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 쿼크

1932년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물리학적 수필집 <부분과 전체>에서 말하기를, 오늘날 우리는 현대 원자 물리학이 철학적이며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이르기 까지 새로운 문제점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현대물리학은 인간의 본질과 사물의 존재, 그리고 생명의 근거를 엄청난 힘으로 파헤치고 있다. 지금 까지 인간이 설정한 세계이해를 재구성해야 할 단계에 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물리학의 도전은 신학과 교회의 세계에도 역시 적용된다. 교회가 진술하는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 세계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금년 봄 미국의 어느 연구소에서 물질의 근원을 이루는 여섯 개의 소립자 중에 지금 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마지막 입자인 <톱 쿼크>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 세계로 알려졌다. 여섯 개의 쿼크는 엎(up), 다운(down), 참(charm), 스트레인지(strange), 버톰(bottom), 탑(top)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진다. 이번에 발견된 탑 쿼크는 역설적이게도 다른 쿼크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컸기 때문에 가장 늦게 발견되었다고 한다. 쿼크는 지금 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물질의 가장 작은 입자다. 원자의 중심인 원자핵은 양자와 중성자의 결합체인데, 양자와 중성자는 다시 여러 소립자들로 구성된다. 이 소립자는 여섯 개의 쿼크가 서로 대칭구조를 이루며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우주가 별들과 그 별들의 운동, 그리고 그 별들에 비해 무한히 넓은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원자도 역시 소립자와 그것들의 운동, 그리고 소립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한히 광대한-실제적으로는 무한히 작은-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거대한 우주와 미세한 원자의 세계가 구조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주의 크기를 아무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수백 만 광년의 크기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런데 재미 있는 사실은 우주의 크기가 이렇게 무한하듯 원소의 크기도 무한히 작아진다는 것이다. 이번에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쿼크는 이제 까지 알려진 물질의 가장 작은 입자인데, 그것의 크기는 그저 수치상으로만 가능할 뿐이지 우리의 감각으로 점검할 수는 없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앞서 말한 양자의 크기는 1펨토미터이다. 이 양자 1조 개가 모여야 겨우 1 입방 미리 미터로 된 공간을 채울 수 있다. 그런데 양자 안에 들어 있는 소립자인, 이 쿼크는 양자의 1만분의 1도 되지 않는다고 하니 그 크기의 작음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시간적인 면에서 볼 때 소립자의 수명은 10-23초인데, 이러한 핵 시간을 1초라고 가정한다면 우리 시계의 1초는 우주의 나이인 1백50억년의 1만 배 이상 긴 시간이 된다. 이렇게 볼 때 물질의 미시적 세계가 우주의 거시적 세계와 반비례하여 얼마나 작은지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다. 오늘의 물리학은, 그것이 거시물리학이었든, 아니면 미시물리학이었든 엄청난 세계를 열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게 어떻다는 건가? 톱 쿼크의 발견이 복음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일반적으로 교회는 그러한 세상의 언어를 부정하거나 아니면 아예 상관하지 않았다. 교회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을 때에 교회는 세상의 과학을 성서에 예속시켜 버렸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러한 시도가 가능해 지지 않게 되자, 예컨대 지동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자 교회는 과학과의 관련성을 거두어 들였다. 계몽주의 이후로 교회는 더욱 작은 세계 속으로 움츠려 들게 되어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에서 볼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은 인간의 윤리성 내지 절대의존의 감정 안에서만 언급되었다. 합리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세계관 앞에서 교회는 다시 한 번 중세기 때와 같지는 않지만 나름대로의 <성역> 안에 숨어들게 되었다. 이제 지동설과 버금될 만한 쿼크의 발견을 교회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여전히 과학과의 적당한 거리를 두고, 교회가 진술하는 내용은 그런 것과 지평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거나, 아니면 창조과학회류처럼 여전히 성서의 눈으로 과학을 해석하는 것으로 물리학의 파도를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새로운 물리학의 발전은 최소한 두 가지 각도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의식의 전환을, 혹은 새로운 자리매김을 요청한다.

첫째는 교회가 말하는 진리성의 문제와 관련된다. 교회는 물리적 진리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며, 더 나아가 현대물리학으로 부터 기독교적 하나님을 이해시키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톱 쿼크의 발견으로 어쩌면 빅뱅이론과 블랙홀 이론이 증명되는 날이 다가오게 될지 모른다. 만약 우주가 대폭발 이후에 지금 까지 팽창되고 있다는 사실이, 반대로 축소되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해야 하는가?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쓸데없는 걱정은 집어 치우고 사람들에게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 전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이다. 물론 물리학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신비로, 그 생명의 신비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참된 진리라고 믿는다면 사물의 비밀을 새롭게 열어가는 물리학과의 대화를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이 문제는 아마 존재론의 새로운 정립으로 모아질 것이다. 무엇이 참된 존재인가, 라는 질문으로 부터 하나님의 존재도 논의될 수밖에 없다. 지금 까지 그리스도교 신학이 채택한 존재론은 헬라인들의 사고방식이라 할 <실체론적 형이상학>이었다. 현대 물리학은 어떤 사물의 <있음>에 대해 실체론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그 <있음>은 때로 운동이며, 변화이며, 과정이다. 이미 물리학이 그것을 확고하게 증거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스도교 신론이 이러한 물리학적 진리에 절대적으로 종속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자유로운 것도 아님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는 선교신학적인 면에서 물리학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의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는 계몽주의를 한참이나 지나, 오히려 근대이후(포스트모던)를 넘어서고 있다. 우리가 이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려면 이들이 살고 있는 시대정신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시대정신이 항상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 그 인간이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물리학적 세계 속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물리학이 전해 주는 세계를 전향적으로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인간의 미래는 <개방성>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앞으로 5백년, 혹은 1천년 후의 세계는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 미래를 기계론적으로 설계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세계는 철저하게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다. 물리학도 이러한 개방된 미래를 열어가는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9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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