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선교에 대해

최근 몇 년 동안 구 소련을 중심으로 발생한 동구권의 혁명적 변화는, 그야말로 그것은 변화라기보다는 몰락이라고 해야 옳을 것인데,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그 대미를 장식한 것이 지난 10월3일과 4일 어간에 벌어진 모스크바에서의 유혈정쟁사태라 할 수 있다. 러시아 대통령 옐친과 그 반대자들, 즉 최고회의 의장인 루슬란하스블라토프와 부통령 알렉산드르 루츠코이라는 보수파 간에 계속된 파워게임에서 결국 옐친의 일방적 승리고 종료되는 것 같다. 이들의 입장 차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옐친 정부는 서방식 자유시장을 근간으로 한 철저한 개혁, 개방주의 노선이며, 루추코이와 루스란하스블라토프는 자유시장을 기본적으로 지지하지만 서방식이 아닌 러시아 고유의 민족주의적 정치, 경제를 추구하는 제 삼의 길을 찾고자 한다는 점에서 구별될 수 있다. 1917년 10월의 볼쉐비키 혁명 이후로 가장 격렬했던 국내 유혈사태인 이번의 사건은 앞으로 옐친의 정치력을 통해 흐트러진 러시아 백성들의 마음을 정말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될는지 아직 미지수이지만, 사회주의 국가의 마지막 재기의 몸부림이 허무하게 허물어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임에 틀림없다.

위대한 정신으로 시작했던 러시아 혁명은 일장춘몽으로 끝나 버리고 말 것인가? 금세기 초 민중의 혁명을 통해 정의롭고 새로운 세계를 실현해 보려했던 러시아의 정신은 왜 실패한 실험으로 세계사의 현장에서 사라지고 있는 걸까?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를 여기서 논하고 싶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어떤 이상적인 이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절대화 되고, 그것을 움직이는 이들이 관료화 될 때, 또한 끊임 없는 개혁이 수반되지 않을 때 그것은 자체의 모순으로 빠져들게 되고, 결국 내부에서 부터 허물어져 내린다는 역사적 교훈을 배웠다는 사실만을 지적하면 충분할 것이다. 한편 이것은 국가 정치세계만이 아니라 종교에도 역시 같은 원리도 적용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앞으로 시일이 얼마나 걸릴는지 모르겠지만 러시아는 아마 자기들의 길을 찾아 나설 것이다. 이미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었고, 러시아 연방도 그 연대감이 매우 허술한 상태이지만, 토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와 고르키, 그리고 베르자예프와 차이코프스키 같은 정신적, 문화적 유산을 갖고 있는 저들이 러시아 정신을 쉽게 포기하고 바람난 과부처럼 서구자본주의에 자기 몸을 던져버리지만은 않을 것이다. 지금 고통의 시간, 혼돈의 시간 속에 놓여 있는 러시아의 운명은 그들만이 아니라 세계사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서구를 비롯한 모든 나라가 그들을 진정으로 도와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 한국 교회는 경쟁적으로 러시아 선교에 열을 올리고 있다. 성결교회, 장로교회, 순복음교회, 시한부 종말론자들, 심지어는 통일교 까지 모스크바 등지에서 교회를 세운다, 신학교를 설립한다, 하면서 전도하고 있다. 지난여름에는 한국교회의 지나친 선교행위로 인하여 러시아 정교회에서 법률적인 제재검토를 시사한 적이 있을 정도다.

한국교회는 철의 장막이라고 일컬어지던 러시아가 개방되므로 써 무신론을 신봉하던 공산주의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여,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에 충성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러시아 선교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것은 한편으로 대견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염려스럽기도 하다. 전해 듣기로는 구라파나 북미교회는 우리처럼 적극적으로 러시아 선교활동을 시작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럽의 신앙이 우리 보다 부족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우리의 선교열이 너무 강한 건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비정상적이라 할 정도로 우리는 러시아 선교에 손을 걷어 부치고 있다.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온 지 일백년 여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2천년의 역사를 가진 구라파 교회보다도 더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수밖에 없다.
현재 진행 중인 러시아 선교에 대해 그런 열심 자체를 문제시 할 필요는 없지만,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전해 듣는 러시아 선교 현장의 소식은 왠지 마음을 거림직 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러시아 선교 방식이 흡사 17-19세기에 유럽의 제국주의적 선교정책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유럽의 교회는, 주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복음을 유럽의 문화와 동일시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만을 진리라고 생각하여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런 여러 나라의 문화를 비신앙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복음과 문화와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심지어는 자기네 정부가 식민지를 개척하러 나갈 때 원주민들을 교화시키는 일을 선교사들이 담당하였다. 결국 유럽의 식민지 정책에 일조를 한 것이다. 선교사들이 미개한(?) 나라를 문명화 하는데 한몫을 톡톡히 하긴 했지만, 우리나라의 교육이나 의료부문에서 선교사들의 역할을 적지 않은 것처럼, 그것의 부정적인 모습도 없지 않았다. 예컨대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에 그곳의 토착문화는 거의 사라지고 유럽 카톨릭 문화가 그것을 대신하였다. 미국이라는 나라도 따지고 보면 인디언의 땅을 빼앗은 것인데, 그 일에 영국의 청교도가 앞장섰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개방된 러시아에 서구의 여러 기업이 진출하였고, 우리나라 유수의 기업들도 보다 먼저 좋은 조건을 차지하기 위해서 러시아에 진출하였다고 한다. 경제 원리에 따르면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원리에 입각한 경쟁을 교회가 답습할 필요가 있는 걸까? 생활필수품의 품귀현상이나 하급 공직 사회의 만연한 뇌물수수 같은 것을 보고 한국의 선교사들이 러시아를 연민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야말로 우리가 불쌍한 사람들이다. 선교는 자동차 사업을 확장하듯이 수행되는 것이 아니어야 하는데, 지금 러시아에서 한국 교회가 하는 모습은 그와 같다. 진정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 사람들의 삶, 전통, 아픔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들 스스로 생명을 일구어 나가도록 협조하는 것이다. 러시아 정교회가 지난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겪은 고통을 그들이 헤쳐 나가도록, 그리고 그들 스스로 그들 백성에게 그리스도교적 구원을 선포할 수 있도록, 그런 힘을 준비할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하며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선교는 너무 급하다. 심하게 말해서 그들을 잡아 먹을 듯이 덤벼들고 있다. <9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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