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

요사이 아이들과는 달리 내가 어렸을 적 아이들은 꽤나 나가 놀기를 좋아하였는데, 대개의 부모들은 그것을 허락하였다. 특히나 여름철에는 선풍기도 없는 방안에 앉아 모기에 뜯기는 것 보다는 밖에 나가 노는 것이 여러모로 좋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가방을 집어 던지자 마자 밖에 나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저녁밥 먹으라는 어머니나 누님의 외침을 듣고서야 들어왔다. 물론 저녁밥을 먹은 후에 또 다시 나갔다. 우리들은 한두 명이 먼저 밖에 나와 다른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그 때 외치는 고함은 “애들 모여라. 애들 모여라. 여자는 필요 없고 남자 모여라.”는 투였다. 때에 따라서는 비유법을 사용하여, “애들 모여라. 애들 모여라. 클럽은 필요 없고, 빠따 모여라!”고 소리쳤다.

요즘처럼 세련된 비디오 게임이나 동화책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그때 우리 아이들은 만나면 그저 즐거웠고, 모든 세계가 놀이의 대상이었다. 우리들이 많이 하던 놀이는 딱지치기, 팽이치기, 구슬치기, 자치기, 비석 맞추기, 말 타기, 깡통 차기, 제기차기, 연날리기, 썰매타기로 부터 시작해서 공기나 줄넘기, 그리고 땅따먹기 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문방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이 있고, 또는 땅바닥에 선을 그어놓고 규칙에 따라 게임을 하는 여러 가지 놀이도 있었다. 그 많은 놀이가 개인놀이와 단체놀이로 구분되기도 하고, 여자와 남자 놀이로 구분되기도 하였다. 공기나 줄넘기는 주로 여자아이들이 했지만 때에 따라 우리 남자아이들도 같이 했다. 여자아이들만이 할 수 있는 놀이로는 주로 고무줄과 소꿉놀이가 있는데,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여자아이들이 고무줄을 하고 있을 때 심술궂은 남자아이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기도 하였다.

학교에 가면 주로 철봉에 매달려 놀곤 하였다. 철봉에서 누가 멀리 뛸 수 있는지를 내기하는 놀이였다. 철봉에서 굴러서 뛴 다음에 단계적으로 멀리뛰기 식으로 뛰는 것인데, 술래는 항상 다른 아이들 보다 한걸음 적게 뛰어서 다른 아이들을 손으로 터치하는 놀이였다. 철봉에서 할 수 있는 심한 놀이의 한 가지는 “꽈배기”가 있었다. 술래아이가 철봉에 손을 잡고 있으면서 그 주변을 피해 다니는 아이들을 손이나 발로 터치해야만 술래를 벗어날 수 있었다. 아이들은 사방에서 술래를 야유하면서 피해 다니다가 몸이 빠른 아이가 등 뒤에서 술래를 두 발로 꽉 조이게 되고, 그게 성공하게 되어 술래의 몸이 부자유하게 되면 다른 아이들이 두 겹, 세 겹으로 서로 엉켜 술래를 더욱 조이게 만든다. 술래는 거기서 벗어나려고 용을 쓰고 아이들은 더욱 힘을 주어 술래를 괴롭힌다. 이 모습이 흡사 그 당시 우리들이 즐겨 먹던 꽈배기와 비슷하다 하여 <꽈배기>라 이름 붙여졌다. 힘이 약하거나 몸이 둔한 아이들이 술래가 되었을 때, 그들은 거의 울움을 터뜨릴 정도가 될 정도로 골탕을 먹곤 하였다. 이것은 정말 스릴 넘치는 남자아이들만의 놀이였다.

우리들의 놀이는 낮 보다 밤에 더욱 맛이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면 친구들이 하나 둘 씩 모여서 뒹굴면서 밤늦도록 놀았다. 열 댓 명이 모이면 서로 옷을 바꿔 입고 <가면놀이>를 하기도 하고, 혹은 <묵, 찌, 빠, 왕자놀이> 같은 것도 하였다. 밑에서 부터 올라와 왕자에게 세 번 지게 되면, 결국 술래가 세 가지 심부름을 하는 놀이였다. 밤에 모이면 그 중에서도 나이가 든 아이가 무서운 이야기를 곧잘 들려주곤 하였다. 요사이 아이들도 귀신얘기 듣기를 즐기는 것 같은데,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 우리에게 밤이 주는 외경스러움이란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과 같았다.

하비 콕스는 <바보제>라는 책 속에서 인간의 놀이에 대한 역사학적, 신학적 이해를 피력하고 있다. 중세기 유럽에서는 아무나 자기가 원하는 복장을 하고 즐길 수 있는 축제일이 있었다. 사제가 농부차림을 한다든지, 창녀가 왕비차림을 한다든지 어떤 차림을 하여도 그날만은 허락되었다. 평소에 눌렸던 마음을 단 며칠만이라도 풀어보려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가 그런 축제를 만들게 된 것 같다. 인간은 자기 신분을 잊어버리고 순수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시간들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놀이이며, 그 놀이의 정형화가 축제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농사와 관계된 축제가 있긴 하지만 구라파에 비하면 너무 옹색한 편이다.

인간이 노동의 노예로 살아간다면 아무리 부를 축적한다고 해도 무의미한 일이다. 나의 기억이 옳다면 칼 마르크스가 구상한 것인데, 만약 노동을 놀이로서 승화시킬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우리의 현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노동이라도 그곳에 창조성이 깃든다면 놀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있다. 오늘의 노동문제는 <노동집약> 보다는 노동의 <창조성> 회복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대인들이 생존하기 위하여 사냥을 할 때, 혹은 농사를 지을 때 거기에는 일종의 놀이정신이 담겨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반면에 오늘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경제적인 기준으로만 평가하기 때문에 거기서 자유하지 못하고 묶인다. 노동은 인간에게 다만 스트레스를 제공할 뿐이다. 인간의 정신은 놀이에서 참된 자유의 경험을 하게 되는데, 현대인은 이것을 상실하고 말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놀이를 즐기고 있음이 사실이긴 한다. 술이나 담배, 마작이나 트럼프, 스포츠, 꽃꽂이, 슬럿머신, 영화와 연극 등, 수많은 놀이의 수단이 있다. 그러나 이 놀이들이 대개 경쟁심의 연장이거나 현실도피인 경우가 많다. 오늘날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놀이를 배워야 한다. 지나치게 이상적인 생각인지 모르지만 삶 자체를 생존경쟁이 아니라 <놀이>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공부나 노동이나 사업이나 정치 등 모든 삶의 자리에서 아이들의 경우처럼 참된 자유와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인간은 아무리 풍성하고 윤택한 삶의 조건들을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릴 적 개구쟁이 친구들과 함께 뛰어 놀던 그 꿈을 그리며...... <93.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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