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서리


추석이 다가올 때면 생각나는 어릴적 이야기 한 토막이 있다. 그것은 친구들과 함께 <밤서리>를 다녔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나 개인의 경험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보편적 경험에 속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서리란 “여럿이 주인 몰래 훔쳐다 먹는 장난”이라고 국어사전에 기록되어 있다. 농촌에서 자란 사람 치고 서리 한번 하지 않고 지나온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오늘의 도시 어린이들은 이런 서리의 낭만과 추억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대단히 불행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서울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돈암동에서 출생하여 국민학교 4학년 때 까지 그 부근에서 살다가 5학년 때 아차산 중턱에 호텔건물이 드믄드믄 들어서 있는 워커힐 앞 광나루 다리를 건너 천호동으로 이사왔다. 그 당시만 해도 천호동은 새로 서울시에 편입된 지역으로서 거의 농촌과 같은 생활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 때가 1960년 대 중반이니까, 사실 서울의 사대문 안이라 해도 요즘 처럼 호화롭지는 못했다. 천호동은 서울의 변두리여서 좀 초라했고, 특히 내가 살고 있던 속칭 <고분다리>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비만 오면 길이 온통 진창이 되어 흡사 늪 처럼 변했지만, 우리 어린이들에게는 마음껏 자연의 즐거움을 누리고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천호동은 서울에서 경기도 여주와 이천으로 빠지는 국도가 통하는 길목이었다. 한강이 그곳을 휘돌아 경마장이 있는 뚝섬으로 유유히 흘러내렸다. 광나루 다리 한강물에서 우리 꼬마들은 여름철 내도록 멱을 감고 놀았다. 그 당시는 아직 제방을 쌓지 않은 때라서 장마철만 되면 어김 없이 큰 홍수가 났다. 내 기억으로 지금 올림픽 단지가 있는 그 넓은 벌판이 온통 흙탕물로 가득했다. 그 당시 천호동에는 비록 교통의 요지였음에도 생활이 불편해서 그런지 그 지역에 살던 얼마간의 사람들과 서울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떠돌아온 외지인이 별로 부푼꿈 없이 그냥 어울려 살았다. 그곳 이름이 왜 천호동이 되었는지 그 연유를 동네 어른들께 들은 바로는, 어느 목수가 그 동네에 집을 지으면서, 앞으로 집이 더두 말고 천호(千戶)만 되었으면 좋겠다고 지나는 말로 한 것이 바로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가을이 시작하면 우리 동네 아이들은 남한산성 쪽으로 밤을 따러 다녔다. 사실 남한산성 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두 시간 쯤만 걸으면 우리 아이들에게 매우 울창한 숲이 나왔고, 그 숲에는 산딸기, 복숭아, 언덕배기에 심겨진 참외나 오이, 그리고 정말 꿀보다 단 샘물 등, 없는게 없었다. 그 당시 우리들에게 산은 신비의 대상이었다. 가까이 있는 작은 산은 밝은 녹색으로 친근한 이웃이었고, 멀리 있는 큰 산은 아예 검은 빛을 드러낸 채 우리의 접근을 거부한 무서운 아저씨였다. 가장 멀리 있는 그 시커먼 산은 우리 아이들에게 세상의 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산 밑자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청학동 사람들 처럼 우리와 다른 무릉도원에 사는 신선으로 느껴졌다. 우리 아이들이 그곳에 접근한다는 것은 일종의 용기있는 탐험이며 호기였다. 토요일 밤 늦도록 신나게 놀다가-이렇게 밤늦도록 놀지 못하는 요사히 어린이들은 다시 말하거니와 정말 불쌍하다- “내일 우리 밤따러 가자.”고 누가 한 마디 하면, 우리는 어김 없이 다음 날 아침밥을 먹자 마자 늘상 만나는 동네 놀이터에 모여, 너댓명이 한조를 이루어 신발주머니를 하나씩 옆구리에 꿰어차고 일말의 두려움과 일말의 호기심을 가슴에 안은채 사냥을 나가듯이 길을 떠나곤했다. 내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니까 밤서리를 다니던 국민학교 5,6학년 때는 일요일 마다 놀러다닌 것 같다. 밤서리를 간다는 것은 재미만이 아니라 큰 모험이었다. 간혹 어떤 형들이 밤 따러 갔다가 산주인에게 들켜서 두들겨 맞거나, 아니면 그 산동네 아이들과 패싸움이 붙어서 코피 터진 이야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한 각오를 했어야 했다. 밤서리는 한 두 시간 안에 돌아 올 수 있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개는 점심을 굶었던 것 같다. 때로는 산속에서 산딸기를 따먹거나 재수가 좋을 때면 수박이나 참외를 몇 개씩, 그것도 역시 서리였는데, 먹을 수 있었다. 그것도 안되면 산속의 샘물을 배부르게 마시기도 하고, 혹은 부자집 아이가 갖고온 건빵이나 사탕을 몇 개 얻어 먹기도 하였다.
우리 일행 중에는 어디에 밤이 많이 있는지 잘 아는, 그 방면에 도사 아이가 반드시 함께 갔다. 사실 나 같은 아이들은 겁도 많았고, 그런 일에는 적극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기분이 좀 나쁘지만 항상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 일은 우리 친구들 중에, 대개는 나이가 한 두살 많은 형뻘 되는 아이들이 인도하게 된다. 길이 멀어서 웬만한 아이들은 혼자서 방향을 잡기도 힘들 정도다. 그 때는 하루종일 걸어도 별로 피곤하지도 않았고, 모든 사물과 대상이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발에 채이는 돌이나 풀, 소리내며 날아가는 새들, 하늘의 구름, 언덕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황소, 그리고 냇물과 허수아비 같은 모든 것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니 하루종일 굶고 다녀도, 심지어는 주인에게 들켜 혼줄이 나서 돌아오면서도 무료하거나 무의미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밤나무는 사람이 살지 않는 깊은 곳 보다는 비교적 마을 가까운 곳에 집단적으로 서식했던 것 같다. 기껏해야 마을과 작은 동산을 하나 사이에 두고 밤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했다. 한 아이가 “여기 있다.”고 소리치면 우리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나무에 달려 있는 밤송이가 왜 그렇게 탐스럽게 보였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절기가 충분히 지난 다음에 가게 되면 입이 쩍 벌어진 밤송이를 볼 수 있었다. 흡사 보물을 발견한 것 처럼 우리는 만면에 희색을 감추지 못한채 나무를 흔들어 대기도 하고, 돌을 던지기도 하고, 좀더 용감한 아이들은 나무에 올라가기도 하면서 밤사냥을 시작했다. 가능한대로 아주 빨리 소리나지 않게 일을 처리하고 떠나야 했는데, 그 산 속에서는 왜 그다지도 소리가 크게 나는지 가슴이 저려온 적이 많았다. 작은 나무가지 하나만 꺾어도 그 소리가 온통 산을 울리는 것 같았다. 가끔 “네 이녀석들!”하는 소리에 우리는 발로 비비며 꼬챙이로 까던 그 아까운 생밤을 채 줏어 담지도 못하고 이리 저리 흩어져 뺑소니쳤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도망하다 보면 다시 만나기도 하지만, 아예 우리 동네에 와서야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애쓰고 따온 밤을 돌아오면서 도중에 먹어치우거나, 남겨 갖고 온 것도 동네에 있던 동생들이나 여자아이들을 주어 버리게 되고, 겨우 조그만 주먹에 쥘 수 있을 만큼만 집으로 가져오곤 하였다.
거의 30년 전의 이야기인데, 그 때 밤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완전히 익지 않아 색갈도 희고 물기도 축축한 그 밤알을 와그작 깨어 먹던 그 어릴 적 이야기가 생각나는 가을이 되었다. 어느 부흥강사 목사님은 그런 일도 회개하라고 외치던데, 과연 그런 걸까? <93.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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