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

지난 4월쯤으로 기억되는데 서울대학교 모 교수가 조교로 부터 성희롱조로 고소당하여 1심에서 2천만 원인지, 3천만 원인지 범금형을 받았다 하여 전국적으로 떠들썩하였다. 명색이 대학교수인데 적지 않은 금액의 벌금형을 받았으니, 그것도 인격적인 문제에 해당되는 문제로 그렇게 되었으니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에게 배우던 학생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껄끄러울 것인지, 그리고 그 가족이 겪게 될 정신적 상처는 얼마나 깊을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를 변호하자는 말이 아니다. 사실이 어떠했던지 간에 선정적인 주간지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가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전국적으로 방영되었으니 변명하기도 옹색한 일이고 해서 그의 입장이 매우 곤혹스러워질 수밖에 없었음을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접하고 몇 갈래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남자의 입장에서 ‘별게 아닌 걸 갖고 공연히 문제가 불거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여자의 입장에서 ‘이번 기회에 남자들의 잘못을 고쳐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 사건의 전말 사정이나, 더 나아가 정말 무슨 일이었는가 하는 구체적 사실을 알 수는 없다. 그 일을 담당한 검사나 변호사도 피차일반이다. 다만 이 사건 당사자들만 알 수 있을 텐데 판사는 정황을 미루어 피의자에게 유죄판결을 내릴 수 있었을 뿐이다. 보도를 통해 짐작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교수가 조교에게 실험실습을 시킨다면서 성적 희롱을 가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희롱인지 아니면 우연하게 일어난 신체적 접촉인지 구분하기 정말 어렵지만 희롱 쪽으로 판결이 난 것이다. 피의자인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자기는 컴퓨터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접촉에 불과했다고 한다. 고소인인 조교의 주장은 정반대였다. 교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게 되자 조교자리를 박탈할 정도로 노골적인 요구를 해왔다고 한다.
<성희롱>이라는 대단히 감각적인 용어는 우리에게 그렇게 낯익은 말이 아니다. 그런 용어가 법률학 사전에 나오는지도 모르지만 사회가 복잡해지다 보니 그런 용어가 새롭게 만들어지는가 보다. 과거에도 <성희롱>이라는 사실은 항상 있었다. 주로 젊은 남자들이 지나가는 젊은 여자를 보고 치근대는 일들이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 주변에 아주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일이 이번에 법정에서 다루어졌고, 더구나 현직 교수에게 대단히 큰 벌금형을 선고했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센세이셔날 하게 보이고 있을 뿐이다.

<성희롱>이란 성적으로 희롱하는 행위를 뜻한다. 물론 당하는 사람의 의사와 관계없이, 아니 그 의사에 반하여 행해지기 때문에 당하는 사람은 대단히 불쾌할 것이다. 대개 직장의 상사가 그 직권을 이용하여 하급의 여직원들에게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상대방에게 신체적 접촉을 유발하거나 혹은 음담패설을 발설하므로 써 희롱하는 행위다. 주로 남자가 여자에게 행하는 것이긴 하지만, 때에 따라 여자가 남자에게 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이 성희롱이 매우 심각할 정도로 만연되어 있는 것 같다. 전화로 그렇게 하거나, 혹은 만원 버스나 전철에서, 그리고 일전에 보도된 대로 운전교습소에서 그런 일들이 발생한다. 이런 일들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성격으로 규정될 수 있다. 성희롱을 의도적으로 저지르는 경우와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경우를 구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의도적인 경우에는 강력한 법적 제재를 가해야 하겠지만, 충동적인 경우에는 그 원인을 제거하므로 써 사건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운전교습을 받으러 가면서 여자들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간다면 그것은 충동적인 일을 일으키게 되는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인간은 성희롱을 하는가? 하나는 사회적인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다.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사회는 아직 성적으로 자유롭지도 않으면서 젊은 사람들이 성적인 충동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구조를 갖고 있다. 구라파처럼 사회가 그 문제를 자유롭게 해결하던지, 아니면 중동의 회교국처럼 완전하게 억제하든지 해야 할 텐데 우리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다.

분명히 인간의 본질 중에 하나가 바로 성욕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성적인 욕구를 허락하셨다. 그것은 선이나 악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식욕을 갖고 있듯이 그러한 자연스러운 현상 중의 하나다. 문제는 과식을 하게 되면, 혹은 상한 음식을 먹게 되면 배탈이 나듯이 성적인 욕구가 잘못 사용될 때 개인적으로도,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인간을 파괴시킨다는 데 있다.

더 큰 문제는 이성을 항상 성적인 관계 안에서만 생각하려는 사고방식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남자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자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남자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은 이미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러한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미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이 바로 간음한 것이나 별반 다름이 없는 죄라는 것이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게 되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성희롱이란 바로 이 처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본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욕심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욕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오늘의 사회는 여전히 여자를 인간으로 보기 이전에 성적인 대상으로 여긴다는 데 문제가 있다. 결국 성을 상품화 하게 되고 여자도 그런 대상으로 평가된다. 일전에 내로라하는 기업체의 신입여사원 채용 기준이 보도되었다. 키는 160센티미터 이상, 몸무게는 50키로그람 이하라던가? 여사원은 그저 사무실 분위기를 돋우어주는 꽃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여자를 남자와 똑같은 인격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고 단순히 장식품으로 삼으려는 기업가의 안목이 거기서도 잘 드러난다. 유럽의 은행에는 남자들이 창구를 많이 담당하고 있는데 비하여 우리나라는 거의 여자들만 일률적으로 창구를 맡고 있다. 여자는 그저 손님이나 접대하고 분위기나 잘 맞추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구조라면 끊임없이 성희롱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성은 인류의 생명을 존속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이지 희롱의 대상이 될 수 없다. <94.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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