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장하겠네!

지난 2월27일 서울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동대구 기차역 앞에서 안심까지 택시를 탔다.
25분쯤 걸리는 거리다.
5분쯤 지났을까,
택시 기사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사투리는 살리지 못하고 그냥 내용만 전한다.)
기사: 날씨가 춥네요.
나: 그렇군요. 멋도 모르고 와이셔츠에 양복만 걸치고
      서울 갔다가 추워서 고생 많이 했어요.
기사: 겨울에서 봄이 되는 이런 때가 옷 입기 가장 어려운 거 같습니다.
나: 정말 그렇습니다.
(3분 쯤 침묵이 흐르다가 기사가 다시 맛을 잇는다.)
기사: 대통령 임기가 너무 길다고 하네요.
       환장 하겠습니다.
나: 무슨 말씀인가요. 대통령 임기가 길다니요.
기사: 노무현이 기자들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네요. 환장하겠어요.
나: 아, 5년 단임제가 길다는 뜻이군요.
      아마 4년 중임제가 좋다는 말은 여야를 막론하고 자주 나왔던 말인 것 같은데,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뜻으로 말했나요? 기사 선생님은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하시는데요?
기사: 해석이고 말고, 미치겠어요.
나: 뭐가 문제라고 생각하시는데요?
기사: 대구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다 위로 올라간다구 하네요.
        여기는 일거리가 없으니까요.
        지금 대구는 경제가 말이 아니에요.
나: 아, 그렇군요. 먹구 사는 문제가 힘들다는 말씀이군요.
      그게 노무현 대통령 이후로 심해졌다는 뜻이네요.
      그런데 중앙집권 체제인 우리나라는 경상도만 어려운 게 아니라
      전라도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땅값이나 아파트값이 올랐다고 해도 거의 서울이 그렇지요.
      경제라는 게 우리나라만 잘하겠다고 해서 잘 되는 게 아니라
      국제경제질서하구 맞물려 있기 때문에 간단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구 5년 임기가 길다는 노 대통령의 말은 무슨 맥락에서 나왔나요?
      그냥 느닷없이 던진 말은 아니지 않을까요?
기사: 그렇지요. 속셈이 있어서 그런 말을 했겠지요.
        기자들을 불러 모아서 세 가지를 말했다고 하네요.
        남은 임기동안 양극화를 해소하도록 하겠다는 거 하구요,
        미국과 뭐라나?... 무슨 협상을 잘 끝내겠다고 하던데...
나: 에프티에이요?
기사: 그래요.
나: 관세 협상이라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에요.
      국내와 국외 문제가 이리저리 얽혀 있으니까요.
기사: 이제 농사도 끝장입니다. 나도 농촌에 들어가 농사짓고 싶어도
       그걸로 먹구 살기 힘들잖아요? 농산물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데요.
나: 맞습니다. 그런데 그걸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할까요?
      자동차와 티브이와 헨드폰을 칠레에 팔아먹으면서
      그쪽의 포도를 수입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안 그런가요?
      가능한대로 우리의 농사를 살려야겠지만 수출을 기본으로 먹고사는 우리는
      그런 세계무역 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는 거 아닐까요?
기사: 지금 미국이 밀가루 수출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망합니다.
       농산물을 국가경쟁의 무기로 삼게 되면 우리는 쫄딱 망하는 거죠.
나: 맞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어쨌든지 농산물 수입을 막으라고 외치면서 정부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그게 현실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대안도 없는 비판일 경우가 많습니다.
      수출을 많이 해서 잘 사는 나라가 되자는 요구도 하고,
      다른 나라에서 수입되는 농산물은 막으라고 요구하는 건 모순 아닌가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기사: 사장님은 많은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말을 조심하는 것 같네요.
나: 그런가요? 저쪽 신호등 앞에 세우시면 됩니다.
기사: 예.
나: (8천300원 요금을 보고 만원을 내며) 천원만 돌려주세요.
기사: 아, 예, 고맙습니다.

안심에서 하양까지 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했다.
앞서 택시 기사는 어떤 생각으로 초면인 손님을 보고
“환장 하겠어요." 했을까?
그 기사는 사람이 좋은 것 같았다.
말을 해도 경상도 사람처럼 버럭 소리를 지르지 않고
조근조근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에는 대통령을 향한 적개심이 불타고 있었다.
함께 말을 하다보면 그 내용이 별로 없는데도
심리적으로 매우 강한 불만이 쌓여 있는 것 같다.
이 기사 아저씨만이 아니라 그런 분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경상도는 그런 분위기가 훨씬 강하겠지만
다른 지역도 대체적으로 그런 것 같다.
취임 3주년을 맞은 노 대통령의 신뢰도가 20프로 대라고 한다.
조선일보의 어느 칼럼니스트는
앞으로 남은 2년 동안 시끄럽더라도 양극화 문제를 해소하는데
주력하겠다는 노무현의 말을 가당찮다고 비난했다.
지금 정부의 고위 공직자 재산이 많이 늘어났다는 사실을
노 대통령의 발언과 연결시키면서
정부 주체들이 많은 재산을 늘렸으면서
가난한 사람을 챙기겠다는 말을 하는 건 헛소리라는 것이다.
한국의 메이저 신문사 중에서 가장 앞서 간다는 조선일보가
말꼬리 잡는 식으로 대통령을 물고 늘어지는 이유를
어느 정도는 알겠지만 동의하기는 힘들다.  
그 칼럼에서 제기한 현 정부 공직자들의 재산 문제는 여기서 거론하지 말고
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서만 한 마디 짚자.
시끄럽겠지만 양극화 해소에 치중하겠다는 말을
왜 그렇게 오해하는지 나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노무현은 분명히 알고 있다.
양극화 해소를 자기가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은 대통령 한 사람의 역량으로,
또는 몇 개 반짝이는 정책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민주노동당이 집권하면 그게 해결될까?
그건 참으로 낭만적인 발상이다.
부유세를 집행하면 될까?
그게 당장 실현될 수 있다고 보는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있는 한,
그리고 그것이 우리사회에 구조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한
그 어디에도 완전한 해결책은 없다.
예컨대 의식 있는 사람들도 삼성을 욕하면서도
자기 자식이 삼성에 입사하기를 바랄 것이다.
서울대 욕하면서도 그곳에 연줄을 대려고 노력한다.
노무현은 이 현실을 뚫어보고
비록 자신이 양극화 문제를 화끈하게 해결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게 길이니까 가겠다는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것뿐이다.
이 양극화 문제를 조금 더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만 본다면 세금을 더 거두어서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서 쓰는 게
그나마 양극화 현상을 줄이는 최선일 것이다.
최선이긴 하지만 이건 미봉이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기서 더 이상 나가지 못한다.
사회 시스템 전체가, 혹은 국민 의식이 바꾸지 않으면
시스템과 의식이 함께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지 않으면
북구파라 같은 복지사회는 불가능하다.
대기업 사원과 하청기업 사원 사이의 임금 격차를
누가 줄일 수 있을까?
대학졸업생과 고등학교 졸업생과의 임금 격차를 어떻게 줄이는가?
더구나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초일류 대기업에 의존적인 한국경제 구조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나?
(사족: 대교회와 미자립 교회 문제를 누가 어떻게 단숨에 해결할 수 있을까?)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최소한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
바로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썩 괜찮은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대통령의 언어감각을 견강부회하는 언론들에 의해서 왜곡되는 일이 많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크게 틀린 말을 하지 않는 대통령이기도 하다.

내가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많은 국민들이 노무현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환장하겠다!’고 한탄하고 있으니,
이 현실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는지.
정말 환장하겠군!
새로운 패러다임이 받아들여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인지.
아니면 지금 내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어떤 음모가 진행하고 있다는 말인지.
어쨌든지 대통령으로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그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그게 우리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남은 2년 동안 양극화 해소 문제에 치중하겠다는 그의 발언이
조금이라도 현실적으로 나타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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