서 훈련을 받던 그 때가 바로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난 1980년 봄이었다. 마침 훈련받으면서 기록한 일기장이 있기에 그 사건에 관련된 날짜의 내용을 수정 없이 지면이 허락하는 대로 여기에 실어보기로 하겠다. 폐쇄된 훈련소 안에 있었던 관계로 정확한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지는 못했지만 그 분위기는 충분하게 드러나 있다.

<1980년5월20일, 화>
K형, 이게 어찌된 일이오? ‘5.17’ 사건을 들었소? 이 민족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망령이 씌었단 말이오? 또 몇 십 년의 역사를 뒷걸음질 치고 있는가 보오. 며칠 전 이곳 광주거리에 모처럼 외출이랍시고 나갔다오. 가장 번화하다는 충장로에 들어가려고 했소. 근처에 이르자 눈과 코를 강하게 자극하는 가스와 많은 군중의 웅성거림, 동네 꼬마들 돌 장난처럼 주먹만 한 돌멩이가 공중에 춤을 추어댔소. -중략- K형, 사랑하는 우리 동생들이 경찰의 방망이에 벌거벗겨 맞아죽었다오. 피를 토하며 20년의 삶을 길거리에서 종식하였다오. 우리의 동생들이, 또 다른 동생들에게 맞아서 말이오.

<5월21일, 수> 끊임없이 소음이 내무반을 뒤흔든다.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리, 장갑차, 트럭... 혹시 전쟁터에 오지 않았나 하는 착각? 어제 새벽부터 상무대 안은 온통 병력수동트럭의 엔진소리로 가득 찼다. 안개가 가득히 낀 연병장을 무서운 소음으로 뒤흔들어대며 밤새 오갔다. 오늘 밤 9시가 D-day라고 하는데. 누가 누구와 싸우는가? 누가 누구를 향해 총을 쏘는가? 폭도(?)가 5백 미터 앞 대건 신학교 입구 까지 왔다는데. 전투대원으로 1소대 3분대에 임명되었다. 유사시 지역방어를 위한 전투에 나서야 한단다. 수명이 죽고(어쩌면 수십 명이 죽었는지도 모르지만) 경찰서 파괴, 나주 무기고 탈취, 공수부대 포위, 어느 사단장 체포.

<5월22일, 목> 저녁 7시30분에 벌서 취침이라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일찍 수면을 취해 두라는 것이다. 헬리콥터로 2백 명의 주동자를 체포해 왔다는 소문이 들린다. 아직 어둠이 찾아들지 않은 내무반을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음으로 뒤흔든다. 창문이 계속 흔들린다. 아! 전쟁은 말아야 하는데.... 오히려 총알이 날아다니는 그곳이 좋겠다. 트럭 달리는 소리, 연병장에 개인 텐트 치고 대기하는 20사단 연대병력. 헬기의 사상자 나르는 분주한 모습들. 저녁 이 시간에 접어들면서 계속 사망자, 부상자를 트럭으로 실어 나른다. 내무반 몇몇 자식들, 재미있다고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구경이다. 모두 모두 개새끼들. 이건 순전히 미친놈들의 광대놀이다.
12살짜리 꼬마도 죽어 실려 왔단다. 서로 조금이라도 잘 알고 있다는 듯 떠벌인다. 내무반 뒤편 의무실에 사망자를 실어 나른다. 계단이 핏물로 물든다. 홑이불로 땅에 뉘여 있는 시체를 덮어놓고 있다. 이제 어두워진다. 안 보이는구나. 웃고 떠드는 개새끼들. 잠이나 자라. 이 자식들아. 울며 회개해도 시원치 않을 텐데 웃고 떠들다니. 중학생짜리도 끌려왔단다.

<5월23일, 금> 상무대 제 7연병장. 보병학교에 근무하는 기간 사병 집결. 저들 까지 출동하다. 병력을 실은 4톤 트럭이 줄을 잇다. 시커먼 먼지를 일으키며 연병장을 크게 한 바퀴 돌아 일렬횡대로 정렬하다. 탄약상자를 싣다. red cross 완장을 두른 의무사병. 한쪽 어깨에 구급 베드를 둘둘 말아 메다. 방위병 까지 물자를 나른다. 분주한 헬기의 飛翔. 오늘은 D-day. 시가전을 불사하고 양평에서 내려온 20사단이 시가로 진입하다. 기간사병들이 광주진입 주요 5개 도로를 봉쇄하러 출동하다. 4천여 명의 공수부대가 이곳에 왔다는 소문. 공수부대 목사님이 오시다. 트럭에 오르내리는 사병. 방금 세발의 오발 사고가 나다. 계속 줄지어 군인들이 모여들다. 무서운 싸움의 준비. 지휘관들의 숨 가쁜 욕설. 조금 전 점심식사 시간에 본부중대 사열대 앞을 지날 때 두 손을 뒤로 묶이고 허름한 옷차림에 머리를 땅에 처박고 꿇어 엎드려 있는 세 명의 젊은이를 보았다. 마치 베트콩을 잡아두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네 명의 군인이 우경계 총의 자세로 지키고 있다. 불쌍한 녀석들. 멋도 모르고 좆아 다니다가 잡혀온 놈들. 생명의 가치가 없는 곳. 인권이 무시되는 세상. 인간보다 총과 칼이 더 귀한, 지랄하는 세상. -중략-
오늘 광주시는 전쟁터로 화한다. 싸움하는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선량이 죽을 것이다. 저들은 폭도라고 한다. 불순세력의 후원과 조종에 의해 불의를 저지르는 무리라고. 구두닦이, 운전사, 음식종업원... 사회적으로 저변에 있는 인사들이라고. 무식한 인간들이라고. 사리를 분간 못하는 우매한 자들이라고. 과연 그럴까? 아니다. 역사에 있어서 어느 운동이고 절대적으로 순수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광주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투쟁이 어느 정도 과격하고 감정적인 면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저들만을 폭도요, 불순분자요, 파괴주의자들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5월27일> 오늘 새벽 4시에 군부대가 광주시에 진입하여 반란세력이 점령하고 있던 도청 및 공공건물을 탈취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중략-
오늘 특수장비 교관이 난폭한 언어로 흥분하면서, 오늘 잡혀온 무리 등 이번 사건의 가담자를 모두 잡아 죽여야 한다고 떠든다. 목사, 신부라는 자들이 모두 그 말에 좋다고 웃고 박수를 친다. 저들의 인간성, 아니 신앙이 의심스러웠다. -중략- 하나님, 어찌 이럴 수가 있는지요?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도 외면하나이다. 형이 동생을 죽이고, 아들이 아비를 치고, 학생이 선생의 목을 조르나이다. 여기 수백의 젊은이들이 피를 분수처럼 쏟나이다. <9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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