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사회, 닫힌 사회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갖고 있다. 우리의 체제가 이북의 공산체제 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잘 산다는 것에 있지 않고 <자유>, 그것에 있다. 자유의 질서가 지배하는 사회를 우리는 <열린 사회>라고 말한다. 누가 무슨 사상을 갖고 있던지, 어던 종교를 갖고 있던지, 어떤 정치적 소신을 갖고 있던지 파렴치하지만 않다면, 그런 것에 의해 부당하게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다. 반면에 이북 처럼 사회 전체의 공익을 앞세우는 체제는 개인의 자유가 극단적으로 유보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회를 <닫힌 사회>라고 부르며 비판하고 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잘 아는대로 그런 닫힌 사회 속에서는 종교 마저도 국가 이데올로기에 편승되어 있어서 사실상 종교의 기능이 상당히 외곡되어 있다. 말 한 마디 잘못 했기 때문에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 갔다는, 말 같지 않은 이야기를 듣기도 했는데, 우리의 체제가 우월하다는 것은 비록 사회의 혼란이 어느 정도 있다 하더라도 사상과 종교와 결사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데 있다.
과연 오늘 우리의 사회는 그런 열린 사회인가? 우리는 이와 너무도 다른 사회적 현상들을 경험하였으며, 지금도 경험하고 있다. 지난 과거 역사 가운데서 두 가지만 기억해 보도록 하자. 79년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뉴욕타임스>와 기자회견을 했다. 그 내용을 문제 삼아 공화당과 유정회는 김 총재의 의원직을 박탈하는 징계 동의안을 제출하여 그해 10월4일에 국회에서 제명조치하였다. 김 총재는 “미국은 국민들로 부터 점점 소외돼 가고 있는 정부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 중 명백한 선택을 해야할 시기가 왔다”면서 “야양 총재로서 통일을 위해서는 장소와 시기를 가리지 않고 김일성과 만날 용의가 있다. 남북대화나 통일 문제는 어느 집단이나 개인이 독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평소 기본 생각이다. 먼저 국내에서 자유롭게 통일문제를 거론하고 비판할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여권에서는 “주권을 모독하는 사대주의적이고 반민족적인 발언”이라면서 “국가의 안전보장을 해치는 반국가적 언동” 등으로 매도했다. 김총재는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했으나 지금은 대통령이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같은 달 10월26일에 수족 처럼 부리던 김재규의 손에 죽었다.
86년 10월31일 정기국회 본회의 정치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통일민주당 유성환의원(현재 민자당 의원)은, 실제 발언한 것도 아니고 미리 배포된 유인물을 통해, “이 나라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 돼야 한다. 통일 또는 민족이라는 용어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라는 용어보다 위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여당의원들은 “반공노선의 폐지를 주장하는 북괴의 노선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몰아부쳤다. 검찰은 유 의원을 국가보안법 위반(반국가단체 찬양고무) 혐의로 구속했다. 그 당시 어느 연립주택에 살던 유 의원의 구속장면이 텔레비젼을 통해 전국에 방송되었다. 검찰이 구속 기소하면서 내 세운 논거는 “유 씨의 주장은 통일만 될 수 있다면 공산주의 까지 수용될 수 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 사건은 91년 11월4일 항소심 판결에서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졌다.(이상의 두 가지 사건경과는 한겨레 신문 94.7.17자에서 참고했음)
이러한 사회를 우리는 결코 <열린 사회>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군사정권 하에서만이 아니라 언필칭 문민정부라 하는 오늘의 정권 하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 민주당의 이부영 의원이 국회에서 질문한 김일성 주석 조문 건이 이상하게 확대되어 그렇지 않아도 가뭄과 찜통 더위로 짜증스럽고 걱정스러운 판에 온통 이 나라를 매카시즘에 빠져들도록 만들었다. 조선일보는 이러한 흑백논리의 선봉장으로서 이 의원을 비롯하여 진보적, 혹은 온건한 행동가들과 지성인들을 흡사 중세기 마녀사냥 하듯 공격하였다. 민자당에서는 이 의원을 정보위에서 제명하자고 결정하였다고 하니 이것이 지난 날 유성환 의원의 구속이나 야당 총재의 의원직 박탈과 무슨 차이가 있나?
우리 사회가 왜 이다지도 사고의 경직성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하는지 안타깝다. 사상과 언로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나라가 어떻게 자유민주주의인가? 자기가 신념하고 있는 생각을 말할 수 없는 사회가 어떻게 인간의 얼굴을 한 나라인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동화는 이 처럼 언로가 막힌 사회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임금님 귀를 본 사람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회 구성원은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따라서 믿지도 못한다. 더구나 임금이라는 권위로 사실을 사실로 말하지 못하게 강제한다. 임금의 귀를 본 그 사람은 마음의 병이 들어 결국 대나무 숲에 가서 큰 소리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외친다.
우리 사회는 자기와 <다름>을 곧 <나쁨>으로 단정한다. 왜 우리는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용납하지 않는가? 이 문제는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조금만 다르면 이단이라고 정죄한다. 그 종교가 가르치는 내용에 대해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단죄하고 만다. 같은 종파와 교단에 있으면서도 <당신은 자유주의 신학자>라는, 너무도 무책임한 말을 전가의 보도 처럼 휘두른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오늘날의 혹백논리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 처럼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단죄하고 자신들만 의인인 것 처럼 생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여러가지 종교적 전통과 이념들을 절대화 하였기 때문에 예수님과 충돌을 빚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닫는 분이 아니라 이웃을 향해, 세계를 향해, 우주를 향해, 그리고 그 모든 <다름>을 향해 열린 사고를 하게 도우신다. <94.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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