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탕

한달 여 쯤 전에 며칠 간격으로 두 번씩이나 목사들 모임에서 보신탕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나는 평소에 일부러 보신탕을 찾아다니며 즐겨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유별나게 꺼릴 것도 없다 싶어 때에 따라 그냥 어울려서 개고기를 먹곤 하였다. 보신탕집에 가면 일반적으로 우선 수육을 먹고 다음에 탕을 먹게 된다. 요리하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 그 맛의 차이가 있지만 별로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고, 다만 독특한 개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잘게 썰은 고추나 마늘, 후추, 들깨와 같은 진한 양념을 섞어 먹으면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여름철만 되면 우리나라는 보신탕집을 중심으로 새로운 먹을거리 문화가 형성된다. 거의 매일 같이 개고기를 먹지 않으면 혓바늘이 돋을 것처럼 그 맛에 중독이 된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한국 남자가 개고기를 먹지 못한다면 남자라고 할 수 없다는 듯이 일장 연설을 한바탕 늘어 제끼면서 게걸스럽게 탐식하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목사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어디 어느 집에 보신탕이 좋다느니, 어느 부분을 먹어야 한다느니, 당회원들이 기도회를 마치고 항상 보신탕을 먹는다느니, 또한 매년 연례행사처럼 교회 안에서 개를 몇 마리씩 잡는다는 등, 끝없이 개고기에 얽힌 이야기를 해댄다.

왜 우리 민족에게 개고기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걸까? 그것을 먹는 사람들이나 먹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개고기를 일반 고기와는 무언가 다른 것으로 여긴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문제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개는 인간의 주변에서 함께 살고 있는 다른 동물과 비교해 볼 때 분명히 구별된다. 소나 닭은 평소에 인간에게 노동력이나 먹을 것(우유, 달걀)을 제공하지만 개는 그저 소비만 할 뿐이다. 돼지는 그야말로 자신의 육신을 제공하기 위해 사육되고 있다. 고양이는 쥐를 퇴치하는 일이나 단순히 애완용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 살아왔지만 역시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유익이 되는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삶에 가장 깊숙히 들어와 있는 동물은 개임에 분명하다. 개는 사냥할 때, 혹은 목동들이 양을 지킬 때, 겨울 철 썰매를 끌 때, 등등 여러모로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동물로 인식되어 있다. 언제부터인가 전쟁 시에도 개들이 참여했고, 미아를 찾는 일이나 세관에서 마약밀수를 적발할 때, 시각장애자를 인도하는 일 같이 인간이 하기 어려운 일을 개들이 대신 맡아서 했다. 주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버린 충직하고 용감한 개의 이야기는 동서를 막론하고 아름답게 전해 내려오는 미담이다. 이만큼 인간은 개를 신뢰하고 개는 주인을 신뢰하게 되었다는 말인데, 돼지가 인간을 위해 충성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언제 부터 개고기를 식용으로 사용했는지 문헌을 찾아보지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처음부터 그랬을 리는 없고, 전쟁이나 흉년으로 인해 먹을거리가 동이 났을 때 할 수 없이 집에서 기르던 개를 잡아먹었을 수밖에 없었던 극한 상황에서 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굶어 죽는 것 보다야 개고기를 먹고서라도 생존하는 것이 훨씬 윤리적인 일이니까 말이다. 약간 옆으로 나가는 말이지만 <어라이브>라는 영화는 생존의 우선성이 무엇인지 웅변적으로 그려주고 있다. 그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을 영화한 것인데, 비행기가 어느 오지에 불시착하게 되었다. 거의 외부로 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지역에서 사람들이 자꾸 죽어갔다. 몇 몇 사람들은 먼저 죽은 사람의 살을 뜯어 먹고서라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육을 먹은 사람들이 생존했다는 이야기이다.
생존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는 면에서 개고기를 먹은 우리 선조들의 행동은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처절한 인간애에 바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도 개를 단순히 미식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현대인의 식도락적 취미에 있다. 인간의 식욕이야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장 확실한 삶에의 의지이지만, 그 식욕이 도에 넘쳐 보신탕은 아무 것도 아니고, 혐오식품에 까지 눈을 돌린다는 것은 어딘가 인간의 탐욕과 관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불개미를 먹는다, 뱀을 먹는다, 혹은 지렁이를 먹는다는 것이 과연 미식일까? 몇 년 전에는 살아있는 곰의 간에 호수를 꽂아 그 피를 받아먹은 일도 있었으니 할말이 없다. 근간에 입시생들을 위해 이런 종류의 보강식품이 날개 돋친 듯이 팔린다고 한다. 미용에 좋다면, 정력에 좋다면 무엇이나 먹어치우는 인간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아닌가?

구약성서에 보면 유대인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을 구분하고 있다. 네 발 가진 짐승 중에 발가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을 하는 짐승만을 먹도록 허락되었다. 날짐승과 물고기도 일정한 기준에 따라 구분되었다. 그들의 전통이 근동의 날씨와 생활습관에 의한 것이지만, 음식에 이르기 까지 절제하려는 저들의 노력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도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무슨 음식이든지 양심에 꺼리지 말고 먹으라고 하면서도 남을 위해서 자기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한다.

나는 외국의 동물보호 단체에서 제기한 우리나라 보신탕 문화에 대한 비판에 그들과 똑같이 동의하지는 않는다. 아직도 동물애호가로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동물을 뛰어넘어 식물도 역시 그런 점에서 보호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채식주의자로서 살아가려는 사람도 아니다. 다만 모든 생명, 인간과 동물과 식물, 더 나아가 모든 사물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그 세계를 우리는 희망한다는 차원에서 보신탕에 집착하는 것과 같은 음식문화는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할 뿐이다. 여하튼 개고기를 먹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앞으로 나도 때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되겠지만, 우리가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먹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언젠가 먼 미래에 인류는 채식만으로 살아갈 날을 맞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93.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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