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야 그럴 리 없겠지만, 그렇게 오래지 않은 지난 날 전라도나 제주도에서는 돼지를 똥통에서 키웠다고 한다. 판자때기에 쪼그리고 앉아 사람이 똥을 누면 그 밑에 있던 돼지들이 그 똥을 받아먹고 살았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분위기 가운데서 어떻게 볼 일을 끝낼 수 있었는지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처럼 수세식이다 뭐다 해서 별로 정화시키지도 못한 똥물을 하천으로 흘려보내는 것 보다는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최소한 자연보호라는 차원에서 훨씬 지혜로운 게 아닐까 모르겠다.
필자가 1981년도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의 8사단 예하 모 연대에서 군목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부대 교회(불멸교회) 부근 길명리에 방 한 칸을 세내어 살았다. 비교적 그 동네에서는 깔끔한 집이었지만 시골이니까 당연히 소도 키우고 농사도 짓는 그런 집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집 우물이 기가 막혔던 것 같다. 그 달콤한 맛은 두말 할 것도 없거니와, 한여름 밤 팬티만 입고 두레박으로 떠올린 우물물을 쏟아 부을 때의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처음 뒷간에 들어갔을 때 매우 황당했던 기억이 새롭다. 거기 마땅히 있어야 할 똥통이 없었다. 그게 있어야 볼일을 볼게 아닌가? 대신 발을 디딜만한 돌 두개만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안쪽으로는 난방을 위해서, 혹은 쇠죽을 끓이기 위해 태운 솔가지 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도저히 해결방법을 찾을 수 없어 멋쩍은 표정으로 주인아주머니께 여쭈어 보니 요령을 가르쳐 주시기를, 우선 돌 사이에 재를 뿌리고 그 재 위에다 볼일을 본 후 다시 재를 덮은 다음, 삽으로 적당히 버무려서 한쪽 켠으로 모아두면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처럼 편리하고 위생적이고 실용적인 해결방법도 없었다. 냄새도 안 나고 군데기도 없고, 나중에 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삼조 아닌가.
여류 소설가 윤정모 씨는 막무가내로 산과 들이 파헤쳐지는 바람에 몇 년 동안 온갖 정열을 바쳤다가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시골 생활을 회상하면서 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 적이 있다. 어느 틈엔가 시골에서도 이제는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함으로써 인분이 전혀 거름으로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농사경험에 따르면 당장은 화학비료가 성과를 거두는 것 같지만 결국은 인분을 중심으로 한 자연비료가 지력(地力)을 튼튼하게 만든다고 한다.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그녀는 서울 인구가 쏟아내는 그 많은 인분을 거름으로 바꾸기만 한다면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라고 호소한 바 있다.
어쨌든 똥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의 문제는 단순히 삶의 편리성이나 청결성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생명과 관련된 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똥은 인간개체의 생명유지로 부터 지구적(global) 차원의 생명에 까지 연관된다. 이런 주장은 이 지구의 순환적 생명체계 현상을 그대로 들여야 보기만 해도 분명해 진다. 인간(동물을 포함하여)의 똥은 식물의 밑거름이 되며, 그렇게 자란 식물은 동물과 인간의 양식이 된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먹고 다시 똥으로 배설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명의 순환작용을 강제적으로 끊어버리는 삶의 양식이 바로 현대의 반생명적 기계문명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똥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간 삶의 엄연한 현실이며, 이 지구의 순환적 생명을 이어가는, 필수불가결한 연결고리이다.
인간이 건강한지 그렇지 않은지 분간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똥에 있다. 그 사람이 눈 똥의 상태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건강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는 말이다. 변비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려 보면 그 고통이라는 게 말이 아닌 것 같다. 의학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인간이 배설을 시원하게 처리하지 못하게 되면 많은 질병을 초래하게 될 게 뻔하다. 똥을 정상적으로 잘 눈다는 것은 위장(胃腸)의 활동이 원활하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처럼 적당히 먹고 잘 소화 시키고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고 배설을 잘하면 사람은 건강하게 살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특별히 건강을 잃은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보강식품이나 강장제, 혹은 정력제 같은 식품이나 약을 먹을 필요 없이 똥을 잘 누도록 하는 것이 건강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떤 분의 글에 보면 고향집을 떠나 살면서 고향식구들에게 전화로 아버지의 안부를 물을 때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아버님께서 오늘 똥을 잘 누셨나요?”였다고 한다. 그의 부친이 오랫동안 심한 변비로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다른 관점으로서 인간의 배설은 일종의 카타르시스(정화) 행위이다. 인간은 똥, 오줌, 땀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종류의 배설을 하는데 그런 일들이 원활하게 돌아가면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안정감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볼 일을 해결하는 화장실은 인간 삶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나아가 생리적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필자는 화장실에 앉아서 책을 보는 경우가 많다. 변비 때문이 아니라 그 시간이 편안하게 느껴졌고 그냥 그렇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우리 집 두 딸도 나를 흉내 내서 언제 부터인가 화장실에 앉아서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사회도 인간 몸의 생리적 구조와 비슷한 면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이 똥을 시원하게 처리해야만 되는 것처럼 사회도 그런 배설 기능이 잘 돌아가야 건강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똥이 아무리 냄새 나고 더럽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인간본질의 한 부분임에 틀림없는 것처럼, 이 세상의 악이 아무리 냄새 나고 더럽다고 하더라도 이 사회 안에 어쩔 수 없이 포함되어 있는 현실이다. 건강한 인간의 배 안에는 항상 어느 정도의 똥이 들어 있듯이 건강한 사회 안에는 어느 정도의 악이 없을 수 없다. 북한이 자기들 체제 속에는 사회악이 하나도 없다고 선전할 때가 있는데 이는 그만큼 건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의 반증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 사회가 악을 갖고 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사회의 건강성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똥이 생명을 위한 거름으로 사용되듯이 말이다. <95.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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